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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이 백제를 멸하러 '황해' 건넜나?
해양대제국 백제의 활동무대는 중국의 산동성이다
2008/05/08 ⓒ pluskorea 성훈 칼럼니스트
아래 글은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265§ion=section78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왕도 부여"의 2부입니다. 연결해서 읽으셔야 이해가 됩니다.
고대중국의 수도가 서부 산악지대인 이유
아래 필자의 글을 확실히 이해하려면 대략적인 중국 고대국가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의 수도는 주로 서안과 낙양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다. 낙양이 동부 평야지대에서 서부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왜 고대 중국은 동부의 넓고도 넓은 평야지대를 놔두고 서부 산악지대에 수도를 둔 것일까? 산악지대가 평야지대보다 살기 좋아서일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동부 평야지대에는 동이(東夷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감히 평야로 나오지 못하고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고대중국인들은 산적(山賊)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동부평야지대로 나온 것은 신라와 대진국이 망하고 난 뒤였다. 그 정도로 우리 삼국은 막강했기에 중국은 감히 동부평야지대를 넘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5호16국이 끝나고 남북조시대로 들어간다. 그 남북조시대의 북조(北朝)의 최강국은 북위였다. 그 북위의 수도도 역시 산악지대로 산서성 대동시와 하남성 낙양이었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5차례나 동부평야지대인 백제를 공격했으나 동성대왕에게 완패하여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불과 백제 패망 170년 전의 일이다.
▲ 남북조시대 북조의 북위도 산적 신세였다. 동부의 넓은 평야지대로 나오려고 동성대왕과 5차례 전쟁을 했지만 모두 패해 결국 산 속에서 패망하고 만다. 동부평야지대를 지배한 동성대왕이 파견한 7태수들.
한반도 백제가 황해를 건너가 이렇게 큰 식민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것을 격퇴시키려면 거의 대등한 병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병력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갔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그 때 충청도와 전라도의 인구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분명 백제는 대륙에 있었고, 주 무대는 산동성이었다.
중국 25사의 하나인 <남제서>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강시단야(僵屍丹野) : 북위의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즉 북위의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는 남제서의 일부 내용(15줄 324자)이 지워져 있다. 거기에는 더 엄청난 기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고의로 그 기록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무슨 내용인지는 중국학자만 알고 현재 아무도 모른다.
▲ 남제서의 일부 내용이 지워져 있다. 중국은 왜 이 기록을 고의로 삭제했을까? '강시단야'라는 표현까지 쓴 남제서가 왜 무슨 기록이 여기에 있길래 이랬을까? 뭔가 엄청난 비밀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나라도 선비족으로 다 같은 단군의 후손으로 고구려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룬다. 한 핏줄이다 보니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자웅을 겨루자고 수.당이 단군의 적장자국(嫡長子國)인 고구려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것이 명분이었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수나라의 수도는 하남성 낙양이고, 당나라의 수도는 섬서성 장안이었다. 왜 그들은 평야지대로 못 나오고 산속에 갇혀 있었을까?
그건 바로 고구려만큼이나 강력했던 백제 때문이다. 중국은 평야지대로 나오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으나 힘이 약해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은 산 위에서 본 선망의 대상인 넓은 지역을 다 바다(海)로 보았다. 海는 글자 그대로 바다일 수도 있으나, 큰 강, 큰 호수, 큰 평야를 바다(海)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X海란 지방이 중국에 여러 곳에 있고, 그냥 海라는 육지지명도 있다.
백제와 관련되는 사서에 나와 있는 海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고대 중국에는 해전 기록과 유명한 수군장수가 없다. 그건 중국이 바다를 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의 적벽대전은 허구의 소설이지 그런 역사기록은 없다. 적벽은 양자강 중류에 있고, 거기가 위.오.촉 삼국의 격전지였다. 그 동쪽의 평야지대에는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로 본 백제의 최후
의자왕 16년(656년)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이 목숨을 걸고 의자왕에게 간한다. “(전략)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겁니다. 무릇 용병하는 법은 반드시 그 지형을 살펴 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타국의 군사가 들어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을 들어서게 하지 말며, 그 요새(혐애)를 의지하여 막아야 합니다(據其險隘以禦之).”
