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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채혁 교수(강원대 사학과)
1.머리말
오늘 이 뜻깊은 바이칼문화연구소 창립모임에 참여하여 여러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1) 다만 한가지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은 제 전공이 13~14세기 칭기스카한 몽골카한국시대 역사이어서 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역사에 크게 비중을 두어야 할 바이칼의 역사문화에 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몽골사가 전공이어서 1991년에 수교와 함께 먼저 현지답사를 하고 그간 학회에도 참여하여 몽골과학원 초청교수로 부리야드 몽골(소련), 아르몽골(몽골국), 우르몽골(중국)이라는 세몽골을 답사해보고 올해(1994년)부터 시작된 동몽골 다리강가지역의 고구려성터 발굴(한국일보,대륙연구소주관,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주최)에 동참해 보기는 했으나, 정작 바이칼 문화를 접해본 것은 1993년 6월 중순에 브리야드 사회과학원이 주최하는 [바자르?바라딘박사 탄신115주년 기념학회]에 몽골과학원 학자의 일원으로 국제몽골학자협회 한국측 집행위원으로 그들과 함께 7박 8일 동안 참여해온 것이 전부입니다.
지금 초청연사로 이 자리에 와 계신 몽골과학원 어문학 연구소장 데?욘동박사의 도움으로 이 학회에서 뜻하지 않게 몽골말로 강연을 해보는 경험을 했던 일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여기 부리야드 공화국의 한가운데에서 지내는 동안 놀라운 일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몽골초원에 살다가 소나무가 뒤덮인 이곳에 들어서면서 마치 고향의 품에라도 안긴 듯이 포근한 느낌을 느끼는데, 특히 길고 긴 산마루를 넘어 바이칼 호로 가는 동안 고개에서 마주친 무당목과 오보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바이칼 호수가 마치도 대관령을 넘어 강원도 명주군-예국(穢國)의 옛땅-에서 바라보는 동해와도 같더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과학원 자료실장 심짓드 교수와 자료실을 돌아보고 한국관계 자료는 단 한점도 없다는 데에 자못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북한을 막론하고 연구정보교환이 전무했다는 점에서였습니다. 이 점은 몽골국역사연구소나 내몽골역사연구소 자료실에서도 똑같이 느꼈습니다만 우리의 역사 연구가 이렇게 폐쇄된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실로 놀라왔던 것입니다. 또 한가지 놀란 일은 한국학자들이 이곳을 답사했다는 한국의 신문기사를 읽고 왔는데도 학자들 중에 연구원에 들러 전공자를 만난 이들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베?체?나이타코프원장의 말을 들어 알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학자들이 자기 분야의 전공자를 만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 내용의 수준이 어느 차원이겠는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창립모임에 오게 된 동기는 바로 세 번째의 문제 때문입니다. 전문가를 만나서 함께 연구해야 성과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절감해 왔고, 그래서 베?체?나이다코프 원장과 울란우데와 몽골의 울란바타르에서 두나라 학자들의 공동연구와 연구정보 및 연구자 교류문제에 관해 여러번 얘기를 나눴던 터였습니다. 또 지난해 우리 협회의 초청으로 몽골과학아카데미의 지리학자, 문헌사학자와 고고학자가 한국에 와서 연구하고 간데 이어 올해 부리야드 연구원과 관계가 깊은 데?욘동 소장과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한 데?체벤도로지 고고학실장, 그리고 오?투멘교수(체질 인류학)가 몽골국립대학 한국학과 학과장 엘?하과 교수와 함께 여기에 동참하고 있는 까닭에 제가 적어도 공동연구를 할 수 있도록 이 지역학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 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세분이 모두 각자의 전공분야에서 바이칼 지역 부리야드몽골과 원래의 몽골, 만주와 한국의 문제들을 비교연구하려고 이 자리에 온 분들이기도 합니다. 데?욘동 선생은 8월에 와서 그간 연구한 것을 잠시 후에 간단히 발표하겠고 10월에 들어 이곳에 온 두분은 연구가 진행되는 대로 다시 결과를 발표할 기회를 만들어 보려합니다.
