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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생명의 본래 의무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일이다....2014.4.14 선교율대법회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햇빛...흩날리는 꽃잎들...툇마루....라고 메모되어 있네요.
목련은 피었는데 아직 날씨는 풀리지 않아서 우리들은 여전히 두툼한 겨울옷을 입고 있었지만, 햇빛 따뜻한 곳에 뾰족뾰족 새싹들이 돋고 있었어요.
큰스님께서 지팡이로 “이것 봐요.” 하고 새싹을 가리켜 보이셨지요.
떠나시기 전에 봄햇살 쪼이면서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며 다같이 웃었어요.
그 때 마침 ‘봉은사 새신도 입문교육’팀이 한 줄로 지나갔는데 큰스님께서 박수를 치자 하셨지요. “고맙습니다.” 하고 새싹을 보던 그 경이롭고 따뜻한 눈빛으로 마지막 분에게까지 박수를 치셨어요.
따뜻한 봄날, 화성유의 아름다운 쉼터에서 우리들도 한껏 포근하였어요.
<법문>
지난 시간에 이어서 법화경 제7 화성유품을 하겠다.
법화경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밝히는 가르침이다.
존재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위시해서 천지만물 삼라만상 그 모든것의 진실한 모습이다.
사람에게 이끌어서 생각해 보면 육신이 있고 마음이 있다. 우리는 육신의 실상도 정확하게 알아야겠고, 마음의 실상도 역시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이 실상에 대해 간단히 두 가지 입장을 이야기 한다.
이것을 흔히 궁극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는 적문, 본문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을 이해하는데도 적불이 있고 본불이 있다.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경계를 동등하게 갖추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깨닫기 이전에 본래 부처였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 순간을 통해서 비로소 부처가 되었다. 본래 가지고 있는 깨달음을 본각이라고 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35세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달은 내용은 시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도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의 입장이 있다. 또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법화경을 통해서 알든지 육조스님처럼 금강경을 통해서 알든지, 손가락 하나 세우는 모습을 보거나, 가섭존자처럼 꽃한송이 든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어서 알거나 그렇게 아는 역사적인 차원, 현상적인 차원,시각의 차원, 적불이며 자취로서의 차원이 있다.
부처님에게도 본래의 부처가 있고, 역사적인 차원의 적불, 자취나 흔적으로서의 부처님이 있다.
모든 존재는 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봄이 되어서 풀이 많이 나는데 그 한포기의 풀은 이제 비로소 돋았다지만 그 본래적인 성질은 이미 여러 수억만 년 전부터 있었다.
풀이 가지고 있는 지수화풍은 올 봄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니다. 지수화풍의 역사는 수천 수만년 전에 있었던 본래의 존재였다.
풀 한포기에서 부터 우리들 자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부처님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본래적인 면과 현상적인 면이라고 하는 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양면을 치우치지 않고 보는 것이 중도적으로 바르게 보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그렇게 봐야 바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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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불가사의한 면이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그 어떤 것도 새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지금 스마트 폰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처음부터 있었다. 어떤 과학적인 기술에 의해 여러 가지로 분리하고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모양과 얼굴을 조금 바꿨을 뿐이다.
우리는 알고 보면 유구한 세월동안 숱한 얼굴을 바꿔서 이 세상에 이렇게 오고 가고 또 가고 온다.
법화경 화성유품 처음에는 대통지승불이라고 하는 부처님이 등장한다. 많고 많은 오랜 세월 전부터 있어 왔던 부처님이라고 이 부처님이 살아온 역사를 이야기하고는 끝에 가서 그분에게 16왕자가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대통지승불이 출가하기 전에 16왕자가 있었는데 그 분들이 부왕이 출가했다는 소리를 듣고 모두 따라서 출가하게 되었고 그중 16번째 왕자는 오늘날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것이다.이와 같이 우리는 유구한 세월을 이렇게 얼굴이나 형태나 모양을 수천만 번 바꿔가면서 오늘날까지 흘러오고 있다. 그러한 내용을 화성유품 전편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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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화성유의 이야기가 비로소 등장한다. 이런 것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부처님 경전중에서 특히 법화경은 그 오묘한 내용이 깊고 깊은 것이 범인으로서 제대로 짐작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깨달으신 분들의 차원이라는 것은 보통 범부의 차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50. 60된 어른들이 사업을 한다든지 일을 구상하는데 유치원생들은 그 일이 짐작이 안되는 것과 같다.
