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떠들썩했던 새천년이라는 환상이 덧씌워진 때문인지, 나는 영혼을 뒤흔들 충격에 대한 기대와 배반의 두려움 사이에서 동요하며 올해의 신춘문예 시들을 읽었다. 제도화한 신춘문예에 대한 많은 이들의 비판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새해 벽두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이 시대에 그래도 신인들의 시에서 내심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새로움이다. 문단에 갓 발을 들여놓은 시인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기성 시인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한 욕심일 수는 없다.
올해의 신춘문예 시들은 내게 새로움이라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최영신의 〈우물〉(《조선일보》), 이승수의 〈고래〉(《동아일보》), 박성우의 〈거미〉(《중앙일보》), 조정의 〈이발소 그림처럼〉(《한국일보》), 이기인의 〈ㅎ방직공장의 소녀들〉(《경향신문》), 이덕완의 〈건봉사 불이문〉(《대한매일》), 최용수의 〈낙엽 한 잎〉(《세계일보》), 김규진의 〈집 속엔 길이 없다〉(《문화일보》) 등 주요 일간지의 시 당선작들은 작년의 당선작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일단 새롭다. 적어도 올해의 신춘문예 시들은 안전제일주의라는 노선을 택하지는 않았다. 시에서, 더구나 신인의 시에서 지나친 무난함은 낡음과 동의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워 보인다고 해서 무작정 좋아할 일은 아니다. 과연 진정 새로운 것인지,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를 조명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움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가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한국문학사에서 1930년대의 이상(李箱)은 낯설고 충격적인 새로움이었지만 2000년의 이상은 이미 익숙한 낡음일 뿐이다. 올해의 신춘문예 시가 진정으로 새롭다면 그것은 2000년의 한국시라는 기대치에 걸맞는 새로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당선시들 중에는 진정 새로운 시보다는 설익음이 새로움이라는 외피를 입은 시들이 더 많았다. 형식의 파격도, 소재나 주제의 독창성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새로워 보이지만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점이야말로 올해 신춘문예 시에 두드러지는 첫 번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선시들 중에서 형식상 눈에 띄는 시는 최영신의 〈우물〉이다. 유일하게 산문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다가 지나온 삶과 시간에 대한 성찰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다른 시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색다름이 이 시의 가치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우물〉에서 시인은 "고요"와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의 우물 속에 고여 있는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고 있는데, 깊이 있는 인식을 보여 주기보다는 장황하고 설명적인 어투로 감상의 흔적을 나열하고 있다. 구절구절 빛나는 표현은 영글지 못한 채 분산돼 있어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에도 시간은 흐른다는("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적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통찰의 시선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스러진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마지막 구절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시간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탐색을 보여 주지 못한 채 질문을 제자리로 환원하고 만다. 〈우물〉에서 보여 준 삶에 대한 성찰이나 시간에 대한 탐색은 새로울 게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새롭지 않음이 아니라 낡음조차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 시는 설익음이 새로움으로 둔갑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박성우의 〈거미〉와 조정의 〈이발소 그림처럼〉은 '얼마나 새로운가'라는 물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거미〉는 소문만 무성한 빈 집을 아이들이 거미집이라 불렀다는 부분에서 이용악의 〈낡은집〉을 연상시키고, 〈이발소 그림처럼〉은 낡은 이발소 그림을 묘사해 가는 시적 발상이 안도현의 〈이발관 그림을 그리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연상 작용은 새로움을 통해 극복되지 않는다면 이들의 시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새로움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물론 태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 〈거미〉에서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 〈이발소 그림처럼〉에서
〈거미〉는 허공에 길을 만드는 거미와 자살한 사내를 오버랩하면서 거미와 사내를 섬세하게 교직하고 있는 시이다. 은유의 직조에 힘입어 마지막 연의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는 의미가 살아난다. 한 인간의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살로 이끈 삶의 고통과 외압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거미〉의 가장 큰 장점은, 여백을 둘 줄 아는 점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삶에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사내를 자살로 이끈 보이지 않는 외압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발소 그림처럼〉의 주제도 마지막 문장에 담겨 있는데, 앞에서 유지되던 긴장이 마지막 구절에 와서 풀려 버린다. 낡아빠진 이발소 그림의 먼지 낀 듯 빛바랜 색채와 하루종일 잠을 자는 무기력한 삶을 병치시키며 간신히 유지되던 긴장이, 마지막에 와서 모든 것을 말해 버림으로써 무너져 버린다. 이 시에는 기성 시인들이 이미 사용한 표현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다행히 이러한 혐의는 낡고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발소 그림이라는 소재와 맞물려 어느 정도 상쇄되기도 하고 좀 더 긍정적으로 읽으면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백을 둘 줄 모르는 태도로 인해 이 시는 결국 새로움의 생산에 실패하고 만다.
