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6]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②
호러스 언더우드가 대학을 졸업한 1881년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었는데, 이듬해 조선에서는 미국과의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영국과 독일(1883년), 이탈리아와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의 나라들과 조약이 차례로 체결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이 이렇게 미국과 조약을 맺기까지는 당시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일본을 저지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선으로 하여금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도록 권고를 하고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중재를 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가 자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중재한 일이었지만 결국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하게 된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1882년 조약 체결 후 1883년에 루시우스 푸트(Lucius H. Foote)가 초대 주한미국 공사로 입국했고, 그가 고종을 만나 미국에 친선사절단을 보낼 것을 건의했으며, 그 결과 민영익을 필두로 한 보빙사(報聘使, 또는 견미사절단)가 미국을 향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가는 열차를 탔던 보빙사를 만난 존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가 미국 감리교 본부에 거액의 선교비를 기부하고 조선 선교를 요청했으며, 당시 비슷한 시기에 미국 기독교 잡지에 소개된 조선인 이수정의 호소를 접한 미국장로회 역시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1885년 부활절에 감리교 선교사와 장로교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 1884년에 일본 주재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로버트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가 조선을 미리 방문해서 선교사들의 사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일도 조선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