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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만들었느냐
욥기 39:13-30
13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욥 39:13-30 / 타조는 좋아라 그 날개를 마구 쳐대지만 그 깃털이 황새 같더냐, 독수리 같더냐? 그들처럼 날아갈 수 있더냐? 14) 타조는 그 알을 땅바닥에 낳는다. 단지 흙의 온기로 그 알은 따뜻해질 뿐. 15) 누군가 그 알을 짓밟을지 어떤 들짐승이 그 알을 깨버릴지 거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16) 그 알을 자기가 낳지 않은 것인 양, 알을 낳느라 무진 애를 썼건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17) 그 타조를 그리도 어리석게 지은 이는 그 타조에게 슬기를 허락지 않은 이는 바로 나 아니더냐? 18) 그럴지라도 그 타조가 한번 뛰기만 하면 도대체 말이 쫓아갈 수 있느냐? 말 위에 탄 이가 뒤쫓을 수 있더냐? 19) 네가 말을 그리도 힘세게 하였느냐? 휘날리는 갈기를 그 말에 준 이 바로 너였더냐? 20) 네가 말을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히히힝하는 말의 콧소리에 사람들이 놀라게 한 것이 너란 말이냐? 21) 계곡 바닥을 있는 힘 다하여 긁어 대다가 온 힘 다하여 전쟁터로 내달리지 않더냐? 22) 저 말은 두려움이란 걸 모르지. 그 어떤 칼에도 뒤로 물러서는 법 없지. 23) 그 위에 탄 자가 지니고 있는 무기가 화살통과 작은 칼, 큰 칼이 햇빛에 번쩍거린다. 24) 나팔소리 듣자마자 땅을 집어삼킬 듯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렬하게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25) 공격 명령 나팔소리 울릴 때마다 히히힝 콧소리 내뿜으며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전쟁 냄새 맡으며 공격하라는 지휘관 호령에 귀기울인다. 26) 매가 날아올라 날개를 펼치고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네 지혜 때문이더냐? 27) 독수리가 네 명령을 받아 산중 높은 곳에 둥지를 틀더냐? 28)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높디높은 바위에, 험악한 봉우리 위에다 꾸미기도 한다. 29) 그 둥지에서 그 보금자리에서 멀리 또 가까이 내려다보면서 잡아 먹을 먹이가 있나 살피지 않더냐? 30) 시체 주위에 독수리 떼는 몰려들고 그 새끼들은 그 피를 들이마신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에게도 지혜와 본능을 주셔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데, 이런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욥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타조에 대하여(13-18) 일반적으로 타조는 위험한 일을 만나게 되어 뛰어 갈 때는 말 탄 자가 따를 수 없을 만큼 신속하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알을 낳은 후 부화시키는 과정(알을 낳아 모래 속에 넣고 태양열로 부화시키지만 상당수가 모래위에 방치되어 밟히기도 하고 다른 들짐승의 먹이가 되기도 함)을 보면 새끼에 대해 심히 무관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애 4:3). 이처럼 타조가 외형적으로는 날개를 뽐내며 푸드덕거리지만, 황새와 같지 않아서 새끼에 관해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세심하게 돌보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타조처럼 어리석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삶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약 1:5).
말의 힘과 위용(19-25)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욥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바람에 흩날리는 갈기의 멋진 모습을 직접 만들어 말의 목에 입힐 수 있거나, 메뚜기처럼 잘 뛰며 전장에 나가서도 용맹함으로 지휘관들의 호령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는 미물의 짐승 하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매와 독수리의 지혜(26-30) 매는 철새이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남쪽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며, 독수리는 사람의 손이 근접하지 못하는 험준하고 높은 곳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이처럼 매나 독수리까지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것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능과 삶의 지혜까지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러한 동물들을 통해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욥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인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인간의 주검을 통해서도 독수리를 부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은연 중 암시되어 있습니다.
적 용 : 미물의 짐승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 전부터 ‘쇼미더머니 5’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비와이’(Bewh Y)라는 청년의 노래가 많이 들립니다. 그가 쓴 가사에는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노랫말만 보면 힙합 가수의 랩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내 삶은 바로 신이 만들 예술 작품의 Featuring / 나의 불완전함을 사용하는 창조주의 Symphony / 나로 인해서 쓰여지는 위대한 history / 어쩌면 이 모든 건 내 이야기가 아닌 His story” 그의 고백대로 나를 통해 이뤄 가시는 그의 큰 뜻을 따라가길...