2. 바이칼문화와 시베리아?몽골?만주?한국의 기층문화 문제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은 이런 것들이 되겠습니다만, 기왕에 이 자리에 섰으니 몇가지 바이칼문화 연구의 문제와 시각에 관해 제 소견을 말씀드려보려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바이칼문화란 무엇인가?”와 “왜 하필 바이칼문화인가?”라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겠습니다만, 과문한 탓인지 이 분야 전공자를 아직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한 저로서는 검증과정을 한번도 거쳐보지 않은 아주 초보단계의 가설을 몇 가지 제기하는 차원에 머물 수 밖에 없겠습니다.
마침 제가 1993년 6월에 부리야드 사회과학원이 주최한 학회에서 발표한 강연요지가 또한 이런 차원의 것으로 그 제목이 <코리(Khori)족의 씨족분화과정과 고구려족에 관한 문제>이어서 이점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한 때는 교과서에 우리의 청동기 문화가 그 합금 내용으로 보아 황하유역의 것과는 다르고 시베리아 계통에 속한다고 하더니 요즘은 그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검증되었다고 합니다.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라고 보고 그로부터 인류문화가 태동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이칼호수 언저리의 신석기 문화보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신석기가 그 시기가 빠르다고 밝혀진 이상 그 쪽에서 이쪽으로 문화가 흘러들어오거나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고만 보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문화는 보통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돌무지 무덤이나 돌널무덤으로 대표되는 만주의 요하유역 문화는 바이칼호수 언저리의 그것보다 시기가 더 빠르고 우수하며 신락유적은 황하유역의 그것과 같거나 더 이른 것도 있다고 합니다. 2)
그리고 이 지점이 단군신화와 동명(東明)?주몽전설, 농경문화와 유목문화가 접합되는 곳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지도참조).
요하유역이나 몽골의 울란바아타르보다 바이칼호수 언저리가 고도가 낮아 비록 위도는 높지만 기온은 더 따뜻해서 - 몽골은 북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져 몽골의 강물들도 모두 부쪽으로 흘러가서 북빙양으로 빠집니다. - 농경문화가 일찍 싹텄을 수도 있다고 보지만 3) 여전히 황하나 인더스강 유역처럼 농사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요컨대 요즘은 우리문화나 우리겨레가 어디서 들어오거나 나들이 했다고 보기보다는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이땅에서 원래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근래에 동아시아 각국에서 일고 있는 민족주체사관이라는 역사인식 경향이 반영된 측면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수렵?유목민족사의 경우에는 이런 관점이 좀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7~8세기까지 몽골고원을 무대로 살다가 서진하여 살죽터키 제국과 오스만터키 제국을 세우며 1000여년을 서아시아에서 활약하면서 마침내 지중해 연안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잡고 터키국을 세운 터키족의 경우가 그 일례입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터키족의 고대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부리야드 몽골사람들과 우리가 인종, 언어, 신앙, 풍속면에서 몇천년 떨어져 있었을지도 모르는 터에 서로 너무나도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몽골반점이 있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점이 같지요, 특히 엄마하고 애기하고 주고 받는 눈짓, 몸짓, 표정들이 너무나 닮았습니다. 몇해전 세계경제연구원의 김병린 소련연구실장이 소련과학아카데미 인류?인종학박물관에서 촬영해 어느 신문에 소개한 에벵키족의 탈 몇점은 하회탈과 너무 닮아서 사람들의 혀를 차게 했습니다.
