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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2.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지난 원나라 시대에는 민간에 전해지는 역사를 바탕으로 평화를 만들어 이야기꾼에게 구연하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오류가 많고 너무나 저속하여 교양있는 사군자들이 대부분 싫어했다. 그래서 동원 땅 출신의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하여 편찬하고 삼국지통속연의라 이름했다. 그 문장은 심오하지 않고, 말투는 그다지 속되지 않으며, 사실을 기록하여 역사 본연의 모습에 접근했다. 독자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서문 / 부산대 삼국지문화기행 교재에서 인용.
오히려 삼국지연의 이후 시대에 발생하는 민담이나 파생 작품들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 기초하여 연의를 일부 변형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2.2.1. 모종강본
滾滾長江東逝水
장강은 넘실넘실 동쪽으로 흐르는데
浪花淘盡英雄
물거품처럼 사라진 영웅들이여
是非成敗轉頭空
시비승패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공으로 돌아갔구나
靑山依舊在
청산은 옛날 그대로인데
幾度夕陽紅
붉은 석양은 몇 번이나 지나갔나
白髮魚樵江渚上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는 백발의 늙은이
慣看秋月春風
가을 달 봄바람 익히도 보았으리
一壺濁酒喜相逢
한 병 탁주로 반갑게 만나서
古今多少事
고금의 수많은 사건들을
都付笑談中
모두 다 웃으며 이야기하며 붙여나보세
― 모종강본 서사(序詞)
삼국지연의에 대해 논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판본이 바로 모종강본이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모종강 부자가 엮은 판본으로, 현재 한중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고전소설의 특성상 모종강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삭제되거나 추가되거나 개편된 장면도 많다. 때문에 나관중본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판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리동혁 역시 모종강본을 비판한다.
전 버전에서는 황석영 삼국지가 나관중본, 즉 가정본을 저본 삼아 번역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가정본이 아닌 1, 2권까지는 모종강본 계열로 추정되는 현토 삼국지를 참조했다고 머릿말에서 밝혔고,, 3권 이후부터는 인민문학출판사본(이하 인문본)을 참조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로 3권에서 조조가 오환 정벌을 할 때, 그 우두머리가 묵돌이 아닌 답돈이라고 수정된 것과, 4권에서 인문본 이전에 회계의 능통이라고 한 것을 낙통이라고 고친 부분과, 오찬(吾粲)의 이름이 吳粲에서 吾粲으로 바르게 수정된 것 등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종강본이 삼국지연의의 품질을 떨어트린 저열한 판본인가 하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엔 여러모로 난점이 많다. 모종강본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소설로서의 매력이다. 나관중본에서 관우의 최후 장면은 싸우다말고 승천하는 것으로 처리되는 등 구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모종강본에서는 이를 소설에 맞게 각색했다. 특히 소설로서의 재미는 그 리동혁도 인정했다.
모종강본이 나온 다음 소설로서의 질이 훨씬 올라갔으니 말인데, 나관중본은 사실 소설로서는 어수선한 데가 많았다. 품격으로 보아 나관중본은 아직 구전 이야기의 냄새가 짙다면 모종강본은 글을 아는 사람들도 볼 만했다.
리동혁, <삼국지가 울고있네>
무려 20여 가지나 난립하던 삼국지연의의 판본들이, 나중에는 모종강본 기준으로 교통정리가 된 것만 보더라도 이 판본의 위력을 알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청대 이후 한자문화권에서 사랑받은 삼국지연의란 대체로 모종강본을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리동혁의 모종강 비판에 대해 삼국지연의 전문가인 정원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가정본을 나관중(원)본이라 호칭할 뿐만 아니라, 가정본이 모종강본보다 우수하다는 표현을 수차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모종강본 출현 이후 3백 년 동안 가정본은 어디 가고 모종강본이 독서계의 주도권을 잡았단 말인가. 가정본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종강본이 유일한 통행본이 되었다면 모종강본의 우수성이 입증된 것이다.