< 설 교 >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너는 모른다 너는 못한다)
하나님은 질문을 연속적으로 던지십니다. 하나님은 ‘네가 아느냐’, ‘네가 하겠느냐(할 수 있느냐)’, ‘네가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알수 없고 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자신에게 이런 고난을 주신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욥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 안에는 사람이 보지 못한 것들, 이해하지 못할 신비한 일들, 지혜로운 모습들이 가득합니다.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지혜로우심, 하나님의 섬세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를 보면 인간은 작고 초라한 존재입니다. 무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더듬이로 더듬거리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자기가 보고 듣고 읽은 것만 압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기 능력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조금만 벗어나면 ‘모릅니다’ ‘못합니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함부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염소와 사슴의 생태)
1-4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산 염소''는 구체적으로 ''암벽에 사는 야생 염소''를 가리킵니다. 이 짐승은 ''카프라 왈루''(Capra walu) 또는 ''카프라 누비아나''(Capra nubiana)같은 종(種)에 속한 것으로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이나 돌이 많은 황무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암사슴''(*, 아야라)은 높고 위험한 지역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발을 가진 짐승으로(시 18:33) 고대 팔레스틴에 많이 서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창 49:21신 12:15왕상 4:23잠 5:19). 욥은 산에 사는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알지 못합니다. 들사슴이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 본 일이 없습니다. 들사슴이 몇 달 만에 만삭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언제 구푸려서 새끼를 낳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낳은 새끼를 언제 광야에다가 풀어 놓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새끼들은 튼튼하게 자라나면, 어미 곁을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들짐승들의 잉태 기간에 그것들을 관찰하고 보호하여 새끼를 낳도록 섭리할 수 있는가 물으십니다. 산 염소의 새끼 치는 때, 암사슴의 새끼 낳는 것, 만삭이 되는 때, 암사슴새끼가 자라나는 것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욥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솨마르''(*)는 ''지키다'', ''보호하다'', ''관찰하다''란 뜻이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본절은 하나님이 욥에게 암사슴의 잉태 기간 동안에 그것을 위험에서 돌보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새끼들을 낳게 할 수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이 같은 질문을 욥에게 하시는 것은 인간이 전혀 알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과 세심한 배려를 통하여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들나귀)
5-8절을 보십시오.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 들나귀를 놓아 주어서 자유롭게 해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날쌘 나귀에게 매인 줄을 풀어 주어서, 마음대로 뛰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빠른 나귀''에 해당하는 ''아로드''(*)는 보통 ''야생 당나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겁이 많아 아주 빨리 도망치는 특성이 있는데, ''들나귀''와는 다른 종류의 나귀이지만 인간으로부터 길들여지지 않고 속박당하지 않는다는 점은 서로 같습니다. 들판을 집으로 삼게 하고 소금기 있는 땅을 살 곳으로 삼게 한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들나귀는 염분이 있는 습지와 풀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별히 소금기의 섭취를 위해 염분이 많은 땅을 핥는다고 합니다(시 107:34). 들나귀가 시끄러운 성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들나귀가 성읍에서 모여 살아가는 많은 군중들과 그들의 소란함을 싫어하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들나귀를 길들이지 못하고, 일을 시키지도 못합니다. 산은 들나귀가 마음껏 풀을 뜯는 초장입니다. 푸른 풀은 들나귀가 찾는 먹이입니다. 들나귀는 나귀치는 자와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들나귀를 자라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귀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들소)
9-12절을 보십시오.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들소(*, 레엠)는 강한 힘을 가졌고(민 23:2224:8), 위험하고(시22:21), 고상하고(시 92:10), 위엄있는(신 33:17) 뿔을 가졌으며, 힘차고 정열적인(시 29:6) 모습을 가진 동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70인역(LXX)은 이를 ''외뿔 들소''(KJV,unicorn)라고 부르며, 벌게이트역(Vulgate)은 ''무소''(rhinoceros)라고 합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Bos primigenius''(원시 소)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합니다. 들소가 욥의 일을 거들어 주지 않습니다. 들소가 욥의 외양간에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욥이 들소에게 쟁기를 매어 주어서, 밭을 갈게 할 수 없습니다. 들소들이 욥의 말을 따라서 밭을 갈지 않습니다. 들소가 힘이 센 것은 사실이지만, 욥이 하기 힘든 일을 들소에게 떠맡길 수 없습니다. 들소가, 심은 것을 거두어들여서, 타작 마당에 쌓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들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들소는 외양간에 머물게 하며 밭가는데 부릴 수 없습니다. 들소로 밭을 갈거나 짐을 옮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통제 바깥에 있는 존재입니다. 들소가 자기를 위해 기꺼이 일해 줄 것이라고 신뢰하지 못할 대상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들소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계획과 일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취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타조)
