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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찬불가 경서도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관음도
불상 감상법 첫째,
종교적 편견을 버리고 우리의
문화재라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감상하자. 기독교에 대한 교양과 종교적 친근감이 없어도, 관련 작품을 서양의
문화예술로서 감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둘째, 기왕이면 불상의 개요을 알고
감상하자.
가장 많이 조성되어 있는 불상으로 중심 전각에
모셔져 있는 부처상, 부처를 보좌하는 보살상, 동서남북의 수호신인 사천왕상과 금강역사라 불리는 2구의 인왕상,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상, 나한상 등이 있다. 셋째, 부처상은 종교적 신성이 넘치게, 보살상은 자애로운 모성을 가진 여성처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나 인왕상은 근육질의 장군처럼 표현하고 있다. 넷째, 신체 각부의 비례를 살펴보고, 얼굴의 눈·코·입·귀와 목걸이 같은 장신구,
옷주름 등의 조각을 세심히 살펴보자. 다섯째, 감상하면서 나름대로 조성시기를 추정해보자.
불상의 조성시기를 칼로 두부 자르듯이 추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구려의 계통의 불상은 '눈두덩이가 은행알처럼 도드라져 있고 옷자락 양끝이 날카롭게 뻗쳐 있다'
거나 조선시대의 불상은 '서안 앞에서 책을 읽는 선비의 모습이다'처럼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의 특징이 있다.
여섯째, 불상만 살펴보고 마는데 대좌·불상 위에 달아놓은 닷집·탱화·전각의 현판과
주련의 글씨도 감상하자. 일곱째, 종교적 신성을 느껴보자.
조각의 아름다움만 감상하지 말고, 오랜 세월 고관대작에서 거리의 거지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의 소망을 담은 경배를 받았을
것이다. 불(부처)의 종류 ● 佛이란?
나집譯本만이 불(佛)이라 하고, 다른 유지본·진제본·급다본·의정본 등은 불바가바(佛婆伽婆) 또는 간단히 바가범(婆伽梵)으로 번역하고 있다.
범어는 Bhagavat로서 세존으로 번역되지만, 일반적으로 제자가 스승에 대해서 부르는 호칭으로 이 말이 사용된다. 佛이란 Buddha(佛陀)의
약칭이다.또한 如來라고도 한다. 즉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이다. 보편적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佛은 Sakyamuni를
가르키는 말이다. 석가모니란 Sakya족 출신의 聖者란 뜻이다. 석가모니는 이 세상의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가 된 분이므로 응신 불이라고 한다.
석존 이전에도 연등불,다보불 등의 과거7불이 있었으며 석가 열반 후 56억 7천만 년 후 나타나는 미륵불이 있다. 불교에서 삼세불이라는 것은
연등불,석가모니불, 미륵불을 가르킨다. 대일여래,아미타여래,약사여래같이 인간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부처도 있다. 이들 부처는 석가여래를 절대적인
부처로 믿는 소승교에서 발전한 대승교에서 말하는 부처이다. 대승불교 관에서 삼신불 사상은 응신불인 석가불과
보신불인 서방 아미타불과 동방 약사불, 진리 그 자체를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집합 체로 보며 부처의 으뜸인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로 본다. ● 대일여래 (大日如來)는 마하비로자나여래라고 음역하고
大光明遍照라고 의역한다.이 부처는 전우 주 어디에나 빛을 비치는 참된 부처이며 석가여래는 지구상의 생을 받아 태어난 그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본체인 부처이고 그의 지혜의 광명은 주야의 구별이 있는 해보다 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밀교에서 절대적인 부처.
화엄경의 비로자나불과 같은 이름이나 불격은 더 높음. 형상은 다른 여래상과는 달리 불은 보살형 좌상 으로 표현되고 五智五佛을 나타내는 화불이다.
금강계 대일여래 는 몸이 백색에 지권인 태장계는 황금색 몸에 법정계인의 수인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다. 이 부처는 지권인을 결하는 수가 많고
때로는 관,영락,팔찌,천의 를 입은 보살형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毘盧자那佛)은 부처의 진신을 나타내는 존칭으로 법신불임. 화엄경의 주존불로 서 밀교의 대일여래와 같은 이름. 지권인의
수인으로 문수,보현보 살 협시 형태와 노사나불,석가모니불 협시 형태가 있다. 통일신라 9세기 이후 유행하였으며 지리산 내원사 소장
석조비로자나불좌 상이 최고이며 보림사,도피안사 철조비노자나불 좌상이 있다. ● 아미타여래 (阿彌陀如來)는 無量光如來 또는 無量壽如來라고
음역한다. 무량수불,무량수광불이라고도 한다. 이 부처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무한한 세계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이 광명을 받은
자는 일체의 苦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또 이 부처는 지금도 서방 극락에 있으면서 섭 법신원,섭정토원,섭중생원등 48원을 세워 중생을
대자비에 의하여 영원의 구원을 받게 한다고 생 각하고 있으며 <나무아미타불>을 외면 그 광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아미타불은 가 장 중요한 부처로 정토사상의 발달과 함께 우리나라,일본,중국, 인도및 서역에 퍼졌다. 형상에는 단독상과 삼존상이
있는데 아미 타구품인의 손을 취하고 관세음,대세지보살이 협시하나 시대가 내려 가면서 대세지 대신 지장 보살이 등장한다. 삼국시대 보편 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았으며 경주 구황동 황복사 3층 석탑 출토 금제 아미타 좌상이 유명하다.手印은 설법인, 미타정인, 9품인 등을
취한다. ● 약사여래 (藥師如來)는 東方瑜璃光世界의 교주이며
大醫王佛이라고한다.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 주는 부처. 약사유리광여래,대의왕불이라 고도 함. 동방 정유리 세계에 살면서 12대원을 발하여 중생의
병 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 줌. 좌우 협시로서 일광,월광 보살을 권속으로서 12신상을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다고도 하고 보주를 쥐고 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7세기 중엽부터 시작 8세기 중엽 인 통일신라때 유행하였으며 경주 굴불사 동면 약사불 좌상이 유명하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고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 하는 등 12大願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ㄱ.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크게 비치게 하려는 원 ㄴ. 威德이 높아서
중생을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 ㄷ.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을 만족하여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ㄹ.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ㅁ.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業을 지어 三聚戒를 구족하려는 원 ㅂ. 일체의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根을 완전케 하려는 원 ㅅ. 일체의 중생의
병을 없이하여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무상보리를 증득케 하려는 원 ㅇ. 天摩.外道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의 바른 지견으로 포섭하려는 원 ㅈ.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원 ㅊ. 일체 중생의
기갈을 면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 ㅋ.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얻게 하려는 원 등 중생의 질병이나 고난을 구제하려는
부처이다. 그래서 한 손에는 약향아리를 들고
있다. 간다라불상 그리스 미술(사실적이며 완벽한 신체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여 조각에 표현함.)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보관과 영락·팔찌로 장식한 건장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다른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관능미는 없다.
세부적으로는 물결 모양의 긴 머리카락과 깊이 파인 눈·날카로운 코·얇은 입술·높고 큰 육계 등을 특징으로 한다. 눈을 반쯤 감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어딘가 우울하며 명상하는 모습과 양어깨를 덮는 통 견의, 매우
사실적인 번파식의 옷주름(큰 주름이 파도치듯 번갈아 연속됨), 옷의 상단의 깃이 목도리처럼 턱 밑에서 한번 뒤집어지며 돌고 있는 것 등이 조형적
특징이다. 그리고 사실적인 역사적 생애를 소재로 불상을 만들었으며 회청색의 편암으로 색감이 어둡고 딱딱하다.
이러한 특징들은 서북쪽의 추운 지방이라는 기후적 특성이 조형양식에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배면 조각이 생략되고 정면 조각 위주로 조각을 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나라 불상도 그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AD 1세기에서 AD 3세기경까지는 편암을 주로 사용하였고, AD 3세기에서 AD 5세기경까지는 테라코타를 많이 사용하였으나
채색이 가해져 한층 우아해진다. 요점정리 간다라 불상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때 소승 불교가 성립되었으며, 기원후 2세기 인도를
재통일한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 때 대승불교로 발전하였다. 아소카 왕(마우리아 왕조)은 정복 전쟁을 전개하면서 불교를 전파시켰으며, 인도
각지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갈라 불탑을 세웠다. 이것이 탑의 시초이다. 그리고 서북인도(쿠샨왕조 시기) 쪽에서는 그리스미술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 양식(1-3세기)이라고
불리는 불교미술이 발전하였는데 1-2세기 경부터 불상이 만들어 진다. 이 간다라(Gandhara) 불상은 얼굴이나 복식이 모두 그리스 신상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 통견(通肩), 샌들, 콧수염 등을 특징으로 한다. 희랍,로마인의 모습 ,머리카락은 곱슬, 이목구비 유럽인 모습, 눈을 반쯤 감고 아래를 처다봄,
우울한 표정,성격이 유약하여 우울 할때 많고 늘깊은 사유,대의는 통견의,신체가 두터운 옷에 가려짐. 옷주름 사실적,대의의 옷주름 표현에 주력,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 마투리불상 중북부 인도의 갠지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민머리(머리카락이 없이 민밋하게 머리를 표현한
불두)에 하나의 큰 우렁상투를 하였다. 토착적인 인도인의 얼굴에 활짝 뜨고 자신감 있는 미소는 깨달은 다음의 법열과 자신감 있는 생명감이
넘친다. 건강하며 팽만감 있는 신체에 편단우견(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게 걸친 웃옷으로 오른쪽 어깨가
비어 있다.)의 얇은 옷을 신체에 밀착시켜 표현하였다. 간다라 불상은 온 몸을 덮은 대의의 옷주름을 세심하게 표현하였으나, 마투라 불상은 나신을
연상케 할 만큼 신체의 표현에 역점을 두며 여성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더운 지방이라는 기후적 특성이 반영된 간결한 장식을 한 三曲 자세의 약쉬(여성)상이 많으며, 인도
고유의 전생담과 이상 세계를 소재로 많이 채택하였고 32호상과 80종호를 충실히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조각의 재료로는 밝고 부드러운 살색에
가까운 사암(砂岩)을 많이 사용하였다. 부처를 표현하려는 의도만 같을 뿐 도상과 양식 및 재료에 있어서는 간다라 불상과 공통점이 없다.
