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10-24 주일오전예배
‘분노하시는 하나님’
성경/ 롬1:18-21
A. 억지 회개, 값싼 회개
사과는 개에게 준다?
지난 주간 우리나라 언론에서 이슈가 된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국가 반란을 일으키고 독재를 일삼은 전두환씨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반발이 일었고 처음에는 변명하다가 사과 요구가 거세지자 결국 마지못해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후보와 관련된 인스타그램 계정에 개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과는 개나 줘버려”라고 읽었습니다. 사과하고 싶지 않은데 표를 의식해서 마지못해 사과해준다는 조롱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진상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들여다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후보가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정황을 통해 미루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진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만행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문제, 그리고 36년간의 일본의 잔악한 지배에 대해여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거의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독일은 과거 나치의 만행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정성 있게 사과했고, 그 잘못에 대한 응당한 책임을 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와 달리 일본은 과거 주변 나라들에게 준 고통에 대해 축소하거나 덮으려고 했고, 식민지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과거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려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과
이렇게 과거의 죄악과 잘못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과 사과, 그리고 책임지는 자세를 우리의 양심이 요구합니다. 그 잘못이 얼마나 크고 깊은가에 따라 책임의 크기는 달라지겠지만 어떠하든 말로만 하는 사과로는 안됩니다.
예전에 이청준의 소설 <벌레>를 영화로 만든 <밀양>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는 값싼 회개에 대한 것입니다.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교도소 면회를 갔는데 아들을 살해한 범인은 자기도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피해자의 용서는 더 이상 별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회개와 용서를 아주 왜곡하고 값싸게 만든 것입니다.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자세는 이에 맞는 책임을 지고 대가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은 자신의 죄에 맞는 책임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완전히 망가트려 놓은 책임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대가를 감당하도록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희생양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를 믿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은 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그 책임을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밀양에서 나온 살인자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자기가 지은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가해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스스로를 용서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후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했던 악행들에 대해 항상 마음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자신이 그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온갖 고난과 시련을 자기에게 주신 주님의 십자가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고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고 자기의 연약성을 알고 있기에 끊임 없이 주님 앞에 자기를 쳐 복종시키며 살았습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를 알기 전 복음을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복음에 대해 한없이 빚진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짓는 것이다
아무리 상대방에게 용서를 받았고 사회에서 이에 상응하는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입니다. 탕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버지께 불효한 것이지만 하늘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법적인 보상을 했던 화해를 했든 사람과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뺨을 때려도 누구의 뺨을 때렸느냐에 따라 죄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파렴치범의 뺨을 때린 것하고 대통령의 뺨을 때린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뺨을 때리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불효 중 하나가 부모 앞에서 자신에게는 부모가 없다고, 당신은 내 부모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신호 위반 속도 위반을 해도 일반도로보다 스쿨존에서 더 엄격한 처벌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국가의 법망에 걸린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그런데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하도 죄인이라고 하니까 마음 깊숙이에서는 동의가 안 되면서도 그저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정말 죄인임을 자각하고 하는 것인지는 의심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 오면 분위기상 자신이 죄인이라고 해야 하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 다는 것을 인정해야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회개를 입에 달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아주 심각하고 엄중하게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B.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18)
오늘 읽은 말씀 18절을 보겠습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사람들의 불경건하고 불의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비진리로 진리를 억누르고 막고 있습니다. 진리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계시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또 양심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계시와 하나님의 뜻(진리)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우상과 인간의 윤리와 사상으로 대치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의한 행동들을 보시고, 하늘 보좌로부터 진노하시며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경건치 않음
이렇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두 가지 특징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두 특징입니다. 그 첫 번째는 ‘경건치 않음’입니다.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보통 불의를 먼저 생각합니다. 외적으로 들어난 어떤 범죄행위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것은 경건치 않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비웃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다고 그래. 있으면 한 번 보여봐!” 마치 빛이 있어서 모든 사물을 보면서도 정작 빛이 어디 있느냐고 보여 달라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비한 우주 만물을 보고 있습니다. 시편 53편 1절에 “(시 53: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불의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또한 불의를 행합니다. 죄를 짓기에 담대합니다. 경건치 않음이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라면 불의란 사람 사이에 짓는 모든 죄악들을 말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모든 행위들을 말합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언어나 행동이나 다양하게 행해지는 범죄를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이렇게 불의로 진리를 막아서는 사람들, 경건치 않고 불의를 행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계를 짓밟고 더럽힌 것에 대한 의로우신 분노를 의미합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피조물인 인간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입니다. 시 10:4절에 나타난 것같이 “(시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비웃는 자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날마다 쌓여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5절을 보면,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이제 곧 터져나올 용암덩어리가 활화산 속에서 끓고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해서 쌓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노는 시간이 되면 죄인들에게 쏟아 부어질 때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미래에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일정부분 시행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은밀한 죄나, 공개적인 죄에 대해 크고 작은 죄에 대해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시행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재앙들을 무심히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 나타나는 진노는 나중에 임할 진노를 대비하라는 경고성 메시지입니다.
C.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근거(19-20)
하나님을 알만 한 것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합당합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지식을 전혀 주시지 않으시고 믿지 않는다고 화를 내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려주셔야 인간이 일 일에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9절-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 1:19-20)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저희 속에 밝히 보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들에게 밝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속성들이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알려져서, 그들이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가? 나는 하나님께 진리를 배운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섬기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들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만물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제 3의 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신을 찾고 섬기며, 제사를 드리고 또 기도를 드립니다. 세상에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신을 찾거나 섬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아름다운 질서들을 발견하게 될 때, 세포 하나에 담겨있는 신비한 생명현상을 보게 될 때 그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주 만물에서 어떤 신비를 느끼고 그것을 숭배하게까지 되는 것은 그 안에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안에는 자연히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이 이 세상만물 가운데 가득합니다.
우리 인간 안에도 하나님의 신비하고 놀라운 손길들이 닿아있습니다. 인체의 세포 하나 하나에 담긴 신비한 하나님의 지문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 만 삼천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보잉 747제트 여객기를 만드는 데에 3백만개의 부속품이, 우주왕복선을 만드는 데에는 5백만개의 부속품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몸에는 10조개의 세포 조직이 있고, 25조개의 적혈구와 250억개의 백혈구가 있습니다. 심장은 1분에 4.7리터의 피를 퍼내고 혀에는 9,000개 이상의 미각세포가 있습니다. 얼마나 정교한 조직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하나님의 영광과 속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몰라서 섬기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정직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관찰한다면, 인간 내면에 심겨진 양심과 하나님 의식을 살핀다면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종교적인 공백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긴박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신을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 신 의식을 억누르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대체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참된 것이 없으면 그 자리에 거짓 것이 채워지게 됩니다.
D.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과 은혜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은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저 심판하시기로 하셨다면 그냥 막 쓸어버리시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계시되고 계속 나타난다는 것은 복음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량한 인간의 지혜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는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몸에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는데 전문의의 말보다 스스로의 느낌과 진단을 믿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은혜와 구원을 말하기에 앞서서 인류의 비참한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회개’에 해당하는 말 중에 하나가 자백, 곧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입니다. '자백'이란 '같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것을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죄에 대한 자백과 회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드는 죄를 짓고 있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또한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죄인의 실상을 깨달아 알아 하나님의 크고 높으신 은혜의 어떠함을 더 깊이 체험하는 데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