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을 생각하면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으로 항일 무장투쟁
신한청년단 ,의열단, 임시정부에서 활약
국가 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류자명 선생을 독립 유공자로 선정했다.
선생은 189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간이 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3. 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리에 학생들을 조직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 하였으나 일경의 밀정에 사전 탐지되자 서울로 피신 한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단체로 이병철, 연병호, 안재홍 등이 조직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투신 함으로써 독립운동가로 나서게 되었다.
1919 년 6월 청년외교단의 후원금과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임시정부에 전달 할 임무를 띠고 상해로 파견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고 신한청년단 당원으로도 활약했다.
선생은 상해에 머물면서 안창호, 신채호 등의 영향으로 자주적이며 투쟁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했고 김한의 영향으로 새롭게 공산주의를 수용했다.
1921년에 북경으로 이주하여 신채호,이회영,김창숙 등과 같이 활동하면서 무정부주의 신념을 달구어 갔다. 1922년 천진에서 무정부주의 성향의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김원봉과 평생의 동지가 되었고, 이후 김원봉은 실천가로 선생은 이론가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하여 의열단을 이끌어 나갔다.
1927년에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여 중국, 인도 등 각국의 무정부주의 자들과 국제연대 활동을 펴고, 조선혁명자연맹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한뒤, 1933년 육삼정 의거를 배후에서 지휘했다. 이후 1938년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자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여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가 중국관내 좌우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여 통합 의회를 구성하자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약헌 개정 기초위원, 학무부 차장 등 임시 정부에서 활약하며 광복의 날을 열었고, 해방후에는 중국에 남아 농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2006년 03월 18일 광주 서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