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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교회 공동체
행 2:37-47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설 교 >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행 2장 37~41절 / 정관호목사(뉴욕만나교회)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사건이나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교회 역사상 잊지 못할 사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신약교회가 창설되었고,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로 3,000명이나 회심하여 그들이 교회에 가입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부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 가운데 구약성경 요엘 2:28-32을 인용함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다락방 고별강화에서 예언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된 것과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것임을 밝히 드러내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 시편16:6-11과 시편 110:1을 인용함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부활과 재위(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등이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렇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데 내주었다고 증언한 사실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였을 때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Brothers! What shall we do?)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Brothers! What shall we do?)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무엇을 들었기에 그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그의 설교 가운데 결론적으로 말한 사도행전 2:36 때문이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유대인들, 곧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실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임을 말입니다. 그들 스스로 70인 공의회의 불법적인 재판을 열어 주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 가운데 이런 사실을 이미 언급하였었습니다. 사도행전 2:23입니다.
“너희(이스라엘 백성들)가 법 없는 자들(빌라도 등)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사도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님 되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말했을 때 그들은 마음에 찔려, 그 양심의 고통 가운데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들려지고, 성령께서 그들의 죄악상을 깨닫게 하셨을 때 그들은 그들이 행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인식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곧 율법의 첫 번째 기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연약하고 무능하여서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로 함을 가리켜줍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 회개와 믿음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이 메시지 안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담겨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다름 아닌 회개와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회개하라
사도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선언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깨달았다면 그들은 마땅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repentance)란 헬라어로 “메타노이아”란 단어입니다. 그 뜻은 생각이나 정신(마음)을 바꾸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곧 삶의 목적과 가치관의 전환과 변화를 갖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는 다름 아닌 생각이나 정신, 삶의 목적과 가치관의 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마음을 바꾸고 인격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행위입니다. 지난 과거의 잘못되고 악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다름 아닌 회개입니다. 회개란 지나온 자신의 삶의 발자취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죄에 대한 돌이킴입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한 죄,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아니한 죄,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에 의해 자기 맘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온 죄,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기면서 살아온 죄, 각종 더럽고 추악한 영적 도덕적 실제적인 죄를 범한 죄, 가정과 직장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 등을 소홀히 여긴 죄,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들을 돌보지 않은 죄, 우상을 숭배한 죄,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사기 악독 자기자랑 무정 무자비하게 살아온 죄, 술 취함 방탕 도박 음란하게 살아온 죄 등등을 떠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죄들을 떠나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일이 다름 아닌 회개입니다.
지나온 삶 가운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인식, 그런 죄에 대한 뼈아픈 자각과 인정, 죄에 대한 슬퍼함과 미워함을 갖고 죄를 고백하면서 구원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일과 부정과 불의로 타락된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이런 참된 회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런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믿으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이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초기에 선포하신 것도 다름 아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14-15이 이를 보여줍니다.
“(세례)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전도의 내용도 다름 아닌 회개와 믿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21을 보십시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1)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각각, 각자가 개인적으로 회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무리들과 청중들 가운데 섞여 있다할지라도 회개와 믿음은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의 설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라고 한 것은 “세례를 받아야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세례가 구원의 전제조건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든지, 세례 받은 자는 다 구원을 얻은 자라는 등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례는 이미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이제는 공적으로,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외적으로 표시하는 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자가 받는 이 세례는 세례 받은 자가 앞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어떤 고난과 박해가 따르더라도 변치 않고 믿음과 순종으로 살겠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세례 받은 자는 바로 이 세례를 통해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member)으로 교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례란 회개와 믿음의 증거로 주어지는 외적인 표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례를 받고”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은 자는 세례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복음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따라서 복음이란 사람이 행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정과 섭리에 따라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형벌과 저주 아래 놓여 있던 우리 죄인들에게 새로운 삶과 영원한 생명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주님과 구주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유효적 소명)을 받은 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중생) 회개하고 믿어(이 회개와 믿음을 합쳐 회심/conversion이라고 함) 죄 용서함 받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칭의) 하나님의 자녀(양자) 곧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특권-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
그 무시무시한 죄와 사망과 지옥형벌로부터 구원을 얻는 길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 사함과 영생과 영원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에는 구원의 결과가 이 죄 사함 과 성령의 선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을 통해 얻는 죄 사함을 가리킵니다. 죄로 인해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없어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게 되고 더 이상의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옛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죄 사함(죄 용서, 사죄)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죄 사함입니다.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보실 때 단순하게 죄인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를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보십니다. 빛의 자녀로 보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정죄(하나님의 심판)가 없는 구원 받은 성도로 보십니다. 이토록 놀라운 은혜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정죄가 없고, 더 이상의 지옥형벌이 없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여기 성령의 선물이란 성령의 은사들이 아닙니다.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아닙니다. 신유와 능력 행하는 은사가 아닙니다. 여기 성령의 선물은 성령이라는 선물, 곧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 그 자체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3위1체 하나님 가운데 3위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일반 자연인이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죄 용서함을 받아 의롭게 된 사람, 하나님의 자녀, 성도,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 왕 같은 제사장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셔서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이도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들 자신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구원하시되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부르셔서 구원하십니까? 39절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가히 상상도 못할 내용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인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인 유대인 후손들뿐만 아니라, 모든 먼 데 있는 사람들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는 이 구원의 복음이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던 자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었던 자들에게 이토록 놀라운 구원과 구원의 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이방인들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형벌 가운데 놓여 있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이 패역한 세대(perverse, corrupt, crooked generation)에서 건져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의 복인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우리들입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을 일컬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단지 교회당에 나와 주일예배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 따라 교회당에 다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남다른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들, 예를 들어 술 담배 도박 마약 등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일성수하며 그런 잘못되거나 악한 행동들을 하지 않고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삶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입니다. 죄를 떠나 하나님께 나아간 자입니다. 악한 세대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옮김을 받은 자입니다. 죄를 슬퍼할 줄 알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끊어버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주님으로, 구주로 믿고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며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으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고난과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나가겠다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이웃들 가운데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체험하고 있는 자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우리 주님을 닮아가고 거룩해져 가는 일에 힘쓰고 있는 자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회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앞으로도 죄를 슬퍼하며 죄를 미워하며 죄를 끊어버리는 거룩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행 2장 37~42절 / 김상복목사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가장 기쁜 날은 세례와 학습을 받고 입교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한 생명이 태어난 생일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육신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도 축복입니다. 오늘 2부 예배 때는 40명의 아기들이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감사한 일입니다.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고, 정부에서조차 출산을 장려하는 시대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축복이지요. 더구나 영적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보통 큰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육신의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무 노력도 없이 그저 부모님들이 주신 것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163명이 유아세례, 학습, 입교, 성인세례를 받은 오늘 같은 날은 우리 교회로서 더 없이 기쁜 날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를 믿어서 세례 받는 이들이 많아지길 원합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기획부서에서 교회 전산에 기록되어 있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세례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들을 파악해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되어 있는 성도는 모두 1만2천명에서 1만3천 명 정도입니다. 거기에는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그 지역 교회에 나가는 자녀라든지 유학 간 자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40%, 최소한 5천명 이상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 식구이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은 데는 아마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원 받는 신앙고백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혹은 ‘교회 다니면 좋으니까 나가긴 하지만 세례까지 받으면 곤란해. 그러면 교회에 아주 붙들리는 건데 빠져 나가기 힘들어. 그저 예배만 드리고 세례는 다음에 받지. 이것저것 하기도 바쁜데 교회만 다닐 수는 없잖아. 꼭 세례를 받아야 한다면 죽기 1시간 전에 받으면 되지 않겠어?’ 하는 경우입니다. 자녀들이 그렇게 권해도 거부하다가 숨지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교인이 되면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못하니까 세례는 안 받고 그냥 교회만 다니겠다는 분들이 없잖아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으려면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도 많이 보고, 기도도 많이 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죄도 없어야 할 텐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세례를 받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세례는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고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공개적인 표시입니다. 한 생명이 “내가 예수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기 한 명이 태어나는 것도 큰 축제인데, 영적인 생명이 하나 태어나는 것은 얼마나 더 큰 축제이겠습니까!
제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할 때 저는 병원에 함께 있지 못하고 뉴저지에 있었습니다. 뉴저지 해변 큰 호텔에서 열린 ‘국제 청년 대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를 막 졸업한 제가 2-3천명의 청년들이 모이는 대회에서 30분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 간지 3년 밖에 안 되었고, 영어를 좀 한다고는 하지만 전 세계 청년들 앞에서 연설을 하려니 얼마나 긴장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제 아내가 아이를 낳을지 안 낳을지 관심을 두기가 힘들었지요. 연설문을 달달 외우며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드디어 연설을 하고 있는데 누가 제 옆으로 올라오더니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어요. “당신 부인이 딸을 낳았습니다.”아기를 낳은 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느낄 겨를도 없었어요. 뉴저지에서 필라델피아까지 4시간을 달려 병원에 가보니 정말 아기가 태어났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기 같지도 않고 그저 조그만 핏덩이 같아 보였지요. ‘엄마를 닮았으면 예쁠 텐데…. 아빠를 닮아도 괜찮았을 테고…’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세 아이가 모두 제가 공부하는 중에 태어났으니 정신이 없어 아이들을 제대로 한 번 쳐다보지도 못한 채 아이들이 컸어요.
그 때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생명이, 출생이 얼마나 소중한 지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 이 자연의 축복이라는 것이 보통 축복이 아니구나!’ 예수님께서도 “한 생명은 우주보다도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에게 세 딸을 주신 것에 정말 감사하고, 앞으로 세 아들을 받을 기대감에 넘쳤습니다. 이제 다 장성한 딸들과 그 가족들을 바라볼 때마다 늘 감격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걸!
육신의 생명이 태어나도 좋은데 영원한 영적인 생명이 태어나면 교회에도 기쁨이요 하늘에서는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163명의 여러분이 세례를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 온 교회가 기뻐합니다. 다시 한 번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세례 받는 이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세례 받으라고 해서 그냥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이해해야 믿을 수가 있거든요. 누구를 막론하고 한 번은 복음을 정확하게 들어야 됩니다. 한번 정도가 아니지요. 예수 믿게 된 사람은 보통 여러 방법을 통해 평균 여덟 번의 복음을 듣고 결심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복음을 들어야 됩니다.
복음은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죽으심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피를 흘려서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덮으시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나도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눈물도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죽음도 없는 저 천국에서 영원무궁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과 특권은 특정한 누구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부귀영화 차별 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 받기를 아직도 주저하는 분이 계시다면, 죄를 사하시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의 것으로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70-80년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존재입니다. 나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매디슨’(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은 전 세계 의사들이 보는 가장 권위 있는 의학학회지입니다. 이곳에는 웬만큼 증명된 글이 아니면 게재되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최소한 3-4번 꾸준히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면 운동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보다 1년을 더 산다고 합니다. 겨우 1년을 더 산다니 그동안 운동을 안 한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그 대신 운동을 한 사람들은 건강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게 살 가능성은 있겠지요.
제가 마흔 살 때 생명보험을 들기 위해 인터뷰를 하고 2백여 가지 질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운동을 얼마나 하나, 걱정거리는 많은가 적은가 등의 질문에 답을 써내고 한 달 후에 결과가 왔어요. “합격입니다. 당신에게 생명보험을 팔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1주일에 이틀밖에 운동을 하지 않는군요.” 그 때 저는 학교에 있었으니까 학교 체육관에서 라켓볼을 했습니다. 라켓볼은 아주 재미있는 운동입니다. 정구보다 몸이 빨라야 해요. 정구는 볼이 상대방에서 넘어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지만 라켓볼은 벽을 치고 금방 되돌아오니 빠르게 탁탁 받아쳐야 합니다. 진땀이 바짝바짝 나고 10분만 뛰어도 숨이 차지요. 좋은 운동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이틀을 운동했는데 보험회사에서는 이틀을 더 하라는 겁니다. 보험을 빨리 안주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당신이 지금처럼 이틀만 운동을 할 경우 예상되는 수명이 74세이지만 앞으로 34년 동안 매주 2시간씩 이틀 더 운동하면 수명이 4개월 연장됩니다.” 34년 운동하면 겨우 4개월 더 산답니다.
1주일에 4일씩을 열심히 운동하면 1년을 더 살고, 저 같은 경우에는 4개월을 더 산다는데,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4개월이 아닙니다. 1년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가 있습니다.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 인생이 끝날 때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갈 것을 지금 이 시간에 분명히 믿습니까?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마음의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믿겠습니다.”하는 개인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묻자 베드로는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38절) 회개하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하나님 없이 세상 속에서 마귀와 함께 죄를 범하며 지옥을 향하여 나도 모르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들었습니다.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 하나님이요 천국이요 영생이요, 예수께서 그 길을 마련했습니다. “뒤돌아 가!” 방향을 바꿨습니다. 가다가 방향만 바꾸면 되는 겁니다. 저쪽으로 계속 가면 됩니다. 저 끝이 하늘나라입니다. 저 끝이 영생입니다. 저 끝이 하나님이 계신 그 곳입니다. 내가 돌아서야 됩니다.
오늘 아침 1부 예배에도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에게 “이제 돌아서면 됩니다. 갈 길은 가시되 방향만 바꾸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결정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주저하는 분이 계시면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뒤로 돌아가!” 하고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마음이 돌아선 사람은 세례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거나, 완벽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38절) 첫째는 회개하는 것, 마음을 바꾸는 겁니다. 둘째는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돌아섰을 때 죄 사함을 받은 것을 보고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대가를 치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모습, 내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을 오늘 누구나 다 받고,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들은 곧 세례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죄 사함의 표시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다 받았습니다.”라고 할 때 구원과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마음을 열면 예수님이 임하시고, 마음을 열면 내 가슴 속에 영원한 생명을 넣어 주시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임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성령과 함께 천성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며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간단한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마다 암송하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을 믿습니다. 교회를 믿습니다. 죄 사함을 믿습니다.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제가 죽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봅니다. 사도신경을 다 암송하고 “믿사옵나이다. 아멘!” 한 후에 바로 죽음을 맞이하면 좋겠어요. 이렇게 고백하고 죽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세례 받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증가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41절) 여러분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 가족들이 아직 세례를 안 받았으면 이제 사도신경의 신앙을 고백하고 모두가 다 구원 받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 받은 표를 모두 다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신앙을 성장시키고 교회 공동체 생활에 열심히 동참하게 됩니다. 42절에 보니까 “저희가(세례 받는 사람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잘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믿는 사람들끼리 교제를 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늘 하나님과 나와의 가까운 대화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세례 받은 사람들은 성장하고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 적극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영원한 평화를 가슴에 안고 산다면 설령 이 땅에서 인생을 마쳐도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갈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고 세례 받은 사람으로서 계속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선물
행 2장 37~42절 / 김상복목사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큰 위기입니다. 약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고, 일하셨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위기(crisis)라는 것은 이제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해서 개인적인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든지, 거부하고 영원히 죽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며,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중립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느니라.”(요3:18) 하셨습니다. 이제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구원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일이 남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사건을 증거하자 사람들이 마음에 찔렸습니다(31절). 예수님을 자세히 알게 되면 마음이 찔립니다. 동요합니다. 부담이 옵니다. 각자의 영생이 결정되는 위기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백두산에서 한 쪽으로는 두만강이, 다른 한 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소식을 들으면 반발하거나 싸우거나, 공산주의자들은 심지어 죽인다고 달려듭니다.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도 그렇고 베트남도 그렇고, 공산주의 국가들은 세상의 타락한 것들은 다 받아들여도 예수 믿는 것 하나는 규제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예수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좋아지는데,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데,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직장인, 사회인이 될 수 있는데, 왜 서양의 타락한 것과 별의별 사상은 다 받아들이면서 예수 믿는 것 하나는 그렇게 반대하는지....
예수의 사건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사건은 말세의 사건이요, 성령의 사건이요, 예수께서 죽으셨다 부활하셨다 승천하신 사건이요, 재림주로 다시 오실 사건입니다. 예수의 사건은 예수님이 주와 구원자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출발부터 놀라운 탄생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놀라게 했고, 목동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심지어 헤롯 왕 마저도 놀랐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하고 예수님의 출생지를 묻자, 헤롯 왕은 너무나 놀라서 “도대체 그게 누구냐? 무슨 왕이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냐?” 하며 당시 두 살 미만의 사내아기들을 죽이라 명령하는 바람에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출생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완벽한 일생을 사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을 책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후회 없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사람은 말해놓고 후회하고 행동하고 후회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긴장하고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리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 한 번도 책잡힐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울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후회 없는 완벽한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탁월한 교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남녀평등과 민주주의사상을 일으켰고, 과학을 발달시켰고, 더럽고 악한 문화를 바꿔 새로운 문화를 일으키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탁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때는 뺨을 맞고도 참게 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적이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내가 볼을 패스해서 볼이 저기 가는데, 내 친구가 내 정강이를 차버린 거예요. 그 순간 ‘때려줄까’ 하다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생각나서 제가 참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만 아니었다면 저 못 참았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처음 한 번만 참은 겁니다. 두 번째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땐 못 참았습니다. 그래도 두 번 가운데 한 번이라도 참았잖아요. 예수님 때문에. 영국의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도덕률은 너무 높아서 나는 도저히 감당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쟁이가 되지 않겠다.” 그러나 인류가 예수님의 탁월한 교훈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해도 그나마 다다르도록 노력하며 살았기 때문에 역사와 문명이 발전하고, 도덕률도 좋아졌던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또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의 사건은 예수님에 의해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잘 먹는 등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몰래 행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만 인정한 것이 아니라, 적들과 중립적인 사람들과 관망하는 사람들도 다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하셨습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친히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경배를 받으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경배하면 안 되었습니다. 헤롯 왕이 하도 인물 좋고 목소리 좋아 한번씩 대중 앞에서 연설하면 사람들이 ‘저 기가 막힌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가! 저분이 하나님이 아닌가!’ 칭찬을 한 적이 있었는데, 헤롯이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이다” 했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천사도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한 번은 사도요한에게 천사가 나타나자 요한이 너무 놀라 엎드려 경배하니까 천사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 하나님께만 경배해야지, 나는 당신의 동료에 불과하다” 하였습니다.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섯째로, 예수님은 당당히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을 때 유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아니, 하나님 밖에는 죄를 용서할 자가 없는데, 자기가 뭔데 죄를 용서한다고 하는가?” 하면서 돌멩이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을까요?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냥 용서해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버리신 것입니다.
일곱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16번에 걸쳐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승천하실 때 약 400명이 지켜보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유대교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주일에 예배합니다. 왜?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역사와 문화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결국 예수의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베드로는 결국 예수가 누구신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지금 들은 것입니다. 이제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역사의 중심이요, 우주의 창조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믿고 또 바라건대, 여러분은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구원 받은 분들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의 사건은 인간의 마음을 찌릅니다. 우리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에 베드로 사도가 대답합니다.