마투라 불상은 약샤·약쉬상과 더불어
기원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굽타양식과 연계되어 천년동안 마투라 불상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다. 두 지역의 불상은
3세기경 융합되어 4세기 이후의 굽타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요점정리 비슷한 시기에 북부 인도의 마두라(Mathura) 지방에서는 마두라 양식(1-3세기)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 미술이 발전하였다. 마두라 불상은 인도의 전통적 미술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큰 눈과 건장한 체구를 지니고 있으며 얇은 옷이 밀착된
우견편단(右肩偏袒)을 특징으로 한다. 인도인의 모습,머리는 민머리, 큰 우렁상투, 인도인의 모습, 눈을 활짝 뜨고 자신감있는 미소, 깨달음을 맛보는 희열 활달한 생명감 넘침,
편단우견, 얇은 옷에 밀착 나신의 느낌, 건강하고 팽만감 있음, 신체의 표현에 힘씀 , 인간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표현 굽타불상 이목구비는 마투라 불상이며 머리카락은 간다라 양식의 소라머리가 형성되었다.
마투라 요소인 통견에 얇은 천으로 밀착시켰으며, 옷주름은 쿠샨 시대의 마투라 불상 양식을 받아들여
추상적인 가는 선으로 평행하게 표현하였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눈은 반쯤 감고 정신성을 살려서 고요하며 또한 양감이 있어 생명력이 느껴지며 크기는 장대해진다. 동적인 2세기의 불상보다 자비롭고 원만한 상호를 보여주며 불상 숭배 사상이 일어난다.
인도 고전문화가 가장 활발히 꽃 피었던 시기로 중국과 한국에 광범한 영향을 끼친다. 요점정리 그 뒤 굽타 왕조(4-6세기) 시대에 오면 굽타 양식(4-7세기)으로 불리는 새로운 불교 미술이
발전하였다.두양식이 과도기를 거쳐 굽타시대4-5세기 두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 인 불상 양식이 탄생하게 된다.굽타불상의 특징은 이목구비는
마투라양식이지만 머리카락은 두지역이 결합하여 나발형식이 형성된다. 이것이 한국,중국의 불 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두라 양식을 수용하였으며, 단정하고 조화된 윤곽선, 육감적인
몸체(힌두교 미술의 영향), 둥근 육계와 나발, 둥근 광배(光背), 목의 삼도(三道), 통견(通肩)의 깔끔한 대의(大衣) 등을 특징으로 한다.
굽타 왕조 (320∼550) 북인도 지방에서 일어난 국가로 대승불교
(중관<中觀>, 유식<唯識>, 여래장<如來藏>, 인명<因明>) 사상이 심화 발전되며 불교를 세계
종교로 완성한다. 한편 힌두 문화가 왕실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침투되어 인도의 보편적인 생활 종교로 자리 잡는다.
마침내 불교는 힌두화되어 인도에서는 불교가 소수 종파로 전락하고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꽃피게 된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 등이 인도 순례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산스크리스트어를 공용어로 채용하여 베다 문학이 널리 성하고 칼리다사같은
훌륭한 시인이 배출되며, 나란다 대학을 설립한다. 또한 아잔타
석굴·엘로라 석굴·산치이 대탑·아잔타 벽화·사르나트 불상 등이 조성된다.
초기에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도 고유의 양식이 성립된다. ☞ 인도 왕조의 변천 : 마가다국(BC 6세기
∼ BC 4세기) → 마우리아 왕조(BC 4세기 ∼ AD 2세기) → 쿠샨 왕조(AD 1세기 ∼ AD 4세기) → 굽타 왕조(AD 4세기 ∼
AD 6세기) 이목구비는 마투라 불상이며 머리카락은
간다라 양식의 소라머리가 형성되었다. 마투라 요소인 통견에 얇은
천으로 밀착시켰으며, 옷주름은 쿠샨 시대의 마투라 불상 양식을 받아들여 추상적인 가는 선으로 평행하게 표현하였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눈은 반쯤 감고 정신성을 살려서 고요하며 또한
양감이 있어 생명력이 느껴지며 크기는 장대해진다. 동적인
2세기의 불상보다 자비롭고 원만한 상호를 보여주며 불상 숭배 사상이 일어난다. 인도 고전문화가 가장 활발히 꽃 피었던 시기로 중국과 한국에 광범한
영향을 끼친다. 중국불상 우리나라에 이러한 양식의 불상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불상으로 간다라 양식과 마투라 양식이 섞여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이단으로 높게 빚은 머리로 육계(부처님의 머리는 이단으로 표현하였는데 윗머리를 말한다.
그리고 머리와 육계의 사이에 구슬을 장식한 것이 있는데 계주라 부른다.)를 표현하였다.
옷은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완만한 V자형의 주름이 바닥까지 내려왔으며, 납작한 주름이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의 옷주름을 보는 것 같다. 하체가 빈약하고 선정인의 손이 과장되게 크다. 대좌의 형식은 좌우와 위 모서리에 직선의 테두리만 한 민무늬 사각형이나, 앞면 양쪽에 사자를
조각하는 경우도 있다. 북위양식의 불상으로 머리 위에 보개가 있으며 광배에는 화불과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민머리에 둥근 사발을 엎어놓은 듯 솟아 있다. 용포 형식의 포복의를 입고 있으며, 옷 끝이 날카롭고
좌우 대칭적인 옷자락과 종교적 긴장감이 충만한 길쭉한 신체와 얼굴 등 북위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요점정리 후한:58-75년,불교도입. 서진:265-316,불교교단성립,불상조성
시작 5호16국:316-386,굽타양식모방의 시대,선정인좌상,통인의여래입상 북위:386-534,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수용,석굴사원건설,불상이 온화하고 얼굴이 둥글고
엄숙해지며,체구는 원통형.운강석굴(마투라계통),용문석굴(왕즉불사상,북위양식성립),석굴암이
대표적이다. 수:581-619,신의 초월적 모습.상체가 짧고 하체가 가늘고 길다.가사주름이 도식화.융기가
날카롭다.신의 초월적 모습 표현. 당:618-907,굽타의 이상적 양식 받아들여,사실적인 균형미 있는 불상등장.중국인의 얼굴을
닮으며8c 후반부터는 밀교의 영향으로 세속화 된다. 고신라불상 지리적 조건과 정치 집단의 배타적 경향으로 불교가 가장 늦게 공인(528년)됨에 6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불교상이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공인 후에는 지배계급의 적극적 수용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흥륜사·황룡사 등 큰절이 많이 세워졌다. 삼국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을 내세에서 보상받으려는 듯 미륵불을 중심으로 금동불과 석불이 조성된다. 석불은 고신라 말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경주 남산은 불교미술의 야외 전시장이라 할 만큼
수많은 불상과 마애불·석탑이 조성되어 있으며 모두 뛰어난 명품들이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신라는 여러 사정으로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였다. 물론 눌지왕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가 소지왕 때의 탄압으로 일거에 소멸되었던 것이 527년 (법흥왕 14)에 정식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공인으로 불교는 급속히 신라사회에 전파되었다. 불교가 급속하게 팽창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상조각을 대대적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신라의 불상조각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고구려양식의 불상 내지 백제양식에 가까운 불상을 만들었지만, 10∼20년 뒤에는 신라 자체의 작품을 일본에 수출할 만큼 격조 높은 신라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신라의 조각 수준은 급속히 신장하여서 600년 전후부터는 고구려나 백제를 한걸음 앞질러 간 느낌이 짙다. 이러한 신라의 불상조각은 대개 3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제1기 이 시기는 불교공인 직후인 527년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당시의 고구려나 백제조각과 마찬가지로 중국 북위양식을 받아 조성된 매우 역강한 추상조각양식의 불상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시기 불상의 대표작은 535년에 착공되어 544년(진흥왕 4)에 완성을 본 흥륜사(興輪寺)의 불상들이다. 흥륜사불상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그 잔영은 황룡사(皇龍寺)출토 금동불입상에서 얼마간 찾아볼 수 있다. 제2기 6세기 중엽부터 말까지인데 진흥왕의 패기찬 활동시기로 불교의 성세와 함께 불상조각은 이제 완전히 신라화되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574년에 황룡사의 거대한 장륙상(丈六像)을 일거에 주조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579년에 왜국(倭國)에 불상을 보냈다는 데서도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각의 특징은 초기에는 중국 동위·서위 양식의영향을 받아 역강한 추상조각을 다소 완화시켜 세련되고 귀족적인 이상주의적 불상양식을 만들어내다가, 후기에는 북제·북주의 영향도 있고 하여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당대의 대표적인 걸작품은 금동장륙존상(金銅丈六尊像)이지만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고 후기 작품으로 거창출토 금동보살입상 등이 있다. 제3기 7세기 전반기의 이 시기는 삼국간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된 삼국통일의 전단계로서 복잡다단한 시기이지만
선덕여왕 치세기간의 활발한 조형활동으로 걸작의 불상조각이 많이 조성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초기에는 중국 북제·북주 내지 수나라초의 영향을 받은
추상표현주의적 작품이 유행하다가, 후기에는 중국 수나라말내지 당나라 초기의 영향을 받은 반사실양식(半寫實樣式)의 불상이 유행한 것이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선방사삼존불상(禪房寺三尊佛像)인 이른바 삼체석불(三體石佛)과 삼화령미륵세존(三花嶺彌勒世尊) 등이
있다. 백제불상의 특징 384년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불상의 양식은 남조의 양식과 고구려를 통하여 북위양식을 받아들였다. 온화하면서 선율이 부드럽고 세련된
백제 특유의 미술은 활발하고 강한 기세의 고구려의 미술과 경직되고 어눌한 신라의 미술과는 다른 것이다. 특히, 불상의 미소는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생명의 미소로 평가받고 있으며 금동불과 마애불이 유행한다. 산경문전과 사택지적당탑비·금동용봉향로 등을 통하여 도교도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고구려와는 달리 도교와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할 때까지 발전하게 된다.
