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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침
행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행 3:1-10 /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 어느 날 오후 베드로와 요한은 3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2)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때였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하나가 실려 왔다. 그는 날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 살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다. 4)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여겨 보았다. 이윽고 베드로가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자 5)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6)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8)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9)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걸어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10) 그가 바로 그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날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인 것을 알자 너무도 놀라 말을 잃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일어나 걷게 됩니다. 이를 치료하신 하나님은 그 곳에 있던 무리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1-5) 사도행전 저자인 의사 누가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사람은 정상인으로 치료될 수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일할 수 없었기에 언제나 사람들이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옮겨 주어야 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공적 장소에서 구걸하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그가 선택한 것, 병에 걸린 것, 실수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면서 걷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 문 앞에 있던 이 사람은 오후 3시에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만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구걸합니다. 매일 성전에 모이는 무리가 자기들의 선행을 하나님께 보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성전 문 앞에서 자신의 가장 큰 문제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보다 시급한 것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구걸하는 것입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은 베드로의 말에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기만 합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함(6-10) 이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베드로와 요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나에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으로 하루하루 만족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시급한 문제 해결하기를 잊고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다. 동일하게 베드로에게도 그가 없는 것처럼 없지만, 네게 있는 것을 준다고 합니다. ‘은과 금은 ...네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베드로의 영적 부유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그것을 문제시 하지 않고 능히 그리스도를 더욱 귀한 줄 알고, 그 영적 부유를 남들에게 주려고 하겠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님의 대리자로 행동하거나, 예수님이 고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만 권능이 있음을 확신하고 한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치료 후에 일어난 기쁨에 넘친 응답과 함께 그 곳에 있던 무리들을 놀라게 합니다. 고침을 받은 그는 그의 영혼까지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육신의 병 고침을 받은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당신에게도 시간을 정해 매일 기도할 때,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과 삶의 모습이 똑같고, 능력이 없음은 똑같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모르고 나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복음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알아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3시를 가리킨다. 단 6 : 11 ; 9: 21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제 삼 시(오전 9시), 제 육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구 시 (오후3시)를 정해놓고 세번의 기도를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구속력있는 율법 규례가 아니라 나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루 구분법에 의하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시간이 되어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한다(출 29:39).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공식적 기도시간은 (1) 이른아침. (2)제 구 시, 즉 오후 예배 시간인 이 때 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오늘날도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다. 베드로와 요한 - (1)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 였다 (마 4 : 18, 21 ; 눅 5: 10). (2) 세례요한의 때부터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요 1: 37, 42) (3) 개심 후 함께 사도직을 받은 동료 였다( 1: 13 ; 마 10 : 2). (4) 특별히 예수께 인정받고 사랑을 입은자들이었다 (마 26 : 37 ; 눅 8 : 51 ; 9 : 28). (5)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행동을 같이하던 친밀한 친구였다(눅 22 : 8 ; 요 18 : 16). (6)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동역자 였다(8 : 14).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인 베드로와 조용하고 차분한 요한은 성격적으로 많은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사람은 모든면에서 함께 행동하였다(눅 22 : 8 ; 요 13 : 24,25 ; 18 : 16,17 ; 20 : 2). 따라서 이들은 12제자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며 지도자 (lwader)로 부각된 인물들이었다. 성전에 올라갈새 - ' 올라갈새'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바이논'(* )은 미 완료 시제로서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어떤 동작 및 과정을 아주 시각적으로 인상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으까? 여기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유대인의 율법 의식을 따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기 보다는 그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서 올라갔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전의 위치가 지형상 높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종교상의 경건한 측면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11 : 2 ; 18 : 22 ;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투'(* )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 태에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하나' 가 된다. 이것은 그가 중간에 사고로 다친것이 아니고 태어날때 부터 40세(4 : 22)가 되는 지금까지 하체가 마비된 고통을 지닌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성전에 들어가는...구걸하기 위하여 - 그는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동냥하여 살아가야 했다.더욱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매번 다른 사람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걸인(乞人)이었나. 한편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를 구태여 성전 문 앞에 둔 이유는무엇일까 ?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매우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이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아는 걸인들이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걸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성전 문앞이야말로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고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 미문(the Beautiful Gate) 이라는 이름은 외관상으로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분분하다.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 동편의바깔 문인 슈산 문(Meyer, Alfird), 또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Knowling, Alexander) 의 양설이 주로 언급되나 후설이 보다 유력하다. 기원 후 5세기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또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그대로남아 있던 동문 혹은슈산문(그 문이 수산 궁전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을 본문의 미문으로 동일시하여 왔었다. 그러나 유머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와 미쉬나(Mishnah)의문서인 '미도트'(Middoth 1 : 3, 4 : 2. 3 : 성전규모와 그 건축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의 기록에의하면 니카노르 문(Nicannor Gate)과 동일시하고있다. 이 문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가치상으로 볼 때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두는 자라 - '두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둔'(* )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매일매일 반복되어 앉혀지는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3:3
구걸하거늘 -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평상시 방법대로 구걸한다.그런데 '구걸하거늘'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로타'(* )는 미완료시제로서 구걸의 행위가 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무엇을 받으려는 그때의 정황을 잘 묘사해 주는 누가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간절하고도 정중하게 한 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아무튼 그는 무엇을 구해야 진정한 삶을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않은 가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종들을 향해서도 물질적인 적선(積善)을 구하고있는 것이다.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 혹자는 베드로가 혼자서 말했음과 걸인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본문의 기적 행위가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으로더불어'라는 표현은 후대에 와서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anechen). 그러나 이는 별 호소력이 없는 주장으로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 기적행함에도 똑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성령의 능력따라 행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은 행동파적인 기질이 있어 그의 적극적인성격을 반영한다. 지난날 12제자와 함께 있을때도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代辯者)역할을 서슴없이 하였었다(마 16 : 13 -16). 따라서 여기서는 누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활동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크신능력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사실에 초점이 있을진대, 요한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이 기적의 사건에 참여한 것이다(J. Calvin, Lenski). 동시에 행동파 베드로와 사색가 요한이 함께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원문상으로는 '주목(注目)하여'의 헬라어 '아테니사스'(* )란 말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데'(* ,그리고') 이하는 걸인이 마흔살이 되는 지금까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일이 전개됨을 보여 준다. 또 '아테니사스' 란 말은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집중된 응시를 의미하며1 : 10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자세히 쳐다 보다'로 번역된 말과 같은 동사다(눅 4 : 20). 그렇다면 왜 주목하여 보았을까 ? (1)13 : 9에서와같이 사도가 집중적인 웅시의 동작을 취한 것은 이제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필요한 내적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2)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된 이 사람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쳐다봄으로써 걸인으로 하여금 사도를 주시하게끔 하기위해서다. 즉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갖기 위해서이다. (3)내재하시는 성령의 지도와 그 역사하심을 따라 행동하던 사도들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구걸을 받자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에 의해서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Calvin). 여기서(1) 의 견해는 성경의 기적을 이적 설화로 취급하는 비판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으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2)와(3)의 주장은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따라로 명령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이제 앉은뱅이가 돈 몇 푼을 구하는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訴願)하도록 요구한 말이다. 즉 자신에게 신기하고도 이례적(異例的)인 하늘의 축복을 소망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3:5
바라보거늘 - '에페이켄'(* )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서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아니라 그의 주의를 사도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 앞에'눈을'(* ,투스 오프달무스)이란 단어를 첨가하면 더욱 생동감있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걸인이 무슨 마음으로 또는 왜 쳐다보았을까에 대해서는 다음과같은 견해가 있다. (1)자기에게 동냥을 주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 걸인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단순히 쳐다본 것이다(Haenchen). (2)보통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까지 말한 그들에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쳐다본 것이다(Lenski).(3) 기적을 일으킬 만한, 즉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았다(E.M. Blaiklock). 그증거로 병고침받은 자들에게는 대개 믿음이 있었다는 점과(막 6: 34,36) 그가 고침을 받은 후 즉시 하나님을 찬미한 것을(8절) 제시한다.따라서 베드로가 그의 믿음을 보았다는 것이다.그러나 당사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병고침을 베풀어 준 사례들을 생각할 때(요 9 : 1-12) 이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하겠다. 따라서 걸인의 신앙 행위는 기적이일어난 후에 생긴 것이라고 보나 렌스키의 견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할 수 있겠다.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앉은뱅이에게 보기드문 기대감을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은과 금을 구하던 걸인으로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곧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했기 때문에 낙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제 베드로의 이 선언을 통해서 돈 몇 푼이 아닌 자신의 처지에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빛을 기대하는 희망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있겠다. 따라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곧바로 선언되는 베드로의 선포는 앉은뱅이로 하여금 어떤 신기한 기대감(期待感)을 갖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베드로의 선언속에서 우리는 (1)물질의 소유에 초월해 사는 사도들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으며 예수의 말씀대로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과(마 10 : 9) (3)혹 물질이있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의 필요를 따라'교회 공동체에서 공동 관리하였다(2 : 44, 45)는추측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하며 사도들에게 물질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뜻따라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하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차원에서 그렇게 선포한 것이다.한편 본 구절이 궁핍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를 금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교회의 역할이 물질적 도움보다는 영적 구원에 집중되어야 함을가르치는 말씀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본문의 앉은뱅이 또한 육신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다(7절). 다만 본 사건은 사도들의 궁극적 관심사가 신체보다는 영적 치유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은과 금,즉 세상의 보화들을 배설물로 여겨버린 자들이었다(빌 3 : 8). 여기서 '이름으로'라고 표현한 것을 먼저 주목해 보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및 본질 즉 그 사람의존재를 대표해 주는 것이었다(주제 강해 창 25:19-16 '이름 짓기'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이름이란 그 사람 인격(人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믿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사렛은 천한 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야였으며 그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걸으라 - '페리파테이'(* )란 말은 시작과 계속의 개념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서 '걷기 시작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 명령은 주님이 뜻을 선포하는 말씀이므로 놀라운 권능을 동반하는 권위있는 선언이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문자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에 항변(抗辯) 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한 것을 보아 그가 베드로의 권위있는 명령을 듣고 믿었음알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명령과 함께 성령의크신 역사가 순간적으로 불쌍한 걸인에게 임하게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이 '걸으라 '는명령과 함께 성령이 얼어붙은 영혼을 혼들어 놓았던 것이다. 40년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다.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신유(神癒)를 베푸는 자의 신비한 능력을 치유받는 환자에게 전달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손수 불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인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을 더욱 복돋아 주기 위하여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 된다(John Joseph H. Mayfield). 발과 발목이 - 앉은뱅이가 치유될 때의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특수한 단어들은 한결같이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로서 그의 전직이 의사였음을 여실히 드러낸다(Kowling). '발'의 헬라어 '바세이스'(* )는 '발바닥' 또는 '발꿈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목'의 헬라어 '스퓌드라'(* )는 ' 복사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 의학적용어이다(Henry Alford). 곧 힘을 얻고 - 이것은 앉은뱅이가 걷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기 때문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제 당장 발과 발목에 기이한 힘이 생겨 정상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치유받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반 법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3:8
뛰어 서서 걸으며 - 본 구절에 대한 헬라어 '여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테이'(* )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는 뛰어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한 것은 사도가 그에게 명령한 그대로 일어나 걷고뛰기 시작했으며 또한 계속해서 걸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는(1)베드로의 말이 허풍(虛風)을 떠는 빈 발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실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생하게 입증하는것이며 따라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의 놀라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나아가 이 기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 : 6)라는 메시야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적(sign)이 된 것이다. (3)40여년 동안 불구의 앉은뱅이 신세로 침상을떠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기운차게 표시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앉은뱅이였던 그가 꿈만 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어 걷게 되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맨처음 들어간 곳은 성전이었다. 이는 자신의치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기서 '뛰기도'(leaping up)의 헬라어 '할레스다이(* ) 뛰어 오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마치 놀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또는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힌 새가 풀려나 창공을 날아가듯이, 혹은 개집에 매여 있던 개가 풀려나 사방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듯이 신바람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 100 : 4)라는 시인의 노래는 새롭게 얻은 몸으로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여 사도의 뒤를 따라 성전에들어가는 이 사람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니 -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치료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으니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미함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이렇듯 찬송은 은혜를 입은 자가 마음에서부터 드리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고 입술의 제사임을 본다(히 13:15).
=====3:9
모든 백성이...보고 - 기적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획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 앉은뱅이 걸인은 수 년 동안의 구걸로 인해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따라서 그의 신원(身元)이나 치유 사실의 여부에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3:10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기이히 여기며'의 헬라어는 '담보스'(* )로 어떤 행위를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음등을 말한다. 그리고 '놀라니라'의 '에크스타시스'(* )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 상태를 말한다(막 1 : 27 ;10 : 24, 32 ; 14 : 33 ; 16 : 5,6 ; 눅 4 : 36). 이처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정신을 차릴 수없을 정도로 심히 놀라게 하는 것은 기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첫단계의 모습으로서 기적 자체가 갖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놀라음의 반응이 그 이적을 일으키신 분께 대한 믿음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서, 그 이적이 시사하는 바인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서도 단지 그 이적에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출4 : 2-9 ; 요 11 : 40- 42 ;롬 15 : 18, 19)
< 설 교 >
가장 좋은 원래적인 것
이정익 목사 / 행 3:1-10
사도행전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이루어진 행적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보면 부활의 증거들과 부활을 통해서 얻은 능력들의 결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역사의 한 분기점입니다. 인류에 전환점을 제공하였고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가장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변화 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예수 부활이전의 베드로는 용렬하고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부활 후 엄청난 변화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변화를 받은 베드로가 성전에 나아가 전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구걸하는 거지 앉은뱅이를 향하여 “내게 금과 은은 없으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예전의 베드로 모습이 아닙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다”, 전도자는 금과 은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은과 금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와 하나님 사역은 금과 은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선교가 실패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그 삶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이름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현장에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때 그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동반하며 회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복을 빌며 사역하여야 합니다. 어느 군목이 소위로부터 심방을 요청받았습니다. 이제 갓 결혼하여 부임해 온 소위입니다. 그 군목은 심방을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빌고 큰 군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잊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목사님은 제대한 후에 어느 부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부대의 부대장은 3성 장군인 중장이었습니다. “제가 30년 전에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해 준 것은 잊었으나 그 군인은 이미 큰 군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교회부흥도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전도도 내 이름이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때 그 현장에 회심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한 것도 예수의 이름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예수의 이름으로 그는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삶은 참 단순한 삶입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여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회심의 역사도 치유의 역사도 동반합니다. 원래 복음은 이렇게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구원의 방법은 이렇게 간단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간단한 구원의 방법들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이론화 하고 제도화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파가 생기고 분열하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원래적인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오늘 찬송도 많아 나왔지만 어렸을 때 부르던 찬송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흰 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겼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던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이 내용들을 보면 아주 원색적인 복음을 말하고 신앙고백을 말하고 복음을 말하는 내용들입니다. 아주 구원관이 분명하고 확실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찬송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찬송들이 다 사라지고 자꾸만 막연한 내용의 찬송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러도 감동이 없고 들어도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또 전도도 “예수 믿으세요,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가 가장 좋은 전도법입니다. 가장 원색적인 전도 방법입니다.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잠을 잘때마다 그 말이 위력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래서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달리 해석도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믿으세요,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이 보다 더 강력한 전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이 전도방법에도 미사여구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원대한 계획을 세우 셨습니다.” 여러분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꾸만 복음이 희미해지고 초점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것이 다 이렇게 의미를 상실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간단화”입니다. 신앙이 너무 간단화 되어버렸습니다. 빨리빨리, 간단 간단히 가 결국 오늘 신앙을 형식화 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옛날에는 부흥회도 한 주간씩 하였습니다. 그때는 성령의 역사도 치유의 역사도 동반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좋은 전통이 너무 간단화 되고 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회심의 역사도 성령의 동반역사하심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과 신속함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기차가 빠르고 비행기가 더 빨라졌지만 그 빠름 때문에 주위의 분위기를 보고 관찰하는 과정은 생략되어 버렸습니다. 자전거는 느리지만 주위를 보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습니다. 빠른 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만찬은 가톨릭이 그 고유성을 더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시간씩 성찬을 받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교회에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이 전통과 과정마저 깨어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떡은 받는데 잔은 번거로우니까 사제만 받고 생략되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이 간단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결국 형식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한 의미와 틀과 내용이 살아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간단화가 위기입니다.
