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드로의 설교 2
행 2:25-36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25-36 / 다윗은 그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ㄴ) `나 여호와를 한마음으로 모시고 살며 주께서 내 가까이에 계시니 떨리지 않습니다. (ㄴ. 시16:8-11) 26) 하여 이 마음 기쁘고 한없이 즐겁습니다. 이 몸도 편안히 살아갑니다. 27) 주께서 이 몸을 스올로 팽개치지 않으시고 주님만을 애타게 그리는 이 몸 버리지 않으시리니 28) 생명의 길 보여주시리니 주님의 얼굴은 한없는 나의 기쁨 주님은 한없는 나의 즐거움이십니다.' 29)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인용한 이 말은 다윗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의 무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습니다. 30) 다윗은 예언자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서 ㄷ) 다윗의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ㄷ. 시132:11(참조,시89:3-4,삼하7:12-13) 31) 다윗은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메시야의 ㄹ) 부활을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야는 지옥에 버려지지 않고 육신 또한 썩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ㄹ. 시16:10(참조,행2:25-28)) 32) 그가 예언한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33)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보좌인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데로 아버지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이 방금 보고 들은 광경이 일어난 것입니다. 34) 다음에 내가 인용하는 이 말 역시 다윗이 그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ㅁ) `여호와께서 나의 주 임금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여기 내 오른쪽에 앉아라. (ㅁ. 시110:1) 35)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앉아 있어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36)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야가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시 16:8-11; 110:1)의 내용을 통해 나사렛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온 인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증명합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25-31) 베드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자의 부활을 다루는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합니다. 두 가지 사실로 이 시편이 다윗에 대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죽어서 장사되었고 그의 무덤은 여전히 우리 중에 있습니다(29). 둘째, 다윗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습니다(34). 따라서 두 가지 사실로 베드로는 시편의 말씀이 다윗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분, 메시아에 대한 기록임을 설명합니다. 다윗이 시편의 내용을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선지자로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3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즉, 다윗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자(내 영혼, 주의 거룩한 자,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32-36) 베드로는 다윗이 예언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자”는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증명합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증언은 예언에 대한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해석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토대로 증명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는 추가적으로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 지금 청중들이 목격한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제자들에게 제한된 경험이지만, 제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지금 청중들이 목격한 사실입니다.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이 모든 일들을 예수님과 연결시킵니다. 베드로는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한 가지를 더 지적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은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사렛 예수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고 온 인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은 확실히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적용: 베드로는 구약의 말씀과 자신들의 경험을 기초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증명했습니다.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경험과 말씀이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누구나 계속해서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나에게 있는 죄가 제거 되어지고 있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2:25-28
베드로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16: 8-11)을 인용한다.이는 자신이 8절에서 예수에 대하여 말한 바를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시 16: 8-11은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에 대한 기록 중 하나로서 메시야의 부활(復活)에 대한 내용을 담고있다. 그는 이 예언의 말씀을 들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야인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와같은 논중은 예수 자신에 의하여 세워진 해석에 기초하고(막12: 35-47 참조), 부활 이후의 기독교 전통에도 부합되며, 또한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용되었던 미드라쉬의 제반 해석 방법과도 일치되게끔 표현된 하나의 논증이다(Richard N. Longenecker). 이 부분의 각절 주석은 본서의 시편 주석을 참조하라.
=====2:29
형제들아 - 이 말은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사람 형제들아'라는 말이다. 이는'유대인들아'(14절)라는 말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아'(22절)라는 말보다 친근감있는 표현이다.베드로는 이제까지 인용한 구약의 맡씀에 대한 결론을 말하려고 공손히 청중들의 주의를 끌고있다. 내가 조상 다윗에 대혀여 담대히 말할수 있노니 - 여기에서 "말할 수 있노니'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말하게 허락하면'의 뜻이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잘 반영하여 '나로 말하게하라'(Let me speak)고 번역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이 청중들과 형제로서, 이스라엘의 왕통의 선조로서존경받는 다윗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공손한 태도를 나타냈다.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 다윗의 묘는 실로암 못 남쪽에 있었는데(Bruce)현재는 예루살렘 마가의 기념교회 가까운곳에 다윗의 무덤으로알려진 유대교의 성기가있다고 전해진다. 다윗은 이처럼 죽어서 그 무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을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란 구절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음이 분명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다윗의 묘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있었으며 그 중에 하나는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3,000달란트의 돈이 도난당했으며 그후 헤롯에 의해 다른 방도 도굴(盜掘)되어 더 많은 돈이 도난당했다고 전해진다.
=====2:30
그는 선지자라 -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기 때문에 선지자였다(삼하23:2;마 22:43). 비록 구약에서 그가 예언하는 무리 중에 포함되어 예언한 적은없으나 자신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예언했으므로 영감받은 선지자 중 하나로 여겨질 수 있다.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하심을 알고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처음 하신약속은 삼하 7:11-16에 기록되어 있다. 그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맹세'에 관한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 89:3,35에서는 '내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나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였은즉...', 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과 거룩함에 근거하여 영원 불변한 서약으로 맹세하신것을 알수 잇다.
=====2:31
미리 보는 고로...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 이 구절은 이미 인용된(27절) 시 16:10에 대한 해석이다. '미리본다'는 것은 선지자로서 계시와 영감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의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선지자는 예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를 단순히 예언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장래에 될 일을 미리보고 예언한 예언자이면서 영감받은 시(詩)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찬양한 선지자였다. 다만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과 관련된 다윗의 선지자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 베드로는 이미 22절에서 '예수'를 언급했으며 그 다음부터 예수에 대해 적용된 예언을 설명했으므로 본절에서 '이(사람을)'(* ,투톤)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에 의해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예수의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과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했다.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에 관계대명사 '후'(* )가 사용되어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즉 본 구절은 이 관계대명사의 선행사(先行詞)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1)하나님 : 이에 따라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증인이다.' 벴겔(Bengel)같은 학자들이 이해석을 지지한다. (2)앞절 전체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여 개역 성경처럼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Meyer, Lenski, Bruce, Ralph Earle).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번역을 취한다. (3) 예수 : '우리 모두가 예수의 증인이다' 란 의미가 된다(Alford, Knowling).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여 설교하고 있으므로 '예수'아 '하나님'을 선행사로 취하는 것보다 앞절 전체를 선행사로 보는것이 가장 무난하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모든자들이 부활에 대한 증인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였고, 그들은 본절 외에 네 차례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강조했다(3 : 15 ; 5 : 32 ; 10 : 39-41 ; 13 : 30,31).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 여기에서 '오른손으로"란 하나님의 전능과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지(엡 1 : 20 ; 히 1 : 3 ; 8 : 1 ; 10 : 12 ; 12 : 2 벧전 3 : 22 비교)승천한 예수의 위치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물론 허비(Hervey)는 '오른손으로'를 '오른편에'로 해석하여 예수가 승천하여 하나님의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주장은 여격이 장소로의 의미보다는 방법의 의미를 나타내므로 타당하지 않다. 한편 '높이시매'라는 말은(3 :13 ; 빌 2 : 9)그리스도의 몸의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영광스러움을내포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의 승귀(昇貴)라 칭한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 예수가 약속하신 성령(1 : 5 ; 요 14 : 16 ; 16 : 13)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내는 권능을 얻었다'(1 : 8 ; 요 14 : 26 ; 15 : 26 ; 16 : 7)는 표현은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이처럼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와서 성자를 통해오시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종교 회의의 결정이 비롯되었다(니케아 신조).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 무리들이 보고 들은 것은 성령이 임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에 대한 것으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3절)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2절)와 백이십 명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4절)을가리킨다. 부어주셨느니라 - (* ,여세케엔). 이 말은 '에크케오'(* ,쏟아버리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 말은선지자 요엘에 의하여 사용되어진 표현으로(17절)그의 예언이 여기에서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 그는 죽어서 장사되었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당시에 그의 무덤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다.그리고 그의 육체는 무덤에서 썩었고 승천하지못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지금 인용할 이 시는다윗 자신에 적용시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었다. 주께서 내주에게 - 이 구절은 시 110 : 1의 인용으로 후기 유대교 시대에 유대교 해석자들이 난해한 문제로삼았던 구절이다. 문제는 '내 주'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몇몇 고대의 랍비들은 이시편을 아브라함과 관련지어 해석했고, 또 어떤사람들은 다윗과 관련지어 해석했으며 심지어는 히스기야 왕과 관련지어 해석할 자들도 있었다.그리고 기원후 약 7년이 될 때까지 랍비 문헌에서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 확실한 중거도 없다(D. M. Hay)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시 110: 1을 메시야에 대한예언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適用)시킨 적이 있다(마 22:41-46 ; 막 12 : 35-37 ; 눅 20 : 41-44).베드로는 이 시편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언급했다.