우리 사람을 두고도 그렇게 서로 차원이 다른데 아무리 궁리를 하고 궁리를 해도 그 오묘한 이치의 깊이를 다 알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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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성에 대한 설화같은 이야기와 대통지승불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d인데 왜 이렇게 한 품안에 갖다 놓았을까.
이제 화성유품에서 그 뜻을 이야기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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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랜세월동안 수천만번 얼굴을 바꾸고 형태를 바꾸고 살아왔다. 그것을 알라고 대통지승불의 오래된 이야기를 화성유품의 앞에 하였다. 심지어 성별까지 바꿔가면서 남녀가 바뀌고 승려와 속인이 바꿔가면서 수천수만번의 변모를 겪어서 이 길고 긴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것이 가슴에 와닿도록 이해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장황한 이야기를 이끌어다가 소개하고는 화성유라고 하는 변화해 만든 성 이야기를 한다. 그 대목을 같이 읽겠다.
옛인연을 말하다.
(9) 십육 왕자의 현재의 모습
제 십육은 나 석가모니불이니 사바세계에서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느니라.
이러한 내용에 이어서 우리도 경전을 쓴다면 이렇게 옛 인연과 길고 긴 역사속의 일원으로 살아온 것을 상기하면서 오늘 우리가 봉은사 법왕루에 앉아 법화경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마저 쓸 수가 있다.
궁극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을 함께 하면서 긴 세월속에서 우리가 무수히 얼굴을 바꿔 가면서 이렇게 변모해왔다.
그 다음 화성유 이야기를 같이 읽겠다.
34 비유컨대, 마치 오백 유순이나 되는 험난한 길에 인적마저 끊어진 무서운 곳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나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였느니라.
35 이 때 한 인솔하는 이가 총명하고 지혜가 많고 이 험한 길의 통하고 막힌 형편을 잘 알아서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이 험난한 길을 통과하고 있었느니라.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중도에서 물러갈 마음이 생겨 인솔하는 사람에게 말하였느니라.
‘우리들이 극도로 피로하고 또 무서워서 다시 더 나아갈 수 없고 앞길은 아직도 매우 머니 이제 그만 되돌아갈까 합니다.’
인솔하는 이가 방편이 많아서 이렇게 생각하였느니라.
‘참으로 애석하구나. 이 사람들은 어찌하여 큰 보물을 구하지 않고 물러가려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방편으로써 험난한 길에서 삼백 유순을 지나서 한 마을을 변화하여 만들어 놓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대들은 무서워하지 말고 되돌아가지도 말라. 저기 큰 마을이 있으니 그 안에서 마음대로 즐길 수 있으리라. 만약 저 마을에 들어가면 편안히 살 수도 있고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에도 갈 수가 있으리라.’
이 때에 피로해 있던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며 처음 보는 일이라고 찬탄하였느니라.
‘우리가 이제는 험한 길을 벗어나서 편안함을 얻었노라.’
이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변화하여 만든 마을[化城]에 들어가서, ‘이미 지나 왔다’는 생각을 하고,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였느니라.
이 때 인솔하는 사람은 이 사람들이 잘 쉬어서 더 이상 피로하지 않은 줄을 알고는 변화하여 만든 마을을 없애버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대들은 앞으로 나아가자. 보물이 있는 곳이 멀지 않다. 아까 있던 마을은 내가 조작하여 만든 것이다. 임시로 쉬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 많고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여러분들, 삼백유순이나 되는 멀고 먼 험난한 길을 무엇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지 참으로 오랜 세월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많았다. 이제 잠깐 쉬어가자.