다만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모종강본에서 호오가 갈리는 것은, 소설의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나관중본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관중본은 '통속연의'라는 말 그대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인 이야기에 가까웠다. 즉 인물 개개인의 '멋짐'이라는 통속적인 면을 보여주던 소설이였다. 그런데 모종강은 여기서 강한 주제 의식을 넣기 위해, 촉한에는 버프를, 위에는 너프를 가한 것이다. 때문에 나관중본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구시대적이고 케케묵은 가치관이 책에 배여버렸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모종강본을 좋아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이런 강력한 주제의식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황실과 같은 유씨라는 이유로 한의 적통을 자처하는 유비가 어딜봐서 선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 공화주의가 보급된 것도 아니기에 너무 가혹한 잣대일 순 있다. 그리고 위선적이라고 비판도 많이 받지만 작중에서 그나마 주인공이라고 현대가치관으로도 긍정적인 인덕을 내세우는 군주는 유비 정도고 조조라고 딱히 민중을 위하는 혁명가도 아니다. 또 위에서도 나온 얘기인데 이러니 저러느니 해도 한때 엄청 격하된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시작은 이 삼국지연의이고, 모종강본이라고 이걸 아예 죽여놓지는 않았다. 당장 조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유명한 여백사 에피소드가 나오는 4화에서 모종강의 서시평을 보자.
조조가 백사 일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수였으므로 양해해줄 수 도 있다. 그러나 백사까지 죽이는 데 이르러서는 그 악독함은 극에 달했다. 그래놓고서는 다시 "차라리 내가 남을 배반할지언정, 남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도록 하겠다"고까지 말하는데, 독자들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를 나무라고 욕하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천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감히 입을 열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일단 이 말을 뒤집어서 "차라리 남이 나를 배반하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배반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듣는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대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조조의 이 두 마디 말을 몰래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조조는 말과 마음이 일치한 소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무리들은 입은 옳아도 마음이 글러서, 그 말과 행동이 직설적이고 통쾌한 조조보다 도리어 못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다."
― 삼국지연의 4회, 모종강의 서시평-
감히 말하건데, 과거 왕침의 위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종강의 이 평가를 능가하는 해석이 나왔던가? 아니 오히려 현대의 조조 재평가들이라는 것들이 나관중과 모종강이 수백 년 전에 짜놓은 그물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는 꼴이 아닌가?
한편 모종강본의 특징 중 하나는 각 화마다 실린 서시평들과, 본문 중간중간에 적혀있는 협평들이다. 서시평은 각 화에 대한 모종강의 감상이고, 협평은 적절한 해설과 농담이 섞인 문장들이다. 1화의 몇몇 협평들 예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협평은 괄호 안에 굵게 표시)
건녕 2년 4월 보름날, 황제가 온덕전에 나와 옥좌에 앉으려고 할 때 전각 모퉁이로부터 광풍이 일더니 푸른 구렁이 한 마리가 대들보 위에서 스르르 내려와서 옥좌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백사(白蛇)를 베어죽인 후 한나라가 일어났는데, 청사(靑蛇)가 나타나자 한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청사와 백사가 멀찍이서 서로 대(對)를 이루고 있다.)
광화 원년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일이 있었다.(이 징조는 더욱 환관들에게 들어맞는 것이다. 남자가 거세를 당하는 것은 곧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환관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은 곧 암컷이 또 수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황제는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장양을 높여서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했다.(이러한 장씨 아비가 있으므로, 자연히 장각 등 장씨 형제 세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당주(황건적)는 곧장 궁중으로 가서 거사계획을 고해 바쳤다.(환관은 반대로 첩자가 되고, 첩자는 반대로 자수를 하는데, 이를 통해 내부의 도적이 바깥의 도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덕 曰: 나는 본래 한 황실의 종친으로 성은 유, 이름은 비라고 하오. 지금 들으니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는데, 도적들을 깨뜨려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뜻은 있으나 다만 내게 힘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서 길게 탄식을 했던 것이오."
