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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7년 거란족 야율덕광
소스: 이페어케이 +
요 태종야율덕광(遼太宗 藝則德光, 902~947)거란의 이름은 요, 야율아.차남. 거란은 10년 2월 초하루(947년 2월 24일)에 여율덕광과 함께 개봉에서 황제로 칭하고, 거란국을 요나라로 고치고, 국호를 '대요', 연호를 '대동'으로 고쳤다.947년, 개봉성에 거란 사람이 왔는데 그의 이름은 야율덕광이다.정확히 말하자면 야율덕광은 그의 대군을 따라 카이펑에 도착했다.
일
거란족은 동호(東湖)의 후예인 유연부(油然部)에서 유래했다.우리나라 요하 유역과 내몽골에서 발원하다하강, 시라무룬강 일대.원래 정부 철(鐵)이라는 뜻의 '거란'을 민족적 칭호로 삼아 거란인들의 끈질긴 의지와 난공불락의 민족정신을 상징했다.
거란 디자부의 수장 야율아보기는 907이다.나이가 들면 바로 땀자리가 된 후, 잇따라 거란을 진압하였다귀족의 반란과 해, 실위, 제복 등의 부족을 정복해 916년 거란국을 세웠다.926년 여율아보기가 회사 도중 쓰러지자 아내는 율평이 섭정을 했다.
야율덕광은 야율아보기의 둘째 아들로 거란이다이름은 요골. 아보기에 있는 3개아들 중 형인 야율배와 함께 아보기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야율덕광은 아버지를 닮아 아보기가 출정할 때 야율덕광이 따라다닌 공로로 발해를 평정할 때까지 공을 세웠다.그는 스무 살에 천하병마대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역시 용감한 어머니 술율평재는 그를 각별히 여겼고, 황위 계승에 대해서는 한족문화를 좋아하는 장남 야율배에게 반대했다.왕위를 계승하다.
927년, 야율덕광은 어머니의 성원에 힘입어즉위. 이 율율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거란을 이용한 사람들은 순구하고 야율배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때리며 야율아보기의 순장(殉葬)을 강요했다.야율덕광은 어머니의 지원으로 동생 이호립을 황태동생으로 황위 계승자로 삼았다.차명리의 암리에 눌려 한문화에 심취한 야율배는 할 수 없이 930년 발해를 건너 후당(後唐)으로 귀순했다.야율배는 후당 이종호에게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자신의 제위를 공고히 한 후에, 야율덕은 빛났다아버지 아보기의 사업을 계속하여 남향하다군사를 써서 중원의 패권을 다투다.거란은 아보기 때부터 황하 해안까지 강토를 확장해 황하 이북의 넓은 영토를 가지려 했다.여러 가지 이유로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야율덕광은 취임 후에도 계속 때를 기다리며 중원 할거 세력 간 투쟁에 참여해 어부지리를 얻으려 했다.
바로 지금 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베개를 가져다 주었다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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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선물한 사람은 후당하동절도사 석경희이다。
석경선은 사타족 사람으로, 5대 때 후진 왕조였다설립자. 석경록은 젊었을 때소박하고 과묵하며 병서를 좋아하고 이목(李木)·주아부(周亞夫)의 행적을 중시하며 이극용 의자의 아들 이사원(李四源)의 계정에 속하여 전공을 세웠다.그는 여러 차례 이사원을 구해 위급한 상황에서 이사원의 복심이 되었다.이사원은 딸 영녕공주를 시집보내 좌사군의 친병을 통솔하게 했다.직책과 세력이 커지자 군사를 거느리고 자중하기 시작해 후당(後)당(唐)을 취할 기세다.