또 하나는 “변질”입니다. 의미가 상실되니까 그 내용이 변질되는 것은 순서입니다. 영국이나 스코틀랜드는 기독교 신앙의 발상지입니다. 신앙개혁의 발원지입니다. 존 웨슬레는 그 신앙개혁의 주인공입니다. 18세기 영국을 영적 혁명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한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감리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는 종교개혁을 이루어 장로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참신한 신앙을 위해서 청교도들이 태동한 개혁신앙의 발원지입니다. 그때는 그 큰 예배당들이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곳에 눈물도 회개도 변화도 기적들도 수반되었을 것입니다. 호사다마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싹텄습니다. 다원주의 신앙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오늘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그 큰 예배당들이 텅텅 비어 있습니다. 오늘 영국인들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6-70%라고 하는데 실제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2-3% 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도심의 그 큰 예배당들이 주일날이면 노인들만 5-60명 나오고 여행객들을 포함해서 100여명이 예배드리는 실정입니다. 그 결과 오늘 교회들이 유지가 어려우니까 매매광고가 신문에 나오고 때로는 카페로 팔리고 회교도들에게 팔려나가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전통이 얼마 있으면 한국에도 그대로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신앙의 간단화 때문입니다. 그 간단화는 마침내 신앙의 변질로 나타나고 그 변질은 의미상실로 나타나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복음의 세계뿐만이 아닙니다. 오늘은 모든 부분이 이 시류를 타고 있습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오늘의 음식에는 순수함이 사라지고 조미료들을 넣고 색깔을 요란하게 넣어 만들어 놓습니다. 이제는 음식도 변질되었습니다. 옛날 먹던 음식에는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었고 건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든 음식에는 자연스러움이 다 없어졌습니다. 또 사람들이 생수가 제일 좋은 음료인데 생수의 맛이 밋밋하니까 톡 쏘는 가스를 주입시켜서 탄산음료를 만들어서 내 놓았습니다. 처음 그 음료수를 마실 때는 톡 쏘는 것이 시원하고 맛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오늘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원래 마시던 생수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생수는 맛이 밋밋한데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생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짜릿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짜릿한 것은 얼마 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짜릿한 것이 오래가면 안 됩니다. 오늘 사람들이 짜릿함을 찾아다니는데 바로 그것이 병입니다. 짜릿함은 생명이 짧습니다. 또 생명이 짧아야 합니다. 그 짜릿함이 오래 수십 년씩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남녀가 함께 만나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면 짜릿합니다. 남녀가 서로 손만 닿아도, 앞에 서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한두 해 살면 그저 그렇습니다. 그것이 알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평생 마주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손만 잡아도 짜릿해 보십시오. 날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짜릿한 것은 잠깐이고 밋밋한 것이 오래가며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원래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원래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야 자연의 소중함을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보호를 말하고 생태계 보전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파헤치고 나무를 베어내고 물을 더럽혔습니다. 그 결과 오늘 이 지구상에 매년 홍수와 산사태와 가뭄과 지진으로 홍역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바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간이 탐욕을 부린 결과 대 재앙을 맞이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영화입니다. 아바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바따라”(avataara)라는 말입니다. 지상에서 내려온 신들의 화신, 분신이라는 뜻입니다. 제작비만도 5억 달러가 들어갔다고 하는데 영화의 스토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인간이 지구자원이 고갈되니까 대체에너지를 찾아 우주로 나서서 판도라라는 행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행성에는 에너지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인간이 개발하기 위해서 거기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그곳 원주민은 푸른색 피부를 가진 나비 족들이 살고 있는데 키가 3미터나 됩니다. 그곳은 행성 전체에 해로운 가스로 가득 차 있어서 사람은 특수 마스크를 써야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나비족 DNA를 복제한 아바타라는 인간을 복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을 링크시킨 제이크 설리라는 퇴역군인을 투입합니다. 이 설리가 나비족에게로 가서 그곳 정보를 입수하여 그 정보를 토대로 무력으로 나비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파멸시키고 그곳에 매장된 에너지 자원을 차지한다는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이 설리가 마침내 판도라 행성을 지구의 지배하에 두고 그 행성을 무력으로 깔아뭉개고 자연을 훼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인간욕망에 마침내 분노하게 되어 주인공 설리가 태도를 바꿔 나비족과 함께 인간의 무력에 대항해 싸운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인데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인간들이 인간세계를 다 파멸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행성까지 가서 그 땅을 또 파헤치려는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저지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이 세상이 다 오염되어 있습니다. 모든 식물에는 농약을 치니까 벌레들이 더 강해지는 이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오늘 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어 근래에 와서 유기농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땅에 농약을 치지 말고 옛날처럼 퇴비주고 거름을 주어 식물을 재배하여 건강한 야채를 생산하여 인간의 건강을 지키자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기농을 하려고 농약을 안치면 식물이 자리지를 못하고 벌레들이 다 먹어치웁니다. 이것이 오늘 고민입니다. 요즘 “기적의 사과”라는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일본 아오모리 현 기무라 아키노리 씨의 이야기입니다. 기무라 아키노리씨가 매년 13차례 농약을 치던 과수원에 어느 날부터 농약을 끊었습니다. 그러니까 벌레들에 공격을 받은 과수들이 서서히 시들어 가다가 마침내 사과나무가 꽃이 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8년간 나무가 죽어 가는데도 농약을 치지 않고 무농약을 고집한 결과 마침내 땅에 지렁이가 나타나고 개구리가 모이고 메뚜기가 나타났고 8년째 되던 해부터 죽어가던 사과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다음해 9년째 되던 해 6만평에 심겨진 사과나무에 흰 꽃이 피어 들판을 뒤덮었고 그해 가을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가을 아오모리 현에 큰 태풍이 불어 모든 사과들이 다 떨어져 농가들이 치명타를 입어 모두 8천억 원의 피해를 입혔는데 그런데 그 집만은 사과열매들이 그대로 매달려 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열린 사과를 일컬어 기적의 사과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 사과를 먹으려면 1년 반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 사과는 반으로 잘라 놓으면 일년가도 시들기는 해도 썩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은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 좋은 땅을 인간 스스로가 망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상이 이런 재앙을 만나게 되었고 그 땅에서 열린 열매를 먹다 보니까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늘에 와서야 원래의 것이 좋다고 고백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의 것이 최고 좋은 것입니다. 신앙도 원래의 은혜가 최고입니다. 보혈의 복음 죄 사함의 은혜가 최고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원래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곧 재앙이 옵니다. 두 번째는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근본의 복입니다. 어떤 분이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집이 컸습니다. 서재에 신앙서적들이 가득 꽂혔습니다. 그 사람의 장인은 목사였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 -7시까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영적교제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손님을 모셔놓고 어느 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예수를 모릅니다, 예수를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재물이 있습니다, 학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만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복이 예수를 믿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예수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은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안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불행이 어디 있습니까. 세 번째는 예수로부터 주어지는 힘을 입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살아갈 때 예수의 힘을 입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였지만 예수님 부활 이전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습니다. 말은 수제자였지만 수많은 실수를 연발하였습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진정한 베드로가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나가 그는 새롭게 변신을 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때 일어났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향하여 “내가 네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당당하고 확신에 찬 고백입니까. 그러니까 그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힘을 얻고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시대를 불문하고 변치 않는 영적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힘 있는 영적 삶이 주어졌으면 합니다.
체험의 신앙으로
임덕순 목사 / 행 3:1-10
금년도 표어는 ‘새롭게 하소서’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달라고 간청하는 표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새롭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까 마지못해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새롭게 되라고 하셨고,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의심쟁이 제자인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동료들에게 듣고서도 믿지 않으면서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마침 주님이 찾아오셔서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가락으로 내 창 자국에 넣어보라”고 하셨고 도마는 염치 좋게도 손가락으로 못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본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삶이 변하였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삶이 새로워지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셨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 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서 삶과 신앙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마흔이 넘은 앉은뱅이 거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고 삶이 새로워진 내용입니다. 성전 문간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는 어디를 가나 남들이 싫어하는 불청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만나서 고침을 받았고, 그날로 새 인생을 출발했으며,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였고, 그 사건을 일으킨 사도들도 용기와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도 않았고 전도하지도 못하도록 위협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평생을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켰고, 그 사람은 그날로 앉은뱅이 생활에서 벗어나 새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너무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에서 그것을 배우며 한해를 시작합시다.
첫째, 미문 곁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편에 난 문으로 Beautiful Gate라 불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고, 성전에 들어가는 미문은 하나님 만나러 가는 통로였습니다. 신약시대로 말하자면 미문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은 미문 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하러 가는 사도를 만났고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답답하고 괴로운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며, 앉은뱅이처럼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넘어지고 실패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오는 곳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나아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생활을 해보려고 나오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노력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밖에 의지 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나아오는 곳입니다.
미문간의 앉은뱅이는 성전 앞에까지 오기는 왔지만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문간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푼돈을 구걸했습니다.
오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만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앉은뱅이처럼, 교회에 나오기는 나오는데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깊은 신앙생활을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문간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고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면서 그렇게 교회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전 문 앞에서 사람들만 만나서 그들에게 손을 벌리지 말고,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을 체험해야 우리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 앉은뱅이와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보시고 그 문간으로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제대로 믿지 못해도 열심히, 결석하지 않고 교회에 나와 앉아있기만 해도, 어느 날에는 은혜를 주시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좀 더 적극적으로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사모하며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부지런히 나오는 것만도 축복입니다. 금년도 교회출석을 한번도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제3시, 6시, 9시 등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제 9시는 지금의 시간으로는 오후 3시에 해당하는데, 그 기도하는 시각에,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미친 여자를 고쳐준 것 때문에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그 억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하였더니 그 기도하는 시각에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린 것처럼,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가이사랴의 고넬료는 이방인인데도 제 9시 기도를 하다가 천사를 만나고 베드로를 청하여 복음을 듣고 자신만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까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잡아 깊은 옥에 가두었는데 교회는 밤을 새며 그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두 명의 군사에 사이에서 사슬에 매여 자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사슬을 풀고 베드로를 석방시켜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로 돌려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기적은 기도하는 시각에 일어납니다.
기적중에 불치병이 낫고 실망한 사람이 용기를 얻고 실패한 사업이 재기되고 망나니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는데, 허망한 물질에 목매달던 사람이 생명의 구원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손 내미는 일이며, 지난날의 자기 생활이 죄짓는 생활이었음을 깨닫고 죄 사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저 주셨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영접하고,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이 가장 큰 기적이요 가장 큰 체험입니다.
제 9시 기도시간은 오후 세시쯤인데, 그 시간은 일의 능률이 가장 잘 오르는 시간이고, 오늘 할 일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간이고 내일 할 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고 바쁜 시간이고, 가장 피곤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쁜 것이나 나른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 시간을 쪼개 쓰는 사람들이 제 9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가 나타났고 앉은뱅이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겐 어떤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어떤 시간이 드리기 힘든 시간입니까? 새벽시간 입니까? 밤 시간입니까? 언제가 가장 바쁘고 언제가 피곤한 시간입니까? 그 귀하고 바쁜 시간을 기도하는데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해마다 제 9시 기도시간을 갖습니다. 봄가을로 밤마다 모여 40일을 기도하는 특별기도회가 그때입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내일을 위해 잠을 자 두어야 하는 시간을 육체의 피곤을 푸는데 쓰지 않고 하나님과 마주 대하여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께 바쳐 기도하는 성도들이 우리교회의 기둥 노릇을 해 왔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가장 귀한 시간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비결입니다. 올해는 개인적으로도 제 9시 기도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귀한 시간, 가장 바쁜 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간구하는 생활을 하셔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여러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체험과 간증의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 즉 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천지의 주인이요 만물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노니 일어나라 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은 돈 많은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는 돈이 있으십니까? 선교와 성전건축을 위해서 드릴만한 넉넉한 돈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좀 해보고 싶은데 손에 쥔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는 않으십니까? 올해는 내가 헌금을 많이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증거하여 돈으로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거지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지금 돈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돈이 없었고 한 알의 약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앉은뱅이 거지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으니까 얼른 지나가자 하고 지나쳐 간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돈은 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네가 알지 못하지만 너에게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우리는 줄 수 있다.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돈이 없어서 헌금 많이 못한다고, 건강이 없어서 몸으로 봉사 못한다고 기죽어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나는 기도할 수 있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하겠다고 당당히 나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는 사도들에게는 은과 금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정말로 믿느냐, 무슨 문제든지 기도로 풀 수 있다고 믿느냐 하는 그 신앙이 재산이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의 기도가 있으면 금년도에 자신도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다른 성도에게도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는 분은 예수님뿐이고, 내가 배운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내 놓을 것은 주님의 이름뿐이고,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주님의 은혜뿐입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이 겁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누구에게서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한가람 성도들이 이렇게 기도의 능력을 갖고 올해를 살아가면서 날마다 주님과 동행 하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신앙과 삶이 새롭게 되는 올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목하여 바라보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 보면서 "우리를 보라"고 하였을 때, 앉은뱅이는 제자들이 동전이 아니라 지폐를 주려나? 하는 마음으로 사도들을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는 은과 금은 없으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으면서 뭘 주목하래?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하고 주목해 보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얻을 줄로 믿고 바라보는 그 시선, 이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건입니다. 무엇을 얻을 줄로 알고 주목하는 신앙, 기대감을 가지고 사모하는 신앙, 이것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바로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사도들을 바라보는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들은 설교 시간에도 그렇게 주목하여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서 예배가 끝나야 다음에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 가 봅니다. 그것은 주님을 주목하는 태도가 아니고, 그런 태도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40장에 보면 “소년도 곤비하며 장정도 넘어지고 자빠져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앙망한다는 말은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집중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어느 꼽추처녀가 목사님께 와서 “기도 한 번만 해 주시면 제 병이 꼭 나을 것만 같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해 주고 눈을 떠보니까 여전히 꼽추더랍니다. 목사님은 미안하기도 하고 낙심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그 처녀는 대단히 밝은 얼굴로 “목사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나를 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꼽추가 아닙니다. 나를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라고 감사를 하더랍니다. 그런 생활을 두 달째 계속하며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영자야" 하는 소리가 들려서 마루를 닦던 그녀가 "예"하고 일어서는 순간에 우두둑 하고 허리가 빠지면서 꼽추가 펴지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이 체험하는 기적이고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교회 안에서도 금년에 이런 일이 여러 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눈을 위로 하나님을 향하여 들고 하나님을 주목하여 바라봅시다. 어떤 날에, 어떤 말씀이, 어떤 계기로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만지시고 고치시고 기적을 베푸실지 모르니, 우리는 날마다 사모함으로 기도하면서 올해 우리를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생활을 합시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체험을 주십니다.
풍랑 이는 바다의 파도를 밟으면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갔던 베드로처럼,
돌로 자기를 치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만을 쳐다본 스데반처럼, 아람군대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하늘의 천군을 보라보고 담대했던 엘리사처럼,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답답할 때도, 위급할 때도, 힘겨울 때도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봅시다. 그리고 기도하십시다.
사람들은 돈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에 관심이 높습니다. 무엇에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관심을 집중하고 뜬소문에 주목하면서 주가를 체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렇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우리의 지난날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여호와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 날마다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기도에 힘쓰는 성도가 되셔서 하나님께 붙들리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킬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40년 동안 앉아서만 살았던 그 사람, 베드로의 말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강하게 잡아 당겼습니다.
우리 같으면 “나를 가지고 장난하세요?”하고 기분 나빠 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앉은뱅이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를 잡아당기면서 일어나라니? 나를 놀립니까?” 라고 대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따라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켜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이 잡아당기면 본인도 일어서려고 노력을 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행 14:8-10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주님이 잡아당길 때 반응하여 일어서는 나의 노력,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목사를 세워서 말씀으로 여러분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게 설교입니다. 앉은뱅이에게 일어서라고 했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무리한 명령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새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주일날은 문을 닫아라. 아직 믿지고 있는데 십일조를 해라. 내 시간도 모자란데 성경공부해라. 기도하러 와라. 전도하러 와라. 이렇게 여러분을 잡아 일으키는 것이 무리처럼 보일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사세요! 십일조 하세요! 기도하세요! 봉사에 동참하세요! 선교에 힘을 더 쏟고, 한 선교사 후원의 꿈을 접지 마세요.”라고 목사가 설교할 때 그것을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일으키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느끼시지는 않습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씀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안돼요, 제 형편을 좀 알고나 말씀하세요.”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으십니까?
