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자 축구 / 홍속렬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 여자축구가 포함됐다.
그때까지 여자축구가 없던 한국에서는 부랴부랴 신문 광고를 통해 선수들을 모으고 감독과 코치를 선임 상무부대에 진을 치고 연습을 시작하였다
타 운동을 했던 다 성장한 성인 여자들을 모아 기초부터 가르치는 해프닝? 을 하며 한국 여자축구의 탄생을 고고하게 소리치며 태동을 하게 된다.
나는 상무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죄? 로 이 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다.
드디어 삼 개 월 후 아시안게임에 출전 예상한대로 참패를 하고 돌아와 그 해 남북 축구 교류에 남 녀 팀이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여자축구는 북한의 상대가 될 수 없어 남자축구만 자웅을 겨루고 여자는 겹 다리로 구경만 하고 돌아온다.
처음부터 그 과정을 지켜본 나는 누군가는 여자축구를 시작 한국의 여자 축구를 발전시켜야할 사명감을 갖는 사람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당시 체육부대장은 베트남에서 함께 전투를 했고 공수부대에서 전우로 함께 생명을 걸었던 분이었기에 이분에게 여자축구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고 여군으로 팀을 창단
한국의 여자축구를 이끌어 나가자고 건의를 한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공수부대 여단장으로 모셨던 부대장께서는 내가 준비해 드린 창단 계획서와 스키 점프 팀 창단에 대한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청와대를 방문 결재를 득했으나 당시 모든 군 병력의 씨링의 권한을 가진 미군 측에서 허락을 해주지 안 아 그만 계획이 무산돼 버렸다
당시 문화체육부에서는 여자축구를 활성화 시키고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당시 명문 여자대학인 이화 여대와 숙명여대에 팀 창단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 두 개 여자대학 팀을 창단하게 된다.
나는 육군대표축구팀부터 선수들에게 신앙을 전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한 선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스포츠 선교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목사님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세계스포츠 선교회와 기타 스포츠를 매개로 하는 많은 선교단체가 있었으나 그 시작은 이영무 목사와 나를 통해 이루어져 오늘날의 발전이 있게 된 것이다
그 첫 열매가 할렐루야 선교 팀의 창단이었다.
당시 체육선교신학교라는 무 인가 신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여자팀을 창단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나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을 하겠다. 해서 그렇지 않아도 나라가 위급할 때 애국자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이 일을 내가 선구자처럼 앞서 나가시작하겠다는 결심으로 군대 정년이 7년이나 남아있는 상황에서 앞 뒤 따지지 안 고 전역을 해 나오게 된다.
군대생활만 30년을 해서 사회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열정과 사명감 하나만을 갖고 나와 보니 부족한 것뿐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이 무인가 학교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이대, 숙대, 인천전문대 우리(체육선교신학교) 네 팀이 첫 리그를 벌려 우리 팀이 우승을 했고 대학 연맹에서 개최한 대회이기에 교육부 인가된 학교만이 검증이 되고 자격이 있다해 우승한지 삼 개 월 만에 우승을 취소하는 쇼가 벌어진다.
그로부터 삼 년간 공식대회에 출전할 수 가 없게 된다.
학교에서의지원이나 팀을 유지해 나갈 지원이 없는 팀 그래서 나 개인이 모든 일을 해결해 나가야만 하는 그런 팀 그 팀을 유지해 나가면서도 나는 의욕과 열정과 사명감 때문에 어려운줄 모르고 팀 지도를 해 나갔다
초창기 대표선수들을 12명이나 만들어 배출 시켰고(쌩짜를 가르쳐 만들었으니 이 표현이 적당하다고 사료됨) 대한축구협회 여성분과 부위원장으로 여자축구의 모든 행정을 총괄해 나가며 진정 여자축구의 발전만을 염원하는 그야말로 여자축구에 미친 놈 가정도 아이들의 교육도 다 몰라라하고 오직 여자축구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며 밤낮으로 뛰었다
몇 개의 고등학교 팀이 창단되어 쳬게 적인 선수 지도가 이루어 져 갔고 그 선두에 있던 학교가 강릉의 강일 여고와 서울의 동산(위례상고) 고등학교였다
대표 팀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계속돼 지도자 급여와 합숙 비 등 초창기의 여자축구를 이끌어 나가는데 미흡하나마 기여를 한 것은 문화 체육부였다
그때까지 대한 축구협회의 역할은 별로 눈에 띠지 안 는다.
당시 여자대표팀 감독은 이이우 씨 였고 코치는 윤홍근 씨였는데 전국의 여관을 전전하며 참 많은 고생을 하며 팀을 지도했었다. 제대로 된 급여도 받지 못하며
여자축구발전을 논 하려면 이 두 분의 희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하여야 하고 오랜 동안 사비를 들여 팀을 지도하며 가장 많은 대표선수를 배출한 서정호 감독을 몰라라 하면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지도하는 팀에 대하여는 아무도 거들떠보거나 도와주는 손길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고 가정은 몰라라해 피폐해져 갔다
그렇게 견디어 내기가 벅차 이영무 목사가 소개하는 낫소로 팀을 옮기게 된다.