=====2:35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 바울이'모든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 :10)라고 가르친 적이 있듯이 '발등상 된다"는것은 항복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 110 : 1 주석을 참조하라.
=====2:36
그런즉 이스리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 베드로는 본문에 이르러 예수를 주와 메시야로 선포하여 자기 설교의 절정이자 결론에 도달했다. '온 이스라엘'(* ' ,파스 오이코스 이스라엘)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전 민족 또는 종교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너희가 십자기에 못박은...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공생애를 통하여 죽기까지하심으로 완전히 성취하셨고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므로 '주와 그리스도'란 칭호가 그에게 참으로 합당한 것이다. 또한 이 칭호가 그에게 합당한 이유는 신약의 다른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독론적인 진술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롬 1 : 4 ; 빌 2 : 9-11 ; 히 3 : 14 ; 요일 5 : 6).특별히 이 '주와 그리스도'라 는 칭호는 바로 베드로의 메시지의 제목이요 초대 교회 신앙 고백의 내용이었다(롬 10 : 9 ; 고전 12 : 3).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에 적용되는 주(* , 퀴리오스)는 아마 구약의 여호와와 일치되는 표현이다. 즉 34절에 인용된 '주께서'가 시 110 : 1에 서 '여호와께서'로 언급되었으며 70인역(LXX)에서 '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또한 '여호와'란 표현을 70인역은 거의 대부분 '퀴리오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구약의 '여호와'와 '예수'를상호관련시키고 있는듯하다(Stanley D. Taussaint). 또한 베드로는 설교 속에서 '주'란 표현을 예수와 하나님께 동시에 적용시키고 있다(21,34,39절). 그러므로 여기에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강조적인 표현이라 할수 있겠다. 이 ' 주와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능력과 영광으로 유대 민족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모든 민족 위에 높여주는 정치적인 위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와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과 부합되지 않게 가르치며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 설 교 >
삶과 희망
사도행전 2:25-29 / 조용기 목사
여러분, 즐거운 추석 세셨습니까?
할렐루야..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좋은일이 일어납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삶과 희망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어느 날 저의 사무실에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굉장히 초라한 옷을입고 초췌한 모습으로 사무에 신앙상담을 왔습니다. 그 할머니 말에 귀를 귀울인즉 6.25 때 10대 나이의 젊은 아가씨로서 시골에서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고 나서 얼마있지 아니하여 6.25 전쟁이 터져서 남편은 일선에 나갔는데 그만 죽고 말았어요. 남편이 없는 10대의 여성이 유복자를 가지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린 애기를 잘 길러서 나았습니다. 어린아기를 낳고 난 다음에 친정에서는 빨리 어린 아기를 고아원에 갔다 맡기고 인생을 재출발 하라고 재촉을 하고 아는 사람은 다 어린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까 맡기고 재출발하라고 하는데 애기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은 자기의 마음속에 무언지 큰 소망이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장차 내가 고생스럽더라도 애기를 잘 키워놓으면 이 아이가 청년이 되고 가정을 이루게 될 때 나는 호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결혼을 하지 말고 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어야 되겠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아기를 키우는데 좌우간 세상에서 해본 일은 다 했어요. 쓰레기 뒤지기도 다하고 행상인 노릇도 하고 시골에 가서 논의 일도 돕고 뭐 안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손도 거칠고 몸도 거칠고 그런 사이에 몸은 늙어지고 어린아이는 자라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왔을 때는 이미 할머니가 다됐습니다. 그래서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서 그 아들을 장가를 보내는데 장가를 보내고 얼마있지 않아서 며느리가 어머니를 안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 어머니 안보겠다. 어머니 위해서 밥도 안차려주고 빨래도 어머니 빨래는 따로 내놓고 어머니가 직접하라고 그러고 그런데 아들이 섭섭하게도 잘 어머니 편을 들어주면 좋은데 아들도 며느리와 한패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내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한평생을 그 자식을 하나 키워놓으면 희망이 있을꺼라 해서 그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희망이 나를 지금까지 살려 주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으면 나는 벌써 포기했지요 그러나 이제 와서 그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들도 며느리도 다 필요없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여자입니다. 목사님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자매님 이게 세상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희망을 이루어져도 얼마 않있으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희망을 이 세상에 두면 이 세상과 물질은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은 영원한 희망의 근원이 되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터이니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날 눈물을 흘리고 예수님을 모시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데 집에 갈 수가 없어서 교회에서 늘 자고 일주일에 몇끼 먹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늘 있더니만 나중에 안보입디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고 가는데 세상을 떴다는 겁니다.
사람이 희망을 잃어버릴 때 그 모습의 초췌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젊은 10대의 여성으로서 아기를 가졌을 때 희망이 그 어린아기를 키운 것입니다. 키워놓으면 무슨 호강할 일이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려운 고통을 참고 애를 키울 수 있었는데 희망을 잃어 버리고 난 그는 완전히 살았으나 죽은 사람같이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60억이 넘는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인종이 다르고 모양새가 다르고 문화와 습관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가슴에 절망의 무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 절망을 극복하고 가슴속에 찬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들었을 때 절망적인 사람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희망으로 충만하게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타락해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양을 떠난 식물들이 다 누렇게 떠서 죽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서 떠난 마음에 희망이 있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와 같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절망이 있으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었어요 우리가 불순종하고 불신앙의 죄를 통회할 때 하나님이 앞에 나아가 우리는 절망적인 삶을 극복하고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 제일 중요한 것이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잃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을 때는 살아갈 희망과 용기가 있는데 희망이 없으면 기운이 다 빠져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상실되고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치고 인생을 포기 안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술을 퍼먹든지 그냥 방종하든지 될 대로 되라고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식물인간이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늘만 뻔히 쳐다보고 있고 자지도 아니하고 먹지도 아니하고 식물인간처럼 되버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우울증의 노예가 되어서 마음의 즐거움이 없고 누가 와서 무슨말을 해도 대꾸를 하지 않고 완전히 고독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잠17:22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리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은 좋은 약과 같아서 심신을 치료하지만 마음의 근심을 뼈를 마르게 하니깐 그 몸에 살이 안 마를 수 있겠습니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죽음을 삶보다 더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 플리쳐 상을 받았던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였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는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책들입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선교사가 될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아주 깊었습니다. 그러나 해밍웨이는 성장하며 믿음의 길을 져버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길을 떠나서 그는 불신앙의 길로 들어가서 방탕하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자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는 삶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엽총으로 머리를 쏘아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무렵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도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은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속에 살고 있다 나는 필라맨트가 끊어진 텅빈 전구처럼 공허하다 왜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세상의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고 상도 받고 사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았어도 그것은 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 마음속은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기전구처럼 너무나 텅비고 외롭다는 것 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 공명과 쾌락을 다 가지고 있어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상실하고 인생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희망을 가지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 되어도 삶의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어떠한 고통과 괴로움과 핍박이 와도 그걸 걸머 지고 나아갑니다. 왜 희망이 있으니까 얼마 안가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스러워도 희망이 있으면 이겨냅니다.
