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소회
2021.5.8.
석야 신웅순
아이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석촌 호수에 갔다. 사람이 많아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버이날이라고 해 특별히 생각해둔 식당이었다.
가족과 함께 석촌 호수에 있는 삼전도비,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를 찾았다. 언젠가는 답사하리라 마음 두었던 곳이다. 청에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한 비석이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이 거행되었다. 온 백성들은 땅을 치며 통곡 했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함께 죽어지이다. 함께 죽어지이다.”
임금의 어가가 닿는 곳마다 백성들은 가지 말라고 길을 막았다.
인조 임금은 남색 융차림으로 세자와 함께 삼전도로 걸어갔다. 아홉 층계 계단을 쌓 은 수항단엔 황색 장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드디어 홍타시의 명령이 떨어졌다.
“조선 국왕은 계하에서 삼배구고두케하라.”
강화도에서 끌려온 왕과 대신들도 똑 같은 예를 올렸다.
‘삼배고두례’는 여진족의 풍습으로 한번씩 절 할 때마다 땅에 이마를 세번씩 찧는 아 홉 번 절하는 예이다.
형제의 맹약에서 군신의 의로 바뀌는 치욕의 순간이다.
- 신웅순,「서울삼전도비」,『한국문학신문』(2015.7.16.)에서
병자국치는 경술국치와 함께 조선 2대 국치 중의 하나이다. 병자국치는 청나라에게, 경술국치는 일본에게 당한 내 나라의 치욕이다. 비의 높이가 323cm란다. 그 위용에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빈궁이 심양으로 끌려갔고 척화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거기에서 참형 당했다.
삼전도는 인조가 홍타시에게 신하의 예를 다한 천추의 한을 남겨놓은 곳이다.
나는 밖에서 식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식성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맛이 화려하고 정이 없어서 싫다. 아이들은 그래도 그날만은 부모에게 대접해드리고 싶어 비싼 음식을 예약해둔 것이니 더 큰 사랑과 맛이 아닐 수 없다.
저쪽에는 남한 산성이 있다. 젊었을 적 오금, 가락동에서 십여년을 살았다. 그 때 석박사를 했다. 학위 논문 쓰다 안 될 때는 남한 산성에 올라갔다. 남한산성은 넓은 서울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꾸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았던 곳이다. 힘들 땐 아무 생각 없이 땀을 흘리며 무작정 걸었던 곳이기도 하다.
삼전도비 앞에 섰다. 동쪽에는 일본이 버티고 있고 서쪽에는 중국이 웅크리고 있다. 수많은 그들의 침략을 생각해보았다. 단연코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 나라가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이다.
삼전도비 글씨를 쓴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는 벼슬도 버린 채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한을 품고 죽었다.
민족의 치욕은 길고도 길다. 400여년이 다가오는데도 치욕의 울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부모에겐 효를, 나라엔 충성을’, 이것이 지금까지 이 나라를 받쳐온 두 기둥들이다. 무너져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어버이날이다. 아이들로부터 효도를 받는 날이기도 하지만 덤으로 오늘은 특별한 충을 생각케준 날이기도 하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파도처럼 쓸려갔다 또 파도처럼 밀려온다. 파도는 내 가슴에서 포말되어 무수한 입자로 부서지고 있었다. 내 부모님 생각이다.
누가 그랬었다. 내 이렇게 나이를 먹을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잠깐 왔다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어제 응급실에 다녀왔다. 나이 들면서 횟수가 잦다. 누구나 다 사람은 처음 가는 길이다. 아는 길이라면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날로 가는 길이 있다해도 절대로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것들이 많다. 언제면 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늦가을 가는 길목이 이런 설움이 아니었을까.
- 석야 신웅순의 서재, 여여재
첫댓글 건강유의하세요 선생님 ~~^^
오늘은 바빠서 휘리릭~~~
담주는 스승날
더 바쁠것같아요~~~^^
천천히 가야겠습니다.잠시라도 안부 남겨주셨네요.
편히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 다녀가셨군요~ 저도 80년대 후반부터 15년간을 가락동에서~
2001년부터 현재까지 '석촌동'에서 居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도 자주 올랐었구요~
아마도 오며 가며 스쳐 지나간 인연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근간에 거의 매일 석촌호수를 돌면서도 '삼전도비'는 아픈 역사가 스며 있어서 그런지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혹시라도 이쪽에 오시는 기회가 또 있으시다면 식사라도 한 번 모시고 싶은 마음입니다.
역사이야기와 더불어 소회가 담긴 귀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옛날 오금, 가락동 가락시영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지금은 옛모습은 볼 수 없을 겁니다.
보따리 장사(대학 강사)시절 으례이 술 한잔으로 마음을 달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 백제고분 힘들 때면 찾았던 곳입니다. 예, 기회가 닿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다가다 스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