첫째로, 회개하라 하였습니다(38절). 회개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를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신 구주이심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돌이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망을 향해 치닫던 사람이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늘의 시민권을 얻는 것이 회개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께 올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신 것을 감사하십시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어느 한 분이라도 예수님에 대해 개인적 결단을 하시지 않았다면 이 시간이 그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개인적 결단이 없으면 인생이 변하지 않습니다. 내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야 합니다. 불신에서 돌이켜 예수께 나아와 죄를 자백하고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였습니다(38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무엇입니까? 씻는 것입니다. Cleansing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모든 죄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히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교회를 오래 다니셨는데도 세례 받는 것을 주저하고 두려워하세요. 세례 받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죄인이라서 스스로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의 구주가 되시고 영생을 주신 것을 믿습니다.’ 이런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기본적인 믿음이 있다면 세례를 받으십시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수 있으면 세례를 받는 것이 옳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장관이자 내시였던 사람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성경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셨고, 빌립 집사가 그 마차에 올라타 함께 가면서 “고난 받으신 하나님의 종”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해주고 난 후 “믿겠습니까?” 하니 “믿겠습니다” 하여 바로 요단강에 들어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예수 믿어도 즉시 그 자리에서 세례를 베풀지는 않고 학습문답 과정을 거쳐 그 믿음을 확인하고 세례를 주지만, 그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세례란 드디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음을 개인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고백하고 확증 받는 세례예식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셋째로, 죄 사함을 받으라 하였습니다(38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그것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표입니다. 나의 모든 죄 -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 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매일 회개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죄를 그때그때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으면 내가 불편합니다. 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죄의식과 고통이 있어서 영적 활기를 잃어버립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데 좀 알려줄래?’ 그래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한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 확실한 믿음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넷째로,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하였습니다(38절).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하였습니다. ‘성령의 선물’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성령님 자신을 내 가슴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이란 여러 가지 은사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을 받을까요? 성령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에, 죄 사함 받는 그 순간에, 세례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마음을 활짝 여는 그 순간에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임하십니다.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 속에는 이미 성령께서 임하여 계십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경을 몰랐고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겠다는 마음 자체가 성령이 이미 오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리라. 성령이 오시면 네 안에 거하실 것이요, 영원히 너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이 약속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모르고 있던 고린도 교인을 두 번이나 책망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속에는 성령께서 와 계심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9절). 몇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40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요새 중학생들이 일진회를 만들어서 친구들을 못살게 굴고 악하게 행한다고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으면 중학생들까지 그렇겠습니까! 그리고 젊은 세대를 타락시키고 악을 행하게 하여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타락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의롭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39절). 하나님은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를, 부모와 자식과 형제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바로 이 시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만약 이 자리에 한 분이라도 예수의 사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오늘 예수를 믿어 영원한 구원을 받기 바랍니다. 이 시간 성령을 선물로 받아 언제 어디서든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도움을 받아 사시기 바랍니다.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지혜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마귀와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나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심지어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이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하기만 하면 지혜와 해야 할 말까지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신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이끌림과 도움을 받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머지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는 축복
행 2장 37~42절 / 박찬길목사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다가 취업이나 이사 등으로 인해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교우들이 있는데, 제가 기도해 주면서 당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서 신앙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라고 하니까 우리 교회를 지칭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우리교회 The Good Church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좋은 교회 Good Church를 말하는 겁니다. 오늘은 좋은 교회 Good Church를 여러 번 반복할 것이니까 여러분이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은 교회를 만나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 때때로 제가 알고 있는 교회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때로는 본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찾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되어서 좋은 교회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한 눈에 알 수가 있어요.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고, 목회철학이나 교회의 핵심 사상을 꼼꼼히 읽어보고, 게시판에 들어가서 사랑의 공동체인가 확인해 보면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세 주 안에 결정하라고 말합니다. 너무 오래 끌면 좋지 않거든요. 감사하게도 많은 교우들이 우리 교회를 떠나 그 지역에서 좋은 교회를 만나서 열심히 신앙 생활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좋은 교회를 만나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교회면 다 같은 교회가 아니겠어요. 예,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교회를 만나야 합니다. 그 이유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 하나님을 쉽고 빨리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교회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든지 만날 수가 있어요. 저와 같이 병원에서 만날 수도 있고 학교에서도 만날 수가 있어요. 참존 화장품의 사장인 김광석 장로님은 절에서 하나님을 만났거든요.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편적으로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만남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 삶이 변화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터치하셔서 하나님의 영향력이 내 삶에 임하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철학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인격이 변화됩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모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이 주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좋은 교회를 만나면 좋은 점이 하나 둘이 아니지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서 신앙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가 있습니다.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 배우고 교제할 수가 있어요. 받은 은사를 마음껏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마음이 뜨거울 수가 있어요.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선정할 때에 선호하는 기준을 몇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외형을 생각합니다. 자체 건물이 있거나 많이 모이는 교회를 선호합니다. 요즘은 이런 전화를 하는 분이 없는데, 전에는 이런 것을 물어봐요. "목사님, 몇 명 모이나요?" 물어보는 의도를 알지요. 어떤 때는 "목사님 연세는 얼마나 되셨어요?" 나이는 안 물어보시대요. 왜 그런 것까지 물어보는 지 모르겠어요. 궁금하면 와서 보면 되지 말이에요. 하여간 요즘은 그런 전화가 없는데, 교회를 외형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겁니다.
교회는 건물이 있고 없고, 교인이 많고 적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건물이나 사람의 수가 좋은 교회를 결정짓는 중요한 이유라면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적게 모이는 것이 좋아서 선택한 사람은 교인이 많아지면 싫어합니다. 많이 모이는 것이 좋아서 선택한 사람은 교인이 적어지면 실족합니다. 교회는 교인의 수가 적을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잖아요.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면 갈등합니다. 외형을 가지고 좋은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썩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둘째는 거리를 생각합니다. 가까운 교회를 찾는 거예요. 가까운 곳에 좋은 교회가 있으면 가야지요. 교회가 가까우면 신앙생활의 여러 가지가 유익하잖아요. 예배나 행사에 쉽게 참석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교회가 가깝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는 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학교를 결정할 때에 어떤 기준을 갖고 계세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대학을 갈 때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계세요? 거리가 가깝다고 아무 대학이나 가나요? 저는 이제껏 버클리 대학이 멀다고 포기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버클리 대학에 합격해서 오라고 하는데, 거기는 베이 브리지도 건너야 하고 멀기 때문에 나는 가까운 대학에 갈 겁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좋은 학교라면 거리가 멀어도 가는 겁니다. 왔다갔다하는 것이 좀 불편하면 이사를 하는 한이 있어도 그 학교에 가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 마음이기에 이곳에 와서 사시는 거 아니에요. 교회도 가까운 지역에, 5분 10분 거리에 좋은 교회가 있으면 좋지만 혹 30분, 1시간이 걸려도 그곳에 좋은 교회가 있다면 찾아가야 하는 거예요. 교회가 그만큼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무임승차를 생각합니다. 현대 사람들은 땀흘려 일하는 업종을 기피한다고 하는데, 교인도 땀흘리며 신앙 생활하는 교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열심히 헌신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 예배만 드리며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교회, 기도하지 않아도 표시 나지 않는 교회, 헌금하지 않아도 부담되지 않는 교회, 식사 봉사를 하지 않아도 거리낌이 없는 교회, 남의 터치를 받지 않는 교회, 미국에서는 푸쉬하지 않는 교회라고 하대요. 다른 사람이 땀흘려 이루어 놓는 부분에 자신은 무임승차하면서 신앙 생활하려는 교회를 찾습니다.
사실 신앙 생활을 무임승차하며 편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위험한 거지요. 편한 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편한 걸로 따지면 서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하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게 더 편하고, 누워 있는 것보다는 잠자는 것이 더 편하고, 잠자는 것보다는 죽는 게 더 편하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편한 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가 있지요. 또래가 많은 교회를 좋아하기도 하고,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교회를 찾기도 하고, 교회학교가 잘 되어 있는 교회를 찾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파킹낫이 구비되어 있는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교회를 생각할 때에 이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살펴보면서 깊이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부분에서 여러분이 생각하셔야 하는데, 하나는 좋은 교회를 만나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생각하여야 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중에 여러분이 이사를 가실 때에 이러한 교회를 기준으로 찾으시면 좋을 것이고, 우리가 좋은 교회를 만들어서 다른 교우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좋은 교회를 찾을 때에 우리 교회를 찾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첫째로 좋은 교회는 균형 있는 설교가 있는 교회입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첫째 요인은 목사의 설교이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첫째 기준도 역시 목사의 설교입니다. 교회는 뭐니뭐니 해도 목사의 설교가 중요합니다. 말씀이 좋아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신앙이 성장하고 가치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교인의 수준은 교회 강단의 높이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하느냐에 따라서 교인들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의 설교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전 세계의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의 공통된 특징이 목사의 설교라는 사실이 이것이 증명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결코 좋은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저도 경험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많은 목사님들이 고민하는 것이지만 목사가 설교할 때에 제일 어렵고 힘든 부분이 균형입니다. 밸런스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듣기 좋은 설교를 할 때도 있지만 듣기 거북한 설교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듣기 싫은 설교를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때에 교인들에게 상처가 될까봐서 피하는 경우도 있고, 교인들도 듣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겁니다.
어느 교회는 축복에 대해서만 설교해서 교인들이 복만 받으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는 성령에 대한 설교를 해서 교인들이 '할렐루야, 성령 충만' 하고 다닙니다. 어느 교회는 친교에 대한 설교를 치중해서 교인들이 노는 데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설교는 균형 있게 해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예배에 대한 설교도 해야 하고, 기도 설교도 해야 하고, 성령 충만의 설교도 해야 하고, 복에 대해서도 설교해야 하고, 십일조 설교도 해야 하는 겁니다. 1년 내내 십일조 설교나 회개의 설교나 죄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 교회라면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균형 있는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실천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자신이 받아드리는 교인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언젠가 이웃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듣기 싫은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은 그 설교가 아니었는데,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셔서 그냥 선포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인사를 나누는데, 어느 여자 권사님 한 분이 저에게 오시더니 '목사님, 오늘 설교는 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찔림을 받아서 회개 많이 했습니다.' 제가 민망할 정도였어요. 저는 그러한 권사님이 있는 그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성령이 강림한 후에 구원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아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38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회개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3천명이 회개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여러분,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쉽지 않았을 겁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응하시겠어요? 목사가 회개하라고 하니까 그래 우리 죄를 회개하자 하시나요? 아니면 자기는 얼마나 깨끗하다고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해. 어느 쪽에 가까우세요? 여러분이 얘기는 안 하셔도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설교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인데 회개 설교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찔림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찔림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서 건강하고 균형 있게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설교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교인들을 축복을 주는 설교도 해야 하고 때로는 찔림과 회개의 설교를 해야 합니다. 교인들의 신앙에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교인들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나에게 해당된다는 자세를 가지고 받아드리고 실천할 때에 좋은 교회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좋은 교회는 교인들이 서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서로 섬긴다는 것은 따뜻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말합니다. 교인들이 서로 챙겨주고 서로 잡아주고 서로 격려하는 교인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다고 챙겨주는 교인이 많은 교회, 상대방의 실수를 받아주고 용납하는 교인이 많은 교회, 남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교인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좋은 교회인가 아닌가는 교인들간의 관계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 가면 교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기대 심리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는데 교인들이 환한 표정을 하면서 인사합니다. 교회의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소개해 줍니다. 서먹서먹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챙겨줍니다. 처음으로 나왔다고 환대합니다. 관심을 갖습니다. 편안하게 맞아 줍니다. 주중에 전화도 합니다. 만나서 식사도 같이 합니다.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 이거 아세요?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가 좋아서 교회를 찾았다고 해도 섬기는 교인이 없을 때에는 더 이상 그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오래 예수를 믿은 이나 직분을 가진 이들이 교인들의 약점을 들추어내서 무안하게 하면 교회를 멀리 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함부로 말하면 교회를 떠납니다. 사실 교회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말입니다. 입조심을 해야 하는데, 함부로 놀리다가 상처를 입는 교인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평소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 교인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가까우니까 함부로 말하거든요. 가깝다고 생각해서 지적해 줍니다. 이런 교인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44절 말씀에도 보면 믿는 사람이 모두 함께 지냈다고 했고, 45절에 보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46절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빵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질문 하나 할까요. 사도행전 교회는 천사와 같은 교인들만 모였기 때문에 서로를 챙겨주고 격려해주고 나누어주었겠지요? 짐작하건대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은 다 같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는 미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친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좋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서로 섬기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연약함을 채워주는 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을 말하지 않는 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데에 집중하는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툼이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 좋은 교회는 교인들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섬기는 교회를 말합니다. 교인들이 진심으로 챙겨주고, 잡아주려고 애쓰고, 단점은 보지 않고 장점을 보고 말하여 격려해주고, 인격적으로 존중해주고, 가족같이 축복해주는 교인이 있는 교회입니다. 혹 상처받은 사람이 들어오면 사랑으로 덮어주고 씻어주고, 교인들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이 들어오면 신뢰하고 격려하여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교인이 있는 교회, 섬기는 교인이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좋은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좋은 교회는 비전을 심어주는 교회입니다.
비전이라고 하면 젊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요엘서 2장 28절 말씀에서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교회는 모든 교인에게 꿈을 심어주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마음이 뜨거워서 세상과 세계를 위한 비전을 갖게 해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설교를 들을 때에 이번 주에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교회,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제시하는 교회,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섬기며 역할을 감당하는 비전을 갖게 해 주는 교회,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는 교회, 교회가 세상을 품고 섬기는 비전을 심어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교인을 위하여도 존재하지만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교인들과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비전을 갖게 해 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비전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 확장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그들의 비전이었습니다. 사도들이나 교인들은 날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서 이러한 비전을 공유하였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도들의 그러한 모습이 교회의 교과서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교회를 생각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도행전 교회를 떠올리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좋은 교회를 만나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힘써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만큼 교회가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제단을 좋은 교회로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제껏 말씀드린 세 가지 중에서 우리 교회에 부족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이제 저와 여러분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힘써 노력하고 기도하고 애써서 좋은 교회를 만들어서, 소문난 교회가 되어서 여러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와서 등록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신앙생활이었다고 말하면서 감격하여 눈물 흘리는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편에 있는 말씀처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하셨는데, 저와 여러분의 예루살렘인 우리 좋은교회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교회로 만들고, 우리 좋은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형통을 받게 한다면 근사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좋은 교회를 찾아와서 좋은 교회를 만나는 축복을 누렸다고 말한다면 그 자체로 우리에게도 축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보다도 더 열심히 신앙 생활하셔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에 더욱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좋은 교회를 만나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면 하나님을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좋은 교회를 생각해 보았는데, 우리 교회가 이런 좋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도와 교회생활
행 2장 37~42절 / 김상수목사
지난 주간 저희는 국가적으로 두 가지의 큰 행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월드컵 축구경기인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반세기만의 숙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16강에 진입하게 된 일입니다.
포르투갈은 세계 5위였고 우리나라는 세계 40위라고 하는데 우리가 이겼으니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금번 월드컵 경기가 전 세계에 방영이 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추산해서 60억 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우리나라가 폴란드를 이기고 포르투갈을 이긴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경기 때문에 나라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졌습니다. 88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룬 나라이며, 또한 16강에 들어간 나라라고 국가 홍보에 막대한 효과를 가져다주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어디를 가든지 이제는 자랑스러운 나라의 국민으로 서게 되었으며, 선교사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잘 뛰어준 축구선수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거를 치루면 여당이 항상 유리한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표를 여당이 잃고 말았습니다. 그 일반적인 중론은 대통령의 아들들의 비리연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아들들의 잘못으로 대통령의 입장도 곤란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 성도의 입장에서 영적으로 하나의 원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본분을 잘 하면 영광을 받고 본인도 복을 받고,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우리도 이번에 축구선수들 때문에 얼마나 기뻤습니까? 자기도 복을 받고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하며 국가도 올려주게 됩니다. 자녀가 본분을 잘 감당하면 부모를 기쁘게 해주며, 자기도 복을 받고,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대통령의 아들이 본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론의 지탄과 여당의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성도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면 다 묶어서 말해야 하겠지만 목사는 목사의 본분을 다 할 때에 나에게도 복이 되고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장로님의 본분을 다 할 때에 본인도 복되고 많은 성도들도 기뻐하며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꼭 장로님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자기 위치를 지킬때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신분을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의 아들은 관직도 아닌 신분일 뿐입니다. 대통령이 최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아들들의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누구일까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시기에 그 자녀 된 우리도 위대한 인식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저모양이야”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신분은 높은데 우리가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신분에 대한 주체성을 분명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생각하기를 ‘나 같은 것이 뭐하겠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아무리 작은 자라도 작은 자가 아닙니다.
마18:17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삼가 이 소자 중 하나라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작은 자라도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매일 보고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서 자신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본분을 잘 지켜야합니다.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 모습은 우리가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이면서도 그 구원의 가치를 잘 모르고 신분의 귀중함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날 교회오시는 것을 의무적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문전출입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우리교회는 그런 분들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그저 편안하게 하고 싶다고 하시며 내가 교회에 와도 모르고 안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간섭도 안받고 편안하게 예수 믿으려고 큰 교회로 출석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여러분! 성도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그런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날까요? 어떤 성도는 교회에 그저 충성봉사하고 기도하고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마지못해서 예배시간에 나오고, 규칙적으로 늦게 나오시는 분들을 가끔 볼 때에 목사의 입장에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입장에서 왜 그런지 그 원인을 밝히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는 사람이 있으며, 하나는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정란과 수정란은 똑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란이 수정란인지는 품고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20일을 품고 있으면 무정란은 그대로 있고, 수정란은 병아리가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병아리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병아리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엄마 닭을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무정란은 그대로 있어서 썩기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진짜 생명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교회 나오실 때에 ‘나는 예수 믿으러 간다’라고 나오신 분들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요한일서 5장 11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그 영생은 아들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교회 나올 때에 ‘예수 믿으러 교회 나가야지’하는 사람은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갔으며, 수정란과 같아서 한달, 두 달, 석 달, 1년.... 계속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생명이 움직여서 어느 날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새 출발하게 되는데 성경은 이것을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 나가는 목적이 출세하기 위해서, 또는 복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없어서 무정란과 같습니다. 아무리 교회 다녀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불신자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있는 이유도 이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맨 처음의 출발점은 새로 태어남(거듭남)으로부터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때에 많은 사람들 앞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아오는데 그때에 “마음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의 특징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일 뿐 아니라 새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죄 문제로 인하여 회개의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몇 번 나온 후 목사를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몇 분 만났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지 여쭈어보았더니 자기만 보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분이 산 사람일까요? 죽은 사람일까요? 이 분은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픈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목사가 설교를 해도 그 설교가 자장가로 들릴 뿐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기를 보고 하는 말씀이라고 하며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아파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난 성도로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에 울어야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울지 않는 아기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과정을 통과한 자에게는 죄 용서함을 받고 평안함을 주십니다. 교회오시면 평안하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된 증거이며, 구원받은 성도의 표시입니다.
“구주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맛본 성도가 진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교회 나오는 것이 즐겁고 기다려지며, 목사님을 보면 반갑고, 성도들을 보면 반가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준비하여 세례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듭나게 된 후부터는 교회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집안에서 부모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거듭나면 내 영혼의 집인 교회를 통하여서 바르게 자라야만 옳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셔야 합니다. 교회는 영혼의 집입니다.
이 영혼의 집이 얼마만큼 중요할까요?
첫째, 성도는 은혜와 보살핌을 받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목사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예배드려주세요”라고 합니다. 아기가 돌이 될 때에, 학교에 들어갈 때에, 졸업할 때에 축하예배 드려주세요, 결혼할 때, 사업할 때, 이사할 때, 병들었을 때, 회갑잔치 때, 세상 떠날 때에도 송별예배를 드려달라고 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러분의 일생이 교회를 통해서 내영혼의 문제가 교회를 통해서 보살핌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자녀들은 집을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저는 시편128편 5절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어다”
제가 처음 부임해 갔던 교회가 20년 된 교회였지만 성도들의 생활수준이 너무나 가난해서 어느 성도의 가정에 가 보았는데 돗자리가 다 떨어져서 밑에서 흙이 올라오는 곳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다 허물어져가는 교회를 다시 짓고, 사택을 지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5년을 시무하는 동안에 300% 성장을 했습니다. 그곳은 최전방 지역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후방인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와 보니 전에 있던 교회 성도들의 생활이 더 윤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가 거의 양식을 대접받으며 살았지만 이곳에 오니 몇 년이 흘러야 양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떠난 이후 그 교회는 6개월 만에 분열이 일어나고 다음 교역자가 왔을 때도 어려운 문제들이 자꾸 일어났습니다. 제가 여기 5년 있다가 전에 있었던 교회에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가보았더니 5년 동안 우리 교회 생활이 훨씬 윤택하고 그곳은 반대로 형편없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통해서 평안하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내 집이 잘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내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셋째는 교회가 나를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누가 별세하시면 성도들이 가셔서 조문하시고 장례식 치러주며, 결혼하면 성도들이 가셔서 축하해 주고 결혼식을 치러주고 하는 이 울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저는 일평생 자기만을 위해서 살다가 죽은 어느 분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죽고 나니 아무도 장례식에 와주지 않아서 상여를 매고 갈 사람을 돈을 주고 사고 상여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직계 가족 밖에 없는 장례식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교회에서 아무리 혼자되신 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울타리를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다른 분들의 경조사에 동참하시고, 내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시는 것도 지혜인 줄 믿습니다.
