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황금 햇살이 맑은 하늘을 만들어낸다. 싱그러운 봄날은 아름답게 익어만 간다. 봄은 왠지 이렇게
신선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봄은 향기롭고 생기가 넘치며 힘이 솟아나는 계절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은 땅속으로부터 돋아나는
새싹과 나뭇가지에 피어나는 어린잎을 어루만져 준다. 무척이나 귀여운 모양이다. 무럭무럭 자라 이 땅을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도
한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향기로운 햇살은 정신이 몽롱한 필자를 사랑으로 포근히 감싸준다. 좋은 글을 써서 만인을 행복하게 해주면 참으로
좋겠다고 한마디 한다. 그 말 한마디가 왜 이렇게 부끄러울까? 더욱 분투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글 쓰는
탤런트(talent:재능)는 하느님께서 주셨지만, 그 글을 갈고 닦아 빛을 내는 것은 내 몫이다.
천년의 신라 문화가 고이 잠자고
있는 경주 남산을 송우 가족이 가는 날이다. 우리는 그곳에 가서 신라의 알지 못했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배워 올 것이다. 달리는 버스의
창틈으로 날아 들어오는 봄의 향기가 왜 이렇게 향기로울까? 길가엔 예쁘게 핀 벚꽃이 미소로 반긴다. 파릇파릇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나뭇잎과
새싹들은 생동감이 넘쳐난다. 신비로움을 간직한 봄의 향기가 이렇게 고속도로를 날아 다닌다. 어느새 달리던 버스는 서남산 주차장에 멈췄다. 경주를
수십번 다녀왔지만, 남산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왔다. 산행하려고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산에는 어떠한 문화재가 나를 반길까 하는 생각을
하면 괜스레 가슴이 설렌다.
우리는 남산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금오봉까지는 2.35km이다. 올라가는 오솔길 양옆은
우거져 있는 소나무에서 솔향을 그윽하게 뿜어내고 오른쪽으로 왕릉 3기가 나란히 있다. 이 왕릉을 삼릉이라 한다. 삼릉은 앞에서부터 신라 54대
경명왕릉, 가운데가 53대 신덕왕릉, 맨 뒤에 있는 것은 8대 아달아 왕릉이라고 한다.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왕릉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삼릉곡으로 올라가다 보니 제1사지 탑재와 불상이 나온다.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곳에 모아 정비하였다고 한다. 앉은 불상은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상이며, 옷 주름 조각이나 특별한 양식이 없어 시대를 알 수 없다. 또 한 점의 불상 조각은 여래입상이란다. 안타깝게도 허리 위와 발
대좌는 어디로 가고 없다. 옷의 주름 조각 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경주 남산 일원은 산 전체가 사적
제311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金鰲山:468m)과 고위산(高位山:494m)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40여개의 계곡으로 형성되어있다. 남산은 신라왕조의 영산이며 불교의 성지로 수많은 불교 유적을 통해 당시
신라인의 신앙 세계를 볼 수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이른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었으며,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불교 관련 유적 이외에도 남산에는
신라의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蘿井), 신라 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鮑石亭址), 서라벌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인 남산 신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이 간직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전설 설화들이 남산 곳곳에 깃들어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도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에 대해 적어본다.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해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해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가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 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 한
남신(男神)이였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 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 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웬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져온다. [참고문헌:경주시지]
삼릉계엔 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이 있다.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석조여래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 끈과 아래 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 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
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왼쪽 산등성이 바위 벼랑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선각의 여섯 부처님과
마애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그리고 남산에서 좌불로는 가장 큰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너무도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어 시간 관계로 자세히 감상하지 못하고 올라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아직 차가운 날씨다. 그런데 봄인데도 이마에선 땀방울이
떨어진다. 1km 정도 걸은 것 같다. 여기서 상선암까지 약 0.35km가 남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상선암에 도착하니 부처님 오신 날 연등접수로
분주하다. 대웅전을 둘러보고 또 걷기 시작했다. 홍권효 부회장은 회원들 추억을 만들어 줄 사진찍기 바쁘다. 정진학 산악 대장은 행여 회원들이
불상사가 일어날까 두려워 잠시도 안심을 하지 못한다. 고원진 감사와 정우진 회원이 한조가 되어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아름다운
천년고도 경주국립공원이란 안내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서 산 아래 넓은 농경지와 함께 경주의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진다. 건너편에는 망산 단석산
벽도산과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선도산 구미산 옥여봉 송화산 등 경주 시내가 가물가물하게 내려다보인다.