말씀으로 잡아 일으킬 때 따라 일어서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의 종이 잡아 일으킬 때 나는 안 된다고 주저앉지 말고 말씀을 따라 일어서셔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앉은뱅이인 줄 몰라서 잡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가 앉은뱅이인 것을 알기에 일으켰습니다. 그에게 기적의 체험이 필요하기에, 새 출발을 해야 하겠기에, 기적일 일어나야만 되기에,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줄을 믿고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가 언제까지나 앉은뱅이로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고치려고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도 일어섰습니다.
잡아당기는 주의 종의 믿음과 따라 일어서는 성도의 믿음이 합해질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에 순종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을 믿고 올해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이끄실 때 순종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보험계약을 할 때 그 회사의 사장과 계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사의 대리자인 보험설계사인 외무사원과 합니다. 그러나 계약서는 대표이사 사장의 이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 계약이 체결된 시간부터는 기재된 계약대로 회사가 책임을 져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종들은 주의 명령대로 전하고 가르치고 권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믿고 순종하면 그 다음은 주님이 책임 져 주십니다.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하셔서 금년에 모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여 새롭게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성전 미문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문간에만 앉아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구하는 교인이 되지 말고, 성전 깊이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들어갑시다. 제 9시 기도시간 같은 중요한 시간을 내어 함께 기도합시다. 반드시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씀에 주목합시다.
교회에 나오면 사람에게 주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을 찾아온 나를 오늘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님을 앙모합시다.
주의 종들이 말씀으로 여러분을 잡아 일으키면 나는 안 돼요 하면서 버티지 말고 벌떡 일어섭시다. 그러면 우리가 올해는 하나님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무한한 능력을 체험하고 나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기뻐 뛰며 찬양하는 신앙으로 바뀔 것이고, 이웃에게 자랑하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가 뛰어 성전에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 같은 그런 기쁜 역사, 승리의 역사가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가득 하여 우리가 모두 새롭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대보다 5000배 받다
강문호 목사 / 행 3:1-10
카나다 집회 중에 집사님 한 분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카나다에 이민 와서 버섯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잘 되는 지 돈을 삼태기로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40억을 주고 딸에게 30억을 주었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거품을 물고 신나게 이야기하는 데 부러웠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대보다 더 잘 된다면 얼마나 신날까요?
베드로부터 봅니다.
베드로는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근근히 살아가는 어부였습니다. 맑고 찬 호수 물이기에 밤에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낮이면 다 보여 고기들이 도망치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고기 잡이 나간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기대는 배 한 가득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망입니다. 단 한 마리도 잡지 못 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피곤이 더욱 겹치는 것같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두 배 가득 채웠습니다. 기대는 한 배였는 데 현실은 두 배였습니다.
기대보다 잘 되는 생을 살아가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또 있습니다.
5000명이 벳세다 광야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허기져서 돌아가지 못 할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세 가지 핑계를 댔습니다.
<빈들입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200 데나리온도 부족합니다.> 모두가 허기를 때우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5000명이 다 배불리 먹고 12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은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기대 이상의 열매를 거두는 삶은 신나는 생애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앉아 구걸하던 거지를 일으킨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최고로 유명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뿐입니다. 온 국민이 모이는 국민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문앞에서 40년 동안 구걸하던 거지가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이 성전에서는 하루에 세 번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침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회에 참석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갈 때였습니다.
거지가 언제나 그런 것처럼 구걸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국 달라스 신학교 세이프 학장은 이 거지에 대하여 세밀한 분석을 하였습니다. 이 거지는 이스라엘 거지 왕초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국에서 가장 명거지 명당자리가 성전 문앞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최고 좋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그토록 오래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거지 왕초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돈을 주려고 하였으나 돈이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거지 손목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앉은뱅이는 갑자기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더니 일어나 걷고 또 뛰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기적을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앉은뱅이는 기대이상 받았습니다.
앉은뱅이는 돈을 요구하였는데 기대이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달걀이 껍질, 흰자위 그리고 노른자위로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데 사람들도 영혼육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영혼육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대이상으로 받았습니다.
앉은뱅이가 뛰는 사람으로
육적으로 도저히 걸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적은 평생을 두고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구걸이 구제로
그리고 혼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기대이상이었습니다. 평생을 흥분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구걸하던 사람이 구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상상도 못 하던 일입니다. 도저히 기대하지 못 하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0여년을 구걸하던 이가 이제는 구걸을 멈추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가 구제하였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보다 못 한 이들에게 구제하여야 합니다. 많이 하였는지 적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구제하였습니다. 구제를 연구하는 민족입니다. 심지어 구제받는 사람도 구제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제는 매일 밥 먹고 자는 것과 같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칙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제할 사람이 앞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때문에 축복을 주시기 때문에 축복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사도행전 4장 22절을 보면 나이가 40세쯤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고 하였습니다. 40년간 땅에만 붙어 살던 이였습니다. 그러나 본문 9절을 보면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앉아 살던 사람이 뛰면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대 이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단 한번도 걸을 수 있으리라, 뛸 수 있으리라 기대하여 본 적이 없습니다. 아예 앉은뱅이로 체념하고 살았던 이였습니다. 기대 이상의 역사를 맞이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대이상의 삶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에게 내가 기대하였던 것을 넘어 놀라운 방향으로 생이 틀어지게 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기대 이상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 시간에 앉은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고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앉은뱅이를 만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메고 오자 말자 만난 것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앵벌이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온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려고 하여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은 것이 아니라 뛰었습니다. 앉은 뱅이 한 명만 구원하고 싶었는 데 5000명이 구원받았습니다. 기대보다 5000배를 받았습니다. 하루에 5000명이 예수믿는 믿기 어려운 기대한 것 이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대 이상을 거둔 사람들입니다. 앉은뱅이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우리 온 성도님들도 모두 기대 이상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기대 이상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오늘의 주인공 앉은뱅이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중에 눈에 띄는 말씀이 네 단어가 있습니다.
1. 날마다
2. 성전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3. 기도시간에
4. 예수 이름으로
1. 날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2)
이 앉은뱅이가 기대 이상의 축복을 받은 것은 40년을 <날마다>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꾸준하게 끈기있게 한 가지 일에 전념하더니 기대이상의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팠던 결과입니다. 쟁기를 붙들고 뒤를 보지 않았던 보상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날마다 꾸준히 하여야 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세계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세를 물어 보니 87세였습니다.
<할아버지! 87세인데 어떻게 잔병하나도 없이 그렇게 건강하게 세계 여행을 하세요?>
할아버지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날마다 일십백천만해!>
무슨 말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날마다 하루에 한가지씩 좋은 일을 합니다. 거리 청소를 한다든지 지나는 마차를 밀어 준다든지 여하간 하루에 한 가지씩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좋은 사람을 10명씩 만납니다. 그리고 하루에 아무리 바빠도 글자를 100자씩은 씁니다. 그리고 하루에 글자를 1000자 이상 읽습니다. 독서를 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꾸준히 하면 기적이 있습니다.
용기는 시작하게 하고, 끈기는 계속하게 하고, 믿음은 완성하게 합니다.
끈기가 있으면 기대를 넘어 흥분까지 갈 수 있습니다.
2. 성전 미문
기적을 넘어 흥분으로 간 두 번째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눈에 띄는 단어가 또 있습니다. <성전 미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가 날마다 구걸한 자리가 성전 미문이었기에 기대를 넘어 흥분으로 갔지 시장 바닥이었으면 이런 기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전철안이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전 미문이었습니다. 어디에 있었는 지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놀아도 기적의 자리에서 놀아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나도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에서 17년만에 아들을 낳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얼마 전 뉴질랜드에 가서 양소를 기르는 목장을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온 종일 소양이 놀아도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나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이 앉은뱅이는 40년간 성전 미문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기대를 넘어 흥분으로 간 비결이었습니다.
3. 기도
앉은뱅이이 기대를 넘어 흥분으로 간 비결이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단어가 셋 있습니다.
<날마다>
<성전 미문>
그리고 <기도 시간에>입니다. 이 기적은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일어났습니다. 성전에 사람을 만나러 가다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상담하러 가다가 기적이 일어난 것 아닙니다. 기도하러 가는 시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에 의하여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혼자 조용히 기도하러 가다가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이 합심하여 기도려고 가다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막 11:17)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하는 데에는 기적이 따릅니다. 예수님이 <내 집은 친교하는 집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집은 먹는 집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E집은 회의하는 집이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먹다가 성령받았다는 사람있습니까? 윷놀이 하다가 불받았다는 사람들어 보았습니가? 회의도중에 은사가 임하였다는 사람 있었습니까? 교회는 먹는 것도, 친교도 회의도 좋지만 본질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앉은뱅이가 기대를 넘어 흥분으로 살게 된 비결은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4. 예수 이름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붙들고 외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아무리 날마다 꾸준하고,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성전 미문이라도 예수 이름이 없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이 핵심입니다.
어느 공장이 멋지게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수 천억 드렸어도 기계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알아보니 전기가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이름은 능력입니다.
어느 분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요즈음 교회들은 은과 금은 있는 데 예수 이름이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없어도 예수 이름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은과 금은 없어도 예수 이름이 있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토바이를 애인과 둘이 타고 달리다가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 잡혔습니다.
<오토바이를 그렇게 달리면 위험하지 않습니가? 속도 위반으로 딱지를 떼야 겠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달려도 안전합니다.> 경찰은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주님이 같이 타고 계십니다.>
<셋이 탔다는 말입니까?>
경찰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정원 초과 딱지 하나 더 떼겠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사실상 오늘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부흥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는 데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부흥을 구하지 말고 부흥을 주시는 하나님을 구하라.>
■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청주에서 목회하시는 차재용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대학교 교수가 정년 은퇴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시골에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경치가 좋은 곳에 별장같이 노년을 지내려고 마련한 집입니다. 정성껏 지었습니다. 입주한 첫 날이었습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거실 천장에 이상한 못이 하나 박혀 있었습니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 장도리로 있는 힘을 다하여 못을 잡아 당겼습니다. 못이 쑥 빠지면서 의자가 넘어져 뇌진탕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앉은뱅이가 기대를 넘어 흥분스러운 생활을 하게 된 비결을 알려 주는 네 단어가 본문에 있습니다.
1. 날마다
2. 성전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3. 기도시간에
4. 예수 이름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매일 그 타령은 아닙니까? 기대를 넘어 흥분스러운 일들이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기대 이상의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모세가 그렇습니다.
모세는 광야로 도망와서 40년 간 살다보니까 80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늙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단 한번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라고 기대한 적이 없습니다. 꿈에도 공상이라도 농담이라도 그렇게 기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시 떨기 불꽃속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인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못 합니다> <입술이 둔합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거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강권에 못 이겨 광야를 떠나 바로와 대결하였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이 기적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만에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드온은 농사꾼이었습니다. 강대국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침범하면서 농사지으면 빼앗아 가고, 과일을 길러 놓으면 따가고 할 때였습니다. 농사꾼 기드온이 몰래 포도주를 짜는 틀속에 들어가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큰 용사여>(삿6;6)라고 부르시며 나가서 미디안과 싸우는 대장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기드온도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2)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기대를 걸면서 나가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이 갑자기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사사가 되었습니다. 농사꾼이 민족적인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도, 모세도, 기드온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대 이상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기대이상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일어나 걸으라
이윤재목사 / 행3:1-10
3월을 앞둔 2월 마지막 주일에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이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질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누구도 이 질문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질문을 실제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국인 이지안입니다. 그는 30의 젊은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세계 100위안에 든 중국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같은 대학교수인 잘 생긴 남편과 한참 재롱을 피우는 어린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다가 청천의 벽력같은 선고를 듣습니다. “말기암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 막 인생의 절정으로 올라간 젊은 여자 교수에게 말기암이라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지안은 그날부터 칠흙같은 어둠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폭풍이 할퀴고 산 폐허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마음을 잡습니다. “그래. 내가 어차피 가야 한다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남기고 싶다”. 그래서 쓴 책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이 책에서 이지안은 짧은 자신의 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후회합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곁에 있는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 아닌가?” 그리고 바빠서 평소에는 안아주지 못했던 아들을 꼭 안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탄식합니다. “아,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 지금 바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것인데.”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가끔 후회하며 사십니까? 이지안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 삶의 여러 상황에서 후회하고 절망하고 그러다가 또 일어서고 그러다가 또 넘어지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다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 수는 없을까?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후회를 줄이며 만족한 웃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는 없을까?
저는 오늘의 말씀을 여러번 읽으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떠올랐습니다. “2천년전에 살았던 이 사람은 어쩌면 후회와 실패와 절망을 안고 사는 우리 자신과 다르지 않다. 오늘의 주인공은 옛날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사람처럼 안되고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받은 축복처럼 축복을 받을까?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내가 누군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며 거지였습니다. 그날도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까지 왔습니다. 1-2절입니다. 행3:1-2, “제 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었습니다. 성전은 온통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었는 데 아침에 해가 뜨면 성전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에루샬라임 쉘 쟈하브”라 불렀습니다. “황금의 예루살렘”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비친 찬란한 황금빛 때문입니다. 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을 사람들은 “니키노르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주전 1세기에 알렉산더에 살던 유대인 니카노르가 성전을 위해 이 문을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온통 황금색입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강한 구리빛 청동입니다. 거기에 동쪽에서 태양이 비췄을 때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을 “미문”, “beautiful gate” 라 불렀습니다. 정말 누가 봐도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문앞에 참으로 볼 품없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거지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앉아 있다기 보다 거의 엎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하철앞에 엎드린 사람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황금빛 성전앞에 엎드려 있는 앉은뱅이, 하늘높히 치솟은 구리빛 대문앞에 파리한 손을 벌여 구걸하는 거지, 이 둘은 얼마나 강력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까? 차라리 성전이 초라했다면 이 사람의 모습도 조금 덜 초라했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앞에 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어쩌다 사고로 못 걸은 것이 아닙니다. 나면서부터 못 걸었습니다. 얼마나 안됐습니까? 그나마 거지입니다. 아무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애 합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무슨 꿈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 사람을 보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날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중 누구도 대단한 존재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서 죄인으로, 그리고 거지로 태어났습니다. 다윗의 말과 같습니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제가 작년에 독일 비텐베르크를 갔습니다. 비텐베르그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며 카톨릭에 대항하여 95개조항을 써붙인 곳입니다. 지금도 교회 정문앞에는 루터가 써 붙였던 95개조 항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텐베르그에는 또 루터 박물관이 있습니다. 루터가 죽을 때까지 35년이상을 실제 살면서 활동했던 곳입니다. 거기에 루터와 그 시대의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고 돈을 넣었던 면죄금고통, 루터가 직접 설교했던 설교대, 루터가 입었던 수도복, 그가 처음 번역했던 성경,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그의 부인 카타리나와 네 자녀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루터가 죽으면서 했던 말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We are beggar, it is true“. 이 말속에 루터가 평생에 걸쳐 외치고 고백했던 모든 신학, 모든 신앙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누구앞에? 하나님앞에. 거지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루 하루 사는 사람입니다. 남의 도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날도 그 거지는 사람들에 의해 메워져 성전까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돕지 않으면 그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하나님앞에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요 날 때부터 거지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 하루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살고 하나님 떠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것이 남은 생을 사는 삶의 기본적 자세입니다.
가치있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거지임을 알았다면 우리의 삶은 당연히 거지처럼 제한되어 있습니다. 거지가 돈이 있습니까? 건강합니까? 문제는 그 제한된 삶속에서 어떻게 최선을 다하며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의 거지를 보십시오. 이 거지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성전까지 왔습니다. 성전까지 온 것까지는 좋았는 데 왜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왜 왔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행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구걸하기 위해 왔습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러 온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기 위해 왔습니다. 거지가 구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말로 “보았다”라는 말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는 여러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에이도”인 데 이 말은 집중해서 본다는 뜻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늘 보던 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거지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냥을 구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똑같이 바라 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기 때문에 본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었어도 보았습니다. 특별한 목적없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습니다. 돈때문입니다.