우리의 양반탈을 그곳에서는 무당탈이라고 했습니다. 에벵키(Ewenki)에는 솔론, 퉁구tm와 야쿠트족이 포함되며 솔론은 솔롱고스(Solongos) 곧 몽골사람들이 한국을 부르는 이름의 원형일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1994년 10월) 몽골과학원에서 무당을 연구하고 있는 이필영 교수가 채록한 충청도 [앉은굿]으로 인간 문화재가 된 신석봉 법사의 독경 소리를 몽골의 무당연구가 오?푸렙 교수에게 들려주었더니 역시 동몽골의 솔론?바락족의 가락이라고 금방 잡아냈습니다. 또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으로부터 바이칼호수 언저리, 동북몽골과 동몽골 대초원 및 만주와 한국으로 이어지는 석인상(石人像) - 돌장승 -전통(터키계와는 뚜렷이 그 인상부터 구별된다)5)
그리고 손진태 선생께서 일찍이 서낭당과 비교해 연구했던 오보오의 맥과 무당목의 맥6)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르칸 산이라는 산은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서도 있고 몽골의 여시조 알랑고아전설에도 등장하며 만주시조 전설이나 우리의 그것에도 등장하는 백두산의 옛이름[불함산(不咸山)]과도 그 이름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최남선 선생은 시베리아, 몽골, 만주와 한국을 엮어 [불함문화권(不咸文化圈)]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7) 신화의 모티브나 그 자연환경으로서의 무대배경, 산이름이나 물이름,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비슷한 경우도 있다는 점은 충분히 연구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최남선 선생이 [밝]과 관련시켜서 [不咸]을 해석한데 대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몽골의 언어학자 베?에린쳉은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본 점이 다르기는 합니다.8)
몽골에서 바이칼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가장 길고 큰강인 셀렝게 강변에는 버드나무가 아주 많고 바이칼호 동쪽에는 아예 [붉은 버드나무 산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마어마하게 길고 큰 산맥 조차 있어 그 속에 부르칸 산을 비롯한 몽골시조 전설과 관련되는 유적들이 있다고도 합니다.9) 몽골에서는 버드나무가 자작나무와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가 그려져 있는 신라 천마총의 천마도는 너무도 유명하지만,10) 우리의 서낭당 신앙과 비견되는 오보오도 숲지대에서는 버드나무 오보오라고 부릅니다. 만주지역의 [보드마마]신앙도 버드나무와 관련되고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도 [버들꽃]이라는 이름을 가져 버드나무와 관계가 있는데, 이들 모두가 하백(河伯) 곧 용왕(龍王)의 딸로 용솟음치는 샘물과 관련되는 점이 주목됩니다.11)
조상들이 태어난 곳에 버드나무 울타리 유조구(柳條溝)를 세워놓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청나라 만주인의 관행도 흥미롭습니다. 이를 모계사회 신앙관행의 잔재로 보는 이도 있지만 몽골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부르칸 산이란 곳은 조상들의 탄생지이자 조상들이 묻힌 곳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12)
다음은 [아리랑]의 후렴을 제대로 불러내는 외국인 가수는 몽골 가수들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특강형식으로 한국어과 학생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보았는데 그렇게 좋아하고 잘 부를 수가 없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울란우데의 어느 학자부인은 아예 “그것은 당신네 가락이 아니고 우리의 가락이다”라고 까지 했습니다.
뒷날 몽골의 음대교수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어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리랑 후렴같은 유창한 가락은 드넓은 몽골의 동남부 초원에 어울리는 가락으로 몽골에서도 서북부 산간지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지역 출신 가수들이 아리랑을 잘 부른다는 사실을 그 뒤에 확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자기 고향땅 이름을 가지고 옮겨 다니는 관행이 있다는 점은 이미 공인된 사실입니다만, 바이칼호수 언저리의 땅이름이 동몽골 초원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 많다는 사실은 몽골과학원 지리학연구소의 데?바자르구르 교수가 오랜 현지 답사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입니다. 13) 제 생각으로는 이를 만주와 한국으로 연장해 비교해 보아도 이와 비슷한 결론이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바이칼은 본래 바이(풍요한) + 갈(불) : 화산(火山)에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부이르노르, 부리야드, 부여도 이 [바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이름이라고 보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시베리아라는 이름조차 아예 쉬베르(나무숲) 또는 쉬베(풀숲)이라는 낱말 곧 [숲]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서로 비슷한 문화유형의 사례는 각부면에서 수없이 많이 찾아지겠습니다만, 아시아의 4분의 1이나 되는 드넓은 시베리아(한국의 60배가 넘는 넓이이다)와 서유럽 땅만큼이나 넓은 오늘의 몽골국(한국의 8배가 되는 넓이다), 이에 다시 내몽골과 만주 및 한국을 포함한 이 드넓은 지역이 그 기층문화로 보아 한 문화권을 이루어 왔음을 확인해 가는 일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4)
그 중에서도 이런 유산이 가장 집약되어 남아있는 지역이 바이칼 호수 언저리라 하겠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 자못 궁금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이곳에는 만주나 몽골과는 달리 요, 금, 몽골세계카한국, 청과 같은 큰 나라들이 세워져본 적이 없고 제정러시아 때도 중앙에서 소외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순수성이 보존될 수 있었지 않겠느냐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제 의견은 조금 다른 데가 있습니다. 문화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상례라고 하지만 특히 농경문화의 경우에는 문화정도가 높은 지역종족들이 반드시 그 사회의 지배층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된 소수가 조직되지 않은 다수를 지배한다는 원리대로 문화정도는 뒤떨어지지만 조직력과 전투력이 뛰어난 소수의 기사유목민족(騎射遊牧民族)이 문화수준이 높은 다수의 농경민을 정복, 지배한 사례가 역사상 적지 아니 나타나고있습니다.