백제의 우수한 조각 기술은 신라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실제로 일본의 많은 조각 유물들은 백제의 조각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남아 있는 불상들을 통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불상의 특징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북위의 양식을 반영한 불상이 조성되었음을 남아 있는 유물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유적과 사료들을 통하 여 7세기 이후 도교와 경쟁하기 전까지 국교적 위치를 누리며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불상 조성 또한 그에 걸맞은 수준의 조형미를 갖추었을 것이다. 와당이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의 미술은 힘과 동감이 넘치고
정열적인 미감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몇 구의 불상을 통하여 그 특성을 살펴보자. 통일신라불상의 특징 통일 초기에는 삼국의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나다가
성덕왕(702∼737) 이후 정치·군사적 안정을 이루면서 성당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서역·인도·페르시아 문화까지 수용하여 국제적인 문화를 건설하게 된다. 철학적 체계를 갖춘 불교에서 사회적 합의점을 추구하였던 신라는
경주를 비롯하여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설하였으며 불상과 탑을 남기게 된다. 불상 중에서도 아미타불과 미륵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불상들의 조각경향은 사실주의 경향이 현저하며 화려한 장신구를 갖춘 볼록한 가슴의 풍만한 체구·잘록한 허리·삼곡 자세로 비튼 모습의 감각적인
불상에서 당당한 체구·품격 있는 상호 등을 갖춘 이상형의 불상으로, 이상형의 불상에서 생동감과 품격이 현저히 떨어져 인간적인 모습을 한 불상으로
변한다. 꽃이 활짝 핀 다음에는 지듯이, 혜공왕(765∼780) 이후 절대왕권이 약해지고 구귀족들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중앙 정부의
지배질서는 혼란을 겪고, 지방세력의 지원아래 새로운 사상인 선종이 널리 퍼지게 된다. 불상 조각은 인체 파악의 소홀과
비례의 불균형·섬세한 듯하나 형식화한 옷주름 등에서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나 불상의 조형미는 떨어지나 광배·대좌의
조각은 훨씬 정교해지고 생명감을 띤다. 그리고 동(銅)의 부족으로 선종사찰을 중심으로 많은 철불이 조성되며 대작의 비로자나불이 남아
있다. 비교적 많은 수의 불상이 남아 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불상의 특징 고려는 삼국시대와 같이 불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여 불교
문화가 융성하며 불상의 제작도 활발하다. 귀족문화와 개인 차원의 기복불교의 흥성으로 도자기·나전칠기·금속
장신구류 같은 공예미술이 발달하나 불상·탑·범종 같은 규모가 큰 조형물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이전 시대에 비하여 예술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이상적 신체 묘사에서 차츰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띤다. 불상의 재료로는 금동·철·목재·석재·소조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 석조가 가장 많으며 금동은 감소한다. 특히 철불은 몸체에 명문이 있어 조성 시기 등을 알 수 있다.
법화사상과 밀교의 영향으로 항마촉인의 석가여래상과 지권인의 비로자나여래상이 주로 조성되며 불·보살상뿐만 아니라,
시왕(十王)과 같은 새로운 불교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입체감이 둔화되고 신체비례를 무시한 매우 큰 석불과 많은 마애불이 조성되는데,
거대한 바위에 신체의 표현을 소홀히 하면서 머리 부분만 별도로 조각한 '파주 용미리 마애미륵불'과 의자에 앉아 있는 '법주사 여래의상'이
특이하다. 1230년 몽고 침입 이후, 원 나라 간섭기(14세기)에는 화려한 영락장식과 여성성을 강조한 라마 불상 양식이 도입되어
풍만한 상호와 단순하면서도 부드러운 옷주름· 정교한 금구장식(金具裝飾)을 한 불상이 조성된다. 또한 고려말에는 라마양식과는 다른 늘씬한 상체와
비교적 세련되고 온화한 상호(얼굴)의 불상이 조성된다.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요점정리 불상의 전래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고구려는 372년)로서, 현존하는 삼국시대 초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울 근교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이다.
이것은 중국의 북위 초인 5세기 초나 중엽의 불상양식과
유사하여 중국에서 전해져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의 모습을 한 불좌상은 한국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형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원오리 폐사지의 소조 불좌상과 옛 백제의 도읍인 부여의 규암면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등이 있다.
신라에서도 불교가 공인된 이후 6세기 후반에는 대규모의 불상조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566년(진흥왕 5) 완성된 거대한 절 황룡사의 절터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륙의 금동삼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 불상 중에는 삼존형식이 많으며,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과 황해도 곡산
출토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 등은 명문이 포함되어 있다. 표현양식은 중국의 북위 말기 및 동위시대의 조각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세부표현이나 광배의 화염문양, 연화대좌의 표현양식은 중국의 불상들보다 단순화되었고 세부 묘사가 생략된 투박한 기법을 보인다.
석조불상으로서 환조는 별로 없으며, 대부분 암벽에 부조로 표현된 조각이 많다. 그 중 옛 백제지역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의 태안마애삼존불(보물
제432호),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등이 삼국시대의 대표적 보살상 형식이다.
또한 반가사유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서산마애삼존불의 좌측 협시, 경주 근교의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불상군 중 반가사유보살상, 고구려의
금동미륵반가상(국보 제118호) 등이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중엽에는 법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지며, 상의측면·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어 입체조각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7세기의
석불상으로는 경주배리석불입상(보물 제63호)·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 등이, 금동불상으로는 백제 규암리사지의 금동보살입상 2구, 경상북도
선산(善山) 출토의 금동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호·제184호) 등의 관음상이 대표적이다. 삼국시대 말기 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불상양식의 영향이 반영된 조형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불상양식의 시대구분은 통일초∼680년의 보수적 경향이 짙은 전대의 양식계승 및
새로운 요소의 모색기, 680년∼8세기 전반의 중국 당나라 양식의 수용 및 이상적 불상형의 완성기, 750년 무렵 이후의 불상양식의 토착화와
쇠퇴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불상표현형식을 보면 대체로 입상에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通印)을 보여주는 불상이 많고 약함을 든 경우도 많다.
법의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경주 구황리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같이 통견으로, 주름이 가슴 앞으로 여러 겹의 U자형
곡선을 형성하면서 늘어져 있다. 또 다른 형식은 경상북도 선산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이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과 같이 통견의 법의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내려오다 허리
밑에서 양 다리 위로 Y자형으로 갈라져서 각기 U자형 주름을 형성하면서 좌우대칭을 이룬다. 자세는 대부분 결가부좌의 좌상이며 수인은 7세기
말부터 나타난 불상 중에는 촉지인의 예가 많다. 경상북도 군위 팔공산에 있는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불,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보물
제200호)의 본존상, 석굴암의 본존불상 등이 대표적 예이다.
보살상은 삼국시대 말기의 양식에서 좀더 화려한 달개장식을 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한 동적인 자세로 변화하며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이 대표적 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조각 중 가장 우수하며 대표적 예는 석굴암의 조상들이라 할 수 있으며, 개개의 조상 표현의 조각기술의 세련도, 상의 알맞은 비례, 부드러운 조형성 위에 불상 전체에 흐르는 숭고한 종교성이
조화되어 있다. 8세기 말∼9세기 무렵에 이르면 금동상이 많이 줄어들고 석조상이나 철불상이 많이 등장한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지방에 따라 몇 가지 특징있는 불상군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 강원도 강릉 주변의
월정사·한송사지·신복사지의 석조나 대리석 보살상들은 신라말기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중국의 송·요시대의 불상양식이 반영된 듯한 풍만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또한 충청남도·전라북도 지역에 많이 보이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같이 민간신앙과 밀착된 토착적 또는 지방색이 강한 불상형태가 많이
보이며, 후기에는 원나라와의 관계에 따라 티베트·네팔 계통의 요소도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표현의 창의성과 제작기술에서도 퇴보를 가져왔다. 대체로 불신에 비해 머리부분이 크고 신체의 묘사도 형식적이며 조각기법도 뒤떨어져 투박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한국불상의 역사적인 의미 불교가 전해진 곳에는 반드시 불상도 존재한다. 불상은 단순히 외형상의
의미가 아니라 한국불교의 존재양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데서 역사적인 의미를 살펴 수 있다.
따라서 불상양식의 변천을 살피기 이전에 불상이 내포하고 있는 상을 생각해야 한다. 불상을 만들기 전에는 상을 생각하고 상이 생기면 형체가 생기고 상의 발생이 불심을 낳게 하는 것이다.
이 상의 의미는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물론 불상에 대한
숭배는 일반적으로는 양면을 지니지만 시대에 따라서 또는 민족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달라진다.
①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상. 이 경우 불상에 향하는 마음은 불상이
표현하고 있는 불력에 의하여 구제받으려하는 절대귀의의 감정을 일으킴--크게 조성
② 자력적인 상의 의미. 이 경우 불상에 향하는 인간의 마음은 불상이
지니고 있는 불심을 자기 마음으로 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상을 보게 되면 자신이 불심을 지니게 된다는 것--작은 불상이 많고 단순한 예배용이 아닌
수행용의 불상
(1)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불상 - 서서 다정하게 웃는 부처님
삼국시대에 불교가 처음 수용되었는데, 불교는 윤회사상(輪回思想),
인과응보(因果應報)를 핵심으로 하면서, 어느정도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 인간과 세계의 이해에 있어서 한층 진전된 사상체계이다.