(박수)
쉬는 곳도 봉은사 같은 유서 깊은 사찰, 법왕루에서 법화경을 앞에 놓고 쉰다고 하는 쉼이 되어야 참으로 제대로 쉬는 것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 있다면,법화경을 다는 이해 못한다 하더라도 한 대목이라도 이해하면서 이렇게 멀고 먼 험난한 인생길에서 다만 한시간이라도 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근사하다.
그렇지만 이제 쉬었으니 일어나자. 저 앞에 있는 우리가 처음에 목표했던 보물산을 향해서 다시 나아가자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 봄이 와서 산천초목이 전부 움이 트고 꽃이 핀다.큰 풀이든 작은 풀이든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서로서로 성장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자기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저렇게 꿈틀대고 있다. 초목들도 저렇게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살아있는 생명들의 실상, 살아있는 생명의 본래 임무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성장하는 일이다.
식물이 끊임없이 물을 빨아들이고 태양빛을 받아서 성장하고 발전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사람도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그 의무가 있다.이것이 화성유품의 교훈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피곤하다. 피곤하면 부처님께서 변화하여 만든 도시에서 피로가 풀릴 때까지 쉬었다가 거기에 머물지 말고 다시 또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화성유품의 교훈은 참으로 이 계절에 잘 맞는 내용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하더라도 나이를 인정 안하는 곳이 불교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해도 불교적 안목으로 보면 우리의 부모일 수도 있고 우리의 스승이었을 수도 있다.
어리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나이들었다고 내가 나이든 사람인데 라고 할수도 없는 것이 불교다.
우리는 늙은 얼굴 젊은 얼굴 남자얼굴 여자얼굴 잠깐씩 배역을 바꾸어 갈 뿐이다.
불교의 안목은 그렇다.
왜냐하면 중도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은 나이든 사람으로 대접하되 영원히 나이먹지 아니하는, 나이와 관계없는 그 사람의 참생명에 대해서도 이해를 해주어야 한다.
어린아이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면서도 그 어린아이의 영원히 어리지 않은 참생명의 실상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도적인 바른 안목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영원을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이 화성유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다.
예를 들어서 아등바등 필기시험을 쳐서 취직이 되었다, 그런데 취직이 되었다고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일년 안에 도태되고 만다.시대의 변화와 발전에 발맞춰서 나도 변화하고 발전해야 되겠다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하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고 만다.
평생 교육이라는 말이 근래에 자주 쓰는 말인데 우리 모든 사람들은 살아 있는 존재의 의무로서 70, 80, 90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진하고 노력하고 변화해야 하고 발전해야 한다. 피곤하면 이 화성유의 비유처럼 잠깐 쉬었다 갈 수는 있다.
그러나 성공하였다고 해서 성공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결코 그 사람의 성공은 이미 성공이 아니다.
옛날 60년대 70년대 교수들은 강의 노트 하나로 몇 년을 버텨도 밥은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죽었다면 따질 수 없는 것이지만 살아있다면 숨을 쉬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끊임없이 정진하고 공부해야 된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공부해야 된다.무엇을 가지고 하던 간에 열심히 정진해야 된다.
세상을 살면서 전세집에 살다가 한 20평짜리나 30평이라도 자기 아파트 마련하면 잠깐은 ‘아이구 소원풀었다,이젠 됐다’하지만 한달쯤 지나면 남의 집이 보인다. 너 나은 아파트가 보이고 새로 장만한 집이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런 것이 사실은 옳은 마음이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살아있는 생명의 본령이다.