수?당제국에 군사, 경제와 정치의 기본틀을 만들어 제공한 선비탁발족의 북위제국과 거란족의 요 및 여진족의 금, 몽골족의 몽골세계카한국 중앙정부 원과 만주족의 청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사례였다고 하겠습니다. 15)
3. 부리야드?코리족과 고려(高麗)?솔론족의 족손문제(族系問題)
몽골족의 여시조 알랑고아는[몽골비사] 8~9절에 의하면 아버지 쪽은 코리(Khori)족의 피를 받고 어머니쪽은 바르구진고아라고하여 바락족의 피를 받아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부족의 원주지가 모두 바이칼호수 언저리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 계통인 코리족의 시조 탄생지는 시베리아 샤마니즘의 메카로 널리 알려진 오이홍 올티릭 곧 오이홍 섬16)에 있습니다. 여기서 황소가 하늘에서 내려온 백조와 결혼하여 코리족의 시조 11형제를 낳았다고 합니다. 부르칸 산이 있고 자작나무가 많이 있는 곳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중요한 땅이라고 하겠습니다.17) 이러한 전설은 만주족의 시조 아이신?쟈오로가 낳아지는 백두산의 불함산(不咸山) 봉우리와 금강산에 오면 ‘나무꾼과 선녀’형태로 바뀌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8)
코리족의 시조탄생지인 오이홍 섬이 바이칼호 안의 서중부에 있는데, 이들은 그후 동몽골쪽으로 이동해 부이르노르 언저리에서 분화해 한 계파는 서진하여 몽골초원으로 나아와서 몽골족을 이루고 다른 한 계파는 동진하여 만주와 한반도로 나아와서 고구려족 곧 [고리족]을 이루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1992년 동몽골 대탐사과정에서 실제로 그런 구비전승과 의례 및 고구려 카한의 석인상이라고 하는 유물이 부이르노르 언저리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몽골과 고구려가 만주와 동몽골을 중심으로 발전해 가서인지 1921년 혁명이후 근대교육을 받기 전에는 이 지역 사람들은 고올리(高麗)라는 이름만 썼을 뿐 솔롱고스(Solongos)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19) <<논형(論衡)>>,<<후한서(後漢書)>>와 <<량서(梁書)>>등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을 북이(北夷) 고리국인(槁離國人)이라고도 썼습니다. 매우 가당치 않은 가설일 수도 있겠지만 고리(槁離)는 코리(Khori)와, 부리야드는 북부여와 연관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합니다.20) 물론 부리야드라는 이름도 오랜 역사과정에서 변천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된 것이기는 합니다.