불교는 삼국의 무력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사상의 통일과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던 삼국의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불교의 수용과 함께
많은 불교 미술품이 만들어졌다. 불교 미술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서의 표현이나 감상용 미술품이 아닌 종교적인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불교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면서 불교 미술의 양식은 당시의 시대 정신이나 지배층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석불은
서산마애 삼존불, 배리 삼체석불, 삼화령 부처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불상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은 단연 친근감있는 웃음이라고 하겠다. 서서
웃고 있는 이들 부처들은 삼국이 서로 다투어 쟁패하던 시기,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사려는 왕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는 중국의 한대부터 당초에 걸치는
시기에 해당되나 불상양식에는 6세기 이후 곧 남북조시대부터수(隋)시대에 걸치는 시기의 불상양식과 유사한 양식이 나타난다.삼국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양식의 불상을 제작하였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중국 남북조시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연가 7년명 금동불입상(539년 또는 599년 추정)은 중국 북조(北朝)의 북위양식을 보여주면서도 예리하고 투박한 조각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반면에 백제는 남조(南朝) 특히 양(梁)나라와 깊은 관련에 있는데 부여 군수리의 납석제불좌상이나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따뜻한
미소나 자연스러운 곡선에서 한국적인 인간미와 부드러운 조형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백제의 불상양식은 뒤늦게 발달하는 신라불상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7세기에 들어서는 수대(隋代)의 새로운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경주 배리삼체석불이나 삼화령 미륵삼존상과 같이 부드러움과 양감이
강조되는 불상양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반가사유형보살상은 미륵신앙과 결합되어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였으며 국보 제78, 83호와 같은 금동반가상은
그 대표가 되는 걸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고 손과 다리의 조각표현에는
별로 입체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의 각기 특징있는 불교미술은 일본에도 영향을 주어 호오류지(法隆寺)의 목조관음상이나
고오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같은 상에 그 영향이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5호16국시대→남북조시대→동서위시대→제주시대→수→당시대인데
현존하는 불상이 모두 6세기이후의 것이므로 남북조와 제주시대의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즉 5세기 중엽의 북위양식은 매우 드물고 북위이후부터
수대에 이르는 양식이 나타난다. 그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몸에는 살이 빠지고 얼굴은 갸름하다가 말기에는 살이 올라서
제주(齊周)양식에 접근한다. 2. 눈은 은행 열매같고 입가에는 미소가
있다. 3. 법의는 통견이고
두껍다. 4. 옷주름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었고 좌우에서
고기지느러미같이 전개된다. 5. 좌상은 상현좌 형식을 취하였고 좌우 대칭으로 복잡한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6. 보살의 천의는 앞에서 X자형으로
교차된다. 8. 큰 주형광배안에 삼존을 표현하는 일광삼존 형식이
유행한다. 9. 반가 형식의 미륵보살상이
유행한다. 10. 3도가 없고 수인은 통인이나 여원인에서 약지와 소지를 구부린
것이 많음 11. 입상과 좌상이 많고 반가상이 유행(미륵신앙 유행과 특수층의
자력적 의미 강함) 12. 연화대좌 많고 광배는 주형과 보주형이 많고 주형광배에는
화염문이 조각 13. 말기부터 암석에 감실을 파고 불상을 조각하는 석굴조각의
초기형식이 나타남 14. 이 밖에도 삼국시대의 불상에는 신비성이 농후하나 중국모방으로
자주적인 성격은 약함. 미소나, 수인, 옷주름이 그렇고 반가상에서 더욱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한편 삼국시대 불상에서는 신비성이 진하게 표출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얼굴의
미소, 수인, 옷주름의 형식 등에서 그러한 감각이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반가상은 그대표적인 예이니 그곳에는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이 농후하였던
사상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미륵선화조에 있는 설화 곧 신라 경주
흥륜사의 중 진자가 미륵보살이 화랑이 되어 현세에 나타나기를 원하여 미륵선화를 만나러 공주 수원사까지 갔으나 결국은 경주에서 만나게 되고 그가
결국 국선이 되었다는 내용은 신라나 백제에서의 미륵신앙의 양상을 짐작할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은 내세에 성불할 것을 약속
받은 보살로서 신비로운 존재이다. 미래의 부처에 대한 숭앙과 내세를 생각하면서 현세를 살아가는 삼국시대 사람들의
사상이 나타나 있는 불상이라고
하겠다. (2)
후기(통일)신라시대 2) 통일신라 시대
통일기의 불상 - 권위적으로 앉아있는 부처님-사실적인 이상미
통일 이전의 선채로 다정하게 미소짓던 부처님의 모습은 통일이후 양식에 있어서 변화가 나타난다. 석굴암 본존불상이 보여주듯이 연화대좌에 높이 앉아서 권위에 찬 이상화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이는 전제 왕권을 확립한
통일기 신라의 왕권의 상징이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신앙이 유행했던 데 비해, 이 시기는 아미타사상이 유행하고, 금동불보다는 석불, 마애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8세기 중엽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통일 신라 불상의 형식적 완벽성은 곧 중앙 귀족의 이상미를대변하는 것이다. 석굴암 불상의 근엄한
자세와 원만한 인상은 인간(귀족)과 부처의 절묘한 합일을보여주는 조화로운 이상미의 극치인 것이다. 그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당시 중앙 귀족들이
지녔을 현실에 대한 긍정과 자신들의 신분적 존엄성의 정당화이며, 안정희구의 염원이고, 공고히 다져가는 제도적 장치의 일환이라는 속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석굴암 본존불을 모범으로 하는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고신라의 불교조각 전통 위에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화교류로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불상조각도 신체비례에 균형이
잡히고 얼굴의 세부 표현이나 몸체의 양감 및 사실적인 옷주름 처리, 정교한 영락장식 등의 표현에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유물들은
대부분 경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8세기의 감산사지 출토 석조아미타불 및 미륵보살입상이나 석굴암 불상군 등에서는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에서
발달한 불상양식의 신라적인 수용과 변형에 따른 한국적 특징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석굴암 불상군에 나타난 종교적인 숭고미와 완벽한 조각기술은
뛰어난 예술성의 극치이며 균형과 조화를 이룬 석굴 속에는 불, 보살, 천인, 나한들이 모여서 이상적인 불국토를 이루고 있다. 신라 후기에는
금동불이 적어지고 조각수법이 쇠퇴하는 대신 석굴암의 본존을 따르는 항마촉지인 불좌상 형식과 지권인(智卷印)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새로이 등장하여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까지 유행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조각되나 불교사상의 변화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에는 비로사나불상과
아미타여래상이 많이 조성되어진다. 이 시대의 불상 양식은 다음과 같다.
이상세계를 향한 깊은 사색을 통한 사실적 조화미의 극치를 보임-불상에
대한 귀의의 감정과 자력적 불심이 조화를 이룸(자력적 의미와 타력적 의미의 조화)
반가상대신 비로사나불상과 아미타불이 많이 조성됨 그러나 8세기부터는 이러한 원숙한 기법이 차츰 쇠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기에 와서 불상의 기법이 퇴화하는 것은 불상숭배에 철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선종 이 유행한 탓도 있으나 전반적인 불교쇠퇴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9세기에는 철불이 나타나는 사실도 특이하다. 신라 하대의 불상 - 새롭고 힘있는 부처의 출현-현실적인 개성미
신라 하대의 중앙 귀족 세력들의 통제력의 상실, 지방 호족 세력, 민중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여, 불교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제왕권을 옹호했던 교학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지방을 중심으로 참선(參禪)을
중시하는 선종(禪宗)이 성장하게 되었다. 교종의 인간의 성불에 대한 차별성에 비해 선종은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선종은 신라 후기 도당 승려인 도의를 통해서 수용되었다. 도의(道義)는 신라 하대 중앙 귀족들에게 교리를 설파하였으나 이들은 이를 마귀의
소리라고 도의를 비방하고 문화의 중심지인 경주로부터 그를 추방하였다.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하여 그곳의 호족세력들에게 선종의 가르침을
설파하였으며, 이들은 선종을 자신들의 위치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이 선종의 사찰들을 자신들의 재산 유지, 확대의 근거로
삼게 되면서 선종은 지방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렇게 선종 불교가 성장하게 되면서 왕실에서도 선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사상의 변화와 함께 불교 미술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중앙 귀족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성된 불상에서는 석굴암 본존불을 모범으로
하는 불상들이 여전히 만들어졌으나 본존불 같은 이상적인 아름다운 부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목을 잔뜩 빳빳하게 세우고 어설프게
권위적인 모습을 한 불상이나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트리방가를 하고 있는 요염하기까지한, 장식적이고 화려한 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바로
말기적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특권 귀족들의 모습이다.
지방 호족들이 세운 선종 사찰에는 호족들의 도전적이고 현실적이며 개성적인 성격을 닮은 불상들이 새로이
등장하게 된다. 장흥 보림사 비로자나불(858년 제작), 철원도피안사 비로자나불(865)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불상들이 보이는 미감은 통일기의 것과 매우 다른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모습이란 알지 못할 미지의 세계에서 도래한 신성한 존재라기보다는
현세 속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현실미가 강조되고, 어떤 보편적인 질서를 대변하는 이상적인 관념미를 떠나 개성미로 대치된다. 중앙 귀족은
인간의 신분이란 제도적 장치 속에서 부여받은 기득권이라 생각해 왔으나, 지방 호족은 자신의 역량으로 일으킨 부와 힘에서 나온 것이라는 속뜻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개성적이고 도전적이며 현세적인 느낌의 불상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지방에서 조성된 불상들의 공통적 모습이 된다. 곧 그것은
8세기의 지배층이 보여 준 정제된 이데올로기의 세련된 형식미와는 다른 미감(美感)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후기 불상의 인체묘사 : 착실함이 없어짐 비례의 불균형으로 위축된 조형
의문은 평면적이고 도식적
삼국시대가 지나고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중국에서는 중국 역사상 외래문화를 가장 잘 수용 소화한 당의
문화가 개화하던 시기로서 그문화가 신라에도 영향을 끼쳐 불상조각에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 육계는 작아지고 나발이
많아진다. 2. 미소가 사라지고 단정 근엄한 모습이
된다. 3. 목에 삼도가
나타난다. 4. 착의법은 우견편단이
많아진다. 5. 의문은 좌우 대칭의 양식이 사라지고
자유로워진다. 6. 상현좌의 형식이 사라지고 의단은 대좌위로 올라가서
대좌가 완전히
노출된다. 7. 대좌는 8각이고 복련의 하대석, 중대석, 앙련의
상대석으로 구성된다. 8. 수인은 통인이 사라지고 부처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9. 보살상의 자세는 정면직립→본존으로 틀거나(3존일때), 3굴의
자세(독존일때) 10. 보살상의 천의 X자형 교차가 없어지고 장신구가
화려해진다. 11. 모든 불상은 살이 쪄서 관능적인 표현이
된다. 후기(통일)신라시대의 불상조각은 8세기를 고비로 차츰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한편 삼국시대의 미륵신앙을 아미타 신앙이 대신하게 되어 아미타여래상의 제작이 많아진다. 이때의 사람들은 현세에서 선을 쌓아
내세엔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정토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였고 극락정토는 그들에게는 이상향이고 아미타여래는 최고의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되어
아미타여래상을 만들고 그앞에서 지성으로 기원하였던 것이다. (3)
고려시대 고려건국 후 태조의 불교숭상정책으로 많은 사원과 거대한 탑, 불상이 조성
되었다.불상의 중심지도 경주를 벗어나 지방 여러 곳에서 선종사찰이 세워짐과 동시에 지방호족들의 후원으로 불교미술도 지역적으로 발달하였다. 즉,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불상형식이 나타나며 연산 개태사 삼존불상이나 논산 관촉사 보살입상,부여 대조사 보살입상등 충청도
지역에서도 개성적이고 규모가 큰 대형불상들이 유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도 역시 중국 오대(五代), 요(遼), 송대의 불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
나름대로의 지역성과 토착적인 조형미를 살려서 인간적인 부처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충청도 문수사, 장곡사의 금동불좌상과
같이 온화하고 정돈된 조형감을 보여주는 불상이 만들어지는 한편, 원나라 왕실과의 교류로 인하여 라마불상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이고 새로운
불상형식이 일시적으로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불상의 양식은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표현이 둔화되고 위축되었으며 신비성이 사라졌다.
