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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
[충격] 한순간에 사라진 해양대제국 백제의 패망지는 중국 산동성
2008/04/30 ⓒ pluskorea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장문이라 다음과 같이 3부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1부) 일제가 조작한 백제의 왕도 부여
(2부)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왔을까?
(3부) 백제멸망과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백제의 도읍이라는 충남 부여는 백제의 도읍일까? 2012/06/04
백제 패망전쟁이 과연 한반도에서 일어났을까? 2013/03/04
인기가수 주현미가‘쌍쌍파티’로 가요계에 데뷔하면서 불러 히트한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백마강>이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님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면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닯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위 노래는 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수도 사비성에서 패망하는 백제를 그린 노래로 애절함이 서려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항상 심금을 울리게 만든다. 그것이 주현미라는 가수의 노래솜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 잃은 망국의 아픔이 절절이 서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과연 백제가 패망한 사비성은 과연 충남 부여가 맞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노래 가사에는 백제 패망시의 중요한 지명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백마강과 황산벌이다. 그 곳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 부여의 낙화암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원래 금강의 지류인데 부여 근처에 와서 역사적으로만 백마강으로 둔갑한다.
전 문화재청장과 일본인이 답사한 부여는 백제의 왕도인가?
아래는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의 베스트셀러였던 기행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329쪽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인용) 부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원 세상에, 부여가 이렇게 작을 수 있어요?”
“아니, 부여가 아직까지 읍이었단 말예요?”
“아직도 관광호텔 하나 없다고요?”
부여는 정말로 작은 읍이다. 인구 3만 명에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Km도 안되는 소읍이다. 그래서 가람 이병도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허망부터 말했다. 부여에 대한 이런 허망은 어쩌면 우리 머리 속에 은연중 들어앉은 부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여는 백제의 123년간 도읍지로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 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퇴락한 풍광뿐인 것이다. (인용 끝)
일본인들은 백제가 일본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고도였다고 하는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에 관심이 아주 많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전부 실망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고도가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풍납토성, 공주, 부여가 백제의 왕도로 조작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인 1937년 일본인이 쓴 기행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용)“정작 부여에 도착하니 시가지라고 하는 것이 함석지붕과 나무판자집들이 두 블럭 정도 줄지어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안쪽으로는 울타리도 없는 초가지붕에 박이 널려있는 평범한 시골풍경뿐이어서 도저히 자신이 생각한 부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여를 다녀온 뒤 그가 다시 친구들을 만나서 부여를 가본 적이 있느냐 물으니 모두들 아직 못 가봤다고 대답해서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부여는 이처럼 가보지 않은 자에게는 환상을, 가본 자게는 실망을 주는 곳으로 어떤 답사객은 “꼭 네다바이 당한 것 같다.”고 까지 했다.”
현재 부여에 가서 백제 유적으로 만나는 것은 오직 정림사 오층석탑 하나뿐이다. 또 있다면 반은 뭉개진 해발 100m의 부소산과 가난한 물줄기의 백마강가의 낙화암이 있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부여에 오면 우선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고란초라도 봐야 부여에 다녀왔다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소산에 오르는 사람은 또다시 부여를 욕되게 말할 지도 모른다. 엉겹결에 보는 낙화암은 그 스케일이 전설에 어림없고, 고란사는 초라한 암자로 절 맛이 전혀 없으며, 부소산성이라는 것은 말이 산성이지 뒷동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잔망스러워서 무슨 전설과 역사를 여기다 갖다 붙인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인용 끝)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화유적을 관광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꼭 이 책이 들려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전문가의 눈에도 “부여는 과연 백제의 왕도인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 식민사관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어 있는 부여의 유적지들. 저렇게 좁은 곳이 700년 사직의 수도라니 말이 되는가?
그렇다.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그의 느낌대로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가 아니다. 일제는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백제의 수도로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조작하고, 논산을 황산벌이라 했고 금강을 백마강으로 조작해 버렸다.
