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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한 3주간 행사와 또 손님들 치르느라고 몸이 많이 피곤했는데 일부 예배 때 목소리가 잠기고 그랬었는데 보혈 찬양 기드온 찬양대의 찬양을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나고 몸에 몸이 회복되는 그런 기분입니다. 귀한 찬양 감사드립니다.
오늘부터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갑니다. 6월이 가기 전에 사도행전의 긴 여행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가 로마로 사도바울 일행이 압송되는 내용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긴 항해 중에 강력한 폭풍을 만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영적인 교훈과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백부장 윤리오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 이렇게 항소를 함으로 상소를 함으로 아그리파 왕과 벨리스 총독이 결정했습니다. 로마로 보내기로 그래서 지금 압송되고 있어요. 아그리파 왕과 벨릭스 베수도가 보기에도 바울은 죄가 없어 보였습니다.
32절에 보면 이에 아그리바가 베스도에게 일러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되었을 뻔 하였느니라
그러나 이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대의 백부장 윤리오가 이제 이 책임을 맡아서 바울 일행과 몇 명의 죄수를 아드라 무데노라고 하는 배에 태우고 로마로 출발했습니다.
여정은 이렇게 해야 됩니다. 시돈 그러니까 지금 오늘날 팔레스타인 위쪽에 있는 레바논 지역에서부터 출발을 해서 그 시돈을 지나서 구부르 해안 구부르 해안은 사도 바울이 처음 1차 선교 여행을 갔던 곳입니다. 바나바의 고향 그 해안을 지나 오늘날 튀르키의 해안인 길리기라와 밤빌리아 해안 그리고 루기아의 무라시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백부장은 다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의 배에 이 사람들을 태웠습니다. 그 배가 다시 살모네와 그레데 해안 그레데는 오늘날 크레타 섬을 얘기해요.
우리가 미술사나 고대 역사를 보면 크레타 문명, 미케네 문명 이런 게 나오는데 거기 나오는 크레타 섬입니다. 거기를 지나서 미양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여러 날을 머물렀어요. 바울은 그곳에서 금식을 합니다. 유대인의 금식 절기가 겹쳤기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금식하는 몇 가지 절기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요 키프로 속죄일입니다. 그들은 속죄 일에 금식을 하는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용서받고 또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인생을 맡겨드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도 이런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금식과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금식과 기도하면서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바울 그리고 그 일행은 앞이 캄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사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때 절기를 지키면서 금식할 경황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절기를 지키면서 금식함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하나님 앞에 맡겨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미래를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욥키푸르는 9월에서 10월 초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는 지중해 연안 바울 일행이 지금 지나가고 있는 그곳에 태풍이 부는 시간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일반 상식이었습니다. 누구나 이 계절쯤 되면 태풍이 분다 하는 걸 알아요. 이미 바람이 불고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 벌써 고생을 했습니다. 거기다가 바울 일행이 금식을 했기 때문에 몸이 너무너무 피곤한 상태라서 여행을 하기가 배로 여행하기가 어려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안을 하는 거예요. 10절에 보면 말하되 여러분이요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뿐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손해를 끼칠 만큼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기서 겨울을 나고 좀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갑시다고 제안을 합니다.
바울이 이런 결정을 할 때 또 이런 제안을 할 때는 바울이 그냥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제안을 하거나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이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하면 대체로 틀리지 않습니다.
첫째는 상식입니다. 상식선에서 결정하는 게 좋아요. 일반적인 상식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성을 주셨어요. 어떤 믿음이 스스로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하면 마치 그게 믿음이 없고 불신앙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무조건 기도만 하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은 사실 그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에 가까운 거예요.
신비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이성과 상식을 먼저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파울이나 거기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거예요. 이 기간에는 우리가 가면 고생한다. 큰일을 만날 수도 있다. 이때를 피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지금 금식을 하면서 기도함으로 그 영이 맑아졌어요.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더 민감하게 깨닫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해요. 일반 상식적으로 그것이 맞다고 해도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다른 방식을 말씀하실 때가 있어요. 그것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걸 듣지 못하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지혜예요.
그런데 백부장은 상식과 기도로 말하는 사도바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충분히 상식적으로 지금 가서는 안 되는 건데 그것도 넘어가고 또 기도의 사람 이 바울의 말도 믿지 않는 그런 결정을 하게 됩니다.
