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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불욕(欲不欲)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낸다는 뜻으로,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欲 : 바랄 욕(欠/7)
不 : 아닐 불(一/3)
欲 : 하고자할 욕(欠/7)
출전 : 도덕경(道德經) 왕필본(王弼本) 64章
이 성어는 도덕경(道德經) 왕필본(王弼本) 64章에 나오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그 안정된 것은 유지하기가 쉽고, 그 징조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대처하기가 쉽다.
其脆易泮, 其微易散.
그 연약한 것은 깨뜨리기가 쉽고, 그 미세한 것은 흩어 버리기가 쉽다.
為之於未有, 治之於未亂.
아직 생겨나기 전에 처리하고, 아직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야 할 것이다.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아름드리나무도 털끝만한 씨앗에서 생겨나고, 9층 높이의 누각도 한 삼태기 흙에서 쌓는데서 시작되고, 천리의 먼 길도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된다.
為者敗之, 執者失之.
억지로 무엇을 하려는 자는 실패하고, 집착하여 놓지 않으려는 사람은 잃어버린다.
是以聖人無為故無敗, 無執故無失.
이런 까닭에 성인은 억지로 무엇을 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慎終如始, 則無敗事.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항상 거의 성공될 무렵에 실패하는 일이 많으니, 나중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眾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為.
이런 까닭에 성인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여러 사람들이 지나치는 바를 되돌림으로써 만물이 있는 그대로를 돕고 감히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64장
○ 治之於未亂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리라.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안정되었을 때 유지하기 쉽고, 아직 조짐이 없을 때 처리하기 쉬우며,
연약할 때 부수기 쉽고, 미세할 때 흩뜨리기 쉽네.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그러므로) 아직 일이 생기기 전에 처리해야 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야 하네.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새싹에서 생겨나고, 구 층 누대도 한 줌 흙에서 올라가며,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네.
爲者敗之, 執者失之.
억지로 도모하고자 하는 자는 실패하고, 억지로 잡고자 하는 자는 놓치게 되네.
是以聖人, 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그러므로 성인은 억지로 하지 않으므로 실패하지 않고, 억지로 잡지 않으므로 놓치지 않네.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사람들의 일은 거의 완성 단계에서 실패하곤 한다네.
愼終如始, 則無敗事.
마지막도 처음처럼 신중히 한다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是以聖人,
欲不欲, 不貴難得之貨;
敎不敎, 復衆人之所過.
그러므로 성인은 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하기에,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고, 가르치지 않음을 가르쳐 사람들이 짓는 허물을 회복시키네.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이런 식으로 성인은 만물의 '저절로 그러함'을 도울 뿐 감히 억지로 도모하지 않네.
[해설 1]
이 장은 구성이 복잡해 예전부터 논란이 많았다. 가령 해동(奚侗)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억지로 도모하고자 하는 자는 실패하고, 억지로 잡고자 하는 자는 놓치게 되네. 그러므로 성인은 억지로 하지 않으므로 실패하지 않고, 억지로 잡지 않으므로 놓치지 않네(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4구는 위 아래의 문장과 연속적이지 못하다. 이 부분은 29장의 문장으로, 29장에서 아래 두 구가 떨어져 나가고 이 64장으로 잘못 끼어든 것이다."
(老子集解)
마서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고 진고응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반면 고명은 문제가 되는 위 4구가 백서본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해동 등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재논박하였다. 그러나 현재 죽간본을 통해 살펴보면, 본 64장은 서로 다른 두 개 의 장이 하나로 묶인 형태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바로 앞 장의 후반부에 이어,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커지고 어려워지기 전에 미리 처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안정되었을 때 유지하기 쉽고, 아직 조짐이 없을 때 처리하기 쉽고, 연약할 때 부수기 쉽고, 미세할 때 흩뜨리기 쉽듯이 말이다.
이 점을 일깨우기 위해 노자는 다시 아름드리의 거대한 나무, 구 층 높이의 높은 누대, 천 리의 먼 길도 그 초기 단계에서는 아주 사소하고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무위의 중요성과 그 실천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반부가 바로 앞 장의 후반부와 연결된다면, 이 부분은 오히려 앞 장의 전반부의 내용과 서로 통한다.