문제는 거지가 구한 것과 장소가 맞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거지가 성전에 와서 돈을 구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기도할 목적이었다면 성전에 온 것이 맞습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구할 목적이었다면 다른 데로 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지는 돈을 구하기 위해 성전에 왔습니다. 돈을 구하기 위해 성전에 온 거지, 그 거지처럼 우리도 자주 이것을 실수합니다. 교회에서 너무 본질이 아닌 것을 구합니다. 한때 교회가 독립운동의 온상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입니다. 3.1운동, 신사참배 반대에 교회가 큰 공헌을 했습니다. 민중운동의 요람인 적도 있습니다. 70년대, 80년대 까지도 그랬습니다. 한때 지식인들이 찾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신문화의 요람인 적도 있습니다. 배고픈 시절, 교회가 밥을 퍼줘 배고픈 백성들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보니까 평소에는 사람들이 안 모이다가 유명한 오키스트라, 음악회만 있으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입니다. 다 필요합니다. 모두 교회가 해야 할 일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필요하니까 합니다. 하다보면 필요를 뛰어넘어 의무가 됩니다. 무엇이 필요고 무엇인지 본질인지 모르게 됩니다. 6절을 보실까요?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교회에서 은과 금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중세시대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12세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과 함께 성 베드로 성당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황이 금과 은으로 장식된 웅장한 베드로 성당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토마스,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네. 자, 보게나. 교회가 은과 금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이때 토마스가 대답했습니다. “교황님,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과 금 때문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일어나 걸으라’ 고도 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교회는 가난해 져야 합니다. 헌금이 줄고 교인이 없어서 가난해지란 말이 아닙니다. 은과 금을 쌓아 놓지 말고 계속 밖으로 내 보내라는 점에서 가난해지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재정이 남아 있을 틈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날 수입된 것은 그날 지출해야 합니다. 은행 이자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돈놀이라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하는 곳입니다. 마치 거름과 같습니다. 거름은 모아 놓으면 썩습니다. 그러나 사방에 뿌리면 삽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가난해져야 합니다. 부해지면 안 됩니다.
교회와의 관계에서 거지를 볼 때 이런 은혜를 받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더 큰 교훈이 있습니다. 자, 이 거지를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매일 하는 것은 성전에 와서 구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됩니다. 몸이 약하니까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구걸한다고 본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아프다고 다 거지로 삽니까? 날때부터 거지였으니 평생 거지로 살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날 때부터 못 듣고 말 못하고 못 보았던 헬렌 켈러는 태어나자 마자 인생을 포기했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태어난 송명희는 아예 자살했어야 합니다. 불행한 인생을 타고 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게 살아야 했다면 중학교 2학년때 축구하다 실명한 강영우 박사는 평생 맹아원에서 불행하게 살았어야 합니다. 아무 죄도 없이 12년이나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영국의 존 번연은 감옥에서 인생을 한탄하며 살았어야 합니다. 본래 머리가 안 좋기 때문에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면 초등학교 내내 지진아였던 아인쉬타인은 평생 실패한 인생으로 살았어야 합니다.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면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아브라함 링컨은 평생 절망 가운데 살았어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거지에게 없었던 것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고 한탄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없는 것은 믿음입니다. 열정입니다. 꿈입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어야 합니다. 태어난 환경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거지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였습니다.
환경을 따라 살지 말고 열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얼마전 죽은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말했습니다. “돈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한 것이 아니라, 일을 열정적으로 했더니 돈이 생겼다”. 그렇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된다는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안되는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되는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이 안 좋아서 안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핑계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하루는 25시간, 실패한 사람의 하루는 23시간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시간관리란 곧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우선순위의문제는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다 하며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지킬 수 없는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인생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다 똑같이 24시간씩 주어졌는 데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잘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제가 보니까 시간의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만큼 충분히 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급한 것 뿐입니다. 둘째 그러나 모든 일을 다 할만큼 충분한 시간은 없다. 시간이 있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그래서 가치있는 것에 집중하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넷째 가치 있는 일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뺏는 것은 순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남은 시간을 집중할 것이냐? 남은 가치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날마다 일어서야 합니다
어떻든 거지는 지금 성전에 있습니다. 돈을 구하러 성전에 왔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4절부터 보십시오 행3:4-6,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니”. 거지가 구걸하고 있던 곳에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거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분명 무엇인가 구하고 있었는 데 그것은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앞에서도 “보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거지가 히끄무레하게 베드로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보다”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거지를 바라본 것입니다. 이때 “보다”는 “아테니조”입니다. 이 말은 “주목하다, 응시하다, 뚫어지게 쳐다보다”라는 뜻입니다. 바라보는 촛점과 강도가 다릅니다. 거지는 희미하게 바라 보았고 베드로는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거지는 애처롭게 쳐다보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쳐다보았습니다. give attention to, “차례”하는 자세로 집중하여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남을 바라보았을까요? 어느 때 사람은 이렇게 바라 봅니까? 자신있을 때입니다. 남에게 꿇릴 것이 없을 때입니다. 약점이 없고 흠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항상 이렇게 남을 바라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만큼 자신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도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그는 어떤 눈으로 바다를 바라 보았을까요? 자신없는 눈입니다. 실패자의 눈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에 갔습니다. 그때 그를 알아본 여자 아이 하나가 “너도 예수 따라더니던 제자지?”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손을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난 예수를 몰라”. 그때 그는 어떤 눈으로 여자 아이를 바라보았을까요? 자신없는 눈입니다. 비겁한 자의 눈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릅니다. 다시 4절을 볼까요? 행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어떻습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를 보라”. 볼테면 보고 말테만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라”. “보라”. 자신만만 합니다. 감히 그 앞에서는 함부로 눈을 치켜뜰 수가 없습니다. 요즘말로 포스가 느껴집니다. 왜 이렇게 베드로가 담대해졌습니까?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그 첫 번째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에게 세 가지가 임했습니다. 영어로 세 가지 p입니다. 첫째 presence,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이 베드로속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자 삶이 달라졌습니다. 둘째 purpose, 목적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안에 거룩한 목적이 생겼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주인이신 그 분이 우리안에 거하면 우리안에 삶의 분명한 목표와 꿈이 생깁니다. 목표가 분명해지면 삶이 단순해지고 삶이 단순해지면 용기가 생깁니다. 세 번째 power입니다.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임하자 능력이 생겼습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할 수 없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막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속에는 이미 성령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까? 성령이 임할 때 우리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임한 것을 믿습니까?
지속적 기도
베드로가 담대해진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1절입니다. 행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성령받은 베드로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을 좇아 하루 세 번씩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그날도 베드로는 시간을 맞춰 오후 3시 기도에 나오던 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을 능력있게 하는 비결중 지속적인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의 모든 일상은 90%의 습관에 따라 움직입니다. 습관이 우리를 살리고 죽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 한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새벽기도할 수 있고 어쩌다 한번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기도는 지속적인 기도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영적 형성”이라고 합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이 습관이 바벨론으로까지 가서 기도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 때문에 고난받았지만 결국 기도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고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도 기도를 습관화하다 보니까 십자가에서까지 마지막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지속적으로 기도합니까? 기도가 우리를 담대하게 합니까?
예수의 이름
베드로가 담대해진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6절을 보시겠습니까? 행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니”. 여기에 “나사렛 예수”란 말이 나옵니다. 나사렛 예수는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사도행전에 20번이나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로 하면 In the name of Jesus입니다. 이 말을 헬라어로 쓰면 “엔 토 오노마 예수”입니다. 이 말을 문자대로 풀면 “예수의 이름안에서” 하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고대 사회에서 땅이나 부동산, 노예를 사고 계약을 맺을 때 “누구 누구의 소유가 되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하고 외치는 순간, 그는 나사렛 예수의 소유안에 들어옵니다.
물건도 누가 소유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물건 값의 원리는 물건 자체의 값이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의 값입니다. 나폴레옹의 칫솔이 2만 천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누가 낡아빠진 칫솔을 2만 달러에 사겠습니까? 나폴레온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썼던 목재 골프채는 77만 2천5백 달러까지 값이 나갔답니다. 케네디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을 소유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명과 내 생명을 맞바꿨습니다. 벧전2:9, 우리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자, 보십시오 베드로가 거지에게 소리쳤습니다. 행3: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7절, 행3:7,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8절,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소유된 백성이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 우연히 이런 영상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런던 올림픽에서 뛴 한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영상) 어떻습니까? 육신의 아버지가 넘어진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면 하늘의 아버지도 그의 자녀인 우리를 일으켜 세우지 않겠습니까? 넘어진 아들에게 달려간 아버지,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뛰겠다”.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삶이 앉은뱅이처럼 불행하다가 우리의 삶이 거지처럼 안 풀린다고 운동장에 주저 앉아 있는 여러분, 일어나 걸으십시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
미문 사건의 교훈
임덕순 목사 / 행 3:1-10
본문은,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는 기적의 장면입니다. 성전 문간에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인 이 사람은 나이가 40이 넘었지만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남이 던져주는 푼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를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어서 새 인생을 출발했으며, 사도들도 새로운 용기와 능력을 얻게 된 사실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요한 등 사도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전도하지 못하게 협박하는 바람에 잔뜩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이 걸인을 치료해 주실 뿐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 시켜주셔서 더욱 힘있게 신앙생활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도 하나님 체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사회는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서, 전도는 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은 위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의 길이 분명히 옳다는 체험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우리교회를 오늘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교회의 앞날도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고 인도하고 계시다는 체험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3주 전부터 교회를 위한 릴레이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인도하심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는 중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주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비결을 바로 배워서 성도들은 당당하고 힘찬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우리교회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전 문간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미문이라는 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쪽에 나 있는 문으로서, Beautiful Gate 라고 불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했고, 신약시대로 말하자면 성전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문입니다. 앉은뱅이는 성전 미문,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에 앉아 있다가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처음에는 자기 몸을 고쳐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의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도 먹고 살 것이 없는 시대에 불구자가 살 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구걸을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자꾸 쫓아내었습니다. 결국 성전에 들어가는 미문 곁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된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누구도 그를 쫓아내지 아니했기 때문에 거기에 터를 잡고 구걸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밀려나고 쫒긴 사람들이 찾아와도 내쫓지 않는 곳이고, 외롭고 슬픈 사람들이 찾아와서 안기는 곳이며, 할 말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 답답한 사람들이 찾아 나아오는 곳이고, 너무 많은 실패를 해서 더 이상 한 발도 떼어놓을 힘이 없는 사람들이 나오는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지만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환영하는 곳이고, 하나님을 만나서 은혜를 체험하는 곳이며 삶이 통째로 바뀌는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정말 만나면, 가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행복한 새 출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체험해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나아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앉은뱅이처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간에서 사람들만 바라보고 돌아갑니다. 하나님께로 간다고 찾아오긴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실망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나가는 사람도 생기고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는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그 문간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갈 생각도 안하고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몇 푼의 돈을 얻기 위해서 그날도 사람들만 쳐다보고 앉아있었습니다.
오늘도 교회마다 그런 모양의 신자들이 가득합니다. 교회에 오기는 왔는데 하나님을 사모하고 앙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교회에 와서 앉아있다가 갑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실망스런 모습만 보이지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혹시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태도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앉은뱅이를 불쌍히 보시고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하셨고,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를 고쳐줄 마음을 먹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못 믿어도 결석하지 않고 꾸준히 교회에 다니기만 하여도 어느날 생각지 않은 은혜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꾸준히 출석해야 합니다. 그동안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고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하나님께로 깊이 나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에 기도를 드리려고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제 3시 제 6시 제 9시였답니다. 제 3시는 오전 9시경이고, 제9시는 오후 3시경입니다. 열대 지방의 오후 3시는 살인적인 태양이 작열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더운 시간인데도 그들은 기도시간을 빼먹지 않고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아무데서나 기도하지 않고 꼭 성전에 올라가서 정성껏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혼자 기도하지 않고 함께 기도할 동지를 만들어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한다고 말만 하고 생각나면 한 번씩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루 세 번의 기도시간을 다 지키려면, 다른 일은 그 사이 사이에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일보다 기도가 우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일은 못해도 기도는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람과의 약속은 혹 못 지키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은 꼭 지킨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은 그렇게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아무데서라도 시간만 지켜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마다 꼭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간한 정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정성을 들인다 할지라도 내가 지은 죄를 다 갚을 수 있는 공을 못 세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성이 공이 못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감사의 표시하기 위한 정성은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정성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 중에서 1번 2번을 다투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유명한 제자들이고, 가장 힘이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기도는 혼자 하면 약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둘이 함께 약속을 하고, 하나가 게을러지면 하나가 권고하고 격려하면서 꾸준히 기도하러 다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봄가을로 특별기도회를 열어 온 교회가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데, 만일 교회에서 기도회를 열지 않고 각자 집에서 그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라고 하면 잘 될까요? 처음에 한 이틀은 될지 모르지만 결국은 흐지부지 되고 말 것입니다. 기도는 함께 모여서 해야 열심이 유지되고, 간절함이 유지되고, 모여서 말씀을 들으면서 해야 힘이 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시간을 정하고, 짝을 이루어서,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에 열심 내는 사도들에게 앉은뱅이를 고치는 일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도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인을 시켜서 용기를 주시려는 것이었고, 불쌍한 앉은뱅이에게는 새 삶의 기회를 주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새 목사님을 모시는 중대사를 두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시간을 정하고, 함께 교회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처럼 최선 다해서 기도하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체험시켜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우리에게 교회의 문제 뿐 아니라 우리의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고, 주님을 증거 하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기적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각에 일어납니다.
믿는 성도가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일을 이루시며, 완악한 사람의 마음이 열려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기도하는 시간에 병든 몸이 치료되고, 낙심한 심령이 새로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개인의 가정사나 자녀의 문제나 다양한 문제를 그가 기도하는 시간에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손 내밀고 살던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손 내밀게 되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정말 필요한 줄도 모르고 세상의 물질이나 건강이나 인정만 바라보던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사람 자체가 변하는 기적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기도하면 우리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여러분 자신이 변하는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겐 어느 시간이 가장 소중하며, 또 어느 시간이 가장 기도하기 힘든 시간입니까? 새벽시간 입니까? 밤늦은 시간입니까?
성도여러분! 한가람의 제9시 기도시간은 매일 밤 여덟시에 열립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내일을 위해 피곤을 풀어야할 시간, 그래서 잠을 자야 하는 시간, 그래서 가장 힘든 시간이지만, 조용하게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시기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을 기도하기 위하여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가장 귀한 시간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할 줄만 알지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무일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 없어도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도에 힘쓰는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돈 많은 사람이나 말 잘하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지 않으시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돈이 없어서 낙심하고 있습니까? 이번에 태국과 필리핀을 위하여 특별선교헌금을 하는데 선교헌금을 낼 돈이 없어서 탄식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한 푼의 돈도 없었고, 한 알의 약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붙들고 기도한 그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40년간 앉아만 있었던 사람을 고쳐주셨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도들은 자기에게 은과 금이 없다는 것 때문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슨 문제든지 기도로 풀 수 있다고 믿는 그 신앙이 가장 값진 재산이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누가 어려운 부탁을 해오거든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예수님뿐이고, 배운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내 놓을 것은 주님의 이름뿐이고,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주님의 은혜뿐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기도 해 드리지요. 걱정마세요.”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시지 않고 누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시는데 누가 그 사람을 무시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어디서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도 밤마다 9시 기도시간에 주님을 만납시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내가 의지할 데는 주님의 이름뿐이고,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주님 은혜뿐이라고 고백하면서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간구합시다. 그러면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목하여 바라보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발견하고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저 사람들이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주려나 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간절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무엇을 얻을 줄 믿고 바라보는 시선,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주목하는 신앙, 기대감을 가지고 앙모하는 신앙, 이것이 능력얻는 신앙입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소년도 곤비하며 장정도 넘어지고 자빠져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목사님을 청빙하는 일을 위하여 밤마다 모여 기도하면서 응답을 받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주님을 앙모하는 것이어야 하며,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사도들을 바라보았던 태도와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앙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 무엇을 얻을 줄 알고 기대하며 바라볼 때 의심은 사라집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합시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기도의 대결을 하여 승리한 후,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를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제거했으니 이제는 비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나중에 지중해 상공에 손바닥 만 한 구름 한 장이 떠올랐을 때, 엘리야는 그 손바닥 만 한 작은 구름을 응답의 징조라고 딱 믿고 비를 피하여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그가 시내에 도착하기 전에 폭우가 내렸습니다.
