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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봄호 제7회 시인세계 신인상 물 위에 지은 집 외 4편 이 갑 노 찻잔을 앞에 두고 녹차를 우려내듯 앉아있다 오래된 기와집엔 글씨가 살고 있지 물거울에 잠긴 소나무 물구나무선 그림자 지상의 높은 우듬지가 밑바닥에서 새를 키우고 있어 시원한 물소리는 맨살을 뚫고 흐르는데 연못에 고인 물은 목이 말라 낙수에 입을 여네 담장 안 늙은 배롱나무 줄기로 쓴 저 글씨가 우암체? 기가 돌아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격자문 열어두고 산빛마저 속속들이 우려내면 심연 속 푸른 숲이 푸시시 깨어난다 우암이 옛날 조선 적 사람인 줄 알았더니 퇴색한 정원에서 이웃들과 살고 있다 다음에 고택을 방문할 때는 빈집이라도 반드시 헛기침이라도 해야 한다 물 위에 지은 집은 길 위에 몸 같은 거 앉았다 일어서는데 발목에서 문 여는 소리, 뼛속까지 열어 보이던 나무기둥이 뚜드득 화답한다 만약에 불이라도 난다면 사리 몇 개쯤 남고 맺은 인연 탁해진 심정에 흰 수련꽃으로 피겠다 멀리 배웅하는 인기척… 귀가길, 걸립乞粒한 차茶 한 잔이 온몸을 데운다. 떨 켜 은행나무 물고기 산란하듯 잎 털어낸다 떨어지는 잎들 울고불고하지만 나무 몸 부르르 떨어 노란 잎들 뭉텅 털어낸다 집 알아보러 간 아내를 기다리며 나무와 함께 서 있다 겨울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 나무는 아직 닫지 않은 문틈을 통해 나를 불러들인다 몸속은 등화 관제하는 집처럼 캄캄하다 완벽한 성이며 요새다 불씨 하나 없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구멍 막는 일 곰처럼 겨울잠 채비를 한다 방금 전 추워서 샤크존에 들렀다 그곳은 아직 가을이 살고 있다 나무들도 몹시 추울 때는 인근에 있는 빌딩으로 피한 간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초대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심장이 있어 좋다고 따뜻한 난로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겨울은 나무에게도 추운 계절이다 산골에서 문풍지 하나로 겨울 나던 우리 식구들 생나무가 우리를 지켜준 은인 아궁이에서 타닥 소리 내거나 입에 거품 물기도 했다 아내가 밝은 얼굴로 어둠을 건너온다. 내 가지마다 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 이제 힘겨워 털어낼 때가 된 것 같다 겨울이 다가왔다 나도 나무처럼 몸 부르르 떨어본다 아내와 나 나무의 도움 받아 밤새 구멍 막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이주해온 나무들은 떨켜를 만들지 못해 각별히 신경 써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거라고 은행나무 내 어깨 감싼다. 눈길, 늪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늪으로 태어나 산다고 처마 밑 풍경은 속삭여 주었지 밤새 입에서 시작된 강은 꾸룩 소리를 내며 흘러갔어 새벽에 일어나 보니 첫눈이 내렸어 나는 아파트 옆길을 걸어가네 나보다 앞서간 발자국 희미하게 찍혀 있네 야구르트 리어커처럼 작은 수레를 끌고 간 발자국 일렬로 길게 난 자전거와 사람의 발자국 나는 새 길을 가다가도 위험한 길에서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네 눈이 녹고 길에는 그들의 발자국만 얼음조각으로 박혀 있어 나는 신발 무늬를 보고 그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하네 밤사이 하늘이 내게 내려와서 늪으로 변한 길을 덮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갈켜 주었어 새들이 날아가며 한번 입력된 길은 유전자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아 늪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어 여행길이 죄다 입력되어 나중에 갈 수 있게 바람의 발자국은 눈 위에 무늬처럼 남아 눈길을 지워버렸어 눈길은 밖으로 이어졌어, 늪으로 골다공증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너무 뚱뚱해서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지 어리석은 마음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새들은 뼛속에 공기주머니가 있어 몸을 가볍게 하거나 척박한 공기 중에서는 공기주머니에 있는 공기로 숨을 쉰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중풍에다 골다공증을 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고 새가 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새가 되려는지 등은 활처럼 굽어지고 다리는 북어처럼 마르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새처럼 뼛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공기 주머니가 이제 생기려는지 뼛속에서 바람이 일고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기도 합니다. 