2. 따뜻함이라는 무기
주제와 소재의 측면에서 드러나는 올해 신춘문예 당선시들의 주된 경향은 일상 현실을 끌어들이고 있는 시가 많다는 점이다. 〈우물〉과 〈이발소 그림처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에 노동 현실, 실직 등으로 인한 가난하고 신산한 삶, 분단된 현실 등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소재 및 주제의 선호도는 올해 신춘문예 시들이 대개 어둡고 퇴락한 정조를 띠고 있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상을 시로 끌어들이는 것은 90년대 시의 대표적인 경향 중의 하나였으므로 특기할 만한 것은 못 된다. 다만 개인의 삶을 곤고하게 만드는 사회 현실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점은 기억할 만한 변화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방법상의 문제는 현실을 시 속에 어떻게 내면화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각자의 답을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당선시들에 나타난 현실은 소재의 차원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다.
따뜻함을 표방한 이기인의 〈ㅎ방직공장의 소녀들〉과 이덕완의 〈건봉사 불이문〉을 통해 이 문제를 좀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의 피로한 삶을 그리고 있음에도 시 전체가 따뜻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목화송이처럼 포근하게 내리는 눈, 따뜻한 분식집, 눈사람의 웃음, 뜨거운 라면 국물, 소년에 대한 소녀의 낭만적 사랑 등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풍경으로 채색되어 있다. 시인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어린 소녀 노동자들의 건강한 생명력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삶이 피폐하다고 해서 모든 시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때로는 따뜻한 시가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따뜻함은 가장되기 쉽다는 데 있다. 전복의 시선을 통해 부정의 부정을 거쳐 도달한 따뜻함이 아니라면 감동 대신 무기력을 낳을 뿐이다. "ㅎ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에 엿보이는 감상의 흔적이라든가 "입김을 불고 있는 ㅎ방직공장의 굴뚝이, /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에 드러난 가벼움과 작위성은 이러한 염려가 기우만은 아님을 증명해 준다.
〈건봉사 불이문〉은 소재나 주제 면에서 특이한 작품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 중의 하나인 건봉사 불이문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선 두 개인 듯 하나이고 하나이자 전체인 불교적 사유와 둘로 나뉘어진 분단 현실이 나란히 놓인다. 이렇듯 거창한 주제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사실 이 시를 지탱하는 상상력은 '불이문'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온다. 금강산과 향로봉, 건봉사와 금강산 대웅전, 아내와 나는 모두 짝을 이루며 둘로 나뉘어 있으면서 포개져 하나가 되기도 한다. 남과 북만 원래 하나인데 둘로 나뉘어 있다. 작위적인 배치 아래 분단 현실은 단지 소재로 동원되었을 뿐이므로 갈등의 해결방식도 단순하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아내와 나는 "보살님이 준 콩인절미를 반으로 나누어 먹는다." 콩인절미를 나누어 먹는 행위를 통해 둘로 나뉜 갈등의 양상은 사랑의 행위로 치환된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사랑의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 이 시는 '불이문'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상상력이 맴돌고 있어서 깊이 있는 감동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따뜻함은 분명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따뜻함이라는 무기는 다루기가 어렵다. 삶에 대한 치열하고 예민한 정신의 열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따뜻함은 온정주의에 그치기 쉽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긍정하는 게 따뜻함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상상력의 진폭
이제 표현상의 문제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이번 당선작에는 유난히 하나의 비유를 축으로 하여 상상력을 전개해 나간 시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이러한 방법은 시에 구조적 완결미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상상력을 틀 안에 가두는 작위적인 시를 생산하기 쉽다는 결함을 갖는다.〈고래〉, 〈거미〉, 〈건봉사 불이문〉, 〈집 속엔 길이 없다〉, 〈낙엽 한 잎〉 등이 모두 이러한 특성을 일정 정도 지니고 있으나, 여기서는 이승수의 〈고래〉와 김규진의 〈집 속엔 길이 없다〉, 그리고 최용수의 〈낙엽 한 잎〉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래〉는 이번 당선시들 중에서 비교적 독특하고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 준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인천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가는 전철 안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크게는 전철 안을 고래 뱃속으로 보는 상상력에 기대고 있다. 그로부터 바다에 관련된 상상력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다소 도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위험을 벗어나는 힘은 '고래'가 가진 상징의 중첩성에 있다. 시를 읽어가다 보면 사내가 평생을 쫓아다닌 것이 "멸치떼"나 "오징어"가 아니라 고래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이 시의 '고래'는 구약성서 요나記에 나오는 죽음과 재생의 공간으로서의 고래뱃속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래뱃속 같은 공간에서 시를 읽고 있는 화자에게서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삶의 어둠에 초연하지 못해 책을 떨어뜨리는 화자의 모습은 다소 감상적이기는 하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습기와 일상의 좌절감에 예민한 모습이 신뢰가 간다.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울림을 갖는 이유는 이렇듯 상상력의 여닫음이 비교적 자유로운 데 있을 것이다.