억지로 도모하고자 하는 자는 실패하고, 억지로 잡고자 하는 자는 놓치게 되네(爲者敗之, 執者失之)는 앞서 29장에서도 나왔던 말로, 인위와 작위에 따르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를 뒤집어 보자면, 노자는 이 말을 통해 사람들이 무위를 실천해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일은 거의 완성 단계에서 실패하곤 하네(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는 인간이 범하기 쉬운 인위와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추진해 갈 때 처음에는 매우 신중을 기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의 자연스러운 형세와 흐름을 따를 뿐 거의 무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일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되면, 어느 새 처음의 그 초심이 사라지고 점차 조바심을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지쳐가면서 어서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 빨리 이 일을 끝내고 홀가분한 상태에서 좀 쉬고 싶다는 생각, 이 일 때문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다른 일들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다보면 방심을 하게 되고, 방심을 하다보면 무리를 하게 되며, 무리를 하다보면 결국 대충 마무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한다(欲不欲)는 개인의 주관적인 의지를 버리고 무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위와 작위는 곧 인간이 지닌 욕망의 또 다른 표현들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역하고 무리를 행한다는 것은 곧 개인의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멈추면 인위와 작위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태, 즉 욕망이 사라진 경지에 이른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이처럼 욕망이 사라지면 그 어떤 얻기 어려운 재물도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가르치지 않음을 가르친다(敎不敎)는 2장에서 나온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를 말한다. 성인은, 즉 참된 지도자는 백성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자주 명령하지 않는다. 지도자는 백성의 허물이 있으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린다. 지도자는 백성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고도 그 공을 자신의 것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런 것이 바로 '가르치지 않음을 가르친다'의 의미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도자는 백성을 진심으로 복종시키고, 혹 백성에게 허물이 있으면 백성 스스로 그 허물을 고치도록 유도한다.
요컨대 참된 지도자는 인위를 멀리하고 욕망을 버리며, 백성의 본성을 따라 그 본성이 저절로 그러하게 흘러가는 방향이나 도와줄 뿐, 감히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면서 억지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이루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설 2]
64장은 기본적으로는 63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위태로운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작은 조짐이 보이기도 전에 다스리는 것이 좋다는 취지이다. 그래서 64장은 안정되어 있을 때 (위태할 것을 미리 대비하면) 지키기 쉽고, 아직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위태함을 없애는 일을) 도모(대비)하기 쉽고, 무를(취약할) 때 녹이기 쉽고, 미세할 때 흩트리기 쉽다(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는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다음에는 이러한 사례들을 정리하는 이론이 제시된다. 아직 있(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대비)하고, 아직 혼란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스린다(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그리고는 그 이유에 해당하는 사례들이 다시 제시된다. 한 품에 안기는(아름의) 나무도 가는 털끝에서 성장하고, 구층의 높은 대도 (한 줌의) 쌓은 흙에서 세워지고, 천리 길도 한걸음에서 시작된다.(合抱之木生於毫末 九層之臺起於累土 千里之行始於足下)
다음은 실패(失敗)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제시된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위의 취지에 따라 처음부터 실패할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리가 먼저 제시된다. 해 놓은 것이 있으니 무너지고, 잡은 것이 있으니 잃는다(爲者敗之 執者失之). 그래서 이러한 이치를 아는 성인은 (처음부터) 하지 않으니 무너질 것이 없고, (처음부터) 잡지 않으니 잃을 것이 없다(是以聖人 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성인에 비해 백성들은 항상 실패를 많이 한다. 심지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갈 마지막 즈음에도 실패를 한다(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이것은 마지막까지 처음처럼 신중하면 실패하지 않는데도 말이다(愼終如始 則無敗事).
이것을 아는 성인은 그래서 (처음부터 삼가여)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상태에 지속적으로 머물고자 하는) 욕심을 내는데, (예를 들어 뭇 사람들이 서로 가지려고 하는) 구하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그리고 (처음부터 삼가여) 배우고자 하지 않는 (지식으로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지 않는) 배움을 추구하는데, (예를 들어) 뭇 사람들이 허물로 여기는 것(무식한 상태)으로 돌아온다(學不學, 復衆人之所過). 여기에 비해 뭇 사람들은 재화와 학벌을 귀하게 여기고, 가난하거나 학벌이 낮은 것을 허물로 여긴다.
그렇지만 성인은 그들이 허물로 여기는 그 낮은 자리에 돌아가고자 한다. 가장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상태를 유지해서 입을 고급화시키지 않는 것과 같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상태로 가려고 하는 욕심(欲不欲)과 (학벌을 높여서 출세 성공하기 위한) 배움을 추구하지 않는 배움(學不學)은 모두 인위적인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성인의 이러한 행위는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듯이 혹은 있는 그대로 있듯이, 만물의 자연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기 위한 것으로 감히 (처음부터) 인위적인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63장에서는 위무위(爲無爲), 사무사(事無事), 미무미(味無味)가 있었는데, 64장에는 욕불욕(欲不欲)과 학불학(學不學)이 나온다. 같은 맥락이다. 위무위(爲無爲)에서 앞의 위(爲)는 긍정적인 의미인 자연으로의 복귀(復歸)이고, 무(無) 뒤에 나오는 위(爲)는 부정적인 의미인 인위적(人爲的)인 위(爲)이다.
사무사(事無事), 미무미(味無味), 욕불욕(欲不欲), 학불학(學不學)도 동일한 구조이다. 세 글자 중 뒤의 글자인 인위적인 위(爲), 사(事), 미(味), 욕(欲), 학(學)은 모두 백성들이나 뭇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구하기 힘든 재화, 명예, 권력, 지위 등을 지녀 남보다 잘났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인은 바로 그런 생각이야 말로 위태로움의 시작이며 불행의 씨앗임을 알고 원천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원천 차단의 방법이 세 글자 중 앞의 글자인 자연으로의 복귀인 위(爲), 사(事), 미(味), 욕(欲), 학(學)이다.
