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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첝님께서 스탈린의 측근들에 대해 올리셨으니, 저는 히틀러의 측근들에 대해 올려보겠습니다.
히틀러에 대해선 스탈린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잘 알려진 부분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그래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약간의 상식 겸 해서 히틀러의 주요 최측근 몇 명만 소개해보겠습니다.
루돌프 헤스(1894~1987)는 한 때에 아돌프 히틀러의 부관 겸 제국 부총통이였던 인물로, 실권은 거의 미비했으나
명실공히 제 3제국의 2인자였습니다.
맥주홀 폭동에도 가담하였고, 폭동이 실패로 끝나 히틀러가 감옥에 가자, 감옥에서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받아적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헤스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기행을 저지르는데, 바로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본인 멋대로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으며, 그 목적은 영국과은 평화 협상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였다고 합니다.(1941)
당연히 대영 제국에서 이것을 받아드릴 리가 만무했고, 그는 결국 포로로 붙잡혀, 종전 때까지 영국에 수감된 후에
훗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계속 감옥살이를 하다가 1987년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가장 최근까지 살아남은 나치입니다.
그의 사망 이후, 네오나치들의 우상화를 피하기 위해 시신을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또한 그는 히틀러와의 동성애 의혹이 있는 인물인데, 살아 생전 히틀러가 그를 "나의 사랑러운 엠마" 라고 자주 불렀고,
당원들도 그를 '헤스 부인' 이라고 자주 불렀다고 합니다.
마르틴 보어만(1900~1945)은 루돌프 헤스의 부관이였던 사람인데, 1941년, 맞선임이였던 헤스가 갑자기 영국으로
날아가 버리는 기행을 저지르자 부총통 자리를 물려받아, 부총통이 된 인물입니다.
회계 관리에 매우 능하여, 제국의 모든 금융을 그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또한 루돌프 헤스의 기행 이후
제국 내에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고, 오만방자하고 거만하게 행동했으며, 자신의 생각과 명령을 히틀러의 이름을
팔아서 내리기도 했으며, 1943년 이후에는 완전히 당을 장악하여, 도데체 누가 총통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며, 실제로도 1943년 이후, 제 3제국의 실질적 통치자를 보어만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할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당원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1945년, 패전 막바지 당시,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를 반역자로 몰아, 실각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히틀러의 자살 이후, 독일군이 아직 남아 있었던 노르웨이로 도망을 치려다가 행방불명 되었으나, 뒤늦은 1972년
그의 유골이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이 확실시 되었고, 네오나치들의 우상화를 막기 위해, 시신이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히틀러의 측근들 가운데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며, 나치 독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인물입니다.
그는 나치의 선전장관으로 뛰어난 언변과 그리고 라디오에 의한 언론 장악과 통제를 귀신같이 하였던 인물이며,
"나에게 세 마디의 단어만 주면, 누구든 반역자로 만들 수 있다", "99%의 거짓과 1%의 진실이 더욱 효과적이다" 라는
그의 명언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집시, 공산주의자
등과 함께 장애인을 절멸의 대상으로 규제하여 탄압하는 데에 크게 동조를 하였으며, 공격적이고 야수적인 나치의
잔인한 사상은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히틀러에게 충성했던 사람으로, 히틀러가 자살하자, 하루만에 아내와 자식들은 자신의
손으로 죽인 후에, 본인도 자살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8세였습니다.
빌헬름 카이텔(1882~1946)은 제국의 참모총장 겸 육군 총사령관으로써, 블롬베르크의 스캔들이 있었던 1937년 이후
계속 제국의 모든 군권을 쥐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없었으며, 바르바롯사 작전 이후, 히틀러가 군에 대한 모든 통수권을 쥐자 히틀러에
대한 반대의견을 전혀 내지 않고, 오로지 히틀러의 명령에만 복종하였기 때문에, 아첨꾼이라며 동료 장군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발키리 작전 실패 이후, 국방군 전체(육해공 모두)에 로마식 경례를 도입하려는 운동에도 힘썼으며,
히틀러의 최측근들 가운데에 히틀러에게 가장 많이 아첨하고, 알랑방귀만 뀌었던 그런 인물입니다.
패전 이후, 독일군 대표로 서방 연합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헤르만 괴링(1893~1946)은 제국의 공군 총사령관이자, 산림부 장관, 경제 계획부 장관 등 여러가지 직책을 맡은
인물로써 '실질적인' 제국의 2인자였던 인물입니다. 그의 계급은 무려 대원수(6성장군)
그는 처음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내무부 장관이였는데, 그 때에 게슈타포라는 경찰 조직을 처음 창제하였으며,
이후 항공부 장관이 되어,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폐기된 독일 공군을 재건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허영심과 자만, 마약 중독, 사치는 그를 겉잡을 수 없이 타락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것이 개인이 아닌 제국
전체에 악영향을 끼쳤고,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오로지 공군만으로 6개월안에 영국을 항복시킬 수 있다" 라고 선언하였으며, 또한
"제국의 영토에 한 발의 폭탄이라도 떨어지면, 나를 멍청이(마이어) 라고 불러도 좋다" 라고 까지 호언장담을
하였으나, 영국은 전혀 항복하지 않았고, 독일 공군이 영국을 폭격한 것만큼, 영국 공군도 독일을 폭격하였습니다.
그의 망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반드시 제 6군을 보급하겠다" 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제국의 안위보다 자신의 부귀영화와 사치를 더 중요시 여겼으며, 항상 요란한 군복에 수많은 훈장을 달고,
지휘봉을 들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점령지에서 수많은 예술품들을 탈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애완동물로 키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53세의 나이로,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진 후, 사형되기 하루 전에 음독자살 하였습니다.