기도하는 우리에게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기대하는 시선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괴로운 문제가 있는 사람도, 답답한 사정을 가진 사람도, 힘겨운 문제를 만난 사람도, 하나님의 응답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가 만든 계획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전능하신 손길을 바라보며 기도에 힘쓰는 성도가 되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져주시고 우리교회와 여러분 개인의 장래를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넷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킬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 하는 말에 앉은뱅이가 집중하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한테는 돈이 한 푼도 없다는 말입니다. 한 푼도 없는 사람이 뭐하려고 우리를 보라고 했는지 기분이 나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뜸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더니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때 대단히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가지고 장난 하는 거요? 앉은뱅이를 잡아당기면서 일어나라니? 놀리십니까?”라고 대들었습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잡아당기는 대로 딸려 일어섰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와서 일어서게 되었고, 찬송하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잡아당길 때 일어섰더니,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잡아당기십니다. 주의 종을 시켜서 앉은뱅이 같은 성도들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일어나라, 기도해라. 주일성수 하고, 봉사하고, 전도 좀 해라. 그동안 안 해봤어도 이제는 좀 일어나 기도해 봐!” 이렇게 일으키십니다.
여러분은 주의 종이 말씀으로 여러분을 잡아 일으킬 때 일어섰습니까?
아니면 ‘나는 안 돼’라고 생각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습니까?
“믿고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사세요! 기도하세요. 전도에 동참하세요!” 라고 잡아 일으키면 온갖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그냥 주저앉지 않았습니까?
“이번 기도모임에 참석하여 기도합시다.”라고 하면 나는 초저녁잠이 많아서, 나는 퇴근을 늦게 해서, 나는 몸이 약해서, 나는 기도 안 해봐서, 등등 온갖 구실을 붙여 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핑계의 바탕에는 “나는 하나님을 못 믿겠어, 기도의 응답이 믿어지지 않아” 라는 불신앙이 들어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은 은과 금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는 돈을 나누어주는 기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일으키고 잡아 당겨줍니다. 그때 순종하여 일어서면 그 다음 순간부터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보험계약을 할 때 그 회사의 사장과 계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사의 대리자인 생활설계사라는 외무사원과 합니다. 그러나 계약서는 대표이사 사장의 이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 계약이 체결된 시간부터는 기재된 계약대로 회사가 책임을 져 줍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종들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고 가르치고 권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이 믿고 순종하면 그 다음은 주님이 책임 져 주십니다. 말씀으로 일으키면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의 성전 미문입니다. 우리도 9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기도를 중시하는 성도, 기도하러 모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모하며 기도합시다. 말씀을 들으면 말씀에 따라 일어섭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앞에 당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뿐만 아니라 기뻐 뛰며 주님의 영광스런 이름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가 체험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이 새로워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난과 종교의 불편한 동거
김영준 목사 / 행 3:1-10
예로부터 빈민은 종교에서 우군을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세상에서 빈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알아주고 동정하는 이들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시설 앞에는 늘 빈민들이 모이게 돼 있습니다. 제가 서울의 어느 사찰 앞을 지나면서 눈여겨 본 것은 그 사찰 입구 앞에 상당수의 빈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쫓아내지 않고 방치할만한 장소가 종교시설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신체적 장애가 있는 걸인이 어디를 가면 받아주고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적선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성전 문가에라도 앉아 있어야 누가 성전에 들어가다가 적선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종교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종교라 함은 기독교뿐만이 아니고 모든 일반적인 종교를 포함하는 것인데 빈민을 구제하고 도와주는 일을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을 구원하겠다고 하면서 빈민을, 약자를 모르는 척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성격상 원하고 안 원하고를 떠나서 빈민을 지원하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빈민의 동거가 불가피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불편한 이유가 무엇이냐. 불가피하게 서로 만나기는 했지만 서로가 원해서 만난 것이 아니고 서로의 입장 때문에 부득이 만난 면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빈민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빈민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합니다. 본인이 원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갈 데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선택권이 있다면 더 좋은 자리, 더 기쁜 자리, 더 행복한 자리에 있고 싶을 것입니다. 사랑과 우정과 풍성함이 있는 곳에 있고 싶지, 누가 목사와 신부님과 수녀님과 스님들이 있는 곳에 가서 앉아 있고 싶겠습니까. 선택권이 있다면 자기의 며느리나 딸이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을 원하지 누가 처음 본 남이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선택권이 있다면 차라리 호텔이나 백화점이나 놀이공원에 있고 싶지, 누가 미문가에 앉아있고 싶겠습니까.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 에벗, 그는 어려서부터 어디에서 자라났습니까.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나마 고아인 자신을 돌아보는 기관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본인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런 데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디의 꿈과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자기를 후원해 주는 이름 모를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고 그를 만나보기를 사모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본 어떤 영화는 제목을 잊어버렸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soup Kitchen에 가서 봉사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soup Kitchen은 우리나라의 무료급식소 같은 곳입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거들기도 하고 또 식사하는 노숙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그런 봉사를 하는 여학생인데 어느 추수감사절에 이 여학생이 의무감에서 혼자 앉아 식사중인 어느 노숙자 앞에 가서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 노숙자가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 여학생이 묻습니다. ‘저와 대화하기가 싫으세요?’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나는 내 대화상대를 내가 선택하고 싶다.’ 그 말을 듣고 그 여학생은 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그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의무감에서 독거노인과 따뜻한 대화라도 나누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그 아저씨의 입장에서는 ‘나는 당신과 대화할 마음이 없는데 내가 여기서 혼자 추수감사절 식사를 먹는다고 나에게 대화까지 요구하지 말아 달라.’ 그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다 잊었는데 그 장면만은 제 인상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서로 만나기는 했는데 둘 다 불편한 것입니다. 한쪽은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의무감, 책임감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쪽은 부득이 그 자리에 오긴 했지만 만일 선택권이 있었다면 다른 곳에 있었으면 좋겠고 형편이 더 나았으면 좋겠고 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종교와 빈민은 동거해 왔지만 불편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아주 좁은 골목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핸들을 조금이라도 좌로나 우로나 틀면 자동차가 긁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 성경 본문에 드러내놓고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변에 흐르는 정서를 통하여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가에 앉아있는 이 장애우, 그가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늘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미문을 통과해서 성전에 자주 들어갔고 그 걸인은 매일 거기 와서 앉아있는 경우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사람을 여기 초청한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이 유일하게 쫓겨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매일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면서 이 사람이 여기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평소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4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고 말한 것으로 짐작하건대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베드로와 요한도 그 사람을 주목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그 자리에 있지만 늘 있는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지나쳤다는 얘기입니다. 서로 동거를 하기는 했지만 베드로와 요한도 이 걸인을 평소에는 주목하지 않았고 그 걸인도 베드로와 요한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어요. 제가 종교인을 모독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본문 상에 나타나 있는 이 상태가 종교와 빈민 간에 존재하는 평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옳으냐 그르냐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평소에는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미문가의 장애우를 주목하지 않았어요. 그냥 거기 있는 사람으로만 여겼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기록된 이 순간에 뭔가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장애우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얻을까 기대했어요. 무엇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을까요? 돈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그에게 주고자 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 구절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돈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 아니에요. 설사 돈이 있더라도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그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신 것은 은과 금을 베풀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에요.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이고 봉사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예수께서 베드로든 요한이든 야고보든 이런 이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목적은 은과 금을 베풀기 위한 것은 아니에요. 주님이 이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도 은과 금을 베풀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지금 돈이 있든 없든 그가 말하는 것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와 능력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을 ‘내게 있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있는 것은 은과 금은 아니에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그것이 무엇이냐?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 바로 당신의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내 이름으로 새 방언을 말하며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그리 되리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주셨고 당신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고 당신의 이름을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천하에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요, 믿는 자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에 주신 사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베드로도 그 사람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베드로를 주목하지 않았어요. 그 자리에 있는 건 맞아요. 매일 마주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 순간이 올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의 형편에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얘기냐. 큰 도움이 됩니다. 은과 금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사람이 영원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서 부유한 삶을 살기 이전에 자기의 원래 직업에 돌아가고 원래 가정에 돌아가기 이전에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다음에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성전 문간에 오랜 세월 앉아있었지만 그러나 몸은 성전 문간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와 빈민이 동거하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중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빈민이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신앙도 그 빈민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의 참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인생의 변화, 운명의 변화, 영혼의 변화, 사는 방식의 변화, 목적의 변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일으키는 변화인 것입니다. 누가 이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느냐. 오직 나사렛 예수만이 이 사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병자든,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줄 수 있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은 나의 사명을 아는 것이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도울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방식이 아닌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애매하게 생각해요. 애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뭔가 남을 도와줘야 될 텐데 이웃을 사랑해야 될 텐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애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뭔가 해야 되는데, 뭔가 하라고 했는데 무엇을 해야 될지는 모르겠고 안 할 수는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마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내게 있는 모든 것,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내게 있는 것이 은과 금이 아닐지라도 내게 있는 것이 은과 금보다도 더 도움이 되고 더 힘이 되고 더 필요하고 더 귀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하면 은과 금을 더 많이 얻고 그래서 은과 금을 나눠줄 수 있느냐를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은과 금을 베푸셨다는 성경구절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일을 하셨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에는 은과 금을 나눠주는 일은 포함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아무것도 안하셨다고 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돕는 것이 반드시 물질적인 도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은과 금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은과 금을 베풀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색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로써 우리가 정말로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을 베풀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은과 금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 우리의 사명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애초부터 베드로가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지 않았느냐.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임의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그 순간에 감동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그 순간에 그 마음을 주시고 그러한 믿음을 주시고 이러한 능력이 역사하게 하실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영적인 사역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임의로 이 사람을 일으켰다가는 다시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뭔가 영적인 다이내믹이 일어나는 순간이에요. 이건 이 사람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수년 동안 예배당의 문간에 앉아있는 분이 계실지 몰라요. 그동안에 교회와 기독교와 불편한 동거 관계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 깊이 들어올 수도 없는,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불편한 관계. 여러분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앉을 자리를 제공하는 교회가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친절, 우정, 관심의 차원을 넘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요. 친절과 우정은 다른 곳에서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유일하게 교회가 베풀 수 있는 사명과 능력을 부여받은 곳입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본질이요, 자산이요, 능력이요, 사명이요, 이것이 믿음이에요. 이것은 미문가의 장애우 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려면
양인순 목사 / 행 3:1-10
여러분은 기적을 믿으십니까? ‘기적’의 사전적 의미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혹은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 가운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기적은 일어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항상 기적을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속에는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기적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것도 기적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어 밀 때 홍해가 갈라진 것도 기적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 함성을 지를 때 그 견고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도 기적입니다. 기드온의 삼백용사가 전쟁을 할 때 해가 머물렀던 것도 기적입니다. 히스기야가 죽게 되었을 때 기도했더니 해 일영표가 10도나 물러난 것도 기적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행한 모든 일들도 기적입니다.
신약성경도 보면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성육신의 사건이 바로 기적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각종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좇는 기적의 연속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거두는 것도 기적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살아난 것도 기적입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니 풍랑이는 바다가 잠잠케 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하며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과학만능주의와 이성주의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상식이나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으면 미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행하신 큰 기적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머리로 따지고, 이성적으로 계산하려고만 합니다. 기적을 믿지 않아서 그런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기적이 일어날 만한 일을 하지도 않습니다. 상식선에서 일을 진행하고, 이성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한 일만 하기에 굳이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아도 될 법 합니다. 아프면 먼저 병원 가서 검사받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수술을 받습니다. 이 아픔과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기도하고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단지 인간의 방법으로 진행하면서 하나님께 결재 받는 정도입니다. ‘하나님! 상황이 이렇습니다. 응급조치와 수술도 잘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회복되도록 도와주시간 하면 됩니다.’
결국 주치의는 담당의사이고, 우리 주님은 간호사 수준이나 간병인 정도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틈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에도 기적을 믿고, 기적을 기대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이비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하늘의 능력을 믿고, 열심히 기도해서 기적을 일으킵니다. 공개적으로 기적을 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짜고 치는 쇼인 경우도 있지만 대중 앞에서 실제로 놀라운 기적을 행합니다.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유혹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가짜를 믿고, 엉터리인 사람들은 기적을 믿고, 오늘 이 시대에도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짜를 믿으면서도 기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기적과 표적의 결과만을 좇는 자들의 신앙을 경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요6:26)’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나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죠. 진정한 기적의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는 생명의 양식으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예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썩을 양식을 구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발견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궁극적 이유는 기적 자체가 아닙니다. 그 기적을 통해 주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이미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처럼 기적의 결과만을 구합니다. 진정한 기적의 의미를 찾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기적을 구합니다. 이런 부작용을 우리는 방송매체를 통해서 많아 보았습니다. 잘못된 기도원 운동을 통해서 병든 자를 고친다는 미명아래 금식을 시키고, 안수를 하다가 사망에 이르는 결과도 보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고 몇 달씩 집안에 시신을 놓고 기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의 모습 때문에 지금은 기적을 말하지도 않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는 결국 기적의 실체까지도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도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얼마든지 가능케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지금도 놀라운 기적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이성의 힘으로 판단하고, 기적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자는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처음으로 일어난 놀라운 기적을 소개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으로 하여금 두 다리로 힘차게 일어서서 걷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걸을 수 없습니다. 마치 날개 없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독수리는 힘차게 창공을 날아야 합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날지 못하면 토종닭만도 못한 신세입니다. 위대하게 창조된 인간이 꿈을 잃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면 바로 날개 없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이 걷지 못하는 자가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와 죄 때문에 장애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힘들고 슬픈 일입니다. 아무런 삶의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로부터 구걸을 해서 연명하는 신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180도 변화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절망의 자리를 한 순간 환호와 감격으로 바꾸실 놀라운 미래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놀라운 내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상황을 보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안에 걷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 요소는 무엇인가요? 비록 육신적으로는 걷고 뛸 수 있지만 영적으로 걷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건강입니까? 자녀문제입니까? 직장이나 사업의 일입니까? 이 시간 하나님이 행하실 기적을 기대하고, 사모해 보십시오. 기대하고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3기의 신앙을 회복하십시오. 지금도 주님 앞에 기대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기적이 상식이 되고, 기적이 우리 안에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비결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성령체험을 한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더해가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성전이 있는 곳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은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입니다. 이 문을 통과해야 성전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걷지 못하던 자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데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이 되어 미문을 통과하기 직전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기도 시간인 제9시, 즉 오후 3시 기도시간입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하루 종일 성전 미문 앞에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자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밉니다. 3절에 보시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여기서 ‘보고’는 헬라어로 ‘에이도(eido)’입니다. 영어로는 ‘see’입니다. 의미를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야에 들어왔기에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 걸인은 기계적으로 손을 내밉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은 건성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자를 얼마든지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매일 보았던 자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주목하다’는 말은 ‘아테니조(atenizo)’로 ‘gaze(응시하다)’입니다. 걸인은 희멀건 눈으로 아무 의미 없이 보았는데 베드로는 그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 말합니다. 여기서 ‘보라’는 헬라어로 ‘블레포(bulepo)’입니다. 영어로는 ‘look at’입니다. 건성으로 쳐다보는 걸인에게 베드로는 자신을 주목하라고 촉구합니다.
베드로의 요청에 걷지 못하는 자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갑자기 걸인의 눈에 힘이 들어갑니다. 여기서 ‘바라보다’는 ‘에페코(epeco)’로 ‘give attention to)’로 ‘온 시선을 집중시키다’입니다. 비로소 걸인은 ‘오늘 대박이구나’ 싶은 마음에 집중해서 베드로를 바라봅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 뛰게 되는 기적의 출발은 바로 걸음을 멈추고 주목함에 있습니다. 보기 위해서는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물론 가면서도 볼 수 있지만 제대로 보려면 발걸음 멈춰야 합니다. 집중해서 자세하게 보아야 합니다.
