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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4 : 14 사랑하는 자녀 같이 - 고전 4 : 16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3. 자비로운 권면 ( 4 : 14 - 21 )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전 4 : 14 사랑하는 자녀 같이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사도 바울이 자신의 비천한 형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1]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상반부에 나타난 반어적인 풍자와 비유는 사라지고 부드럽고 친근감(親近感) 있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바울의 엄격하고 딱딱한 어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극한 분노와 책망 속에서도 사랑으로 권면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부끄럽게 하려고'(*, 엔트레폰)란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었다(6: 5, 15: 34). 그곳에서는 오히려 부끄럽게 하려고 경고의 말들을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 절의 문맥은 그것과 다른 의도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격한 분노 속에서도 아버지의 따뜻함과 같은 위로를 나타내려 하였음을 바로 이어지는 후반 절에서 명백히 밝히기 때문이다.
2]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녀에 대한 사랑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랑하는'이라는 말과 '권하려 하는'이라는 말이 결코 그들의 죄악마저도 덮어두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다.
'권한다.'는 것은 '권면한다.'는 것과 같은 보다 부드러운 해석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아버지의 훈계와 같은 보다 준엄하고 권위적인 훈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 엡 6: 4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렇듯 '사랑'과 '훈계'를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여 사용한 부자(父子) 개념은 다음 절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고전 4 : 15 일만 스승이 있으되 -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통하여 설립되었다. 그는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 아버지는 선생들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칠 것이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는 엄격하게 말해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지위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아들로서의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이다(slave-guide).
갈라디아서에서는 초등교사(몽학 선생)로 번역되었다.
* 갈 3: 24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들은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는 수행원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다.
보편적으로 '파이다고구스'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가르친다.'는 지식적 개념이다.
(2) '지도한다.'는 지도권의 개념이다.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가정교사라는 긍정적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바레트(Barrett)는 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지도권을 행사하는 하나의 집단이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이해한다.
본 절에서는 가르치는 것과 지도권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해석상에 무리는 따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의 의도는 단지 '일만'(*, 뮈리우스)이라는 풍자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의 신분을 고발하고 있다(J. Calvin).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만 스승은 고리도 교인들을 가르치며 인도하는 교회의 많은 지도자나 선생, 또는 후견인 등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자신을 일만 스승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특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실제로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고 증거 하고 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하게 된 많은 이방인에게 영적 아버지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생계비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12 절), 그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날의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키면서(10-13 절, 갈 4: 19) 돌아올 것을 강청한다.
* 갈 4: 19 -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모든 복음의 지도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1) 본능적인 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 및 권면이 진실 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 다른 복음 지도자들보다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친숙한 관계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복음을 통하여'라는 강조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버지'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계속해서 그들을 젖과 밥으로(3: 2)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며 훈계하고 의로 양육하려 한 자들보다는 지도자라는 직책(職責)만을 얻기에 급급한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 1-11), 그 교인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 아비였다(1: 3, 3: 2).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1: 11-12) 심한 책망을 할 수 있었다.
고전 4 : 16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그의 낮아짐, 그의 비천함, 그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첫째 문제점은 높은 마음에서 생긴 분쟁과 분열이었다. 그들은 이제 높은 마음을 버리고 자신들을 낮추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울이 당한 비천함을 듣는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멘토 - 지도자, 안내자 - 는 제자 훈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 사도는 고리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멘토임을 자처했다.
바울은 자주 이와 갈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
* 갈 4: 12 -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빌 3: 17 -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 살전 1: 6 -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 살전 2: 14 -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 살후 3: 7, 9 -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일 수도 있으나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 주변에 붙어 다니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본 절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L. Morris).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 K. Barrett).
그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고자 일평생 고난 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다(11: 1).
따라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 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
(2) 그의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자신의 비천한 형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면하기 위해 지금 말하고 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다. 바울은 스승이라는 말과 아비라는 말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스승은 단순히 이미 믿은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비는 처음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 자를 가리킨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통해 설립되었다. 바울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 참 선생도 사랑을 가지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비의 사랑은 많은 선생들의 사랑보다 더 크다.
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그의 낮아짐, 그의 비천함, 그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은 높은 마음에서 생긴 분쟁과 분열이었다. 그들은 이제 높은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들이 바울이 당한 비천함을 듣는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스승과 아버지
(1) 가르치는 자’(스승)를 넘어서 ‘본을 보이는 자’(아버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정리한 자는 사도 바울이다. 그는 지성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 아래에서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아 율법 안에서 철저하게 경건했던 유대인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에서도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십자가 복음 밖에서 자기가 가르침 받은 대로만 따라 하려 했다.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까지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 후 유대교 최고의 열성 신자가 복음의 최고 열혈 전도자로 바뀌었다. 곳곳에 교회를 세워 복음을 가르쳤고 신약성경의 교리에 관한 부분을 거의 혼자서 정리하다시피 했다. 그도 제자를 둔 스승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즉 제자들을 향해 권하는 말이 이상하다. “내가 가르친 대로 잘 따르라”고 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유대교의 최고 스승 자리에 오를 뻔하다가 기독교 최고의 스승이 되어 그 교리를 정연하게 확립했던 자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권면이다. 복음은 지성적 가르침과 종교적 훈련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는 교리를 배워 따른다고 구원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스승, 즉 목사는 복음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기부터 본을 보여 제자들로 그대로 닮게 만들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목사는 강대상에서 설교한 대로의 삶으로써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
(2) 스승과 아버지의 차이
바울은, 목자는 “스승 같은 목자”와 “아버지 같은 목자”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후자는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스승 목자는 가르치기만 하고, 아버지 목자는 가르치지 않고 사랑만 베푸는 자인가? 아니다.
스승은, 학생보다는 가르치는 것 자체를 더 사랑하고, 아버지는, 가르치는 것보다는 학생 본인을 더 사랑한다는 의미다. 정확하게는 스승은 가르쳐서 제자를 변화시키려 하고, 아버지는 사랑하여서 제자를 변화시키려 하는 차이다.
(3) 아버지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스승’만으로는 안 된다. 초대교회 신자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 아무 주저나 불평 없이 십자가를 지고 이웃을 사랑했다. 예수가 복음 안에서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을 먼저 변화시켰고 그 후 변화된 제자들은 그분 가르침대로 따랐다.
그들은 스승을 본받아,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영혼이 거듭나도록 죽기까지 힘썼다.
(4) 스승은 교리를, 아버지는 사랑을 앞세운다.
스승은, 제자가 지식이 진보되기를, 아버지는, 제자의 존재 전체가 변화되기를 소원한다. 스승 목자는 자기 가르친 대로 제일 잘 따르는 제자를 가장 사랑하지만, 아버지는 자기를 그대로 쏙 빼닮은 제자를 가장 사랑한다.
바울은,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복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낳았고, 그들에게 본을 보이면서 그들을 길렀다. 그의 목표는 애초부터 스승에 있지 않고 아버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자기를 본받아, 스승을 넘어서, 아버지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5) 복음은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끌어안아 주는 것이다.
완벽한 커리큘럼 코스를 짜서 가르치고, 찬양과 기도로 감정을 고양시키며, 심리학적인 치유법을 동원한다고 해서, 사탄에게 묶여 있는 영혼이 새롭게 되지 않는다.
천하의 죄인이라도 복음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말고, 복음으로 끌어안아 주어야만 한다. 작금 목사들이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은커녕 강단에서 그 십자가의 메시지마저 차츰 사라지고 있으니 오늘날도 분명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버지는 너무 찾기 힘들어진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