롬 5:3~4에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있으면 환란 중에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으면 창조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뭇 없는 것을 있게 만들어 놓고 희안한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삶의 꿈과 행복이 넘쳐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삶의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행2:25~28 “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희망이 있으니까 살아도 기쁨이 충만하고 죽어도 기쁨이 충만하고 어딜가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 났을 때 영국 런던이 첫 폭격을 받았습니다. 다음 런던의 모든 언론계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한 기자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정부를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이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 인것입니다. 우리 언론은 이제부터 희망을 말하고 희망의 기사만 씁시다. 언론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승리 할 수 있다는 낙관적 희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십시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신문 기자들은 그 저널리스트의 말에 합의 하여 모든 기사와 논조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희망이 넘치는 기사와 논조를 썼습니다. 신문들은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실었고 군대에 출전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에 대문짝만치 헤드라인으로 차지했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할 것 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이 찬 메시지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영국 국토 전체는 순식간에 희망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전쟁의 승리를 국민전체가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삶의 희망이 있으면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겨나고 그 어떤 고난이라도 적극적으로 이겨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널리즘의 힘이 얼마나 강합니까? 현실은 영국이 그 때 암담했습니다. 그 암담한 현실을 신문이 자꾸 파헤치고 부정적으로 말을 했으면 영국은 전쟁에서 졌을 것입니다. 일제히 신문들이 일어나서 정부를 칭찬하고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고 전쟁은 우리가 이긴다고 우리는 승리한다고 희망을 주었으므로 국민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희망을 얻었습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앞다투어서 전쟁에 나가길 원하고 그래서 전쟁이 이겼지 않습니까? 우리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우리나라에도 매스컴이 잘 못해서 국민전체를 절망에 빠트리는 것을 보았지요. 소고기 파동 때 텔레비전들이, 신문들이 부정적인 말들을 적어서 사실 아닌 거짓말을 확대해서 온 국민 전체가 분노하고 치를 떨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같이 되었습니다. 이 매스컴들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도 하고 절망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매스미디어의 시대이기 때문에 매스컴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정보를 얻습니다. 절망적인 정보는 모든 우리 국민들을 낙심시키고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주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일어나서 창조적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인 빅터 플랭클 박사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이 나치 수용소에 잡혀서 살아나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600만 유대인이 참사를 당한 나치 수용소의 체험담을 책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책에는 그는 인간의 위기상황 속에서 희망을 가질 때는 놀라운 힘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다고 말했습니다. 빅터 플랭클 박사는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나치수용소에서 다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던 사람은 모진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불이이익을 당해도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현재의 고통과 상관없이 우리는 삶의 기쁨과 행복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현재가 아무리 눈물어린 고통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행복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초자연적인 꿈을 마음속에 가져올 수있게 하고 인내를 가져올 수 있게 하고 능력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처지에도 희망을 갖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확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으면 희망이 생깁니다. 미움을 받고 있으면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지금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여기 여러분 믿는 자마다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시인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천국백성이요, 영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 인 것입니다. 롬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사랑할것이냐 안할것이냐 질문할거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되었을 때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어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번 따라 말해 봅시다. ‘ 나는 지금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공백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질 수가 없고 오직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 질 수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을 누리고도 마음의 텅빈 공간은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셔야 채워지도록 그렇게 만들어져있습니다. 육체만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인 것 입니다. 하나님의 그 속에 들어와 앉아야 마음의 안정이 오고 마음이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 뜻을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안에서 안식을 찾을때까지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졌으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 떠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마음속에 평안이 있을 택이 없는 것입니다. 안식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지위나 명예나 돈이나 쾌락을 가지고 행복을 얻을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동안 행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결코 이것을 추구해도 만족함을 줄 수 없는 우리 마음속의 텅빈 웅덩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 자기를 위해서 행복과 성공이라는 웅덩이를 팠습니다. 또 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에 사랑과 행복을 채워 넣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고 보니까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우리 가슴 속에 있는 하나님 없는 웅덩이는 다 터진 웅덩이 인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그 터진 웅덩이가 메꾸어 지고 우리의 노력하고 일한 보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오중복음, 삼중축복,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몸 찢고 피흘려 값주고 사서 주신 은총과 축복이 우리를 향해서 주렁주렁 열매 맺고 있으니 우리가 마음 속에 행복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쳐다보면 우리가 절망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내 상황이 어렵고 괴롭고 한심할지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그 속에서 예수님은 나같이 못난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서 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하고 계시고 나를 믿으면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채찍을 맞으므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 너의 병과 고통을 내가 짊어 지었다 내가 너의 저주를 담담했으므로 너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나를 통하여 면할 수 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므로 너를 영생시켜서 천국 데려갈 수 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내가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 이런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그런 약속을 주시고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보증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 마음 속에 절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절망을 할려해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절망할 수가 없어요. 저도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절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목사가 절망했다고 하면 부끄러운 말이지만 젊을때는 감추어도 이젠 감추지 않습니다. 감추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을 절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목사이면서도 자살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때마다 엎드려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몸찟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절망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희망이 마음속에 솟아 낫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니 내가 정말할 수가 있겠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아니냐 그리스도를 보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내 마음을 부여잡고 나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3:3~5 “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 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여러분 이런 좋은 하나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왜 절망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와서 위로해주고 계십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눈에 안보이지요. 우리 눈에 안보이는 숨을 쉬고 공기가 우리 속에 들어와 있고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은 우리 눈에 안보여도 우리 속에 와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고후1:4~5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 고난이 있으면 위로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 계셔서 우리에게 위로를 해주심으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통을 당할 때 친한 친구가 와서 여러 말로 위로해 주면 굉장한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 위로의 영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은 오셔서 우리에게 위로하여 소망이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리 큰 환란과 풍파가 돌아와도 가슴속에 성령님의 위로가 넘치면 그 환란을 거뜬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 클래시스 인데 파라 칼레오 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파라 칼레오란 경외한다, 도와준다.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을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보혜사라는 말은 파라 클레토스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와서 위로 해주고 격려해주고 도와주는 영으로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 어려울 때 여러분 성령님의 품안에 여러분 자신을 던지고 성령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나는 성령님은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합니다. 나는 몰라요. 나는 못해요 성령님이 나를 붙들어 주셔야 해요. 그러면 꼭 성령이 와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온 세계에 다니면서 체험했습니다. 기후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잠자리가 바뀌고 여행이 피곤해져서 집회장에 나갔을 때 강당에 설때 다리가 떨리고 몸에 열이 나고 고통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강사로 와서 몸이 아프다고 못한다고 호텔에 누워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오직 의지할 분은 성령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와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드립니다 의지합니다. 성령님이여 나는 성령님을 꽉 붙잡으니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성령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언제나 집회장소에 가서 집회를 하게 되면 성령이 마음을 뜨겁게 만드시고 몸에 새로운 힘이 생기고 즐거움이 생기고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기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위대한 위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그 위로를 여러분이 늘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란이 심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성령이 우리 속에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우리 예수믿는 사람이 희망을 가지는 것은 천국의 약속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당의 약속이 있어요. 이 땅위의 우리 삶의 끝나면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고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천국이 여러분에게 약속되어 있다고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땅에 사는것은 잠시 잠깐이요 영원히 살 천국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약속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몸 찢고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속을 확증하시고 우리 눈 앞에 보는 대서 천국을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것입니다. 벧전 1:3~5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특별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것 입니다. 우리 소망이 꺼져가는 소망도 아니요 죽어가는 소망도 아닌 것입니다. 산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시편 146:5 “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 안버리니깐 소망을 가질 수 있지요 좋을때는 품어주고 조금 나쁘다고 발길로 차버리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좋은 때도 우리와 같이 계시고 어려울 때도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신 28:12~13 을 우리 다같이 함께 읽읍시다 “ 야훼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훼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 있지 않게 하시리니” 이만한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금새 안심 내세 복락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쳔들은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은 여생을 희망속에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가 더 나은 내일을 주실 것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역사가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 보다 명년는 금년보다 좋게 만들어주신다. 그러한 밝은 꿈을 마음 속에 늘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으니깐 하나님 말씀대로 꽉 믿어야 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하늘의 별들과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는 것처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늘 헤아리고 그 말씀을 꽉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희망차고 긍정적인 말을 하십시오. 부정적인 말이나 절망적인 말을하면 나도 희망을 잃어버리고 남도 희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잘되는 것도 있고 못되는 것도 있고 축복받을 때도 있고 어려움 있을 때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나중에는 선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나간 50년의 목회를 되돌아 보면 하나님은 저에게 늘 희망의 전도자가 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하던 시절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특히 저의 양무리들은 삶의 희망을 잃고 절망하여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다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고 복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저보고 기복신앙을 전한다고 손가락질하고 욕을했지만 우리 교회 찾아오는 성도들은 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그게 희망을 전하고 복음을 안 전하면 그들이 삶아 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막교회, 시절서대문 시절, 우리교회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때를 지어 찾아왔습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못살게 되고 변두리에 쫓겨난 사람들이 오도 가지도 못하고 절망적에 있을떄 희망을 준다는 복음을 전하는 천막교회에 개미때 같이 모여든 것 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구름때 같이 모여 왔습니다. 이들은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받아 변화되어 기적을 체험하고 오늘날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그 분들이 헌금하고 노력해서 우리 교회를 만든 것 입니다. 저는 늘 희망의 전도자가 되라는 사명을 마음에 품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메시지를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위해 힘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희망으로 시작하여 희망으로 끝나라고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절대로 희망을 시작해서 절망으로 끝나지 마라 희망으로 시작해서 희망으로 끝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저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온 천하 만국으로 나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희망을 바라던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때같이 몰려왔고 희망과 용기를 얻고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는 것을 저는 보고 체험했습니다. 여러분 정말에 처한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저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매세지를 힘차게 선포했고 그들은 현실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슴속에 희망을 안고 일어나니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꿈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지고 절망과 죽음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꿈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지고 절망과 죽음 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감사하고 마음의 희망의 불꽃을 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의 불꽃이 타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버림 받지 않습니다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희망을 가질뿐 아니라 우리가 가는 곳마다 희망을 전달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성령님이 나의 보혜사가 되셔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를 감싸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안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면 희망은 널리널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기 떄문에 희망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희망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려도 손에 잡히는건 없고 내 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사랑을 주시고 예수님은 은혜를 주시고 성령님은 도움을 주시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붙잡았는데 어떻게 절망이 우리를 정복할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잘살 수 있습니다. 병고침 받을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승리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 속에 희망이 있기 때문 인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 마음속에 꿈을 만들어 내고 꿈은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만들어내고 믿음은 우리에게 용기와 담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할 수있다. 하면된다. 해보자! 희망이 있다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희망을 끝까지 가지고 희망을 전도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신앙고백
김영규 목사 / 행 2:25-36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베드로 설교를 계속하겠습니다. 앞서서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성령 강림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다윗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성령 강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 강림은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결과로 보내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편 16편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행25-28절) 이 말씀은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메시야 예언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22편은 다윗이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하소연 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의 예수님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시편 16편도 그렇습니다. 다윗의 평소 신앙생활의 모습인데, 여기에 메시야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먼저 다윗의 신앙 고백을 보려고 합니다. 예언적인 해석은 그 다음에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어떤 믿음으로 살았을까요?
