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8.09 18:08 | 수정 : 2013.08.10 15:07
“189개 수교국 대학도서관에 한국 역사사전 꽂히는 게 꿈”
‘표준전과’ 등 학습서 한 우물 62년 간 판 출판계의 원로
양철우 회장이 17년간 심혈을 기울여 펴낸 《교학 한국사 대사전(전 10권)》
올해로 미수(米壽)를 맞은 양철우(楊澈愚·88) 교학사 회장은 출판계의 원로이자 ‘현역’이다. 지난 7월 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교학사 본사에서 만난 양 회장은 책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돋보기 너머로 기자를 올려보고는 이내 반색을 했다. 섭씨 36도가 넘는 무더위에 그는 에어컨도 없이 낡은 선풍기 한 대로 버티고 있었다.
양 회장은 ‘2012~2013 특성화고 상업·정보계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목록’을 보고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양장본의 두툼한 사전 한 권을 내밀었다. 지난 4월 말 출간한 《교학 한국사 대사전》이었다.
양 회장은 “《한국사 대사전》을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국에도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며 “전 세계 189개 수교국 대학도서관에 꼭 한 질씩 비치되면 좋겠다”고 했다.
양 회장은 우리 역사 재인식에 초점을 맞춰 초·중·고생, 대학생, 일반인, 역사 전공자 등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전을 제작하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교학 한국사 대사전》은 변태섭(邊太燮) 서울대 교수와 (康宇哲) 이화여대 교수를 중심으로 편찬위원 17명, 감수위원 10명, 집필위원 568명, 편집인원 41명, 사진작가 3명 등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추천으로 참가한 교수들이 교정을 보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역사사전 하나 없는 현실이 씁쓸”
사전 출간을 앞두고 내부 반대도 심했다고 한다. 양 회장은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활용해 정보를 얻는 시대에 과연 시장성이 있을까’하는 우려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사 대사전》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작업”이라는 양 회장의 ‘고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민족은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역사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집대성(集大成)한 출판물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교학사 본사 건물
온갖 어려움 속에서 어렵사리 빛을 보게 된 《한국사 대사전》은 수록 항목만 7만 개, 문화재 관련 이미지 자료만 1만3000여 점, 총 페이지는 1만 쪽이 넘는다. 역사 용어에서부터 고고학, 민속학, 국문학, 지리학, 종교와 미술 등 관련 영역을 총망라하고 있다.
양철우 회장은 1951년 교학사를 설립했다. 62년간 초중고생을 위한 학습도서와 교과서, 대학교재 등 교육서적 출간이란 한 우물만 팠다.
교과서 출판은 1964년 제2차 교육과정에 따른 검인정 교과서로 ‘국어 쓰기’, ‘글짓기’, ‘도덕(바른 생활)’, ‘서예’ 등 4종의 초등 교과서를 내놓은 것이 시작이다. 현재는 검정교과서 39종 등 총 143종의 교과서를 발행하고 있다. 교학사가 출판한 중·고교 학습참고서는 ‘뉴 프론티어’, ‘파우어 시리즈’, ‘챌린지’, ‘필승 시리즈’ 등 총 40여 종이다.
강경상고를 졸업한 양 회장은 광복을 맞이하자 상경해 이항성(李恒星) 화백이 운영하는 ‘문화교육사’에서 일하면서 출판계에 첫 발을 디뎠다.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소공동에 있는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빌려 ‘교육과학사’라는 이름으로 3학년 초등생을 위한 ‘수련장’을 만들었고,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을 가 그곳에서 ‘대입 종합수학 완성’이라는 책을 매엽(每葉) 인쇄기로 찍어냈다.
전쟁 이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사상계》를 인쇄하기도 했던 그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을 빌려 ‘교학사’라는 회사 이름을 지었다.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침으로써 성장하고, 제자는 배움으로써 진보한다는 뜻이다.
《표준전과》의 탄생
특히 양 회장은 40대 전후 세대에게는 기억에 생생한 초등학생용 《표준전과》와 《표준수련장》을 출간했다. 교학사를 대표하는 표준전과는 “학습을 위해서는 좋은 참고서가 있어야 한다”는 양 회장의 신념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표준전과》의 발간 역사는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 회장은 광복 직후인 1945년 서울사대부속 초등학교 교사들을 집필자로 초빙해 전과를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아출판의 《동아전과》도 나왔다.
《표준전과》는 한 해 20만~30만 부가 팔릴 정도로 교학사의 ‘효자’ 아이템이었다. 양 회장은 “일선 교사와 장학사, 교육연구사 등 전문가가 집필했고, 제작 실무는 전직 교사 출신을 영입해 전문성을 극대화한 것이 성공 요인”이라며 “제본까지 완료한 전과도 본문에 오탈자가 하나라도 확인되면 폐기하고 다시 인쇄하는 등 품질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전과의 판매가 부진한 것으로 미뤄 시대는 지나간 느낌이다. 양 회장은 “요즘 아이들은 학습 도움을 받을 곳이 많은 데다 학부모들도 전 과목을 한데 모은 두툼한 전과를 선호하지 않는다”며 “설상가상으로 매년 저작권료로 몇 억이 들어가는 등 수지가 맞지 않아 서서히 전과 출판을 접고, 과목 단위의 참고서로 방향을 틀고 있다”고 했다.