그리고 노랫말로 허구의 삼천궁녀와 낙화암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흑치상지가 활동했던 임존성(任存城), 주류성(周留城)도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조작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반도사관의 이론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백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있었다고 사학계는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생겨난 엉터리 사학이론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되어 전라도 백제, 경상도 신라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지역주의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지역주의가 얼마나 허황되고 창피스럽고 무지한 것인지 사서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백제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증거
현 국사책에 나오는 백제의 줄거리는 백제는 B.C 18년 온조대왕이 하남 위례성(서울)에 개국했고, 전성기인 13대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병합하고 대륙에 진출해 요서/진평에 무역기지를 두었으며, 21대 개로왕 때 한강변에 제방을 쌓았으며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자, 아들 문주왕이 웅진(공주)로 천도하고, 26대 성왕 때 사비(부여)로 천도했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망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교과서 내용은 사실(史實)과 많이 다르다. 백제의 본거지는 대륙의 산동성이고, 패망도 역시 산동성에서 했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던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핵심은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잠시 대륙으로 진출한건지, 아니면 백제는 아예 대륙에 있었는지가 논쟁의 관건이다.
우선 아래는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증거들이다.
(1)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없는데, 이상하게 백제의 역사기록은 대륙이다.
(1) 근초고왕 때 한반도에서 대륙에 진출해 요서(遼西)와 진평(晋平)의 땅을 차지했다고 하는데 그곳은 산서성 남부에 있는 지역이다. 또한 백제의 고토를 대방고지(帶方故地)라고 하는데 그곳은 북부 하남성 일대이다. 그 이유는 대방현은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현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과연 대륙 깊숙히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까?
(백제의 도읍이라는 충남 부여는 백제의 도읍일까? 2012/06/04 )
(2) 북위와 5차례 큰 전쟁을 한 백제 동성대왕의 무대는 대륙이고, 동성대왕의 궁전인 임류각은 산동성에 있었고 거기서 죽었다.
(2) 북위와 5차례 큰 전쟁을 치룬 백제 동성대왕의 무대는 중국대륙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북위의 주력부대는 기병 10만이었는데 그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까지 온 기록은 문헌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북위의 1차 도읍인 평성(平城)은 낙양 북쪽에 있는 맹진 부근이며, 백제와의 전쟁 후 국력이 약해져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평음현 : 한나라 때 평음현이 설치되었으며, 응소가 말하기를 “평성의 남쪽에 있다. 옛날에 평음이라 했다.” 진나라 때 폐했다.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 동쪽이다. 삼국 위나라 때 하음으로 바뀌었다.
(백제의 도읍이라는 충남 부여는 백제의 도읍일까? 2012/06/04 )
(3)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를 멸하려면 중국 땅에서 대륙백제와 먼저 전쟁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고, 황해를 건너왔다면 당나라와 해상강국 백제와의 해전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5)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온다. (한반도에서도 부분일식을 볼 수 있기는 하다)
(6) 만약 한반도 백제가 본토라면, 본토의 20배 크기의 땅을 수백 년간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7) 인구의 역사로 보아도 백제의 수도는 산동성 일대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8) 백제의 8대 성씨가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다.
(9) 그 외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가 많다. (향도,조공,제방,기상,특산물, ...)
▲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가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도표에 따르면 백제의 최적관측지는 발해만 근처 북경지역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하나하나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지금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한반도에 있었는지 대륙에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부여박물관에 가면 부여에서 발견된 비문 탁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분명 내지성(奈祗城)으로 되어 있다. 이 탁본만 봐도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부여 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내저성 비문. 부여는 내지성이었지. 사비성이 아니다.
경기도 시흥시는 관내의 소래(蘇來)포구를 소정방이 왔기 때문에 소래포구라 한다고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의 이름은 소정방이 제주도에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정방폭포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또 부여를 흐르는 강이 백마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호국의 용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엉터리 같은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정방이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바위가 백마강에 조룡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무지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약발이 아직까지 듣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소정방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왔다는 것은 백제 패망지이므로 소정방의 위치를 추적해 보면 백제의 위치를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옆을 휘감아 도는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나, <삼국사기>와 <신.구 당서> 등 모든 역사기록에는 "백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서>에 보면 소정방은 백제패망 전에도 백강에서 낚시를 가끔 했다고 적혀있다. 그럼 소정방은 한반도 백마강까지 바다건너 낚시하러 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백강이 당나라의 영역이든가 국경선이었고, 백제와 당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 이어지는 백제에 대한 기사를 보시려면 이 지도를 참조하시면 이해가 빠르다. 2008/04/30
최후를 맞는 백제의 수도는 어디?
