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내가 안 것은 백일이 지나서였다. 백일홍 꽃이 피었다 질 때까지, 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조용히 그녀와 이별할 준비를 한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1
어쩌면 코끼리가 들어있을지도 몰라. 뚜껑을 열면, 잘못 바른 시멘트벽처럼 꺼칠꺼칠한 피부를 지닌 코끼리가 벌떡 일어나서 푸우우우 하고 울지도 몰라. 그러나 검은 가방의 입은 굳게 닫혀져 있다. 직사각형의 검은 가방. 딱딱한 하드 케이스 위에 가죽으로 덧씌워진 그 가방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누가 그곳에 가방을 갖다 놓은 게 아니라, 원래 가방이 있던 자리에 마루가 깔리고 벽이 세워져 실내공간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지하계단을 내려가, 탱고 바 오나다의 문을 처음 열었을 때 내가 보았던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이었다. 오나다의 천정에는 따뜻한 달이 여러 개 빛나고 있다. 배관을 드러낸 높은 천정에는 빨갛고 파랗고 노란 조명등이 달려 있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천정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실내의 마루바닥에 쏟아지는 불빛은 온전히, 조선 백자 달항아리 같은 둥근 등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강렬하지 않았지만 밝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의 선술집 테이블 위에서 번쩍이던 금화 같은 달이,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고 백일동안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그것은 단 한 번도 내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고백한다.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한 게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없었다. 분명히 있었지만, 없었다.
2
오나다 바와 마주 보고 있는 입구 쪽 벽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나란히 두 개의 검은 스피커가 서 있다. 직사각형의 기다란 그 스피커에서는 항상 탱고가 흘러나온다. 탱고 아니면 아무것도, 라는 뜻의 [탱고 오나다]처럼, 탱고 아니면 아무 것도 흘러나오지 않게,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스피커에서는 언제나 탱고만 흘러나온다.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시디 플레이어와 연결된 선을 통해 다른 음악이 흘러 들어온다면 스피커가 그것을 튕겨버리며 거부할 것만 같다.
검은 스피커의 무릎 부분에서 푸른 불빛이 빛나고 있다면 그것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반도네온의 흐느낌을 부추기는 듯한 바이올린, 그것들과 스크럼을 끼고 비린내 나는 항구의 선술집을 향해 달려가다가, 때로는 등에 얹힌 손을 풀고 혼자서 바다를 바라보는 피아노, 또는 낮은 목소리의 베이스들은 대부분 스피커 아래 마루바닥에 먼저 부딪쳤다가 어떤 것들은 천정까지 튀어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리의 대부분은, 상체는 붙어 있고 하체는 떨어져 있는 이상한 짐승들의 세포 속으로 흡수된다. 가슴과 머리는 붙어 있고 하반신의 네 다리는 각각 살아서 움직이는 이상한 짐승을 본 적이 있는가? 탱고 바 오나다에 오면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의 가슴을 밀착시킨다.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쇠붙이처럼, 영혼이 이끌리는 상대를 찾아 서로의 머리와 가슴을 밀착시킨다. 그러나 절대, 자신의 두 다리를 맡기지는 않는다. 두 다리는 굳건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오나다에서 전시회가 개최된 적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땅게라들 네 사람이 모여 전시를 했는데, 모두 탱고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었다. 유화와 동양화, 에스키스 등등의 소품들, 10호가 채 되지 않는, 어떤 것들은 2,3호 크기의 작은 그림들이 세 개의 벽에 빼곡히 걸려 있었다. 그날 나는 한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는 붙어 있고 하체는 분리된 그림이었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구름 위에서 길게 엉켜 있고 저 낮은 지상에서는 네 개의 다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 다리들은 각각 살아있다고 힘 있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하나가 되어 있지 않으면 비극적인 몸짓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다가는 엉키고 쓰러지고 무너질 것임을 강렬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나는 상상한다. 나의 머리카락과 내가 같이 춤을 추고 있는 땅게라의 머리카락이 하나로 뒤엉켜 있고, 우리들의 발은 보이지 않는 저 낮은 지상에서 움직이고 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투명하게 읽을 수 있을까?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진행을 원하는지, 혹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혹은 진행을 멈추고 제 자리에서 가만히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지, 나는 투명하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
오나다 마루 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다. 바가 영업을 시작하기 직전, 저녁 7시가 조금 지나서 다른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귀가를 서두르려는 바로 그 시간, 오나다의 지하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새벽부터 쌓여 있던 어둠과 그 속에 묻혀서 신음하던 외로움은 열리는 철문의 틈 사이로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천정에서 만월의 불빛이 내려오면 마루바닥은 다시 황금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나 오나다가 진정으로, 탱고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은, 스피커에서 탱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오나다는 오나다다.