결국 64장은 성공과 실패에 대한 논의이다. 노자는 우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위태한 상황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아야 쉽게 해결한다고 한다. 그래서 안정이 되어 있을 때 유지하기 쉬우며, 위태한 상황에 빠질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조치를 취하기 쉽다고 한다. 만약에 그런 조짐이 나타나더라도 무를 때 녹이거나 미세할 때 흩어버리는 것이 쉽다고 한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백성들은 성공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실패하기 쉽다. 이유는 재화획득과 학벌추구를 통한 자연에 역행하는 위태한 상황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성인은 무위(無爲)와 무집(無執)과 욕불욕(欲不欲)과 학불학(學不學)을 통해 자연에 순종하는 신중함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성공하기 쉽다.
[해설 3]
이번 왕필본의 64장은 백서본에서는 27장에 해당한다. 내용이 다른 상,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곽점본에서는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는데, 백서본에서 엮을 때에 한장으로 묶은 것 같다.
상부 문단의 내용은, 아직 유위행의 수행을 하는 수행자에게 가르쳐주는 내용인것 같으며, 마음이 안정되면 평온함이 유지되어, 이 생각없는 상태에서 평온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수행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즉 생각이 나오기 이전에 머무르고, 그 생각이 없는 무심상태를 유지하는 수행을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하부 문단의 내용은, 최종 절대바탕의 도에 근접한 상근기 구도자에게 일러주는 내용으로써, 도를 구하려고 의도적인 수행을 하면 도를 얻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의도적인 수행 행위를 그치고, 나를 버린 자연스러운 무위행으로써 도에 다가가라고 충고하고 있다. 마지막에 모든 지식과 수행마저 버려야만 도에 진입할 수가 있다고 일러주고 있다.
이번 해석에서도 기존의 해석서들과 좀 차별나게 해석된 부분이 다소 있다. 맨 첫 문단에서 기존의 해석서들은 '易'자를 '쉽다'라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여기서는 易자를 '평온함'으로 해석을 했다. 그 외에 다른 문장에서는 크게 차별나게 해석한 부분이 없는것 같다.
○ 其安也 易持也(기안야 이지야) : 마음이 안정되면 평온함이 유지된다.
其는 '마음' 또는 '생각의 움직임'을 말한다. 易는 거의 모든 도덕경의 해설서들이 '쉽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서 易는 '평온하다'는 의미로서 '평온함'이 주격으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통적인 노자 도덕경 해설 및 주석서들은 이 易자를 '쉽다'는 술어의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 64장의 전체내용이 첫번째 문단부터 그 뜻이 빗나가 있다.
기본적인 문장으로써 易持也는 '평온함이 유지된다'고 당연히 번역되어야 하는데, 모든 번역서들이 이 문장을 술어로써 해석을 해서 '유지하기 쉽다' 또는 '쉽게 유지한다'고 주격을 생략한 번역을 하고 있다.
이렇게 易자를 '~하기 쉽다, 쉽게 하다'고 번역을 한 것은 노자 도덕경 왕필본을 비롯한 초기의 주해서들이 모두 易를 '쉽다'고 해석을 했기 때문에 수천년동안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 검토없이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왕필본은 '其安易持'로 되어 있지만, 해석은 그대로 '마음이 안정되면 평온이 유지된다'고 해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번역서들이 문장의 주격(主格)를 생략한채, '안정되면 유지하기 쉽다'고 해석들 하고 있다.
'마음이 안정되면 평온이 유지된다'는 말은 '생각의 움직임이 없이 안정되면, 마음이 평온하게 유지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생각의 움직임이 없다는 상태는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無念)의 상태, 즉 자기존재감도 없는 아주 고요한 삼매상태를 말한다. 마치 깊은 잠과도 같이 자기 자신이 있다는 생각조차 없는 무심(無心) 상태를 말한다.
○ 其未兆也 易謨也(기미조야 이모야); 생각이 아직 일어나기 전에, 평온함이 꾀해져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 평온함이 꾸며져야 한다'는 것은 최초의 생각이 나오기 이전에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최초의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있다'는 존재느낌이며, 그 존재느낌이 나오기 이전상태로 유지하고 있어야 본래 바탕인 무심상태에 안주할 수가 있다. 그 상태에 안정시키는 것을 보통 일반적인 수행체계에서는 '내면으로 들어가 안정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문장도 역시 易가 '평온함'이라는 의미의 주격이다. 따라서 '易謨也'는 '평온함이 꾸며진다'고 직역하게 되지만, 이말은 생각이 나오기 이전의 무심상태로 유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의도적인 수행을 하게 되는데, 이 의도적인 수행시에도 '나'라는 생각이 나오기 이전의 평온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꾀 모(謀)로 표현한 것 같다. 謀자는 '꾀하다, 도모하다, 계획하다' 등 능동적인 수행행위를 말한다.