1. 그는 항상 하나님의 실체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다윗이 바라본 하나님은 항상 앞에도 계시고, 우편에도 계십니다. 앞과 우편은 아주 의미 있는 위치입니다. 앞은 안내자의 위치요 인도자의 위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앞에 계심으로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우편은 힘 있는 위치요, 도우미의 위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우편에 계심으로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안내를 받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다윗의 삶은 아주 안정되어 있습니다. 조금도 요동치 않습니다. 어떤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많은 신자들 중에 유독 다윗에게만 하나님이 앞에도 계시고 우편에도 계시다는 말입니까? 오늘 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혹시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런 식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고 내게서는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다윗은 날마다 자기 앞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우편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7-28)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멀리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까이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바로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가까이 느낀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절실했고, 가까이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남보다 부족하고 모자라서 하나님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권력자입니다. 금과 은이 넘쳐나는 부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왕입니다. 자녀들이 많고 가정이 든든합니다. 건강하고 힘이 넘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힘 있는 왕이라도 연약한 인생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양에 비유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다윗은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십니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하나님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내일은 너무 복잡해서 하나님께 맡길 수 없습니다. 제가 해결해야만 됩니다. 하나님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내가 불편합니다. 제가 필요할 때만 와 주세요. 제가 요청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멀리 계시도록 애써 거리를 둔 것은 아닌가요? 그렇다면 다윗처럼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이 우편에서 도와주시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앞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우편에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다윗은 삼중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마음의 기쁨, 입술의 즐거움, 육체의 희망!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입술도 즐거워 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결과는 삼대 행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마음의 기쁨입니다. 마음의 기쁨이란 내 영혼이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저는 요즘 손녀를 품에 안고 새로운 감정을 체험합니다. 이제 겨우 생후 한 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행복이란 무엇인지 제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준 후에 품에 안고 있으면 한 시간이 지나도록 눈 마주치면서 행복해 합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131:2) 하나님 품에 있을 때에 우리 영혼은 한 없이 평온합니다. 기쁩니다. 개그맨이 웃기려고 온갖 소란을 떨지 않아도 그냥 마음이 기쁩니다. 둘째는 입술의 즐거움입니다. 입술의 즐거움이란 마음의 기쁨을 겉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유의하세요. 서양 사람들은 새가 노래를 부른다고(singing)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가 운다(cry)고 합니다. 마음의 정서가 슬픔입니다. 대중가요를 보세요. 맨 실연당한 얘기, 원망 불평하는 얘기, “너 때문이야!” “왜, 나를 버렸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 품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으로 즐거움의 소리가 나오게 하세요. 뿐만 아닙니다. 심령이 평안하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좋은 말을 합니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소망을 주는 말을 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평안치 않으면, 가시돋친 말을 합니다.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만나서 얘기만 나누면 우울해 집니다. 심령의 기쁨에 좋은 소리가 나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육체도 희망을 갖습니다. 육체가 희망 속에 산다는 것은 곧 부활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가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병들면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육체가 상하거나 쇠약해지면 절망에 빠집니다. 이제는 끝장났구나! 그러나 다윗은 육체가 썩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부활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잠시 병드는 것이나, 신체적 결함 때문에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처럼 육체의 약함을 믿음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육체의 연약함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육체의 소망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3. 다윗은 궁극적인 영혼구원과 육체 구원을 다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내 영혼은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길이 생명을 향해 가고 있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승을 향하여 속절없이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절규합니다. “노세 젊어서 놀아 늙고 병들면 못 노나니!” “아까운 내 청춘 다 가는구나!” “청춘을 돌려다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생명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윗은 미래적 구원을 내다보았습니다. 첫째는 영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하데스에 버리지 않으시리라! 내 영혼은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리라! 둘째는 육체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육체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리라! 미래가 있는 사람은 현재가 즐겁습니다.
예수님께 적용된 다윗의 예언
이제 이 다윗의 고백을 예수님께 적용해 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예언을 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25-28절) 다윗은 이 말씀을 했지만 다윗 자신은 썩음을 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어 장사되어 묘지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직접 다윗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29-33)
이제 이고백을 예수님께 적용해 봅시다. 첫째로, 예수님 우편에 성부 하나님이 계시며, 부활하신 후에는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계시게 됩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34) 둘째로, 예수님은 썩음을 당치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원수 마귀를 굴복시키셨습니다.(34절) 넷째로, 위로 올리우심으로써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가 다윗의 예언을 인용한 목적이 뭡니까? 예수님이 성경대로 부활 승천 하셨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셨다! 그래서 청중에게 요구하는 것이 뭡니까? 성령 강림만 설명하자는 얘깁니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결론이 36절에 나옵니다.
마지막 권면
베드로 설교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알지니! 이스라엘 온 집이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든지, 아니면 순례 차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이든지, 너희 유대인들은 알아야 한다!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영어 표현에 “Why m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왜 나냐?” 변을 당했을 때 쓰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왜 너희냐?”(why you?)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너희 유대인들 손으로 죽였느냐? 이런 베드로의 질문을 받은 청중들의 반응은 다음 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37절) 아무튼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너희 손으로 죽인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그렇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기 바란다. 이제 예수님을 바르게 대하기만 하면 된다. 너희가 죽인 예수님은 이제 너희의 주가 되셨고, 너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 사실만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이것이 베드로의 최후 권면입니다. 과거가 어떻든지 현재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게 어떤 분입니까? 두 가지를 인정하십시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주”이십니다. “주”(kuvrio")란 말은 소유권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인간을 창조하신 원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지옥의 심판에 놓인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죄인들을 살려내시고, 자기 소유로 사셨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소유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원 창조주시오,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 다시 살려내신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생명, 내 육체, 내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겁니다. 오늘 바로 이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들도 다시 한 번 내 소유권자가 주님이심을 모든 삶의 순간마다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Cristov")란 말은 헬라어입니다. 같은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메시야(요1:41)입니다. 헬라어로 하든지 히브리어로 하든지 뜻은 같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이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 기름부음을 받은 직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사장입니다. 둘째는 왕입니다. 셋째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제사장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영원토록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구약 시대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갔지만 일 년에 단 한 차례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백성들이 직접 나가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 자신만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4:14)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내 인생의 유일한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게 명령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명령에 따라야 할 유일한 분이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의 명령을 듣는 것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길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서든지 왕이신 주님의 명령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계시의 통로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날마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세요. 오늘 예수님을 내 인생의 그리스도로 모셔 들이세요. 그래서 다윗이 누렸던 축복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
스데반황목사 / 행 2:29-36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분은 말씀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셨습니다. 특히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모습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오셔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분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예언하여 왔던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죄사함과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보혈과 생명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하나님이며 사람으로서 살아 계셨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계속해서 살아 계십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천사의 모습으로 오셔서 구약에서 활동하셨듯이 성령께서도 구약에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어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하였듯이, 성령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역사 가운데 그분을 공식적으로 보내신 후로 모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며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약에도 역사하셨으나 마침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궁극적인 그의 사명을 완수하신 것처럼, 성령께서도 구약에도 계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역사하셨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궁극적인 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때는 성령 강림의 때였습니다. 이 땅에 공식적으로 오신 성령님의 사명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여 모든 열방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에 있어서 양태론과 같은 이단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되는 위격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세 위격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한분 하나님의 신격 안에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까지 모든 구원 사역에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공동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의 공식적인 활동으로 구별한다면, 성경에는 주요한 세 시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성부께서 주로 역사하신 시대이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교훈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구속을 이루신 시대이며, 그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활동하시는 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삼위 하나님의 각 위의 하나님께서는 다함께 역사하십니다. 그럼에도 주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그 시대가 나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고 그 이후는 영원한 세상으로써 주 여호와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 해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처럼 성령의 오심을 기대하며 기다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더니 혀처럼 생긴 불꽃이 사람들의 눈 앞에 보였습니다. 그 불꽃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그 곳에 모인 각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성령으로 충만하여졌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 강림의 사건은 사람들의 눈과 귀로 목격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 현장을 본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 사건이며 이에 교회 역사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사건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그 약속의 실현이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알리시고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는 사건은 참으로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려라”(행 1:4)고 당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때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기를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8).