성충은 분명 강의 상류로 나가 적과 싸우라 했는데, 현 국사이론대로라면 백마강의 상류로 가서 적과 싸우란 말이다. 소정방이 배를 타고 부여를 오려면 분명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 와야 하는데 왜 성충은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이길 수 있다 했을까? 이 한마디만 들어도 성충이 말한 강은 부여의 백마강이 아니고 부여는 백제의 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기벌포를 금강 하구 장항으로 비정한 식민사학계. 장항이 군사적 요새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적의 수군은 요새 즉 험애(險隘)인 기벌포의 언덕을 들어서게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요새인 기벌포의 언덕이라 함은 바다 포구가 아니고 강에 있는 포구로 봐야 한다. 바다 포구 옆에도 언덕이 있을 수는 있으나, 강 포구 옆에 언덕이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리고 성충은 기벌포의 언덕이 험애(險隘) 즉 요새라고 말하고 있다.
사학계는 기벌포를 장항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필자는 장항이 천연적인 요새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서해안 포구에 요새가 있을 수 있는 확률은 전무하다. 왜냐하면 요새란 반드시 험한 산이 있고 천연적인 지형지물인 협곡(峽谷)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경새재(조령) 정도는 되어야 요새란 소릴 듣는다. 높은 산도 없는 서해안 바닷가가 요새가 될 수는 없다. 장항을 기벌포로 비정한 식민사학계의 거짓말이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현 사학계의 이론대로 백제 땅인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에 요새가 될만한 높은 산과 깊은 협곡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산동성은 그 유명한 태산(泰山)을 비롯해 험한 산과 호수가 많은 지역이다. 충신 성충의 이야기 한마디만 들어봐도 백제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산동성 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다음은 현 삼국사기 번역문이다.
소정방은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니(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신라왕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좌평이 아뢰길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와 병났고(唐病遠涉溟海)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는 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피곤해져 있으니(不習水者在船必困) 그들이 육지에 내리어 사기가 오르기 전에 급히 들이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은 “당나라는 협주(莢州)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라는 <신라국본기>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분명 <신라국본기>에는 바다가 아니라 물길(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 왔다고 했다.
그러나 <백제국본기>에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이 있어, 사학계는 이를 근거로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두 기록이 다르다는 것은 어느 기록 하나는 위작이란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누가 위작을 했건 위작을 하려면 어느 기록을 고쳐야 했는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만일 어느 하나가 위작이라면 <백제국본기>가 위작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위작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는 소정방이 성산, 제해(지명)에서 나라 서쪽 덕물도까지 군을 이끌었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성산과 제해 둘 다 지명으로 볼 수도 있고, 성이 있는 산인 제해지방에서로 번역할 수도 있다. 성산제해는 <신라국본기>의 협주(莢州)보다 더 서쪽에 있거나 가까운 지방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섭명해(涉溟海)를 바다를 건넜다고 해석하지 않고, 큰 평야인 溟海라는 지역을 지났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근거는 걸어서 지난다는 섭(涉)자이다. 진짜 바다를 배로 건넜다면 굳이 걸어서 건넌다는 섭(涉)이란 한자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 않은가??? 고대 중국인들은 큰 평야도 바다로 표현했다. 그리고 불습수자(不習水者)라는 문구는 강물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이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로 해석하기는 지나친 면이 있다. 진짜 바다라면 불습해자(不習海者)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장 그대로라면 당나라 군대는 처음부터 배를 타고 온 것이 아니고, 먼저 명해 지방을 멀리 걸어 와 병이 났고 다음에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온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하면 신라국본기와 해석이 거의 같아진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국본기>는 위작이 아니라 다른 표현을 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본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무대는 분명 한반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다른 근거도 많으니 여기에 집착할 필요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 평원, 동평, 황산, 백마강, 사수 등이 패망시 지명. 부흥운동의 중심인 주류성도 보인다.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으로 도독부가 설치된 곳.
계속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흥수가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당군은 (생략) 신라와 더불어 기각(?角:기병)이 되었으니, 만약 평원(平原:지명) 광야에서 대진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긴한 길목입니다. (생략) 당병은 백강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며 (후략)”라고 고한다. 그러자 대신들이 말하기를 “(전략)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더라도 물결따라 내려오는 것이어서 여러 배를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이며, 신라군을 탄현에 오르게 하더라도 지름길을 경유하는 것이어서 여러 말을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입니다. (후략)”이라고 반대의견을 내던 중, 이미 적이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5천 병사와 함께 계백장군을 급히 황산으로 보낸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황산을 논산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흥수와 다른 대신이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바로 “백강은 도성(都城)의 요긴한 길목이고, 백강에 들어서더라도 물결 따라 내려온다.”라는 대목인데 현 부여의 백마강은 흥수와 대신의 말과 많이 다르다. 우선 길목이라 함은 백강과 도성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을 말함인데 현재의 백마강은 부여의 바로 옆을 휘감아 돌아 흐른다. 이 백마강이 어떻게 요긴한 길목이란 말인가? 그리고 백마강은 백강에 들어와 물결 따라 내려오는 강이 아니다.