○ 其脆也 易判也(기취야 이판야) ;마음이 가볍게 들뜨면, 평온함이 갈라져 떨어진다.
脆(취)는 '가볍다, 물러지다, 부드러워지다'는 뜻으로 마음이 마치 얼음처럼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다가 녹아서 부드러운 유동성이 된다는 뜻이다.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判(판)은 '나눠지다, 갈라지다, 떨어진다, 분별하다' 등의 뜻이 있으므로 무심상태가 깨진다는 표현이다. 이 상태는 '나'라는 느낌이 마음 표면에 나타난 직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새벽의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순간에 의식이 꿈틀거리는 상태로 비유해서 이해하면 된다.
무심상태로부터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마음의 평온 상태가 대상을 분별하는 상태로 바뀌는 상태를 말한다. 마치 한물결도 없는 잔잔한 연못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잔 파도 물결이 생기면 연못물 표면의 고요함이 갈라지는 것처럼 묘사했다. 즉 전체가 일체인 순수한 마음상태에서 나라는 개체의식이 일어나면서 나와 세상을 나누고 분별하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는 상태이다.
○ 其微(幾)也 易散也(기미야 이산야); 생각의 미세한 일어남으로, 평온함이 흩어져 버린다.
微(미)는 '미세함, 아주 작은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생각의 움직임을 말한다. 이 微(미)자는 곽점갑본에서는 '幾(기)'자로 되어 있으며 '조짐, 기미, 낌새'의 뜻이 있으므로 생각이 움직이는 조짐, 낌새를 의미한다. 생각이 아주 미세하게 나타나면 마음의 평온이 흩어져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나'라는 느낌이 마음 표면에 나타나서 세상을 대상으로서 지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새벽의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자 마자 정신이 들고 내가 있고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로 비유해서 이해하면 된다.
정신이 막 깨어나면서 깊은 잠의 아무것도 모르는 지복상태가 깨져 버리고, 자기가 작은 육체를 가진 한 사람이라는 개인 동일시가 된다. 따라서 전체가 하나가 된 평온한 지복상태에서 작고 협소한 개인의식으로 분활되는 것이다.
위의 네 문단에 대하여 기존의 다른 해석서들은 어떻게 해석을 했나 잠깐 들여다 보자. 易자를 '쉽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문장의 주격(主格)이 생략되어 있다. 백서본과 왕필본의 두가지 대표적인 해석을 예시해 보자. 모든 노자도덕경 해석이 아래 예시된 해석과 거의 비슷하다.
▣ 백서본 해석 예시
안정되었을 때 유지하기 쉽고, 드러나지 않을 때에 도모하기 쉬우며, 연약할 때에 부수기 쉽고, 미세할 때에 흩뜨리기 쉽네.
▣ 왕필본 해석 예시
가만히 있을 때에는 쉽게 잡을 수 있고, 아직 낌새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꾀하기 쉽고, 연한 것은 녹기 쉽고, 미약한 것은 흩어지기 쉽다.
위에 예시한 해석과 같이 모든 해석서들이 易를 '쉽다'고 해석을 했지만, 무엇이? 유지하기 쉽고, 도모하기 쉬우며, 부수기 쉽고, 흩으러지기 쉬운지, 명확하게 이해가 잘 안된다. 그 주체가 생략되고 없어서 명확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애매모호하여, 대략 읽는 사람이 적당히 상상하면서 짐작으로 (그것인가? 하고) 때려 잡을 수 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본 해석에서는 앞문장의 其는 '마음' 또는 '생각의 움직임'으로, 뒷문장의 易는 '평온함'이라는 주격으로 분명하게 이해되도록 해석을 했다.
○ 爲之於其未有(위지어기무유); 수행은 생각이 아직 나오지 않을 때에 해야 하며.
爲(위)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구도 수행'을 말한다. 其未有(기무유)는 '아직 생각이 없는 상태'이다. 수행은 생각이 아직 나오지 않을 때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나'라는 느낌조차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기초를 닦는 수행자 지망생들은 이 '아무것도 알수없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 이전에는 구도자라기 보다는 유치원 단계의 예비구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라는 느낌이 나오는 그 지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유치원 단계를 벗어난 구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개인육체와 마음, 현상세계가 무지로부터 비쳐진 환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나오기 이전에 안정되게 머물 수가 있다.
○ 治之於其未亂也(치지어기미난야): (생각의) 다스림은 생각이 아직 어지럽게 움직이지 않을 때에 해야하오.
생각의 다스림이란 쓸데없는 망상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알려진 대상과 망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망상과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이끌려 다니게 된다.
집착과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망상이 나오기 이전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첫생각이 나오기 이전에 머물러 있으면 망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데, 그 첫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나'라는 개체적 정체성을 말한다. '내가 있다'는 첫생각이 없으면 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이 어지럽게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기본 스크린 위에서 비쳐지는 것이므로, '내가 있다'는 생각 이전에 머물러 있어야 생각을 다스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내면 속에서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온갖 망상의 어지러운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 合抱之木 作於毫末(합포지목 작어호말); 아름드리 나무도 털끝같은 싹에서 일어나고
크게 성장한 나무도 처음에는 아주 가는 털끝과 같은 어린 싹에서 부터 나오듯이, 이 무한한 우주세계도 '내가 있음'이라는 하나의 존재 핵점에서 나온다.