동명(東明)이나 주몽(朱蒙)이 마정조직(馬政組織)을 갖춘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함은 그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가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있고 또 마사기술(騎射技術)에 기초를 둔 큰 군사력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기사기술을 갖춘 유목집단은 뒷날 칭기스카한-[몽골비사]의 기본무대가 되는 동몽골대초원 특히 훌릉보이르호수와 동남몽골에서 주로 방목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지만, 실제로 그가 장거리를 이동해 와서 고구려를 세운 사실은 이를 증명해 줍니다. 부여의 속어(俗語)에 백발백중의 선사자(善射者:활 잘쏘는 사람)라 주몽21)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는데 몽골 속담에도 투멘은 만이라는 뜻으로 만발만중(萬發萬中)의 명사수란 뜻이 있서 북방유목제국의 카한의 이름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이름에 투멘이란 이름이 나타나곤 합니다.22)
1880년대 제정 러시아의 몽골탐사대원인 포타닌이나 이봐노브스키 등이 몽골을 답사23)한 이래 헤?페를레의 답사24)와 내몽골 학자들의 조사25), 또 근래의 한?몽학자들의 조사 결과로 밝혀진 몽골, 특히 동남몽골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고올리 성터와 코리족 분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는 90년대 들어 시작된 고올리 성터에 대한 한?몽학자들의 답사와 발굴이 진척되면서 점차로 풀려가리라 기대됩니다.
이에 대해서 솔론(Solon)족은 바이칼호 동쪽에서 헨티산맥에 걸치는 지역을 원주지로 하면서 주로 초원의 주변으로 동진하기도 하고 셀렝게 강을 타고 서진하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러는 솔론?바락족 또는 솔론?다구르족으로 불리우는 부족연합형 호칭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인종, 언어, 신앙과 풍속 면에서 우리와 매우 가까울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26)
셀렝게강과 오르흥강의 합류지점에 살던 우와스(Uwas)메르키드의 다이르승카한의 딸 홀란공주는 칭기스카한의 4번째 카한비가 된 미모의 여인으로 유명한데, 17세기의 문헌인 [몽골원류]와 [로알탄톱치]에서는 홀란을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했습니다.27) 이로 미루어 보아 메르키드라는 솔롱고스의 한 종족은 세렝게 강과 오르홍 강을 따라 올라가 서부 몽골로 진출하고 이들 서부몽골 세력이 집권하던 때에 솔롱고스라는 이름이 보편화했는데 이것이 7세기 경의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련하여 솔론 신라와 연관되면서 우리를 솔롱고스라고 불러온 것은 아닐까 합니다.
칭기스칸과 그의 제4부인인 솔롱고스의 홀란공주가 신방을 차렸다는 하일라르강변의 헤름투유적은 칭기스칸의 네 번째 부인이 된 전설적인 미모의 솔롱고스(당시의 메르키드 임금인 보카<渤海>차간한의 딸) 공주 홀란과 칭기스칸이 첫날밤을 보낸 자그마한 성터(약 50~60m2)로 유명합니다.
1999년 10월 8일 부이르호일대의 현지답사과정에서 내몽골 신바라크 좌족(左旗) 문물연구소에서 주채혁, “흥안령지역의 실위와 맥(貊)-몽고올리와 맥고올리”, [한국민족학연구] 3, 단국대학교 한국민족학 연구소(1995), pp. 5~26의 개요를 소개하면서 이 고장의 고올리관계 유적에 대해 관계관 및 주민들과 토론하는 가운데 소코르 연구관이 헤름투유적에 관해 어렴풋이 제보해 주었습니다.
10월 11일에 신바라크 右旗까지 답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만주리에서 하일라르로 가는 길가에 이 헤름투휴적이 있어 답사하였는데, 몽골 스텝과 타이가를 답사하기 10여 년만에 한국인인 필자가 칭기스칸과 솔롱고스-메르키드(보카:발해)인이 함께 엮어낸 역사의 유적을 처음으로 찾아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물이며 곤충등을 놀랍게도 많이 수집해 놓은 지방사가 남스렝(당시60세)연구자를 만났는데, 무엇보다 감격적인 일은 그가 이 후진 땅에서 한글을 배워 ‘가갸거겨나냐너녀..“를 거침없이 외워내던 일입니다.
어려서 이웃에 있는 조선인 어른에게 그냥 좋아서 배웠다고 하는데, 필자가 내몽골땅에서 처음 만난 자생적인 몽골인 한글 터득자였습니다. 몸이 불편한데도 필자 일행을 반겨 맞으며 감격하여 이제 고올리인 연구자를 만났으니 모두 내어 주겠다며 수집한 자료를 필자에게 많이 건네주었습니다. 훌룬호 언저리 알탄에멜(황금안장이라는 뜻)에서 맛본 오이지의 맛은 어찌 그리도 필자의 입맛에 딱 맞았던지 어린 시절 도시락 반찬 맛을 떠올리며 감격스러워 할 정도였습니다. 우물파는 일을 생업으로 하고 산다는 조선인 -고올리사람은 끝내 못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주채혁:“朝鮮?鮮卑의 鮮과 馴鹿遊牧民-몽골유목기원과 관련하여-”,[동방학지] 110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2000), pp 199~200의 주39 참조.