신라불상에 비하여 수준이 떨어짐
← 불상이 귀의 감정으로서의 대상임
← 선종의 파격적 시도
☆ 자력+타력의 조화를 못이루고
자력(선종) 또는 타력(불상) 한 의미만의 종교로 변화
← 대중불교, 의식불교로서 각종 불교의식이
성행 <참고> 불상의 의미와 규모의 관계 불상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①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불상이다. 즉 인간은 불상이 표현하는 불력에 의해
구제를 받는다. 절대귀의 감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대작이 만들어진다.
② 자력적인 상이다. 불상을 보는 자는 불상이 지닌 불심을 자기 마음으로
한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불상을 믿고 있으면 자신이 불심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불상은 되도록 작게 만든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불상조성 기법이 퇴화된 원인은 우선 선종의 영향으로
보인다. 선종은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는 조사의 언행을 따르고 선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시되었으므로 불상에 대한 의욕이 쇠퇴된
것이다. 이 시기 불상의 특징은 눈꼬리가 길게 옆으로 돌아가고 입은 괴상하게 표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상의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퇴화현상이지만 선종의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시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고려 불교의 대중성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고려의
불교는 일부 출가자에 의한 선종이 유행하긴 했으나 전체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신앙의례가 성행하였다. 즉 수행의 의미보다는 절대귀의 감정의
대상으로서 또는 예배의 대상으로서 불상을 숭배하므로 대작을 만든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후기에는 라마교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양식이 시도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려왕조를 건설한 왕건은 왕조의 건국이 불력에 의하였다고 굳게 믿으면서도 사원의 난립을 엄히
경계하였으나 신왕조의 건립에 따르는 신흥의 기운은 많은 사원의 건립은 물론 거대한 탑파와 불상의 조영을 촉진하였다. 관촉사의 석불이나 현화사의 석탑은 그 일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흥의 의기는 정신과 기술이 수반되지 못해 우수작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고려 시대에 들어 더욱 유행한 선종(禪宗)의 영향이 컸으니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는 선사(先師)의 언행을 따르고 사색을
통해 돈오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으므로 불상조각에 대한 의욕상실 내지는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어 정신면에서 퇴보하였고 표현 능력도 따라서 감퇴된
때문이었다. 불상의 양식은 대체로 신라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삼국시대의
신비성이나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을 향하는 깊이 내재한 성격은없어지고 현세의 인간을 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나타나지만 그 미소는 삼국시대의 미소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되었다. 불상조각 쇠퇴의 또 하나의 원인은 풍수도참(風水圖讖)사상의 습합을 들 수
있다. 풍수설은 신라 말기부터 수용되어서 석탑과 석불의 점지(占地)에 작용한 흔적이 있으나 고려가 되면서 더욱 성행하여 조성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하나 주목되는 점은 고려말기에 몽고 세력의 침투로 라마불상의 양식이 도입된 사실이다. 몇몇 주목할 만한 금동상이
전래되고 있으나 석불에서는 그다지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이른바 억불숭유(抑佛崇儒) 의
정책과 함께 국가적인 후원이 줄어들어 불상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고려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차츰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주로 개인의 행복이나 내세를 위해 소규모의 불상 제작과 개인용의 불감(佛龕), 목각탱등이 만들어졌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위축되었으나 자취를 감춘것은 아니었다. 즉
사회적으로 공인이 되지 않았을 뿐 개인적으로는 왕실에서 서민까지 신앙행위를 해 왔다. 대신 공인이 되지 않은 탓에 사회사상과는 직결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불상은 형식적으로 아름답지 못하였고 깊이도 없었다. 예배의 대상도 존귀한 대상도 아니고 단지 예의와 형식으로서 갗추어지는
조형물이었다. 조선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인체의 파악이 부족
② 측면관에서 등이 앞으로 굽고 턱을 내밀고 있음
③ 개성적이지 못한 얼굴
④ 법의는 두텁고 인체의 표현이 없음
⑤ 의문은 사실적이지 못한고 형식적
⑥ 세속화 된 경향이 농후
예술적 아름다움이나 창조적 양식은 사라지고,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는
불상이 조각됨.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는 불상이 조각됨
← 배불정책으로 불교가 사회적인 의미를 잃음
← 세속화되고 형식화 됨 이것은 정신과 기법이 동시에 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퇴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그나마 개성이 남아있었다.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불교문화가 쇠퇴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 숭유억불 정책으로 일관하였던 관계로 불교가 큰 타격을 받았지만
완전히 소멸된것은 아니었다. 천년 동안 국민의 사상과 생활을 지배했던 만큼 정치적으로는 억압하였으나 지배계급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는
이어져 내려왔다. 왕가에서의 불사와 서민의 예불은 계속되어 불상의 조성도 필요하였으나 그것은 현세적이며 개인적인 복을 염원하는데 지나지 않아서
사상적인 깊이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우수한 불상이 조성될 수 없었고고려시대의 불상이 쇠퇴하여 조형예술의 퇴보를 가져왔다고
하지만그래도 개성이 나타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조선시대에 와서는 개성마저 사라지고 시대적인 하나의 양식은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창조적인 양식의 전환은 볼 수 없다. 불상의 종류 원시불교에서는 교주인 석가불만을 불타라 하지만 불교교리의 발전과 함께 많은 종류의 불이 예배되고 또
조상(造像)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실제로 신앙되고 즐겨 조상된 것은 석가불을 비롯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약사불(藥師佛)·미륵불(彌勒佛) 등이다. 또한 53불·천불·삼천불 등과 같은 다불(多佛)과
사방불(四方佛)·오방불(五方佛) 같은 방위불(方位佛)도
만들어졌다. 석가모니불 탄생상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 직후 사방으로 일골 걸음을 옮긴 다음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이 우주에 나만이 존귀하다"라고 외치는
모습이다. 반가사유상 10대 중반 태자 시절의 어느 봄날, 밭갈이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살고
죽는 것이 괴로움임을 목격하고 깊이 고뇌하는 모습이다. 성도상 5세 때 보리수 아래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이루는 모습이다.
오른 손이 항마촉지인이다. 설법상 35세에서 80세 사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설법하는
모습이다. 열반상 80세에 사라쌍수 아래에서 입적하는 모습이다. 모로 누운 것은 등에 종기가
나서 똑바로 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량수불,
아미타불 서방 정토를 주재하는 보신불이다. 협시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또는 지장)
보살이 있다. 선정인 또는 구품인을 한다. 비로자나불 여래형 화엄경의 주존불로서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법신불이다. 지권인을
한다. 보살형 대일여해(마하비로자나불)라고도 한다, 금강계 밀교에서는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에 지권인, 태장계 밀교에서는 보살형에 법계정인(선정인)을
한다. 약사불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동방 유리광세계를 주재하는 보신불이다. 질병과
무지까지 지켜주는 부처이다. 손에 둥근 약단지나 약병을 들고 있다. 미륵불 석가모니로부터 56억 7천만년 후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부처가
된 다음,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래의
부처이다. 2. 보살상
산스크리트 Bodhisattva를 한자로 菩提薩라 음역하는데, 보살이라
약칭한다. 불타가 되기 위해, 즉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자라는 뜻이다. 독립된 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경우도 있고, 불타의
협시(脇侍)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며,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비롯하여 문수(文殊)·보현(普賢)·세지(勢至)·지장(地藏)·일광(日光)·월광(月光)·미륵(彌勒) 등 수많은 보살이
조상되었는데, 관음보살 중에도 33관음·11면관음·수월관음·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등의 종류가 있다. 보살상의 모습은 속세의 귀인(貴人)과
같으며, 몸에는 영락(瓔珞) 등의 각종 장신구를 걸치고 손에는 지물(持物)을 들기도 한다.
3. 나한상(羅漢像)
아라한(阿羅漢)이라고도 하는데,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로
온갖 번뇌를 끊고 사제(四諦:苦諦·集諦·滅諦·道諦)의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를 말한다. 각 종파의
창시자나 지도자들도 나한에 포함시킬 수 있다. 대개 수행의 상으로서 표현하는데, 10대 제자상·16나한·500나한 등이 있다. 경주 석굴암의
10대 제자상은 그 훌륭한 예라 할 수 있다. 4. 신장상(神將像)
불법이나 불타를 수호하고 중생에게 이익되게 해주는 호법신(護法神)으로
인왕(仁王)·사천왕(四天王)·팔부중(八部衆) 등이 유명한데,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착신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다. 인왕은 금강역사(金剛力土)라고도
하는데 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며, 사천왕은 불법과 동방(東方:持國天王)·남방(南方:增長天王)·서방(西方:廣目天王)·북방(北方:多聞天王)의
사방을 지킨다. 팔부중은 인도 재래의 8신을 불교에서 흡수한 것으로 그 이름과 모습이 정형화되지 않고 있으며, 불타팔부중과 사천왕팔부중이 있다.
불상의 재료와 방법
⑴ 석불(石佛) 돌로 만든 불상. 초기부터 만들어졌던 일반적인
불상이다.석재는 인도는 붉은 계통의 사암제, 중국은 흰대리석,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주종이며 마애불이나 석굴사원에서 볼 수 있다.
⑵ 목조불(木造佛) 나무로 만든 불상. 향나무로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는
소나무 이용 고려 이전 의 불상은 없고 조선시대 목각탱, 불감에서 볼 수있다.
⑶ 금불(金佛)
금으로 주조된 불상. 경주 황복사 금제불좌상의 예가 있다.