〈집 속엔 길이 없다〉는 '집'과 '길'에 대한 상상력을 토대로 바쁜 일상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내밀한 삶의 꿈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시적이면서도 진부한 '집'과 '길'이라는 소재를 시인의 상상력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떠남과 머묾에 대한 사유를 보여 주는데, 그렇다고 해서 떠남과 길, 머묾과 집이 상식적으로 일대일 대응되지는 않는다. 물론 이 시에서도 길은 안주하지 않고 근거지를 떠나는 것을 뜻하지만, 일상에 쫓기는 시인에게는 매일 같은 길을 오가는 출근을 거부하고 집 속에서 뒹구는 것이 오히려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를 끊는 탈주가 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이 머무는 집 속에도 역시 그가 찾는 내면의 길은 없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이 시의 상상력에 힘을 실어 준다. 그러나 상상력이 이 시의 구조와 행복하게 만나지는 못했다. 네 개의 번호가 붙은 각 부분들은 단절의 지표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관계를 보여 줬어야 했다. 떠남과 머묾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은 그러한 구조를 감당하기에는 벅찼던 것 같다. 예수와 싯다르타, 혜능의 길, 비안개 속의 꽃무리들의 길을 거쳐 바다로 걸어들어간, 시인이 추구하는 내면의 길은 먼 길을 돌아서도 여전히 방황하는 꿈 주변을 맴돌고 있다.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라는 회의의 목소리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낙엽 한 잎〉은 상대적으로 빈곤한 상상력을 보여 주는 시이다. 용역 사무실에 나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 사는 실직자의 신세를 초겨울의 낙엽 한 잎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에서 상상력의 변주는 일어나지 않는다. 닫혀 있는 상상력으로 인해 이 시가 풍기는 쓸쓸함은 감상의 차원으로 떨어지고 만다.
4. 동요하는 시의 대지
2000년 신춘문예 시를 읽고 있으려니 몇 년 전에 본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파블로 네루다에 얽힌 일화를 소재로 한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그 영화에서 나를 감동시킨 것은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삶 자체가 시였던 한 우체부였다. 삶은 분명 시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답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고 산다.
세상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도 있는가 하면, 허울뿐인 이름도 많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신춘문예가 허명으로 가득한 제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에서는 문제점을 주로 지적했다. 세상이 다원화된 만큼이나 좋은 시를 보는 안목도 다양해진 듯하다. 여기저기서 시에 대해서, 좋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회의하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저마다의 완고한 기준이 쉽게 만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진정으로 좋은 시는 취향을 넘어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이번 신춘문예 시에서도 여전히 치열한 도전 정신과 패기가 아쉽다. 심사위원들에게나 당선 시인들에게나 새로움은 강박으로 작용했지만, 실체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섣불리 긍정과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태도도 신뢰가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선 시인들의 경우는 이제부터 비로소 시작이다. 강렬도를 가진 정신만이 진정한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가기 바란다. 지금이야말로 삶을 향한 열정을 언어의 힘으로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어야 할 때이다. 지금, 시의 대지는 우리의 발밑에서 다시 한 번 불안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문학사상》2000년 2월호)
― 이경수(문학평론가)
집 속엔 길이 없다
-김규진
1
신발을 숨겨버리고
전화도 끊어 버리고
종일 집 속에서 뒹군다.
---일찍이 출근하는 시인은 없었다.
숨쉬는 것은 오직 나와
베란다의 난초 몇 그루뿐.
내가 뒹구는 집을 꿈꿀 때
이 식물들은 떠나는 길을 꿈꿀까?
집은 하루 종일
수도꼭지로 마시고 솥과 냄비로 끊여내고
변기의 똥구멍으로 쏟아낸다.
---우리 시대에 '존재의 집'은 철거되었다.
가격의 단지가 서 있을 뿐이다.