양철우 회장은 “1974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 때 《해법수학》 광고를 《동아일보》에 게재해 혼이 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1974년 12월, 《해법수학》을 발행해 신문광고를 했더니 중정에서 전화를 걸어 ‘계속 광고를 내면 회사를 사찰할 것’이라며 협박했다”며 “덜컥 겁이 나 그 다음 날부터 광고를 중단했다”며 웃었다.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출판인들
교학사는 공익(公益) 출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도감시리즈를 꾸준히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한국식물도감》, 《한국어류도감》, 《한국의 자연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교학사의 글짓기 강좌 수련장과 표준수련장.
양철우 회장은 “도감류는 출판 비용에 비해 판로가 한정돼 있어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하지만 출판으로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다는 창업정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출판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양 회장은 “돈만 바라고 하는 출판은 시정잡배나 하는 일이지 출판인이 취할 자세는 아니다”며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 단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면 그 책을 찍어야 하는 게 출판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양철우 회장은 “우리나라 출판 1세대인 조상원(趙相元) 현암사 회장(2000년 작고), 정진숙(鄭鎭肅) 을유문화사 회장(2008년), 최덕교(崔德敎) 창조사 회장(2008년), 김익달(金益達) 학원사 고문(1985년) 등을 존경한다”며 “그분들은 광복 직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출판계에서 민족문화를 담은 저작을 쏟아낸 출판계의 주역들”이라고 했다.
양 회장은 “광복 후 이희승(李熙昇), 이극로(李克魯) 선생 등이 정진숙 회장을 찾아와 《우리말 큰 사전》 원고를 내던지며 ‘이걸 일본 출판사에서 펴내야 하느냐’고 큰소리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출판인의 사명감을 느꼈던 것”이라고 했다.
‘한국사능력시험’도 처음으로 시도
양 회장은 ‘대한민국 역사 지킴이’를 자임하고 있다. 양 회장은 2005년부터 교학사 주관으로 처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시작했고, 정부 예산을 지원받기 시작한 5회 시험 이전까지 매년 3억원에 가까운 경비와 교육 노하우를 제공했다.
양 회장은 “8년 전 류영렬 국사편찬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 역사교육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었다”면서 “‘한국사능력시험’을 보게 해 아이들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성을 심어주자고 의기투합해 시험이 시작됐던 것”이라고 했다.
양 회장은 중고교에서 한국사 과목이 ‘필수’가 아닌 ‘선택’인 것에 대해 “글로벌 시대에 세계사와 국사 공부는 필수”라며 “대한민국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는 ‘검인정(檢認定)’이 아니라 ‘국정(國定)’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과 좌파 인사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권희영·정영순 교수 등이 집필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지난 5월 국사편찬위 검정을 통과하자,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테러활동을 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고, 4·19혁명을 ‘학생운동’으로 깎아내렸다”고 비난했다.
양 회장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뒤 교학사에 항의전화를 걸고, 교학사의 다른 교과서들까지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 협박하고 있다”며 “현재 중고교 현대사 교육은 좌파 성향 학자들이 쓴 교과서가 거의 독점하고 있다시피 하다”고 했다.
그는 “좌파 세력들은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본 것처럼 주장하는데, 그들 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5·18광주민주화운동 부분도 해당 단체의 요구사항을 공문으로 받아 저자들에게 그대로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요구대로 다 해주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몰상식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국가기관이 참고서 만들어 파는 나라
양철우 회장은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하면 주요 신문의 칼럼과 사설을 읽고, 《닛케이신문》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한다. 양 회장은 “지금 일본은 아침 독서운동을 하고 있다”며 “우리도 모든 초중고생이 수업하기 전 10분씩 책을 읽게 해서 독서습관을 길러줘야 한다”고 했다.
양 회장은 학습서 출판계의 불황 요인으로 교육방송의 교재 발행을 꼽았다. 그는 “사교육을 없앤다고 EBS라는 국가기관이 책을 만들어 팔고 있고, 교육부장관이 그 책에서 수능시험 문제를 70% 낸다고 그 책을 사보라고 광고하고 있다”며 “사고력을 죽이는 ‘교육 획일화’도 문제지만, 정부마저 이러니 출판계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양철우 회장은 “아이들이 와서 마음대로 뛰놀며 독서하는 빌딩을 짓는 게 꿈”이라며 “3대가 함께 보는 《교학 한국사 대사전》을 출간한 것이 가장 큰 보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