장비 曰: "나에게 어느 정도 재산이 있으니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 모아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해보는 게 어떻겠소?"(결국 재산이 있는 사람은 큰일을 하기가 쉽다.)
황제는 대장군 하진을 불러서 군사를 동원하여 마원의를 잡아다가 목을 베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봉서 등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하옥시키도록 했다.(왜 즉시 죽여 버리지 않는가?)
또한 탐관오리 독오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다가 트러블이 일어나고는 장비에게 매질을 당하는 유명한 에피소드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기도 했다.
독오가 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했다: "네가 황제의 종친을 사칭하면서 공적을 거짓으로 보고하는가? 이번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린 것도 바로 너 같은 엉터리 관리들을 가려내서 퇴출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독오가 사정했다: "현덕공, 제발 날 좀 살려주십시오!"(내가 어찌 감히! 나는 본래 황제를 사칭하고 공적을 거짓 보고했던 사람인데 어찌 감히 공을 구해줄 수 있겠는가?)
현덕은 본디 마음이 인자한 사람인지라 급히 장비를 꾸짖어 매질하는 손을 멈추도록 했다.
즉 협평의 용도는 나무위키의 주석 및 취소선과 비슷하다. 권선징악적 주제라는 평 때문에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협평의 문체는 매우 유쾌하고 농담이 많은 편이다.
2.3. 한족 민족주의를 담은 서사인가?
김운회는 2003년에 장정일, 서동훈과 공저한 삼국지 해제에서 연의가 한족 민족주의 서사를 담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연의가 의도된 정치적 프로파간다, 반외세적인 성격을 띈 민족주의적 서사라고 볼 근거는 없다. 우선 연의에 영향을 준 삼국지평화는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 때 유행했다. 황실과 주군에 대한 충성과 권신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고대부터 중국의 전통적 관념이었고,이를 굳이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구도에 끼워맞출 필요나 재료가 없다. 왕조 사회서 찬탈자가 이야기의 악역 되는건 반외세 민족주의와 상관없는 이야기다. 조조가 이민족인 것도 아니고, 찬탈자 악역 세팅이 딱히 원명 교체기라 그런 것도 아니다. 찬탈자가 악역이 되는 세계관이 유학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걸 반외세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왕=국가는 맞지만 그게 민족하고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나관중이 연의에서 그걸 의도한 정황도 없고 유교의 국가 개념은 현대 민족 관념처럼 특정 혈통이나 역사, 언어, 문화에 기반한 민족국가 개념과 다르다. 그래서 조조가 악역이어도 굳이 외래민족으로 세팅될 필요가 없고 한 외부 피가 섞인 왕조인 당이나 진(한나라 이전)도 정통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민족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개념은 근대의 창작품(논의의 여지는 있지만)에 가깝고 삼국지연의는 전근대인 원명 교체기 때 나온 소설이라서 근현대에 부각된 한족 민족주의와 거리가 멀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화는 혈통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오랑캐여도 예 받아들이면 중화가 되는 개념이고 삼국시대 이전인 이위공문대나 진, 당의 정통 왕조 인정에서 보인다. 즉 연의의 서사가 왕조의 정통성 개념에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근현대 민족주의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다. 서양에서 중화와 가장 흡사한 관념은 로마 제국 계승 관념인데, 두 관념의 특징은 그 계승이 문화적 이념적 개념이지 역사적 혈통적 개념이 아니며, 민족과 달리 외부 혈통집단에 열려 있는 개념이었다. 촉한정통론은 동진연간부터 나타났는데, 이는 북방민족의 침공 보다는 연달아 터지는 선양을 빙자한 찬탈 행각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다. 삼국연의도 북방민족의 비중이 극도로 약하다보니 한족 민족주의 경향이 있다고 볼만한 요소가 없고 중심되는 사상은 찬탈자에 대한 대항일 뿐이다. 모종강 평본(評本)은 최근에는 정통, 천하, 대의명분 등의 해석을 두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시기에 따라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삼국연의는 청대 금서였지만(판본에 상관없이), 워낙 재미있다보니 널리 유통되었고, 단연 모종강 평본이 인기였다. 느슨한 금서였던 셈인데, 만약 연의 속에 이민족을 배척하자는 의도가 있었거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면 적어도 청나라 중기까지 책이 유통되기 힘들었다. 위촉오가 벌인 전쟁은 한족끼리 대의명분을 놓고 벌인 것인데, 이 안에 이민족을 설정해 읽는 것도 좀 이상하다.
