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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잊혀진 항일독립투사 안정근(安定根) 선생
잊혀진 양정의 항일독립투사 안정근(安定根)
양정의숙연구회 이영석 1. 안정근의 국내생활 안정근(安定根)은 순흥(順興) 안씨 집안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趙) 마리아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진해 현감을 지녔으며 집안이 넉넉해서 안정근 집안은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알아주는 큰 부자이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쫒기는 몸이 되어 벼슬에 대한 꿈을 버리고 가족을 모두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안정근은 1885년 1월 17일 출생하였다. 유학자 집안이면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한 안중근(安重根)은 영세명이 토마이었고 6살 아래의 안정근은 시릴로이었다. 1895년 안 진사를 찾아 한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 후에 안정근과 사돈이 됨)는 그의 책 “백범일지”에서 안 진사의 맏아들 안중근은 사격술이 제일이었고 언제나 사냥을 다니고 있었고, 동생 안정근은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글 잘 읽는 도련님”이었다라고 증언하였다.
백범 김구는 1894년 동학혁명당시 농민군의 접주였고, 안태훈 진사는 농민군을 토벌하는 관군의 장수로서 서로 적대적 위치에 있었지만, 서로 상대방의 인품을 알고 존경하는 관계에 있었다. 안 진사가 백범 김구에게 ‘군이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겠다. 군이 무모하게 싸우다 죽으면 인재가 아깝다’는 뜻의 밀서를 보내면서 두 집안의 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백범 김구가 자신을 반대하던 일부 농민군 세력의 습격을 받아 위태로움에 처했을 때 백범은 안 진사에게 몸을 의탁했고, 그때 안중근, 안정근 형제를 만나게 되었다. 고향땅 신천에서 한학을 익힌 안정근은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신천의 만석꾼인 왕재덕(王在德) 여사의 고명딸 이정서씨와 결혼을 하였다.
안정근은 결혼 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양정의숙(養正義塾)에 유학을 왔다. 경성(京城)에 연고가 없는 안정근은 서부 봉상사 남문동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양정의숙에서 법률학에 전념하였다. 친형인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할 당시(1909년 10월 26일) 안정근은 26세 나이로 양정의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경시청 비밀보고문서(警秘 제294호, 1909. 10. 31)에는 안정근의 성격이 온순하고, 후덕하며, 매사에 신용이 있으며, 천주교 신자로 일요일마다 불란서 교회당에 다니고, 동급생 윤교신(尹敎信, 양정의숙 3회 졸업생)과 교분이 두텁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여순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안중근 의사를 위해 안정근은 양정의숙을 자퇴하고 동생 안공근(安恭根)과 함께 친형의 옥바라지에 온갖 힘을 다 쏟았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자 안정근은 형의 시신을 여순감옥 인근 언덕에 매장하고 귀국하였다. 맏형을 대신하여 가장역할을 떠맡게 되었으나 가족들의 삶은 예전과 전혀 달랐다. 이등박문의 피살을 두고 친일파들은 일본에 사죄단을 파견하고 동상을 건립하자고 날 뛰고, 총리대신 이완용이 사죄하러 일본으로 달려가고, 각 학교들이 조의를 표한다는 명목으로 강제휴교를 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안정근은 결단을 내려 1910년 봄에 홀어머니와 누이동생,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유족과 자신의 가족, 동생 안공근의 가족 등 혈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망명의 길에 나섰다. 2. 안정근의 망명생활 안정근 일행의 첫 망명지는 북만주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러시아 영토의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였다. 그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방 50리 지점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인심이 좋아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월경한 조선인들이 대거 운집해 살고 있었다. 일제에게 핍박을 받던 조선인들에게 안정근은 신화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이라는 점과 안정근 자신이 지닌 후덕한 인품으로 안정근의 망명지 숙소는 항상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 되었다. 집안의 재정이 궁핍해지면 부인 이정서 여사는 국경을 넘어 친정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였다.