이사원이 죽은 후, 리종후는 왕위를 계승하고, 대봉상절도사 이종호(이사원의 양자)와하동절도사 석경경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마침내 두 사람의 대조를 명령하였다.이 종호도 이에 불복하여 봉상(鳳翔)에서 일어나 반역하였다.이종호가 이종후를 죽이고 황제로 자립한 뒤 석경희와의 갈등은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이종호를 타진하기 위해 미리 모의한 석경환은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병권을 구걸하고 타진으로 이동한다.이것은 바로 이씨가 옥의 뜻에 따라 석씨의 요청을 승낙한 것이다.뜻밖에도 석경은 그만두고, 마침내 모반을 결심하고상표는 이종호를 이사원의 양자로 몰아 승사하지 말라며 이사원에 있는 4남 이종익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했다.이종호도 관직을 깎고 석경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936년, 후당 하동절도사 석경이로(石敬 以)연운십육주할양조건야율덕광에게 출병하여 후당을 돕기를 구걸하다.기다리던 야율 덕광은 기뻐하며 5만 기병을 거느리고 진양성 아래에서 후당군을 격파하고 석경정을 후진 황제로 책립했다.이후 그는 군을 이끌고 남하해 당을 멸망시켰다.석씨는 태종을 향해 아황제라고 자칭했다.
이렇게 야율덕은 거의 힘들이지 않고연운 16주를 거란의 통치 범위에 끌어들이다둘레, 그리고 매년 대량의 패브릭이 수입된다.
책립식서 45세 석경휘 착용계댄 복장, 비굴하게 34를 만났다부황 예율 덕광은 거란에 신하(臣下)를 모시고 매년 견백 30만 필을 내겠다고 약속하면서 유·엉겅퀴·영·막·탁·단·순·신·규·유·무·운·응·인·삭·울십육주 땅을 모두 거란에 할양했다.
2년 후, 석경정의 후진 정권은 거의 획득하였다공고히 하여 야율드광과 술에게 사절을 보내니라율평태후는 존호를 올리고 연운십육주를 거란에게 정식으로 인도했다.이와 함께 야율덕광은 회동(會同)으로 개원했다.
예율 덕광은 연운 16주를 베어낸 뒤 취하라속세로 다스리는 통치 방식, 북으로 가다면관제와 남면관제, '거단을 국제로 다스리고 한인을 한으로 대하라'는 것이었다.북면 관제는 요나라 거란족의 관제로, 관리들은 거란족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여 거란의 모든 군정을 장악한 요나라의 최고 권력기관이었다.남면 관제(官製)는 당나라를 본떠 3성 6부 등 일체의 통치기구를 설치하여 한족(漢族)을 관리하였다.김용 소설 천룡팔부에서 소봉이 맡았던 남원대왕이 바로 그 남면관이다.
율덕광은 또 유주를 남경과 운주를 서쪽으로 바꾸었다경, 연운16주를 진일로 건설하다남하한 기지를 보고 황하 이남으로 눈을 돌렸다.
석경환은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우울하게 죽었다.조카 석귀중(石貴貴)이 즉위한 후 야율덕에게'손자불칭신(孫子不應臣)'만 내세웠다.후진의 태도 변화는 야율덕광에게 좋은 기회와 충분한 빌미를 제공했다.
용병을 하는 과정에서 야율덕광의 탁월한 계략이 있었다대략도 충분히 운용했다.그는 한족 관리들의 황제 칭호 야심과 그들 사이의 모순을 최대한 이용했다.
후진에 대한 전쟁에서는 후진이 국장을 사랑했기 때문에선사의 용감한 분전에 요군도 매우 난감하게 싸웠다고. 처음 병사를 일으켰는데 조연수의 일행만이 약간의 전과를 올렸다.2차 발병 때 요군은 후진의 황보우(皇保友)·모용언초(母容彦超)·이수정(李守貞) 등 장수들에게 대패하고 돌아갔다.거란 내에서도 당시에 재해가 발생하여 사람과 가축이 대량으로 죽었고, 각 부족은 전쟁혐오를 느꼈다.또 술레이핑이 후진에게 사자를 보내 화의할 것을 알았을 때에도 야율덕광에게 힘을 다해 화의할 것을 권하였다.
술율평문야율덕광단왕, 되겠습니까?
야율덕광은 "안 된다"고 했다.
술율이 가로되 "그럼 너는 왜 한인이 되느냐?왕은요?"
야율 덕광은 가로되 "석씨는 배은망덕하여 용서치 못하노라참는다"고 말했다.
율례는 그에게 권하여 가로되 '네가 한나라를 얻었구나오래 머물 수 없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후회하면 늦는다"고 말했다.