2.4. 비극적 성격
삼국지연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비극 작품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謀事在人成事在天, 모사재인성사재천)
제갈량이 연의 103회에서 호로곡에 갇힌 사마의가 살아남자 탄식하며 한 말.
사마염이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결국 유비, 조조, 손권 등 모든 영웅들의 노력이 대부분 허사로 끝났음을 보여주며, 이는 연의 맨 앞에 나오는 '합해지면 나뉘고 나뉘면 합해지기 마련'이라는 말과 수미상관을 이루기도 한다. 삼국지연의의 마지막은 연의의 모든 줄거리를 되돌아보는 "고풍(古風)"이라는 장편 시로 마무리되는데, 마지막 수인 뒷 사람들 탄식하며 공연히 가슴 설레네!(後人憑弔空牢騷)는 상당히 허무주의적으로 느껴진다. 사실 처음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실패하는 영웅들의 최후를 보면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데,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비극 작품들과 비극 공연들도 그렇고, 옛사람들은 비극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실제로 유비의 촉한은 명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어 망해버리고, 조조의 위나라는 힘은 강했지만 찬탈로 건설된 나라인 만큼 신하였던 사마氏에게 무력하게 찬탈당한다. 작중 묘사를 보면 헌제가 동한을 빼앗기는 모습과 비슷하게 묘사하는데 아예 사마소가 "너희도 한에게서 찬탈했잖느냐"면서 빈정거리는 걸 보면 가히 역사는 반복된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오나라도 결국엔 세력이 밀려서 멸망한다.
중국 현대 정치사상사 전공 학자인 피터 R. 무디 주니어는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nd Popular Chinese political thought"라는 글에서 이 엔딩과 전체 구성을 보고 시니컬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건 삼국지연의라는 문학 작품에 드러난 심성에 대한 평가다. 이는 동양의 군담과 서양의 기사 이야기들은 그 테마가 좀 다른 데서 기인하는 평가로, 삼국지에 대해 서양식 기사 이야기를 일컫는 단어인 Romance를 붙여 번역하긴 하지만 서양식 기사 이야기가 강적, 특히 이교도와 맞서 싸우며 기사도를 지켜내는 절대선에 가까운 용사를 칭송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동양식 군담은 대개 권력다툼과 영웅들의 활약이 긴 역사 안에서 갖는 본질적인 허망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악 대립에 익숙한 서양인들이 선악의 구별이 희미하고 선도 악도 세월 속에서 스러져버리는 동양식 세계관을 염세주의적이라고 느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인생무상을 아주 잘 나타냈다고 평가받는 명문으로 시작하는 헤이케모노가타리나 뒷사람들이 영웅들을 추억하는 쓸쓸한 이야기라 강조하며 시작하고 끝나는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서양의 기사로맨스는 '선악구분이 확실하고 절대선을 칭송', '동양식 군담은 허무주의'라는 이분법적 분류는 지나친 감이 있다. 동양 군담소설만 해도 결말이 정해진 역사 군담 소설이 아니라, 창작 군담 소설(유충렬전 같은)들은 서양식 기사 이야기와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면도 꽤 많다. 거기다 역사 군담 소설도 정사가 해피엔딩이면 당연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정사 삼국지부터 서진의 승리로 끝나고 심지어 서진조차 자기들의 병크와 소빙하기의 발생으로 인한 남북조 시대의 서막으로 순식간에 망해서 자동으로 비극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기사전설도 새드 엔딩과 허무한 성격을 띄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중세 유럽 기사 로맨스의 대표격인 아서 왕 전설만 해도 아서 왕이 자식인 모드레드의 반역으로 목숨을 잃는 새드 엔딩으로 끝나며, 그 외에도 기사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나 사랑등을 노래하는 전설이나 문학은 꽤 많다. 역시 대표적인 기사 문학인 니벨룽의 노래도 선악 구분따위는 없으며, 마지막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 정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