○ 九成之臺 作於(卄累)土(구성지대 작어누토); 아홉층 누대도 한삼태기 흙에서부터지어지며
거대한 높이로 싼 높은 9층 탑도 처음에는 흙 한삽부터 쌓아올렸다는 말이다. (卄累)자는 '삼태기 누자'이다.
○ 百仞之高 始於足下(백인지고 시어족하);백길 높이도 발바닥 밑에서부터 시작한다.
백길이나 하늘로 뻣친 높은 곳도 처음에는 발바닥 땅밑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위의 세가지 문장은, 일이 크게 확대되기 이전에 처음의 아주 미세한 때부터 아예 그 싹부터 다루어야 된다고 말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예를 들었다.
이 세상은 의식으로 형성된 거대한 생각의 나무와 같은 것이며, 그 생각의 나무가 나온 뿌리는 바로 존재의식이라는 작은 씨앗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씨앗에서 실뿌리가 나오기 이전을 깨쳐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도 수행은 마음이 나타나기 이전의 무지상태, 즉 나라는 생각이 나오기 이전의 무심상태에서 안정적으로 머무르는 수행을 하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는 아직 유위행(有爲行)의 수행에 힘쓰고 있는 기초 수행자들에게 가르쳐 준 말씀이다.
이번 문장부터는 유위행(有爲行)의 수행을 넘어선 상근기 구도자들에게 가르쳐 주는 무위행이며, 절대본체에 안주하기 위한 일종의 최종적인 보림과정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겠다.
○ 爲之者敗之(위지자패지) ; (도를 위해)억지로 수행 하려고 하는 자는 실패하고
일반적으로 도를 닦는 행위를 수행이라고 하며, 여러가지 명상이나 기도, 만트라 또는 요가, 단전호흡 등 많은 실천 방법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방법의 구도수행이 있고, 고금의 많은 도인들이 극기와 고난을 극복하며 자기생명 조차 희생시키면서 궁극적인 도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들이 인류의 정신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문장에서는 어째서 도를 구하기 위하여 수행을 하면 실패한다고 했을까?
보통사람이 처음에 도를 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전공부와 자기극복을 넘어설 수 있는 무욕수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구도자가 어느 단계에 까지 도달했는데도 여전히 특정 종교철학이념이나 수행방편에만 의존하여 그 속에서 묶여서 헤어나질 못하고 그 수행과 종교철학개념에 집착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자기가 믿고있는 종교철학이념과 수행방편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본래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최종 도에 들어가는 문이다. 이것을 바로 문 없는 문, 있는 그대로 무위자연의 길을 걷는 것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개인의식에서 벗어나 자기가 전체라는 것을 깨치기 위한 것인데, 의도적으로 수행하는 그 행위자체가 개인의지의 특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수행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식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도적인 수행을 과감하게 버리면, 자연히 개인의식과 욕망도 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행위자'라는, 행위의 주인공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에는 개인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가 육체 동일시에서 벗어난 전체 의식이 된다면 '내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자아관념이 없어지고, 전체흐름에 맡겨져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무위적인 자유이다.
저절로 흘러가는 전체 흐름 속을 타고 가므로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로써 걱정할 일도 없고 어떤 것에 집착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자유스러운 무위자연의 전체상태가 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인데, 자신을 억지로 개인이라고 여기면서 수행을 하고 있는 그 행위의 습자체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의지를 가지고 수행을 하면 도를 깨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충고는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아주 상근기의 구도자 부류에게는 적절한 말씀이긴 하지만, 아직 깨달음법에 대한 기초 개념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또는 기초적인 무욕수행으로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지 못한 일반인, 초급 또는 중급 구도자들에게는 바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벅찰 수도 있고, 부담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법을 처음 대하는 사람조차 이 무위법(無爲法)의 원리는 확실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앞으로의 수행에도 더욱 효율성을 높일 수가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우연스럽게 즉각적인 깨달음(敦悟)의 번개체험을 할 기회도 있을 것이다.
○ 執之者遠(失)也(집지자원(실)야) : (도를)억지로 붙잡으려 하는 자는 멀어지네(잃어버리네).
이말도 그 위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도를 얻겠다고 너무 집착하는 행위도 바로 개인의 욕망이며, 그러한 도를 깨치겠다는 욕망조차 마지막에는 내버려야 도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지금 현재 자기자신이 무엇이 옳바른 것이고, 무엇이 옳바르지 못한 것인지를 스스로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된다.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도를 닦고 있는 그 사람 자체(주체)는 자각하지 않고, 경전이론이나 수행의 경험에만 관심을 줌으로써 본래 내면의 실체인 자기 자신은 항상 소외시킨 채로 엉뚱하게 대상만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빨리 자각해야 한다.
