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한
'철야(徹夜) 소설', 밤을 지새워 읽게 되는 소설로 불리며 수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즈쿠이 슈스케의 '범인에게 고한다'는 지금까지도 경찰 소설의 모범처럼 소개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5년 새로운 얼굴로 찾아왔던 이 작품 이후 2년만에 그 두번째 이야기로 다가아 반가움을 전해준다. 아동유괴 살인범과 경찰, 그리고 매스컴을 사이에둔 치열한 심리전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냈던 '범인에게 고한다'에 이어 이번에 찾아온 그 두번째 이야기 <립맨>은 유괴 사업(?)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실행하는 소위 립맨과 경찰과의 또 한 번 땀을 쥐는 대결을 그려낸다.
<립맨>은 동기도 목적도 없는 어둠의 비지니스 설계자의 치밀한 범행을 주요 소재로 삼고있다. 명문대에 들어가 졸업을 앞두고 건실해보이는 회사에 입사를 앞두고 있던 도모키. 하지만 그 회사의 갑작스런 경영 악화로 사실상 취업이 어려워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도모키는 동생 다케하루와 함께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발을 들여놓게 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영업소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만다. 가까스로 동생과 함께 경찰을 피해 도망나올 수 있었던 도모키는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함께 일했던 아와노와 함께 새로운 범행을 모의하게 된다.
유괴 사업, 그들이 모의한 새로운 범행은 바로 유괴 사업이었다. '대일본유괴단'이라 자신들을 지칭하고 그들의 첫 사업을 가볍게 성공시킨다. 이후 그들의 유괴 사업은 본 궤도에 올라 도모키가 입사하려던 회사의 사장과 아들을 유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몸값으로 거액의 금괴를 요구하는데... 이런 그들의 활약(?) 덕분에 '범인에게 고한다' 시리즈의 히어로 마키시마 후미히코 경시가 다시금 멋찌게 등장한다. '배드맨 사건'을 화려하게 해결해낸 그의 활약상을 다시한번 기대하며...'립맨'이라 불리는 아와노의 천재적이고 치밀한 범행 설계 기술과 마키시마, 그리고 피해자 미즈오카 가쓰토시간의 쫓고 쫓기는, 속고 속이는 치열한 머리싸움이 다시금 시작된다.
<립맨>은 'Rest in peace.' 의 앞글자 'R. I. P.' 를 딴 말이기도 하다. 사실상 립맨으로 불리는 아와노가 차갑게 안녕을 고하는 이 말은 '편히 잠들라!'라는, 묘비명 등에 자주 쓰이는 그런 말이다. 이와노의 상상을 불허하는 기발하고 치밀한 계획에는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사전 정보가 바탕이 된다. 전 시리즈에서 사건을 해결한 마키시마 경시가 작품속 진정한 주인공이었다면 아마도 이번 시리즈에서 그 메인의 자리는 아와노에게 넘겨야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야기 전반을 주도하는 캐릭터는 도모키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건과 이야기 전반을 주도하는 인물은 역시 립맨이기 때문이다.
경찰소설의 대표작이었던 이전 작품에 비해 '립맨'에게 자리를 내어준 이번 작품은 '범죄소설'로 불러야 할 것 같다. 보이스 피싱, 아동 유괴!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나 쉽지 않은 소재들이 작품의 전반을 주도한다. 결코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될 이런 범죄들이 현실 불가능한 범죄 설계자 아와노의 손을 거쳐 조금은 가볍고 미화되듯 다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립맨의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라는 말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것 같다. 경찰과 범인, 그리고 피해자간의 숨막히는 대결이 승자는 결국 립맨이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의 탄생인 셈이다. 다만 다음 시리즈에서 그가 등장한다면 범죄의 컨셉을 조금은 다르게 가져가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예를들어 괴도 루팡처럼 정의의 편에서 서는 착한 악당 처럼???
무엇보다도 도모키가 처한 시대적 상황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도 알바를 전전해야 하는, 공무원 시험 밖에 출구가 없다는듯 작은 바늘구멍을 향하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의 모습들이 그의 모습을 통해 투영되어 그려진다. 다단계 회사에 끌려 다니고 몇푼의 돈을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에 자신의 통장을 내어놓는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립맨이 휘두른 짧은 혀에 범죄를 정당화 해가는, 자신의 처지에 순응해가는 그의 모습이 다시금 안타깝게 느껴진다. 마지막까지 보여지는 도모키의 모습이 지금 우리 시대의 청년들의 모습처럼 그저 평범하기에 더욱 더 안타까운지도 모른다.
'경찰소설'이란 수식을 살짝 내려놓았지만 '철야(徹夜)소설'의 계보는 계속 이어갈 충분한 이유가 있어보인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터운 무게를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가독성이 빼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살짝 주인공의 자리를 매력넘치는 범죄자에게 내어준 마키시마 경시, 다음 시리즈에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지 기대해본다. 개인적으로는 '범인에게 고한다' 시리즈는 마키시마 경시에게 양보하고, <립맨>은 '범인에게 고한다' 시리즈 외전(外傳) 형식으로 이어지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아직도 미스터리를 간직한 립맨의 모습과 활약, 다음에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