율평이 뭐라고 말하든 이미 마음먹은 거야율덕광은 후진을 잡기로 했다.
거란은 9년 12월 17 새벽, 후진과 회동하였다항복장 장언택이 군대를 이끌고 대들보의 서쪽을 쳐부수었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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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10년 정월 초하루, 대량성북에서 만났다밍크 캡에 밍크 모피, 속철갑의 야율덕광은 곧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갔고, 귀항을 받은 후진 문무백관은 "조진 문무군관, 모든 것은 구태와 같으며, 조정의 제도와 한례를 병용한다"고 무릎을 꿇었다.그는 이때부터 군대를 멈추고 백성을 안정시키고 정벌에 나서지 않기를 바란다.그가 대량성문으로 들어갔을 때, 백성들이 모두 도망간 것을 발견하였다.이에 야율덕광이 성루에 올라 백성에게 통역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나는 거란인이지만 사람이니 모두 두려워 말라!나는 너희들을 휴양시키고 안정을 취하게 하겠다좋은 날입니다. 남래할 마음이 없습니다. 후진병이 저를 이곳으로 안내했습니다.명덕문에 이르러 거란주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입궁했다.그는 그의 추밀부사 유밀에게 대리개봉윤을 명했다.일몰 때에 야율드광이 카이펑성에서 물러나 츠오카에 군사를 둔하니라
다음날, 고훈이 그에게 장언택을 죽였다고 고소했다
장언택은 승냥이의 눈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은 승냥이보다 더 매섭다.개봉성에 들어간 후 장언택은 황궁에 침입하여 황궁에 있던 각종 진귀한 보물들을 모조리 소진하고는 사람을 시켜 봉인하고 야율덕광이 와서 받도록 하였다.이후 장언택은 종병대탈(從兵大脫)에 나서 병사들을 시켜 경사의 부잣집에 침입해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였다.이틀 뒤 개봉은 거의 빈 성이 되었지만 장언택의 거처에는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장언택은 성에서 재물을 강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살생계를 펼쳐 샨베한을 사적으로 처형하고, 그와 조금이나마 친분을 쌓았던 관리들도 놓아주지 않았다.고훈이 장언택과 적대시하자 장언택은 술김에 군사를 이끌고 고훈의 집에 침입해 숙부와 형제를 살해하고 시신은 거리로 내던졌다.지나가던 관리 백성이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장 씨는 장병들이 붙잡아 온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범행 여부를 묻지 않고 병사들에게만 물었다.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면 병사들은 무고한 백성들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
장언택은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며 온종일 성에서 술을 마시고 외출할 때마다 포옹을 외쳤으며, 모든 깃발에 적심보주(赤心報主)라는 문구를 넣도록 뻔뻔스럽게도 했다.
고훈의 고소를 들은 야율 덕광은 문무백관에게 이런 사람을 죽여야 하느냐고 물었다.백관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여율 덕광이 명하여 장언택과 그 감군을 잡아 고훈감에게 보내어 참수케 하였더라고훈은 형을 집행할 때 장언택의 두 손을 잘라 수갑을 벗어 심장을 도려내 망혼을 추모했다.장언택에 의해 살해된 그 관원들의 친척들은 모두 중상을 입고 손에 삼베 끈기를 들고 형장에서 울부짖으며 온갖 모욕을 주었다욕설을 퍼부었다. 구경하던 그 백성들은 우르르 몰려와 그의 머리뼈를 부수고 머리를 끄집어내더니, 또 그의 몸에 붙은 고기를 잘게 잘라 입에 넣어 먹었다.비참하게 죽은 것도 듀엣이었다.이 변덕스러운 놈은 거란에 반항했다가 다시 후한으로 복항하여 책형을 받고 단칼에 살점을 냈다.백성들이 고기를 다투어 먹었지만 감참관도 막지 못해 곧 뼈다귀가 되었다.
거란은 10년 정월 초닷새에 회합하였는데, 야율덕광봉석중귀는 부의후라 하여 황룡부에 안치하였다.