3.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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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건적의 난, 도원결의(1회~2회)
후한 말, 십상시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며 기강이 문란해지자, 백성들은 점점 불만을 품기 시작하며 전국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이런 가운데 태평도의 교주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발생한다. 황실의 먼 후손인 유비는 관우, 장비와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하고 황건적 토벌을 돕기로 한다. 유비, 관우, 장비 3형제를 비롯한 영웅 호걸들의 활약 덕분에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미 조정의 지방 통제력은 붕괴 직전에 도달했다.
• 십상시의 난(3회)
서기 189년, 수도 낙양에서는 영제가 죽고 외척과 환관 사이의 정권 다툼 끝에 십상시의 난이 발생하였다. 군벌 동탁은 외척과 환관이라는 양대 세력이 없어지는 바람에 공백이 생긴 권력을 장악한 후, 스스로를 상국이라고 칭하며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르니 황실의 정통성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 반동탁 연합과 군웅할거(4회~19회)
이런 동탁의 행위에 각지의 제후들이 원소를 중심으로 서로 연합하니 이를 반동탁연합이라 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제후들은 서로의 이권 문제 때문에 대립하기 시작하여 결국 동탁과 싸우기는커녕 자신들끼리 서로 싸우게 되어 연합은 해산된다.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며 폭정을 계속하다가 초선을 이용한 왕윤의 이간계에 당해 여포에게 처단된다. 그 후 여포는 이각·곽사에게 밀려 장안에서 쫓겨나며 왕윤은 이각·곽사에게 살해당했다. 연합에 참여했던 제후 중 한 명인 손견의 아들인 손책은 양주(강동)에서 독립하며 원술은 황제를 칭했다가 몰락했다.
• 동승의 조조 암살 미수사건, 관우의 천리행, 관도대전과 조조의 하북 장악(20회~24회, 25회~29회, 30회~33회)
그러던 중에 반동탁 연합에 참여했던 제후 중 하나인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여포, 원술, 도겸 등 여러 군벌을 정벌해나가며 권력의 입지를 다진다. 동승은 헌제의 밀명을 받들어 유비를 끌어들여 조조를 암살하려 했으나 들켜 일족이 모두 처형당하며, 유비도 조조에게 패하며 원소에게 의탁했다. 관우는 유비 가족의 안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장료의 설득을 받아들여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원소의 장수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벤 뒤 다시 유비에게 돌아간다. 장비는 여남에서 머물다가 유비·관우와 합류하며 공손찬이 멸망한 뒤 떠돌던 조운도 유비의 부하가 된다.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원소와의 일전일퇴의 사투 끝에 승리를 거둔다. 얼마 후 원소가 죽고 원담, 원희, 원상이 내분을 벌이자 조조는 원씨 형제를 모두 멸망시키고 하북을 제패하면서 최강 세력으로 자리잡는다.