이 말은 백강은 다른 강과 연결된 강이란 말이며, 분리되어서는 내려오는 강물인 것이다. 그래서 성충이 “강 상류로 가서 대항하라”고 의자왕에게 충언한 것으로 본다. 성충이 말한 강이 백강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여하튼 부여의 백마강은 그런 강이 아니다. 소정방은 분명 바다에서 백마강 하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했다.
이는 흥수와 대신이 의자왕에게 고하는 사서의 기록과 다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여가 사비성이라면, 소정방의 병력을 막으려면 하류에서 막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지 왜 상류를 막아야한다고 성충이 말했을까? 성충이 잘못 말한 건지 현 부여의 백마강이 틀린 건지 머리 좋은 독자는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부여 백마강이 가짜인 것이다. 산동성 백마하(白馬河)는 사하(泗河)에서 분리되어 내려오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이다. 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강이다.
▲ 산동성 백마하는 사수에서 분리되어 흐르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났기 때문에 계백을 황산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백강과 사비성 중간에 황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쪽인 논산(황산)을 지나야 서쪽인 부여(사비)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비 서쪽에 백강(백마강)이 바로 옆으로 흘러 현재의 지형은 사서 기록과 전혀 안 맞다.
현재 사학계에서 설정한 백마강과 논산과 부여의 위치가 역사기록과 엇박자가 난다. 즉 백강, 황산, 사비 순으로 지형이 놓여 있어야 하는데, 서쪽에서부터 백마강(백강), 부여(사비), 논산(황산) 순으로 놓여있다. 이건 삼국사기 기록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이유로 분명 부여는 원래 백제의 수도가 아니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가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망갔다 나와서 항복하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는 쓰러졌다. 당시 백제는 막강했었으나 방심하다 상대의 기습공격에 수도가 졸지에 함락당하고 왕이 항복해서 순식간에 나라가 망한 것이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무하마드 알리가 빠른 발로 다가가 휘두른 강펀치에 턱을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 되는 조지 포먼과 같은 신세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고,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에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백제의 인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3부에서 다시 언급한다). 덕안은 양자강 이남 강서성에 있고 나머지는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다.
이후 백제는 부여풍 복신 흑치상지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왜까지 동원된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겨루는 국제전이 된다. 이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이 당나라 40만 대군이 역시 배타고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정신병자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이런 대군이 배타고 황해바다를 절대로 건너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 만 척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우기는 사람들을 위해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 식민사학계의 이론은 당나라가 황해바다를 건너 한반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얘긴데 글쎄요? 건널 수 있을까요?
소정방은 과연 황해바다를 건너 왔을까?
필자는 중국에 갈 때 배 타고 가길 좋아한다. 선박으로 갈 수 없는 곳이라면 모를까 웬만해선 배를 이용한다. 배 여행은 편하고 나름대로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배는 밤을 끼고 달린다. 배를 타면 저녁식사를 하고 독주를 마시고 잠을 청한다. 잠자리가 바뀌어 잠이 안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 이유는 파도에 울렁거리는 배 멀미를 안 느끼기 위해서이다. 파도가 높은 날에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때도 있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구토하기 예사이다.
정용석씨가 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 124쪽에 보면 황해바다 해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중간 중간 생략하고 요점만 말하자면, “인천과 청도를 항해하는 1만 톤급 뉴 골든 브리지(New Golden Bridge)란 동력선이 있는데 청도까지 21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대형 선박도 대륙연안의 급 해류 지역에서 ‘걸프 스트림’을 만나면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심하게 요동을 치며 항로를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급 해류 해역에서의 항해는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연안해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한국의 연안해류도 같은 방향) 평균 유속은 0.5~0.6m/초 정도이다...(이하 생략)”
▲ 황해의 해류도. 청색은 육지쪽의 연안해류이고, 적색은 바다 가운데 주 해류다. 연안해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주해류는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른다. 산동반도 앞바다는 주해류와 연안해류가 만나는 곳으로 바닷물이 빙글빙글 도는 곳이다. 여기를 중국형 목선으로 돛과 노도 없이 도만 가지고 황해를 건넜다는 것은 정신병자들이 하는 소리다.
참고로 위의 해류 사진을 보면 바다 한 가운데 황해바다의 주 해류(빨간 선)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 흐르고, 그 해류가 발해만으로 들어갔다 돌아 나와 중국과 한국의 연안해류(청색 선)로 이어져 내려온다. 주 해류의 유속은 중국연안 해류의 몇 배나 된다. 이러한 해류들은 만조나 간조 시간에 특히 심하게 움직인다.
