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찾은 외감리
칠월 둘째 월요일이다. 일주 전 시내 종합병원 영상의학과에서 흉부 씨티를 찍어둔 결과를 보는 날이다. 지난해 연말 서울로 올라가 받았던 종합 건강 검진에서 가슴 사진에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기에 창원으로 돌아와 재검받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6개월 후 다시 보자고 해 절차를 따랐다. 정한 시간에 호흡기내과 전문의를 찾아가니 아무런 일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병원으로 가기 전 집에서는 새벽까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와 같은 연령대 정신과 여의사가 쓴 진료실 얘기가 아닌 자신의 투병기라 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는 앞길이 창창했던 정신과 전문의로 사십대 초반 개인 병원 개업 직후 파킨슨병 판정을 받고도 20년 넘게 살아온 여생을 담담하게 풀어 놓았더랬는데 그가 발병 후 열 번째 쓴 책이었다.
종합병원은 의료인 말고도 숱한 직종 군상들이 근무하고 드나들었다. 치료받는 환자와 보호자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가 훨씬 넓어질 테다. 컴퓨터 저장 정보와 예약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병원 문화이지만 기본은 의사와 환자가 대면하는 진료였다. 진료비 자동 납부 코너에서 관계자 도움을 받으면서 내 남은 생에서 병원 출입은 최소화하고 살았으면 싶은 소박한 소망을 가져 봤다.
밖으로 나오니 진료실 로비에서 기다리던 사이 소나기가 한줄기 내렸다 그친 뒤였다. 집을 나서면서 진료 후 보낼 시간은 미리 설계해 놓았다. 즐겨 가는 산행은 시간이 지체되어 어렵고 산책 정도로 보낼까 했다. 산책도 장마철이라 강변으로 나가 먼 길을 걷기는 어렵고 가까운 계곡이나 들길을 걷는 정도로 짧게 끝내고 싶었다. 웃비가 올까도 염려되고 볕이 나면 무덥기도 해서다.
소답동으로 옮겨가 북면 가는 농어촌버스를 타기 전 때가 일렀지만 점심부터 해결했다. 야외로 나가면 현지에서 식당 사정이 여의하지 못해 불편을 겪기 일쑤였다. 향토 사단이 떠나고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상가에서 돼지국밥을 시켜 먹었다. 전에는 한 끼 점심으로 먹는 국밥도 안주 삼아 맑은 술을 두 병까지 거뜬히 비우기도 했으나 이제는 ‘아, 옛날이어라’가 되고 말았다.
점심 식후 감계를 거쳐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굴현고개를 넘은 버스가 지개에서 외감마을 앞을 지날 때 내렸다. 동구 바깥 매실나무는 매실 수확이 마쳐졌고 밭이랑 옥수숫대는 엄마가 업은 아기처럼 수염을 내밀고 서 있었다. 안테나처럼 꼭대기에서 수술이 흩날릴 꽃가루를 받아 수분시켜 알곡으로 여물게 할 암꽃이 기다렸다. 꽃가루를 받으려고 내밀고 있는 수염이었다.
동구에는 미나리를 길렀던 비닐하우스는 방치된 채 여름을 나고 있었다. 몇몇 식당이 들어선 동구를 지난 달천계곡 입구에서 마을 뒤 농로로 드는 물길을 따라가다 돌나물이 보여 걷어 모았다. 이른 봄에는 돌나물이 보드라워도 철이 철인 만큼 쇠어 있었다. 그래도 장마철이라 비를 맞은 잎줄기는 수분을 머금어 통통해 열무를 대신하는 물김치 재료가 될까 싶어 찬거리로 확보했다.
작은 저수지로 흘러드는 수로를 따라가니 외딴집이 나왔다. 나는 이전에도 몇 차례 지나면서 봐둔 정원이 잘 가꾸어진 집이었다. 알림판에는 신비의 열매 구지뽕을 판다는 내용과 함께 들꽃 구경하는 집이라 소개되어 있었다. 열매는 가을에 팔 테고 야생화는 철 따라 아름답게 피어났다. 주인장이 부재중인 뜰에 피어난 여러 화초 가운데 내가 아는 꽃은 다알리아와 개미취 정도였다.
여러 꽃이 잘 가꾸어진 외딴집 뜰을 서성이다가 외감마을 뒤 논둑에서 돌나물을 더 걷었다. 새터에서 중방마을로 건너가 보려다가 볕살이 드러나니 날이 무더워졌다. 아까 들리려다 비켜온 달천계곡 들머리로 되돌아갔다. 남해고속도로 창원터널로 접속하는 높다란 교각 밑을 지나 느티나무 아래 퍼질러 앉았다. 비닐봉지에 채워온 돌나물에 붙은 검불을 가린 뒤 배낭을 추슬러 짊어졌다. 2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