4. 맺음말
오늘 여기가 바이칼연구소 창립모임을 갖는 자리여서 한국 고대사에는 문외한인 칭기스카한몽골카한국사 전공자가 바이칼 문화와 관련하여 코리족과 부여?고구려?백제, 솔론족과 신라를 연관시켜 보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사설을 감히 세워 보았습니다. 아는 것이 없을수록 용감할 수도 있겠지만 원로 국사학자(선사시대 전공) 가운데서도 광개토대왕비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예니세이 강으로, 夫餘를 부리야드로 비정해 보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조금 대담해져 보았습니다.
두 지역 주민의 종족특성이나 그 문화내용의 동질성으로 보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설이라고는 결코 보고 있지 않습니다만 물론 구체적인 연구?검증과정에서 얼마든지 수정 또는 정정되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기마유목민족은 문화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력과 전투력으로 선진농업지역에 진출하여 지배종족으로 군림할 수 있으며 지배종족이 전체에 미치는 문화적 영향은 [씨눈]과도 같아서 그것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실로 큰 것이므로 넓은 의미에서의 바이칼문화를 우리의 모태문화의 한 핵심부분으로 설정할 가능성이 또한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넓이가 31000평방미터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넓고 깊이가 1620미터이며 높이 해발 2000미터의 산들로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호수면은 해발 450미터밖에 안되는 바이칼호수입니다.
바이칼 농경문화가 일어날만 하고 풍부한 물과 숲, 그리고 초원지대가 더불어 존재하는 주변환경으로 보아 수렵과 유목문화를 창출해 낼만한 곳이기도 합니다. 주민들의 생업상 기록된 문헌사료보다는 구비사료가 위주인 이곳의 문화 복원에는 고고학?인류학?언어학?생물학?지질학?암석학등 각종 학문이 동원되어, 공동연구를 해야 그 복원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29) 한문문헌 뿐만아니라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의 구비전승자료들도 많으므로 연구자들의 언어능력의 한계성이 연구의 큰 장벽으로서 이 또한 공동연구로 타개해 가야할 문제가 되겠습니다. 혼자서는 어렵고 여럿이 더불어 하는 연구대상이므로 이 연구모임이 갖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 어떤 심리학자가 다람쥐에게 쳇바퀴를 돌리게 하는 실험을 했는데, 먼저는 종래대로 다람쥐가 제멋대로 달려서 쳇바퀴를 돌리게 하고 나중에는 전기로 쳇바퀴를 돌려주고 다람쥐는 그에 따라 발만 움직이면 되게 했다고 합니다. 앞의 경우에 다람쥐가 힘이 들어도 생기차게 살아 있었지만 뒤의 경우에는 다람쥐가 힘이 별로 안들었는데도 며칠이 못되어 생기를 잃고 시름시름하더니 마침내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힘이 들어도 하고 싶어서, 자기 개체사 나름으로, 마음내키는대로 뛰면 살맛이 나고 생기가 도는데 전기의 힘으로 기계, 컴퓨터와 로봇이 일을 다 해주어 편히 따라 가기만 하는데도, 사회보장제도 조차 잘 되어있는데도 사람들에게 살맛이 안나고 생기를 잃어버리게 하는 시대가 하이테크시대가 아닐까 하는 소박한 생각에 젖어봅니다.