안정근의 장모인 왕재덕 여사는 신천갑부로서 학교를 짓고 운영자금을 대 주는 열렬한 교육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사위 안정근을 위해 왕재덕 여사는 헌신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안정근은 망명지에서 조선인들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망명생활 중에서도 일제의 마수는 끊임없이 안중근 일가를 노리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장남 안분도가 일제의 음모로 독살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러시아가 1914년 세계 1차대전에 참전하자 노령에 거주하던 한인 중에는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참전함으로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또 실전경험을 풍부히 쌓아 후일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일제는 러시아에게 공문을 보내 안정근을 체포하여 일제에 넘겨달라는 요청을 한 상태이었다. 일제의 마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정근과 동생 안공근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여 군대에 입대하였다. 안정근은 위생장교로 임용되어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러시아 장교의 군복차림으로 목이 긴 가죽장화를 신고 찍은 사진이 가족들에게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군대에서 제대 한 안정근은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경제적 기반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직접 벼농사 사업을 시도하였다. 생활안정이나 경제적 향상 없이는 한인사회의 성립이나 조국독립운동의 기반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기초산업진흥을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시베리아 땅에서 시도한 벼농사는 대성공을 이루었으며 그곳에 이주한 한인들 뿐 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상해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은 안정근의 시베리아 벼농사 성공을 자세히 보도하여 조국을 떠난 한인들에게 경제적 자립가능성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나고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자, 1919년 3월 중국 길림에서 조소앙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때 안정근은 국외에 있는 독립운동계의 거두 39명 가운데 대표자로 선정될 만큼 한인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안정근은 전도가 유망한 벼농사 사업을 중단하고 자신의 장남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하여 상해로 이주하였다. 망명 초기부터 1919년 늦가을 상해에 이주하기까지 10여년간의 망명생활의 모습은 “독립신문”에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독립신문”은 또한 안씨 가문의 2세들이 인성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충실히 받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2세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상해로 이주한 후 안정근의 독립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 상해에서의 항일독립운동 안정근(安定根)이 1910년 양정의숙을 중퇴하고 북만주로 망명하여 러시아영토인 니콜리스크(蘇王營)에 정착하였으나 1919년 전도가 유망한 벼농사를 제쳐놓고 상해로 이주하였다. 자신의 장남과, 형 안중근의 자녀, 아우 공근의 장남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언제 상해에 도착하였는지, 또 언제부터 어떻게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안정근은 상해에 도착할 당시부터 상해 교민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19년 11월 3일 상해임시정부의 이동휘 국무총리, 이동녕 내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취임식에 안정근이 귀빈으로 참석하였다는 기사 뿐 아니라,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 1면에는 안정근이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차장직에 오르게 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3면에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안정근은 이미 상해 임시정부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내무차장직과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중 대한적십자회 쪽을 택하였다. 당시 대한적십자회 회장인 이희경(李喜儆)은 업무차 미국에 장기체류하고 있어서, 부회장으로 취임한 안정근이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로서 적십자회를 이끌어 나갔다. 안정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적십자회를 이끌어 취임 당시 999명이었던 회원을 6개월 후에는 2,128명으로 확장 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 나갔다. 2.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통합과 청산리전투에서 안정근의 역할 1919년 3월 1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전기를 마련하였다. 국치를 당한지 10년만인 1919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내외 각지에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임시정부는 상해에 있는 각 지방출신들 중 유력인사들을 자기 출신 고장의 “조사원”으로 위촉하여 국내상황을 파악하고 해당 고장의 ‘유력자.재산가.학교.종교’등을 조사하여 정부에 보고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때 안정근은 황해도의 조사원으로 위촉되어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북간도는 본국과 단지 강 하나를 사이로 떨어져 있어 수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었고, 약 40여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각각의 독립운동단체들은 일본의 정보망을 피하고 중국마적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 더욱이 각각의 독립군단체들은 조직배경과 지지기반이 달랐고 이해와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어 독립군단체끼리 연락체계나 협조체계는 미흡하였다.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였던 기독교계열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대종교(大倧敎) 계열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세칭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간의 알력과 대립이 극심하여 항일무장투쟁 전선의 큰 걸림돌이 되었다.