그런 자기의 행위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그곳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체 그 자체인 도를 대상화시켜서 도를 깨치겠다는 욕망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한, 본래 道와는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다.
○ 無爲也 故無敗也(시이성인무위야 고무패야) ;이와같이 구도자가 억지로 행하지 않으므로 실패하지 않고.
구도자가 있는 그대로에 머물러서, 개인의지적인 행위자 의식이 없다면, 도를 얻는데 실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는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道라는 것이 무위(無爲) 그 자체라는 것이다.
○ 無執也 故無失也(무집야 고무실야) ; 집착이 없으므로 잃어버리지도 않네.
취하려고 집착한다는 것은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잘못 착각하여 찾아 다녔지만,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구태여 찾을려고 집착도 하지 않을 뿐더라, 잃어 버렸다고 여기지도 않는 것이다. 항상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으로 아무 할일이 없는 것입니다.(無事)
○ 民之從事也 恒於其成事而敗之(민지종사야 항어기성사이패지);사람들은 일을 할 때에 늘 거의 완성단계에서 실패하네.
이 문장은 가장 오래 되었다고 알려진 곽점갑본에는 없고, 그보다 시대가 어느 정도 흘러가서 나온 곽점병본 부터 나온 문장이라고 한다. 곽점갑본에는 이 문장 대신 '臨事之紀' '일에 임하는 기본 자세는'이라고 되어 있지만, 오히려 곽점갑본이 더 간단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원래는 없었던 문장인데, 세월이 감에 따라 누군가가 臨事之紀를 개조한 글이다. 이 문장은 아마도 밑에 있는 故愼終若始, '그러므로 마지막도 처음처럼 신중하라'는 문장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후대에 개조한 문장인 것 같다.
사람들이 일에 종사할 때는 항시 마지막 일이 완성될 즈음에서 실패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글에서 표현한 것처럼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실패하는 경우를 관찰해 보면 일이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서 좌절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렇다지만, 여기서는 구도자가 수행단계에서 마지막 최종 마무리를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아야 한다.
외부에서 보기엔 어느 단계에까지는 도달했지만, 본인 자신은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깨달아야 되겠다는 욕망을 놓지 못하고, 깨달음에 대한 지성적 욕구나 특정종교이념등을 완전히 놓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훌륭한 지혜가 많다하더라도, 아직 최종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깨달아야 되겠다는 욕심을 마지막까지 놓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다른 말로 아직 '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故愼終若始(고신종약시); 그러므로 마지막도 처음처럼 신중하면
처음 시작하는 마음처럼 마지막 마무리도 신중하게 조심하라는 말이다. 그동안 온갖 노력을 해서 목표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긴장이 풀어지게 되면, 그 동안에 노력한 보람마저 헛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도 처음처럼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구도수행도 최종 진아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실 아무리 수도를 오랫동안 하고, 경전을 수천권 왼다고 해도 범부나 다름없는 것이다. 또한 깨달음법에 대한 이론이나 경전은 하나도 몰라도 최종진아를 깨치면 그것으로써 구도수행을 끝나는 것이다.
그 마지막이라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무위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이 노자 도덕경에서는 반복해서 계속 가르쳐 주고 있다.
○ 則無敗事矣(칙무패사의); 곧 실패하는 일이 없네.
모든 것을 놓아 버리면 틀림없이 최종적인 도를 얻는다는 말이다. 최종적인 도를 얻는 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개체적인 '나'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 是以聖人欲不欲(시이성인욕불욕) ; 그러므로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며
欲不欲(욕불욕)은 '바라지 않음을 바란다'는 뜻인데, 이 밑의 문장인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문장과 연련해서 '무욕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성인은 원래 수행을 해서 무욕을 얻은 사람인데, 왜 또 굳이 새삼스럽게 '무욕을 바란다'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구도자에게 무욕(無欲)의 중요성을 강하게 심어주기 위해서 성인의 무욕상태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한 것 같다.
○ 而不貴難得之貨(이불귀난득지화);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도인은 무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귀한 재화라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금을 돌같이 여긴다는 것이다.
○ 敎不敎(學不學) 而復衆人之所過(교불교(학불학) 이복중인지소과); 가르침(말)없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지나쳐 버린 허물을 돌이켜 보도록 하네.
이 문장에서 곽점갑본은 敎不敎로 되어 있는데, 백서본은 學不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뒤의 문장인 而復衆人之所過, '사람들이 지나쳐 버린 허물을 돌이켜 보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보자면, 곽점갑본의 敎不敎가 백서본,왕필본의 學不學 보다 더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도 敎不敎, '가르침 없는 가르침'으로 해석을 했다. '가르침 없는 가르침'이라는 것은 일부러 사람들에게 직접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도인 스스로 무위적인 행동을 하므로서 사람들이 저절로 도인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다. 즉 도인은 '말없이 자연 무위적인 가르침'을 펼친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저절로 가르쳐 준다. 마치 자연의 온갖 생주이멸(生住異滅) 변화 현상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새삼 깨우쳐 주는 특별한 기회가 되는 것처럼 도인도 그렇게 무위적으로 말없이 가르쳐 주는 것이 敎不敎라고 볼 수가 있다. 물론 學不學도 배운다는 입장에서 敎不敎와 동일하게 무위자연적으로 배운다는 것이다.