몇 개의 길들이 문을 두드린다.
난초잎 두어 개가 흔들렸으나
기척을 느기지 못한 길들은 이내 돌아가 버린다.
열쇠의 구멍은 언제나 밖에 있다.
지친 나그네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2
기원전 588년
싯다르타는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에서 죽었다.
기원전 4년
예수도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 위에서 죽었다.
행복했으리라
존재의 집마저 짓지 않았던 그들은.
56번 도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포장되지 않은 길.
칡넝쿨이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비포장길을 달리다
낮술을 마신다.
목마름을 목마름으로 다스리기 위해
어데까지 가제예?
난데없는 주모의 물음.
마치 혜능에게 점심을 어디다 두었냐고 물었던 주모처럼.
낮술 때문에 길은 비틀거리고
3
갑작스런 흐드득 흐드득 비
해발 1,300미터 구룡령 넘어가는 길.
비안개는 뿌리고 차는 진창에 빠지고
---차를 버릴까?
나는 아직도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액셀을 북북 밝으며 간신히 한 굽이 돌아
아,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연보라색 도라지꽃.
비안개 속에서
수천, 수만의 길을 열고 있던 꽃무리들.
하늘도 언덕도 뭉개버리고
비안개를 타고 놀며 저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던 꽃무리들.
함께 비안개를 타고 놀며
교접의 뿌리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던
산비탈의 꽃무리들.
4
모든 길이 걸어 들어간 바닷가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넘어온 수많은 들과 산을 물 위에 띄워 보내며
꽃잎처럼 하나 둘.
또한 마음의 길까지도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길은 아직도 나의 발자욱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시인은 출근하지 않네
집 속에 길이 업네
이리로 오게
이리 와 걸어가세
바다의 밑바닥을.
한번도 걷지 않은 가슴 속의 황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의자
-김성용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거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닌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 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 외로워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 달라고 호소하지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 발 달린 짐승이다
거 미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술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더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ㅎ방직공장의 소녀들
-이기인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그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 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 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입김을 불고 있는 ㅎ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소녀들이 마지막 戰線(전선)으로 총총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네
건봉사 불이문
-이덕완
두 개인 듯 하나로 보이는 구름 한 조각
금강산과 향로봉에 걸쳐 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건봉사 불이문에 들어선다
부처님 치아사리 모신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고
계곡 건너 금강산 대웅전엔
부처가 환하다
만행의 뜨거운 발자국이 보일 듯
돌다리를 경계로
금강산과 햘로봉이 포개진다
같고 다름이 하나인데
이곳에는 모두가 둘이라니
민통선 철조망이 반세기 동안
녹슨 풀섶에서 가람을 두르고 있다
반야심경 독경 소리가 풀향기에 섞인다
깨진 기왓장에 뒹구는 낡은 이념들
초병들의 군화 발자국 절마당에 가득한데
목백일홍나무에서 떨어지는
자미꽃의 핏빛 절규는
나무아미타불탑 위의 돌봉황에 실려
북으로 가는가 갔는가
적멸보궁 터진 벽 뒤로 날아가는
하얀 미소를 보며, 아내와 난
보살님의 준 콩인절미를
반으로 나누어 먹는다
고래
-이승수
아까부터 내 옆에 앉은 사내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전철 바닥에
누런 갈매기들을 토해낼 때마다
그가 멸치떼를 쫓아다녔는지
오징어를 잡으러 다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과녁을 맞히려면 과녁 위를 겨냥하라1〉는
구절에 이르러 나는
마구 흩어지고 있는 활자들을
애써 끌어 모아야 했다 그는
과녁 대신 자신의 다리를 찌른 듯이
한참을 절룩대다 앉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솔기가 다 닳아 구지레해진 바지 주머니에서
떨리는 손으로 꺼내어 간신히 입에 문
〈장미〉담배가 전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성한 무릎 위에는 어린 계집 아이가
마지막 남은 영토를 지키듯 그렇게 매달려 있었고
뒤돌아 노려본 창문의 하늘엔 새들이 잠시 내뱉아진 침으로 흘렀다 그의
두눈에선 독기오른 작살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기어이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또 활자들은 모조리