어떻게 해야 살맛이 날까? 살맛은 비록 힘이 들더라도 나를 나로 살려온 역사과정을, 내앞에 펼쳐져 가는 삶의 현장에서 체험을 통해 다시 확인해 갈 때, 특히 한 개체나 공동체의 기본틀이 형성되던 시기의 맛, 빛과 냄새감각 및 소리, 몸짓, 율동과 가락등을 다시 체험해 갈 때,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내 잘난 점과 못난 점을 모두 품어 다독거려 나를 나다운, 참 나로 살려내신 부모의 손길과 조상의 숨결을 체험해 갈 때 곧[역사적인 참나]를 만나 갈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하이테크시대의 아득한 미래로 뻗어나가면 그럴수록 우리 역사의 태반으로 더 깊이 뻗어 들어가는 [역사탐방] 곧 [내 속으로의 순례]가 이루어져야 살맛나는 생기찬 장래를 기약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이 바이칼문화연구소 창립을 계기로 바이칼문화에 관한 연구가 아주 많이 깊이 이루어져 가면서 겨레의 뿌리를 찾는 역사탐방길, 내속으로의 순례길이 오염되지 않은 물과 역사유난- 오늘날<몽골국>노래에 조차도 중국풍이 스며 있어 그 원형유산을 여기서 구하게 되는 역사 상황입니다. - 이 풍요한 바이칼 호수까지 끊임없이 뻗어 나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석)
1) 이 논문은 1994년 10월 22일에 세계일보사 귀빈실에서 있었던 ‘바이칼문화연구소’ 창립기념강연논문에 조금 손질을 한 글이다.
2) 한창균,[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고고학 발굴자료와 연구성과를 중심으로-],[국사관논총] 33, 국사편찬위원회, 1992,1~40쪽. 이밖에도 이 글을 쓰는데 한창균교수의 도움말이 있었다.
3) 몽골고원 울란바타르에서 북으로 바이칼호수쪽을 향해 달리다 보면 북으로 갈수록 원반형으로 넓찍하던 양의 꼬리가 점점 더 얇고 가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기후가 추울수록 양의 꼬리가 두터워지게 마련이다. [부리야드 몽골인의 원주지] 지도는 몽골과학원 원사 지질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원 오?투무르토고오 박사가 그려준 것이다.
4) 이희수, [터키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3. 참조
5) 주채혁, [몽골 다리강가 지역의 훈촐로오와 제주도의 돌하르방에 대하여 -답사보고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제2호, 한국역사민속학회, 122~144쪽과 [제주도 돌하르방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 : 그 명칭과 개념정의 및 존재시기 - 동몽골 다리강가 훈촐로오와 관련하여], [청대사림]6집, 청주대학교 사학회,1994 및 [제주도 돌하르방 연구의 몇가지 문제점 : 그 기능과 형태 및 계통 - 동몽골 다리강가 훈촐로오와 관련하여-], [강원사학] 제9집, 강원대 사학회, 1993. 참조
6) 손진태 [조선 민족문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48 참조
7) 최남선, [육당 최남선 전집] 2, 현암사, 1973 참조
8) 1993년 여름에 체?샥달수렝 교수(베?에린칭의 제자)에게서 들었다. 이는 결국 1999~2000년의 대흥안령과 소흥안령 일대의 답사를 통해 [부르칸(不咸)이즘과 유화(柳花), 그 모태회귀신앙연구보유] [봉우국학] 제2집(봉우사상연구소) 200~238쪽으로 발전되어 결실을 보았다.
9) 베?에르?조릭토에브의 대담기사 [칭기스카한은 어디에 묻혔을까?], [푸라우다]紙 부라야드 지방판, 1990년 6월 30일자를 주채혁과 바?도로지가 옮겼다. [한몽공동학술연구] 3,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몽골과학아카데미 1994를 참조.
10) 필자는 1993년 여름에 흡스굴?아이막의 한 젊은 무당(34세 여자 :1994년 8월에 무당연구자 이필영박사가 직접 만나 굿거리를 채록하였다)의 굿거리에서 그 신장대의 손잡이가 말인 것을 볼 수 있었다. 내용은 [한몽공동학술연구] 2,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몽골과학아카데미, 1993, 143~158쪽 참조.
11) 최희수, [조선족 설화와 민족설화 비교 - 주몽설화를 중심으로], [한민족] 제4집, 한민족학회, 1993, 96~112쪽.
12) 필자가 1993년 봄에 몽골과학아카데미 고고학 연구실 바트?사이홍 석사와 도?바예르 석사 등에게서 직접들은 이야기다.