돌 속에 갇혀 있던 백로들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갑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나 봅니다. 몸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팔월 한낮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맛나게 먹고 있습니다. 아, 하늘에 있는 새들은 지상에서 숨겨온 동전 한 닢도 너무 무거울 거야. 이사移徙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늘정원 대문에 풍경을 거는 일이다 이사할 새 집에는 먼저 이사 온 자작나무들이 마루를 깔고 있다 방문은 조막손을 내밀어 잘 지내보자며 악수를 청해온다 시베리아 추위를 녹이며 모여 있던 벌목꾼들이 보드카 냄새에 취한다 의사들은 말한다 암도 애인이나 부인처럼 껴안고 살아야 한다고 토굴 같은 수납장과 붙박이장을 열어 본다 집은 부엌 안방 건넌방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아내는 구석구석 앉은 먼지의 궁뎅이를 떠민다 여럿의 영혼이 드나들 것이다 주인 영혼은 안방에 못을 박고 세든 영혼은 건넌방에 액자를 건다 청파동 적산가옥부터 몇 번째인가 벗어놓은 집들이 아내는 솥단지 속에 요강을 넣어 안방에 들여놓고 오늘부터 이사를 왔노라고 성주신과 조왕신, 측신에게 고한다. 밖으로 나오자 딸랑거리며 닫히는 문 꺼내 놓았던 가구들이 하나 둘 제자리로 들어가 나의 내장이 된다. □ 당선소감 바람의 길을 따라 달려보고 싶다 이 갑 노 1955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2002년 스포츠 서울, 월간 현대시 제정 제2회 한국인터넷문학상 시 부문 선정. 빈터 현대시문학 월간문학저널 회원. 현재 화승물산 대표 마라톤을 하면서 안 가본 길이 없을 정도다. 동네는 물론 달릴만한 곳이면 차를 세우고 무조건 달린다. 그러면서 시가 늘었다. 내가 쓰는 시는 단지 받아쓰기였다. 강을 따라 달리고 산길을 따라 달렸다. 비가 오면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오직 시를 완주해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며칠 전 갑하산 산자락을 오르다가 춘란을 만났다. 어머니 기일을 앞두고 있어 나는 몇 시간 동안 난을 업고 산행을 계속했다. 튼튼한 다리와 믿음직한 어깨로 생전에 마음껏 업어주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나는 난을 화분이 아닌 심장에 옮겨 심었다. 난은 꽃은 피우지만 열매는 맺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한을 견디고 피우는 향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하에서 건너오는 메시지일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이제까지는 스토리와 이미지의 압축으로만 믿고 달려왔다. 지금까지는 물살을 거슬러 올랐다면 지금부터는 바람을 거슬러 올라볼 것이다. 길이나 언덕을 달렸다면 앞으로는 산에 올라 바람의 길을 달려볼 것이다. 실체는 없지만 소리를 내고 등도 떠밀어 줄지 아는 바람, 나무뿌리나 벼랑에 집을 짓고 사는 바람, 시작도 하기 전에 흥분된다. 바람을 잡으러 간다. 어두운 밤길이나 새벽길을 달린다. 추운 날씨에도 몸은 땀으로 젖는다. 축축하다는 느낌보다는 상쾌함으로 하늘을 날아갈 듯하다. 처음 벼랑에 선 매처럼 힘차게 날갯짓을 해본다. 하늘에 길을 낸 자유라는 것은 우주를 꿰뚫었을 때 가능할 것이야……. 부끄러운 글에 용기를 주신 김종해 오탁번 정호승 김상미 시인님 그리고 《시인세계》에 감사합니다. 현대시문학 대전지회 이원우 부지회장 고행숙 배용주 외 회원님들 지회장으로 먼저 영광을 얻어 죄송하구요. 그리고 빈터 회원과 동인들께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지만 윤성택 시인님의 수고에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합니다. 곁에 있는 아내 박효순, 유럽을 배낭여행 중인 나의 분신 휘세, 분당에서 새내기 사원으로 근무하는 현정이 모두 감사합니다. 큰형 이찬노 시인님 김종학 시조시인님 감사합니다. 군자우아지약 이불우적지강, 좋은 시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힘, 파이팅……. □ 심사평 시의 화법이 매끄러웠다 김 종 해 | 시인 예심을 거쳐 최종심으로 넘어온 응모작은 모두 11명이며, 이 가운데 끝까지 거론된 작품은 현호의 「거꾸로 선 쉼표가 가리키는 것은」(외 9편), 배두순의 「황태」(외 9편), 김수정의 「수제비와 친구」(외 9편), 이갑노의 「물 위에 지은 집」(외 9편)이다. 이들 가운데 단일작품 1편만을 당선작으로 뽑을 때는 배두순의 「황태」가 가장 유력했지만, 함께 응모한 나머지 9편의 작품들 수준이 들쭉날쭉으로 일정치 않았고, 언어의 긴장감이 풀어져 있어 아깝게 탈락했다. 김수정의 「수제비와 친구」도 심사위원의 눈을 붙들어맸지만, 나머지 응모작의 수준이 느슨했다. 현호의 「거꾸로 선 쉼표…」는 언어에 대한 실험성과 전위의식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아직 설익은 것이 흠이 되었다. 배두순의 「황태」와 마지막까지 경합한 이갑노의 「물 위에 지은 집」(외 9편)은 신인으로서 요구되는 내것, 독특한 개성과 자기 목소리는 담아내지 못했지만,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안정되어 있고, 시를 풀어가는 언어 운용과 화법이 매끄러웠다. 