13-18절을 보십시오.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타조(*, 레나님) - ''외치다''의 ''라난''(*)에서 파생한 복수 명사형으로 날카로운 소리로 우는 새, 또는 슬퍼서 째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새를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암타조를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암타조의 야수성과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입증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타조가 날개를 재빠르게 치기는 하지만, 황새처럼 날지는 못합니다. 타조가 땅바닥에다가 알을 낳는 것은, 흙이 그 알을 따스하게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알이 발에 밟혀서 깨어질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들짐승이 그 알을 짓밟을 수도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타조는 알을 거칠게 다루기를 마치 제가 낳은 알이 아닌 것같이 하고, 알을 낳는 일이 헛수고가 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타조를 어리석은 짐승으로 만들고, 지혜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조가 한 번 날개를 치면서 달리기만 하면, 말이나 말 탄 사람쯤은 우습게 여길 정도로 달려깁니다. 타조는 말보다 빠르게 달립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말)
19-25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해 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은 전쟁용 군마입니다. 말에게 강한 힘을 준 것이 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달아 준 것이 욥이 아닙니다. 욥이 말을 메뚜기처럼 뛰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두렵게 하는 그 위세 당당한 콧소리를 욥이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말은 앞 발굽으로 땅을 마구 파 대면서 힘껏 앞으로 나가서 싸웁니다. 그것들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칼 앞에서도 돌아서지 않습니다. 말은 군사와 싸울 때 두려움을 모릅니다. 말을 탄 용사의 화살통이 덜커덕 소리를 내며, 긴 창과 짧은 창이 햇빛에 번쩍입니다. 나팔 소리만 들으면 머물러 서 있지 않고, 흥분하여, 성난 모습으로 땅을 박차면서 내달립니다. 그는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나팔을 불 때마다, "힝힝" 하고 콧김을 뿜으며, 멀리서 벌어지는 전쟁 냄새를 맡고, 멀리서도 지휘관들의 호령과 고함 소리를 듣습니다. 말이 지휘관에 순종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매와 독수리)
26-30잘을 보십시오.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매(*, 네츠)는 레 11:16과 신 14:15에 나오는 ''새매''(falcon)로서 매우 높이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날개의 펼침과 그 힘은 새 가운데서 아주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매가 겨울에는 높이 솟아올라서 남쪽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이 욥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 네쉐르)는 아마 금 독수리 또는 황실 독수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수리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9:26렘 49:16). 이들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흔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제나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짓는 것이 특징입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욥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가 바위에 집을 짓고 거기에서 자고, 험한 바위와 요새 위에 살면서, 거기에서 먹이를 살핍니다. 그의 눈은 멀리서도 먹이를 알아봅니다. 독수리의 시력은 매우 뛰어납니다. 독수리 새끼는 죽은 시체의 피를 빨아먹고 삽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습니다. 독수리의 본능적 습성이 매우 잔인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잔인한 본능을 독수리에게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인간의 주검을 통해서도 독수리를 부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은연 중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
하나님은 산염소,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독수리에 대하여 아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아느냐는 질문들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신 분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한 분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으신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가 알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욥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얼마나 한계적인 존재인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가 얼마나 어리식은 존재인가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힐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크시고 미물도 섬세히 사랑하시고 인간을 더욱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 숙여 고난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사랑의 손아래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욥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은 그것을 알고 고난 중에 감사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