바닥 위에 쏟아졌지만 한남, 옥수, 응봉
세 개의 海域(해성)을 지나는 동안 웬일인지
그의 시선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기침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크르릉대며 전철이 서고
혈흔 같은 그의 딸이
손도 잡아 주지 않는
아비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나간다
병들고 괴팍한 선장과 헤어졌으니
선원들의 불만 섞인 술렁임도 이제 더는 없으리
저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천 바다를 아주 떠나고 싶은 것일까
책을 주우며 무심코 올려다 본 전철의 천장은
묘하기도 하지, 궁륭 모양으로 부풀며
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깊어 가는데
남겨진 사람들 출렁이는 물살에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몇몇은 토해지고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다
나는 가만히 책을 주웠다
알타미라 벽화
-정진경
1
통로는 좁았어요 에스컬레이터로 도착한 층계에서 핸드백 같은 하이힐 같은 그리고 벨트 같은 짐승들의 허울을 보았어요 내게도 하나쯤 매달려 있는 쇠 가죽 핸드백 지퍼를 열 때마다 슬프게 눈 껌벅거리는 황소의 긴 숨소리가 옆 구리에 지근지근 파고들었어요 세상 모든 짐승들이 내뿜는 숨소리의 올가미에 나는 깔려 있었어요 어둠을 찍어 짐승들은 내 뇌리에 벽화 하나씩 그리기 시작 했어요 뿔을 그리고 등뼈를 그렸어요 천정 어디쯤엔 별 몇 개 옛날의 수림을 찾아 푸른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층계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슬픔을 껴안은 조그만 동굴 하나 수렁처럼 아득히 뚫려 있었지요
2
그날은 아마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이었지요 아직 떨어질 수 없는 홍조 띤 잎새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은 굽신한 등이 눈에 들어왔어요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털갈이 중인 비둘기들 땅콩 모이로 더 여문 살이 오르고 있었어요 철제다리 너머, 잎새든 깃털이든 상관없는 바람이 불고 벤치와 벤치 사이 깃털 같은 흙먼지가 벤치의 발목을 잡고 놀았어요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 일이라고 지루한 평화라고 말하는 듯 했어요
알타미라 벽화였어요 황소 눈알 같은 슬픈 껌벅임이 들리는 듯 했어요
이발소 그림처럼
-조 정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거울을 피해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친 식탁이 내 늑골 안으로 몸을 구부렸다
밤이 지나가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우물
-최영신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지금처럼 태양이 불 지피는 삼복더위에 물 한 두레박의 부드러움이란, 지나간 날 육신의 목소리로 청춘의 갈증이 녹는 우물 속이라도 휘젓고 싶은것. 거친 물결 미끈적이는 이끼의 돌벽에 머리 부딪히며 퍼올린 땅바닥의 모래알과 물이 모자란 땅울림은, 어린 시절 나를 놀라게 하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물로 아프게 꼬여 간 끈, 땅 속으로 비오듯 돌아치는 투명한 숨결들 하얗게 퍼올리는 소녀, 시리도록 차가온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밤이면 하늘의 구름 한 조각도 외면한 채 거울 속은 흐르는 달빛, 가로 세로 금물져 가는 별똥별의 춤만 담았다. 그 속에 늘 서 있는 처녀 총각, 어느 날 조각이 난 물거울 속 목숨은 바로 그런게 아름다움이라고 물결치며 오래 오래 바라보게 했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척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퍼올리고 내리던 수다한 꿈들이 새로운 물갈이의 충격으로 흐르다 모두 빼앗긴 젊은 날의 물빛 가슴, 습한 이끼류 뒤집어 쓴 채 나를 바라본다. 쉼없이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도 아닌, 우물 속의 달빛을 깔고 앉아서.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말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낙엽 한 잎
-최 운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날이 저물고,
마음 맨 안쪽까지 가벼워질대로 가벼워진
낙엽 한 잎이 다 닳아진 옷깃을 세운다
밥 익는 소리 가만히 새는 낮고 깊은 창을 만나면
배고픔도 그리움이 되는 걸까
모든 길은 나를 지나 불 켜진 집으로 향한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마저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
바람 심하게 부는 날일수록
실직의 내 자리엔.
시린 발목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며
새우잠을 청하던 동생의 허기진 잠꼬대만
텅텅 울린다
비워낼수록 더 키가 자라는
속 텅 빈 나무 앞에 가만히 멈추어 섰을 때,
애초에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먼데서부터
우리 삶의 푸르른 날은 다시 오고 있는지!
길바닥에 이대로 버려지면
어쩌나
부르르 떨기도 하면서
구로동 구종점 사거리 횡단보도 앞,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세상을 둥글게 말아 엮던 달빛이 하얀 맨발을
내려놓는다
**제길헐~ 비평을 하면 전문을 올려야지 전문도 안 올리다니. ㅎㅎ 여기 저기 한글파일 뒤지니까 나오긴 나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