而復衆人之所過에서 '사람들이 지나쳐 버리는 허물'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의 원래 본성을 잊어 버리고 사는 것을 스스로 되돌아 보도록 유도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개인존재가 아니고, 육체의 탄생과 죽음과는 관계없는 전체 의식이라는 진리를 깨우치도록 무위적인 가르침을 준다는 말이다.
○ 是故聖人能輔萬物之自然(시고성인능보만물지자연);이렇게 성인은 만물이 저절로 있는 그대로가 되도록 도울 수 있을 뿐,
이렇게 성인은 만물의 존재자체는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것을 깨우칠 수 있도록 말없이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죽음과 삶을 넘어서 있는 도의 절대 본체 그 자체임을 깨우치도록 인도해주는 도움만 줄 뿐이라는 것이다.
○ 而不能(敢)爲(이불능(감)위);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네.
성인이 의도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행위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무위적으로 그런 깨우침을 유도해 준다는 것이다. 마치 항상 저절로 빛나는 태양처럼, 성인은 보편적인 의식의 덕행과 자비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그 빛을 저절로 비쳐준다는 것이다.
곽점갑본에는 能자로 되어 있는데, 백서본, 왕필본에는 敢자로 개조 되어 있어서, 여기서는 곽점본의 能자로 해석을 했다. 두 경우 거의 비슷한 뜻이다.
이 64장은 구도자들에게 아주 유익한 교훈들이다. 전반부에서는, 유위행(有爲行)의 기본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생각이 나오기 이전의 무심상태에서 안정되게 머물러 있어야 된다는 가르침이며, 후반부에서는, 유위행을 마친 상근기 구도자들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수행마저 다 내버리고, 오직 무위행(無爲行)으로 되어야 최종 절대본체에 안주할 수가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 공부는 비움과 채움의 조화
노자 도덕경 48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
학문을 함은 나날이 채움이요, 도를 함은 나날이 비움이다.
공부는 비움과 채움의 조화라는 메시지이다. 비움과 채움이라고 하여 비움을 앞세운 것은 비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바로 채움 공부를 시작한다. 부모를 중심으로 주위 사람들을 통해 보고 듣고 겪으면서 세상을 배워 나간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속한 문화적 환경을 중심으로 앎을 쌓아나간다.
헌데 이 앎이 특정한 문화적 환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문제이다. 특정한 문화적 환경은 넓은 시야에서 보면 그만큼 치우친 것이고 편향된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단지 많은 책을 섭렵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외국 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책이나 여행도 문제를 완화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편견(고정관념) 때문이다. 성장기에 얻은 배움은 나를 이만큼 키워준 자양분인 동시에 내 몸과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웬만해서는 뽑아내기 어려운 습관과 편견으로 작용한다.
이 습관과 편견을 뽑아내지 않는 한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쌓고 다양한 배움을 얻어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기 쉽다. 자신의 습관과 편견에 맞는 정보만 선택하고 맞지 않는 정보는 자동으로 배제하기 십상이니까.
그래서 비움이 중요하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모든 것이 틀릴 수 있음을, 내 경험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할 수 있음을, 나의 확신이 실은 편견일 수 있음을, 그리고 내 습관이 내가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비움의 첫 걸음이다.
걸신들린 듯 게걸스럽게 섭취하던 잡동사니 정보를 줄여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것도 편견을 내려놓고 습관을 바꾸기 위한 비움의 방편이다.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얻더라도 역시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집착하지 않는 것은 채움 과정에서의 비움이다.
이렇게 해서 오로지 채울 줄만 알던 낡은 습관을 내려놓고 비울 줄도 알고 채울 줄도 아는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도덕경 구절 다음에는 이런 구절이 이어진다.
損之又損以至於無爲(손지우손이지어무위)
비우고 또 비우면 무위에 이르게 된다.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무위라고 하지만 아니함이 없다.
공부에서 비움을 강조하는 것은 비움이 먼저이기 때문이지 채움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비움만으로는 세상을 이롭게 하기 어렵다. 아니, 세상에서 살아가기조차 어렵다. 무엇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인 언어를 배우기 어렵고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렵다.
그래서 위 구절의 '무위(無爲)'는 '함 없음'으로 읽을 게 아니라 '집착 없이 함'이나 '욕심 없이 함' 또는 '무심으로 함'으로 읽을 것이다. 무언가를 해야만 '아니함 없음(無不爲)'이 성립할 수 있으니까. 노자께서 함곡관에서 윤희에게 도덕경을 써주신 것도 무언가를 한 것이다. 다만 자신의 말씀대로 '무위'로 하셨겠지.
