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Guitar 할아버지 / 엄기철
5년 전, 첫 손자로부터 할아버지라는 호칭대신 ‘기타’로 불리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뒤늦게 입문한 통기타에 빠져 연주하느라고 현을 튕기며 흥얼거릴 때 손자는 돌이 막 지나고 말문이 트일 무렵이었다.
사위 직장 따라 지방에 사는 관계로 어쩌다 한 번씩 올라왔던 이 녀석은 나를 만나면 매번 ‘할아버지’라고 반가는 대신 ‘기타’라고 외치며 품에 안기곤 했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청소년기였던 1970년 전후로 통기타를 기반으로 한 포크송이 대유행했다.
근간에 ‘트롯’이 대세이듯 그 시절 젊은이들은 통기타를 둘러메고 폼을 재며 우상 같은 인기 가수들의 흉내를 내었다. 트윈폴리오나 뚜아에무아, 라나에로스포, 은희,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서유석, 김민기, 사월과 오월, 양희은, 김세환, 어니언스, 이연실, 김정호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그 시절 방송가와 음악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도 한동안 음악 흐름에 젖었다가 군 입대와 함께 잠시 통기타를 놓았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기 시작하고 회갑이 지날 무렵부터 일상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퇴직 후 서실에서 묵향과 더불어 보람을 엮는 중에 뭔가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픈 욕구가 생겼다.
원인이라면, TV에서 진행하는 경연프로를 보는데 故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서정적인 가사가 심장을 두드려서 감동이 넘치는 바람에 가사를 곱씹어보다 유튜브를 통해 원곡가수가 부른 동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우수에 젖은 표정에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에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동네 ‘주민자치센터’ 문화 프로그램 현수막에 ‘기타 수강모집’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낙원동 악기상가로 달려서 통기타 한 대를 구입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모두들 나를 쳐다 보는듯한 부끄러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기타를 다시 만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습자(붓글씨)’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칭찬과 대회 출전이 나를 30대 중반에 서예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60대 들어 배운 통기타는 고등학교 시절, 어설프게 튕겼던 멜로디에 뜨겁게 반응했던 이웃집 여학생의 호응이 반추(反芻)되어 뒤늦게 통기타의 길로 들어선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사는가보다. 아무튼 6개월 기초반을 마치고 심화과정을 진행하는데 경험이 있어서인지 남들보다 진도가 빨랐다.
거기에다 유튜브를 통한 동영상 강의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노래까지 곁들이는 용기가 생기더니 드디어 작업실 한쪽에 연주실을 갖추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심하게 몰두하는 성격임을 스스로 알기에 아담하게 꾸밀 생각을 했다. 일 년이 지나서 이웃에 사는 음악인의 도움을 받아 통기타 연주실을 설치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그 분의 손을 거치니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데 앰프에 스피커, 반주기까지 마련하고 내친김에 고급 수제 통기타도 새로 구입했다. 운치를 살려보고자 ‘7080 통기타 사랑방 靜中動’이라는 현판도 걸었다.
고요한 서실에 간간이 음악소리가 섞여 시나브로 새로워졌다. ‘문방사우’와 ‘통기타 사랑방’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다가온다. 새로운 변화는 늘 설렘을 동반한다.
흥얼거리던 애창곡을 반주기와 연결된 노트북에 저장하고 보니 300곡이 넘었다. 더불어 손자, 손녀들을 위한 노래들도 잊지 않고 챙겼다. 그리고는 한곡, 한곡 기타로 익히기 시작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 1시간으로 정했다. 가끔이지만 제자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관객삼아 부르기도 했다. 그러노라면 “선생님, 노래 한 곡 청합니다.”라는 호응을 얻는 기쁨도 누렸다.
나를 ‘기타’라고 부르던 손자 녀석이 벌써 7살이 되었다. 손주 넷이 서실에 들이닥치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붓을 들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마이크 앞에서 경쟁하듯 노래를 불러대는 녀석들을 보노라면 에너지가 파도처럼 밀려와서 행복감이 넘쳐 뿌듯하다. 그런 손주 녀석들은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지금 문밖에는 봄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통기타가수 유익종의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를 흥얼거려 볼까 한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그리워 떠오르면 가슴만 아픈 사람”
내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지. 언제 들어도 명곡이다.
2021년 5월 4일 Gallery 秋藝廊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