그런 마음을 욕심으로 표현해서 비판하는 입장이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눈을 돌릴 줄 알아야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다보니 화성유다.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서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일 뿐이다.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아파트 한 채 사고 두 채 사고 100평 200평 짜리 사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유다. 여기 있는 분들이 그런 말의 깊은 뜻을 이해 못하지는 않겠지만 혹 또 그렇게 이해할까봐 염려 되어서 드리는 말씀이다.
불교에서는 성불 역시 또 한 생각 더 돌이켜 보면 조작해서 만들어 놓은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다. 성불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성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아무리 많고 많다 하더라도 맹세코 내가 건지리라 라고 하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성불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사람의 성불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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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은 태자 출신으로 부족함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진정 그 자리가 마지막 자리가 아니었다.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내 삶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출가를 했다.
우리 대다수 사람들의 목표는 싯다르 태자 같이 호화로운 생활에 있다.
그런데 그분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그것마저 다 버려버리고 갖은 고행이 목표였다.그야말로 뼈만 남은 고행상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고행도 다가 아니었다. 그것 또한 조작해서 만든 잠깐 쉬어가는 곳일 뿐이었다.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성취했지만 깨달음 또한 조작해서 만든 성일 뿐이다.
우리는 깨달음을 성취했으니 그것이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지만, 깨닫고 나서 부처님은 베나레스로 간다.
오비구를 찾아서가 아니다. 저는 부처님이 오비구를 찾아서 베나레스에 왔다고 보지 않는다. 바라나시라고 하는 곳이 내노라 하는 철인들과 종교가들과 쉽게 표현해서 깨달았다고 하는 모든 도인들이 다 집합하는 곳이다.
거기에 와서 서로 깨달은 사람끼리 대화를 통해서 자기 공부를 점검하고 다른 사람의 공부를 바로 잡아주고 하는 도시다.
그래 석가모니도 그 도시에 가서 그 많은 성자들에게 자신을 한 번 점검 받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곳에 가니 마침 오비구도 거기 먼저 와 있었다.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서 그렇게 의심하지는 않았겠지만 많은 중생들에게 공증을 받아야 종교인으로서 성인으로서 행세를 할 수 있으니까 그곳에서 인증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다가 아니었다.그 또한 잠깐 쉬어가는 마법의 성일 뿐이다.
깨달음을 인증받고 부처님은 끊임없이 중생을 제도 하러 나선 것이다.
끝까지 중생 제도를 했지만 중생을 다 제도 하지 못하고 가셨다.
그러면서도 중생을 제도하는 많은 방법들을 우리에게 무수하게 남겨두고 가셨다.
‘뛰어난 경전으로 나를 대신해서 많은 중생을 제도하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부처님 한 분의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있다.
이것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해야 할 일이다.
100년이라고 하는 한 생을 가지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멀고 먼 인생이다.
그런데 불교적 안목으로는 대통지승불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수많은 얼굴을 바꾸어 가면서 길고 긴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멀고 먼 인생 여정과 끝없는 인연들 이런 것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우리도 변화해야 하고 그 변화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성장해 가야 한다.
마법의 성은 사실은 어정쩡한 중간지점이다. 부처님 출가도 6년 고행도 깨달음도 바라나시에서 당신의 깨달음을 점검받는 것도 역시 어정쩡한 중간 지점이다.
부처님은 끊임없이 중생제도를 하면서 80 생애를 그렇게 열심히 살아갔던 것이다.이것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특성이다.
봄이라고 하는 이 아름답고 근사한 계절, 모든 만물이 생장하는 이 계절을 우리가 보면서 살아있는 존재의 특성은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개혁하고 정진 하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불교는 변화의 종교다. 변화의 이치를 가르치는 종교다.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니까 그 변화에 맞춰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
경전 내용을 한 번 더 보도록 하겠다.
5. 비유에서 법을 밝히다.