당시 낫소는 부도가 나 법정관리에 들어가 있었으며 단지 먹이고 재우며 입히는 것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팀을 옮기게 된다.
그리고 나 개인의 급여를 해결해줄 수 가없으니 당시 낫소 이사 중에 식당업으로 크게 성공한 분이 있어 식당을 열어 줄 테니 자급자족해 보라는 꿰임에 빠져 아내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식당을 개업해 운영해 나가다 보니 쫄땅 망하고 아내는 대상포진이라는 몹쓸 병에 쓰러져 생사를 넘나드는 지경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은행 대출을 받아 강릉에 경기를 하러 가게 되고 아내의 생사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미쳐도 보통 미친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여자축구를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치듯 해 온 여자축구가 월드컵 16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제 나는 여자축구에서 잊혀 진 이름이며 아무도 나의 공과를 따지거나 논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사명감을 스스로 깨닫고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나는 여자축구를 잊어 본 적이 없다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때 연구하고 가르쳤던 노하우가 소년 소녀들을 가르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지도자가 돼 있다는데 감사한다.
나의 작은 노력 그러나 가정을 희생해 가며 이룩해 놓은 일로 탄탄대로에 서 있고 월드컵 16강에 오른 오늘의 여자축구 잘 달려가는 오늘의 여자축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매우 감격적이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앞서 나가 남이 생각 치 못하는 일들을 계획하고 실천하려는 선구자적인 입장에서 상무여자팀을 창단하려던 계획이 많은 시간이 흐른 시방 팀이 창단돼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998호의 외침을 받아 쑥대밭이 될 정도로 외세의 말발굽에 밟혀 왔지만 우리어머니들이 강해 잘 이겨 나와 오늘날의 기적을 이루어 낸 것 아닌가
또한 남자보다 더 빨리 월드컵 16강에 올랐고 잘 만 키워내면 세계 제패도 가능하다 일본이 그렇고 북한이 최강국 아닌가?
1960년대 일본의 니찌보 배구팀이 세계를 수년간 제패오지 않았는가?
계획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몸무게중심이 위로 붙었고 체격이 알맞은 어린 소녀들을 선발 체계적인 훈련을 계속하면 충분히 세계 제패가 가능하다고 본다.
대우 증공업의 김규환 명장의 얘기를 들으면 그 분은 고아로 15세에 대우 중공업에 사환으로 들어가 글도 못 읽는 상황에서 이제는 명장의 칭호를 받으며 세계 특허를 수 십 개 또한 5 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며 이제는 각 기관에 다니며 강의를 하는 명사가 돼 있어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분이다
나는 축구에 미처 가정도 몰라라 하며 오늘에 이르렀고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현역 지도자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도 알아주지도 않지만 나는 열심히 최선을 다 하며 노력하고 연구하는 축구인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고 시를 쓰며 노래를 좋아해 잘 부르고 음악회는 찾아다니며 듣고 어린 영혼들을 사랑하여 그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며 가슴 저리는 영화를 좋아하며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노인이 돼 있다
내 마지막 꿈은 온드라스에 가 축구 굼나무를 찾아 키워 세계적인 선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초창기 여자축구에서 12명의 대표선수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내 손을 거쳐 현재 한국 축구계에서 활동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있다 육군과 상무에서 내 눈에 띄여 선수로 성공한 사례이다
내가 처음 부임할 때 (육군대표 감독) 내 나이 약관 33세 그때 생각한 것이 기존의 대표선수나 청소년대표출신보다 가능성을 가진 선수들을 찾아내 키우겠다는 생각을갖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아 들어가 수많은 무명선수를 유명선수로 국가대표로 키워냈다
그래서 들어올 때는 무명 선수였지만 나갈 때는 당당히 프로팀에 스카웃이 됐고 대표 선수가 되어 선수로 성공한 예가 많이 있다
한국축구계는 학연과 지연으로 꼭꼭 뭉쳐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비전을 갖고 있어도 펼쳐 보일 조건을 만들어 주지 안 는다
처음 초창기 아무도 여자축구에 관심조차도 없었고 볼모지에 맨땅에 헤딩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이제 제 자리를 잡아 놓으니까 우후죽순처럼 달려들어 내가 해 냈다 하고 소리친다.
진짜 여자축구의 산증인은 이영근 당시 여성분과 위원장과 죽은 최추경 교수와 서정호 홍속렬 이이우 윤홍근이다
입은 옆으로 찢어져 있더라도 말은 바르게 해야 한다.
공과를 따지거나 누가 잘 했다거나 가 아니라 이건 역사이고 진실이기에 기회가 주어진 시방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정도 몰라라해 가며 전력투구했던 이 노병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축구인……
그러나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기 때문에 헸으나 그 후유증은 한 가정이 받은 상처로서는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처를 부등켜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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