북간도 현지의 여론은 임시정부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군정서측은 1920년 3월 26일 상해 임시정부에 수습책을 제시하였다. 군정서측과 국민회에 무관한 사람으로서, 신망이 있고, 군사상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명석한 두뇌와 공정성을 지닌 무종교인이 중재를 해 달라는 요지였다.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각각의 무장독립단체들을 결집시켜야하는 중차대한 소임을 맡을 적임자를 물색하던 임시정부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안정근과 임시정부의 군무위원(軍務委員) 왕삼덕(王三德)을 “파견위원”으로 엄선하였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1920년 5월 17일 북간도에 파견되어 각 단체들의 본거지를 일일이 방문하면서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임시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각 단체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통합조건을 제시할 뿐 통합운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파견위원의 끈질긴 설득과 노력으로 처음으로 통합을 이룩한 독립운동단체는 의민단(義民團)과 의군단(義軍團)이었다. 주로 가톨릭신자들로 구성된 의민단에서는 임시정부 파견위원인 안정근(가톨릭신자)을 고문으로 맞아들여 전적으로 임시정부를 신뢰하여 의군단과 통합하였다.
대한국민회와 북로군정서는 완전통합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격의 없는 토의를 통하여 상호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도모하기로 합의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서간도 방면에서 군사 활동을 하고 있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도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군 정규군이 불법적으로 만주를 침입하여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독립군 1개 소대병력이 1920년 6월 4일 두만강을 건너서 일본군 헌병소대를 격파하자 일본군은 중대병력을 이끌고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독립군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귀환하자 일본의 정규군도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추격에 실패하자 그 지역에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독립군부대를 추격하였고, 6월 6일 밤 10시 독립군 매복작전에 걸려 일본군 1개 중대가 섬멸되었다(三屯子戰鬪). 패배에 대한 보복을 위하여 일본군은 대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독립군 섬멸 작전을 시도하였다. 일본군의 계략을 간파한 독립군 쪽에서는 연합부대의 결성을 절감하여 통합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 19사단 소속 추격부대가 진격하자 독립군 소대는 일본군을 봉오동(鳳梧洞)까지 유인하여 매복작전을 통하여 또 다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군의 선봉 추격부대가 패배하자 일본군은 1920년 6월 7일 11시 30분 다시 봉오동 계곡에 진입하여 독립군의 포위작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에게 집중사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 전투를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규정하고 이를 독립신문 호외를 통하여 공식발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정근과 왕삼덕은 더욱 심혈을 기울여 통합운동의 박차를 가하였으며 그 결과 대한국민회, 의민단, 의군회, 신민회, 한민회가 통합하여 대한국민회의 사령관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지휘아래 연합부대를 구성하였다. 봉오동전투의 패배는 일본군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장독립단체들이 통합함으로써 독립군의 조직이 강력해지자 당황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 섬멸한다는 목표 아래 시베리아 연해주에 주둔한 11사단, 13사단, 14사단과 19사단 전부. 20사단 일부를 포함한 25000명 규모의 전투단을 편성하였다. 만주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중국정부에 승인을 요청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만주군벌에게 독립군을 토벌해 달라고 압력을 행사하였다.
, 한국의 무장독립군 활동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중국인들도 일본군의 압력에 굴복하여 1920년 8월 25일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중국군을 출동시켰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한국의 무장독립군들은 주둔지를 이동하여 삼림지대로 잠수하였다. 독립군의 이동은 수개월에 거쳐 조직적으로 이루어 졌고 중국군의 토벌작전은 아무런 성과없이 9월 20일에 종료하였다. 1920년 10월 13일 중국정부가 일본군의 만주 출동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자 일본정부는 10월 14일 만주지역에서 일방적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한다고 선언하였다. 국제법상 일본은 불법 무력침입을 통하여 전투를 개시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에서 역사적인 청산리 전투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청산리라는 장소는 하나의 작은 마을이 아니라 만주 일대의 넓은 지역을 지칭하며, 청산리대결전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10회 가량의 전투를 지칭하고 있다.