거란은 10년 정월 초칠에 회동하였는데, 야율 덕광은 석중귀와 그의 일가족을 봉선사로 옮겨 대동절도사 겸 시중하노이인 최정훈을 병졸로 거느리게 하였다.거란주는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안부를 물었고, 후진출제는 사자가 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온 집안이 놀라 두려워했다.당시 진눈깨비가 십여 일 동안 내리면서 경외의 공급이 끊겼고, 온 집안 식구는 춥고 배고팠다.석중귀는 남몰래 간수를 애원해서 음식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다.
이날 거란주는 아카오카에서 궁중으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다.도성의 각 문과 궁금대문에 거란병을 보내어 밤낮으로 병기를 떠나지 않게 하고 그 문 앞에서 개를 죽이고 정원에 장대를 세워 양피를 달아 저주를 하였더라거란주는 군신들에게 "이제부터는 병기를 정비하지 않고 군마를 장만하지 않으며, 세금을 경감하고, 부역을 적게 징수하여 천하가 태평해졌다"고 말했다.동경건제를 폐지하고, 개봉부를 변주(邊州)로 낮추고, 원부윤(原府尹)을 방어사로 삼았다.
거란은 10년 정월 초닷새에 예율 덕광개가 중원의관을 입고 문무백관이 조상에서 퇴조하는 모든 것을 옛 전장(典章)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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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의식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거란은 10년 2월 초하루, 여율 덕광은 숭원전에서 한족 황제의 차림을 하고 문무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황제가 되기 전 야율덕광은 후진 백관을 불러 "우리나라 땅은 넓고 넓으며 사방 수만 리에 군장이 27명이나 되는데 중원의 풍습은 우리나라와 달라 중원의 군장으로 뽑고 싶은데 어떠냐"고 물었다.후진의 신하들이 사면된 것만으로도 감격했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느냐며 "하늘에는 태양이 두 개 없다.오랑캐, 화하를 막론하고 마음속으로 당신을 황제로 받들고 싶다"고 말했다.만일 재삼하면 야율 덕광도 더 이상 양보하지 않는다진작 앉고 싶었던 황제의 자리에 우뚝 섰다.
의식을 할 때 한인은 한복을, 거란인은 그들의 민족 복장을, 요 태종은 한복을 입었다.이후 요나라의 관복제도는 이를 기준으로 거란과 한인이 각각 우리 민족의 복장을 입었다.눈에 띄는 것은 대전에 참석한 야율 덕광의 '천관(天冠), 강사포(江沙 ")'는 완전히 중원 황제의 차림새였다는 점이다.다른 사람들은 '화복(華服)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탄복한다'고 했다.
야율덕광은 거란의 국호를 '대요(大遼)'로, 연호도 '대동(大同)'으로 고쳤다.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대요국은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대전에 앞서 야율덕광은 각지의 절도사를 불러들여 입조 의사를 밝혔고, 다수의 번진절도사는 각기 군사를 거느렸지만 상경하여 앞다퉈 야율덕광에게 신하를 표하였다.야율덕광은 명신 펑다오에게 "당신들이 나를 황제로 만들기를 원한다면 지금 해야 할 일, 첫 번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황제는 이제 막 천하를 얻었으니 죄인을 대사(大辭)해야 한다"고 했다.그리하여 대료 대동10년 대사(大遼大同十年大辭)라고 명령을 하달하고 "대료 대동10년 대사(大使)하라"고 말했다.지금부터 갑병을 이수하지 않고, 군마를 사지 않으며, 부역과 부역을 감면해 주니 천하가 태평하구나!"웅대한 포부가 말과 표정에 넘치다.
안타깝게도 중원을 다스리는 야율덕 광공에는 아름다운 염원이 있다.무엇보다 임금의 도(道)에 가장 필요한 민심을 잃었다.
개봉성에 들어선 후 야율덕광은 사방에서 선물을 많이 받고 술을 마시며 즐겼고, 종종 원후진의 신하들에게 "당신들 중원의 일은 내가 다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은 너희가 모른다"고 말했다.