또한 요한복음도 똑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 1:33-34).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구속의 사명을 주시면서 만일 그 사명이 성취되면 성령을 보낼 수 있는 권한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아들이 십자가에서 그 사명을 다 감당하시자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들에게 성령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심은 주 예수께서 그분의 사명을 완벽하게 다 이루셨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 또 다른 면에서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라는 말은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령 강림으로 성령 세례를 받아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설명이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16절을 보니,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7-21).
성령의 강림은 말세를 시작하는 징조입니다. 그러나 말세의 끝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말세의 시작부터 말세의 끝까지 성령께서는 모든 나라로부터 주의 백성을 불러 그들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 말세의 기간은 사도행전 2장 34절과 35절에 다윗을 통해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행 2:34-35 /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원수인 마귀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완전하게 두실 때까지 역사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기간이 말세입니다. 즉, 주의 부활 승천 이후 성령을 보내신 때부터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가 말세입니다. 말세는 성령의 시대이며 복음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서 피와 불과 연기로 징조를 나타내시는 역사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날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을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에 아직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구원을 얻지 못하였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 확신이 없습니까? 오늘 이 시간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도 예수님을 마음 속에 왕과 구세주로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임하셔서 새생명과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 및 신약 성경이 언급하는 "말세'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시대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시대입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시대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 2:2)
그 시대에는 모든 열방과 만방에서 주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시대에 대한 예언은 성령 강림으로 시작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주의 백성을 다 찾아 모으는 것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이처럼 구약에서 말일 또는 끝날이라고 부른 것은 메시아가 오신 시대의 현상으로서 그 시작은 성령의 강림이며 그 끝은 복음이 모든 열방에 다 전파된 후에 마지막 날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 말을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성령 강림으로 공식적으로 시작하여 온 세상을 향해 복음으로 정복하여 번져나갈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라는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마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구약이 바라보는 ‘말세’이며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말세의 끝 날로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인 것입니다.
메시아의 시대, 곧 말세 기간에는 성령께서 유대 민족에게 국한하지 않으시고 온 세상 민족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을 한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가장 깊은 비밀인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 15: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3-15).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모든 나라와 민족 가운데 주의 백성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증거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증거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드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다시 다른 면에서 성령 강림 사건을 설명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인성을 따라 설명합니다. 이에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보다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면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행 2:22절).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여러 기이한 일들과 표적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침내 악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마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사망의 고통'은 히브리어의 배경에 의하면 사냥꾼들이 포획하기 위하여 놓은 덫이라는 개념으로써 '죽음의 덫', 혹은 '죽음의 매는 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죄가 없으시므로 사망의 올무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따라서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다윗의 예언과 연결시킵니다. 다윗은 시편을 통해 장래에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썩지 않고 부활하여 생명의 길을 허락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윗이 예언하고 기다리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시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세워졌음을 알립니다. 즉, 다윗에게 약속된 메시아가 등장하여 부활하였으며, 부활하신 메시아는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영원한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바라던 다윗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나단이 말합니다(삼하 7:11-14, 16-17)
그러므로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다윗의 왕국을 이을 영원한 왕은 다윗의 후손으로써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영원한 왕국이 되려면 그 왕은 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그분이 그리스도이며 나아가 사람으로써 다윗의 왕국을 영원히 다스릴 새인류의 왕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0-32).
그후 베드로는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곁에 앉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계시며 주와 그리스도가 되였는데, 바로 그 증거가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33절 이하를 쉬운 성경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은 곳에 올려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들은 것처럼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늘로 올라가 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 사건이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따라서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음을 가장 분명하게 객관적으로 증거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26).
그러므로 성령께서 강림하신 이후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즉,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41).
우리는 성령께서 강림하신 직후에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 강림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에게 맡겨진 구속 사역을 완전하게 마무리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며, 나아가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며,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왕이 되셨음을 외쳐야 합니다. 성령 강림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이 땅에 와 있기 때문에 주의 제자들은 이 복음을 열방에 전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모든 만방에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택한 자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나라로 들어올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여 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주의 큰 날이 임할 때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실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치시고 그 나라와 함께 우리 모두를 품에 안고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고전 15:24-28).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 능력은 거룩의 능력이며 사랑의 능력이고 그리스도의 삶처럼 살 수 있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라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힘입어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인정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와 희락을 누리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리시는 분을 만나라
행 2장 29~36절 / 민경설목사
우리는 영적인 눈이 열리어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과 승리를 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죽는 길, 죽이는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상이 다 좋고, 다 기쁘고, 다 살 것 같지만 나중에는 다 죄짓고, 다 죽고, 다 병들고, 어렵게 됩니다. (요일1:19)“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세상에는 죽이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세력은 처음에는 인간을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지만 나중에는 죽입니다. 또한 인간을 죽여서 지옥으로 던져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비극이지만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나올 수 없는 것 역시 비극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7: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를 건져낼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또한 이 세상에서 빠져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건져낼 것입니까? 세상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분을 만나면 됩니다. 진실로 나를 살리시는 분을 만나 그 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면 살게 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 한 분입니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 멸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죽은 후에도 영생합니다. (요11:25-26)“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이 분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까?
첫 번째, 예수님만이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행2:29-32)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셨기에 죽음으로 떨어지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죽고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행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고 지금 우리에게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그 분을 믿으면 그 분이 우리 마음에 와 계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그리스도’는 ‘기름부은자,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힘들고 불행하고 어렵게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죄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죄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를 위해 죽는다해도 우리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세주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를 해결하심을 믿으면 됩니다.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세 번째, 예수님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주님은 ‘Lord’,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책임지시고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28: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우리를 고치고 지키시며 영원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요14: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을 만나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부활사건의 진면모
행 2장 29~41절 / 오정호목사
지난주간 한 일간지에 서울 조계사 7층 석탑을 해체하여 옮기는 과정에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리'란 부처나 승려를 화장했을 때 몸안에서 나온 딱딱한 물질을 말하는데 이 진신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조계사에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부처는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물증인 셈입니다 이방 종교의 모든 창시자는 다 죽었으며 그 무덤들은 관광지나 종교적인 기념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방 종교의 교주를 따라가면 결국 죽음밖에 경험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반드시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종교인 이방종교와 생명종교인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복음을 선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은 죽었으나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죽었다"고 말합니다(30-31절). 죽음이란 초가삼간뿐만 아니라 궁전에도 찾아옵니다. 이세상에서 죽음에서 면죄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죄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말씀을 받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죽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해외여행을 할 때에 종종 도시안에 있는 공원묘지나 교회묘지를 찾습니다. 묘비들에 기록된 글을 읽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 소망, 인생관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죄 많은 이 몸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깨워 주실때까지 이곳에서 잡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진 자만이 이런 묘비의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묘비는 슬픔과 한탄의 글이 씌어져 있지만 부활 신앙을 가진 자의 묘비는 비록 가족과의 이별의 슬픔이 있지만 부활의 소망안에서의 다시 만날 것에 대한 기쁨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부활사건은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셨으며 완성하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사건의 진면모(眞面貌)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30절).
하나님은 메시야의 부활을 맹세하셨습니다. 사람끼리의 맹세도 지켜야 하거늘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겠다고 맹세하셨다면 그 약속을 반드시 실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말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활의 약속을 성경뿐만 아니라 봄에 돋아나는 새싹들 가운데도 새겨주셨다." 겨우내 죽은 것 같던 나무의 생명이 봄의 기운에 파릇파릇한 생명의 움을 터 오는 것을 통해 자연속에 하나님의 부활의 메시지를 담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람의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겠다는 약속을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이루신 사건입니다.