넷째는 교회를 통해서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바르게 배우시기만 하면 내 가정을 바로 지키게 되고, 인간관계가 바르게 되며, 일평생동안 고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교회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못 만나면 재산 다 없애고, 가정 다 파괴되며,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건강한 교회를 통하여 믿음을 잘 지키시기 바라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20여 년 동안에 우리교회 젊은 자매님들 중에는 아빠가 가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가정이 더러 있었을 때에 끝까지 인내하라고 지도했으며, 그 지도를 따라서 잘 견딘 가정을 보면 모두 다 구원받고 가족들이 다 잘되며 평안한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잘 정함으로써 바른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교회중심의 삶을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지도자의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저희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선수들이 잘 뛸 수 있는 원동력은 감독의 지도를 잘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양일심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일등교회가 되고 일등성도가 된다면 그만한 영광과 축복이 있는데 이런 축복을 받으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의 지도를 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를 잘 따르실 때에 여러분들 모두 바르게 되며,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바르게 되지 않고,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바른 성도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교육을 시켜야 바르게 자라는데 우리 하나님의 자녀도 말할 것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목사의 말에 잘 순종합니까? “기도합시다”라고 아무리 외쳐도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전도, 성경공부 해야 하는 일에 꼭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회 교육프로그램에 잘 따라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의 지도를 잘 받기 위해서는 목사와의 좋은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에 누가 은혜를 받을까요? 저와 가까이 하고 좋아하는 분들이 은혜를 가장 많이 받습니다. 처음 오셔서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저 목사가 어떤 목사인가?’ 생각하며 은혜를 받지 못하지만 저를 잘 아는 분들은 ‘우리 목사님 말씀이 맞아!’하며 아멘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렇듯 목사를 가까이 하시는 분들이 은혜 받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은 제 변명을 좀 해야겠습니다.
우리교회가 300명 정도였을 때에는 제가 성도들과 아이들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 가정의 형편을 소상히 다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제가 앞을 보고 달려가다 보면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고 시간과 체력의 제한을 받습니다. 심지어 전화도 제대로 잘 못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우리 목사님은 전화도 하시지 않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앉으셔서 우리 목사님 전화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마시고, 제 한사람이 여러분을 맞추는 것보다 여러분이 저 한사람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겠습니까?
집에 계실 때에 저에게 전화도 좀 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잘 지내십니까? 저희 가정은 이렇고 이렇습니다”라고 전화해 주시면 얼마나 빨리 여러분의 가정사정을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교회 오셨을 때에 그냥 가시지 마시고 사무실에 들러 가정의 기도제목을 이야기 하고 잠깐 함께 기도하고 가시며, 목사를 가까이 한 만큼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추운 겨울 난로 옆에 가야만 따뜻한 것과 같이 교역자 중심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성도의 교제에 힘써야 됩니다.
“성도가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라고 했습니다. 나무에 불을 붙여보면 무더기가 크면 클수록 불이 잘 탑니다. 나무 무더기가 적으면 적을수록 흩어버리면 불이 빨리 꺼져버립니다. 이렇듯 성도들이 서로 모이는 것이 중요하고 귀한 것입니다. 많이 모일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주 모이시고, 구역과 기관에서 모이셔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잘 이루어지면 비로소 교회는 교회다워집니다.
그동안 남반식구들을 보면 남자 분들이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전도하면 한참 만에 교회 나오시고 나오셔도 적응을 못해서 한참 고생을 하시고, 좋은 구역장을 만나면 어쩌다가 구역예배 참석하고 그 다음부터는 자주 참석하게 되고 재미를 붙이셔서 그 다음주부터는 금요 구역예배가 기다려지게 됩니다. 자랐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구역예배나 기관모임에 잘 참석하셔서 성도의 교제가 잘 이루어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와 기도하는 성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시고 교회 나오셔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며, 감동을 받고,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듣는 설교는 머리로만 들어와서 알기는 아는데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래 믿음생활 하신 분 일수록 기도 많이 하셔야 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밥을 조금만 먹어도 되지만 어른이 되면 밥도 많이 먹어야 하고 운동도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의 분량은 많이 꾸준하게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매일 조금씩 단계를 높여서 기도생활을 해야 하며, 기도할 때에 사람들은 그분을 신령한 영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게 됩니다.
기도할 때에 진짜 성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목사가 진정한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 기도를 힘써 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를 복되게 하며, 자신도 복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나타내게 됩니다.
결론으로 우리는 이 시대에 목적이 분명한 성도의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이 시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바른 성도, 자랑스런 하나님 나라의 자녀 되어서 우리 신분에 부끄럽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있으나 마나한 성도 되지 않기를 꼭 마음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룻기서를 보면 룻의 가족 이름이 다 나오며, 그 가정과 관계된 이름이 다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분이 있습니다. 누구냐면 나오미의 대를 이어주어야 할 제일 가까운 친척인데 그 친척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 하겠다. 못 하겠다”고 해서 그보다 더 먼 친척의 이름 보아스가 나옵니다. 보아스는 이름이 올라갈 뿐 아니라 그 대가 다윗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갑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을 회피한 사람을 성경에 “아무개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족보에 분명히 기록된 자가 되어야지 “아무개여”라고 기록되면 되겠습니까? 우리 안양일심교회는 아무개가 없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으나 마나한 성도가 되지 마시고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있어야할 존재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에 “하나님! 제가 어느 때까지 하나님 일 할지 모르지만 천국 갈 때까지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 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까요?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3단계의 무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왜 하필이면 할아버지 산소,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 3단계의 무덤이 저에게 떠올랐을까요? 이 설교를 준비할 때에 그런 산소가 자꾸 생각되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세상에 와서 겨우 한 세상 살고 무덤하나 남기고 떠나며, 다음 세대도 겨우 무덤 하나 남겨놓고 떠나고, 그 다음 세대도... 이렇게 살다가서 되겠습니까? 무언가 하늘나라에 영원한 상급으로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세상 살고 나니 누구의 무덤이라고 그것만 남기고 살다 가서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영원한 나라의 영광을 위해 준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도 기쁘고, 하나님도 기쁘며,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우리 모두 복을 받는 아름다운 성도의 본분을 다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다섯가지 사명
행 2장 37~47절 / 김상복목사
여러분은 기초가 부족해서 고생한 적이 혹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학생 때 기초가 부족해서 고생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제가 평양에서 태어났잖아요. 그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전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려니까 실력이 안 되는 것이에요. 이북에서 공부한 것과 이남에서 공부한 것을 비교해 보니 이북에서 공부한 것은 기초가 제대로 안 되어 있었어요. 제가 이북에서 제일 많이 배운 것은 김일성 장군이고 그 외에는 그다지 많이 배운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초등학교 6학년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공부를 했는데, 공부를 하면서도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 수학시간에 부피를 구하는 공식을 배우는데 제가 부피가 뭔지를 알아야지요. 그래서 집에 돌아와 형뻘 되는 중3 학생에게 도대체 부피가 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컵을 가져오라고 해서 컵에다 손을 얹으며 이게 부피야 하더군요. 한번은 부피라는 공식을 공부하는데 파이, 3.14라고 해요. 파이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내 옆에 있는 친구는 파이를 썼는데 가만히 보니까 24를 잘못 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공책에 파이를 24라고 아주 제대로 써 놓았지요. 이렇게 기초가 부족했으니까 공부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렇게 석 달을 공부하고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첫 학기중간고사에 그만 낙제를 했어요. 내 평생에 낙제를 하다니. 이북에서는 우등생이었는데…. 선생님이 학부형을 데리고 오라고 하셔서 “우리 학부형은 평양에 있는데요” 하고 두 살 많은 저희 누이를 데리고 같이 갔는데, 동생 공부를 제대로 시키라는 말을 들었어요. 기초가 없으니 힘들었지요. 그 기초를 쌓는데 중학교 3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기초가 중요합니다. 운동선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잘 하는 사람들은 기초가 아주 잘 되어 있어요. 기본이 중요하지요 기초가 튼튼하면 큰 집을 지을 수 있지만 기초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발전 하는 것 같아도 한계가 있지요. 제가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에 다른 과목은 다른 친구들을 따라 갈 수 없었는데 저와 이남에서 공부한 다른 학생이 똑같이 시작하는 과목이 하나 있었어요. 영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것들은 못 따라가도 모두 다 기초를 닦는 이것 하나만은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ABC를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결국 1학년 때 영어를 잘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잘 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영어 교과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외워 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묻습니다. 목사님처럼 영어를 잘 하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그 비밀은 바로 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1학년 교과서를 다 외우고 2학년 교과서까지 다 외우고 3학년이 되니까 학교 선생님이 저보고 영어를 가르치라고 하더군요. 기초가 튼튼해진 것입니다. 운동이든 무엇이든 일단 처음 배울 때는 프로한테 배워야 됩니다. 전문가한테 배워서 처음 기초를 철저하게 놓아야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대강 공부한 사람들은 발전하기가 힘들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됩니다. 모든 것에는 기본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의 기본을 확고하게 세우면 할렐루야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 것이고, 기초가 흔들리면 교회가 왕성하지 못하고 연약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50일 되던 그 날 오순절에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강림한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 되었어요.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다섯 가지의 기초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교회는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도 공동체입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죄에서부터 영원히 구원하시고 인간을 죄의 세력과 죄의 습관과 죄의식과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 시켜주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또 인간을 위해 다시 사셨으며 부활하셨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포함으로써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37절부터 41절까지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그 분을 선포하고 그 분을 전하고 그 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때에는 사도들이 선포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서 선포하도록 만든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를 구주로,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구원자로 선포하도록 만든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불러 안수한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요,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선포를 듣고 예수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동체, 전도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전도를 위해 존재 한다면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전도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전도를 하면서 다섯 가지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첫째, 회개하라. 하나님 교회의 목회자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이 땅에 선포되는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방향을 정 반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 하나님을 무시하던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을 미워하던 사람, 하나님을 저주하던 사람들은 돌아서서 하나님 쪽으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 것이 회개입니다. 죄 속에 살던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니까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우리들이 우상을 섬기던 우리들이 멋대로 살던 우리들이 자기중심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둘째는 세례 받으라고 했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꿨으면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마 세례를 안 받은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그중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아직 자격이 없습니다. 준비가 안 되었어요. 세례 받고 세례 교인답게 살만한 능력이 없고,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그만큼 헌신하고 결정할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례는 성화된 사람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선 사람들이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간단한 것입니다. 옛날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 받던 것 기억나십니까? 에디오피아의 내시 한 사람이 마차를 타고 길을 가면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집사 한 사람이 그 마차를 같이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시는 집사에게 이게 누구의 얘기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는 “그건 예수요. 죽었다가 다시 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 최근에 예루살렘 소식 못 들었소?” 그래서 이사야서를 읽는 가운데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빌립 집사는 “당신이 세례 받는데 방해를 받을 것이 무엇이요” 하며 바로 마차에서 내려 그 곳의 강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했어요.
성숙한 사람이 받는 것이 세례가 아닙니다. 세례는 돌아선 사람들, 하나님 없이 천국 없이 죄 사함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내 발걸음을 출발 하겠습니다 하고 돌아선 사람들이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돌아 서시면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것이 세례입니다. 즉 “나는 예수를 믿기로 했기 때문에 죄 씻음을 받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 죄를 사함이다”라고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 쪽으로 돌아 섰으면 세례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셋째는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돈 문제도, 정치 문제도 아닙니다. 감당 할 수 없는 죄, 죄성은 내가 원해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요, 태어날 때 가지고 났고, 그것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잘못 생각 하고, 잘못 말 하고, 잘못 행동 하게 됩니다. 사람은 거듭나기 전까지는 죄를 범하지 않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 하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용서하시고, 하나님 쪽에서 덮어 주시는 그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보혈 때문에 여러분과 저의 죄가 덮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사함 주시는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는 영원한 마음의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죄 사함을 통한 평화, 이것이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는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 하셨습니다. “내가 보혜사를 보내 주리니, 그 보혜사 성령께서 너의 속에 계실 것이요, 너희와 함께 게실 것이요,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돌아서는 순간,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고, 죄 사함 받고 돌아서면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마치 구원이, 천국이 선물인 것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십니다.
다섯 번째는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은 39절에 너희와 너희 자손과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것은 먼저 우리들에게 한 것이요, 그러나 우리만이 아니요, 나와 내 자손들에게 주신 약속이요.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을 받으면 구원받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인데, 이것은 나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자녀들과 내 자손들에게 주신 것이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세례를 주지 않습니까. 교회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나뿐만 아니라 나와 내 자손들에게 주신 약속이요,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유아 세례를 주는 것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 것을 믿습니다, 나와 내 자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을. 그래서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메시지를 전하는 곳이요, 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전도 공동체로서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 성령이 너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어서 이 복음을 끝까지 전하라. 여러분과 제가 힘을 합해서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 주위와 우리의 친척들과 우리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날 세례 받고 돌아 섰습니다. 하룻 동안 3천명이 돌아서서 회계하고 세례를 받고 구원받고 죄 사함을 받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회계한 사람들이요, 세례 받은 사람들이요, 죄 사함 받고 성령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교회는 전도의 사명뿐만 아니라 교육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장하는 곳이에요. 42절을 보면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 했다고 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사복음서에 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다 사도들이에요. 바울이 사도요, 야고보가 사도요, 베드로가 사도요. 사도들의 가르침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참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정적으로 잘 배워서 여러분의 영혼이 성장하고 왕성한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에는 여러분이 지칠만큼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아요. 여러분이 게을러서, 여러분이 원치 않아서, 여러분이 관심이 없어서 성경공부를 못하지, 우리 교회에서 기회가 없어서 성경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전국에 있는 교인들이 교회에서 저희 교회의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의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함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교회는 교육의 공동체입니다.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믿음이 튼튼하게 슬 수 있도록 여러분이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교회의 사명은 교제의 사명입니다. 친교의 공동체. 42절부터 43절에 보니까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 즉 교육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협력하지요. 예수를 믿는 삶이라는 것은 혼자 믿지 않아요. 서로 교제하고, 서로 함께 떡을 떼고. 사람을 사귀는데 몇 가지 요소가 있어요. 첫째는 사귀는 일을 도모하고 또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주일날 왔다가 국수라도 한 그릇 잡수고 가셔야 되요. 같이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서 교제하는 것이에요. 또 함께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보이면 서로 기도하면서 기도 안에서 서로 사귀는 것이에요. 함께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말하고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에 대한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또 뿐만 아니라,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했어요. 기적이라는 것은 눈 먼 자가 눈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요, 기적은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지는 것이 기적이에요. 왜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가능성과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나.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리고 우리가 함께 기도 했으니까요.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 하신다고 했어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중보기도 위원회가 있고, 그 사역이 아주 활발합니다. 여러분이 기도 제목들을 써 주시면, 중보기도 위원들이 그것을 위해 일주일 내내 기도합니다. 석 달이나 몇 달에 한번씩 저에게 한번씩 보고서가 옵니다. 보고서를 보면 어떤 기도 제목이 있었으며, 어떻게 응답이 되었는지, 어느 날 응답이 되었는지, 그리고 몇 퍼센트가 응답이 되었는지가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이야,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 하시고, 내 능력 이상의 분이 계시는구나. 여러분과 제 삶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들이 다 기적이요. 그 중에 한 두 가지가 눈 뜨는 것도 있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있지만, 그것만이 기적이 아니요. 즉 다시 말하면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여러분과 제 삶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에요. 여러분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친교하며 대화하며 서로 사귀고 기도 할 때마다 나에게만 그런 일이 있는 줄 알았더니 나와 같이 기도하는 그 사람의 삶에도 하나님이 역사 하는 것을 본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능력들이 체험되는 것이요, 하나님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응답 하시고 간섭하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이와 같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 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기 때문에,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나보다 크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구나 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고 했어요. 43절을 보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게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난다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 교회 안에 기적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이런 간증을 서로 모여서 나누는 삶, 이것이 영적인 교제 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영적인 교제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는 섬김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전도의 사명, 교육의 사명, 또 친교의 사명뿐만 아니라 섬김의 사명을 서로 감당하는 것이, 즉 교회를 통하여 서로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려면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해요. 44절에 보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었다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같이 모이는거에요. 공동체 생활 하면서 서로간에 나눔이 있었어요. 오늘이 나눔 주일인데, 매달 넷째 주일이 나눔 주일입니다. 나눔 주일에는 우리가 평상시에 헌금을 하고는 특별히 나눔을 위해서 헌금을 합니다. 오늘 저도, 매달 넷째 주일에는 나눔 헌금을 드려요. 그래서 그 나눔 헌금을 모아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돕습니다. 여러분 중에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 것은 돈만이 아니에요. 돈이 좀 많은 사람이 있고 돈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아주 모자라요. 어떤 땐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상태를 우리가 다락방을 통해서, 성도를 통해서 알게 되면, 바로 나눔 위원회가 연락을 하고, 나눔 위원회에서는 그 사람의 상태를 살펴서 바로 가서 돕습니다. 이런 일을 교회가 하면서 공동체에서 서로서로를 돌보며 살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예전에 제가 어느 한 고3학생의 이야기를 예배 시간에 했는데, 그 어머니와 두 남매가 어려서부터 아빠 없이 자라났어요. 태어났는데 이 아이들이 참 감사하게도, 어머니가 참 많은 고생을 하며 이 아이들을 키웠는데 감사하게도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첫 아이가 대학을 붙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여러 해 동안 그 가정을 지켜보면서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해 왔는데, 감사하게도 그 두 아이가 그렇게 착하게 신앙생활도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아주 성적이 우수해서 수시 입학으로 처음부터 들어가는 것이에요. 대학에 입학을 했지만 어머니가 학비를 내 줄 수 있는 능력이 안되요. 제가 예전에 예배 시간에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 예배 끝나자마나 어느 집사님이 와서, 목사님, 제가 좀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을 완전히 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서로 형편을 몰라서 그렇지, 알면 누군가가 도울 수 있다는거에요. 왜,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언제나 돈이 많은 사람이 돕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난 주일에 또 한 가정이 와서 그럽니다. 우리 아들도 붙었는데 우리는 좀 넉넉해서 이 아이의 등록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우리 아이를 생각하니까 요전에 목사님 그 아이 생각이 나서 제가 그 아이의 등록금을 좀 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좀 늦었습니다. 앞으로 이 아이는 어머니가 계속해서 공부를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어요. 앞으로 이 아이는 8번 학비를 내야하니까 다음번에 하십시오. 그랬더니 다음번에 꼭 자기에게 차례를 달라는 것이에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공동체요, 서로서로 도우며 사는거에요. 저는 기도합니다. 어렵게 성장한 이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 하고 당당한 신앙인으로, 당당한 사회인으로 설 그 날을 기대하며 전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하나님께서 능력 이상의 것을 이루셨다고 하는 간증이 꼭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섬기는 공동체요. 물질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키가 큰 사람이 있어요. 왜 키가 크냐. 하나님이 실수 한거냐. 아니요, 키 작은 사람을 위해서. 선반에 올려놓은 것 좀 내려 주라고 하나님께서 키 크게 만들어 주신 거에요. 여러분 가운데에 머리가 좋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 좋다고 자랑하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머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주라고. 여러분 가운데에 건강한 사람들, 힘 센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 센 사람은 이 야들야들한 김목사 같은 사람 도와주라고. 기운 없는 김목사 같은 사람들 도와주라고 힘을 주신 것이요. 여러분 가운데에 온갖 종류의 재능을 가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왜,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우리는 서로 돕고 섬기며 사는 공동체입니다. 인간은 자칫 잘못하면 자기 중심적이요 이기적이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주시고, 자기 아들을 주셨는지,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지, 죄 사함을 주셨는지, 부활을 주셨는지 아는 우리들. 내 능력이 부족할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역사하시는지를 경험한 사람들이 서로서로 격려하며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며, 이것이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좀 넉넉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모자라요. 제가 전에 어떤 분들 얘기를 들으니까 어떤 분은 시간이 너무너무 모자라요. 저도 바쁘지만 제가 그 바쁜 분들의 얘기를 듣고 아니 저렇게 바빠서 어떻게 인생을 살건가. 우리는 서로서로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섬김이요, 상부상조 하는 공동체에요. 교회는 전도의 공동체요, 교육의 공동체요, 친교의 공동체요 섬김의 공동체로다. 이런 일을 잘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에요.