가장 물살이 강한 곳이 대련과 연태사이의 바다이고, 다음이 위해 앞바다로 육지간의 거리가 좁아지다 보니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주 해류와 나오는 연안해류가 만나 뒤엉키는 곳이다. 해서 21세기인 지금도 대련과 연태를 오고가는 쾌속선은 사고가 잘 나고, 배타고 온 사람들은 항상 배 멀미를 심하게 해 초죽음이 되어 도착한다. 이러한 급해류 지역을 1,350년 전에 목선으로 횡단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류의 방향과 속도는 같다고 봐야 한다.
기존 식민사학계는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으로 1만 척의 배로 황해를 건너 한반도 백제로 갔다고 쉽게 말하고 있다. 그 때는 철 동력선이 아니고 목선인데, 그런 배로 중국대륙연안 해류와 황해바다 주 해류를 횡단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짓말은 지금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과연 중국 배가 황해를 횡단할 수 있었을까?
▲ 중국의 배들은 6종류로 모두 도형강선으로 황해횡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돛도 없이 보트식 도를 저어
▲ 해류가 급격한 황해를 횡단하여 건널 수는 없다. 이는 윤모교수의 뗏목탐험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고대 중국의 배 모양은 위 사진과 같이 대개 6종류로 나뉜다. 이런 배의 형태는 B.C 500년 ~ A.D 1,621년까지 지속되는데, 한결같이 돛이 없고 보트형 도(櫂)를 장착하고 있다. 이런 배를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 한다. 이는 중국은 강에서만 배를 운영했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필자가 맨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바다 항해가 필요 없었던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중국의 <무비지>에 따르면 중국 수군을 대표하는 누선의 경우에도 “만약 바람을 만나면 인력으로 능히 제어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櫂)형을 가진 배는 아무리 커도 연안 항해만 가능하지 횡단항해가 불가능한 법이다. 중국의 전선은 주로 정크선이나 판옥선(누선)과 같은 배로 대부분 돛이 없고 보트식으로 양쪽에서 도를 젓는 식이다. 만일 소정방이 산동성에서 이런 배로 출발했다면 당나라 군대 13만은 아마 전부 연안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표류되었거나 수장되었다고 봐야한다.
백제가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 된 것은 보트식 도(櫂)가 아닌 우리식의 노(櫓)를 발명해 노형해선(櫓型海船)의 형태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식 노에다 돛을 달면 장거리 횡단 항해도 가능하다. 돛과 키와 우리식 노를 사용하여 아라비아까지 간 조상(백제)의 슬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중국 배는 우리 것과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다를 끼고 대륙 동쪽에 살았던 민족이고, 중국은 고대부터 산악지대에서 바다 구경을 못한 민족이었다. 중국인들은 진짜 바다가 아닌 큰 평야, 큰 강, 큰 호수 등을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선이 잡히는 바다를 동경하고 또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산적(山賊)일 뿐이었다. 그들의 배들은 바다에서 싸우는 해전(海戰)이 아니라, 강에서 싸우는 수전(水戰)용 배이다. 그래서 사진처럼 돛이 없고 보트식 도인 것이다. 보트식 도는 강에서나 통하지 바다에 나오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게다가 중국 배는 돛도 없는데 어떻게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단 말인가? 돛도 없이 도를 저어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 있다고 보는지? 중국인들은 팔 힘이 무척 강했나보다!!!
이렇게 바다에 열악한 중국배로 황해바다를 건너오려면 해류를 3번 지나야 한다. 하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중국연안해류요, 둘째는 황해바다 가운데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주 해류이다. 세 번째는 한반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연안해류이다. (참고로 중국의 연안해류는 한반도 연안해류보다 강하다) 황해를 횡단하려면 해류가 내려갔다, 올라가고,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해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바닷물이 빙글빙글 돈다. 이런 해류를 헤치고 황해를 횡단할 배가 당시에 중국에 있었다고 보시는지!!!
하물며 현대의 철 동력선이 연안해류에서 ‘걸프스트림’을 만나도 안간힘을 쓰는데, 1,350년 전의 중국의 목선이 버틸 수 있겠는가? 만일 황해 한 가운데에서 사나운 주 해류를 만나고 바람까지 불어 파도까지 높으면 전원 수장(水葬)이지 달리 방법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처럼 기상 예측을 못하고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다. 고려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다가 2번이나 실패한 것도 태풍(神風)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해탄의 울렁이는 해류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만큼 바다를 건너는 원정은 무섭고 겁나는 것이다. 부산과 일본 사이의 바다보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황해바다가 훨씬 거리가 길고 해류가 강하고 변화가 심하다.