아마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선장과 선주는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왜 선장과 선주는 여행 일정을 무리하게라도 좀 앞당겨서 자신들의 재정적 이득 빨리 갔다가 한 번이라도 더 오거나 여러 가지 그런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그런 차원에서 무리수를 두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이 바다 상태 지금은 항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지금 이 여행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일반 상식도 벗어나는 일을 했어요. 또 대다수의 사람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겨울 나기가 지금 여기는 별로 안 좋다. 그래서 베닉스라고 하는 그레데 섬의 항구에 가면 거기는 따뜻하고 겨울 나기가 좋다더라고요. 지금 조금 고생하더라도 가서 거기 가서 편하게 지내다가 로마로 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어요. 보통 때는 그게 통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바울의 상식과 바울의 영적 감각이 옳았어요. 이럴 때가 있습니다. 결국 배는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순풍을 만나는 거예요. 순풍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야 우리가 잘 생각했다고 저 사람 바울 얘기 괜히 들었다가 우리 재정적으로 손해 보고 또 여기 좋지도 않은 곳에서 겨울을 날 뻔했다고 우리 결정 잘했다고
여러분. 그러나 옳지 않은 길에도 일시적 순풍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돼요. 잘못된 길을 결정해 놓고도 일이 잘 되네. 이게 맞는가 봐.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 속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 명령을 거절하고 다시 쓰러 가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욥바라는 항구로 갔어요. 욥바라는 항구에 가서 보니까 마침 다시 쓰러 가는 배가 있었어요. 요나서 1장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열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 서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마침 그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기다릴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 시절은 오늘날처럼 하루에 몇 번 배가 떠난다든가 아니면은 매일 배가 있다든가 그런 게 아닙니다. 며칠에 한 번씩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때가 되면 떠나는 그런 때였어요. 그런데 마침 도착했더니 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배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얼른 그는 배를 타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니 노예로 가지 않는 것이 자란 것이지 내가 혹시 잘못 들은 것이었을 거야? 니느웨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원수 같은 우리가 일본에게 압제를 당할 때 일본을 반일 감정과 같은 감정이 있는 그런 곳인데 하나님이 거기를 심판해야 되겠다.
그럼 얼마나 좋은 소식이에요 심판해야 되겠다. 그런데 니가 가가지고 그 심판 소식을 알려서 심판을 면하게 하라. 요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갔는데 하나님이 이걸 좋게 보신 거예요.
요나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지 내가 내가 진짜 그렇게 판단한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거야 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것이 정답인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반대 길로 가면서 잠시 잘 되는 순간 때문에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
여러분 그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입니다. 당장은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에요. 당장은 역풍을 만나는 것 같아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에요. 당장 순풍을 만나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다고 해도 그걸 잡아타면 어떻게 됩니까?
물속이 뱃속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물고기 뱃속으로 죽을 고생하다가 결국은 네 노예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백부장과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됐어요? 결국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어요. 14절에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골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다. 그들에게 불든 순풍은 얼마 가지 않았어요. 이게 길게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 순풍이 죽을 때까지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당장 잘될 것 같다가 어느 순간이 되니까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 이것이 역풍으로 바뀌고 말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 잘 되는 것 같은 상황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 잘 되는 것 같고 죽음 순풍을 만난 것 같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돼요. 왜 그 순풍이 순식간에 폭풍으로 변하는 거 그것은 정말 진짜 순식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인생의 결정을 할 때 신중해야 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교인들, 특별히 우리 젊은이들은 앞으로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될 때가 많이 있어요. 그때 이 지혜를 발휘하시기 바라요. 첫째는 상식에 근거해야 돼요.
두 번째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결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고, 그 결정이 당장은 어리석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결국은 승리하게 돼 있어요. 당장은 힘들어 보여도 십자가의 일 같아도 마지막에는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에 확 웃었다가 잘 되네 했다가 마지막에 폭삭 망하면 어떡하겠어요 처음에 힘들어도 그 길을 끝까지 가서 하나님이 손들어주시는 그런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들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났어요. 광풍이라고 했습니다. 미친 바람 종 잡을 수 없어요. 여긴 상식이 안 통합니다. 이렇게 갈 수도 없고 저렇게 예측할 수가 없어요. 빨리 가려고 했지만 더 늦어졌습니다.