백제 패망전쟁이 과연 한반도에서 일어났을까? 2013/03/04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백제 마지막 왕 무왕의 아들인 31대 의자왕은 대외적으로 영토를 많이 넓히고 대내적으로 정치를 잘해 당시 당나라로부터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의자왕은 말년에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고 충신을 멀리 하고 간신을 가까이 두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렇게 기록된 이유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백제가 천하통일을 했다면 의자왕은 분명 명군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의자왕 2년(642) 8월 백제의 윤충 장군은 군사 1만으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머리를 베어 도성으로 보낸다.11월 의자왕이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막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단사학계는 대야성을 경남 합천으로, 당항성을 경기도 화성으로 비정했는데 과연 그럴까? (참고로 <신라본기>에는 백제의 대야성과 당항성 공격이 모두 8월로 기록되어 있어 서로 가까운 곳으로 보인다)
현 역사이론대로라면 경상도 지역에 있던 신라와 당나라와의 육지 통로는 고구리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있을 수 없고, 신라는 바닷길이 당나라와의 유일한 통로일 뿐이다. 그런데 왜 육지에 있는 당항성을 잃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가 끊겨졌을까? 즉 이 기록은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당나라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로 현 사학계의 이론이 반도사관으로 얼룩져 잘못되어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은 것을 그린 지도. 백제 멸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008/04/30
▲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가 막히려면 신라의 위치는 대륙일 수밖에 없다. 2013/03/04
여하튼 신라는 총체적인 국가 위기로 몰리고 김춘추는 개인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자체적으로 군사력이 약했던 지라 김춘추는 고구리를 찾아가 원병을 요청한다. 김춘추가 온 이유를 미리 간파한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데 우리나 그대들은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이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수도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낸다면 그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쟁에서 이긴 후에 옛 영토에 따라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仁義)로써 함께 다스리도록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원히 준수함을 계획함이 어떻겠소?" 라고 오히려 삼국이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김춘추는 듣지 않아 애석한 일이었다고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에게는 민족적 대업보다 백제군에 의해 비명에 죽어간 딸과 사위의 복수 만이 머리속을 맴돌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추는 연금된 곳에서 몰래 도망쳐 귀국했고, 진덕왕 2년(648) 이번에는 당나라로 찾아가 당태종 이세민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를 칠 원병을 요청한다. 당나라는 신라를 이용해 삼국 전체를 먹어치울 속셈으로 지원을 약조하자, 신라는 진덕왕 3년부터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자체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는 속국이 된다. 국가의 위기도 하나의 이유였겠지만 개인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위한 적개심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 백제를 멸하기 위해 스스로 이민족인 당나라의 속국임을 자청한 신라의 모습을 보면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명나라의 힘을 빌리기 위해 스스로 속국이 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660년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하여 13만 대군을 동원한다. 이 때 신라 무열왕이 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지원케 한다. 보통 군을 동원하여 직책을 내릴 때 정벌할 지역명을 따는 것이 상례이다. 당나라가 고구리를 공격할 때 이세적 장군에게 내린 직책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다. 참고로 요동은 산서성에 있는 고구리를 의미하며, 신구는 어디인지 현재로는 알 수가 없다. 김춘추의 직책인 우이(嵎夷)는 바로 백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이를 중국의 지도를 근거로 산동성 동부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으로 보아 우이는 산서성 남부인 요서(遼西) 지역에서 출발한 이족 즉 백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발해(대야택) 부근 황하변 하남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창업한 강태공이 제(齊) 땅을 다스리는 제후가 되어 봉지인 영구(營丘)에 도착할 무렵 래이(萊夷)의 군사들이 공격을 하는데 래(萊)란 영구 땅 주변에 사는 만족(灣族)들이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태공의 봉지인 영구는 현 북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일대로 그 결정적 근거가 위휘현 태공천에 있는 강태공의 무덤인 것이다. 중국은 하남성에 있던 제나라의 도읍을 산동성 임치로 지명 이동해 놓고 역사왜곡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백제의 중심지역.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한강변이 아니라 황화변이다. 숭산은 하남성 소림사가 있는 지역이다. 거기까지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이야기이다. 초록색 사각형 아래 항성(項城)이 바로 당항성이다. 백제의 패망지는 바로 이 지도의 산동성 안에 있다. 평원, 황산, 백마하, 사성과 비성(사비성), 부흥운동의 중심지 주류성, 석문(석가장)은 신라와 당나라가 싸우던 곳이다. 최치원전에 나오는 연, 노, 제가 이지역이다. 산동성 아래가 海지방이다. 백제의 수도로 들어가면서 이곳을 지나간 것을 두고 바다를 건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해 마치 황해바다를 건넌 것처럼 오인하기도 한다. 2008/04/30
▲ 중국의 하대 형세도 지도에는 우이가 산동반도에 그려져 있다.