마지막으로 교회는 예배의 공동체에요. 예배의 사명을 잘 완성시켜야 해요. 이 모두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뭐냐. 위대한 하나님을 알게 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교회의 하는 일이에요. 46절에 보니 두 장소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우리 교회는 성전에 모이는 날이 크게는 일주일에 두 번이에요. 주일날 한번하고 수요일에 한번하고. 이게 공식적인 예배에요. 여러분,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에 참석하려고 힘을 쓰십시오. 가만히 있으면, 힘을 쓰지 않으면, 한번 참석 안하면 양심에 가책이 되요. 두 번째 참석 안하면 조금 가책이 되요. 세 번째 참석 안하면 별로 가책이 안되요. 네 번째 참석 안하면 내가 왜 갔던가 싶어요. 힘써야 되요. 천국은 침로하는 자의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예배 하는 자를 찾으세요. 여러분이 빠지면 찾으세요. 찾다가 찾다가 보니까 저 설악산에 가 있더라고요. 교회에 예배에 열심히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교회에만 모인 것이 아니고 또 모인 곳이 있어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했습니다. 가정 예배에요. 가정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믿음의 가정, 또 집에서 모이는 건 다락방이요, 구역 모임이요, 작은 모임들이 집에서 있습니다. 교회에서 모이고 집에서 모이고 이 두 가지의 모임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고백 하는 것이 찬양이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 달라고 찾아가는 그 분, 그것이 바로 찬양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그 것이 바로 찬양이에요. 하나님은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은총을 베푸시고 건강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열정을 주시고 소망을 주신 분이라는 것. 이것을 말하며 표현하는 것이 예배에요.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악기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헌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드높이는 일을 날마다 날마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가정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회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여러분의 삶들이 되기를 꼭 바랍니다.
전도, 교육, 친교, 섬김, 예배 이렇게 이 다섯 가지를 골고루 잘 하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나요. 여러분 제가 할렐루야 교회에 두개의 기둥이 있다 그랬습니다. 선교와 구제다. 어째서 두 개 뿐입니까. 다섯 개여야지. 다섯 개 중에 우리가 두 개 골라서 기둥하겠다 그러면 안 되죠.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골라서 기둥하라 그런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다섯 개 기둥이요, 다섯 개 기둥이 다 튼튼하게 서야지, 그 중에 두개만 서면 세 개는 어떻게 하자는 거에요. 그래서 앞으로 할렐루야 교회의 기둥은 다섯 개다, 두개가 아니라. 선교와 구제는 그 중에 두개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는 교회를 막론하고 다섯까지에요. 기본이에요. 이 다섯 가지의 사역을 잘 감당하면 두가지 결과가 나타나요. 첫째, 우리 모두가 다 매력 있는 사람, 호감이 가는 사람들이 될 거에요. 47절을 보세요. 하나님을 찬미하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요. 왜, 여러분과 제가 변하니까요.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하고 친교하교 교육받고 섬기는 삶이, 이 다섯가지가 잘 교회 안에서 개발이 되면 여러분이 변해버려요. 여러분도 모르게 변합니다. 변하는데 어떻게 변하느냐. 칭찬 받도록 변한다는 거에요. 생각하는 것이 변하고, 말하는 것이 변하고, 태도가 변하고 여러분의 정서가 변하고, 여러분의 가슴에 평화가 있고. 행동과 습관이 변하고, 인격에 변화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좋아한다 그 말이에요. 칭찬하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들, 쉽게 말하면 호감이 가는 사람들.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하면 장사가 잘 되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싫어하면 장사가 안되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하면 환자가 많아져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싫어하면 환자가 안와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하면 훌륭한 교수가 되고 훌륭한 선생님이 되요. 학생들이 따라요.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면 선생하기 힘들거에요. 제가 전에도 얘기 했지만 제가 미국에서 교수가 된 것이 딱 한가지 이유에요. 내 선임 교수가 쫓겨난 것이에요. 그 덕에 제가 교수가 되었어요. 제가 바로 거기 있었거든요 그 교수가 쫓겨날 때. 그 교수가 쫓겨나니까 우리 총장이 나한테 와서 니가 좀 가르치겠냐고 해서 제가 Why not? 그래서 제가 교수가 된 거라고요. 지식은 많았지만 사람을 좋아할 줄 모르는 교수 때문에 쫓겨났어요. 학생을 좋아하지 못해서 그 교수가 쫓겨 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엇을 열심히 할까요. 학생을 좋아 하는 것. 여러분, 호감을 주는 사람 어떻게 됩니까. 교회 생활을 잘 하고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을 골고루 개발하면 여러분과 제가 칭찬받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총회를 입는 사람들이 반드시 될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증가한다는 것이에요. 우리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여러분 때문에 꼭 구원 받는 가족들이 생기길 바랍니다. 친구들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교회 생활에 성실함으로 다섯가지를 잘 개발해서 여러분이 매력있는 사람, 호감주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 되서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요. 기본적인 사명, 전도와 교육과 친교와 예배 사역을 잘 수행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가 다시 신경써야 할 것이요. 개인 생활이나 가정 생활, 구역모임, 선교회, 위원회, 교회 학교, 성가대 어디서든지 우리가 우리를 좋은 교회로 만들기 위해선 이 기본 5가지 사역에 여러분이 정진 하면서 한사람 한사람이 잘 개발되서 사람과 하나님 앞에 총회를 입고 많은 전도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행 2장 37~47절 / 박조준목사
오늘 봉독한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놀랍게 임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 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 니다. 그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습니다. 이때 저 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강한 바람, 이것은 성령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셉니까?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강한 것을 의미합니다.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했는데,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불의 혀는 성령의 뜨거움, 열정 그리고 어두움을 밝 히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히 임할 때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고, 뜨거운 마음으 로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어두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회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은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을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행 17 : 6)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본래 베드로는 성격이 몹시 거칠고 고집이 센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성미가 아주 충동적이었습니 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도 길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당장 그물을 버려두고 주를 좇는 사 람이었습니다.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실수도 잘 했습니다. 그는 아주 솔직했습니다. 그의 말은 직선적이었습니다. 3년에 걸친 예수님의 공생애의 중간 시기에 예수님이 한 번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고 물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라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하며, 다른 이는 예레미야나 그 밖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 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 했습니다. 이 귀중한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너무 기뻐서,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것을 알게 하 신 이는 혈과 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다 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깨우쳐 주기 시작했 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신 후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실 것 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든 것을 다 수긍하겠지만 그 죽으심에 대해서만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일만에 다시 사신다 는 말씀은 채 못들은 것 같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 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아주 심한 꾸지람을 들었습니 다. 베드로는 허세를 나타내는 면도 있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며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밤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리리라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가만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크게 소리쳤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 가 나를 부인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물론 진 심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가시자 베드로는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약한 의지력 때문에 외부의 압력에 이겨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장 담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니 저주하고 맹세하는 죄까지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의 능력 있는 설교는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지낸 경험을 가지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특별한 교육을 받은 경우가 없는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머리가 남보다 특별히 뛰어 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의 팔에 붙들릴 때 완전히 달라졌습 니다. 실수만 하고 행동에 일관성이 없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던 베드로가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성령 충만한 종이 된 것입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겁쟁이였던 베드로는 자기의 주님을 세 번씩 부인했지만, 이제는 어떤 큰 압 력 밑에서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습니까? 대답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가 얼마나 달라졌나 하는 것을 보세요. 그렇게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성미가 급해서 실수만 저지르던 베드로가 차분히 가라앉은 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평하고 투 덜거리기를 잘하던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후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공회 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 당하는 일을 귀하게 생각하고 기쁘게 여겼습니다. 타고난 이기적인 성향 때문에 항상 명예를 추구하던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후에 한없이 겸 손해졌습니다. 오순절 전에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자기의 성품이 많이 나타났습니다만 성령의 지배 를 받으면서부터는 모든 일이 달라졌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어려운 일이 그의 신변에 일어나도 초조해 하거나 당황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감옥 안에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환경 속에서도 평화롭게 잠들 수까지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 다. 더구나 베드로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 드시는 힘이 있으십니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단점 하나 하나를 장점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가령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우리의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충 만을 받아 달라지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아주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집사 스데반이 증거를 마치자 그 당시 그를 핍박하는 교계 지도자들은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사울은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거기에서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데 가편 투표를 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 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 있는 성도에게도 큰 핍박이 닥치게 되었고,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 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했습니다. 이것은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울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를 달라지게 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달라졌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솟아났습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한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 : 15 - 19) 우리가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사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화를 내며 분한 생각이 있습니까? 이것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세요. 주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는 일이 자꾸만 꼬여 나갈 때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 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믿음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기 쁨을 표현하면 더욱 기뻐집니다. 그러나 절망을 나타내면 더욱 우울해집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 는 일에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나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한 가지 계명에 순종 함으로 우리의 영혼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을 변화시켜서 마음의 평화가 있게 하셨습니다. 마음의 평화란 이상적인 환경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는 외부 세계와는 아무 런 관계가 없습니다. 유쾌한 환경에서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 속에서는 영적인 승리를 맛볼 수 없습 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 안되어 갈 때도 마음이 평화롭게 지내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자제력을 잃어버릴 정도로 안절부 절합니다. 여러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뭣이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 : 6 - 7) 이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통해 성령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도 이 평 화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달라진 바울에게는 철두철미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풍랑 만나 파선 직전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배 안의 사람들에게 그의 믿음 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던들 이런 재난과 손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나의 하나님의 천사가 지난 밤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무서워 말라. 너는 반드시 가 이사 앞에 설 것이다. 보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많은 사람을 다 네게 맡겨 주셨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용기를 내세요. 나는 내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행 27 : 21 - 26)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 사회와 너무 비슷한 형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미항을 떠나 베닉스로 향한 알렉산드리아 호는 남풍이 순하게 불어 얼마를 나가다가 갑자기 유라 굴로라는 광풍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이 큰 배는 파도에 쫓기기 시작하여 24시간만에 짐을 몽땅 바다 에 던져야 했습니다. 50시간도 못되어 배 안의 모든 기구를 물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밤낮 사흘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맥이 다 빠지고 지쳐 버렸습니다.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절망이었습니다. 성경에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했습니다. 지도자가 한 번 잘못 생각하고 잘못 결단을 내리면 온 국민은 고생과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원들은 암초가 두려워 도망치려 했습니다. 사명감 없는 일꾼들은 제 갈 길 찾아 발뺌이나 하는 것이고 달아날 궁리만 합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란 배는 아주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타개해 나아가야 할 사명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더욱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 다. 이 알렉산드리아 호가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 저희를 위로하고 음식을 권한 사람은 군 인 백부장이 아니고, 선장이 아니라 죄수로 끌려가는 바울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 존재가 비 록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어느 나라에서나 그 국민의 영혼과 생명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 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밀어닥칠 때 그 위기를 경고하고, 위기에 봉착했을 때는 그 원인을 밝히는 동시 에 고생하며 절망에 빠진 국민에게 위로와 소망을 안겨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국민을 편리한 대로 이용하고 착취하다가도 위기가 닥치면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있어도 기독교는 항상 고생하는 민중의 벗이 되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절망할 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어야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염려와 근심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 나님은 살아 계시다 고 우리가 말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고 여러분이나 저 나 이 고난의 배에 같이 탄 승객 중의 한 사람입니다.
북쪽에는 유라굴로라고 하는 질풍이 마구 불어옵니다. 동남쪽에는 일찍이 삼켜 본 경험이 있는 거 센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때 나라를 책임지고 지도하는 사람들이 사심을 버리고 바로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고, 숙정작업을 시행하고, 의식 개혁을 부르짖고 있으나 사회의 분위기는 날 로 더 험악해지고, 불신풍조는 더 심각해지고, 이제는 구원의 여망이 없어진 상태 가 되어 가고 있 습니다. 그 동안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저지른 일들은 국민의 분노와 허탈을 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변명의 여지가 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때묻지 않은 학생들이 어떻게 어렵게 입학한 학교인데도 생명을 내걸고 철통같은 저지 하에서도 들고 일어나곤 하는 것을 기성 세대는 일리는 있지만 지금이 그럴 때는 아니지 않느냐? 고 호응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썩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니 일반 국민도,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 도 이젠 설득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느 유명한 외국 신문 기자가 작년에 왔을 때는 두고 봐야지 하는 관망상태였는데 이번에 와 보 니 이젠 할 수 없다 고 표현한 말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 다. 먼저,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사명 다하지 못한 것을 절실히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겠습니다. 오늘 한국에 예수 믿는 사람은 많아졌다고 하지만 제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유익 을 주기 보다 부담을 주고, 소망을 주기보다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보다 좀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우리의 삶이 온전히 달라져야겠습니다. 세상의 제도나 교육으로 우리가 달라질 수 없습니다. 보이는 거리는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모릅 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고 달라져야 되는데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이제 와서 우리가 누구의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법에 맡길 것입니다. 문제는 이 나라 이 겨레를 살려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가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나라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초대 교회 교인들같이 각각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 충만해서 옛 사람이 달라져 새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옛날의 가정이 아니라 새 가정으 로 달라지기 바랍니다. 옛날의 교회가 아니라 새 교회로 달라지기 바랍니다. 옛날의 정부가 아니라 새로운 정부로 달라지고, 옛날의 나라가 아니라 정말 새 나라로 달라지기 바랍니다. 스가랴서 4장 6절을 읽고 기도합시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달라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령으로만 됩니다. 이 강하고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우리 모두를 새롭게 하여 달라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왕성하는 교회
행 2장 37~47절 / 박조준목사
희망의 새해 1981년을 맞이하여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과 사랑 하는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말 여러 면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지난 한 해를 하나님의 은혜 중에 지내고 보니 에벤에셀 즉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와주셨다 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작 년 같이 어려운 해에 교회가 계속 성장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씀이 너무 실감이 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대를 가지고 맞이하는 이 새해는 모든 어려움이 풀려 나가는 해가 된다는 보 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지난해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더 어려움이 많을는지도 모르겠 습니다.이런 때에 우리도 그 어려움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떠내려가고 말아야 할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주변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교회는 더욱 빛을 발해야 합니다. 죽는다고 모두들 아우성 칠 때 그리스도인은 신념을 가지고 굳건히 서서 절망적 인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사람들에게 갈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그 동족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고 신성 모 독죄와 소란죄로 피소되어 로마 총독에게 몇 번씩이나 심판을 받다가 유대 땅에서는 공정한 재 판을 기할 길이 없어서 직접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탄 배는 얼마를 못가서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배는 파도에 쫓기 기 시작하여 24시간만에 배에 실은 짐을 몽땅 바다에 던져 버려야만 했고, 50시간도 못되어 배 안의 기구마저 물 속에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밤낮 사흘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맥이 빠지고 기술도 이젠 소용없게 되자 실망의 얼굴빛 을 나타내게 되었고 행여나 하고 선장과 선원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승객들은 선원들의 실 망을 보고 그만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기자 누가는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고 사실 그대로를 밝혔습니다. 이렇게 알렉 산드리아호가 위험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죄수의 몸으로 타고 가던 한 사람 바울이 나타났습니 다. 바울은 구원의 소망이 없이 식음마저 전폐한 276명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시오. 여러분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고 손해가 있다면 배 뿐이오.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그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을 다 네게 맡기셨 다 했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시오. 나는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결코 거짓말 안하실 줄을 믿소. 이렇게 바울은 불안과 공포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소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 존재가 비록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어느 나라에서나 그 백성의 영혼과 그 생 명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직면할 때 그 위기를 경고하 고 위기에 봉착했을 때는 그 원인을 밝히고 동시에 고생하는 민중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소망 을 안겨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항상 고생하는 민중의 벗이 되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절망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염려와 근심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너희는 근심하지 말 라.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고 교회는 말해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쳐서 넘어질 때 그 짐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라고, 그리하면 쉼을 얻을 것이라고 교회는 위로 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위기에 처했을 때 파선에 직면한 국민들의 생명을 구원의 피안으로 인 도할 능력을 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 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라굴로를 만나 파선 직전에서 절망과 낙담 가운데 있는 알렉산드리아 호 의 선객들처럼 이 민족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이때 교 회가 일어나서 어두움에 싸여서 갈 길을 못찾고 방황하는 이 겨레에게 참 살 길, 소망의 새벽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너 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면서 너희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교회 역사상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 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왕성하는 교회였습니다. 저희들은 서로 교제하며 말씀을 배우며 기도하 기를 전혀 힘썼습니다.그래서 능력있는 교회가 되었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가는 왕성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금년에 더욱 왕성하는 교회 라는 표어 밑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영락의 권속 하나 하나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능력있 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35주년을 지내 보내고 창립 40주년과 한국 교회 100주년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생동하는 교회, 전진하는 교회, 빛 을 발하는 교회로 성장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더욱 왕성하는 교회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회적인 사명을 다해야겠습니다. 교회적으로도 각 방면에 왕성해야겠습니다. 더욱 왕성하게 전도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더욱 왕성하게 교육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더욱 왕성하게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 다. 모든 구역의 활동이 더욱 왕성해야겠습니다. 성가대의 봉사가 더욱 왕성해야겠습니다. 그래 서 금년 일년 동안 더욱 왕성하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몸의 어느 작은 지체 하나라도 바로 움직이지 못하면 그 몸은 왕성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왕성한 몸은 어느 지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지백체 오장육부가 왕성해 갈 때에 있 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책임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한 분도 구경하시는 분 없이 직접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온 교우가 함께 모든 일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더욱 왕성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온 성도가 100퍼센트 일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더 욱 왕성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도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의 온 가족이 각 방면으로 왕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하시는 사업이 금년에 더욱 번성하시기 바랍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하시는 사업 그리고 우리 교회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라
행 2장 37~47절 / 이동규목사
무디 선생이 언젠가 교인들에게 자기 손에 들고 있는 컵에서 어떻게 공기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뺄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공기 펌프로 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무디 선생은 "그렇게하여 진공이 되면 컵이 깨집니다."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많은 빗나간 대답들이 있은 후 무디 선생은 미소를 지으면서 주전자를 들고 컵에 물을 가득 부었습니다. "자 보세요. 공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할 때, 무디 선생은 그리스도인이 생활에서 공기를 빼려고 하듯이 죄를 제거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짐으로 죄를 제거하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기처럼 남아 있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망, 그리고 무기력은 성령의 채움으로 한 순간에 극복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은 제자들의 일생이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있던 3년 간의 공생애 시기,
둘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까지의 약 40일간의 시기,
셋째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이후 순교하기 까지의 사역의 시기입니다.
짧게는 40일, 3년에서, 길게는 몇 십년이 되는 시기 까지 차이가 많습니다.
첫 번째 시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3년 동안은 사실 제일 소중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과 함께 숨쉬고 활동하던 시기였으니까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경험해보지 못할 우주적인 사건에 제자들은 함께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제자들은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하나님이신 주님과 함께 생활했지만, 사실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시기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낸 시기에는, 깨닫기는 했지만 행동하지는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 가던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졌고, 도마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는 예수님이 낙심한 제자들에게 나타나 확신을 주고 음식 까지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하나님의 아들이신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의 고백에 다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고 마음이 뜨거워 졌을 뿐 그만입니다.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느꼈을 뿐 그만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여전히 변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 나가지 못했고, 여전히 마가 다락방에서 불안한 칩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모여 있긴 했지만, 그 제자 공동체가 행동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지긴 했지만, 그저 그만입니다. 그들도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 나가지 못한 것은 마찬 가지입니다.
머리로 깨닫는 것이 곧 변화를 가능하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알고서도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 처럼, 엠마오의 두 제자 처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정렬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낌이나 정렬이 참된 영적인 변화를 지속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 2장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기, 즉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제자들을 한 번 보십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딴 판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불의 혀 같이 갈라지면서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서 변화의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그렇게 견고한 성 처럼 보이던 변화가 단숨에 진행이 됩니다. 겁많아 배반하고 의기소침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속 사람 까지 변했고, 그들은 행동을 했습니다. 힘있게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고, 정렬적으로 함께 모여 친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쁨에 들떠서 재산과 물건을 나누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외없이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 나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참으로 대담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변화와 행동의 분수령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은 깨닫기는 해도 알기는 해도 믿기는 해도 아직도 행동하지 못하던 것을, 행동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성령은 머리만 변하고 가슴의 느낌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속사람 까지 변하는 역사를 만들어 줍니다. 성령이 물론 깨닫게 합니다. 성령이 물론 믿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알고 느끼던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케 하는 변화와 행동의 파워를 줍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자들의 일생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받은 제자들이 어떤 변화를 보인 것입니까? 예수님과 3년 동안 먹고 마시면서도 꿈쩍 않던 변화, 부활하신 주님이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나타나셨어도 요지부동이던 변화가,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온 것입니까? 성령역사의 기막힌 변화와 행동의 드라마가 있은 것입니다.
성령은 우선 제자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찔림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 하거늘(37절).. 성령은 어찌할꼬 하는 회개를 줍니다. 없던 눈물이 흐르고, 교만한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라 그리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리니“ 그러니 성령과 회개는 늘 동시에 주장되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성령이 있습니다.