독립군 부대는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사단으로 크게 2개의 대부대로 편성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양정의숙 3회 졸업생인 고헌 박상진 의사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서 대한광복단 총사령 박상진 의사로부터 부사령으로 임명받은 후 만주로 가서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강력한 화력과 함께 정규전투에 익숙한 일본군은 철저하게 포위섬멸작전을 구사하였고 이에 맞선 독립군은 철저하게 게릴라전술을 사용하였다. 매복을 통하여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기동작전을 구사하였으며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고지를 선점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일본의 전투부대와 처음으로 교전한 부대는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 부대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1만이상이나 되는 대규모 일본군과 전투를 하기 위하여 결전지를 심산유곡으로 택하였으며 길가에 말똥을 뿌려놓아 일본군을 백운평으로 유인하였다. 포위망을 좁혀오던 일본군이 백운평에 도달하자 김좌진부대는 일제히 집중사격함으로써 청산리전투는 시작되었다(白雲坪戰鬪). 일본군이 혼비백산하여 퇴각하는 혼란을 틈타 김좌진 장군은 병력을 분산시켜 은밀하게 포위망을 뚫고 제2의 집결지로 이동시켰다. 독립군 주력부대가 포위망을 빠져 나간 것을 모른 채 일본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하였고 잔여 독립군이 집중사격을 한 후 빠져나오자 일본군은 서로 다른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그 결과 백운평전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안정근은 처음부터 청산리전투에 직접 참전하였다. 3일째의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 안정근은 전투상황을 정리하여 동료인 왕삼덕을 통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 보고서를 인쇄하여 각 방면에 배포하였으며 청산리전투에 대한 문서 중 가장 주요한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 백운평전투 직후 김좌진부대는 포위망을 탈출하여 천수평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본군 기마중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하였다(泉水坪交戰). 그 후 재빨리 어랑촌 서남단 고지를 점령하여 매복을 실시하였으나 전열을 재정비한 대규모 일본군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연이은 전투와 식량보급마저 끊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부대의 측면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漁郞村戰鬪). 청산리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던 백운평전투, 천수평교전, 맹개골 전투, 만기구전투(萬麒溝戰鬪), 쉬구 전투 등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였으며,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와 고동하곡전투(古洞河谷戰鬪)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사단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어랑촌전투와 천보산전투(天寶山戰鬪)는 대한군정서와 독립군 연합사단이 협동해서 값진 승리를 이끌어낸 전투이었다. 1920년 10월 26일 일본군이 퇴각함에 따라 역사적인 청산리전투는 막을 내렸다. 독립군 장병 2천여명이 일본군 2만여명의 포위 공격을 물리친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은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항쟁 의지를 보여준 위대한 승전(勝戰)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하고 오만한 자존심을 꺽은 쾌거였다. 청산리대결전의 승리는 우리의 독립군부대들이 서로 합심하여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안정근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이었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안정근은 그 후에도 간도(間島, 墾島, 艮島)에 머물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가 1921. 3. 23 <歐洲의 我事業>이라는 서적을 간북(墾北)교통부특파원 안정근(淸溪)에게 발송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정근은 간도에서 임시정부특파원의 자격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은 안정근은 부상병을 위한 구제사업에 앞장섰다. 안정근은 북간도에서 교민들과 부상병들을 돌보며 대한적십자회의 부회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주불공사 민영찬에게 신임장을 보내 1903년 1월 8일 제네바 협약에 가입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대한적십자사가 첫 발을 내딛은 것은 1904년 12월 21일이었고, 1905년 10월 27일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반포함으로써 인도주의 적십자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빈곤한 병자를 구호하기 위함이 목적이었으나 그 해 12월 18일 규칙을 개정하여 전시나 평시의 상병자(傷病者)를 구호.치료 할 수 있도록 수혜범위를 넓혔다.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은 1894년 보빙대사로 유럽각국을 순방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1899년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습득한 후 귀국하여 1905년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어 인도적인 국제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5. 11. 7일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완용 내각은 1908. 12. 7일 대한적십자사 관제 및 규제 폐지에 관한 칙령안을 제출하였고 1909. 7. 23일 일본적십자사에 합병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되자 이희경(李喜儆) 박사는 서병호(徐丙浩), 안창호(安昌浩)과 함께 대한적십자회를 다시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설립목적은 <전시 및 천재지변에서 상병자를 구호하는 것>이었으며, 1919. 7. 1 내무부의 인가를 받아 이희경 박사가 회장에 추대되었다.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희경 회장은 1919년 말 미국에 건너가 회원모집과 모금활동을 전개 한 후 1920년 7, 29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희경 회장의 공백기간을 부회장 자격으로 대한적십자회를 이끌던 안정근은 1920. 5. 17일 임시정부의 특명으로 북간도에 파견되었었다.