노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실존 인물이라는 설에 따르면) 주나라 왕립도서관 관장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오로지 비움만으로는 그런 지식인이 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노자 스스로가 비움과 채움의 조화를 잘 이루신 분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공부가 비움과 채움의 연속이자 반복이라면 그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집착 없이 욕심 없이 무심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움은 곧 무심이요 채움은 곧 열심이니, 공부란 그 과정도 결과도 무심과 열심의 조화일 따름이다.
▶️ 欲(하고자 할 욕)은 ❶형성문자로 慾(욕)과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하품 흠(欠; 하품하는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谷(곡, 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欠(흠)이 입을 벌린 사람의 모양이며 欠(흠)이 붙는 글자 歌(가), 飮(음) 따위는 모두 입으로 무엇인가 함을 나타낸다. 후세에 心(심)을 더하여 欲(욕)이라 쓰고 보통 주로 慾(욕)은 명사, 欲(욕)은 동사로 쓴다. 먹을 것을 더욱더 하고자 하는 일, 먹을 것에 한하지 않고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欲자는 '~하고자 하다'나 '바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欲자는 谷(골 곡)자와 欠(하품 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谷자는 물이 흐르는 계곡을 그린 것으로 '골짜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골짜기를 그린 谷자에 입을 벌린 欠자가 더해진 欲자는 마치 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마시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欲자는 본래 과할 정도의 의욕이라는 의미에서 '욕심'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후에 欲자가 '~하고자 하다'나 '바라다'와 같은 '욕망'을 뜻하게 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心(마음 심)자를 더한 慾(욕심 욕)자가 '욕심'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참고로 실제 쓰임에서는 欲자와 慾자를 크게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欲(욕)은 욕구(欲求)의 뜻으로 ①하고자 하다, 바라다 ②장차 ~하려 하다 ③하기 시작하다 ④순하다 ⑤온순하다, 정숙하다 ⑥좋아하다, 사랑하다 ⑦편안하다 ⑧욕심(欲心), 욕망(欲望) ⑨애욕(愛慾), 색욕(色慾) ⑩희구(希求) ⑪마땅히, ~해야 한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본능적이나 충동적으로 뭔가를 구하거나 얻고 싶어하는 생리적 심리적 상태를 욕구(欲求), 자기만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욕심(欲心),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욕념(欲念), 사물에 대한 욕심의 기운을 욕기(欲氣), 무엇을 하거나 가지고자 하는 바람을 욕망(欲望), 한 때의 충동으로 일어나는 욕심을 욕정(欲情), 물러가고 싶음을 욕거(欲去), 애욕의 넓고 깊음을 바다에 비유한 말을 욕해(欲海), 불같은 욕심을 욕화(欲火), 욕정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더럽혀짐을 티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욕진(欲塵), 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의욕(意欲), 이익을 탐내는 욕심을 이욕(利欲), 사치하고자 하는 욕심을 사욕(奢欲), 큰 욕망이나 큰 욕심을 대욕(大欲), 하고 싶어하는 바를 소욕(所欲), 아주 큰 욕심을 학용(壑欲), 마음에 생기는 온갖 욕망을 정욕(情欲), 빨리 하고자 하면 도달하지 못함 또는 어떤 일을 급하게 하면 도리어 이루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욕속부달(欲速不達), 울려는 아이 뺨치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불평을 품고 있는 사람을 선동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욕곡봉타(欲哭逢打), 잘 만들려고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너무 잘 하려 하면 도리어 안 됨을 이르는 말을 욕교반졸(欲巧反拙), 그 사람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 뜻으로 원한이 뼈에 사무침을 이르는 말을 욕식기육(欲食其肉), 덮으려고 하면 더욱 드러난다는 뜻으로 나쁜일을 감추려 하면 더욱 밝게 드러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욕개미창(欲蓋彌彰), 사람의 욕정은 한량이 없으므로 절제하지 않으면 재화를 입는다는 말을 욕불가종(欲不可從),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데 아직 다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감정의 깊이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욕언미토(欲言未吐), 붓과 벼루를 태워버리고 싶다는 뜻으로 남이 지은 문장을 보고 자신의 재주가 그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는 말을 욕소필연(欲燒筆硯), 죽으려고 해도 죽을 만한 땅이 없다는 뜻으로 몹시 분하고 원통함을 이르는 말을 욕사무지(欲死無地), 물건을 보고 탐내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남을 이르는 말을 욕적지색(欲炙之色), 말을 타면 노비를 거느리고 싶다는 뜻으로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과 같은 말로 곧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나 죽여 없애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을 불구대천(不俱戴天), 묻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가히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불문가지(不問可知),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지위나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불치하문(不恥下問),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으로 마흔 살을 이르는 말을 불혹지년(不惑之年),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음을 일컫는 말을 불요불급(不要不急),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을 불요불굴(不撓不屈),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이르는 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등에 쓰인다.
첫댓글 난해한 도덕경 64장을 곽점본, 백서본, 왕필본의 예를 들어서 상세한 해설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가위 저녁되시기 바랍니다.
현곡 김성봉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