1907년 한국굑회 부흥 운동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걸 경험할 수 있습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 초대교회에 성령의 체험을 동반한 엄청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강원도와 원산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모였는데 그 중에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R. A. Hardie)목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드리렸습니다. 이 간증이 한국교인들에게 감명을 주었을 뿐 만 아니라 그들도 성령을 갈망하기에 일으렀습니다.
1907년 1월 6일부터 10여일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인 모든 성도들도 성령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날에 회개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는데, 개인의 내면적인 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서는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사경회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이어 사람이 일어서서는, 죄를 자복하고 넘어져서는 죄의식에 고민하면서 땅을 쳤다.. 어떤 때는 죄 자복이 있은 후 온 청중이 통성기도를 하는 데, 또 다시 죄를 자복하고 나서는 온 청중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이렇게 기도회는 새벽 두시 까지 자백과 울음과 기도로 계속 되었다” 마치 오늘 본문의 37절 처럼 초대교회를 탄생시킨 회개 운동이 일어 난 것입니다. 성령의 결과입니다.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도 그랬고, 한국 평양의 초대 교회도 그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선 어찌할꼬의 회개를 줍니다.
또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을 받은 무리들은 곧 변화를 보입니다.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에 힘쓰고 찬양에 몰입합니다. 물건을 통용하고 나눔을 실천합니다. 겁쟁이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변화는 일회적이고 스쳐가는 사건이 아닙니다. 일평생 진행되는 평생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니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가 되는 겁니다. 주님을 내 마음 속에 성령으로 모셨으니 주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은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성령은 알고 깨달은 것을 추진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은 일명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그 만큼 성령의 활동이 생생하게 나타난 현장을 보도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의 영어 이름은 ACTS입니다. 영화 찍을 때 ‘액션’의 그 액션입니다. ‘액션배우’ 할 때의 그 액션입니다. 말하자면 행동 모음입니다. 어떤 행동 모음입니까? 성령의 활동 모음입니다. 성령이 사람들을 변화 시키고, 성령이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든 그 현장 보고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보도는 탬포가 빠릅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따라 잡기가 힘듭니다. 그만큼 성령의 역사는 급하고 강하게 몰아칩니다. 구체적이고 생생합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정지화면이 아닙니다. 동화상입니다. 액션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는데도 정지 화면인 사람, 아직도 충만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연약한 우리에게 추진력을 가져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고급입니다. 옵션도 다 달았습니다. 운전도 베테랑입니다. 그러나 연료가 없으면 다 무용지물입니다. 실제로 추진하게 하는 파워는 성령님이 주십니다. 성령을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합니다. 성령은 분명히 인격이지만 숨과 같이 바람과 같이 묘사된 것은, 변화의 힘과 영적 실천의 에너지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자체가 에너지는 아니지만 성령님은 에너지를 주로 주십니다. 영적 실천의 동력을 주십니다. 정지 상태의 화면을 움직이게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치않고 어떻게 신앙 생활이란 발전의 터빈을 돌릴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지루하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에너지만 있으면 쉽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연약한 인간은 믿음의 행진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대, 예수님의 시대, 그러나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현시도 부활 승천 이후에는 사라졌습니다. 재림 때 분명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생생한 모습으로 지금도 주도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믿음의 아들 딸들에게 생활 구석 구석에서, 지탱하고 위로하고 변화시키고 행동하게 합니다. 영적인 생활인 크리스챤의 삶은 모두 성령의 에너지로 됩니다. 영적인 생활이니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의 영역에 성령이 얼마나 주도적인 역사를 하시는지를 한번 살펴 보십시다.
기도는 성령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나니”(롬8:26) 했습니다. 말씀도 성령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까 성령을 받아 읽어야 말씀의 감동이 되 살아 납니다.
선교도 성령활동의 결과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임해서 활동하는 것이 복음증거의 일입니다. 성령 없이 선교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예배라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빌3:3)했습니다. 봉사도 성령의 능력으로 할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방언, 예언, 병고침, 지식말씀, 교사, 위로주는 일, 이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봉사하기 위한 은사입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도 성령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란과 호색과 분냄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오직 성령의 에너지로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육체의 사람이 자기의 습관을 고치고 말씀과 인격의 사람이 됩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거룩한 투쟁도, 인격의 변화도 모두 성령의 활동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믿음의 사람은 일거수 일투족이 성령의 결과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진행하며 성령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영적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성령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매일 매일의 삶에서 성령의 충만을 구할 일입니다. 무엇 보다 먼저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전 삶은 성령의 삶입니다.
올브라이트 박사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를 했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육체적인그리스도인, 능력의 그리스도인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육체적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가 충만히 행사되지 못해 번번히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무기력하고 패배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반대로 능력에 찬 그리스도인(Powerful Cristian)은 성령의 지배가 충만히 달성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은 적은게 현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힘겨운 믿음의 생활을 합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의무감에만 매여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실천에 매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한 짐씩 지고 죽을 맛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전투에서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는 있지만, 깨닫기는 하지만 진정한 변화가 없습니다. 행동이 없습니다. 바로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때문에 성령 충만한 믿음의 수레바뀌를 굴릴일입니다. 성령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바람 처럼 자유롭게 역사 하지만 바람 처럼 가볍게 율법의 실천을 넘습니다.
자! 이제 전환점을 이룰 때입니다. 혁명적 변화를 이룰 때입니다. 언제까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앵무새 처럼 이런 말만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이런 시스템의 쳇바퀴를 굴릴 것입니까?
이제는 성령의 지배가 충만히 달성 되도록 하십시다.
마가 다락방에서 온 무리가 함께 모여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할 때에 성령이 충만히 임했습니다. 무엇보다 무릎을 꿇을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는 자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십니다. 그러니 무기력을 느끼면 그 장소가 어디든지 무릎을 꿇을 일입니다.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든지 무릎을 꿇을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무릎을 꿇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무릎을 꿇을 일입니다. 그러면 오순절 후의 제자들 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증인된 자로서 승리의 삶을 살 것입니다.
성령은 혁명적 변화를 줍니다. 성령은 행동하게 합니다. 성령은 탈출하게 합니다.
이 시간 기도의 겸손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지배를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에게 이런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저희들은 연약합니다. 저희들은 때때로 패배하고 무기력한 삶을 이렇게 꾸려갑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곤고한 생활입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의무감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힘겨운 삶입니다. 율법의 짐을 한 짐씩 지고 거룩한 전투에서 연전 연패를 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저희로 하여금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하여 주옵소서. 전심으로 갈망하는 당신의 아들 딸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옵소서. 변화하게 하여 주옵소서. 행동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 원칙을 실천하는 승리의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공동체 고백대로 살기
행 2장 37~47절 / 옥한흠목사
언젠가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하신 독일 목사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크리스티안 A. 슈바르츠라고 하는 목사님인데, 세계적으로 아주 저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책을 보면 '최소치 요소의 중요성'이란 제목 하에 물통 비유를 들어 중요한 영적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물통은 적당한 넓이의 널빤지를 이어 동그랗게 두른 후, 대나무 같은 것으로 바깥에서 얽어 조여 맨 옛날 물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물통을 만들 때 길이가 각각 다른 널빤지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여기에 물을 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얼마만큼의 물을 부을 수 있을까요? 긴 널빤지만큼 부을 수 있을까요? 가장 짧은 널빤지만큼 부을 수 있을까요? 열 개의 널빤지를 가지고 만든 물통이라면, 그 중 가장 짧은 널빤지의 높이만큼만 물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짧은 널빤지 위로 다 흘러나와 버릴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널빤지가 아무리 높고 튼튼해도 물을 채우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 물통의 물은 가장 짧은 널빤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소치 요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영적 원리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본문에서도 이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처음 생긴 교회요, 때묻지 않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 믿음, 첫 사랑을 가지고 성령충만해서 시작한 교회요, 몇 천 명이나 되는 성도들의 공동체였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5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하길 원합니까? 능력 있게 하길 원합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적어도 다음 5가지는 반드시 구비해야 합니다. 저는 이 5가지를 요약 정리하여 공동체고백이라는 것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 공동체고백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을 것입니다. 99년도 1월부터 이 고백을 사용한 것을 시작하여 이제는 다른 형제 교회들 중에도 이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여 예배 때마다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고백 안에는 신앙생활의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5가지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예배, 둘째는 전도, 셋째는 교제, 넷째는 봉사, 마지막 다섯째는 교육 혹은 훈련입니다. 이 5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행복해집니다. 우리의 영적 삶이 풍성해집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이 5가지 가운데 1가지는 적당히 하고, 나머지 4가지만 잘하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한번 손가락을 볼까요? 5개의 손가락 중 제일 짧은 새끼 손가락을 예배라고 합시다. 만일 "나는 예배에 대해서 성의가 없어. 교회 출석도 잘 못하고, 가정 예배를 그렇게 드리는 것도 아니니까 예배가 좀 약해. 하지만 다른 것은 잘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적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1가지만 못하고 다른 4가지는 잘하므로 그의 신앙생활의 건강지수가 상당히 높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4가지를 아무리 잘해도 만약 이 예배가 가장 짧은 널빤지의 역할을 한다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는 그 수준 이상 올라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어줘도 다 쏟아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선 5가지를 하나하나 검토해보면서 나에게는 무엇이 가장 짧은 널빤지인지, 내가 금년에 힘을 다하고 정성을 쏟아 보완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찾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짧은 것을 보완해서 높이면 그만큼 내 신앙생활은 풍성해지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배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참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42절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설교도 듣고, 훈련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뗀다는 말은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이 모두가 다 예배입니다. 이어서 46절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좋아했습니다. 곧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전에서 흩어졌을 때에도 가정으로 돌아가서 떡을 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따라서 그 공동체를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열정이 모든 성도들의 가슴에 불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거룩하신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모습은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놓고 우리는 공동체고백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는 예배자가 됩시다." 이 예배는 지상에서 연습하고, 하나님나라에 가서는 영원히 지속될 우리의 본업이 됩니다. 그만큼 예배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 4절을 보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천군천사들이 주를 찬송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위대한 영적 거인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레는 이런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입이 만 개라면 만 개의 입을 다 벌려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어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지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배의 심정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항상 할 수가 있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도, 혼자 있을 때도 예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일정한 내용과 틀을 가지고 예배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 중 하나로 주일 예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을 지키고,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가 이어져왔고, 이 세상을 바꾸어 왔습니다. 예배에 오면 찬양과, 말씀,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 영혼의 세포가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가 제대로만 예배를 드리며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데, 그 영광 앞에 어떻게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이런 놀라운 은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됩니다.
어떤 분이 예배의 감격을 대해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었습니다. 저처럼 어릴 때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은 바닷가가 주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추억들이 많습니다.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다 빠집니다. 옛날만해도 바다 밑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물이 다 빠지면 물 밑에 있던 바닥이 다 드러납니다. 거기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습니다. 바다 조개, 고동, 해파리, 성게, 미역 등등. 그런데 요즘 바닷가는 너무나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다 빠져나가면 고무신 짝이 돌아다니고, 나무 조각이 사방에 널려 있고, 죽은 성게, 중독되어 이상하게 죽은 물고기 등 지저분합니다. 그러다가 밀물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점점 물이 많아지면서 무릎까지 차오릅니다. 나중에는 물이 해안가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썰물 때 보았던 바다 밑에 있던 온통 더러운 것들이 싹 없어집니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풍요로운 물결과 파도소리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배라는 의식을 행함으로 밀물과도 같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 예배에 나올 때만 해도 세상에서 고생하며 사느라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마음 이곳 저곳에 구멍이 나 있을 정도로 상처도 많이 입고, 여러 가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 범한 죄로 영혼이 고약한 냄새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런 저런 잡동사니를 마음에 안고 그대로 예배에 나옵니다. 대부분 예배 드리러 나오면 "주님, 지난 한 주간 잘 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고 회개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썰물 때 물이 빠져 나간 후의 더러운 바닷가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두 손을 들기 시작하면, 하늘로부터 밀물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은혜의 밀물이 우리 마음을 덮고는 그 안에 있는 잡동사니를 쓸어내 버립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근심걱정이 조용히 물러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은혜가 예배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시간을 정해 놓는 주일예배 외에 또 중요한 것이 있다면 것이 있다면 가정 예배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끼리 함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번 '우리지'에 보면 '우리 가족 행복의 열쇠는 가정예배'라는 제목 가운데 국영진 집사님과 구미선 집사님의 가정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주일 저녁이면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과 2학년에 있는 자녀들도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즐거워요. 그리고 한 주간을 살아가는데 이 예배가 많은 도움이 돼요."
1월호 가정예배 시리즈에 실린 표지 사진을 보면 김재일 집사님과 한금옥 집사님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정도 직장에 다니는 자녀들이 돌아오려면 귀가 시간이 제 각각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다렸다가 매일 저녁마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좋은 점은 가족이 모두 한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 교육에는 기도가 최고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하고 거기에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5가지 중 예배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운데 예배가 짧은 널빤지에 해당되는 분은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면, 금년 한해는 여러분이 이 예배에 정성을 쏟길 바랍니다. 주일 예배도 매주 정성을 쏟아 드리길 바랍니다. 가정 예배도 매일 드릴 수 없다면 1주일에 1번이라도 드리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짧은 널빤지를 좀더 길게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키우는 것만큼 은혜의 물이 물통에 차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오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도입니다. 47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날마다 찬송하며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교인들은 전도도 안 하는데 하나님께서 매일 사람들을 교회로 보내주는 것 같이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실은 예루살렘 성도들이 구원 받고 은혜로 가슴이 뜨거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때,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믿도록 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행 2장 37~47절 / 김삼환목사
교회는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운영하십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도 돌보아 주십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성령이시고, 말씀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저는 우편배달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전하시는말씀을중간에서전달할뿐입니다.오늘날까지 2천 년 동안 아무런 힘도 조직도 없는 교회를 세상의 힘과 능력으로 넘어뜨릴 수 없었던 것은 교회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우리의 발걸음은 초청에 의한 발걸음이고, 배경이 있는 소중한 발걸음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주인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오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성령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성령께서는 교회를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도 늘 지켜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은혜로운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힘과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늘의 영입니다. 지혜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삼위의 영입니다. 놀라운 능력의 영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사탄의 올무에서 건져 주십니다.
오직 성령뿐입니다
성령은 네 가지의 역할을 하십니다. 첫째, 성령은 스승의 역할을 하십니다.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성령은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끊임없이 책망하시고, 가르치시고, 권고하십니다.
둘째, 성령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십니다. 세상에서 시달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사랑하시고, 격려하시고, 품에안아주십니다.
셋째, 성령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아버지와 같이 환난과 위기에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악하고 환난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도록 지켜주십니다.
넷째,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많고 능력이 많아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30년 후, 50년 후, 100년 후의 일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역사의 미래를, 인류의 미래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래를 아시는 분은 오직 성령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위기와 환난이 많은 이 세상을 걸어나 갈 때 성령께서 우리의 앞날을 기적같이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지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보호를 받습니다. 성령은 불행의 지뢰, 멸망의 지뢰, 사고의지뢰, 재난의 지뢰 등 온 가정을 파멸하는 지뢰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성령께서 인도 하심으로 우리는 길을 잃거나 방황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과 지성만으로도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성과 지성으로는 알 수없는 악한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악한 영은 늘 우리를 지배하고 넘어뜨리려 하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악한 영의 함정을피할수없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며 나같이 똑똑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귀는 지성인과 권력자를 지배합니다. 이것이 악한 영, 사탄의영입니다.
사탄은 원래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의 천사였습니다. 교만 때문에 하늘에서 쫓겨나 이 세상으로 내려와서 사람을 괴롭히는 영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악한 영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올무에 매여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141편 9절에 보면“…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140편 5절에 보면“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올무에 관한 말씀이 수없이 나옵니다. 시편35편 7절에보면“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64편 5절에도“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18편 5절에 보면“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탄이 놓은 질병의 올무, 사고의 올무, 미움의 올무, 거짓의 올무, 죄악의 올무, 음란의 올무에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수많은 마귀 사탄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삶의 올무를 끊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온갖 불의와 죄악과 멸망과 불행의 올무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사탄의 올무를 끊어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올무에 걸리게 합니다. 이것은축복의올무, 구원의올무입니다. 이 올무에 걸리면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올무에 걸리면 비천한 사람을 명문가의 가정으로, 저주의삶을축복의삶으로, 온갖더러운 삶을 거룩한 삶으로 변화 시켜주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지만, 마귀가 역사하면 악하고 더럽고 추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셔야 합니다. 영어로‘HolySpirit’이며, 히브리어로는‘루아흐( )’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심으로 놀라운 변화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의미 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감사를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인격에 가득 차면 우리의 삶이 행복해지고, 평안해지고. 건강해집니다.영국의 문학가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년)는“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고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하늘의 것도 얻고 땅의 것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하게 살기 때문에 불행할 일이 없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육신도 잘됩니다. 성령을 무시한 채 악한 영에 이끌려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일을 행하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바람, 은혜의바람, 축복의 바람입니다. 우리나라가 잘되고 가정이 잘되려면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성령이 없는 삶은 냉랭합니다. 세상의 영은 우리 마음을 차갑게 만듭니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친구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탄의 바람입니다.
성령은 불과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사랑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가정이 뜨거워지고, 교회가 뜨거워집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가슴이 열리고, 돕는 마음이 생기고, 감사의 마음이 불 일듯 일어납니다. 성령은 생수와도 같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수만이 우리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은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갈급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 줄믿습니다.
2천 년 동안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 교회에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뜨거운 바람이 불어 이 민족을 살리고, 한국 교회를 살리고, 북한동포를 살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늘 은혜로운 삶,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성령께서 인도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더럽고 불의하고 악한 사탄의 영으로 유혹받는 심령을 회개하게 하시고, 주님의 영으로, 거룩한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옵소서. 기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진리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희락이 가정마다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교회의 목적
김상복목사 / 행 2:37-47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존경과 칭찬받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다”(43절)고 하였습니다. ‘겁을 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를 그리스어와 영어성경은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말은 모두 ‘두렵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fear’라는 단어는 무서워하고 겁낸다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awe’입니다. 즉 존경심, 경외심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너무 훌륭해서 접근하는 것을 어려워하며 존경과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 믿고 점점 좋아지니까 주위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점점 좋게 변합니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화됩니다. 주위 사람들도 그런 우리의 모습을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는 중국의 공산당 간부양성소인 중국인민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해서 공산당 간부양성소에 신학과 기독교 상담학과가 생겨 하나님 나라 간부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생긴 것입니다. 중국의 기독교지도자들이 그곳에서 석사 공부를 합니다. 이번 강의 프로그램을 주관한 교수는 본래 공산당원으로 홍보부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1991년에 우리 교회 평신도목회연구원에서 강의했던 요한계시록 강의테이프를 구해서 듣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예수를 믿고 대단히 좋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도 그 테이프를 듣도록 권유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 제가 공산당 홍보부장인데 어떻게 그런 것을 들으라고 하십니까!”라며 안 들었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계속 테이프를 들으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를 매우 좋아하게 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꼭 아들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들이 “어머니, 기도하실 때 제 이름 좀 부르지 마세요. 저는 공산당 홍보부장 아닙니까!”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소리는 내지 않고 계속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테이프를 계속 권유하셔서 할 수 없이 테이프를 듣다가 그만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좋은 변화들 때문에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으니”(47절).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에 대한 소원이 있다면, 예수 믿고 변화하는 가운데 누구보다 먼저 가족에게 존경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밖에 나가서도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존경과 칭찬받는 사람이 되었나? 신앙생활을 잘 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어머니 때문에 아들이 믿은 것처럼, 변화된 우리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한 어머니가 존경과 칭찬받는 사람으로 변화됨으로써 22명의 가족이 다 예수를 믿고, 아들은 중국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중요한 기독교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모여서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 교회가 존경받고 칭찬받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면 자연히 이런 결과를 얻게 됩니다. 변화된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교회가 왕성해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새신자반’ 8주 과정에 2번 정도 강의를 합니다. 강의 첫날에 새교우들이 어떻게 해서 우리 교회에 오게 되었는지 소개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 해 동안 자주 들은 내용 중 하나가, 할렐루야교회에 오니까 교인들의 얼굴이 참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총애를 입고 존경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우리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나날이 더해질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성경공부를 합니다.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42절).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대신 권위와 능력을 부여받고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말씀을 직접 듣고, 그 인격을 체험하고, 하신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동참했습니다.