기적은 보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믿음도 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선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눈이 멀었다’ 고 합니다. 누구든지 사랑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시선이 고정됩니다.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영화를 보면 그 내용을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가 주인공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를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뻔합니다.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바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봄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만약 베드로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걸인을 보고도 지나쳤다면 여전히 그는 절망의 삶 속에서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걸음이 그 걸인 앞에 멈추고, ‘블레포’ ‘우리를 주목해서 보라’고 말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출발점이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걸인이 베드로를 향해 자신의 시선을 집중하기 전에 베드로가 그를 주목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베드로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걸인을 주목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로로 사용하셔서 걷지 못하는 자에게 먼저 당신의 사랑과 생명의 시선을 따스한 햇빛처럼 비춰주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사랑의 시선을 부어주시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는 구걸하는 미천한 인생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설령 베드로가 그 걸인을 주목했다 해도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런 기적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적은 인간을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시선에 우리들이 반응할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걷지 못하던 자가 베드로의 시선에 ‘에페코’-집중해서 주목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미문(美門)은 아름다운 문이 아니라 절망과 고통과 눈물의 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 말했을 때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바로 그 때 절망의 문은 희망의 문으로 바뀝니다.
고통의 문은 축복의 문이 됩니다.
눈물의 문은 찬양의 문으로 변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미문 앞에 앉아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상황들을 의미 없이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시선이 서로 만나 불타오를 때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은 일어납니다.
오늘 내 삶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내 발걸음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멈추지 않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향해 뛰어가야만 열심히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지금은 어쩌면 우리가 달리는 차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어야 할 때입니다. 걷다가 이제는 멈춰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땅에 것을 보던 삶에서 하늘을 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심지고,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들을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고 열심히 좇아갑니다. 그 속에는 계속되는 염려와 걱정과 근심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땅을 보는 시선에서 이제는 하늘에 계신 주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맡기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볼 때 하늘의 능력과 기적이 우리가운데 일어남을 강조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주목하는 걷지 못하는 자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3:5-8)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이것을 준다고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베드로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주목하는 걸인의 시선과 부딪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바로 그때 발과 발목이 힘을 얻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 번도 걷지 못했던 자가 벌떡 일어납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중세 최고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부름을 받고, 교황을 만났습니다. 교황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마침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마차가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교황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초대교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금과 은을 저렇게 풍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보내오는 저 금은 보화를 보십시오. 이 놀라운 건물과 금은 장식을 보십시오.”
그때 아퀴나스는 교황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명할 수 있는 확실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교회를 지었습니다.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닦을 꾸민 엄청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제 은과 금은 우리에게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가졌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교황은 금은보화를 소유한 것이 능력이라고 자랑했지만 아퀴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참 하나님의 교회임을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성전의 미문에 앉아 있지만 우리의 삶이 여전히 아픔과 고통, 탄식과 절망으로 뒤섞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어 서서 주님의 시선을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원하는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롯처럼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 바라보다가 소돔과 고모라의 삶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의 발걸음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시선과 내 시선에 불꽃이 튀기듯 내 삶의 자리에서 부딪칠 때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삶에 진정한 미문이 활짝 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집중하십시오. 아버지가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곳을 바라보십시오. 아버지의 눈물이 있는 곳에 발걸음을 멈춰보십시오. 바로 그 속에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하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납니다. 우리 인생에 진정한 미문이 활짝 열리는 기적이 임합니다. 이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마음> 이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
우리를 보라
김광일 목사 / 행 3:1-10
다하라 요네코(田原米子)는 18세 때에 찾아온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오는 전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죽음대신 두 발 및 왼손과 왼팔,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른쪽 팔과 손가락 세 개뿐이었습니다. 전보다 더 절망적인 환난과 근심이 찾아 왔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그녀는 자살을 계속 시도했으나 남아 있는 세 손가락으로 죽는 것조차도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선교사 지망생 아키도시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키도시가 요네코에게 청혼을 한 것입니다. 그와 결혼한 그녀는 꿈에서조차 상상 못할 새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요네코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작은 자를 섬기는 일을 평생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부유하지만 예수를 모르는 자들, 힘은 있지만 진리에 눈먼 자들, 건강하나 참 생명을 지니지 못한 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네코의 섬김과 헌신에 감동을 받고 예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게는 손가락이 세 개나 있습니다.” 한 팔과 두 발, 일곱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잃었기에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세 개의 손가락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었노라 말합니다. 세 손가락으로 죽어가는 영혼, 환난과 근심 속에 빠진 이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후에 요네코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수기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면 삶이 달라집니다. 변화되어진 삶을 보이며 당당히 간증하게 됩니다. 다하라 요네코는 우리를 향해 ‘나를 보라, 우리를 보라’ 고 외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선포한지 494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루터는 전통적이고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가까이 계신 하나님, 생활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외적인 제도나 구조를 개혁하기 이전에 자신의 개혁으로부터 출발한 운동이었습니다.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개혁이 우선되지 않고는 바른 교회의 개혁이 없으며, 교회의 개혁이 없이는 사회, 정치의 개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니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가는 길에 성전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고 외쳤습니다. 계집 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였으며 또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히려 의심하였던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그가 ‘우리를 보라’고 공개적으로 외친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할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종교개혁주일에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우리를 보라’ 고 외칠 수 있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어떠한 우리를 보라고 외쳤습니까?
첫째로 정하여 기도하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 병사를 구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동료 병사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부상당한 병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 모습을 본 지휘관이 놀랍니다. 지휘관은 두 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동료병사가 구출해 내는 겁니다. 두 병사가 모두 살았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지휘관이 총에 맞은 병사를 구출해 온 병사를 불러 물었습니다. “자네는 전투 중에 왜 시계를 보고서 병사에게 달려갔는가?” 그러자 병사는 대답합니다. “예, 제가 전쟁터에 나가려고 할 때에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매일 12시가 되면 정기적으로 기도를 할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시계를 보았을 때가 바로 12시였습니다.” 병사는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도 동료를 구하러 갔던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이전에는 특별한 능력이 없었지만 베드로는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앉은뱅이를 고치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기에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은 평소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습관은 본 받아야할 모범입니다. 고넬료 백부장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9시에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9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는 길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손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움직일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둘째로 영혼을 주목하는
9.11 테러당시 브라이언 브릿드웰(Brian Bridwell)은 국방부 복도에서 비행기 폭팔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의사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브릿드웰은 전신의 40%가 불에 탄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생명을 건지기 위해 수없이 피부 이식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틀이 지난 후 대통령 영부인 로라 부시가 브릿드웰의 병실을 방문하여 멜(Mel)부인을 포옹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누군가 브릿드웰 부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했습니다. 잠시 후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이 들어 왔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브릿드웰 중령에게 거수경례를 하였습니다. 브릿드웰이 답례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데 20초 정도 걸렸습니다. 팔에 입은 화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경례한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브릿드웰이 손을 내리자 비로소 내렸습니다. 부하가 상관에게 하는 거수 경례 예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영혼에게 주목하는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대통령이 한 영혼에게 배려를 보였듯이 우리도 불행한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거리에서 누구를 보았습니까? 늘 그랬듯이 그냥 무심결에 불쌍한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을 스쳐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한 영혼이 돌아오려면 그 영혼을 주목해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여기의 ‘주목했다’ 는 말은 무심하게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로 '아테니사스' 인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 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영혼의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주목해 보았습니다. 사도의 마음속에는 불쌍한 앉은뱅이를 향한 자비심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면 주목해서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죽어가는 영혼들입니다. 미용사는 머리를 보고 제화공은 신발만 바라보듯이 교회는 불신자의 영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는 영혼은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가 받고 싶은 것과 베드로와 요한이 주고 싶은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앉은뱅이는 물질을 얻고 싶었고, 사도들은 회복과 구원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일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빌어먹는 사람을 벌어먹는 사람으로 일으키고 싶어 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주목하는 신앙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름을 선포하는
성 프란시스코(Saint Francis)는 무소유로 얻어먹으면서 전도하고 다니는 걸식성단을 만들었습니다. 교황청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를 만난 교황은 그가 하는 일이 아주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보화가 가득한 창고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다 보여준 후에 프란시스코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그러자 프란시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은과 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지는 치유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권능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지 않고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문제이든 예수 이름을 선포할 때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예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물질적으로 풍부해졌습니다. 부해졌습니다. 교회가 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학교도 세우고, 고아원도 세우고, 기도원도 세우고 묘지까지 만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 걸으라고 자신 있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는 교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능력을 간구하기보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었기에 과연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할 자신이 과연 있습니까?. 그러한 능력이 현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세상에 선포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길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절망에 빠져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 희망의 삶을 살아가도록 일으켜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에 기도 응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도무지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우리를 보라' 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자기 개혁을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정한 시간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패션모델은 새로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나처럼 옷을 입으라고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패션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부디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목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선포하여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는 성도들로 다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진정한 부자인가?
사도행전 3:1~10, 시편 119:56~57 / 김홍도 목사
15~16년 전,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로 화재 사고로 인한 방사능 유출로 공중에서 흙을 덮던 사람 3,000여 명을 비롯해서 60만 명이 즉각 며칠 안에 사망했고 방사능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이 27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핵폭탄을 터뜨리면 공기가 오염되고 수질이 오염되고 토양이 오염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은 물론 중국, 일본, 멀리 캐나다까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북한에서 핵무기를 무슬림 테러단체에다 팔면 세계 여러 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전시작통권을 이양 받는다고 합니다. 작통권을 이양 받은 다음에는 한미연합사령부를 해체하고, 그 다음에 미군을 철수시키고, 그 다음에는 고려연방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남한을 적화통일시키는 것이 김정일의 각본입니다. 그래서 내일(10월 9일)부터 10여 일 간 매일 밤 8시부터 9시 반까지 광화문에서 촛불시위를 하게 됩니다. 매일 밤 참석하면 감사하고 그렇지 못하면 이틀이나 삼 일 간만이라도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방문하는 중 어느 호텔 앞을 지날 때 가이드가 소개하기를 호텔의 주인은 큰 부자인데 할아버지도 자살했고 아버지도 자살했고 며칠 전 손자마저 자살했는데, 그의 유서에 “나는 무엇이나 다 가져보았으나 내게 아무 즐거움도 주지 못했다. 나를 즐겁게 해준 것은 우리 집 강아지뿐이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Thomas Hugh라는 사람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호텔을 몇 개씩이나 가진 큰 부자였는데 93년도에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병이 들어서 누구를 만나지도 않고 자기를 죽일까봐 아무 음식이나 먹지도 않고 호텔방에서 문을 잠그고 살면서 깡통 음식만 먹으며 살다가 거의 죽게 되니까 구급차를 불렀는데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망 원인을 알고 싶어서 부검해본 결과 아무 병도 없고 오직 영양실조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땅 위에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진정한 부자도 아닌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들이 1, 2, 3위로 높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재물이 많으면 많은 만큼 행복하고 진정한 부자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면 참된 부자일까요?
1.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부자가 아닙니다. 쌀 10말 드는 통에 5말 넣어도, 9말 넣어도 차지 않습니다. 그러나 쌀 1말들이 쌀통에는 한 말만 넣어도 차고 넘치고 두 말만 넣어도 줄줄 흘러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욕심을 줄여서 욕심을 작게 가지면 늘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욕심을 버리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형제가 재산분배 문제로 다투다가 예수님께 찾아와 재판해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꾸짖듯이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14절)라고 말씀하신 후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라고 참된 해결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돈이 적다고 짧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하고 불행한 것,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돈 많은 집에 가정불화가 더 많고 자살하는 사람, 이혼하는 사람이 더 많은 법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8절에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하시고, 9절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고 하셨습니다. 몇 년 후, 몇 십 년 후의 것까지 염려하지 말고 그날그날 만족하며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날그날 만족한 줄 알고 살아야 진정한 부자입니다.
2.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
베드로는 앉은뱅이 거지가 돈을 구했지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본문,행3:6)고 명령하여 일으켜 세웠습니다. 쌀 100가마 준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에 실상 어떤 부자보다 더 큰 부자였습니다.
가나 혼인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모셨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다 채워졌습니다. 예수님 모신 가정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 모신 가정은 가난해보여도 가나 혼인집처럼 부족함을 다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를 볼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나라들은 다 부요해졌지만 주님의 교회들을 다 파괴해버린 나라들은 다 최빈국들이 되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며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둔, 북한을 비롯한 모든 공산국가들은 모두 비참하게 가난해지고 처참하게 인권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나라들은 부요해지고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해적들이 모여 세운 나라들이라도 후에 납치당해 간 여자들이 전해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나라들은 문명하고 부요한 나라들이 된 것입니다. 지상낙원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다고 할 만큼 크리스천이 많은 남한과, 크리스천을 죽이고 투옥하고 교회들을 파괴한 북한을 비교해보십시오. 예수님 믿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부요해지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개인이나 국가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가정과 국가가 진정한 부자입니다.
3.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땅 위에만 보화를 쌓고 하늘에 보화를 쌓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제물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실상은 현세와 내세에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부지런히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사업에 많이 쓴 사람은 하나님이 물 붓듯이 부어주시기 때문에 반드시 부요해집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고, 19절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고 큰소리칠 때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절)라고 하시고 이어서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많이 바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참으로 부요한 자입니다. 참으로 물질과 모든 면에 부자 되는 비결은 부지런히 하나님께 심어두는 것입니다. 바로 엊그제 아들 목사와 대화하면서 돈 모을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바치고 아낌없이 베푸는 생활을 하라 강조할 때 “그럼요,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들은 말씀이 그것 아닙니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은 미국 유학하면 돈 때문에 고생하고 식당일하면서 고생하지만 저의 아들이나 사위들은 신비하게 채워주시는 것을 날마다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남들이 아무리 방해하고 못 살게 굴어도 그 부요함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로 심고 헌금으로 심고 십일조로 심고 구제로 심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보장하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해도 물질에 인색한 사람은 평생 고생을 면치 못합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참으로 부요한 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청지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내가 맡아가지고 있는 동안은 아직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써둔 것만이 영원히 내 것이 된다는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도적맞는 법도 없고 부도나는 법도 없고 화재가 나서 타버리는 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21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축복의 말씀인데 이해를 못하고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시고 이어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만큼, 사람에게 베풀면 베푸는 만큼 크게 갚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19장 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56~57절에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산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한 것이 자기의 유산 즉 분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4. 천국을 소유한 사람
본문에 베드로는 은과 금은 소유한 것이 없지만 영원한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에 세상 것은 분토와 같이 버리고 목숨까지 버리고 순교도 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을 소유한 다음부터는 세상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결혼도 포기하고 목숨도 버리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소유했다고 해도 영생을 얻지 못하고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이보다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아파트 100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늘나라의 집이 예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비록 셋방살이를 해도 천국에 영원한 집이 예비된 사람은 참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금과 은 나 없어도
홍문수 목사 / 행 3:1-10
우리가 자주 듣고 부르는 「나」 라는 가스펠 송이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이 가사를 작시한 분은 ‘하늘의 시인’이라 불리는 송명희 시인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 분입니다. 지금 나이가 43세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간증을 들어보면 하루하루 살면서 제일 고민이 되는 게 화장실 가는 거랍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대로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눌한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온몸을 비틀어야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입니다.
