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가 열리는 사과나무
조물주는 하늘과 땅을 만들고, 그 다음 아름다운 산천초목을 만들었으나 보기에 밋밋하고 움직임이 없어 허전하였다. 그래서 신은 고민하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온갖 생물을 만들어 풀어 보았다. 그랬지만 동물들은 생각 없이 움직이기만 할 뿐 허전하여 마지막으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을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인간들은 모두 다 제 정신으로 이성적으로만 살아가니 모습이 참 무미건조하게 보였다. 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욕심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미움과 질투로 생겨 이전투구 하고, 다른 사람들은 용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물주는 생각 끝에 술을 만들어 주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 간에 생긴 앙금들을 화해하고 용서하며 다시 마음을 합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술을 즐겨하여 남용되기 시작했다. 술로 인해 함부로 행동하고, 싸움도 생기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이 나타나 죄를 저질렀다. 신은 가장 잘 만든 음식이 술이라고 자부심이 높았는데, 술 때문에 다시 사람들을 망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탄식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술 중에 막걸리와 나의 인연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모내기철이면 으레 술심부름은 나의 몫이었다. 장터에 있는 술도가에서 두 되짜리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
어린 나에겐 힘이 빠질 정도로 꽤 먼 거리였다. 술이 대체 무엇이기에 어른들은 이렇게 술을 좋아 하는 것일까? 나는 우선 그것이 궁금하여 술을 가져 오면서 주전자 코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마셔보았다.
어린아이 입맛에도 막걸리는 물만큼 시원하고 맛도 그 정도면 괜찮았다. 그만큼 무게도 줄어들었으니 주전자를 들고 가는 발걸음도 자연 가벼워져 자주 꾀를 부렸다. 막걸리를 한 말 먹고는 갈 수 있어도 들고는 못간다는 속담을 몸소 체험하며, 난 어른들 모르게 막걸리의 세계로 입문하고야 말았다.
사과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는 한 여름 동안 사과나무 아래서 가뭄과 잡초와 병충해와 싸우셨다. 몸이 힘들고 지칠 즈음이면 사과나무 그늘 아래서 으레 막걸리를 드셨다. 오전에 한 병, 오후에 한 병, 새참 시간에 맞추어 드시곤 했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밥의 한 종류였다. 일하다 지치고 힘들 때 큰 대접으로 한 잔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고, 배도 불렀다. 아버지와 나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서 막걸리 한 잔으로 휴식하며 하늘을 보곤 했다. 막걸리 기운 탓인지 하늘을 보면 구름을 타고 앞산에서 뒷산 너머로 둥둥 떠 다녔다. 마음도 부르고 여유도 생겨 힘도 절로 생겼다.
옆에 있는 사과나무도 이따금 막걸리를 한 잔씩 얻어 마셨다. 아버지는 혼자 먹는 것이 미안하셨던지, 너도 이 가뭄에 고생이 많다며 사과나무에 한 잔씩 부어 주셨다. 갈증을 느끼지 말고 기운을 내서 사과를 주렁주렁 달아 달라고 당부하셨다.
2대째 사과농사는 형님이 이어 받아서 하신다. 아버지가 심으셨던 늙은 나무는 베어 나가고 어린 묘목을 심어 이제 갓 수형(樹型)을 잡아가고 있다. 어린 사과나무는 날씬한 자세로 하늘을 향해 가지를 키워가고 있다. 그렇지만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나뭇가지는 생각도 없이 천방지축 아무데나 뻗어 나가고 있다. 사과나무를 키우다 보면 나무도 자연 주인의 성품을 닮아가는 건지, 초봄과 마주한 사과나무는 내 어릴 적 형님 모습처럼 날씬한 자태로 조금씩 자라고 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보니 나뭇가지에 뭔가 드문드문 달려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막걸리병을 달고 있지 않는가.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막걸리병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니. 막걸리 심부름하며 힘에 겨운 나머지 한 모금씩 먹던 나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아니면 사과나무도 제 주인을 닮아서 인지, 대를 이어 막걸리를 사랑하는 아버님과 형님을 닮아 사과 대신 막걸리를 달고 익어가는 건지. 어린 묘목이 자세를 잡느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막걸리 한 잔하면서 버티고 있는 건지. 또 아니면 자기를 키워주는 형님을 위해 막걸리를 선물하려는 기특한 마음인지. 가지가지 경우의 생각들이 겹쳐서 폭소를 터트렸다.
신이 만들어 준 최고의 음식인 술! 어쩌면 신은 막걸리가 열린 사과나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막걸리를 걸치고 있는 사과나무를 보자니 나 또한 흐뭇하였다. 잘못 먹으면 독이 되는 술! 앞으로 술을 마시고 실수하지 말아라. 술기운을 이용해 나쁜 짓 하지 말아라, 술을 욕되게 하지 말라 라는 교훈도 얻는다. 막걸리가 열린 사과나무를 보며 술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본다. 참 좋은 음식은 참 좋게 즐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댓글 막걸리와 시골 농번기 새참은 누가 뭐라해도 막걸리가 최고다. 사과나무에 오죽하면 막거리가 열리겠습니까.
생각만해도 한여름 시원한 막걸리 한잔 하고 싶습니다.
나도 끼워 주셔요 막걸리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