여러분 빨리 가는 게 빨리 가는 게 아니에요. 지름길이 지름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도록 하시는 그 길에 순종하는 것이 진짜 지름길이고 그게 빨리 가는 길이에요. 인생을 살아보니까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돌아보면 하나님 뜻대로 했던 순간이 지름길이에요. 괜히 인간적인 잔꾀를 낼 필요 없어요. 하나님의 뜻이 뭔가 이걸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목숨이 위태해졌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왔던 모든 짐을 다 바다에 던져버렸어요. 모든 걸 잃은 거예요. 얼마 동안은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다. 희망이라는 것은 한 조각도 없는 그런 상황이 됐어요.
20절에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들에게 있음에 그대로 있음에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도다. 모든 걸 다 토해냈어요. 일어날 기력조차도 없었어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상황이었어요. 누가 이런 상황을 만날 줄 알았겠어요? 조금만 고생하고 가면 거기서 좋은 시간이 있을 것이다 생각했는데 그만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후회합니다. 21절에 보면 바울의 말을 들을 것을 바울이 말할 때 그때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하는 거예요.
세상에는 꼭 실패해야 깨닫는 사람이 있어요. 한 대 얻어맞아야 정신 차리는 사람이 있어요. 또 죽도록 얻어맞아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어요.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일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얻어맞기 전에 알아서 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는 상식적으로는 내가 그동안 세운 계획은 이건데 하나님이 어느 날 다른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 그 자기 상식과 자기 계획을 내려놓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셔요. 하나님의 계획은 내 계획보다 더 뛰어난 거예요.
그런데 고집부려 그래서 한 때 얻어맞으면 또 그때라도 정신 차리면 되는데 또 얻어맞고도 정신 못 차려요. 나중에 막 죽도록 맞고도 정신을 안 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제 모든 구원의 여망이 사라져 있는 상황, 이제 그대로 그냥 침몰돼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때 22절에서 25절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에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는 다 내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드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이 절망 가운데 있는 자기 동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줍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은 늘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사람이 돼야 돼요. 막 겁 주고 막 망한다고 하고 그걸로 끝나면 안 돼요.
하나님의 메시지는 희망의 메시지예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다시 하나님 우리 하나님의 별명은 어개인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고 믿음으로 살아도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얼마나 많이 넘어지겠어요 하나님이 딱 한 번만 기회 준다더 아니면 기회 안 줘. 내가 너를 어떻게 구원했는데 니가 그 따위로 살아 그리고 그때마다 심판의 칼을 들이대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그걸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다시 일어나라. 다시 기회를 줄게. 하나님 계속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 절망 중에도 희망이 있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늘 엄한 얼굴로 대하시면서 그때마다 막 대쪽 같은 옛날 우리나라 선비들처럼 막 대쪽 같은 율법주의자들처럼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어떻게 희망이 있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기회를 주십니다. 물론 그걸 이용해서 그걸 교활하게 이용하면 안 되겠죠. 하나님 다시 기회를 주시니까 뭐 하고 또 잘못하면 안 되겠지만 살다 보면 인간이니까 이런 실수도 하게 되고 잘못된 판단도 하게 되고 죄를 짓게도 돼요.
그러나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되고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를 떠나는 그날까지 기회를 주셔야 언제는 너무 미안해가지고 죄송해서 회개를 못할 때도 있어요.
아이고 지난번에도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잘못했어요.
그게 이제 민망하고 죄송해서 회개 안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더 중요한 건 100번이라도 가서 잘못했다고 하고 그 길을 돌이키는 것이 고집부리고 안 가는 것보다 더 낫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끝까지 잡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너무 양심적인 사람이세요.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잘못 이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해서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얼굴 들 그게 없어 나 차라리 지옥 가고 말겠어 그러고 막 지옥 가기로 결단한다고 그게 훌륭한 게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약간 조금 뻔뻔한 게 좋아요.
자식 중에도 약간 뻔뻔해가지고 잘못하고도 또 와가지고 죄송하다고 하고 자꾸 오는 게 좋지.