2. 하나님께서 부활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32절).
부활사건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세상의 법이나 권력이나 지혜로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부활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첫 열매란 그 다음에 계속될 추수를 의미하기에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부활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약속을 이루어 주심으로 예수안에 있는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내 인생의 주어(主語/ Subject)를 하나님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여주셨습니다(33절).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취급을 받으셨던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죄와 죽음의 권능을 깨뜨리시는 손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도 부활의 자리에 높여주시고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핍박을 당하는 것 같아도 주님의 능하신 손을 의지함으로 우리 자신을 낮춘다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반드시 우리를 높이실 것이며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가정과 직장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와 메시야가 되게 하셨습니다(36절).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사건은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주와 영광의 메시야가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석가나 공자는 인류의 스승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우리의 주와 메시야로 세우신 일이 없습니다.(요한복음 10:7-18 / 사도행전4:12)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 때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헨델의 메시야 중 할렐루야 코러스가 연주될 때 대관식을 하는 왕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왕의 왕, 주의 주"라는 코러스 부분에서 빅토리아 여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후에 여왕은 신하들에게 "일개 대영제국의 황제가 왕중의 왕이며 만유의 주이신 주님 앞에서 어떻게 일어서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구원자 메시야이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이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믿는 자로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삶의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까?
첫째,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38절). 주님을 신뢰하지 못한 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교만,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한 모든 잘못된 신앙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내 인생과 삶과 죽음의 주인으로 모시는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후 항복조인식에서 남군 사령관이 "우리가 어느 정도 땅을 포기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북군 사령관은 모든 지도위에 손을 얹고서 "우리 정부는 이 땅 전부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아직까지 주님께 내어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의 고백, 헌신의 고백, 충성의 고백을 할 때에 주님은 부활의 능력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과 기쁨으로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죽은자와는 동행할 수 없습니다. 죽은자의 철학과 교훈은 따를 수 있지만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20). 우리의 기도가 독백(Monologue)이 아닌 대화(Dialogue)가 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 계신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주님과 동행함을 기뻐하십시오.
하버드대학 심리학과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조사를 했습니다. 먼저 사랑으로 봉사하는 내용의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찌 독일의 대학살(The Holocaust)의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감기바이러스 저항면역성을 조사했더니 첫 번째 장면을 본 사람들이 훨씬 감기저항 면역성이 강했습니다.
사랑의 목자이신 예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심령뿐만 아니라 육체도 건강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영광과 축복을 회복하십시오. 올해의 부활절이 여러분의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 되게 하십시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 가슴벅찬 감격과 기쁨의 찬양을 높이 올려드립시다.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셔서
죄인의 유일하신 구주(The Savior)와 주인(The Lord)으로 세우셨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누가복음19:37-40)
나사렛 예수, 그는 누구신가?
행 2장 33~36절 / 정근두목사(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 성령강림주일에 시작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오늘은 본격적으로 살피겠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3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4-15절)
먼저 그의 설교의 첫 대지를 잘 들어 보십시오. 부정적 명제로 시작합니다.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첫 째 의무는 청중들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오해를 교정하되 청중의 수준에서 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청중들의 논지를 취해서 그들의 상식에 호소합니다.
“때가 제 3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절)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13절)는 청중의 주장을 되받아 그들의 상식에 따라 살필 것을 호소합니다. “때가 제 3시다” 즉 “아침 9시”라는 말입니다. 먼저 유대인의 관습을 두고 그들의 상식에 호소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나 축제 때에는 정오가 되기 전에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순절 기간에 그것도 하물며 아침 9시에 술에 취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에 술에 취했다는 것은 유대인의 관습상 말이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새 술에 취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가볍게 일축합니다. 어디 유대인의 관습만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아침 9시에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 보셨습니까? 술 취한 일단의 무리를 목도한 적이 있습니까?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됩니다.
우선 그들의 말문을 막아놓고 나서 새로운 차원의 설명을 시작합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상황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 성취라고 구약 성경에 호소합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 . .”(16절)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선지자 요엘의 예언에 입각해서 이해합니다. 성령을 부어주신 하나님의 큰일을 구약 예언에 입각해서 이해합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마지막 시대를 개막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 . .”(16절)
여기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 표현을 약간 바꾸고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는 표현을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바꾸고 있습니다. 요엘이 막연히 언급한 “그 후에”를 “말세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신을 “만민에게”, “모든 육체에” 부어주는 것입니다. 말세가 도래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 신을 사람들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주시긴 했습니다. 하지만 한정된 사람에게, 특정한 사람에게만 부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신을 수여받은 사람들은 특정한 직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만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기름 부어서 새운 직분은 무엇입니까?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주심을 상징한 기름부음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세의 특징은 누구에게나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군사문화의 용어를 빌리면 말세는 “전군 간부화”시대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남종과 여종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떤 직책을 가졌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성령께서 임하신 말세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누구에게나 성령을 부어주시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분이 있어야 성령을 주시질 않습니다. 직책 묻지 않고 능력 부어주시는 시대가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지금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새로워집니다. 더 이상 힘이 없다고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이 임하면 달라집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십니다. 사회를 향한 바른 말을 하십시오. 내일을 향한 꿈을 꾸십시오. 아름다운 환상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베드로의 설교의 순서를 살펴보십시오. 맨 먼저 그들의 상식에 호소하여 반박한 다음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들어 설명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구약 예언보다 신약 성취입니다. 요엘을 통해서 보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오순절 사건의 경위를 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의 진상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본문 22절부터 예수님 사건을 진술합니다. 말하자면 나사렛 사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증거 하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오순절 사건의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나사렛 예수, 그가 누구인지를 물어봅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또한 우리는 성령강림의 경위를 보다 상세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22절)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통해 이미 새 시대가 도래 한 것을 밝힌 다음 이제 어떻게 이 새 시대가 열렸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 사건을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사건을 말하기 전에 먼저 청중의 주의를 다시 환기시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그들의 긍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으라.”고 권위 있게 호소합니다. 동일한 권위로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14절에서 호소한 바 있습니다.
확신에 찬 증거라야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설교를 하든, 전도를 하든, 증언하는 사람의 말은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한 확신을 갖고 말해야 합니다. 교사로서 가르치든 여러분이 속한 구역서 묵상한 것을 나누던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도 아는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베드로의 청중들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상당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알고 있는 기반 위에서 예수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사렛 예수께서 베푸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입장에 따라 그 능력의 출처를 바알세붑에게 돌리기도 했지만 그가 행한 사건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 온 세상에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그의 다른 설교에서도 밝힙니다.
그는 고넬료의 집에서 한 설교입니다.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6~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셔서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는 소식은 유대 온 세상이 아는 사실입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소식까지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베푸신 것이라고 밝힙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라고 증거 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임을 증거 하기 위해 너희 가운데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셨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의 삶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이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가 선택받은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베푸신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에 우리가 아는 나사렛 예수의 삶이 있습니다.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며 귀신 들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 능력이 나타나는 사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거룩한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대리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는 누구십니까? 그의 삶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도 그가 누구신지를 증거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증거 합니까?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23절)
하나님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로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대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해치운 것입니다.
“법 없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율법이 없는 이방인 모두를 부를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실제로 형을 집행한 로마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못 박은 유대인의 죄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36절은 분명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라고 선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설을 명백히 봅니다. 유대인들은 악의를 가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이미 결정하신 것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이미 예언된 것을 성취했을 뿐 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란 한 가지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 때문인 동시에 인간의 사악함 때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고 있다는 초대교회의 이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언된 사건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일찍부터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인류를 타락의 구덩이로 몰아넣은 사단을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물리치실 계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는 그때 사단의 머리가 박살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보다 명백히 예언합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5,6)
인간의 악의는 아무리 발악을 해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동시에 인간이 그 악의의 극치의 발로로 해치운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지극히 선한 목적을 이루어냅니다.
