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년 전(1994년 4월 3일)에 카톨릭신문에 실렸던 제 글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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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에도 어김없이 부활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한 사순시기가 지나가고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빠스카의 신비가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빠스카의 어린 양으로 표시된 당신의 몸인 생명의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 22~24). 예수님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이처럼 자기 희생을 통한 부활의 의미가 오늘날에 와서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예수 부활 자체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유는 충분한 확증이 없어서라기보다 이 사건이 인간의 인식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모욕을 받고 인간적 고통을 거쳐 부활에 이른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은, 반복되는 비판과 현대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하게 유지되고 있다. 결국 누가 부활을 믿을까?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살리신다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예수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이 시련을 당할 때 함께 계시고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 희망을 주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임을 깨닫고 그분이 영광에 도달하기 전에 반드시 고통을 당해야만 했음을 이해한다.
부활은 하느님의 보다 큰 정의를 외치다가 희생 당하는 무죄한 사람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 주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당하게 사형 언도를 받아 희생 당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름없이 사라져 버리는 모든 사람들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준다. 부활한 자는 권력의 정상에 앉아 있는 황제가 아니라,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죽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정의를 위하여 불의에 희생당하여 죽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은 부활을 믿는다. 억압 받고 착취 당하고, 박해 당하는 자들은 부활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을 가두고 때리고 짓밟는 자들은 부활을 거부한다. 이교예식을 강요하는 왕으로부터 일곱 형제와 어머니가 차례대로 혀가 잘리고 머리 가죽을 벗기우고, 사지가 잘리우는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면서도『나는 지금 사람의 손에 죽어서 하느님께 가서 다시 살아날 희망을 품고 있으니 기꺼이 죽는다. 그러나 너는 부활하여 다시 살아날 희망은 전혀 없다』(마카베오 하 7, 14~15)는 외침에서 보듯이 투옥, 고문, 살해 현장에서 가난하고 소외 당하는 민중은 부활을 믿는다. 그들은 부활의 어원이 되는 「아나스타시스」「에게이로」의 뜻이 「맞서 일어나다」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어미 우렁은 자기 속에 새끼를 배어 그 새끼들이 자기 창자를 다 뜯어 먹고 자라게 하고서 자기는 빈 껍질만 남아 물 위에 떠가지 않던가.
민중들은 그들을 위하여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열사들의 죽음을 그들의 가슴에 묻는다.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김남주 시인의 죽음이 그렇다. 이름없이 민족 해방의 길에서 쓰러져간 독립군들, 의병들, 농민군들, 빛고을 광주 영령들, 민주 통일 열사들의 넋이 살아있는 칼날로, 살아있는 죽창으로 민중의 가슴에 묻힌다. 민족의 허리를 두 동강 낸 제국주의와 민중을 수탈하는 다국적 독점 자본과 피비린내 나는 국가보안법, 그리고 반공 민족 분단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우는 죽창으로 돌멩이로 부활할 것이다.
UR 협상과 함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농민들, 고통 분담이라는 허울 좋은 외피 속에 고통을 전담하는 노동자들, 지금도 수배 중이거나 감옥에 갇혀 있는 양심수들, 부활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생각하며 민족 해방의 전사로 살다가 얼마 전 췌장암으로 우리의 곁을 떠난 김남주 시인의「사랑이란」시를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읽는다.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봄을 기다릴 줄 안다/기다려 다시 사랑은/불모의 땅을 파헤쳐/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천년을 두고 오늘/봄의 언덕에/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사랑은/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안다/너와 나와 우리가/한 별을 우러러 보며』 94년 부활절 아침,「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아는」신앙인이 될 것을 짐짓 다짐해 본다.
첫댓글
어제
부활절....
마음이 무겁습니다.
나라를 생각하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카톨릭 신문에 연재를 부탁 받고
글을 썼는데
나중에 짤렸습니다.... ㅠㅠㅠ
신부님들 골프치는 것을
못마땅하다고 글을 썼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