「물 위에 지은 집」에서 “앉았다 일어서는데 발목에서 문 여는 소리”, “나무기둥이 뚜드득 화답한다”와 같은 예리한 청각적 표현은 이 새로운 시인의 특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함께 응모한 「골다공증」 같은 작품은 화자가 엮어가는 시적 우화가 재미있다. 뚱뚱한 ‘우리 어머니’와 하늘을 가볍게 나는 ‘새’의 이야기, 그 속에 이 시인이 간직하고 있는 슬픈 사모곡과 사랑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시에서 산문과 시의 경계를 주의해야 할 필요를 지적하고 싶다. ‘새로운 시인’으로 탄생하는 이갑노 시인의 전도를 축원한다. 천성에서 나오는 시의 묘미 오 탁 번 | 시인 「물 위에 지은 집」 외 4편으로 당선된 이갑노 씨의 작품은 사람의 가슴을 따듯하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다. 알맞게 다스려진 비유의 끈도 살갑지만 그 구조를 풀어내는 어조의 낙낙함이 좀 서러운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망각의 갈피 속에 숨어 있던 추억을 나직나직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인상적이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이러한 기묘한 낌새를 이를테면 시적 천분이라고 하는 것일까. 손끝으로 조작해낸 단순한 기교는 빛 바랠 수도 있지만 이처럼 천성에서 나오는 시의 묘미는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언제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법이지만 이 눈물이 바로 시의 금강석이라는 점을 아직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세파에 좌지우지 좌고우면하지 말기 바란다. ‘먼지의 궁뎅이’를 눈여겨보고 ‘배롱나무 줄기’에서 ‘우암체’를 훔치는 밝은 눈이야말로 시인이 꼭 지녀야 할 덕목이다.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작품 가운데 「거꾸로 선 쉼표가 가리키는 것은」(현호)과 「황태」(배두순), 「수제비와 친구」(김수정)는 다 나름대로의 특장을 지니고 있지만 신기한 상상력에 지나치게 기울어졌거나 반대로 단순하고 낯익은 비유에 머물고 있는 징후가 쉽게 드러났다. 참신하되 시의 위의威儀를 파괴하지 않는 진정한 시의 방법이 무엇인지 확연히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사람이 아니고 시의 귀신쯤 될까나. 법고창신 온고지신의 낡은 옛말이 새삼 새삼스러워지는 까닭을 잘 헤아리기 바란다. 입춘 추위에 제법 귀가 시린 날, 새롭게 태어나는 시인을 위하여 몇 자 글로 축복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늙은 시인 오 아무개의 감계로도 삼는다. 밝고 따뜻한 눈빛 정 호 승 | 시인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거꾸로 선 쉼표가 가리키는 것은」 외 9편 (현호), 「황태」 외 9편(배두순), 「수제비와 친구」 외 9편(김수정), 「물 위에 지은 집」 외 9편(이갑노) 등 4명의 작품이었다. 이들 중 이갑노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갑노 씨의 작품이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의 결점이 더 두드러진 탓도 없지 않았다. 현호 씨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모험성이 강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있는지 모호하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 의미가 연결된다기보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절된다.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친 탓이다. 다시 한번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배두순 씨는 끝까지 당선자와 겨루었으나 투고작 전체의 수준이 고르지 못했다. 「황태」도 육화된 깊이를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습작한 노력이 돋보인다고 해서 선뜻 당선작으로 내세우기에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김수정 씨의 시에는 아픔이 있었다. 삶의 비의를 엿보는 눈길도 있었다. 그러나 김수정 씨 또한 그러한 면이 한두 작품에 그친다는 결점이 있었다. 반면에 당선자 이갑노 씨는 전체적으로 고른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적 완성도도 높다. 삶을 통찰하는 눈이 예리했으며, 그 통찰의 꽃으로서 시를 꽃피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허황된 상상력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미더웠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그 현실 속에 사는 인간의 고통에서 시를 발견하는 눈빛이 참 밝고 따뜻했다. 그는 “나무들도 추울 때는 인근에 있는 빌딩으로 피한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의 앞날을 기대하는 마음만 클 뿐이다. |
첫댓글 오래된 신인상 작품이지만 시와 심사평을 음미해 볼 만하여 옮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