▲ 북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태공촌에 있는 강태공의 묘. 이 부근이 원래 제나라의 땅이었다.
▲ 황하변 하남성에 조그맣게 있던 제,노,연나라가 각각 산동성과 북경 부근으로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되었다.
(번역) 우이 : <서요전> 우이가 사는 곳에는 여섯 가지 설이 있다.
(갑) <공정> 공표의 땅을 우이라 칭한다
(을) <석문> 마융이 말하길 우는 해우이고, 이는 래이(?夷)이다.
(병) <후한서 동이전> 이족은 아홉 종족이 있는데, 구이를 우이라 했다.
(정) <설문> 우산은 요서(遼西)에 있다. 일설에 우철이라 하며 양곡이다.
(무) <설사룡서고문훈> 우이는 해(海) 부근에 사는 모든 이족을 말하며 지금의 등주이다. 영해주를 우이라 했다. 현재 산동성 모평현이다.
(기) <동파서전> 우이는 동방의 해상에 있다.
(주: 海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내륙호수인 대야택 즉 발해를 말하는 것이며, 산동성 등주는 지명이동된 것이다.)
자고로 중국의 고지도에는 북경 이동과 한반도 지도와 지명이 없었다. 송나라 때 만든 지도인 우적도에도 만주와 한반도는 아예 그려져 있지 않다. 당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즉 백제 패망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제는 대륙에 없었고 한반도 서부에만 있었다고 보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이론이다.
대륙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여름 5월 26일 무열왕이 김유신을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도읍을 떠나 6월 18일에 남천정에 주둔하였고 당나라는 협주(莢州)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隋流東下). 6월 21일 무열왕이 병선 100척과 함께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 때 소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당도하여 군사와 회합하여 의자왕의 도성을 무너뜨리려 하오.”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우리 대왕이 지금 대군을 고대하고 계시는 터이라 만약 대장군이 오셨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리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학계에서는 남천정을 경기도 이천으로, 덕물도를 인천 앞바다 덕적도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위의 장면은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무열왕이 5월 26일 수도를 떠나 6월 18일 남천정에 주둔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의 경상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경기도 이천인 남천정까지 가는데 20일이 넘게 걸릴 정도인지? 물론 군대의 행렬은 일반인이 가는 것보다 더디므로 그렇게 걸릴 수도 있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백제에게 당항성(화성)을 빼앗긴 상태인데 남천정(이천)에서 어떻게 배를 보내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할 수 있을까? 도대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지명비정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가 협주(성산)를 떠난 날이 6월 18일인지는 문맥상 불분명하지만, 만일 6월 18일 떠난 소정방이 6월 21일 덕물도에 도착했다면 이는 분명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당나라 군대가 물길을 타고 동으로 내려온다(隋流東下) 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다가 아니라 상류 하류가 분명한 큰 강일 것이다. 중국은 협주(莢州)를 글자가 비슷한 래주(萊州)라 하면서 현 산동성 동부로 말하고 있으나, 협주일 가능성이 크며 莢(협)은 陜(협)자와 거의 같은 글자이므로 하남성 낙양 서북쪽 황하변에 있는 협주(陜州)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당나라 군대가 떠난 협주는 하남성 낙양 서북쪽 협주일 가능성이 높다.
<대청광여도> 지도에 협주가 보인다.
게다가 만일 덕물도가 인천 앞바다라면 당나라 수군은 고구리나 백제 수군의 공격을 먼저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배와 항해술로 황해를 횡단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고 분명 육지를 끼고 가는 연안항해를 했을 터인데 그럴려면 고구리 앞바다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6월 21일 덕물도에서 신라 태자의 영접을 받은 소정방은 약 20일 만인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인천 앞바다에서 충청도 금강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릴 리가 없고, 무열왕이 소정방의 백제 도착 약 40일 전인 5월 26일에 먼저 도성을 출발했는데 과연 그렇게 미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을까? 한반도 경주에서 출발해 경기도 이천에 진을 치고 태자를 인천 앞바다까지 보내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육로로 올 필요 없이 해로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무열왕 출발에서부터 백제의 기벌포에 소정방이 나타나기까지 40일 걸렸다는 것은 땅덩어리가 큰 곳에서 벌어진 상황이지 좁은 한반도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상황이다. 위와 같은 여러가지 이유로 신라 태자가 배 100척을 거느리고 소정방을 영접한 곳인 덕물도는 한반도의 인천 앞바다가 아니라 바로 대륙 어딘가에 있는 백제의 영토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사학계에서는 당나라가 중국에서 떠나 한반도까지 오려면 그 정도는 걸린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뭐 하러 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5월에 소정방을 맞으러 먼저 출발한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3~4일이면 경주에서 백제 국경까지 가고도 남음이 있는데 40일 전에 움직인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하려는가?