3
왜 그랬을까? 나는 땅게라의 등에 얹은 손바닥에 힘을 주고 뒤로 진행하려는 그녀를 멈추게 한 다음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오른 발을 뒤로 한 발자국 빼고 왼 발을 왼쪽으로 크게 이동시킨다. 바로 그 살리다 2번 스텝에서, 그녀의 두 발이 오므라들기 직전 내 오른 발을 두 발 사이로 깊숙이 집어넣고, 무게 중심을 오른발로 옮기며 회전을 하며 땅게라의 간초를 유도한다. 목요일 누에보 탱고 시간에 배운 동작이었는데, 그 순간 땅게라의 무게 중심이 비틀거렸다. 내 상체가 그녀 쪽으로 기울어 땅게라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백일 뒤, 누에보 탱고 강사에게서 집중훈련을 받으며 나는 내 잘못된 동작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왜 중심이 흐트러졌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 회전 동작의 경우, 땅게로는 무릎을 구부리고 자세를 낮춰서 거의 머리 하나 정도를 땅게라의 몸 밑으로 내린 다음 회전을 해야 무게중심이 안정감 있게 잡히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땅게라의 무게 중심이 비틀거리며 몸의 균형이 깨지던 바로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검은 보자기를 둘러쓰고 웅크린 검은 개로 생각했었다. 컹, 컹, 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검은 눈을 말똥말똥 빛내며 그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이미 내 몸의 체중은 땅게라 쪽으로 쏠리면서 균형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황급히 균형을 잡아 앞으로 이동하면서 나는 조금 전에 본 그것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홀 안에서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LOD 규칙을 따라야 한다. 홀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돌린다고 해도 그것이 제대로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네 다리는 이미 입구 쪽 벽에서 이미 멀어져서, 바 가까이로 접근하고 있었다.
방향을 틀면서 나는 흘낏 스피커가 있던 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벽에 세워진 검은 스피커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것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았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은 그곳에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의 위치를 과시한 적도 없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우리 둘 사이의 교류에는, 깨달음이라는 표현이 갖고 있는 어떤 정신적인 만남, 그것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의 발견이다. 그것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눈이 맞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한 쪽만 상대를 바라본다고 해서 눈이 맞을 수는 없다. 왜, 그때 그것이 내 눈에 띄었을까?
탱고 오나다의 검은 가방.
4
왜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금요일 밤 12시의 동대문 시장이나 토요일 오후 강남역 사거리에서, 그 수많은 인파를 뚫고서도 백 미터 밖에서 어떤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특별히 눈이 좋아서가 아니다. 특별히 그 사람이 레게머리를 하고 있다거나 앵무새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독특한 차림새를 하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사람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 속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다.
초능력은 아니다. 그것은 집중력의 표현이고 깊은 관심의 발견이다. 어떤 대상에 무섭게 관심을 집중하게 되면 그 대상은 돌연 광휘로운 광채를 발산하게 된다. 물론 관심이 없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 광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나다 입구 쪽 벽에 세워져 있는 두 개의 검은 스피커, 그 왼쪽 스피커 옆에 낮게 웅크리고 있는 검은 가방이 내 눈에 발견된 것은 우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것이 내 눈에 띈 것은, 내 안의 무엇인가 그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그것 역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이 맞은 것이다.
5
그날은 우울했다. 저녁 7시 30분 오나다가 문을 열 때 첫 손님으로 들어가서부터 맨 마지막 손님으로 바에서 나올 때까지, 나는 오나다 문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탱고로 숨을 쉬었고, 탱고로 사유했으며, 탱고로 허기를 달랬다. 거의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땅게라가 있으면 다가가서 춤을 청했다.