요나라 군대가 후방배급을 하지 않아 요군은 가는 곳마다 곡식을 빼앗아 한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조연수는 중원의 전통대로 예율 덕광에게 부하 병사들에게 급료와 양식을 지급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전통이 없었다"며 "병사들이 돈도 식량도 없으니 빼앗으라고 했다"고 말했다.그는 북방 유목민족의 관습을 그대로 사용해서, 기병들이 도처에서 말을 방목한다는 명목으로 표탈하여 초곡을 치게 하였다.그러자 "정장어봉(丁壯魚鋒)이 죽었다"고 말했다.칼은 노약자가 골짜기에 몰려 동·서 양기 및 정·활·조·복 수백 리 구간에서 거의 동이 났다"고 말했다.요나라 군대를 남하시키기 위하여 야율 덕광은 또 3사에 명하여 하사품을 마련하였다.당시 관청의 창고는 이미 비어 있었고, 삼사의 관원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게 도성의 선비들에게 돈을 빌려 장상 이하도 면할 수 없었다.그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사자를 각 주에 보내 돈을 빌리도록 협박해 민폐를 끼쳤다.사실 거란 병사들에게는 주지 않고 모두 황궁의 창고로 모여 차를 싣고 북쪽으로 가려고 했다.훗날 야율덕광은 천하를 배반하게 한 삼실(三失·종병들이 조를 빼앗고 괄민의 재물을 빼앗아 불시에 환진시켰다)을 자인했는데, 그중에는 '초곡치기'와 '괄전'이 있었다.
또 많은 거란인이 한족지역에서 관직을 맡았을 때 통치방법을 몰라 한인 중 일부의 투기꾼들이 그들의 앞잡이로 나서 함께 백성의 재물을 갈취하고 백성을 잡아먹었다.이는 요군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더욱 부추겼고,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중원 곳곳에서 봉화가 터지면서 거란인을 몰아내는 민중 폭동이 일어나고 격렬해졌다.
한 번은 야율덕광이 "천하의 백성이 어떻게 구할 수 있느냐"고 풍에게 물었다.요나라 병사가 중원을 너무 심하게 죽여 종족을 멸절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 펑도는 "지금 부처는 태어나도 살릴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살릴 수 있다"고 에둘러 권고했다.
야율데 빛도 구하지 못하더라각지에서 눈발처럼 날아오는 비상문서에 야율덕은 "중원의 민중이 이렇게 통치할 줄 몰랐다"고 울분을 토했다.
한탄에 야율덕광은 남하칭제의 득실을 반성하고 총결산하기 시작했다.동생 리후(李胡)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원을 다스릴 방법을 항상 생각하는데 오직 마음을 열고 군정을 조화시키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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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7년의 여름은 일찍 찾아온 듯 4월의 중원 대지는 이미 뙤약볕이었고, 예율 덕광과 거란 장병들은 추운 북방에 익숙해져 여름 더위를 견디지 못했다.
요대동 10년 3월 8일 야율덕광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에 넣은 땅을 포기하지 않으려 조중의 문무백관을 불러 "변주는 덥고 풍토는 살기 힘들다.나는 북방 사람이라 여기서는 익숙하지 않아서 먼저 돌아가 태후를 본다.걱정 마세요.
이에 그는 율평의 조카 소한을 남겨놓고 선무군 절도사로 남아 변주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문무관료들을 대거 데리고 귀국하였다.떠날 때는 "제사료리·빈어·환사·방기·백공·도적·역상·석경·동인·명당각루·태상악보·제궁현·할로부·법물 및 갑옷"도 빼놓지 않고 가져갔다.
요대동 10년 3월 17일, 야율덕광은 정식으로 대량을 출발하였는데, 후진조에서 그에게 포섭되어 간 관원이 수천 명이고, 금위각군 병사도 수천 명이나 되었고, 환관 궁녀가 몇 백 명이나 되었고, 국고와 궁고 안의 모든 금은보석도 그에게 함께 끌려갔다.이날 밤 야율덕광은 대들보와 가까운 아카오카에 살았지만 보이는 마을은 황량하고 생기가 없었다.그는 수하 관리들에게 수백 장의 공문을 발송하도록 명령하고, 지방 각 주와 현에 박차를 가하도록 명령했다망명한 백성을 위무하려고 하지 않지만, 요나라 군사의 간살과 약탈을 금지하는 공문을 보내려 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감히 반항할 수 있는 곳에 대해 잔인하게 도성의 방법을 채택하여 살육의 길을 걸었다.야율덕광은 카이펑에서 군을 이끌고 북상하던 중 상주를 지나 성을 허물고 성 안의 남자를 모조리 죽이고 부녀자들을 모두 데려갔다.병사가 아기를 하늘로 던지고 다시 창끝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정말 잔인하기 그지없다.성 전체 유민은 7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나중에 묻힌 시신만 10만 원이나 됩니다!