⑷ 금동불(金銅佛) 동, 청동으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 것이다. 중국은
남북조시대에 유행하였 다. (5) 철불(鐵佛) 송대 유행,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유행. 도피안사
철조비노자나불,보림사 철조 비노자나불좌상이 있다. ⑹ 소조불(塑造佛) 점토로 만든 불상.
⑺ 건칠불(乾漆佛) 나무로 간단한 골격을 만들고 종이나 천으로 불상을
만들어 옷칠을 하고 다 시 도금한 불상. 조선시대 기림사 건칠보살좌상과 불회사 건칠삼존불좌상이
있다. 세부명칭 육계 보통 부처의 머리 위에 혹과 같이 살(肉)이 올라온 것이나 머리뼈가 튀어
나온 것으로 지혜를 상징한다. 불정(佛頂), 무견정상(無見頂相), 정계라고도 한다. 원래는 인도의 성인(聖人)들이 긴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던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나발(螺髮)은 오른쪽으로 말린 꼬불꼬불한 나선형 모양의 머리카락이다. 원래 부처의 32길상에는 머리카락에 관한
설명이 없지만 일부 경전에 나발이 오른쪽으로 말려 있다고 되어 있다. 불상의 머리카락은 간다라 불상에서는 굵은 웨이브형인데 비해 마투라
초기불상에서는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으로 표현되었으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점차 오른쪽으로 말린 꼬불꼬불한 나발형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소발(素髮)은 민머리로 별다른 장식이 없는 머리형태를 말한다. 대개
석조불 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두발형식이다. 계주 유계와 이마 중앙에 반달형의 살이 보이는 부분을 말함. 중아계주와
정상계주가 있다. 백호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을 백호(白毫)라 한다. 이
털은 오른쪽으로 말리면서 나와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광명을 비춘다고 하여 부처뿐만 아니라 여러 보살들도 모두 갖추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초기
불상에서부터 작은 원형을 도드라지게 새기거나 수정 같은 보석을 끼워 넣기도 했으며 드물게 채색으로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삼도 삼도(三道)란 불상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으로, 생사(生死)을
윤회하는 인과(因果)를 나타내며 혹도(惑道) 또는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의미한다. 원만하고 광대한 불신(佛身)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형식으로 보통 불, 보살상에서 볼 수 있다.
보관 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뜻하지만 특히 불상의 머리 위에 얹는 관을 의미한다. 여래 가운데 보관(寶冠)을 쓰는 것은 대일여래, 보관 아미타불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보살, 명왕, 천부 등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보관이 있다. 보관은 고대 인도 귀인(貴人)들의 머리장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불상을
장엄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불, 보살의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즉, 대일여래는 5불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화불이 표현된
오지보관(五智寶冠)을 쓰고 있으며 관음보살은 보관에 아미타화불(阿彌陀化佛), 대세지보살은 수병(水甁), 미륵보살은 탑(塔) 등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변화한 부처를 말한다. 응신불(應身佛) 또는 변화불(變化佛)이라고도 한다. 불,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것으로 작은 여래형으로 표현된다. 보통 관음보살과 대일여래는 보관에 화불(化佛)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광배에 작은
화불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영락 진주, 옥, 금속 등을 끈으로 꿰어서 만든 것으로 보살의 목이나 가슴
등에 늘어뜨리는 장신구의 하나. 원래 인도 귀족들이 몸을 장식하는 풍습에서 유래되었으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불상 특히 보살상의 손과 팔, 다리를
장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밀교상에서는 뱀, 해골 등을 영락(瓔珞)으로 한 예도
있다. 보살영락본업경 권 상에 의하면 보살의 수행에 따라 금, 은, 동, 유리,
수정 등의 영락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보살영락경 제 5에는 이러한 영락들은 각기 다른 기능과 위력을 지니면서 중생을 위해 널리 쓰여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북위, 북제시대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에는
심엽형(心葉形)이나 원형, X자형 영락장식이 크게 유행하였으나 보살상의 양식적 변화와 함께 점차 형식적인 상징물로 표현되었다.
의복 부처나 승려가 입는 의복은 가사(袈裟) 또는 법의(法衣)라고도 한다.
불상의 경우는 세 종류의 옷을 걸치는데 가장 겉에 대의(大衣)를 입고 그 안에 승기지(僧祇支)와 치마인 군의(裙衣)를 입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반면에 보살이나 천부상은 몸에 장신구을 지니고 천의(天衣)를 걸치는 것이
특징이다. ① 대의(大衣) 불상 중에서 여래상이 제일 겉에 입는 옷이다. 승가리(僧伽梨)로 음역되며
중의(重衣), 중복의(重復衣), 잡쇄의(雜碎衣)라고도 한다. 대의를 입는 방식에는 보통 통견과 우견편단의 두 가지가
있다. 통견(通肩)은 양쪽 어깨를 모두 가리는 방식이다. 불상에서는 대의를 이
방식으로 걸치고 옷 끝을 끌어 당겨서 왼손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법의를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치는 방식이다. 불상의 경우는 대개 설법하는 부처가 입는 옷방식이지만 예외도
있다. ② 승기지(僧祇支)
불상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옷을 걸쳤을 때 드러난 가슴을 덮은 속옷으로 승각기(僧脚崎), 엄액의(掩腋衣), 복견의(復肩衣)라고도 부른다. 대개 장방형의 천을 왼쪽 어깨에 걸쳐 양 겨드랑이를 덮으면서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게 한 것으로 군의와 함께 대의 안에 입는
것이다. ③ 군의(裙衣) 중국 고대 의복의 일종으로 불교 전래 이후 불, 보살이 걸쳤던 옷으로
상의(裳衣)라고도 한다. 입는 방법은 종파에 따라서 다르나 보통 허리에서부터 아래를 덮은 긴치마 모양의 옷을 말한다. 불상 표현에서는 대의의
아래와 배의 윗부분에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④ 천의(天衣) 보살이나 천인(天人)들이 입는 얇은 옷을 말하며 무봉의(無縫衣)라고도
한다. 무게가 없는 매우 가벼운 옷이란 의미로, 형태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보통 숄 같은 것으로 나형(裸形)인 상반신의 어깨에서부터 걸쳐서
몸에 두르는 것이다. 손모양(手印) 불, 보살의 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모양을 수인(手印)이라 한다.
원래 불전도(佛傳圖)에 나오는 석가의 손모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불의 경우에는 선정인,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시무외인, 여원인의 5가지
수인을 주로 취하나 이 밖에도 천지인 등이 있다. 특히 밀교에서는 수인을 중시하여 대일여래의 지권인을 비롯하여 보살, 천부, 명왕 등에 따른
다양한 손모양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상 종류에 의한 수인은 교리적인 뜻을 가지고 표현되었기 때문에 불상의 성격과 명칭을 분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① 선정인(禪定印)
부처가 선정에 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결가부좌한 상이 취하는 수인이다.
삼마지인(三摩地印) 또는 삼매인(三昧印)이라고도 하며 불상의 종류에 따라 법계정인(法界定印), 등지인(等持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취한 첫 수인이다. 손바닥을 편 채로 왼손은 배꼽 아래에 두고, 그 위에
오른손을 포개서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양이다. ② 시무외인(施無畏印)
부처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위안을 주는 수인이다. 인도의
초기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오른손 또는 왼손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세운 채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여원인과 짝을 이루어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 두 수인을 합하여 일명 통인(通印)이라고
한다. ③ 여원인(與願印)
부처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하는 의미의 수인이다. 시원인(施願印), 만원인(滿願印)이라고도 한다. 왼손을 내려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손모양으로 시무외인과는 반대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원인은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 삼국시대 불상에서는 시무외인과 함께 불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나타나고 있다. ④ 통인(通印)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합친 수인을 말한다. 교리상 비슷한 성격을 가진 두
개의 수인을 합치게 된 것은 보다 많은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 같다. 통인을 취하는 상은 대부분 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연가 7년명 불입상을 비롯하여 신라의 경주 남산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배리 삼체석불입상 등 삼국시대 불상에서 그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부처가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항마인(降魔印),
촉지인(觸地印), 지지인 (指地印)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성도(成道)할 때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지신(地神)을
불러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였다는 내용에서 유래되었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가운데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늘어뜨리면서 다섯 손가락을 편 모양이다. 이 수인은 반드시 결가부좌한 좌상만이 취하는 것으로 입상이나 의상(倚像)에서는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팔공산 군위 삼존불 본존상을 시작으로 해서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 및 석굴암 본존불을 거쳐 고려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⑥ 지권인(智拳印)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의 수인이다. 보리인(菩提印), 각승인(覺勝印)이라고도 한다. 금강정경(金剛頂經)에 기초를 둔 것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집게손가락만
똑바로 세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집게손가락 끝에 서로 맞닿도록 한
모양이다. 이 수인은 주로 밀교계의 대일여래가 취하는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철불(859년)을 비롯하여 동화사
비로자나철불(863년), 도피안사 비로자나철불(865년), 축서사 비로자나철불(867년) 등 고려시대의 불상을 들 수
있다. ⑦ 전법륜인(轉法輪印)
부처가 깨달은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와 중생들에게
최초로 설법할 때의 수인이다.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린 채 왼쪽 손바닥은 안으로, 오른쪽 손 바닥은 밖으로 향하게 하고 각각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맞붙여 마치 불교의 법륜(法輪)을 상징하는 것 같은 모양이다. 이 수인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어 일정하지 않다.
보통 정토교에서 말하는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에 해당되며 단독의 아미타상에도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많지 않으나 안압지 출토의 통일신라시대 금동삼존판불상의 본존불 등에서 볼 수
있다. ⑧ 합장인(合掌印)
보통 예배를 드리거나 제자와 문답(問答)할 때 취하는 수인으로,
귀명인(歸命印) 또는 일 체절왕인(一切切王印)이라고도 한다. 두 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손바닥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양으로 인도의 바르후트
대탑이나 산치 대탑 등의 부조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방어산 마애삼존불(801년)의 오른쪽
협시보살상을 비롯하여 안압지 출토 금동보살판불상, 석굴암의 십대제자상 등에 나타나고
있다. ⑨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 선정인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아미타불의 수인이다.