보통 때는 땅게라에 다가가 춤을 청하기 전에 수 천만 번 망설인다. 이제 막 바에 들어온 처음 본 땅게라라면 혹시 초절정 고수여서 이제 겨우 탱고를 배운지 반년이 겨우 된, 그리고 탱고 바 오나다를 드나들기 시작한지 백일이 지난 초보 땅게로인 내가, 괜히 실레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고, 또 반대로 이제 막 탱고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 땅게라라면 같이 버벅거리는 커플이 되어 홀 안에서 엉거주춤 붙어 있는 것도 우스울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격이 예민하고 까다로울 것 같은 땅게라라면 가까이 가기가 어렵고, 주위에 춤 신청하는 땅게로가 수없이 대기하고 있으면 그 역시 먼저 다가가서 춤을 청하기가 힘든 것이다. 마음 편하게 춤을 신청할 수 있는, 그래서 간혹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는 땅게라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관상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그리고 동호회나 친구들끼리 같이 온 경우라면,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쉬는 동안에도 다른 땅게로들과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땅게라라면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 춤을 청할 수도 없다. 이것저것 머리 속에서 생각하다 보면, 결국 나는 오랜 시간동안 혼자서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커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보통 때는 그렇다.
그러나 그날은 이상했다. 내가 나를 알 수 없는 경우도 간혹 있는 법이다. 플로어에 함께 나가면 최소 3곡의 춤을 함께 추어야 한다는 탱고 바의 불문율에 따라 나는 땅게라들과 3곡의 춤을 추었다. 느낌이 좋은 땅게라들에게는 한 곡만 더 추자고 붙잡기도 했고, 음악이 끝나면 곧바로 벽에 붙어 있는 의자로 돌아와 앉기도 전에 아직 춤 신청을 받지 않은 비어 있는 다른 땅게라에게 다가가서 춤을 청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날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땅게라들과 춤을 추었다. 안데르센의 분홍신처럼 내가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붉은 내 탱고 슈즈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만 탱고 슈즈 위에 발목을 세우고 서 있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동화 속에서처럼 춤을 멈추기 위해서는 발목을 잘라야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였다.
어느 순간 홀을 바라보니까, 그날 함께 춤을 춰 보지 않은 땅게라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춤을 신청할 생각은 없었다. 일주일 전 나는 혼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춤을 청한 적이 있다. 아무도 그녀 주변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는 섬처럼 혼자 떨어져 있었다. 푸른 물살이 그녀 주변에서 일어났고 땅게로들은 그 물살을 두려워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한 걸음 전에 멈추고 고개를 숙이며 춤을 청했다. 그녀는 눈가의 주름을 슬쩍 찌푸렸다. 그리고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추고 싶지 않다고 빠르게 말했다. 나도 한 번 거절당한 땅게라에게 다시 춤을 신청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아니 그것보다는, 나의 소심함이 그런 방어벽을 만든 것이다. 그녀가 다리가 아플 수도 있고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게 같이 춤을 추기 싫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누구나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한 번 거절당한 땅게라에게 어떻게 다시 춤을 신청할 수 있겠는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살고 있는 변호사 에밀 캐식이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5천 명의 여성들에게 프로포즈를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인터넷 노컷뉴스를 통해 포탈사이트에 게재된 그의 사진을 보면, 그가 매우 신체건장한 남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재력 있는 유능한 변호사인 그가 지금까지 프로포즈 한 5천 명의 여성들은, 왜 모두 하나같이 그의 청혼을 거절했을까? 이런 질문에는 어떤 논리적인 이유만으로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하물며 춤 신청 한 번 거절당한 것이 뭐 그리 뼈 아픈 상처이겠는가.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아, 아, 그러나 지금, 상처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날은 그녀를 제외한 모든 땅게라와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6
내가 우울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외형적으로만 살펴본다면 그 날은 내가 탱고 바 오나다에 출입한 이후 가장 행복한 날이 되었어야만 했다. 단 한 사람의 땅게라만을 제외하고 모든 땅게라와 춤을 추다니! 있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분이 오셨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분의 사촌동생이라도 다녀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우울했다.
2달 전 아르헨티나로 주문해서 구입한 나의 탱고 슈즈는 빙글빙글 플로어를 돌며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탱고 슈즈 저 혼자서만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없었다. 나는 없고 탱고만 있고, 탱고만 있었으며, 탱고만 있었으니까, 계속 탱고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 때문은 아니다.
내가 우울한 이유는,
바로 그것.
가방.
검은 가방 때문이었다.
7
처음에 내가 우울한 이유를 나는 홀 내부에서 찾았다. 내가 춤을 거절당한 그 땅게라 때문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녀의 존재가 나의 내부에서 그만큼 커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징후는 없었다. 해부학 실습실에 들어간 외과의사가 예리한 칼로 사체의 곳곳을 섬세하게 자르고 살펴보듯이 나는 나의 내부를 해부해 보았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며, 그녀의 닉네임조차 몰랐다. 그런 것을 알고 싶은 욕망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땅게라 때문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를 찾아봐야만 한다. 그런데 가장 즐거워야 할 그 날, 나는 가장 우울했다. 춤을 추고 있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원인을 찾아보았다.