이것을 아는 사단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후에도 불안해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메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4절)
24절은 악의에 찬 인간의 행동과는 대조적인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그를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의 결과요 지극히 크신 그의 능력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생명의 구주께서 사망에 메어 있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1:20a)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b)
나사렛 예수, 그는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죽음의 세력에서부터 구출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십니다. 나사렛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은 우리를 또한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시편 16편 8-11절에 호소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진실성을 확증합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25~32절)
베드로의 논지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합니다. 다윗이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라고 했을 때 그가 자신을 가리켜 말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어 장사되어 그의 무덤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리켜 말한 대신 그는 예언자로서 한 구별된 후손을 그의 보좌에 앉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다시 한 번 나사렛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에 이제 열 두 사도가 동참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는 홀로 썩음을 보지 아니하셨습니다.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서 입증되신 분이십니다. 로마서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 1:4)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는 누구십니까?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분이십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능력으로 입증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교회는 고백합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살아계셔서 온 우주와 인생을 다스립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절) 나사렛 예수, 그는 누구십니까? 그는 하나님이 그 오른 손으로 높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표현을 빌면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하늘에 오르사 그가 하신 첫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자기 백성 위에 부어주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높임 받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오순절 아침 지금 그들이 목도한 사건은 부활하시고 존귀해지신 나사렛 예수께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베푸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길 안내자 요한이 누누이 증거 한 사건의 성취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가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주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가르치신 보혜사 성령을 주시리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재확인하신 사건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부활이 열두 제자들이 증거 하는 사건이라면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은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모든 청중이 증인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귀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들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절)
주께서는 지금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거기서 자기 백성을 위해 능력을 부어 주시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역이 남아 있는 한 성령의 권능을 힘입는 일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9절)고 베드로는 이 설교 마무리 부분에서 역설합니다.
다시 한 번 본래 질문을 되풀이합시다. 나사렛 예수, 그는 누구십니까? 베드로는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신 분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베드로는 다시 한 번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이 결론을 유도합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4~36절)
앞에서 베드로는 시편 16편으로 메시야의 부활을 입증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시편 110편으로 그리스도의 승천을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어 그 육체가 썩었고 그는 또한 몸을 가지고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0편은 예수님 자신이 자기에 관한 예언으로 인용하셨고 바울 사도와 히브리서 저자도 주님께 적용시킨 유명한 시편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설교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부활 이전 공생애 기간에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가르쳤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는 공생애 기간에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실 권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사실로 인해 하나님은 그를 능력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도록 높이 올리셨습니다. 부활은 그가 메시아라는 주장을 하나님이 입증하신 사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나사렛 예수 그분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신 그분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의 사람 나사렛 예수를 여러분의 구주로 인정하고 여러분의 삶 속에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나사렛 예수께서 여러분의 삶에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 참 소망을 주십니다. 어제나 오늘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참 복을 내리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 분은 지금도 하늘 아버지의 우편에 계셔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 용서 받은 삶과 능력으로 충만한 삶은 한 분 예수로 말미암는 새로운 삶입니다. 이 새로운 삶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이 높이시매
행 2장 33~36절 / 강문호목사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아지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에 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1.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사람 이 세상에는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높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도니야 형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 하였더라>(왕상 1;5-10) 이같이 아도니야는 자기를 자기가 높이려 한 자의 대표입니다. <스스로 높여 이르기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높아 지겠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후에 아도니야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왕도 되지 못 하였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솝우화중에 한 이야기입니다. 청개구리는 하늘을 날라 다니는 황새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황새에게 하늘을 날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방법을 자기가 제시하였습니다. 나무를 자기가 물고 있으면 황새가 그 나무를 물고 하늘을 나르면 된다고 방법을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시원스러운 하늘이 앞에 펼쳐지는 것이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밑에 있던 동물들이 부러워서 물었습니다. <누가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하였니?” 청개구리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청개구리는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랑>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높이는 것은 높아지지 않습니다. 아도니야가 그 격이었습니다.
2. 사람이 높이는 사람 사람들은 높아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높여 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높여주는 높임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헤롯이 그렇습니다. 헤롯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시위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헤롯을 신처럼 위하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충을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12;21-23) 사람들이 높여 주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압도적인 표로 밀어 주어 대통령이 되었어도 그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높여도, 사람들이 자기를 높여 주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3. 마귀가 높여 주는 사람 마귀가 사람을 높일 때가 있습니다.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와에게 마귀가 와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만큼 높아지면 최고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와서까지 예수님을 자기가 높여 주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였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자 제일 먼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금식하고 능력이 임하자 말자 마귀가 왔습니다. 첫 번째는 배고프니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세웠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4;6) 세 번째는 산으로 예수님을 인도하고 말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다 거절하셨습니다. 마귀가 높여 주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높이는 것은 결국 파멸시키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람이 돼지에게 맛있는 것을 주는 것은 잡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4. 하나님이 높여 주는 사람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높여 주는 것도 아니고, 마귀가 높여 주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높아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이같이 하나님이 높여 주니까 영원하고 굳건한 높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어야 진실된 높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여 주십니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4;8)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이 높여 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제일 주의로 살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여 주실 것입니다. 인도에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왕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던 중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왕은 슬픔을 견디지 못 하여 무덤 동쪽에 자신의 동상을 세워 주었습니다. 얼마 후 서편에 왕가를 상징하는 호랑이를 조각하여 주었습니다. 1년 후 호화로운 별장도 세웠습니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웅장한 성도 건립하였습니다. 왕은 맞은 편 산에 올라가 무덤을 내려다 보며 흐믓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저 무덤을 파버려라” 웰스(Wells)의 단편소설 <무덤>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다가 주변에 돈,명예가 생기면 하나님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세상으로 차츰 차츰 빠지는 과정을 이렇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구체적인 말이 무엇입니까? 1. 성전 사랑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몸에 병들지 않도록 잘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성전 건축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온 세상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로마가 점령하였습니다. 오늘 날까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였던 흔적들이 정확하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때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로마에서 백부장이 가버나움에 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가버나움 회당은 그 백부장이 지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방문하시게 되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은 못 고치실 병이 없으신 분임을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l 장로들이 예수님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4-5) 예수님은 회당을 지은 백부장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그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6-8)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9) 그리고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성전 건축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5가지 마음 가짐을 이미 선포하였습니다.
1. 엄청난 일을 부담스럽지 않게 2. 유익한 일을 즐겁게 3. 영원한 일을 정성되게 4. 신나는 일을 길게 5. 영광된 일을 복되게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세 가지 헌금을 하시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1. 매 월 3만원을 1 구좌로 하여 헌금을 차근차근 드리는 것입니다. 2. 생각지도 못 하였던 돈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건축헌금하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그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3. 인생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성전 건축 헌금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면서 서원 기도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오래 전 전남 광주 벧엘 기도원에서 76기 성막 쎄미나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204명의 목사님들이 모여서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100명 정도 잘 수 있는 기도원에서 200명이 공부하자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100여 명의 목사님을 이렇게 추운 날씨에 교회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러나 불평없이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군산제일교회에서 설교하고 돌아 왔습니다. 이 종주 감독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해 1월에 거의 2,000평 되는 교회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대상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난한 할머니 이 확실 집사님이 1,000만원이나 되는 강대상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그 사연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손자 하나 데리고 거의 20년간 종이로 봉투를 만들어 살림을 꾸리며 살았습니다. 기구한 운명의 할머니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죽었습니다. 손자 하나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때로 없이 딩굴었습니다. 할머니의 가슴은 온통 인생의 아픔으로 멍들어 있었습니다.견딜 수 없는 우울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자기 마저 죽고 싶어도 간질병 손자 하나 불쌍하여 죽지 못 하며 가정엣 봉투 만들어 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알뜰살뜰 모은 것이 1,000여만원이었습니다. 그는 1,000만원을 드려 성물을 봉헌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간질병은 불치라면서요? 그러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줄 믿습니다. 내 재산을 다 드리니 고쳐주옵소서!> 결론은 고참받았습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소원 사랑 하나님의 소원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영혼 구원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렇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구원받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런 소원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얼마나 높여 주시는 지 다니엘은 이렇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나리라>(단 12;2-3) 가수들이나 연예인들의 최고 목표는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군인의 최상의 영광은 별을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최고 최후의 영예도 별과 같이 빛나는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세상에 신비한 것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마음속에 양심이요 다른 하나는 저 하늘에 빛나는 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나리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다는 말은 간단하게 말하여 전도하는 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헌금많이 하는 사람이 천국의 VIP가 아닙니다. 기도많이 하는 사람이 천국의 VIP가 아닙니다. 봉사많이 한 이가 천국의 VIP가 아닙니다. 이들은 천국에서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별과 같이 빛나는 이들은 아닙니다.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시는 이는 전도많이 한 이들입니다. 영혼을 많이 구원한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나도 내 소원을 들어 주는 이를 높일 것입니다. 3. 은총을 사랑 하나님의 은총을 소원하며 바라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여 주십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는 저희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이다>(시89;17-18) 은총을 사모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시며 은총을 주신다는 말씀입나다. 기적을 바라면 기적을 주십니다. 은혜를 사모하면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을 만족케 하여 주십니다. 인도의 한 내륙지방에는 데카페라라는 독사가 살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어떤 뱀보다도 이 뱀을 무서워 합니다. 그 이유는 한번 물리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뱀이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칩니다. 데카페라가 화가 나면 머리가 수건을 쓴 것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두건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데카페라에 물리면 해독하는 약이 있습니다. 특효약입니다. 그것은 데카페라가 화가 나서 부풀어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곳 주변에 있는 약초입니다. 이 약초를 짓이겨 데카페라에 물린 곳에 바르면 신기하게 낫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이 약초를 캐러 데카페라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해답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는 곳에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고 고난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사람을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사람 2. 사람이 높이는 사람 3. 마귀가 높여 주는 사람 4. 하나님이 높여 주는 사람 하나님이 높여 주는 사람이 참으로 높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이시는 것일가요? 1. 성전 사랑 2. 하나님의 소원 사랑 3. 은총을 사랑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이성희목사 / 신명기 10:17-19, 사도행전 2:35-37
요즘 봄이 왜 짧은지 아십니까? 여름, 가을, 겨울은 다 두 자인데 봄은 한 자 밖에 없어서 짧다고 합니다. 실재로 요즘에는 봄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씨가 춥다가 갑자기 더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봄이 실종되었다는 말도 합니다.