13)필자가 1993년 여름에 직접 만나서 그의 논문 원고를 보며 설명들은 이야기다. 그는 이 지역의 땅이름에 대한 역사?언어학적 비교연구가 시급하다는 점에 관해 필자와 의견을 같이했다.
14) 물론 구체적으로 지역별?시기별?종족별로 분석이 이루어져 그 민족 또는 문화기원의 다양성?다원성이 집요하게 천착되어 가야겠지만 해외문화 유적연구학술회의 발표논문집 [해외 소재 우리역사관련 문화유적의 현황과 보존], 문화재 연구소, 1995, 5~124쪽에서 이에 관한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특히 최몽룡이 바이칼 지역의 토기와 우리 빗살 무늬토기와의 밀접한 관계, 연해주의 신석기문화와 한국동북지방의 그것과의 연결성, 에니세이강과 아무르강의 암각화와 우리의 것의 관계성 및 극동지역의 초기철기시대의 여러 유적과 우리의 그것관의 연관성 문제를 거론하여 바이칼→동몽골?만주→한국서?중부 및 바이칼?아무르→연해주→한국 동북부?동부?제주도?일본 구주로 그 문화적 이동경로를 추정해 본 일은 흥미롭다. 손보기는 이 지역의 조사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이들 지역에 문화가 단순히 단선적으로 전파되어온 것이 아니라 문화공동체의 구조속에서 이동과 역이동을 통한 상호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보고 그 다양성과 다원성 또한 충분히 고려되야 한다는 것이다.
15) 일본동아연구소 편, 서병국 옮김, [이민족 중국통치사],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1 참조.
16) ‘오이흥’섬을 러시아 인들이 ‘올콘’섬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이흥’은 전설상으로 ‘가까운’이라는 뜻이 있다고도 한다. 17세기 후반기 에르마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한 이래로 러시아인들에 의한 지명변경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7)
18) 손철신 편저, [-중국말대황제-애신각라?부의전], 북경, 화문화출판사, 1990 참조.
19) 1992년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와 몽골과학아카데미가 공동으로 실시한 근 3000km에 달하는 동몽골대 탐사과정에서 필자가 직접 수집한 자료들이다.
20) 부여?고구려의 부여문화인 서풍의 서분구문화, 요원의 석역채이문화, 유수의 대파문화가 모두 흉노?오환?선비등의 서쪽 목축민의 문화로 의심받기도 했을 만큼 몽골족과 근사하다는 점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손지기 지음, 임동석 옮김, [동북민족원류], 동문선, 1992, [제 5장 예맥 여러족의 원류] 참조.
2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조.
22) 1990년 8월에 베?수미야바아타르가 <[몽골비사] 윤독회>에서 제시한 견해이다. 논자는 주몽의 후예를 표방한 궁예가 활(弓)의 후예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살을 뜻하는 ‘솜’이 ‘추모’(광개토대왕릉비)라고도 하는 주몽의 본디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궁예에 관해서는 박한설 [궁예성명고], [하성이선근박사고희기념논문집] 1974, 참조.
23)
24)
25) 필자가 1992~1993년에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에서 객원교수로 있을 때 내몽골 출신 대학원생들에게서 동남 몽골지역의 고을리성 유적들에 관해서 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답사가 긴요하다 하겠다.
26) 실제로 1993년 7월에 오?푸릅이란 무당 연구자에게 충청도 앉은굿의 가락(이필영 채록)을 들려주었더니 즉석에서 솔론바락족의 가락이라고 지적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부족에 대한 현지조사 또한 시급한 일이라 하겠다.
27) 홀랑공주에 관한 사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체계적인 연구?발굴 작업이 긴요하다.
28) 잠스랑긴?체벤 씀, 주채혁과 바?도로지 역주 [러시아 치하에 잇는 부리야드 사람들의 생활상태], [한몽공동학술연구] 3,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몽골과학아카데미, 1994 참조. 2002 [신동아]에 등재된 유전공학적방법으로 접근한 이홍규교수 바이칼과 한겨례의 기원에 관한 글은 우리에게 신선한 의미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