소정방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려면 배가 몇 척이 필요한지 계산을 해보자. 원래 전투 병력이 100이라면 지원 병력은 200인 법이다.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올 수 있는지는 고대전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일언지하에 불가능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전쟁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 10만이 조선에 올 때 700척으로 6번에 나누어 왔다. 그것은 병력을 수송할 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도 상륙작전은 몇 번에 나누어 실시한다. 수송선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6.25 때 한반도의 허리를 끊은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수송선은 261척에 한번에 병력 25,000명을 3번에 걸쳐 실어 상륙시켰다. 현실이 이러한데,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가 13만 대군과 지원부대를 배 만 척에 실어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보냈다는 사학계의 이론은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백제부흥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했는데, 이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은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과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과 임존성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떠들고 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김성호씨의 설에 의하면
연안항해(바다에 인접한) 능력 및 강상항해(양자강, 황하)능력에 능했던 중국민족이 이정도의 규모로 한반도로 올 수 있었는가?
(2) 윤O철씨의 의견도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혀, 육전이 아닌 수군의 동원은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뗏목탐험으로 유명한 분. 필자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리비정이 잘못된 것으로 본다.)
(3) 고대전쟁사를 연구하는 군사학자들도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의견을 말하고 있다. 즉 군사 40만이 오기위해서는 수많은 보급품(군량미, 말, 각종무기)이 동시에 수송이 되어야 전쟁수행이 가능한데, 그 당시 정황으로 도저히 맞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지리 비정을 엉터리로 해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과연 소정방과 김유신이 백제와 전쟁을 벌인 곳은 한반도인가 중국대륙인가? 아래에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 전함의 최대승선 가능인원(최대인원 추정)을 최대 약100명과 50명으로 추정 시
(소정방) : 당군 13만 / 100명 = 1,300척 ~ 2,600척 = 당군 13만 / 50명
(부흥군) : 당군 40만 / 100명 = 4,000척 ~ 8,000척 = 당군 40만 / 50명
과연 이 규모의 배가 산둥반도에서 금강하구로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전투병력 말고 지원부대(말,무기,식량,수레)까지 합치면 2~3배의 배가 필요한데 그게 과연 가능했다고 보는지. 세계 어디 해전사에도 이런 병력이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이만 척이 넘는 배로 40만 대군이 황해 바다를 건넜다고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태연히 말하고 있으니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설사 그런 숫자의 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대군을 전혀 가 보지도 않은 바닷길로 배를 태워 보낸다는 것을 허락할 왕이나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13만 ~ 40 만 전투 병력이면 국가 전투력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걸 하룻밤 사이에 전원 물귀신을 만들지도 모를 무모한 작전을 진행할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소정방과 당 고종이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40만 대군더러 도형강선(櫂型江船)인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릴 리가 상식적으로 없는 것이다.
웬만큼 상식이 통하는 말을 해야지, 그런 병력이 황해 바다를 횡단하여 건너왔다고 태연히 말하는 식민사학자들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횡단이 어려우면 연안으로 붙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억지를 부릴 사학자도 있을 것이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연안을 따라 오려면 고구려 앞바다를 지나와야 하는데 고구려 수군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식민사학자들이 중국 가는 배를 한 번 타보면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백제는 분명 산동성에 있었고, 소정방은 황해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중국 배는 죽어도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가 없는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모든 기록과 정황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즉 백제의 멸망은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작은 보트같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물을 따라 기습 침투작전을 폈기 때문으로 보인다. 22담로까지 해외에 건설한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해군과 소정방 군대와의 해전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즉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고 중국 대륙 산동성에 있었던 것이다.
▲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과학으로도 입증되었다. 백제 일식의 최적관측지는 북경 부근. 북경은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부분일식까지 보는 지역은 넓어진다. 백제의 부분 일식은 한반도에서도 볼 수 있으나, 신라의 일식은 2개나 한반도에서 전혀 볼 수 없다. 따라서 신라와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패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이외에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다음 3부 연재에는 “흑치상지의 백제부흥 운동과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다른 증거들”에 대한 글이 실립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의 지난 4월 30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성훈 칼럼니스트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으며, 1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참여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오늘 (5월 8일)브레이크뉴스 송기옥 칼럼니스트 글(기사 작성은 5월 4일)과 본지 성훈 칼럼니스트의 글 2부. 그리고 양지환씨가 기고한 "백제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을 동시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많은 의견을 내주시어 바른 역사찾기에 국민 모두가 동참하도록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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