만주에 있는 독립무장단체들을 결속시키고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안정근이 언제 상해로 복귀하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안정근은 1921년 11월 21일 공석 중인 대한적십자회 회장을 대신하여 총회 개회를 선포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상해에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적십자회의 향후 업무방침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안정근은 북간도 교민과 부상병들의 참담한 정황을 설명하였다. 이들을 구호하기 위해서는 중국영토나 러시아 영토의 적절한 장소를 택하여 병원설립이 시급하며 아군주둔지에 구호원(救護員)을 파송할 것을 제안하여 가결시켰다.
대한적십자총회는 그동안의 업무공백을 보완하기 위하여 임원 보궐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동안 사의를 표했거나, 조선땅에 귀국한 임원이나 사망한 임원뿐 아니라 장기간 외국에 체류(出洋)함에 따른 임원재편성이었다. 이희경(李喜儆) 회장의 후임으로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선출되었고 결원상태의 감사와 임원(常議員)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도산 선생이 회장직을 극구 사양함에 따라 또 다시 안정근 부회장이 회장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대한적십자회 회장의 장기 유고로 안정근 부회장의 역할과 책임은 더욱 무거웠다.
1922년 신년을 맞이하여 안정근은 다음과 같이 축시를 독립신문에 투고하였다. 고향인 신천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고향의 마을 청계(淸溪)를 그대로 자신의 호로 사용하였다.
祝新年 大地에 新年이 來하고 萬里에 春風 吹하도다 三年陰雲에 呻吟하는 半島萬象 四年東風에 活躍하니 全球和氣로다
안정근은 1920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이 단체는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씨스코에서 창립되어 미국에서만 활동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1920년 봄 상해에 흥사단원동위원부(興士團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미국 본부와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정근은 1922년 2. 4 흥사단 강당에서 <최근 본국의 참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20년대 임시정부의 항일투쟁은 군사적인 항쟁을 목표로 삼았다. 상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치 운영하였고 이곳에서 배출한 무관을 만주지역 실전에 배치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를 필두로 필사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무기력하고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중국인들은 크게 자극을 받았다. 중국인이 최초로 쓴 정원(鄭沅)의 <안중근전>에 안정근은 형님에 대한 글을 써서 이 책 부록에 실었다.
전략--- 나의 형님인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임종할 때 나에게 최후의 몇 마디를 유언하였다. 하나는 조국동포들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조국을 위해 나라의 원수를 죽였으니 오늘 이 한 몸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만 나라의 회복을 보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유감스러울 뿐이다. 다행으로 동포형제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조국회복에 협력한다는 소식이 천국에 도달되면 나의 하늘에 있는 영혼과 땅에 파묻힌 유골도 당연히 즐겁게 춤출 것이다. 나는 두 나라 관계와 동양대세를 위해 이등을 죽이고 이 몸도 죽게 되니 중화민국은 나의 이 진심을 응당 이해하고 두 나라의 운명관계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 한국 2천만인과 중국 4억만인을 도탄에서 구해내야 한다. 내가 오늘 말하는 것은 한국독립이 회복되기 전에는 중화민국도 필연코 편안한 날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10년 후인 나는 우리 한국독립운동을 이어 받게 되었다. 중국에 대하여 감상의 표출을 금할 수 없어 정성스러운 이 진심을 그대로 알리는 바이다.