이곳 삼릉계에서
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 磨崖觀音菩薩像)을 감상해 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높이 약 1.5m이다. 통일신라 시대 8세기 중엽 이후
불상으로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 새김 되어있다. 얼굴은 풍만하며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썼는데, 보관에는
작은 불상이 따로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 주위에는 주칠(朱漆)의 흔적이 남아 있어 붉은빛을 띠고 있으며, 작게
표현된 입가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뚜렷하다. 관음보살은 연꽃으로 표현된 대좌 위에서 있는데 얇게 조각된 옷자락은 허리 아래까지 내려와 양다리에
U자형으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유형문화재 158호로
지정받은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삼릉계에 있다. 거대한 바위벽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남산에서 2번째로 큰 불상이다. 얼굴의 앞면은 고부 조로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바위를 투박하게 쪼아 내었다. 짧은 목에 삼도는 없고, 건장한 신체는 네모난 얼굴과 잘 어울린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을 짓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불상의 신체는 거칠고 억세게 선각하였고, 좌대는
부드러워지다가 희미하게 버린 듯하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 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엿다.
입체감 없는 신체표현, 거칠고 치졸한 옷 주름 선 등으로 보아 9세기 불상 양식을 반영하는 거대 불상이다.
드디어 남산의 두
봉우리 중 금오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반가움이 솟아오른다. 천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금오산 정상이다. 늘 정상에 올라오면 정상 석에 반가움의
입맞춤을 한다. 여기서도 외에 없이 다른 산 정상에서 하던 입맞춤을 했다. 천년간 헤어졌던 애인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애인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갑다. 김종배 회장이 바라보곤 빙그레 웃는다. 내가 정상까지 올라와 기쁘다는 반가운 마음에서 웃는 것 같다. 늘 보아도 멋진 명예
회장이다. 기념사진도 찍어 준다. 송우산악회는 이렇게 멋진 분들이 모여있는 산악회다. 한참을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경주 일원을 감상했다.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경주는 역시 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그중 남산은 그 자체가 신라인들에게 절이요, 신앙으로 자리한다. 놀랍게도 산
전체에 문화재가 산재해 있기 때문에 남산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다.
재미있는 비파골(琵琶谷)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이 계곡에는 네 곳의 절터가 있고 4기의 석탑지가 남아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할 뿐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오는 재미있는
전설이 숨어 있는 뜻깊은 골짜기다.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 6년 (697년) 동쪽 교외에 망덕사라는 절을 세우고 낙성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임금님이 친히 행차하여 공양을 올렸다. 그때 차림이 누추하고 못생긴 스님이 와서 임금님께 청하기를 "저도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님은 마음이 언짢았지만 맨 끝에 앉아 참석하라고 허락하였다. 재를 마치고 임금님은 스님을 불러 조롱하는 투로 말하였다.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예 저는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 고 대답하자 임금님은 "돌아가거든 임금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
하지 말아라." 고하시며 스님을 비웃듯이 바라보자, 스님은 웃으면서 "예, 잘 알겠습니다, 임금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眞身釋迦)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하고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임금님은 깜짝 놀라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부르며 허겁지겁 산에 올라가 그가 날아간 하늘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였다. 스님이 사라져 버리자 신하들을 보내 진신석가를
찾아 모셔 오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비파골 안 삼성곡(三星谷)이라는 곳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가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진시석가
부처님은 바리때와 지팡이만 남겨두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린 뒤였다. 신하들은 돌아와서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효소왕은 자신을 뉘우치고 비파암 아래
석가사(釋迦寺)를 세우고 진신석가가 숨어버린 바위 위에는 불무사(佛無寺)를 지어 바리때와 지팡이를 두 절에 나뉘어 모셨다고 한다.
[참고문헌:겨례의 땅 부처님의 땅/윤경렬 지음]
경주 남산 제1편은 여기서 마무리한다. 제2편에서는 하산하는 장면과 무수히 많은
문화재를 어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