36 여러 비구들이여, 여래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여래는 지금 그대들의 인솔자가 되었느니라. 죽고 사는 번뇌의 악도(惡道)는 험난하고 먼 것과 갈 만한 데와 건널 만한 데를 알건마는, 중생들이 다만 일불승만을 들으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친근하려고 하지도 않느니라. 곧 생각하기를 ‘부처님이 되는 길은 멀고도 멀어서 오래오래 애쓰고 닦아야 이룰 수 있으니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은 그들의 마음이 겁이 많고 용렬한 줄 알고 방편을 써서 중도에서 쉬게 하기 위하여 두 가지 열반을 말하였느니라.
만일 중생이 두 번째 지위에 머무르면, 그때에 여래는 이렇게 말씀하느니라.
‘그대들은 할 일을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며, 그대들이 머물러 있는 지위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울 뿐이니라. 마땅히 잘 관찰하고 헤아려 보라. 얻었다는 열반이 진실한 것이 아니니라. 다만 여래가 방편으로써 일불승에서 나누어 삼승을 말한 것 뿐이니라.’
37 마치 저 인솔하는 사람이 쉬어가기 위하여 조작하여 만든 마을과 같으니라. 이미 편히 쉰 것을 알면 다시 말하기를 ‘보물이 있는 곳이 멀지 아니하고, 이 마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조작하여 만든 것이니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천지만물도 마찬가지만 이 특성을 잘 살려야지 그렇지 못하면 그 순간 바로 죽은 사람이다.
죽은 것은 변화가 없고 발전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없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노력하고 발전하고 뭔가를 위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부처님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바르게 잡아주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유익하게 ‘이런 방향으로 내가 가야 되겠구나’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 준다.
우리 인간 개개인의 삶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학업의 문제라든지 산업의 문제라든지 농업이니 상업이니 어업이니 등등 심지어 도둑이니 사기꾼이니 그 모든 사람들의 바라는 바, 목표하는 바가 각자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바람직한 그 길을 향해서 노력을 쏟아야 참으로 보람이 있고 뜻이 있다. 다른 방향으로 그렇게 하면 세상이 어지럽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많이 준다. 올바른 방향으로 취사선택을 잘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법당에 와서 부처님 슬하에서 나의 성장과 발전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하고 모색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인생길을 바르게 가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이 달라진다.
큰 소나무 사이에 있는 칡넝쿨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하늘로 죽 곧게 바르게 솟아올라간다.
칡넝쿨과 같이 옆으로 땅으로 기어가려는 존재가 설사 많다 하더라도 그들도 또한 주변에서 바르게 성장하려고 하는 소나무 덕분에 곧게 올라가는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바르게 노력하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주변의 칡넝쿨과 같은 사람도 다같이 바르게 살게 된다.
종교인의 역할, 특히 불교인은 마치 저 숲의 소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소나무를 통해서 다른 작은 잡목들도 죽죽 곧게 뻗어가는 것이다.
세상을 살펴보면 참 험악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가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도 또한 바르게 성장하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교정이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게 된다.
화성유품은 중간에 잠깐 쉬었다 가도록 부처님이 허락한 잠깐의 쉼터다. 그러나 잠깐 쉬었다 가는 쉼터일 뿐이다. 또다시 보다 더 나은 내 삶의 발전을 위해서 나에에 보탬이 되는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런 교훈이 화성유품의 교훈이다. 오늘 법화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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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또다시 보다 더 나은 내 삶의 발전을 위해서 나에게 보탬이 되는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눈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고 싶은 참으로 달콤한 감로수 법문입니다...고맙고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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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생명의 본래의 임무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성장하는 일이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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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나무 사이에 있는 칡넝쿨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하늘로 죽 곧게 바르게 솟아올라간다....불교인은 마치 숲의 저 소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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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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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바르게 노력하고 바르게 살려는 마음가짐, 인생길을 바르게 가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이 달라진다. 고맙습니다. _()()()_ 조금 우울하게 생각했던 일들, 시간의 치유법! 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어요. 사랑스런 마음이 집착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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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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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감동. 나무묘법법화경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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