에리히 레더(1876~1960)는 해군 총사령관으로, 히틀러의 해군 재건 계획을 열렬히 지지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제 2제국 시절의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다음으로 유일하게 해군 대제독(6성 제독)에 오른 인물로써
베저위붕 작전을 계획하였고, 그것을 성공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영국과의 해전에서 여러 차례 패하였고, 바렌츠 해전(1943) 패배 이후, 히틀러는 그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으며, 결국 후임이였던 카를 되니츠에게 제독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입니다.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84세를 일기로 최후를 맞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임하기 전에, 히틀러에게, 해군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긴 헤르만 괴링을 겨냥하여
"총통 각하, 제발 괴링 원수로부터 제국의 해군을 지켜주소서!" 라고 말한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카를 되니츠(1891~1980)는 에리히 레더의 뒤를 이어 독일의 해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히틀러의 자살 이후
매우 잠깐이지만, 제국의 총통을 지냈던 인물입니다.(당시의 경례 구호는 '하일 되니츠' 였을까나요?)
그는 영국의 로열네이비가 가장 무서워했던, 유보트의 총사령관이였으며, 울프팩 전술을 고안해내었고, 그 덕분에
독일 잠수함대가 수많은 영국의 함대를 침몰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을 합니다.
패전 때에는 항복을 지연시키는 시도를 하다가 실패를 하였고,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다가
풀려나고 나서 심장병으로 8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하인리히 힘러(1900~1945)는 제국의 치안장관이자, 게슈타포 통치자, 친위대의 총사령관이였습니다.
그는 나치당원 중에서 가장 악질로 손꼽히는 사람으로, 유대인과 집시,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장애인, 여호와의 증인
등 '열등인자' 들을 청소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고, 제국의 '실질적인 3인자' 였습니다.
1936년에 형사경찰의 장관이 되었고, 이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보안경찰과 형사경찰을 합치고자 하는 시도를
합니다.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이것은 평범한 전쟁이 아닌, 절멸 전쟁이 되어야만 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으며,
미개한 슬라브인은 살 가치가 없으니 포로로 잡더라도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죽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전쟁 내내
친위대를 동부 전선으로 보내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으며, 친위대 징병 활동도 하였습니다.
그는 패전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자, 헌병으로 위장을 하여 도망을 치려 시도를 하지만,
곧 발각되었으며, 사형되기 직전 45세의 나이로 자살합니다.
그는 중세 시대에 큰 관심을 보였는지, 중세 시대와 당시(20세기)를 비교하고 비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마법이나
심령술, 프리메이슨 등을 믿고 그에 대한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매우 동양적인 외모를 지녔는데, 자신의 얼굴은 생각도 안 하고, 후임경찰인 하이드리히를 몽골인처럼
생겼다고 비웃곤 했다고 합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904~1942)는 게슈타포와 보안방첩부를 관리한 사람으로, 장검의 밤(1934)에서 두각을 드러난
인물로, 인종 청소에도 크게 가담하였던 매우 잔인한 인물입니다.
1942년 체코 총독대리가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지 내의 유대인과 집시 등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으며, 그로
인해 '프라하의 도살자', '피 묻은 사형집행자' 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그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1942년, 38세의 나이에 체코슬로바키아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게 됩니다.
너무나 노골적인 인과응보였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893~1946)는 제국의 외교부 장관으로,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독소불가침 조약 외에, 독이일 방공 협정, 뮌헨 협정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 때 영국 대사로도 활동하였는데,
영국 조지 6세 앞에서도 로마식 경례를 하는 등, 매우 열성적인 나치당원이였습니다.
패전 이후, 연합군으로부터 도망치려다가, 체포되어 53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는 히틀러의 최측근들 중에서 가장 어렸던 인물로, 제국의 군수장관이자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세계의 중심이 될 도시라는 '게르마니아(베를린)' 를 만드는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932년 요제프 괴벨스의 소개로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 만났을 때에, 베를린의 리모델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 군수장관이였던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인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으며, 군수장관으로써의
능력도 탁월하여, 1942~1943년 이후 연합군이 지속적으로 독일에 폭격을 가하였으나, 폭격으로 인한 손실분을
단시간에 메꿀 정도였으며, 전쟁물자와 보급품의 생산량이 오히려 늘어날 정도였습니다.
전차와 항공기 생산량이 토트가 재임한 시절에 비해 두 배나 늘어났고, 유보트의 생산시간은 1년에서 무려 2달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슈페어의 행정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1944년, 바크라티온 작전 및 오버로드 작전으로 인한 독일의 패전을 막을 수는 없었고, 슈페어의 능력에도
한계가 찾아왔으며, 1944년 4월에 보어만과 괴링, 힘러의 모함으로 군수장관에서 물러나고야 맙니다.
패전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나치의 만행을 반성한 유일한 나치당원이였으며,
1981년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버립니다.
제 3제국을 알고 싶은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엇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잘못된 정보 있으면, 지적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카이텔(예스맨), 요들(딸랑이, 작전부장) 크랩스(참모총장) 부르크 도르프(수석부관) 빼고 다 나가
이글에도만 봐도 뭔놈의 군부가 군대만 하는게 하니라 경제,정치,사회까지 다 싸그리 장악했내요. ㄷㄷㄷㄷ
역시 능력면에서 히틀러는 스탈린에 비할 바가 아님
스탈린은 커녕 무솔리니에도 비할 바나 될까요? 허허
슈페어는 참 다시봐도 ㄷㄷ하네
카이틀 요젧 카맄스 운뿥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