그는 모진 고통 중에서도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그런 시를 쓸 수 있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외 1,500회 간증 집회, 100여 곡의 찬양시 작시, 25권의 책 저술 등 초인적인 일을 해냈습니다. 지금은 몸이 더 나빠져서 거의 전신마비 상태지만 여전히 열정을 갖고 기도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애인 학교를 설립하려는 꿈을 위해 오늘도 일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고통을 이길 기쁨과 보람을 소유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렇게 놀라운 분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도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생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각자의 형편과 처지가 다르지만, 각각의 인생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릴리 바닷가의 비천한 어부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된 당당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소개받은 앉은뱅이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미 이와 같은 변화를 체험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다시 한번 그 변화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런 체험이 아직 없다면 예수님을 만남으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함으로 그들에게도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1] 앉은뱅이 걸인의 비참한 모습 : 예수가 없어서 불행했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제9시는 지금의 오후3시에 해당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제3시(오전 9시), 제6시(정오), 제9시(오후3시) 등입니다. 그날도 그 시각에 맞춰 기도하러 갔던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통하는 문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여 ‘미문’(美門)이란 이름의 문이 있었다. 그 문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걸인들에게는 목 좋은 자리였을 겁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게다가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동정심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미문 앞에 걸인 하나가 앉아서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2절 보니까,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의 나이가 40세 정도였으니까(행4:22) 무려 40여년 동안 그런 고통을 겪은 겁니다. 그는 그날도 제 발로 오지 못하고 남들이 데려다 주었을 겁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그 날도 그 몸으로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불쌍한 인생입니다. 육신의 건강도 물질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가족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가족들마저 이제는 지쳐서 무관심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비참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장애인이 성전 임장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레21:18~23 참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강림한 후라 이미 신약시대가 됐지만, 1세기에는 아직 과도기라서 구약의 풍습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도 안타깝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짐승과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죠. 짐승은 영혼이 없습니다. 그냥 먹고 마시고 육신의 본능해도 살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혼에 하나님을 모시면 육신이 고통스러워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송명희 시인이 바로 그런 예가 아닙니까? 그런데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곤고합니다. 참 만족이 없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또 한 가지는 내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짐승은 살다 죽으면 그냥 흙에 묻히고 끝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 영혼은 내세로 들어갑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원한 내세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 천국의 소망을 갖지 못한 것이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눅16:19 이하를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자색옷(관복)을 입고, 베옷(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고가품)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엽니다. 그러니까 권세, 재물, 향락을 다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음부에 내려갑니다.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합니다. 반면 나사로(‘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란 뜻)는 노숙자요 음식 찌꺼기를 먹고 살며, 몸에 병까지 있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겉으로 보면 비참한 모습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영혼이 천사의 손길에 이끌려 천국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과연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고, 비참한 인생인지 밝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육신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 불행인 줄 압니다. 물론 힘들겠죠. 그러나 인간의 영혼이 중요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게 불행입니다.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사니까 더욱 비참한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 걸인도 영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면서 오직 하나 육신을 위해 하루하루 살 방법에만 골몰하고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육신이 앉은뱅이인 게 비참한 것보다 사실은 영적인 앉은뱅이 상태인 게 더 비참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무엇이 자신의 근본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앉은뱅이 걸인에게 동전 몇 닢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몰랐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마치 위암에 걸린 사람이 수술을 하는 등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매일 약국에서 가서 활명수나 사다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지금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까? 무엇 때문에 남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부럽다고 생각합니까? 과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있으면 행복한 것이고, 예수가 없으면 불행한 겁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의 당당한 모습 : 아무 것도 없는, 그러나 예수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보면 그들이 위대한 사도요 멋져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도 어렵지만, 그들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잘못하면 투옥이요 매 맞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행색도 초라하고, 빈털터리였습니다. 오죽 하면 그날도 걸인에게 줄 동전 한 닢도 없었겠습니까? 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
하지만 그들의 태도가 어떠합니까? 당당합니다. 4절 보면 걸인을 향해 외칩니다. “우리를 보라!” 이런 말은 당당함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적으로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자신의 풍요를 나누어 주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풍요는 영적 풍요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육신적인 궁핍을 극복할 뿐 아니라, 앉은뱅이 걸인의 육신적 영적 궁핍까지 해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하게 동전 한 닢을 주고 말았다면, 일시적이고 육신적인 위로가 됐을지언정 진정한 풍요를 제공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과 평안, 그리고 천국의 소망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보화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모신 자들을 가리켜 뭐라고 말합니까?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의 육신적인 풍요는 오히려 가질수록 자기 혼자서도 부족합니다. 궁핍합니다. 안 가져도 궁핍하고 가져도 궁핍한 것이 바로 육신적인 풍요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져 버립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풍요를 소유하기 전에는 궁핍함 가운데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어부로서의 육신적인 궁핍이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도 서로들 앞서려는 세속적인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끊임없이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한 그들로서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예수 한 분을 모심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부요해진 것입니다.
[3] 앉은뱅이 걸인의 변화 :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얻은 변화
다행히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앉은뱅이 걸인에게 주님의 은혜가 전달됩니다. 4절 보면 베드로에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금과 은은 없었으나 가장 소중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6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뛰어다닙니다. 그는 금이나 은을 소원했지만 ‘금보다 귀한 선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름은 당사자의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즉 인격, 권세, 능력 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에는 위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그 능력과 권세를 행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날 앉은뱅이에게 전해준 그 이름은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난 기쁨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일어나 걷게 된 육신의 기쁨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은 그 후 어떻게 됩니까?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 이전에는 남들에게 누가 되고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됩니다. 9절~10절 보면, 백성들이 다 놀랍니다. 여기서 ‘기이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놀라다’라는 단어는 황홀경(엑스타시)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 사람에게 나타난 변화가 증거가 되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겠다고 결신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까?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 3천명이 되었고, 이제 5천 명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받은 그 큰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구질구질하던 삶에서 180도 달라진 영광스런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살아계신 능력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으로부터 온갖 축복과 은혜가 찾아오게 됩니다. 설사 다른 것이 변화되지 않아도 영혼 구원 그 자체가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기쁨과 평안은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 어느 장로님의 전도 간증이 신앙 잡지에 게재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평소 늘 전도하는 분이신데, 어느 날 택시를 탔습니다. 기사분이 젊은 나이인데 얼굴이 너무 어둡고 말도 퉁명스럽게 하더랍니다. 이야기를 걸어 전도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데,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자기는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이 있나 살살 달래면서 이야기를 걸었습니다. 마음이 서서히 열리며 자기 사연을 말하는데, 정말 자살할 생각을 가질 만했습니다. 큰 교통사고가 나서 누워있는데 부인이 도망을 갔답니다. 그리고 누님은 중풍으로 누워있어 대소변을 받아내야 되고, 여동생은 정신 이상으로 격리 수용되어 있어서 조금만 틈나면 면회 가서 돌봐줘야 하고 ... 당장 죽고 싶어도 자기가 죽고 나면 누님과 동생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면 차마 자살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집 나간 부인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누님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동생의 정신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셨는지 솔깃해져서 말씀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 못 가요! 먹고 살아야 되는데 시간이 있나요? 게다가 헌금할 돈도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은 교회 가고 헌금 하는 게 당연하고 좋은 일이지만, 교회 안 나가도 되고 헌금 안 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방송을 듣고 설교 테이프 들으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주소를 묻고 설교 테이프를 보내준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있는데, 멀리서 택시가 총알같이 달려와 끽~하고 서는 것입니다. 보니까 그 기사분입니다. 택시를 탔는데 영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모든 게 그대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마음이 왠지 기쁘고 평안하니까 너무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손님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여러분, 그렇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어도 주변 환경이 바뀌지 않고 문제가 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화되면 그 어떤 고난도 이기게 됩니다.
여러분! 이 좋은 주님을 모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D. L. 무디는 세계적인 부흥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미국 역사에, 그리고 세계에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디를 누가 변화시켰습니까? 물론 예수님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전해 준 것은 평범한 한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무디가 구두 방에서 일하고 있을 때, 에드워드 킴벨이란 주일학교 교사가 찾아와 복음을 전해 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디만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킴벨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를 아시죠? 그는 20세기 미국과 세계에 영향을 끼친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그런데 그를 변화시킨 것은 한 명의 전도자입니다. 헨리에타 미어즈 여사인데, 그는 본래 화학자였습니다. 그런데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젊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수양관을 세워 젊은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 젊은이들 중 하나가 바로 빌리 그래함입니다. 사람들은 빌리 그래함만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미어즈 여사가 한 일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산목록 1호입니다. 금과 은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금과 은 나 없어도!” 이런 고백으로 승리하시고,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놀라운 이름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전 미문
이동원목사 / 행 3:1-10
상담실을 찾은 한분이 자기의 정신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무엇을 갖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애정의 대상을 찾아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그런 대상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을까 늘 두려워합니다. 나의 대인관계는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때로 나는 물쓰듯 돈을 써버리고 이내 그것을 후회하곤 합니다. 나는 돈을 모으지 못합니다. 나는 정서적으로 늘 불안을 느낍니다. 이런 불안이 심해지면 자살 충동을 느끼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누군가를 의지하지 못하면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대인 의존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정신 의학에서 이런 증상을 가르쳐 “경계선 성격 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라고 부릅니다. 사람들 중에 약 2-3가 이런 증상을 경험하고 상담가나 의사를 찾지만, 경미한 경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징후를 느끼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병명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경계선 성격 장애>! 본래는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선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인생은 누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이웃에게 다가서지도 멀지 하지도 못하는 소위 경계선상의 불안을 느끼며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제대로 교인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닌 경계선상의 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이어서 구걸로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 ''''''''''''''''미문''''''''''''''''(예루살렘 동편 안쪽에 위치한 Nicanor문, 아름다운 문)에 날마다 출근하여 구걸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늘 성전 가까이 있었고 성전을 사모하기도 하지만 성전에는 들어가지는 못하고 다만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자선에 의지하여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마도 그는 입만 열면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인색함과 이중성을 비판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 말로 성전 안과 성전 밖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던 인생이 아닙니까? 이렇게 교회 가까이 있으면서 신앙의 도움을 은근히 사모하면서도 입만 열면 늘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경계선상의 이웃들’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 경계선상의 이웃들을 돕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1. 이웃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본문 4절에 보면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이 사람을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2절에 의하면 날마다 이 사람은 친구들의 도움을 빌려 이 성전 미문을 찾았고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전에도 그를 자주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이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이 사람을 특별한 마음으로 주목해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여’라는 말은 희랍어에 ‘아테니조’(atenizo)라는 단어가 쓰여 지는데 <의도적으로 집중적으로 바라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fastening(fixing) his eyes upon''''''''''''''''(고정해서 붙잡아 두고 바라봄)이라는 번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말로는 ‘눈 맞추기’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제일 못하는 것의 하나가 ‘눈 맞추기’입니다. 부부도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눈 맞추라고 하면 잘 못합니다. 그런데 부부 생활에서 눈 맞춤은 입맞춤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눈 맞춤을 못하는 원인이 그 중요성을 몰라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한국어는 못된 시선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를 소유: 노려보기, 째려보기, 두리번거리기, 곁눈질하기, 눈 부라리기, 눈 치켜뜨기, 눈 내리깔기, 깔보기, 한눈팔기, 사팔뜨기, 먼 산보기, 도끼눈 뜨기) 문제는 우리에게 훈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메라비안(Mehravian) 법칙(UCLA, Albert Mehravian 교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첫인상이 7초안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첫인상이 무엇으로 결정되느냐 하면 대화의 내용으로는 7, 청각으로는 38, 몸의 언어로가 55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몸의 언어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눈의 언어인 것입니다. 한국어에도 ‘눈웃음 친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커뮤니케이숀 연구가가 소위 ‘5관에 의한 지각 정도’를 연구한 일이 있습니다. 상대가 보내는 정보의 인상이 5관중 무엇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에게 전달되느냐는 것입니다. 머리로 전달되는 것이 11, 손놀림으로 3, 입으로 2, 코로 1 그런데 눈으로가 83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의사소통의 결정적인 부분은 시각에 의하여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이웃들을 사려 깊게 주목하는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 주목할 때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사소통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이웃을 정말 한번 사랑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지금까지 한번도 바라본 적이 없는 그런 ‘느끼한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그를 치유하고 그를 변화시키는 기적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2. 이웃들과 기도를 나누어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의 경계선상에서 방황하는 이웃들을 섬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안 믿는 이웃들도 심지어 전도를 수용하지 않는 이웃들도 기도해 준다고 하면 대부분 거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 비행기를 타고 옆 좌석에 계신 분에게 전도했더니 화를 내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교회 나갔다가 받은 상처가 원인인듯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 대화를 지속하기 어려워 그냥 제가 목사인데 “한번 기도해 드릴까요?” 그러니까 갑자기 양처럼 순해지면서 “기도해 주세요”하더라구요. 그래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하자 어느 사이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리더니 공항에 도착해서는 “저 교회 다시 나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하던 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도였다고 믿습니다. 요즘 중보기도 사역의 장에서 통용되는 말을 빌리면 ‘명령 기도’(Prayer of command)인 것입니다. 이웃들을 섬기고 싶으시고 전도하고 싶다면 그를 위해 기도로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대학교수이며 전도자 가운데 ‘토니 캄폴로’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역시 비행기를 타고 “옆에 앉을 분에게 전도할 기회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보기에도 인상이 위협적이고 덩치도 큰 험상궂은 분이 옆 좌석에 앉더랍니다. 그래서 속으로 주님, 이 사람은 아니지요? 했더니 자꾸 그 사람이 내가 보낸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 더 흘깃 인상을 보니 입을 잘못 열었다가는 얻어맞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기도를 시작하기로 했더니 기도하는 동안 조금은 용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런 기도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성령님, 제가 일단 이 사람에게 기대어 보겠사오니 제 사랑의 마음이 전달되게 하소서”하고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부딪치자 갑자기 그가 “당신 혹시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 아니요”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기왕 날 위해 기도하려거든 소리를 내서 기도해 주시오”하더랍니다. 기도하는 동안 성령이 일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도상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제 구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그러나 그날 그들은 그들이 성전 안에서 만이 아닌 성전 밖 미문에서도 기도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들도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삶의 마당에서 우리의 기도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기적의 시작입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선물하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늘 이 앉은뱅이 걸인을 성전 미문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지나치고 싶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냥 돈을 구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지나칠 적마다 조금씩 이 사람에게 적선할 수 있었겠지만 날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날 만은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는 다른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에게 적선이 아닌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만은 이 사람이 돈 이상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생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선포한 것입니다.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랬더니 그는 일어나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는 교회의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유일한 책임이 사회봉사인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웃 사랑의 명령에 따라 물질로 사회를 섬기는 책임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좀더 이런 일에 헌신하기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실 사실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회봉사는 교회 아닌 다른 단체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만이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교회의 우선 순위적 사명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때 지나간 역사에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 창궐하던 시절 교회가 복음 증거의 사명을 잊고 사회봉사에만 열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회심 자들을 잃어버린 교회들은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전도도 사회봉사도 못하는 영향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름을 증거 하는 그 우선 순위적 사명을 결코 놓치지 않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부자 되어 전도안하는 교회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가난해져서 전도 많이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중세 교회는 부자 되어 전도안하는 교회이었습니다. 교황이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불러서 화려한 금으로 장식된 성당을 보여주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하는 말은 이제 우리가 못하겠구만” 하자 신학자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소리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 한 교회 앞 마당에서 유전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유전 가치가 있는 그 마당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의논하던 교회는 더 이상 교인들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유전 이익 배당금이 줄어들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망했고 교인들도 불행해 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위대한 교회는 은과 금이 남아도는 교회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를 위해 모든 은과 금은 속히 처분해버리고 스스로 가난해 지는 교회입니다. 다만 예수의 이름만 가득한 교회-나는 그것이 우리 교회의 미래이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이 오직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일어 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도 우리 사업체도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다시 재기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인 되신 주께서 친히 주의 이름을 위해 사는 그 가정, 그 사업 그 공동체를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승리를 누리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돌파는 나의 것
행 3장 1~12절 / 노경모목사(함께하는교회)
인간의 한계라고 하는 100m 10초의 벽이 1968년 6월20일 전미 육상선수권대회에서 세 사람에 의해서 돌파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100m를 누가, 언제 9초 5로 돌파할 것인가가 관심사입니다. 대한민국 영화중에서 최초로 1000만 관객이 돌파된 영화는 바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라는 영화입니다.
제가 ‘돌파’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돌파’라는 말은 ‘쳐서 깨뜨려 뚫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일정한 기준이나 기록을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장애나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 놓여 있는 큰 산과 같은 어려움들,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는 것이 바로 돌파입니다.
지금 여기 앉은뱅이가 있다고 합시다. 50세정도가 되신 분인데 날 때부터 앉은뱅이입니다. 50년 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앉아만 있었습니다. 다리뼈도 근육도 신경조직도 모든 것이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을 정도로 굳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의학적으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고칠 수가 있었으면 아예 어렸을 때 고쳤겠지요?