기록과 같이 무열왕과 김유신이 소정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도착 후 모든 작전계획이 실행된 것을 보면, 무열왕과 김유신과 소정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런 스토리가 엮이지 않는다. 다들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남은 것이다.
▲ 식민사학계의 지명 비정으로 그린 백제 패망도는 앞, 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 백마하, 주류성, 해, 사수는 사성이 있는 곳, 황산은 계백장군이 패한 곳, 래는 동성대왕 시절 임류각이 있던 곳,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 서화는 기자가 살던 곳, 바로 이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다. 패망시 지명이 여기 다 들어있다.
현 국사책의 이론은 당나라는 서쪽 바다 건너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이고, 신라는 동남부이다. 기록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먼저 만난 후 백제로 간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배가 신라바다까지 가야 하는데 백제 앞바다를 거쳐야 하므로, 당연히 신라가 황해바다 어딘가에서 영접을 했을 것이다.
현재 사학계는 신라태자가 덕적도(옹진 앞바다)로 영접을 갔다 하는데, 거긴 백제 또는 고구려 지역으로 해상강국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신라 배 100척을 가만 놔둘 리가 없고, 또 해전이 벌어졌다면 태자와 소정방이 참전한 해전이므로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전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고구려/백제는 수군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이 상황은 대륙에서 발생한 전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는 당연히 당나라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백제와 전투를 시작한다. 첫 전투가 황산전투라고 치고 다음의 상황을 보자. 김유신과 계백의 5번의 전투가 얼마나 소요되었는지 몰라도 최소한 10일 이상이다. (하루 전투해 져서 다음날 재정비해서 그 다음날 또 도전했다 하더라도 최소 10일은 걸린다.)
덕적도와 기벌포가 같은 한반도 내에 있었으면 이렇게 늦게 소정방이 도착할 리가 없다.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를 만난 후 출발한 소정방의 첫 전투지인 기벌포까지 그렇게 오래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린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7월 9일 김유신이 황산(黃山)의 평야로 나가 백제의 계백장군과 전투를 벌여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다가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충천한 신라는 백제군을 격파한다. 7월 12일 나당연합군은 드디어 백제 도성인 소부리(所夫里)를 포위하자, 13일 의자왕은 웅진(熊津)성으로 피신하고, 18일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게 된다. 8월 2일 무열왕 김춘추는 의자왕으로 하여금 당하에 앉히고 술을 따르게 하는 수모를 준다. 9월 초 소정방은 의자왕 및 왕족과 신하 등 93명과 백성 12,000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국가가 썩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적의 기습을 예측치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단 몇 번의 전투에 패해 수도가 무너지고 왕이 갑자기 항복해 패망한 것이다. 즉 국가 실력으로 볼 때 그렇게 쉽게 패망할 정도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상대의 기습공격에 카운타 펀치를 급소에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 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건 흑치상지가 벌인 부흥운동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그 K.O 펀치란 과연 무엇이었까?
▲ 백제 부흥운동의 주인공 흑치상지의 고향은 중국대륙 남단. 여기까지 백제가 있었단 이야기이다. 고향이 이곳인 흑치상지가 한반도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했다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봐야 한다.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그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왔다는 걸 믿는 사람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다. (다음 회에 자세히 소개됩니다)
<2부에서는 “백제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후”와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 백제를 멸했나?”가 연재됩니다. 또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가 지난 4월 22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의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현재 브레이크뉴스 관계자는 본지 성 훈 칼럼니스트와 송기옥 칼럼니스트와의 공개적인 토론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두 칼럼기사를 함께 실었음을 독자 제위께 알려 드립니다. 이를 위해 빠른 기간에 두 칼럼니스트를 통해 서로의 주장을 실을 예정에 있습니다. 편집자 주>
[출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 (대륙 삼국설 1)|작성자 jajuw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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