제자 중에 당시 세무서장을 한 마태가 있습니다. 세무서 일은 기록이 중요합니다. 마태도 늘 정확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마태가 첫 15년 동안 유대에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다 모아서 ‘로기아’라는 책을 썼고 후에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갈대)로 노란색 종이를 만들어 썼는데 지금도 이집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파피루스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마태는 작은 조각을 들고 다녔던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시면 마태가 그 자리에서 파피루스에 기록합니다.
복음서 자료는 어떤 것은 한 절, 길어야 다섯 절 정도의 짤막한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한두 장씩 차곡차곡 모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빌려 베끼면서 성경이 예수님의 교훈이 퍼져갔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기록을 했습니다. 판테누스라는 사람도 마태복음 한 권을 들고 인도에 선교를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베드로도 마태복음의 복사본을 가지고 로마에 가서 예수님에 대해 가르쳤는데 그 통역자가 마가복음을 쓴 마가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읽고 바로 마가복음을 읽으면 ‘이거 방금 읽은 건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단어나 표현이 같은 것이 많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로서 마태복음을 썼고, 마가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마가복음을 썼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의사는 과학자입니다. 정밀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누가를 찾아와서 진찰을 받았는데, 병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자기가 예수 믿는 선교사인데 멀리 선교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건강으로는 못 갑니다”라며 말렸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아니요, 나는 가야 합니다”라고 하자 누가가 “그럼 제가 따라가겠소!”하고 나서서 바울을 따라 전 세계를 다니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4절을 보면 본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조사해서 알아보았고 그것을 차례차례 정리해서 예수님을 분명히 알고 믿도록 누가복음을 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누가는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상황 등에 대해 마리아에게 들은 대로 기록했습니다. 사실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애기를 낳았느냐를 묻고 답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의사가 물으면 스스럼없이 다 이야기하지요. “이 모든 일은 마리아가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다”는 말들이 누가복음에 몇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예수님 제자 가운데 제일 어렸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18살 정도 밖에 안 되었고,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본인이 쓰면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잡수실 때도 바로 옆에 앉아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기도 하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은 AD 95년까지 제자들 중에 제일 오래 살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서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의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쓴 요한일서는 사랑의 이야기임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아는 제자들이 적어 놓은 말씀을 사도들이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자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평신도목회연구원’에서는 20년 동안 47과목을 공부했습니다. 그 교재와 테이프, DVD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면 사고방식이 변합니다. 그러면 말투와 말의 내용이 변합니다. 정서와 감정이 변합니다. 자연히 관점이 변하고 삶의 태도가 변합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우울하던 사람이 긍정적이고 격려를 잘 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왜? 믿음이 성장하니까요.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니까 힘과 용기가 생기고 자연히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생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생각이 옳아야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마음이 행복해야 인생이 행복해 집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 여러분의 삶에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고, 존경받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교제합니다. “서로 교제하며”(42절). 주일 아침 대예배는 교제의 시간까지는 못 됩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교회에 와서 몇 명과 대화하는지 꼽아보세요. 대개 일곱 명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축제의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영적인 힘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럼 교제는 어디서 하나? 사랑방, 선교회, 위원회, 찬양대, 주일학교 등에서 같이 섬기면서 교제하게 됩니다.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로서 내가 신앙생활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교제에도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교회는 예배를 드립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46절).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지키라,” “구별해서 지키라,” “따로 떼어 놓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참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 일생토록 아파서 드러눕지 않는 한, 타지에 가더라도 반드시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에 여기서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약속한 시간이니까요.
하나님만이 아니고 김상복 목사도 기다립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제가 여러분을 쭉 둘러봅니다. 대개 지정석이 있는데, 누군가가 계셔야 할 곳에 없으면 ‘아, 그 분이 없네!’ 하고 걱정이 됩니다. 지금도 한 부부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에 없어요. ‘어디 아픈가? 휴가를 가셨나?’ 별생각을 다 합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 “결혼식이 끝나면 주일날 꼭 와서 ‘우리 둘이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얼굴을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도, 목사에게도, 서로에게도 얼굴을 보일 때 ‘이 분이 오늘은 괜찮은가보구나!’하고 안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일에 여러분을 만나기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매일 예배를 드립니다. 가정 예배와 사랑방 예배를 드리지만 일주일에 전 성도가 같이 모여서 찬송하고 예배하는 날을 하나님께서 주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영적인 샤워시간입니다. 최소한 1년에 매주 한번씩 52번은 샤워를 해야 합니다. 365일 한 번도 안 하면 냄새가 나서 그 사람과 어떻게 같이 살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예수님께 나와서 조용히 앉아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서 영적인 샤워를 하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이어서 일주일에 한 번으로는 모자랍니다. 주일은 좋은데 월요일에 좀 괜찮다가 화요일, 수요일이 되면 흔들흔들합니다. 생각도 말도 태도도 부부사이도 흔들거립니다. 제가 보니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수요예배라는 것을 만든 것 같습니다. 수요일에 한 번 더 예배드리고 추슬러서 목요일을 지내고 금요일 밤에는 다시 모여서 기도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강화하고 주일에 또 만나는 것입니다. 계속 새로운 충전을 해야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잊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미국 목회시절에 의사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암에 걸리셨는데, 어느 날 예배를 참석했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중간에 나와 제 방에 와서 누우셨어요. 예배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신 후 저녁 8시에 자기 사랑방 식구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고는 그날 밤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배드리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헌신과 사랑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넷째로, 교회는 함께 기도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2절). ‘힘썼다’는 것은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기도가 안 됩니다. 시간도 내야하고 기도제목도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제목을 써 놓지 않으면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5분만 기도하면 할 말이 없어요. 제가 기도의 은사를 받도록, 기도가 터지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제가 기도가 터지도록 기도를 해드리겠지만 사실 터질 것까지는 없습니다. 기도가 터져서 저절로 줄줄 나오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 중보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어떤 사람들이 예수 믿고 신나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해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합니다. 어떻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한 것이 현실이 되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중국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지역에 비가 너무 안 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비오라고 기도하자고 특별기도회를 제안을 하여 교인들이 모였는데, 한 아이가 기도하면 비가 올 거라고 믿고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왔더랍니다. 믿고 기도하면 믿은 대로 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 기도를 해 본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기도를 안 해 본 사람은 경험이 없습니다. 금요철야기도회에 오셔서 마음을 모아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 사회와 내 직장과 가정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늘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중보기도는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다섯 손가락 중에 엄지는 자기를 위한 기도, 둘째 손가락은 다른 사람을 가리켜 이웃을 위한 기도, 셋째 손가락은 제일 기니까 높은 사람을 위한 기도, 넷째 손가락은 결혼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니까 내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제 어머니는 ‘우리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상호, 상철이, 상태, 순옥이, 상복이...” 하시면서 아침마다 9명의 자녀들의 이름을 한 명씩 다 부르고 저녁에 또 한 번씩 부릅니다. 저는 기도만 하려면 “상복이…”하고 부르는 어머님의 기도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제가 11살에 부모를 떠났는데도 아침과 저녁 시간만 되면 어머니가 제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 그것이 제 인생에 얼마나 큰 힘과 용기가 되는 줄 아십니까? 그래서 오늘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 갔을 때 제가 평양에서 와서 부모와 헤어져 혼자 살았고 하니까 어느 분이 “목사님은 그렇게 고생한 분 같이 안 보이는데요?”라고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돌봐 주셔서 그렇습니다. 그분은 제가 부잣집 아들 같다고 했는데,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부자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기도가 하나씩 응답되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 삶에 느껴지므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감사가 충만합니다. 왜? 기도하는 대로 되니까요. 힘써 기도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고 교회입니다.
다섯째로, 교회는 서로 돕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44-45절). 지금은 재산을 다 팔거나 하지는 않지만 사랑방 식구들이나 교구에서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 교회는 성미를 모으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 무슨 성미가 필요하냐!’고 한다면 모르시는 말입니다. 이렇게 풍성한 시대에도 우리 주위에는 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져온 한 줌 쌀에 저녁 먹거리가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 중에 제일 잘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복음을 전합니다. 본문에도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그때 베드로는 “회개하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죄사함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고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둘째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는데, 예수 믿는 표로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 받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완벽한 사람이라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성인(聖人)이 되었다는 표시도, 앞으로 잘못이 없을 것이라는 표시도 아닙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죄성이 있고 내 죄 때문에 나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내가 받아서 “내가 받았습니다”하는 마음의 고백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분은 신앙고백을 하는 그 순간 주저 말고 세례를 받으세요.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그 시간에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해지고 믿는 사람들이 증가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 성경, 교제, 예배, 기도, 구제, 전도하는 삶, 이것들이 교회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역입니다. 다른 특별한 것이 없어도 이 몇 가지 기본적인 것을 잘 해나감으로써 여러분이 존경받고 칭찬받아서 여러분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목적이 살아있는 교회
행 2장 37~47절 / 박봉수목사
오늘이 교회 창립 4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49년 전에 이 땅에 상도중앙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49년 동안 인도하셔서 오늘 이처럼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시켜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중요한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어떻게 이 상도중앙교회를 더욱 교회다운 교회로 발전시켜갈 것인가 하는 과제입니다. 어떻게 더욱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갈 것인가 하는 과제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외딴 섬에 등대가 있었습니다. 근처 바다를 지나는 배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불을 밝히기 위해 한달에 한 번씩 기름 공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근처 마을에 사는 아주머니가 집에 기름이 떨어져 가족들이 추위에 떨고 있으니 기름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등대지기는 마음이 좋은 사람이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경운기에 기름이 떨어졌다고 급히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좋은 등대지기는 몰라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월말이 되기도 전에 기름이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월말에 기름을 공급받을 때까지 등대 불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배들이 불편을 겪었고 끝내 배 한 척이 좌초되어서 여러 사람이 죽는 사고까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상급기관에서 책임자가 나와 이 등대지기를 조사했습니다. 등대지기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책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기름을 준 까닭은 단지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소. 그 목적이란 다름 아닌 등대의 불을 밝히라는 것이오. 아시겠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에 충실할 때 그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목적을 잃어버릴 때 그 교회는 결코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교회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은 전 세계에서 급성장함으로써 기업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회사의 성공 비결을 데이비드 슐츠 회장이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항상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확실하게 답하기 위해서 온 종업원들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다 보니 커피 맛이 좋아지게 되었고, 서비스 질이 최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성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적에 충실해야 합니다. 목적에 충실할 때 사업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목적에 충실할 때 목회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교회다운 교회로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요 10: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의 사역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늘 그 목적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빌 3:13-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의 사역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목적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도중앙교회를 더욱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갈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역시 목적에 충실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여기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목적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면 주님께서 여기에 왜 상도중앙교회를 세우셨을까요? 그 답은 보편적인 교회의 목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상도중앙교회의 특수한 존재목적은 보편적 교회목적 안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왜 세우셨을까요? 그 답은 주님의 사역 전체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직접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은 한 번 뿐이고 그 말씀에는 교회를 세우시는 존재 목적을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마 4:17) 이 말씀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속에서 시작하셨고, 그리고 이것을 누룩이 번져가듯 이 세상에 번져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서 계속해 가도록 훈련시키셨고 또한 위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힘썼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널리 퍼져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 든든히 세워져가도록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사탄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람들을 내세워 다스리고 통치하는 이 세상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 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나라 속에 널리 확장시켜 가도록 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사역의 목표가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이것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38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이 세상 나라에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전해야 합니다. 그 분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렸음을 전해야 합니다.
둘째, 예배하는 것입니다.
46절 이하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섬기는 이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으로 진리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왕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셋째, 가르쳐야 합니다.
42절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나라에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교제해야 합니다.
42절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먹고 함께 가진 것을 나누고 교제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나라 사람들과 달리 서로 사랑하며 하나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나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이루어가야 합니다.
다섯째, 봉사해야 합니다.
47절을 보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서 그 말씀대로 섬기면서 이 세상나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널리 확장시켜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사역 목표는 전도, 예배, 교육, 교제, 봉사입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의 존재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목적에 충실할 때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을 지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릭 워렌 목사가 쓴 "The Purpose Driven Church"(새들백 교회 이야기)라는 책에서 저자는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존재 목적을 잃어버린 것에 있다고 아주 확실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에 한 눈을 팔고 있기 때문에 무기력하고 정체와 침체 현상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목적 아닌 다른 것에 이끌려 가고 있다고 보면서 그 다른 것을 일곱 가지로 손꼽았습니다.
첫째, 전통입니다. 교회가 그 전통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고 본연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입니다. 교회가 특정 몇몇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목적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재정입니다. 교회가 예산에 발목이 잡혀서 목적에 맞게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프로그램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존재 목적보다도 정해진 프로그램을 가동하느라고 쩔쩔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건물입니다. 교회가 건물 짓는 일, 건물 보존하는 일에 신경 쓰다가 정작 교회의 존재 목적에는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행사입니다. 교회가 각종 행사를 치르느라고 목적과 동떨어진 일에 분주하고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구도자입니다. 교회가 양적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서 교회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마다 가만히 있지는 않습니다. 나름대로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해 보려고 애들을 씁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회다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각종 잡음이 들리고 힘겨운 문제에 사로잡힙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가 그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눈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존재 목적을 잃지 않고 그 목적에 충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적이 살아있는 교회로 지속적으로 발전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요 3:3을 보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임하고 있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 아닌 것에게 속아서 그것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중국선교 여행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영하 회족자치구의 은천교회에서 확인한 이야기입니다. 회족은 이슬람교가 민족종교입니다. 그래서 회족은 나면서부터 이슬람교도입니다. 만일 개종하면 가족이나 마을 사람에게 추방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회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성가대에 회족이 몇 사람 봉사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자원봉사자로 큰 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이슬람교 사원에게 가보니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랍니다. 전도를 받아 교회에 와 보니 목사님을 비롯해서 교우들이 지극정성으로 기도해 주고 자기를 돌봐주더랍니다. 그뿐 아니라 기도로 또 병까지 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어차피 죽을 몸이었다 살았으니 주님께 충성을 다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그냥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이슬람 회족들도 사랑하시고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곳의 대부분의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고 오히려 그 점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족을 사랑하신다. 저들을 구원해야 한다. 우리가 이 일을 돕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봐야 교회의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행 13장을 보면 최초로 선교사가 파송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세우라 하시니...”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미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 28:19)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증인이 되리라”(행 1:8) 저들이 “아멘”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무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기도하고 있는 안디옥 교인들에게 성령이 충만한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존재 목적에 충실하도록 이끌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존재 목적을 잘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려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 목적을 알아도 지속적으로 그 목적을 살아있는 목적으로 유지해 가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감숙성 난주의 오가원 교회를 찾았습니다. 위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작년 우리 청년들이 찬양집회를 통해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혔는데 그 후에도 자기들끼리 규모가 큰 극장을 빌려 집회를 했답니다. 300명 결신자를 얻었고 훈련시켜서 지지난 주에 세례식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7월 31일에 또 한다는 것입니다. 저더러 와서 말씀을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중국교회 지도자 가운데 몇 안 되게 교회의 존재 목적을 잘 알고 이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 까요 성령충만입니다. 이번에 보니까 역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상도중앙교회가 목적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목적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살면 다 삽니다
행 2장 37~47절 / 김삼환목사
교회가 살면 모두가 삽니다. 가정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삽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얼마나 귀한 생명입니까? 우리가 살 때에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와 사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 참된 삶,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교회가 살면 민족이 삽니다. 교회는 나라의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사회를 환하게 합니다.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파수꾼입니다. 교회는 모든 이 나라의 위기를 알려주고, 개인의 위기를 알려주고 예방하고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강과 같습니다. 강을 통하여 비옥한 땅이 만들어지고, 평야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열매를 거두듯이, 교회는 우리 모두에게 영육이 아닌 모든 분야에 자유와 번영을 주고, 평화와 번영을 주고, 안정과 번영을 주고,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다 같이 건강하고 비옥하게 만들어 줍니다.
교회가 살면 모두가 삽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 능력 있는 교회, 살아있는 교회, 정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라와 가정을 지켜주고, 우리의 방패가 되어 줍니다. 교회는 영적인 우리의 군대와 같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모든 악에서 지켜주는 가장 큰 무기는, 아버지 집에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흥망성쇠가 아버지 집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집에 나아와 내 개인의 축복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참으로 우리가 어떤 교회를 오늘도 영원히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꿈꾸고 바라보고 섬겨야 할 바로 그 모습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믿음으로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변화 받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열심으로 모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봉사하고 구제하는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교회는 구제와 봉사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우리 태안반도에 지난 주 월요일 날 우리 교인들도 1200명이 다녀왔습니다. 행자부 장관님께서 나오셔서 보고를 하시면서, 태안반도에 백삼십 만명의 우리 국민들이 다녀갔는데, 거기의 70%가 한국 교회에서 다녀간 거라고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모두 잘난 척하고, 말은 많이해도 막상 어려운 곳에 가서 도와주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교회입니다. 정말 교회는 봉사를 많이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손이 하는 것을 한 손이 모르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감추는 것이 미덕인 줄 알고, 너무 감추다가 이 세상에서는 ‘교회가 뭐하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줄 아는데 봐라, 말이입니다. 봐라, 말이입니다. 얼마나 많이 하냐 말입니다. 이것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봉사하는 기구에 70%~80%를 한국교회가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이든, 양로원이든, 지체장애인이든 간에 수많은 봉사를, 한국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전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예배가 살아 있었습니다. 많은 영혼이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핵심이 뭐냐? 바로 기도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항상 모여서 열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방이 있었습니다.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성령충만하여, 다락방은 예루살렘을 기도의 다락방으로 만들고, 온 세계를 구원하는 역사가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마치 화단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꽃을 보려면 물을 주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물을 잘 주어서 돌볼 때, 좋은 정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정에 정원을 만들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정원같은 교회로, 이 국가를 에덴 동산같은 정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라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유럽을 가보신 분들은 그 곳에 살고 싶은 마음을 느끼시지요? 미국을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국은 농촌과 도시의 차별이 하나 없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야,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너무너무 아름답다.’ 그럽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이 동산입니다. 그들의 사회가 동산입니다. 그들의 문화가 동산입니다. ‘야, 에덴동산 같구나!’ 무엇으로 이루었을까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믿고 나아가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 곳이든지 에덴동산같이 만들어 주십니다.
부부간에도 기도해야 사랑이 살아납니다. 시들지 않습니다. 물을 주어야 화초가 시들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발표하기를, 인간이 이성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일 년, 그리고 결혼해서 제 아무리 사랑한다 할찌라도 구백 일이 지나면, 동이 난다라는 겁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거기까지 밖에 못간다라는 겁니다. 하나의 목표물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라는겁니다.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없는 최고의 결혼식을 올려도 그 사랑은 계속 가뭄이 들고 시들게 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기도의 물을 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평생 사랑하는 마음의 이유가, 내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공급하는 힘으로 내 심령이 은혜를 받아 사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영혼은 강과 같습니다. 샘솟는 이 샘물과 같은 은혜가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에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할렐루야!
외롭고, 공허하고, 메마른 것이 우리의 심령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성령의 단비가 부어지고, 은혜의 단비가 부어지고, 믿음의 단비가 부어지고, 기쁨과 소망의 단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영혼은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생명이 있는 영혼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기도하여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하듯이, 오늘 우리는 이 사회와 이 민족 앞에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힘있게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에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 사회는 이렇게 지식이 발달하고, 잘살고, 환경이 좋아지고, 고속도로가 열리고,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많은데도, 우리 마음에는 공허와 외로움과, 그리고 긴장과 불안감이 넘칩니다. 더구나 요사이는 화풀이와 내 안에 원한이 맺힌 사람이 그렇게 많답니다. 이번에 남대문에 불을 지른 그 노인처럼, 어제 제가 기사를 보니 오늘날 길에 다니는 사람들중 기름통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라는 겁니다. 어디 불지를 곳이 없는가?
지난 일년 동안 방화사건이 2537건이 일어났습니다. 전문적으로 불 지르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천안에 있는 유모씨는요, 식당이나 계단이나, 집에다가 지난 12월부터 14곳의 건물에다 불을 질렀답니다. 왜 그러느냐? 자기 마음에 불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속에 막~ 화가 막 밀려오는 겁니다. 아무것도 그럴게 없는데, 불 지르고 싶은 겁니다. 저 집을 불 지르고 싶은 겁니다. 청도에 있는 어떤 분은요. 자동차마다 펑크를 내는 겁니다. 기계를 가지고가서 기술적으로 뚫어버리는 겁니다. 이 사람은 뇌졸중으로 지난 1991년에 오른쪽 발과 팔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이 되가지고, 이걸 사회에다가 다 책임전가 하는 겁니다. 너 때문이다! 이래가지고 차만 보면 막 펑크 내고 싶고, 불 지르고 싶고, 긋고 싶고, 이런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젊은 세대부터 온 나라에 이글이글 한다라는 겁니다.