정원(鄭沅)의 책 <안중근>은 상.중.하로 구성되어 있다. 정육(程淯)이 상편에 <안중근전>을 썼고, 편자인 정원(鄭沅)이 중편에 <안중근 사략>을, 하편에는 역시 정원(鄭沅)이 한인 의열활동개요를 편술한 <한인살매국노지역사(漢人殺賣國奴之歷史)>를 썼다. 중국의 지식인들도 일제를 섬멸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인과 친분이 두터운 유정 조동호(趙東祜)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여 1921년에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가 조직되었다. 이미 한중간에는 쑨원(孫文)의 호법정부(護法政府)가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였고, 우리도 호법정부를 승인하였으므로 두 나라의 외교적인 후원이나 상부상조 전통은 끈끈하게 맺어진 상태이었다. 한국의 독립과 중국혁명에서 상호협조를 목적으로 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는 친선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한국 청년의 중국유학과 구미유학을 위한 여권의 주선 등이 포함되었다. 안정근은 1923. 9. 1일 제3회 총회에서 여운형(呂運亨),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한국측 이사로 당선되었다.
안정근은 1922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수뇌부들이 공산당으로 변신하여 당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안정근은 임시정부계열인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김인전(金仁全) 등과 함께 탈당하였다. 1923년 10월 24일 안정근은 상해(上海) 교민단 제4회 의원선거에서 본구역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대미외교의 중요성을 내세워 상해에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이끌고 항일투쟁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해야 할 대통령이 미국 땅에서 별도의 행정부나 다름없는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임원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상해복귀를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議政院) 의원 17명은 1920년 3월 19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향후 2개월 이내로 상해에 복귀하기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전횡적이고 독선적 행동을 계속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1922. 7. 2일 오영선(吳永善), 안정근(安定根), 조상섭(趙尙燮), 양기하(梁基瑕) 등이 제출한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원의 불신임안을 가결하여 각지에 통고하였다. 1924. 9월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이동녕(李東寧)이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도록 결정하였고, 의정원(議政院)은 이듬해 3. 18일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03월 30일 상해 임시정부 議正院 憲章을 개정하였고, 4월 7일에는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임시헌법을 개정하였다. 4월 1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구미위원회에 대한 폐지령을 내렸다.
1925년 안정근은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병치료를 목적으로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산동반도 동쪽 끝의 항구도시인 웨이하이웨이(威海威)로 이주하였다. 산동반도의 웨이하이웨이는 중국과 한국(태안반도)을 잇는 가장 가까운 뱃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안정근은 어선 건조사업을 시작하였다. 어선을 건조하여 교민들에게 공급함으로써 교민들의 생계를 보장하고 기회가 되면 어선을 공작용 선박으로 개조하여 본국에 상륙하기 위한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었다. 조선사업을 위장한 공작선 건조는 1937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일제에 정보가 누출됨에 따라 수포로 돌아갔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중국대륙을 유린해 가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안정근은 또 다시 가족을 이끌고 홍콩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항구도시 홍콩에서도 안정근은 공작선 건조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안정근의 집념은 대단하여 자신이 못하면 가족이라고 선박전문가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차남 안진생(1914년)은 미국인이 경영하는 북경보인대학에서 학업을 하던 중 북경주재 로마교황대표의 소개와 도움으로 이태리 유학길에 올랐다(동아일보 1935. 2. 22).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신뢰를 받고 있던 안정근의 도움으로 중국의 여권을 갖고 유학을 떠났다. 차남 진생은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공학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안정근 자신은 뇌병으로 고통을 받아 중국 각지를 돌며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안정근은 1945. 3. 16일 한국구제총회(韓國救濟總會)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각종 구제(救濟), 자선, 보건공작을 목적으로 1945. 3. 16일 충칭(重慶)에서 창립되었다. 그러나 안정근은 1949년 3월 17일 상해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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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분 말고도 3남 공근씨가 있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1939년 10월-
며칠 후, 위령제가 열렸다.
얼마 전부터 떠돌던 믿어지지 않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박문사'는 엄청나게 붐볐다.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미나미 총독의 연설이 끝나고 이토 히로쿠니가 무대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라는 소개에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미나미 총독이 안준생을 불러 안중근의 아들이라 소개했다.
장내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미나미 총독은 둘을 무대 가운데로 인도했다.
마주보고 섰다.
이토 히로쿠니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안준생은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악수를 받았다.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고 전했다.
안준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다.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일본 곳곳을 돌며 '눈물의 화해'를 재현했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준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