우리말에는 한 자가 굉장히 강력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깡’, ‘뻥’, ‘짱’ 등 한 자로 말하지만 그 의미는 굉장히 강합니다. 또 요즘에는 젊은이들은 긴 말 보다 짧은 말을 많이 쓰고 축약어를 사용하는데 어떤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강력한 단어가 무엇일가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한 자인 “주”입니다. “주여”라는 한 마디에 생명이 있고, 힘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주여”는 구원 받은 자의 고백이며 외침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다가 물에 빠져 들어가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에 물이 잠기게 되자 제자들이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주여”, 이 한 마디를 들으실 때 주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라는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라고 하고, 신약의 헬라어로는 ‘퀴리오스’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야훼’를 대신했던 말이 ‘아도나이’입니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말인데 얼마나 강력한 언어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주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메시야가 되십니다. 무엇을 통하여 메시야가 되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최악의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금광석을 불로 연단하여 비로소 순금을 뽑아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연단하신 후에 순금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강한 군인을 길러냅니다. 특별한 자신만의 특기를 가진 기술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학문에 능한 학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깊은 학문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혹독한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주,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하여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됩니다. 시편 119:71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성령강림과 방언의 후속으로 베드로가 말씀으로 처음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방언은 성령강림의 상징이며, 말씀은 성령강림의 결과입니다. 성령강림을 받은 군중을 상대로 성령강림을 설명합니다. 그 설명의 결론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 성령의 충만이 아니면 예수가 주시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 외에도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가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9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 설교가 예수가 주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며, 그리스도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설교의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예수님이 주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부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 참 메시야 되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없으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도 될 수 없고,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구원하심을 감사하는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도행전 2:36에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신명기 10:17에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주’란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하기도 하고, 위엄의 존재나 일반적인 주인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이런 존재들 가운데 유일한 ‘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 되시는 길이었습니다. 로마서 14:9에는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자가 되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십니다. ‘퀴리오스’란 헬라어 단어는 구약의 ‘여호와’와 일치되는 표현입니다. 34절에는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는 말입니다. ‘70인역’이라는 성경에는 여호와란 말을 대부분 ‘퀴리오스’로 번역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와 예수님을 동일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초대교회의 가장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그들이 함께 살고 보았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씀을 통하여 ‘주’를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31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며, 그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음’이 곧 구원입니다.
지난주간 수요일 새벽에 제가 4시 30분경에 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화장실에 갔더니 분홍색 봉헌봉투가 있었습니다. 그 봉투 안에는 누군가가 인쇄된 편지를 넣어 두었습니다. 교회 봉헌봉투 여럿이 이곳저곳에서 30개 가까이가 발견된 것입니다. 심지어 개인 봉헌함에도 넣어 두었습니다. 교회의 십일조, 감사, 생일감사 봉투에 넣어둔 편지는 ‘사랑하는 담임목사님께’라고 시작하는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교회 청년 박00이라고 소개한 편지는 어머니가 권사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 10년 이상 다녔는데 자신에게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고 신천지의 이만희에게 가서 설교를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서 계시록의 천당과 지옥 설교를 듣고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왜 계시록 설교를 안 하느냐고 했습니다. 계시록을 모르면 천국에 갈 수 없는데 목사님은 많은 성도들을 구원받지 못하는 지옥에 데려가려고 하나요 라고 하였습니다. 천국과 지옥과 계시록을 설교시간에 풀어주지 못하면 목사님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은 거짓이며 교회를 치리하기 위해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전부 알리고 다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천지의 새로운 수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님께’라고 하면서 저에게는 주지 않고 왜 화장실에 두었지요? 제가 항상 화장실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교회에 나온 지 10년 된 권사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계시록을 알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없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알아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계시록을 말하고,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단의 수법입니다. 이단은 종말론을 강조하여 위기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25에는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합니다. 우리교회에도 다른 사람이 다 잘 때에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마태복음 13:39에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라고 합니다. 교회에 와서 밤에 가라지 같은 편지를 뿌리고 간 자는 원수입니다. 마귀입니다. 그들은 자칭 추수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추수꾼이 아닙니다.
가장 악질적인 도둑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름 내내 수고하여 농부가 가을걷이하여 놓은 볏단을 차로 몽땅 싣고 가는 도둑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도둑이 가장 악랄하다고 봅니다. 여름 내내 흘린 농부의 땀과 수고를 헛되게 하는 도둑이 가장 악질적입니다. 이렇게 도둑질하는 것은 추수가 아니라 도둑질입니다. 성경은 추수꾼은 천사라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도둑질을 합니까? 우리교회의 아까운 봉투를 많이 축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봉헌에 쓰는 봉투를 그렇게 쓰는 게 추수꾼입니까? 이들은 추수꾼도 아니고 천사도 아닙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단의 발호가 극심해집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구원은 계시록을 잘 알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빨리 목사님을 찾아오세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이런 헛된 사설에 유혹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계시록과 구원을 꿰맞추니 놀라서 현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믿고 구원의 은총과 감격이 늘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놀라운 뜻이 있고, 우리에게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려고 그렇게 힘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6에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그 분이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8에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모습을 전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자발적 비하’(voluntary humility)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 이름은 간단하지만 그 뜻은 심오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어 그 직분을 수행하게 한 사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고, 제사장으로 오셨고,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메시야는 이 세 직분의 기능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서신에는 ‘예수’라는 단어가 219회, ‘주’라는 단어가 272회,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389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 중요한 단어인데 왜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제일 많을까요? 예수님을 의미하는 말 가운데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 믿음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31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회의는 가장 중요한 교회 회의 중의 하나입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다는 중요한 교리가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교리를 채택할 때에 회의에 참석한 인원 318명 가운데 단 5명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교리를 채택하는 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 중에 2명만 결국 서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속죄는 우리 각자가 받아들일 때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군병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이 때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합니다. 피는 구원을 상징하며, 물은 변화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도 변화는 원하지 않습니다.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어디서 구원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이 일을 하십니다.
‘칭의’란 법적인 문제로서 단번에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칭의’ 다음에는 도덕적 진보인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구원과 변화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칭의’와 ‘성화’ 둘 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둘 다 그리스도의 피로 산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시는 길은 힘든 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자기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마디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고백이었고, 이 한마디 때문에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9:22에는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고 합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고, 출교를 당할만한 악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사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목숨을 내놓을 만큼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은 유대인에게는 절대금기 사항입니다. 위험하고 목숨과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것 외에 복음이나 진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복음전파가 아닙니다.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사실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사도행전 9:22에는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개심하자말자 전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에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래서 당시에 복음은 증거하는 것은 순교하는 것입니다. 증거하다는 말이 ‘마르투레스’인데 이 말은 순교하다는 말도 됩니다. 증거와 순교는 같은 단어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순교의 각오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교의 각오가 있어야 복음이 전파됩니다.
결론
19세기 무명 러시아인이 쓴 ‘순례자의 길’(The Way of Pilgrims)이란 책에는 성도인 한 순례자가 기도를 늘 마음에 품고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경위를 소개합니다. 기도를 늘 마음에 품는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늘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며, 그리스도이시기에 이 기도가 가능하고 이 용기를 얻습니다.
영성학에서는 ‘관상’(contemplation)이란 말을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관상’이란 말은 성소(temple)에 함께(con)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묵상이란 마음을 비워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성소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영성의 주제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변하여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드렸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 모두를 얻으신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주님,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