지금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무서운 세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악해지고 강퍅해졌습니다. 죽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살인 사건이 말할 수 없이 많이 일어나는 겁니다. 범죄 심리가 막 일어나고 대부분이 화풀이성 범좌라는 겁니다. 오늘 왜 모두가 이렇습니까? 우리 마음에 불을 누가 꺼주겠습니까? 이 증오와 미움에 불을 누가 꺼주겠습니까? 우리는 몇 년동안 더 심각했습니다. 계층간에 서로 싸우고, 온 국민이 데모를 하도록 부추기고요, 정부는 또 데모하는 사람 돈까지 다 대줬습니다. 질러라! 불질러라! 경찰 향해서 그냥 막 찔러라 죽여라! 온 국민에게 머리띠를 두르도록, 전부 길거리로 나오도록, 언론과 이 나라에 지도자들이 부추겼었습니다. 자기들도 일선에 나와 가지고 막~ 공격적인 말을 막하는 겁니다. 전부 이렇게 막 하는 겁니다. 이래서 이 사회가 이렇게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아프리카 에도 없는 아무리 미개한 사람들에게도 없는, 이 증오심이 우리나라에 꽉 차있습니다. 우리만 아닙니다. 지나간 세대까지 다 들추어 내 가지고 전부 불 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불을 누가 끄겠습니까? 이 자녀의 가슴마다, 젊은이의 가슴마다, 이 미움과 증오에 보기만 하면 죽이고 싶고, 태우고 싶고, 찌르고 싶고, 이런 이 마음들 누가 제거하겠느냐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섭다는 겁니다. 전부 휘발유통을 들고 다닌다고 하니 이걸 누가 이렇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나는 어떤 목사님들부터로 도와 달라는 편지를 많이 받는데, 증오심을 가진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무섭습니다, 거기다가 그냥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막 잔인한 말을 해대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가 전체적으로 이런 마음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마귀가 주는 마음이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입니다.
주님에게로 돌아와서 우리 마음이 새로운 은혜의 단비를 받아서, 소생하고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간다 그랬습니다, 기도하면 내 마음이 살아나서, 슬프던 마음이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절망에서 소생하고, 증오심이 사랑으로 다 바뀌고 감사로 바뀌고, 원망과 불평이 감사로 바뀌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께로 나아와야 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 국회의사당에는 기도실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기도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바빠도 항상 기도합니다. 기도의 시간은 짧아도 효과가 큽니다. 굉장히 귀중합니다. 짧은 기도가 내 모든 전체의 삶에 에너지로 충전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찾아옵니다. 은혜가 찾아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오늘 이 어려운 때에 제가 참 좋은 지혜있는 삶을, 말씀 드릴려고 합니다. 말씀드릴까요? 안드릴까요? 예, 하하하...
이번에 이 방화가 정부 종합청사에도 또 방화가 일어났습니다, 불이 났습니다. 이 불은 앞으로 어디든지 불이 날 수 있는 가능성이 다 있기 때문에, 우리도 불하면 먼저 소방서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불나면 몇 번을 돌리지요? 117? 아, 119입니다. 맞습니다. 119를 돌려야 됩니다. 그리고 범죄는 112, 경찰에다가 빨리 연락해야 됩니다. 그러나 경찰보다도 더 좋은 것, 소방서 보다 몇 배 좋은 것이 어디 있느냐? 바로 여러분이 소방관이 되면 됩니다. 집에다가 소화기를 하나만, 몇 개만 이렇게 갖다 놓고 있으면, 불이 났을 때, 불은 초기 5분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이 났을 때 5분 내에는 누구든지 끌 수 있는 겁니다. 소화기만 가지면 불의 99%는 다 끌 수 있습니다. 처음 붙었으니까, 끄기도 쉽습니다. 어떤 불이든지 끌 수가 있는 것이 소화기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안전핀 빼고 그냥 당기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5분이 지나 가지고, 소방서가 도착하면 온다한들, 그 때는 소방차가 30대가 오더라도 시간 지난 거는 못 끈답니다. 이번에 그 보세요. 우리나라 모든 소방기구 다 달려들어도 남대문, 결국 못 껐지 않습니까!. 나는 내 혼자서 다 끌 수 있는데, 신고해 가지고 오는 것은 이미 다 늦습니다. 첫째로 위험한 게 불인데, 집안에 불을 늘 켜놓고 있는, 가스가 늘 있는데, 실상 그 가스불이 일어났을 때, 대비는 전혀 안 한다는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돈도 몇 푼 안듭니다. 그래서 그 소방서 이야기가, 우리가 가서 불을 끈다하더라도, 소방 호수에서 나가는 그 물길이, 그리고 그 그슬린 냄새가 모든 의복을 못쓰게 만든답니다. 완전히 배어 가지고 완전히 못쓰게 만들고, 백화점에 예를 들어 불이 났다 그러면, 불이 안난 층에 있는 것도 다 못 쓴답니다. 왜? 그 냄새가 배어 가지고 다 버리게되는 겁니다. 음식물도 다 버린답니다, 몽땅 버리게 되어 있답니다. 불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옆집에 불이 붙어도, 우리 집에 그 냄새에 그만 완전히 다 못쓰게 된다라는 겁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피해를 소방서만 믿고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끄면 되는 겁니다. 5분이면 끌 수 있는걸, 늦어서 모두 버리게 되지 말라는 겁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문단속하면 모두 괜찮은걸 문단속안하고, 이미 다 털리고 나고, 강도질 당하고 모두 넘어지고 갔는데, 경찰이 와봐야 병원으로 옮기는 일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스스로 해야 할 것은 스스로 해야 한다라는 겁니다. 내 할일 건강도 그렇습니다. 건강도 서울대학병원 삼성병원 10개 가지고 있는 것보다 스스로 건강을 조심해야 됩니다.
제가 술먹고, 몸을 함부로 하는데, 천하에 유명한 의사가 다 달려들어도, 고칠 수 있냐?라는 겁니다. 성경은 언제나 네가 스스로 책임지라는 겁니다. 네가 복의 근원되라는 겁니다. 네가 네할일은 하라는 겁니다. 은행 10개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제가 살림을 아껴 살고 절제해 살고 아껴 쓰면, 제가 은행에 신세질 일이 없어진다라는 겁니다. 아무리 새 정부가 들어선다 할찌라도,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들어선다 할찌라도, 제가 알코올 중독되고 제가 마약 중독되면 대통령이 건져 낼 수 있냐하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에 모든 문제는 스스로에게 달렸다 스스로가 복의 근원되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변을 의지하지 않게 만들고, 내 스스로 내 길을 걸어가게 하고, 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잠깐의 기도지만, 그러나 하루 종일에 안전을 주시고, 내 모든 사건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별거 아닌것같지만 짧은 그 시간에 내 필요한 에너지 공급을 받는 겁니다.배터리를 충전할 때 잠깐이지마는 제가 부산까지 갈 수 있는 힘을 그곳에서 얻는 것처럼, 기도의 골방은 바로 우리를 모든 위기에서 건져주시고, 잠깐의 기도지만 내 생애를 건강하게 만들고, 힘있게 만들고, 위기에서 건져주시고, 환란에서 건져주시고, 질병에서, 저주에서, 건져주신다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기도할 때 아말렉을 이겼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앗수르를 이겼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므로 모든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었듯이,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최고의 지성이요. 위대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우상에게 비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앞에 기도하는 것은 인류역사에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대통령 인수 위원장 하신 분도 숙대를 기도의 총장실로 만들었습니다. 숙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에 라이스라고 하는 국무장관도 목사님 딸입니다. 가난한 흑인의 딸이었지마는, 아버지를 통하여 기도를 배워서 최초로 흑인이 미국에 국무장관이 되어서 훌륭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당선되신 대통령도 기도의 사람입니다. 새벽을 항상 어머니가 새벽 4시에 깨워서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고, 우리 교회에서도 간증하셨습니다. 책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미군이 쓰던 그 담요 모포 헌 담요를 가지고, 포항제일교회에 가서 밤을 세워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 가난한 가정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아들 모두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 어머니가 배우지 못해도,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 능력있는 사람이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이도 대통령 만들었는데, 여러분은 자녀 한 두 명도 이 도시에서 잘 기르지 못해가지고, 과외시키고 쩔쩔매고, 애들하고 밤낮으로 싸움이나 하고 말이지, ‘이 놈의 새끼야, 이 놈의 새끼야’ 그런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안싸워도 됩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의 방!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너무 호화로운 방이 많으면서도, 기도의 방은 없습니다. 요사이 아파트며, 별의별 룸이 다 나옵니다. 드레스 룸, 화장하는 룸, 뭐 하는 룸, 하여튼 룸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 중에 기도의 룸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의 다락방이 있어야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역사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찾으라 찾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새벽기도는 더욱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새벽은 어두움이 물러가는 시간 아닙니까? 성경에 놀라운 사건이 모두 새벽에 이루어졌다고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아브라함도 모리아산에 올라갈 때 새벽에 올라가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새벽에 갈라졌고, 이스라엘의 해방도 새벽에 이루어졌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도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새벽입니다. 새벽은, 은혜의 시간이요, 기적의 시간입니다, 어두움이 물러가는 시간입니다. 새벽을 깨우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모두 연약합니다. 오늘 이 나라가 엉망이 된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조금 알았다고, 조금 가졌다고 교만한데서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산다고 교만하고, 무엇을 얼마나 가졌다고 교만하고,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교만할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승리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번에 우리 축구팀이 저 중국하고 싸워가지고 3:2로 중국에 이겼습니다. 우리의 기술 감독 이영무 목사님이 그 게임 앞에 두고 ‘목사님 30분 전입니다 기도해 주세요.’하면서 중국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제가 기도해드렸습니다. ‘이번에 승리하게 해 주시고,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겼습니다. 이번만 아닙니다. 카타르라고 그전에 몇 번 이긴 경기마다 연락이 왔습니다. 기도 안할 때는 졌습니다. 기도 여러번 해드렸습니다. 외국에서 전화 하는 겁니다. 막 급하게 찾는 겁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유럽에서도 기도해 주세요, 아프리카에 가서도 기도해 주세요, 여기하고 시간이 안맞을 때, 막 밤 인대도, 목사님 지금 10분 전입니다, 기도해 주세요.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스포츠라고 기술로만 되는 줄 압니까? 스포츠도요, 이기고 지는게 요만한데 달렸습니다. 기업이라고 기술로 되는 줄 압니까? 비지니스가 꼭 머리 싸움인줄 아십니까? 요만큼만 안 맞아도 그만 사업 무너지는 걸 알아야 됩니다. 정치고 뭐고 이 세상에 이기고 지는 것이 한 순간 아무것도 아닌 일에 결정되는 겁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빨랫줄과 전깃줄의 차이는 줄은 같은 줄인데, 빨래 줄은 전류가 흐르고 에너지가 흐르고 파워가 흐르고 아니, 빨래 줄에 반대지 참, 제가 참, 들어보시면 모릅니까? 그거요 예, 아이고 참, 언제 웃겠습니까! 이럴 때라도 웃습니다 여러분! 하하하... 설교시간에도 참 은혜 받으면 우리 마음이 웃음도 나와요, 사람이 웃기도 해야지 이거 안웃는거요, 보통 병이 아닙니다. 확 웃고 교회에 나와서 이래 털어야 됩니다. 다시, 다시, 시작하니 들어봐요, 빨래 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줄은 줄인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전깃줄은 흐르는 겁니다, 할렐루야! 막 웃고 이 분위기가 살벌한 이 세상에, 예수 믿어서 전기 줄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막 흘러가는 겁니다.
한나가 기도해서 아들을 낳고, 성경에 기도해서 안되는게..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은 이 세상에 가장 비극의 사람, 어려운 사람, 고난의 사람, 환란의 사람, 억울한 일도 이렇게 많을 수 없지마는 그는 기도해서 다 이겨냈습니다. 기도하면 이겨 낼 줄로 믿습니다. 시편118편 5절 “제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40편 2절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면 주십니다. 저희 교회가 개척할 때 쫓겨나서 갈데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지마는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계신 아버지가, 창조주 아버지가, 야훼 하나님이, 제가 어려서 부터 부르짖던 나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저는 이명박 장로님에게도 정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청와대 안에서, 뭐 미국 부시하고 전화하고 뭐 후나깐지, 다나깐지 뭐 그런 사람들 자꾸 전화하고 이런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아버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그러고 눈물 흘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5년 동안 지켜주실 겁니다, 분명히 지켜주실 겁니다, 국민들은요 믿을 수 없습니다. 한 순간에 변하는 것이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끝까지 기도해야, 여호와께서 그 오른 손을 잡아 주셔서 아무도 해치지 못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도와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됩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36장 37장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실 그 미래에 큰 환상,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한번 다 찾아 보겠습니다. 에스겔서 제 36장 25절서부터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에스겔서 구약 성경입니다. 36장 25절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말합니다. 정말 어려웠던 이스라엘을 이렇게 회복될 미래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같이 25절서부터 1207페이지 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할렐루야!
너희에게 새 마음 주겠다, 너희에게 새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에게 맑은 물로 너희에게 씻겨 주듯이 정결하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너희 우상 섬김에 그 모든 저주에서 너희를 건져 주겠다라는 말씀이, 에스겔을 통하여 주시는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영적 회복입니다. 영적 회복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 회복이 오면, 육적 회복도 반드시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회개하면, 육신의 삶에도 축복이 따라오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따라옵니다. 그 다음 읽어보면 육의 회복이 나옵니다. 29절서부터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제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것이며, 또 나무에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양식을, 너희에게 궁핍함을 끝나게 하겠다. 하나님께서 이 국가에 모든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거는 밑으로 내려갑니다. 35절서부터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35절 36절 시작,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더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너 에덴동산같이 만들어 주겠다. 너 잃은 가정과 국가 회복해 주겠다. 할렐루야!
이 나라는 지금 에스겔36장에 회복의 은혜가 와야 됩니다. 우리 심령에도 와야 되고, 우리 국가에도 와야 되고, 경제에도 와야 되고, 이 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회복이 와야 할 때입니다. 어디 한 분야의 회복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모든 일에 회복을 주님이 내려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방법이 나옵니다. 너 이래야만 내가 주겠다, 그러는 것이 그 밑에 나옵니다. 읽는 길에 다시 37절 한 절만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제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보십시오. 그 위에 있는 수많은 약속이, 내가 이렇게 약속했지마는, 네가 내게 구해야 주는 것이지 구하지 않으면, 안준다 그랬습니다.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입니다. 기도하면 주시는 겁니다. 구하라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사람에게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시간을 가지면, 사람에 그렇게 하소연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는 창문으로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경제도 회복이 되고, 부부사이에 다툼도 해결되고, 이 막혀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길은 기도에서 찾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 다 선진국입니다. 과학자들입니다. 나사국에 세계 과학자가 제일많습니다. 나사국, 기도하는 사람 제일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기도하여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고, 여러분의 가정에 번영과 예루살렘의 축복이 우리 교회 이 민족위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성도, 이렇게 삽시다
이성우목사(왜관교회) / 행 2:38~47
오늘은 평신도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 감리교단은 1979년도부터 평신도 주일을 정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리고 청지기로서 선교와 봉사를 통하여 안으로는 개인과 교회 성장에 이바지하고, 밖으로는 사회구원의 밀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쓰임 받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 개인의 경건과 절제를 배워서 개인적인 성화와 사회구원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고자 하는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주일은 평신도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재인식하고 결단을 새롭게 하는 계기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평신도를 새롭게 세워 나가는 평신도들의 생일입니다.
교회 안에는 크게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들입니다. 또 한 부류의 성도는 평신도들입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목회자들이 성직자로서 교회를 위해서 전적인 헌신을 하는 것에 비해서 평신도들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구원해 나가는 일에 앞장서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이 세상의 처음 교회 성도들의 생활 상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2장 38절~47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새롭게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깨닫고 결단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가기를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이 있음을 오늘 본문 말씀이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 가운데, 우선 첫 번째는 본문 37절~38절 말씀이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서 성령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감으로 영원한 죽음을 향해서 인생을 달려가던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삶의 방향을 돌이킴으로서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는 거룩한 결단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정죄를 당하지 않는 죄 사함의 기쁨과 함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며,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 가운데, 두 번째는 본문 42절 말씀이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삶의 모습은 세 가지 측면에서의 교제와 사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거룩한 교제와 사귐을 통해서 영혼의 양식을 날마다 공급받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로서 영혼의 만족과 건강함을 통해서만 근본적인 행복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날마다 꿀 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과의 교제와 사귐을 더 부지런히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또 하나의 교제와 사귐은 바로 함께 성도가 된 형제자매들과의 거룩한 교제와 사귐을 통해서 서로를 견고하게 믿음으로 세워주고 영적인 동지로서 연대함으로 영적인 선한 싸움을 잘 싸워나갈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탄과의 거룩한 싸움을 함께 연대해서 싸우도록 함께 부름 받은 영적인 전사들이며, 형제자매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영적인 가족구성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지금보다 더 성도들 간의 교제와 사귐에 열정을 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44절~4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인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간의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함께 모이는 일과 자신의 소유를 팔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힘썼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더 많은 것을 모으고 소유하는 일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일에 힘씀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또 하나의 교제와 사귐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깊고 친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인 기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소위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이며 영혼의 호흡이라고 믿음의 선배들이 가르쳐 주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건강하고 행복한 동행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 46절과 47절 상반 절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에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유대인들은 율법의 형식과 관습에 의해 날마다 성전에 의무적으로 모여서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렸으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이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하는 일에 힘썼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 가운데, 세 번째는 본문 47절 말씀이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초대 교회 성도들의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받을 만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 주었습니다. 이처럼 정말로 성령 충만한 성도라면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게 됨으로써 온 백성들의 칭송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서 성령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삶을 살며,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삶을 살아간 결과로 맺게 된 열매가 바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 하게 되는 초대교회의 부흥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셨음을 본문 47절 말씀이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들이 잃어버렸거나 일그러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합당한 삶의 모습의 원형을 되찾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삶도 그렇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건이나 기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본래의 모습에서 느슨해지거나 뒤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모습이 뒤틀어지거나 볼트의 조임이 풀려서 느슨해진 상태를 발견했다면 서둘러서 그것을 바로 잡아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오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써 과연 내가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잃어버렸거나 소홀히 하고 있는 삶은 무엇인지, 본래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모습은 없는지를 살피심으로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첫 믿음과 첫 사랑을 회복하여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로 그 교회!!
행 2장 38~47절 / 박정식목사
요새 여성학자 박해란씨가 쓴 책 가운데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나이가 드는 증상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번 비교좀 해보지요.
에너지가 고갈되어 감을 느낄 때, 새로운 일을 꾸미기가 두려울 때 젊은이들이 이뻐 보일 때 젊은이들이 막 지나가는데 '야! 참 좋다.'그럴 때,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못할 때, 분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연민이 채워질 때 젊었을 때는 남편도 '아 저 인간'했는데 이제는 늙으니까 '아! 불쌍해라' 라고 바뀐다는 거예요. 그밖에 몸이 말할 때 등 이렇게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증상들을 또 몇 가지 이야기했는데 그중에 첫 번째는 달콤한 것이 입맛에 당길 때, 두 번째는 아홉시 뉴스를 보다 잠이 문득 들 때, 세 번째는 오후 늦게 커피를 마실때면 잠이 도무지 안 올 때 네 번째는 하룻밤을 새면 몸을 추수리는데 일주일이 걸릴 때 그 다음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자리가 나기만을 노릴 때 이미 늙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몬드 보봐르가 쓴 책 가운데 「노년」이라는 책 가운데 거기에서 보니깐 노년의 증상이 뭐냐면 모든 호기심을 다 상실하는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노년이 계십니까? 우리교회는 16년이 되었으니깐 이팔청춘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신선한 호기심과 영적인 갈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마 예배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충격 받는 분도 계실겁니다. '이게 지금 바로 온거냐, 안온거냐?' 그런데 지금 미국교회 예배스타일은 다 이런식으로 드립니다. 이렇게 다 예배드리고 하는데 우리는 오늘 교회 생일이기 때문에 한번 이렇게 해봤습니다. 정말 다이나믹하고 감격적인 예배를 우리가 어떻게 드릴것인가를 날마다 힘쓰는데 성시교독, 사도신경 다 뺐습니다. 이것 때문에 또 '어 이상하다.'이미 나이가 드신 것입니다. 항상 '어 그럴수도 있구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모든 상황과 내용들은 조금씩 바꿀수 있는 그래서 미래를 준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가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아멘..