서로의 머리와 가슴에 몸을 기대고 추는 탱고의 핵심은, 집중과 몰입이다.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몰입이 될 수가 없다. 춤은 계속해서 추었지만 분리된 두 개의 가슴이 하나로 통하는 전율의 순간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원인이, 춤을 추다가 눈이 마주친 그것, 그 가방, 바로 그 검은 가방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8
언제부터 그 검은 가방이 그곳에 놓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 막, 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나는 LOD 라인을 따라 시계 역방향으로 춤을 추면서 스피커가 있는 벽 쪽으로 접근할 때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었다. 호흡을 들이쉬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는 듯, 생각에 잠긴 듯, 두 발을 모으고 긴 포즈를 둔 후 진행을 했다. 그때 같이 춤을 춘 땅게라들은 아마, 이거 새로운 해석인 걸, 하고 색다른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고, 이거 뭐야 빨리 진행해야 하는 데 지나치게 느리잖아, 아휴 답답해, 라고 속으로 가슴을 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오른 쪽 스피커를 지나 왼쪽 스피커 쪽으로 접근하면 땅게라들의 시선을 피해 그것을 쳐다보았다.
검은 가방.
슬쩍 먼지가 덮인 것으로 봐서,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도 가끔, 바의 문을 열면서 청소를 할 때 닦아주었다는 뜻이다. 적어도 검은 가방을 닦아준 사람은, 바의 주인이든, 일일 도우미이든,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손잡이에는 [KOREAN AIR]의 비행기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아르헨티나 부이노스 아이레스에서 먼 길을 여행했을 그 가방은, 그러나 지금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떠나고 싶은 것이다.
9
맞은 편 바의 장식장에 놓여 있는 낡은 반도네온과 크기가 비슷한 그 검은 가방 속에 애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검은 가방을 바라보았다. 가방 역시 그 커다란 검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몸의 균형을 잃고 땅게라 쪽으로 지구가 자전하는 축만큼 기우뚱거렸으며 땅게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땅게라가 양 쪽 눈썹을 가운데로 슬쩍 끌어당기자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생각났다. 홀에서 아직 춤을 춰 보지 못한 유일한 그녀, 그녀가 나를 거절했을 때의 그 표정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오나다 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사라져 버렸다. 화장실에 가거나 탈의실에 가거나 둘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화장실이나 탈의실 문이 열리고 나오는 사람은 다른 땅게라들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때, 나는 보았다.
검은 가방이 열리는 것을. 그리고 그 속에서 눈부신 황금의 드레스를 입고 걸어 나오는 그녀를.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나에게 손을 내민다. 구두 밑에서 딱딱하게 굳어진 어둠을 달빛이 따뜻하게 녹여준다. 나는 왼 손으로 그녀의 오른 손을 잡고, 내 오른 손을 그녀의 움푹 파인 등 쪽에 갖다 댄다. 그리고 탱고가 흘러나왔다. 피아졸라다. 망각(Oblivion). 나는 서서히 스텝을 움직인다. 검은 가방은 활짝 열려 있고, 우리 두 사람은 그 속으로 들어간다. 어둡지 않다. 차갑지 않다. 외롭지 않다. 가방이 닫힌다. 백일홍, 붉은 꽃잎 백 개가 진다.
0
탱고 오나다의 검은 가방을 발견한 사람은 이제 떠나야 한다. 누구에게나 그 가방이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 가방을 발견한 사람은, 떠나야 한다. 그러나, 어디로?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멋진 글입니다. 제 까페로 옮깁니다.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
가방안엔... 오나다의 심장이 들어있습니다... 궁금하면 청진기를 대보세요! -.,-;;
검은 가방은 오나다에 있는 반도네온 케이스에요.^^ 이미 아시고 계실지 모르지만....
DADA님 저 원스키타는 사진이요....배경화면으로 폼나게 깔고싶단말이져....그나저나 자리도 드려야할텐데...언제드려야하나...쩝...
멋진 글이네요, 탱고를 다시 추고 싶게 만드는 ~
..........
스피커 옆엔 선풍기와 에어컨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선풍기 바람이 좋아서 그곳을 지나칠 땐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카락이 날리면 왠지 하늘에 붕 뜬 기분이 들어요. 스피커 근처에서 머뭇거렸다면, 음... 이분 더워서 그러는 구나. 이렇게 생각 했을듯...^^ 검은가방이 진짜 있나 보네요. 확인해봐야겠네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