• 삼고초려, 적벽대전(34회~40회, 41회~42회 43회~50회, 51회~57회)
그 동안 유비는 새 근거지였던 여남이 조조에게 함락되자 유표의 객장이 되었으며, 그 와중에 사마휘와 서서의 추천으로 재야에 숨은 인재 제갈량에 대해 알게 된 유비는 세 번이나 제갈량의 거처를 찾아가는 수고를 들여 제갈량을 영입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받아들인 유비는 유표 사후에 손권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군과 싸워 적벽대전의 승자가 되어 형주 남부의 4개군을 차지한다. 유비는 손책의 동생 손권과도 동맹을 맺으며 손권의 여동생을 새 아내로 맞으나 유비와 제갈량의 야심을 경계한 주유는 제갈량과 지략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밀리던 중에 조조가 차지했던 남군을 공략하다가 입은 부상+제갈량과의 지략 싸움에서 밀린 화병이 도져 요절한다. 주유 사후에 노숙은 유비와의 동맹을 계속 유지했다.
• 마초와 조조의 싸움(55회~56회)
조조는 허도에 있던 마등과 그 아들들인 마휴, 마철을 주살하지만 량주에 있던 마초는 복수전을 시도한다. 하지만 가후의 반간계에 밀려 패하고 권토중래를 노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한중의 장로에게 의탁한다.
• 유비 입촉, 합비 공방전, 한중 공방전(60회~65회, 66회~69회, 70회~73회)
유비는 익주로 들어가 유장을 몰아내고 익주를 새 근거지로 삼았다. 입촉 때 종군한 참모 방통이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장로를 몰아내고 한중을 차지한 조조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며 한중왕으로 즉위한다. 한편 손권은 합비를 공략하지만 장료가 이끈 위군에게 패한다.
• 형주 공방전, 조조의 죽음, 후한 멸망(74회~77회, 78회~80회)
그러나 유비는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형주 문제로 손권과 크게 대립하게 되고,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는 위와 오의 협공을 받으며 여몽과 육손의 계략에 당해 전사한다. 얼마 후 여몽과 조조는 차례로 세상을 뜨고,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받아 위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다. 이를 찬탈로 여긴 유비는 익주에서 한나라의 부활을 선포하며 촉한을 세운다.
• 이릉대전, 도원종언(81회~86회)
유비는 복수전을 준비하지만 장비가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는 불상사를 겪고, 결국 이릉대전에서 육손이 지휘하는 오나라 군대에게 대패하면서 막대한 전력손실을 입는다. 이로 인해 제갈량이 세운 천하삼분지계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유비는 성도로 돌아오지 않고 백제성에서 머물다가 병사하고, 제갈량과 조운에게 유선을 보필해 줄 것과 한을 부흥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 오로침공, 칠종칠금(86회~90회)
유비가 죽자 조비는 이릉대전 때 칭신한 손권을 끌어들인 뒤 맹획, 가비능과 연계하여 촉을 공격하지만 제갈량은 등지를 보내어 오와 화친하고 가비능은 마초를 보내서 막았다. 조비는 오나라를 공격하지만 정봉, 서성에게 패하며, 제갈량은 칠종칠금으로 맹획의 항복을 받아 배후 위협을 없앴다.
• 제갈량의 북벌(91회~104회)
제갈량은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전쟁 수행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위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맞수로 떠오르며 명성을 쌓으며 오의 손권은 스스로 황제가 되며 삼국정립 구도가 자리잡는다. 북벌 때 제갈량은 위나라 장수 출신인 강유를 등용하며 병법이십사편을 전수했다.
• 사마씨의 위나라 장악, 강유의 북벌(105회~115회)
제갈량 사후, 제갈량의 북벌을 방어해냄으로써 입지가 강력해진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통해 위의 권력을 장악한다. 강유는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다시 시작하지만 등애와 같은 위나라 장수들이 분전한 탓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에서는 손권이 세상을 뜬 뒤 손량, 손휴로 황제가 바뀌며 손준, 손침이 전횡을 펼치다가 손휴에게 처단된다. 위에서는 관구검, 문흠, 제갈탄이 사마씨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하며, 황제 조방, 조모도 사마사, 사마소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다가 폐위당하고 살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