옆의 계신 분과 인사한번 할까요! "오늘은 우리교회 생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말은 1970년대에 시카고에 있는 트리리티 신학교의 교수였던 길버트 빌지키언이 자기 클라스 학생들에게 향한 자기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정말 위대한 비전의 불꽃을 지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클라스에 있는 학생들에게 사도행전 2장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제로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그 성령의 능력 속에서 모든 성도가 서로 상호 사역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비전을 일궜습니다. 그들은 가슴속에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전세계에 나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그들의 마음을 여셔서 그들을 하나 하나 구원하셨고, 또 그들은 서로 섬기면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날마다 사랑과 은혜가운데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복음을 증거하고 서로 약한 지체를 어루만지고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부흥을 일궈냈습니다. 바로 그 공동체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의 교회는 매일 반복되는 동일한 메시지들, 무미건조하고 삶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동떨어진 메시지들, 경직되고 굴절된 신앙의 자세들, 감동이기 보다는 오히려 왜곡되고, 위축된 우리의 가슴들, 예배당 문을 나서면 감동과 비전으로 가득채워진 어떤 크리스챤의 모습이 아닌 위축되고 오히려 더 주눅되는 크리스천의 모습들 전도란 가끔 내가 하긴 해야되는데 하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무리들,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날마다 더 증가되는 공동체의 모습. 그게 바로 오늘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왜 이렇게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와 오늘의 교회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성령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감히 제안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동일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정말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서 이런 불꽃같은 헌신을 드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지금도 그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군가가 그 비전에 횃불을 가슴에 담기를 바랍니다."
거기 있던 수십명도 안돼는 작은 학생들 중에서 한사람의 가슴속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정말 그 일에 부르셨구나! 내 삶 속에서 정말 그렇게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하나님의 공동체를 완성하면 어떨까?' 그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고 그 교회가 부흥하는 그런 놀라운 확증을 가진 바로 한 사람 바로 유명한 빌하이벨즈였습니다.
그가 20대 초반때 이불을 가슴에 담은 것입니다. 그 불을 가슴에 담고 하나님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처음부터 그 교회가 성장했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불과 몇 년만에 분열되는 갈등도 겪었습니다. 교역자들이 반 이상 떠나가고 수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서 교회를 떠나 버렸습니다. 또 얼마 안가서는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수많은 빚을 져야만 했습니다. 수백만달러의 빚 때문에 그들은 정말 허리가 휠 정도로 고통을 많이 겪기도 했습니다. 위기와 고통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몇 년 십년 동안 자신의 모든 정성과 열정을 다해서 함께 세워놓은 동역자들이 정말 하루아침에 그들을 떠나가고 거리가 단절되는 고통들을 수없이 맛보았습니다. 그 과정을 그들은 눈물의 골짜기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어느덧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고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15년이 지난 다음에 정말 위대한 교회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지금에는 2만명이 넘는 성도들, 전세계속에 정말 멋진 비전을 나누는 교회로서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교회구나!' 라는 것을 검증하는 교회로서 지금도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처어치입니다.
우리는 흔히 너무 숫자놀음에 그냥 세뇌되었습니다. '흥! 별거아니네!' 우리 한국에는 10만 20만도 있는데 미국교회에서 2만명이면 한국교회에서 100만명도 넘는 파워를 갖습니다. 성도가 2만명이지만, 그들에게는 7천명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7천명이 매주 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성도와 모든 세상을 섬기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얼마나 많습니까? 30%가 넘는 사람들이 그 교회의 동역자로서 팔 걷어 부치고 세상을 향해서 이웃을 향해서 섬김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나왔던 바로 이 교회가 지금 이 시대에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사람 릭워렌 목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도 젊은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목적을 쫓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우고 정말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런 교회가 없을까? 이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러다가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일년동안 교회성장에 대해서 하나님의 모든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책들을 보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공통분모를 찾아냈습니다. 그중에 제일 첫 번째는 하나같이 성장한 교회는 한 목회자가 10년, 20년, 수십년 동안에 자신의 전부를 받쳐서 그 교회를 세웠다는 것, 또한가지는 그 동역자들을 세워서 그들이 그 교회를 위한 거룩한 섬김의 삶을 감당했다는 것 그럴 때 그 교회는 다음 세대까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수 있었다는 것 건물이 아닌 사람에게 모든 열정과 관심과 애정과 비전을 쏟아 부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분이 일년만에 정말 무수한 책들을 대하면서 얻어낸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도 이런 교회를 세워야겠다.' 그리고 그는 자기 고향이 아닌 전혀 낯선 캘리포니아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새들백 처어치입니다.
지금 2만명이 넘는 성도와 만명 가까운 동역자들이 그 교회를 섬기고 그 지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꿈꿨던 교회 그것은 어떤 한 인간의 야망도 아니고 한 인간의 비전도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비전이었고, 성경이 말씀하는 거룩한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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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왜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셨습니까?
무엇때문입니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가 천당가는 것이 우리의 끝입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에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한사람 한사람 피로 값주고 사시고 그들을 하나하나 불러모아서 그분의 공동체, 그분의 몸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천당가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공동체란 말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바로 세워질 때 우리의 신앙도 바로 세워지고 우리의 삶의 가치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당신의 믿음이 좋고 아무리 당신의 복음에 매료된 삶을 살아도 공동체가 그런 비전과 열정을 소유하지 못하면 당신은 사실상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과 공동체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내게 붙은 이 거룩한 비전이 공동체를 통해 나타나야 되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선포될때만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공동체안에서 검증되어야 되고, 공동체를 통해서 확장되어야 하고, 공동체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신앙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습니다. '난 지금 죽어도 천당가니까...' 이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공동체를 통해서 증폭되어야되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부름받은 거룩한 특권뿐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는 보냄받은 소명이 있다는 것을 가슴 속에 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혜의교회는 1986년도 첫째주에 창립되었습니다.
지금 16주년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빌하이벨즈나 릭워렌처럼 제가 가슴에 불을 담고, 나름대로 교회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또 교회를 이렇게 일구어야 겠다는 꿈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무지목매하게 너무 막연하게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제가슴에는 불이 있었습니다. 그 불이 뭐냐하면 성령의 역동성이었습니다.
성령의 다양한 사인과 그 사인을 통한 감격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낮은데서, 어려운데 가서 이 성령의 역동성이 드러내기만 하면 뭔가 든든한 일이 일어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천막교회때부터 괭장한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정말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성령의 능력들, 증거들이 많았습니다만, 그러나 2년만에 은혜의교회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도무지 변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2년 가까이 되어서 30여명이 되는 성도들이 모였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갈등과 분열과 하여튼 이 문제들이 쉴새 없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지금보다 심방을 더 가졌습니다. 30명의 교회인데, 하루에 한집을 몇 번씩 다시 방문하곤 했습니다. 오전, 오후 그리고 야밤에, 한집을 여러번 하루에도 방문했습니다. 그렇게 문제가 많아서 매일 갈등, 매일 다툼, 한사람 빠지고 한사람 나오고 또 두사람 다 빠지고 이런 문제들이 시도때도 없이 벌어졌습니다.
가정의 불화들, 삶의 여러 가지 버거움들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그분들을 섬겨도 도무지 변하지 않은 현실 때문에 제가 탈진해 버렸습니다.
목회가 징그러워졌습니다. 정말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우리가 변화되고 멋진 천사는 아니지만 변화된 삶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고 섬기고 정말 나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나보다는 공동체를 위해서 어떤 나의 프라이드나 어떤 나의 인격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런 거룩한 비전을 갖는 사람들로 채워질줄 알았습니다.
공동체보다는 내가 앞서고 너보다는 내가 우선이라는 이상한 모습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갈등은 끝이 없었습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시험을 들고, 사소한 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결국은 교회 자체가 와해되는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끝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것이 1980년도 하반기였습니다. '이제 내 능력은 여기까지가 한계구나! 나는 이곳에 사실 하나님이 보낸게 아닌데 나름대로 젊은 객기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경험을 다시 쌓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큰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가서 잘 섬기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교회를 섬겨야 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체념했습니다. 그러나 보고는 해야되잖아요. 하나님 앞에, 그래서 보고하기로 작정하고 기도원을 올라갔습니다. 기도가 됩니까? 일주일동안 굶는데 결과를 만들어놓고 기도한다는게 그렇게 힘들줄은 그때 알았습니다. 기도하다가 굶다가, 굶다가 기도하다가........ 나중에 너무 힘들어서 성경책을 꺼내놓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책 말씀속에 제 가슴에 거룩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마다 성경을 읽었는데 전혀 다른 개념의 말씀이 제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말씀입니다.
정말 초대교회는 성령이 역동하는 교회였지만, 그 역동하는 교회가 지금까지 제가 이해했다는 것은 방언 말하고 능력가지고 예언하고 서로 은사 가지고 능력행하는 교회인줄 알았는데, 그 교회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제 가슴에 와 닿은 것입니다.
참 똑같은 교회였지만, 이 교회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동적으로 역사하면서 그들은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잖아요. 환란과 핍박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을 향해서 그들의 정말 두려움없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거리끼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만해도 날마다 3천명, 오천명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그들은 서로 자기를 버리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공동체를 앞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세상을 섬겼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안되는거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 가슴이 파악 막혔습니다. 왜 똑같은 교회인데 안될까? 그러다가 사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복음서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가르치는 장면들일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을 저도 읽었습니다만은 그때마다 제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주께서 병을 고쳤다. 귀신을 내어쫓았다. 오병이어를 베풀었다. 그래서 밤낮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병 낫게 해주십시오. 우리 교회 제일 처음 나온 집사님이 한손이 좀 불구셨습니다. 이분의 소원은 그 팔이 낳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분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녁마다 기도하는데 손을 얹고 안수하고 조금 펴지는가 하면 다시 구부려지고 그랬습니다. 어떻게서든지 천막이 변해서 멋진 건물이 안되겠습니까? 오병이어 항상 그런데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읽다가 전혀 다른 단어에 제 시선이 고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쳤다."는 단어였습니다.
헬라어로 "디다케"라는 말인데 말씀을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그런데 똑같은 성경을 봐도 사람이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자기가 어떤 가치관으로 보는가가 정말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르쳤다에만 동그라미를 계속 치면서 읽었습니다. '가르쳤다'가 '기적과 이적'보다 아홉배가 더 많았습니다. 9:1의 빈도입니다. 그런데 기적과 이적조차도 기적과 이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오병이어!!
여러분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에 남은 그 사건이 그냥 그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떤 메시지입니까?
예수께서 당신의 살과 피로 즉 살을 찣기고, 피를 흘리므로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당신의 구원에 대해서 예표하는 하나의 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적은 기적 자체로 끝나지 아니하고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깐 모든 9:1의 빈도가 아닌 모든 100%가 전부다 가르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가르친 그들에게 성령이 역동적으로 임했을 때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증거하게 되었고, 그 증거한 복음은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는 놀라운 능력이 되었단 말이지요. 저는 거기서 며칠 굶다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놀라운 열정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이거구나!' 저는 거꾸로 했단 말이지요. 왜 사람이 안 변하나? 왜 안되는가 거꾸로 했습니다.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거기서 새롭게 목회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회를 포기할려다가 아니구나 다시 한번 해봐야 겠다는 불꽃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정말 한사람 한사람 말씀을 가르쳐서 그들에게 성령의 역동성을 경험하게 하고 그들을 이 시대의 제자로 삼는다는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동역자가 된것입니다. 한주간의 기도는 제 가슴에 불꽃을 지폈습니다. 성령의 역동성이 아닌 말씀에 대한 감격, 열정으로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자 와보니 관심있는 사람이 몇 없습니다. 배움이 그렇게 많지 않는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보는 제 가슴에는 가능성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다음에부터 시작한 것이 바로 은혜의 교회 지금의 스타일인 것입니다. 14년동안 이런 비전을 가지고 은혜의 교회를 이끌어 오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많은 동역자들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지평을 열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이 그때부터 갖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런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가 일궈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16년째를 맞이하면 몇가지 비전을 다시 한번 비전을 나눌려고 합니다.
은혜의교회 비전은 어떤 것인가?
은혜의 교회 비전은 이런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으로 섬겨서 모든 동역자를 세워나가는 것이 우리의 비전의 첫 번째 입니다.
구원받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섬겨서 그들의 가슴속에 거룩한 불꽃을 지피고 우리가 부름받은 특권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름 받았으면 그만큼 '보냄 받은 소명이 있구나 내가 구원 받은 것은 그만큼 내가 세상에 책임이 있구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있구나!' 알게 하는 것 이것이 은혜의교회 비전의 첫 번째입니다.
여러분!
성경공부하고, 제자훈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일 뿐입니다. 교회의 초점이 무엇이냐면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이런 가치관을 그 가슴속에 담도록 돕는 과정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모든 성경공부 프로그램은 이런 가치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서 구속해주셨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나 지금 당장 죽어도 천당갑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는 당신은 정말 가족들에 대해서 이웃들에 대해서 세상을 향해서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동역자로 어떻게 이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함께 넓혀가야 할 것인가를 어떻게 더 약한 지체를 살려야 겠습니까? 어떻게 공동체를 더 섬겨야겠습니까? 이런 삶에 대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마인드가 우리 가슴속에 확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가능성은 성도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그 거룩한 동역자 정신이 얼마큼 우리 존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그 교회의 가치입니다. 우리 교회에 몇 명 나오느냐? 그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열정이 우리 가슴을 얼마큼 차지하고 있는가?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실패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너무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끝내는 정말 여기에서 모든 신앙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완성하는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당신은 보냄받은 것입니다.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믿는 것은 누군가가 구원받은 이후에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희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천년동안 복음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온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런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 얼마큼 무위도식하는 크리스챤이 많은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목적앞에 응답하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크리스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위해서 생명을 받치셨습니다. 그결과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그의 공동체와 그의 거룩한 비전을 위해서 우리의 전인격을 드려야만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이런 열린 가슴, 하나님의 불꽃이 우리 가슴에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바꾸실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120명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 이 불꽃이 점화될 때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문제는 얼마큼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은혜의교회에서 양성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흥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부흥은 숫자가 늘어나는게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우리 가슴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정이, 하나님의 심장이,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 가슴에 충만해지는게 부흥입니다. 부흥의 의미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두 번째 은혜의 교회 비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맡은바 은혜와 은사를 따라서 서로 상호사역하는 공동체 이것이 우리 두 번째 비전입니다. 사람마다 맡은바 은혜가 다르고 은사가 다릅니다. 받은 은혜의 깊이와 폭이 또 다릅니다. 받은바 대로, 또 맡은바 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 응답해야 하는것입니다.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많이 맡은 사람으로써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깊이와 사명의 깊이는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많이 섬기는 자가 되야되고 더 많이 헌신하는 자리에 있어야만 합니다.
은혜의 공동체는 직분으로 이끌어가지 않습니다. 직임으로 이끌어가지 않습니다. 은혜의교회는 섬김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은혜의교회 리더쉽은 이끄는 리더쉽이 아니라 섬기는 리더쉽입니다. 은혜의교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은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대상은 어쩌면 초신자들입니다. 세상입니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름없이 섬기는 사람들, 그들이 은혜의 교회 동역자입니다.
십년, 이십년 되었다고해서 그 자리에서 안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얼마든지 기꺼이 내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고 나는 더 기꺼이 섬기는 위치에 가 있는 동역자들 그게 은혜의 교회 마인드입니다. 그래서 더 험한, 더 힘든, 더 천한 그런 일들을 기꺼이 감수하는 그런 동역자들 그들이 주님의 동역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리를 지키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것 이상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더 섬기는 위치에 서는 것 그것이 은혜의 교회 비전입니다. 목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동역자들이 갖는 비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 번째는 거룩한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찬 공동체를 우리는 완성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 이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분들이 많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빚진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 추운 날에도 일찍부터 나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증거하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교회만 부흥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땅의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백성이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면 언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다 오기를 원하지만은 않습니다. 비록 우리 교회에 못 오더라도 다른 교회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뿌려야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공동체는 정말 이 복음을 향한 열정을 충만히 채우는 공동체로 완성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분들이 은혜의교회에 참 많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감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약한 지체를 섬기고 어떻게든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런 열망을 가진 동역자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안믿는 모든 사람들과 세상속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 비전을 일궈야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네 번째는 믿음의, 헌신의, 순종의 현장감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은혜의 교회는 현장감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내적인 부분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드러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물론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은 우리속에 현장감으로 드러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당신의 믿음을 보이십시오. 행동하는 믿음으로 드러내 보이십시오. 믿음은 그럴 때 자라납니다. 우리 속에서 구원받은 그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 구원받은 믿음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현장감이 있는 공동체 순종이 현장감으로 드러나고, 헌신이 현장감으로 드러나는 공동체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믿음좋은 사람이 많은지 모릅니다. 다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그 믿음이 드러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믿음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검증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현장감으로 드러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으로, 희생으로, 헌신으로.................
C. S 루이스가 쓴 「고통의 문제」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질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지성인들에게 주는 여러 가지 교훈인 있습니다.
지성인들이 나름대로 성경의 모순들을 공격하지 않습니까? 이런 모순들을 공격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순종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이게 넌센스입니다. 알았다고 하면 뻔히 아는 것을 왜 명령하느냐, 또 몰랐다하면 하나님이 뭐 그러느냐, 지성인들이 성경을 비난할 때 그런식으로 비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이것을 아주 명쾌하게 풀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순종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명령했을까?" 왜 명령했습니까?
현장감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가 가진 믿음 하나님이 아세요. 그런데 우리는 모릅니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런 것이야 검증하는 현장으로 모리아 정상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아들 독자 이삭을 바칩니다. 그게 그의 믿음의 현장입니다. 그 현장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아!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구나!'
당신의 믿음의 현장은 어디십니까?
그것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현장들이 은혜의 공동체 안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역의 현장에도 있고, 때로는 갱신의 현장에도 있습니다. 은혜의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오히려 즐깁니다. 그럴 때 마다 턱턱 걸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턱턱 가슴에 걸리는 분, 뭔가 언치는 분들이 계시고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믿음의 현장감을 드러내는 것을 맛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신의 현장들, 희생의 현장들 정말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이 부름받고 보냄받은 사람인데 그 보냄받은 현장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10년 20년 일생 다가도록 그리고 그 현장감들을 우리 삶속에서 완성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목사의 사역의 현장감은 어디입니까?
바로 말씀으로 섬기는 현장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소원이 있다면 정말 성도들을 말씀으로 섬기는데 미친 목사라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제 무덤가에 와서 저는 우리 자식들에게 그래요. 자기 손자 손녀들을 데려와서 "너희 할아버지이시다. 이분은 목사다운 목사셨다."그 이상의 최고가는 말이 있겠습니까? 목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목사가 해야될 비전이 무엇입니까? 왜 성경에서는 목사를 세우셨습니까? 목사의 할 일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쳐서 그들의 가슴속에 불꽃을 지피고 그들을 동역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가 할 일입니다.
그것이 제 믿음의 현장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현장은 어디입니까? 구원 받았을때만 머물러 있는 믿음이 아니라 정말 구원의 감격속에서 보냄받았다는 현장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을 하는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런 공동체가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너무나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공동체는 더 많은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할 것입니다. 숫자적인 부흥만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주님의 담는 부흥을 우리는 다음 세대까지 하나님의 비전을 일궈 갈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대에 이 비전을 전 세계에 펼쳐갈 것입니다. 지금부터 준비하고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헌신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은혜의 공동체는 그런 비전을 갖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껏 걸어왔고 세워져왔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차례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헌신했던 분들에 대해 수고와 눈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그들을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흘러간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헌신을 드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요망되는 것은 이 비전을 가슴에 품고 여전히 하나님앞에 진행형으로 우리의 삶을 존재케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공동체가 앞으로 20년, 30년 여전히 건강하게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바로 그 교회! 성경이 말씀하는 그 교회를 일궈갈수 있는 위대한 공동체로 완성되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