묘관찰지정인(妙觀察智定印)이라고도 한다.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에 오른손을 포개서 배꼽 부근에 놓고 각각 둘째 손가락을 구 부려서 그 끝이
엄지손가락에 닿게 한 모양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중생들은 성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화하여 9등급으로 나누어서 각 사람에게 알맞게 설법해야만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이 9품에 따라 아미타불의 수인도 각각
다르다. 상생인(上生印)은 아미타정인과 같은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중생인(中生印)은 두 손을 가슴 앞에까지 올려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자세이고, 하생인(下生印)은 오른손을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하여
가슴 위까지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는 것만이 다를 뿐, 손가락 모양은 상, 중, 하생인이 똑같이 되어 있다. 다만 엄지와 맞대고 있는
손가락에 따라 상(上), 중(中), 하품(下品)으로 구분된다. 즉 엄지와 둘째 손가락이 서로 맞대고 있을 때에는 상품이고, 엄지가 셋째 손가락과
맞대고 있을 때에는 중품, 그리고 엄지와 넷째 손가락이 닿아 있을 때에는 하품이 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상품상생인은 좌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반면에 입상에서는 상품 하생인이 일반적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와는 반대로 손모양은 똑같지만 서로 맞댄 손가락에 따라 상, 중, 하생인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으나 최근에는 전자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미타불이 9품인을 하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물며 주로
아미타정인과 항마촉지인 을 하고 있다. ⑩ 천지인(天地印)
부처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 걸어가서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던 데에서 유래한 수인이다. 한 손은 위로 하고 다른 한 손은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주로 탄생불이 취하는 수인이다. 지물 불상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을 말한다. 수인에 상대되는 말로
계인(契印)이라고 도 한 다. 불, 보살의 본원(本願)과 성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물(持物)에 의해서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여래상 중에서는 약사불이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것 외에는 거의 볼 수 없으나 보통 관음보살은 정병이나 연꽃, 지장보살은 석장, 범천은 불자,
제석천은 금강저, 다 문천은 보탑(寶塔) 등을 들고 있다. 이 밖에도 법구(法具), 무기, 보주, 악기, 경책, 염주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① 보주(寶珠)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구슬. 여의주(如意珠) 또는
여의보주(如意寶珠)라고도 한다. 지도론(智度論) 제 59에 의하면 원래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중생을 정신 적인 번뇌와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덕과 신통력을 가진
상징체로서 신앙되었다. 그러나 점차 불, 보살상의 지물로 표현되었으며 보관(寶冠)이나 광배, 천개(天蓋), 사리용기 등 여러 부분에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특히 우견편단( 右肩偏袒)의 약사불입상이나 백제 보살상의 지물로서 많이
나타난다. ② 불자(拂子) 승려가 수행할 때 마음의 티끌이나 번뇌를 털어내는 데에 사용하는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불 (拂), 불진(拂塵)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먼지나 모기, 파리 등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였던 생활
용구였으나 불교에서는 더럽고 나쁜 것을 털어버리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 형태는 마(麻)나 짐승의 털 같은 것을 묶고 손잡이를 붙여서
만든 도구인데 특히 털의 색깔이 흰 불자 (白拂)를 귀중하게 여겼다. 주로 선종(禪宗)에서 주지(住持)가 설법할 때 위엄의 상징으로써 많이
사용되었으며 불교 조각에서는 제석천(帝釋天)이나 천수관음보살상(千手觀音菩薩像)의 지 물의 하나로
나타난다. ③ 금강저(金剛杵)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불구의 하나로 금강지저(金剛智杵),
견혜저(堅慧杵)라고도 한다. 원래는 제석(帝釋)의 전광(電光:번개)에 붙였던 이름이었으나 점차 여러 신이나 역사(力士)가 지니는 무기를 가르키게
되었다. 금강저는 불교로 수용되면서 그 단단함 때문에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으며 밀교에서는 금강령과 한 짝이 되어
마음의 번뇌를 없애주는 상 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형태는 손잡이 양쪽 끝에 뾰족한 창과 같은 것이 붙어 있으며 창(杵)의
수에 따라 독고저, 3고 저, 5고저, 9고저로 나누어진다. 또한 형태가 특이한 탑저(塔杵), 보주저(寶珠杵), 9두용저(九頭 龍杵)도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유물로는 3고저와 5고저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악마를 항복시켜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는 벽사의 의미에서 만다라(曼茶 羅)나 사경화(寫經畵) 등의 불화의 테두리에 금강저문이 장식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금속이나 목공 예품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④ 정병(淨甁) 깨끗한 물이나 감로수(甘露水)를 담는 병을 말한다. 법화경 권 하에
의하면 원래는 승려가 반드시 지녀야 할 18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 점차 불전(佛前)에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정병은 부처님 앞에 바치는 공양구의 하나일 뿐 아니라 관음보살이 가지는 지물로서의 역할도 함께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정병은 가늘고 긴
목에 테두리가 둘러져 있고 넓은 어깨 부분에는 뚜껑이 있는 주둥이가 나와있는 독특한 형태라고 자세히 설명되 어 있다. 주로 청동이나 점토로
만들어지나 금, 은을 사용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융성 과 함께 특히 많이 제작되었다.
⑤ 경책(警策) 승려가 좌선할 때 졸음이나 잡념을 쫓기 위하여 사용하는 넓적한 막대기이다. 길이는 약 127cm, 폭은 약 6cm 정도 되는 크기로 주로 나무로 만들어지며 죽비 대신에 사용하기도 한다. 보통
스님의 지물로 초상화에 많이 표현되어 있으며 석굴암 보현보살상에서도 볼 수 있다. 지금도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유물로서 오래된 예는
없다. ⑥ 염주(念珠) 불, 보살상에게 예배할 때 손목에 걸거나 손으로 돌리면서 염불하는 수를
세는데 사용하는 불구의 하나로 수주(數珠), 송주(誦珠), 주주(呪珠)라고도 한다. 예배도구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지 만 비구 18물 중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초기 불교도들은 사용하지 않다가 대승불교의 흥기와 함 께 염불이 유행하면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목환자경에 따르면
108염주를 항상 지니 고 다니면서 불(佛), 법(法), 승(僧)의 이름을 외울 때마다 구슬을 하나씩 넘기면 마음의 번뇌와 업보가 없어져
안락함을 얻는다고 한다. 염주의 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1080, 108, 54, 27개의 4종류와 108, 54, 42,
21개의 4종류 등이 있다. 그 중에서 108개는 백팔번뇌를 끊고 백팔삼매를 얻는 것을 상징한다. 보통 금, 은, 적동(赤銅), 수정으로
만들어지나 보리수 열매, 연꽃 열매, 다라수 열매, 나무, 유리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⑦ 석장(錫杖) 스님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지팡이로 비구가 항상 지녀야 하는 18가지
도구 중의 하나이다. 유성장(有聲杖), 성장(聲杖), 지장(智杖), 덕장(德杖)이라고도 한다.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인도에서는
산이나 들에 다닐 때 뱀, 독충을 쫓기 위해서 이것을 울리면서 걸었다고 하지만 법회와 걸식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불교 조각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지물로 알려져 있으나 천수천안관음보살(千手千眼觀音菩薩)의 지물의 하나로 표현되기도 한다.
형태는 손잡이 끝에 탑 모양의 둥근 고리가 붙어 있고 여기에 조그만 쇠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는 데 이
쇠고리의 수에 따라 4환장(四環杖), 6환장(六環杖), 12환장(十二環杖) 등으로 부른다. 둥근 고리의 중심에는
보주(寶珠)나 용, 오륜탑(五輪塔), 삼존불 등을 장식한 예도 있다. 보통 석장의 머리부분은 동(銅)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아래 받침대는 나무
또는 철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서 대표적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의 금동석장을 들 수 있다.
자세 불상은 자세에 따라 입상, 좌상, 와상(臥像)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특히 좌상은 결가 부좌, 반가부좌, 유희좌, 윤왕좌, 의좌, 교각좌 등으로 다시
분류된다. ①
결가부좌(結跏趺坐) 부처가 좌선할 때 취하는 편안한 자세로 금강좌(金剛坐),
선정좌(禪定坐), 여래좌(如來坐)라 고도 한다. 여래가 주로 취하는 자세로 길상좌(吉祥坐)와 항마좌(降魔坐)의 두 형식이 있는데 전자는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좌선할 때 취한 자세로서 그 기원이 좀더 오래된
것이다. 길상좌는 왼발을 오른쪽 다리 위에 얹은 다음 오른발을 밖에서 왼쪽 다리에 얹은 것이고 항마좌 는 이와
반대로 오른 발을 왼쪽 다리 위에 얹고 왼발을 오른쪽 다리 위에 얹은 것이다. 인도에 서는 간다라 불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길상좌를 하고 있으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불상에서도 길 상좌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많다. ② 반가부좌(半跏趺坐) 보살상이 많이 취하는 자세로 반가좌(半跏坐) 또는 보살좌(菩薩坐)라고도
한다. 결가부좌에서 한쪽의 다리를 푼 자세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으로 결가부좌한 위쪽의 다리를 넓적다리 밑으로 넣고 오른쪽 또는 왼쪽의 한 발만을
다리 위에 얹은 것이다. ③ 유희좌(遊戱坐)
한쪽 다리는 결가부좌하여 대좌 위에 얹고 다른 다리는 아래로 내린 자세이다. 다리의 위치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오른쪽 다리를 내린 것을 우서상(右舒相)이라고 하는 반면에 왼 쪽 다리를 내린
경우는 좌서상(左舒相)이라고 한다. 인도를 비롯하여 티베트, 네팔 등 동남아시 아에는 그 예가 많이 남아 있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고 오히려 이 형식에서 변 형된 반가사유상이 크게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신선암 마애보살좌 상과 성주 노석동
마애불상군의 불좌상과 조선시대의 기림사 건칠보살좌상(1501년) 등이
있다. ④ 윤왕좌(輪王坐) 한쪽 다리는 결가부좌하고 다른 한쪽 다리는 무릎을 세우고 편안하게 앉은 자세이다. 전륜성왕( 轉輪聖王)의 좌법으로 왼손은 왼쪽 다리 뒤로 기대고 있는데 반하여 오른손은 무릎 위에 걸치고 있 기 때문에
불상의 상체가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도에서는 사자후관음이나 문수보살이 주로 이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중국에서도
북위시대부터 시작되어 그 예가 상 당히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형식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상 등 고려시대 불상에서
간혹 나타난다. ⑤ 의좌(倚坐) 일반적으로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의자나 대좌에 걸터앉은 자세이다. 이
명칭은 오래된 예가 없 어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의 북위시대부터 수, 당에 이르 기까지 만들어졌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의 경주 삼화령 미륵삼존상의 본존불이나 고려시 대의 법주사 마애불상에 있을 뿐 보기 드문
형식이다. ⑥ 교각좌(交脚坐) 의상(倚像)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양 다리를 교차시킨 자세이다.