요대동 10년 3월 21일, 야율덕광은 백마(활주 소속현)에서 황하를 건넜다.고향이 가까웠는지 고훈에게 "내가 거란에 있을 때는 사냥을 가장 좋아했는데 중원에 가면 사냥이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45세의 야율덕광은 몸이 얼음을 잔뜩 쌓아놓고 얼음을 삼켜도 식을 수 없을 정도로 급병에 걸려 고열이 심했다.태의는 그에게 여색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그는 태의 악취를 한바탕 꾸짖었다.며칠 지나지 않아 야율드 광이 허베이 롼성에서 병들어 죽었더라그가 죽은 후, 현지 사람들은 '살호림'으로 바꾸었다.
멀리 요에서 상경한 술율평은 야율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태어나는 자는 사람을 만나고, 죽은 자는 시체를 만나라'고 전한다.이것은 정말 따라다니는 문무대신을 난처하게 한다.뜨거운 여름날에 시체를 보존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문무대신과 태의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한 요리사가 황제를 아예 ' "'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여름에는 목축민이 한동안 먹을 수 없는 소와 양의 내장을 모두 털어내고 소금 간을 해 썩지 않는 ' "'을 만든다.할 수 없이 문무대신과 태의들도 요리사의 권유로 야율덕광의 내장을 비우고 소금 간을 해서 시신을 요로 상경했다.중국 정사에 기록된 유일한 '미라' 황제다.
진시황과 함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거란) 부귀의 집에는 죽은 자가 있고, 칼날로 배를 찢고, 위장을 취하며, 세이지실은 향약염반으로, 오색바늘을 꿰매고, 또 뾰족한 갈대통을 피로에 찔러 피를 다 흘리고, 금은으로 탈을 쓰고, 동사로 그 수족(手足)을 취한다"고 하였으므로 "야율덕광의 죽음은 이 법으로 덮으면 인목이 제희(帝 ,)라 믿었다"고 한다.
사후에 예율 덕광의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효무혜문사성황제(孝武惠文使聖皇帝)로, 역사적으로 그를 요태종(遼太宗)으로 통칭하였다.몇 년간 전쟁에서 얻은 땅은 16주를 포함해 모두 상실돼 북한이나 후주에 빼앗겼다.
원나라 관수정사 요사탈탈탈 등은 태종은 다방면으로 원근향화했다.건국호, 전장에 관하여 정서정, 명명실열, 죄수 녹음, 농사짓기, 홀아비 배정에 관하여.직언하는 선사를 구하고, 득랑군해사(得郞君海思)를 얻으면 곧 선휘를 승진한다.가당 장경달은 임금에게 충성하여 졸졸로 예장하였다.여행을 그만두고 삼극지청을 받아들이고, 병졸을 불쌍히 여겨 휴양명령을 내리다.진나라를 친히 정벌하여 체면을 중시하다.이것은 위덕과 겸홍이라 할 수 있어, 영략한 견문이 있다.입변 직후엔 '삼실(三失)'의 교훈이 있었다"고 말했다.
야율 덕광의 폭사는 요나라에서도 큰 권력 변동을 일으켰다.야율덕광과 술율평은 황위를 계승한 자가 야율배의 아들 야율응우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더욱 전설적인 것은 숙부 야율덕광을 따라 출정했던 야율응우옌이 당나라 궁녀 견씨(후진 때 궁궐에 남아 있었다)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점이다.견씨는 41세로 예리앙보다 10살 많다.예율응우옌은 견씨를 끔찍이 사랑했다.그를 황후로 책봉하다.요나라의 역대 황후 중 견씨는 유일한 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