한 번 잘못해놓고는 나는 아버지 자식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집 나가버리는 거 하고 연을 끊어 내가 어떻게 우리 아버지의 자식일 수 있냐 그거보다는 집으로 기어 들어오는 게 들어와서 또 밥 먹고 또 있는 자식이 좋은 거라 이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풍랑을 만난 이들에게 이런 놀라운 기회가 주어졌어요.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게 정말 우리 기독교 신앙의 사실은 핵심이에요. 회개할 기회를 계속해서 주신다.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우리나라도 삼세판이란 말이 있잖아요. 삼세판 가위바위보를 해서 저도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세 번 우리나라에 더 좋은 게 있어요. 뒤집기 그래가지고 계속 기회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어리석어 보일 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자하시고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 그 하나님을 붙들고 여러분 어떤 순간에도 극단적인 생각 나는 안 된다. 그 생각 버리고 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마음을 넓게 가지고 계신 자기 아들을 우리하여 십자가까지 내어주신 그 하나님께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들이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 때문이었어요. 여러분 그 많은 무리 중에 세상에 위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 많은 무리 중에 누구와 함께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바울을 살려서 사명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 모두를 살렸고 또 바울을 통해서 그들을 살리셨어요.
누구와 동행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좀 미안하기는 하죠. 바울의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밥상에 숟가를 넣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그런 자격이 없는데 지금 하나님이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그들에게도 은혜가 흘러가도록 하는 그런 현장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좋은 믿음의 동료와 함께 동행하면서 그 사람에게 내가 그 정도가 안 되면 숟가락을 얹어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좋은 거 아니겠어요?
우리 교인들은 너무 양심적이라 그런 건 싫은가요? 믿음의 동료와 함께 동행하면서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으면 좋은 거예요. 더 좋은 것은 내가 바울이 되는 거죠.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이 살고 나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우리 민족이 살고 하나님이 나를 쓰시기 위해서 나와 함께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살리신다. 그러면 그 인생 잘 사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나는 좋은 친구가 돼야 되고 또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야 돼요.
어떤 사람이 제일 좋은 친구입니까? 믿음의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과 동료가 된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은혜를 입습니다. 또 그런 친구와 가까이하면 떨어지는 게 많아요. 이런 위기경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사람은 망하는 사람과 친구가 돼서 동행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미래는 되게 정해져 있어요. 딱 보면 알아요. 지금 이번 금년에 요번 달에 이번 주에 이번 달에 지난 한 해 어떤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며 내 마음을 나눴는가 그것이 여러분들의 1년 5년 10년 후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돼요. 물론 내가 전도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어요.
그건 전도의 목적이에요. 그러나 동행 친구 친구라는 것은 폴트르니에 의하면 마음을 나누는 관계, 더 나아가서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 그게 친구예요.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거예요. 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매일 만나면서 자기의 비밀과 자기 인생과 고민을 함께 나누는 그게 친구입니다. 그것은 잘 사귀어야 돼. 그래서 내가 좋은 친구가 돼서 생명의 영향력을 주고 또 좋은 친구를 통해서 내가 영적 좋은 영향력을 받아야 인생이 잘 되게 돼 있어요.
흥하는 사람은 흥하는 사람과 동행한다고 하잖아요. 영적으로 잘 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은 좋은 사람, 믿음의 사람과 동행해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을 만났나요?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있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친구를 되게 좋아했어요. 청소년기에 누구나 다 그렇지만 저는 유달리 그랬어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 부모님이 늘 불만이 그거예요. 너는 부모보다 친구가 좋냐 맨날 그걸로 막 화도 내고 혼나 그렇게 친구가 좋았어요.
그런데 나이를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보니까 그렇게 평생 갈 것 같은 친구들도 다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이번에 저희 아버지 장례식 때 40년 전 친구 고등학교 졸업하고 헤어져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내 영혼의 친구가 왔어요.
그런데 이제 그 친구는 예수 안 믿고 그냥 사업하는 친구로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만나서 얘기해 보니까 이게 별로 할 얘기가 없어 40년 동안 밀린 얘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친구가 그렇더라고 같이 영적인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거예요. 그렇게 평생 갈 것 같은 친구도 사실은 지금 와서 보니까 그만한 정도의 가치는 아니더라고요. 그게 그래서 너무 우리가 내가 그동안 이렇게 사귀어 왔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에게 영적인 부정적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을 줄여야 돼요. 만나면 남 씹고 교회 욕하고 아무개 욕하고 그래서 만나고 나면 막 그런 부정적 생각들로 가득하게 하는 것은 내 영혼을 망하게 하는 거예요.
바울 같은 사람을 만나야 돼요. 그래서 만나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하고 우리의 미래를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러면 내가 그 영향을 받아서 내 인생도 열리게 되는 거예요.
또 그리고 내 자신이 그런 인생이 돼야 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