인도에서는 천인(天人)과 속인(俗人)이 앉는 방법으로 그 기원이 오래되었으며 간다라 보살상에 그 예가 많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특히
남북조시대 때 유행하여 주로 미륵상으로 많이 나타나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 신라시대의 성주 노석동 마애불상군의 오른쪽 협시보살상이 유일한 예로
알려져 있다. ⑦ 열반상(涅槃像) 부처가 열반할 때의 모습으로 두 다리를 가지런히 뻗고 옆으로 누운 자세의 불상으로 와상(臥像 )이라고도 한다. 이 자세는 석가불만이 취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아잔타 석굴 제 27굴에 유 명한 열반상이 있으나
예배상으로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에 그 예가 드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더욱이 볼 수 없는 상이지만 최근에 원각사지 10층석탑
4층 탑신석에서 부조로 표현된 예가 발견되었다. 8.궤좌상 한무릎은 세우고 다른 무릎은 꿇어앉은 자세.보살 공양상 등
9.하엽좌 나뭇잎 모양의 대좌,천부상,나한상
등. 대좌 대좌(臺座)란 불, 보살 또는 천인, 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를
말한다. 불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나 32길상 80종호에는 대좌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어 그 기원과 전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원래는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불도(佛道)를 깨달았을 때 앉았던 풀방 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에는 이 자리를 금강좌(金剛座)라 불렀다. 그
형태는 불상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연화좌를 비롯하여 사자좌, 상현좌, 암좌, 운좌, 조수좌, 생령좌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연화좌와
사자좌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①
연화좌(蓮花座) 대좌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며 연꽃이 더러운 흙 속에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 덕이 있 기 때문에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연꽃 줄기만 표현한 연화대좌가 만들어졌으나 꽃잎 끝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과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을 합친 단판(單瓣) 연화, 여러 개가 포개 진 복판(複瓣) 연화, 그리고 장엄화된 보련화 등으로 발전하였으며 점차
복잡한 구성으로 전개되 었다. 보통 형태는 크게 방형대좌와 원형대좌로 나눌 수 있는데 방형대좌는 사각, 육각, 팔각 등이며 그 중에서 사각대좌는
인도,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서 가장 유행한 형식이다. 우리나 라에서는 특히 통일신라시대부터 팔각대좌가 보이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에서
9세기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다. ② 사자좌(獅子座)
대좌의 형태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니라 부처가 사자와 같은 위엄과 위세를 가지고 중생을 올바르 게
이끈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로서 경전에서는 자주 언급된다. 실제로 대좌의 좌우 양쪽에 사자 를 새긴 예는 매우 드문
편인데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이나 집안의 장천 1호 고분벽화에 보 이는 고구려 초기의 불상예배도, 청주 비중리 석조삼존불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사자좌는 불, 보살을 비롯한 여러 불상에 널리 이용되는 연화좌와는 달리 여래상에서만
나타난다. ③ 상현좌(裳懸座)
결가부좌한 불상이 입은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 형식을 말한다.
인도 간다라 불상 조 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특히 불상 표현이 중국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옷주름 표현이 강조되면 서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특히 백제시대의 부여 군수 리사지 납석제불좌상과 팔공산 군위삼존불의 본존상, 청양 출토 대형 도제불상
대좌 등이 대표 적인 예이다. ④ 암좌(岩座)
울퉁불퉁한 바위 형태를 표현한 대좌로 주로 명왕과 천부상에 많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분황사 석탑의 인왕상이나 석굴암 팔부중의 대좌에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상은 없으졌지 만 황룡사의
금동장육삼존상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대좌로 이용한
예이다. ⑤ 운좌(雲座) 구름 형태로, 내영(來迎) 형식의 아미타삼존 내지 독존상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보살상이나 신 장상, 천부상의 대좌로도
이용된다. ⑥ 조수좌(鳥獸座)
동물을 불상의 대좌로 사용한 형식으로 인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불,
보살, 명왕, 신장상 등에 나타나는 동물은 신화에 의한 것이 거의 없고 오히려 불교 교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 것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경의 불국사와 법수사지에 파편으로 남아 있는 문수, 보현보살의 사자좌와 코끼리좌를 제외하고는 거의 볼 수
없다. ⑦ 생령좌(生靈座)
천인에서부터 아귀축생(餓鬼畜生)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대좌로 한 형식이다. 옳지 않은 생령(生靈:생명)을 힘으로 항복시킨다는 뜻이 있다. 대개 명왕이나 신장상이 타거나 서 있는 것으로 좌상에서는
드물며 주로 입상에 많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천왕, 팔부중의 대좌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감은사지 3층석탑
출토 청동사리구 사천왕상을 비롯하여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사천왕상전, 석굴암 사천왕상 등이
있다. 석굴사원의 기원 1. 석굴의 의미 석굴사원의 전통은 인도에 기원을 둔다. 그리고 석굴사원의 구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차이티나(Caitya)굴로, 대체로 장방형으로 길고 안쪽 끝이
둥근 말발굽형태이며,둥근 곳에 탑을 봉안하는 형식이다. 다른 하나는 비하라(Vihara)굴이다. 커다란 방형의 홀을 중심으로 각 면에 작은
방들을 마련한 형식이다. 중앙의 큰 홀은 강의나 집회 장소로 사용하고, 각 면에 뚫린 작은 방들은 침실이나 식당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이 석굴은 찌는 듯한 더위, 오랫동안 계속되는 장마, 맹수들의
습격이나 세속의 소란을 피하여 조용히 수도에 전념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였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는 돈황석굴이
일종의 예배장소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우상숭배교도로...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많은 사원과 수도원을 갖추고 그 안에 안치된 우상을 숭배하며 공양을
드린다. 아이가 태어나면 양 한 마리를 살찌워 신년 혹은 축제일에 아이와 그 양을 우상 앞으로 데리고 가서 제를
올린다." 이 전통이 동쪽의
중국으로 전해져 처음으로 이루어진 석굴사원이 돈황의 막고굴, 천불동이라고 볼 수 있다. 석굴사원의 전통은 운강석굴과 용문석굴로 이어졌고, 신라의
석굴암에 까지 이어졌다. 석굴사원과 마애불의 관계 마애불은 인도의 석굴사원의 벽면에 새긴 불상을 시초로 한다.
석굴사원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후부터 조성되기 시작되었으며 매우 빈번하게 조성된
시기는 5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대승불교시대에는 석굴사원이 대표적인데 그 예를 들자면 아잔타 석굴인 초기 석굴과 후기 석굴 그리고
후진의 주불 등이 주로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다. 오랑가바드 석굴 등에서는 각 벽면마다 불·보살상을 빽빽히 새겼으며
여기에 마애불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석굴의 석주기둥에도 돋을새김이 나선각으로 불상을 새겼는데, 석굴 아닌 절벽이나 바위면에 감실을
파고 새긴 간다라 스와트 지방의 마애불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마애불은 경주 남산 마애불과 거의 비슷해서 우리 나라 마애불의 선구임을 알
수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 있는 석굴은 수십 미터나 되는 초대형 석굴이며 돈황석굴 등에도 마애불이 새겨지고 우리 나라에도 전해져 돋형
마애불이 새겨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약수계와 삼릉계에 있는 마애대불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옛 장안인 서안 일대에도 맥적산 석굴이나
장안의 각 감실에 마애불들이 수없이 조성되었으며 운강, 용문, 천룡산, 타산 등은 물론 사천 각 지역마다 수많은 마애불이 새겨졌다. 특히 산동
지방의 운문산 석굴은 우리 나라 삼국시대 마애불의 조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은 간다라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 각지의 수많은 석굴에 조성되었으며,
인도 중국의 마애불은 우리 나라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나라는 중국과 인도와는 달리 지리적 환경적인 것을 감안해 완전한 석굴이 아닌 대형
바위나 절벽 또는 돌기둥 등에 크고 작은 감실을 파고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마애불은 기법, 재료, 주체 등에 따라 구분 짓는 방법이 있다. 여기서
잠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애불을 이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은 조각 기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오목새김인 음각은 바위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뒤 깊이 파는 방법으로 새긴 것을 말하며 바위면을 그대로 둔
채 깊이로 새기는 방법이다. 여기는 조각칼로 선을 그어 형태를 만드는 선각기법과 조각정으로 두드려서 형태를 이루는
점각기법이 있다. 돋을새김인 양각은 불상의 외형을 그대로 둔 채 주위 바위면을 제거함으로써 불상의 형태가 두드러지게 하는 기법이다.
우리 나라에는 양질의 화강암지대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애불은 화강암 절벽이나
화강암으로 된 큰바위에 새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화강암 마애불이라는 명칭을 얻을 만큼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있는데, 화강암이 다른 석재에 비하여 풍우에도 오래 견디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마애불을 크게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삼국 가운데 고구려 마애불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다루기 어려우므로 통일이 이루어진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서울과 경주 편집부는 각기
지역적 특징을 감안하여 '우리 나라 마애불을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다음과 같이 우리 나라 마애불의 실태와 상황 등을
탐방하였다. (2) 신석기
사회 * 씨족 중심의 부족 사회 : 부족장이 생산 활동 지휘, 폐쇄적 생활 구역, 족외혼,
공동샌산 * 신앙 : 영혼 숭배(해, 달, 산, 강, 동물, 큰 나무 등)
애니미즘 농사에 영향을 끼치는
해, 구름, 비, 천둥, 우박과 같은 자연의 변화에 큰 관심을 갖음. 자연환경이나 산, 강 같은 것에 신이 있다고
생각 토템이즘 곰이나 호랑이 말 등과
같은 동물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음 샤머니즘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 사람과 영혼을 연결시키는
무당과 주술을 믿음 끝 |
첫댓글 귀한말씀 잘듣고 갑니다...()...
귀한자료 묘셔갑니다,감사합니다_()_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 근데 넘 많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