이 사람이 어느 교회 앞에 매일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걸을 합니다. 1년이 아닙니다. 5년이 아닙니다. 아마 몇 십년동안 그 교회 앞에 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교회를 다니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아들도 손자도 계속해서 이 앉은뱅이를 봅니다. 이 앉은뱅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교회 앞에서 앉아서 구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그 앉은뱅이가 교회 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시 했습니다. 항상 매일 그리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몸이 아파서 그 앉은뱅이가 나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허전하고 이상하게 느꼈습니다. 앉은뱅이 자신도 자기가 항상 매일 교회 앞에 앉아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 자신도, 그 교회 교인들도, 그 교회 목사님도 모두다 앉은뱅이가 그 교회 앞에 매일 앉아있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누구 한사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누구하나 그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저 앉은뱅이가 저 자리에 계속 앉아 있어야만 하는가?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그 교회 앞에 매일 앉아있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흔들릴 수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 완전히 고정되어 굳어진 큰 바위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교회 앞에 앉아있던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서서 걷습니다. 그리고 뜁니다. 그리고 앉은뱅이이었던 이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놀라운 일이 생긴 겁니다. 그냥 단순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까무라칠 정도의 놀라운 일입니다. 놀랍고 놀랍고 또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할렐루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는 엄청나게 큰 바위가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아예 바위가 돌파되고 말았습니다. 바위 가운데 구멍이 생겨 뚫리고 만 것입니다. 동쪽에서 해가 뜬다는 진리와 같은 것이 서쪽에서 해가 떠버리고 마는 엄청난 돌파가 이루지고 만 것입니다.
성령은 돌파하는 영입니다. 성령의 기적적인 능력을 ‘두나미스’라고 합니다. ‘두나미스’는 ‘다이나마이트’라는 뜻입니다. 큰 돌을 깨뜨리고 그 가운데로 터널을 내기 위해서는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합니다. 성령은 불가능한 것을 돌파하는 다이나마이트입니다.
성령은 돌처럼 굳어진 죄악된 마음을 돌파합니다. 그래서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은 마귀의 견고한 성을 돌파합니다. 그 마귀의 성이 아무리 견고하다 할찌라도 순식간에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치 여리고 성이 한 순식간에 무너지듯이 말입니다. 성령이 죽음을 돌파하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수십 년 동안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돌파하니 그 앉은뱅이가 한 순간 일어나 걷고 뛰게 됩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돌파는 베드로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돌파는 베드로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돌파는 영원히 베드로의 것입니까? 오늘 하나님을 믿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것은 될 수가 없습니까? 우리들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게 임했을 때 베드로는 돌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2000년 전에 베드로에게만 일어났던 돌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 있는 돌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호흡을 하듯이 우리가 날마나 식사를 하듯이 우리가 날마다 일을 하듯이 성령의 충만을 날마다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에 대한 관심이 없고 성령의 충만에 대한 열망이 없고,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좋고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권능은 오지 않습니다. 간절히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우리에게 돌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성령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권능을 구해봅시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기만 하면 우리는 달라지게 됩니다. 돌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주안에서 자신감이 생깁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상실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렇듯 성령의 충만함이 없는 인간적인 자신감으로는 돌파를 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습니다. 이제 그는 달라졌습니다. 주안에서의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가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제 구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가 되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갑니다. 과거에는 성전 문 앞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앉은뱅이가 여전히 있구나하고 지나갑니다. 그 사람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그 앉은뱅이가 일어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아유 내가 어떻게 저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말도 안돼 말도 안되고 말고.. 앉은뱅이가 돈 달라고 손을 내밀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면 그냥 눈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동전이 있거나,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때는 동전을 주었겠지요. 그러나 보통 때에는 앉은뱅이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 이제 달라졌습니다. 여유가 생겼습니다.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성령이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앉은뱅이의 눈길을 피하기는 커녕 도리어 앉은뱅이를 집중해서 쳐다봅니다. 그리고 소리칩니다. ‘나를 똑똑히 쳐다 보세요’ 정말로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3절과 4절을 읽어 볼까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어려운 문제나, 직면한 힘든 상황을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시선을 피해선 안됩니다. 마귀에 대해서, 마귀의 방해에 대해서 눈을 피하면 안됩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신감으로 도리어 직시하고 ‘야, 이리와’ 하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문제야, 어떤 어려움이야, 어떤 마귀의 방해야’ 하면서 어려움과 문제 앞에 당당하게 서야합니다. 마귀 앞에서 당당하게 대적하면 마귀가 피합니다. 우리가 마귀한테 주눅이 들어서 눈길을 피하고 꼬리를 내린다면 안되지요. ‘더러운 마귀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 자신감이 충만한 자세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야고보서 4장 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어려움과 힘든 문제를 보고 낙심되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축 내리면 안됩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신감으로 외쳐야 합니다. ‘성령으로 너를 돌파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어려움은 해결될찌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숙명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할 수 없지’ 하고 공존하려고 합니다. 아니요? 성령 받은 베드로는 이런 것들과 공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주목했습니다. 도리어 부릅니다. ‘야 이 어려움아. 나 좀 봐, 글세 나 좀 쳐다보라고..’
제가 목사로서 병원으로 환자들을 심방갑니다. 과거에는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분의 병을 고쳐주옵소서’ 그러나 어느 순간 달라졌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신감이 나를 채웠습니다. 병원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사람에게 올라가 있는 열은 떨어질지어다’
‘혹시 이렇게 기도했다가 안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망신인데..’ 이런 생각이 들어올 때도 있지만 성령의 능력이 이런 마음을 쫓아내고 자신감있게 기도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열은 떠나가라’라고 외치면 고열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의 열이 떨어집니다. 열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애기의 열이 즉시 떨어집니다. 심지어는 오래된 고열로 임종을 앞두고 무의식 상태에 있는 할머니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렇게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에게 돌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돌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담대함이 생깁니다.
‘담대’라는 말은 겁이 없고 베짱이 두둑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믿음이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죽고 난 뒤 염려 속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요단강물은 넘치지요.. 걱정이 태산같지요. 그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을 봅시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이 돌파할 수 있도록 담대함을 주십니다. 성령의 담대함입니다. 베드로는 수십 년 동안 한자리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당신 혹시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외칩니다. 명령합니다. 선포합니다.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나 돈 없어 그러나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단 말이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정말로 담대합니다. 그냥 조심스럽게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걸어라’고 외칩니다. 아니 7절을 보니깐 아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걱정과 염려가 우리를 묶지 못합니다. 우리는 담대함으로 우리의 처지와 환경과 상황을 넉넉하게 뛰어 넘습니다.
한국 교육계에 신선한 새 모델로서 자극과 도전을 준 살아있는 고등학교의 표본, 거창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전영창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전영창 선생님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빚이 많아 쓰러져 가는 거창고등학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학교 빚을 갚으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그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1958년 4월 학교는 다른 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찬송 그리고 담요 하나를 가지고 거창읍에서 40리 떨어진 어떤 산마루 언덕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서 자리를 펴고 일주일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미국 유학을 갔다 와서 이 나라에 새로운 고등학교 교육을 해 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학교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는 사흘 동안 밤낮으로 매달려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는 너무 가슴이 답답해서 사흘째 밤에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이 답답합니다. 응답의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일주일 금식 기도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서 동아일보에다가 하나님은 안 계시다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협박할 수 있는 담대함으로 기도를 하고 나니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이 시원해져서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일주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보니 학교 서무과로 편지 한 통이 와 있었습니다. 조우복이라는 미국 에 사는 어떤 성도가 수표 하나를 보낸 것인데 그 수표에는 놀랍게도 2,050불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2,050불이라는 돈은 그 당시 학교 빚을 정확하게 갚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 후 그가 1971년 학교 강당을 위해서 다시 한번 엎드려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이 유명한 미국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담대함이 생깁니다. 이 담대함으로 돌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겸손해집니다.
성령의 능력은 겸손함으로 돌파를 마무리 짓습니다. 아무리 돌파를 잘 했다하더라고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할 때 돌파된 곳은 다시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령은 ‘선줄로 알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수십 년 동안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걷습니다. 뜁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놀라운 돌파입니다. 기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베드로 곁으로 모여듭니다. ‘베드로, 베드로’ 베드로를 외칩니다. 영화로 말하면 클라이막스입니다. 절정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난 돌파는 여기가 절정이 아닙니다. 클라이막스가 아닙니다. 여기는 돌파가 성공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점입니다. 갈림길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이제 돌파가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자기가 영광을 받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향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 베드로’ 환호하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는 외칩니다. 뭐라고 외칩니까? 11절과 12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내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돌파를 멋지게 마무리 짓는 겸손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보면 이러한 상상도 못할 놀라운 돌파의 역사가 베드로를 통해서 계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새해 1월을 살고 있습니다. 1월부터 돌파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읍시다.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받읍시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멋진 돌파의 역사가 일어나는 체험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치유와 회복은 찾아 나서야 합니다
행 3:1-10 / 노경모 목사
오늘날은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큰 상처 속에서 고통을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지가 오늘로 34년이 되지만 아직까지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도 한 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상처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꼭 이 문제 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모양 저모양으로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없나요? 여러 가지 상처가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서 상처가 없는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반드시 이 상처들은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회복되지 않으면 이 상처가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결과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반드시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치유될 수가 있고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한 사람의 상처가 얼마나 멋지게 치유되고 회복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에는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있었습니다. 그를 사람들이 메어다가 성전 미문에 두면 그저 구걸만을 하여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구걸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구걸하는 사람들에겐 성전처럼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돈을 구걸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병을 고쳐 주기를 기대하거나 바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침 받으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으면서도 돈뿐이었습니다.
한번은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앉은뱅이는 여전히 한푼의 동정을 구했습니다. 두 제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나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때 그는 다리에 힘을 얻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온전하고도 완전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었던 사람이 겨우 걸을뿐만 아니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완전하고도 온전한 회복과 치유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에는 장소가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2절에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침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 앉은뱅이를 메어다 주고 저녁이면 집으로 메어 가곤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걸의 장소를 성전 문 입구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당 입구나 빌라도 총독 관저 입구를 구걸의 장소로 선택했더라면 걷고 뛰는 회복과 치유의 은총을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소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별히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는 장소가 더더욱 중요합니다. 빨리 병원으로 가야지요? 병원도 아무 병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전문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이번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위기의 순간을 맞이 했지만 한남동 집에서 차로 5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순천향대병원이 있어서 그 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위기를 넘겼지요. 지금은 삼성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이렇게 치유에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성도들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습니까? 어떤 때는 탈진합니다. 기진맥진합니다. 지치지요. 회복과 치유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병원이라는 장소가 필요하듯이 성도들에게는 성전, 교회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건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의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시면 영혼과 마음과 육체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고 츨애굽기 15장 2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병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의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본인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자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러 온 의사임을 마태복음 9장 11절-1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모든 병든자와 약한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교회의 머리되십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께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을 치유하십니다. 회복시키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이 사실을 믿고 이 사실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 상처와 고통가운데 있는 분들이 저에게 상담전화가 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진정으로 치유받고 회복되시기를 원하십니까? 묻습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시면 저는 주저없이 함께하는교회에 예배드리러 오시라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치유하고 회복시키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른 데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 여러분은 너무나 잘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늘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을 만지시고 여러분을 회복시키시고 여러분을 소생시킬 것입니다.
시편 84:1-4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성전 즉 교회를 사모하며 교회에 나오기를 힘씁시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성경 공부합시다. 교회를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적으로 치유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에는 시간이 아주 중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라고 했습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장소와 시간은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본문에 ‘제 9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정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일어나도록 자리를 까는 것입니다. 즉 멍석을 까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기회를 만들거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멍석을 깐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55:17절에 보면 다윗은 하루에 세 번을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하여 놓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 6:10절에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니엘을 다니엘서 10장 11절에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으로 받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굶주린 사자들이 다니엘에게 작은 상처 하나라고 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좇아 정한 시간에 새벽 미명에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정한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나의 사사로운 이익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것을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지 않고서는 힘듭니다. 기도를 통해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고친다고 야고보서 5장 1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마음의 병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울증, 조울증, 뚜렷한 근거나 이유 없이 갑자기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공황 발작이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염려증, 공포증 이런 정신적인 병들의 치료에 기도가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요즈음 더욱 더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치료의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에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지요. 요즈음은 일반 의하계에서도 기도가 치료에 아주 효과적이라는 논문들이 많이 발표되면서 ‘기도치료’라는 치료의 한 영역이 생겼습니다. 여러 가지 임상 발표가 있지만 그 중에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심장내과 의사 바드(Randolph Byrd)는 393명의 응급실을 통하여 입원하는 관상동맥 질환 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치료하였습니다. 한 그룹은 병원 외부에서 기독교 신앙인들에 의한 기도를 하게 하고 다른 한 그룹은 대조군으로써 기도 치료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치료군과 대조군의 내과적 치료는 동일한 의사에 의해서 동일한 치료를 하였고, 치료하는 내과 의사나 환자 자신은 기도 치료가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몰랐고 기도를 하는 신앙인들도 단지 환자의 성(姓)만 알뿐 다른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하루 세 번식 규칙적으로 환자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도를 받은 그룹에서는 항생제 사용량이 5배가 감소하였고, 폐부종의 발생이 3배 적었으며, 기도 삽관을 해야 하는 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고, 사망하는 사람이 적었다고 합니다.
회복을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까? 치유를 소원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소생됩니다. 우리의 탈진되고 지친 심령이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처와 질병들이 치유되고 회복됨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는 마가복음 9장 29절의 말씀은 기도의 시간이 치유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치유와 회복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 날 그 시간 거기서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지 못했다면 치유되는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만남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합니다. 학생은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특히 환자는 의사를 잘 만나야 합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남이 모르게 혼자서 몸부림을 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혼자서 그것을 치유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매우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의사는 환자들을 위해서 준비된 분들입니다. 의사한테 빨리 가는 것이 치유의 지름길입니다. 이렇게 좋은 만남은 회복괴 치유의 필수적 조건입니다.
성경은 병든 자에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라고 권합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을 읽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교회 장로들은 교회 목사님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병이든, 육체적인 병이든, 정신적인 병이든 성경의 말씀대로 목회자들을 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즈음은 목사님들을 청하지 않습니다. 즉 심방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긴 여러 가지 이유들도 있습니다. 결혼식이라든지, 7순 잔치라든지, 개업하는 곳에서는 목사님께 심방을 요청하면 목사님들이 기쁘게 잘 심방을 가십니다. 너무나 좋은 일인데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이 없지요. 그러나 이런 병든 곳에서 심방을 요청할 때 목사님들이 심방가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뭐 내가 기도한다고 나을 병도 아닌데.. 목사님 스스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성도들도 병으로 인해 목사님께 심방요청을 잘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한다고 특별히 낫는 것도 아니고 목사님이 심방오시면 귀찮고...
물론 목사님이 가서 기도한다고 다 병이 낫는 것은 아니지요. 병을 고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지요. 목사님이 고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병든 자들을 위해 목회자들의 심방을 요청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심방요청을 받으면 병든 자에게 지체없이 가서 병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명령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을 통해서 병든 자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치지고 탈진하고 기진한 자들이,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는 야고보서 5장 14절-15절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이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회복되고 치유되고 소생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제 때에 체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생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병자들을 위해서 심방을 요청받은 분들은 그 병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과연 병이 나을 수 있을까 의심해서도 안됩니다. 치유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6절-8절을 읽어 봅시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기도하는 목회자들을 만나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냥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수 많은 환자들이 치유받고 회복된 사실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치유와 회복을 위한 좋은 장소를, 시간을, 좋은 사람들을 오늘 성경이 찾아나서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적으로 건강을 온천하게 회복되고 치유받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있는 것과 없는 것
행 3장 1~10절 / 문기태목사(창원침례교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돈의 위력은 너무나 크고 대단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돈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추구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돈을 의지하고 돈을 추구하며 돈을 사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돈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몹시 힘들어 합니다.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오래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정적일 때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신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보다 돈을 선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돈이 나쁜 것도 아니고 돈이 필요 없는 것도 아니지만 돈을 사랑함과 돈에 대한 탐욕은 참된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위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성전 문 앞에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사도들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사람은 사도들에게 몇 푼의 동전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기대를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 한 마디의 말이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나면서부터 장애를 입어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 걸인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면서 그를 치유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도 사도 베드로와 똑같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베드로 사도 같은 능력이 나타날까요?
1. 사도들에게 없는 것 - 은과 금
베드로는 걸인에게 명확하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 말을 했을까요? 걸인이 사도들에게 기대한 것은 은과 금 즉 돈이었습니다. 걸인은 성전 문을 드나드는 수 많은 사람을 보면서 그 주머니에 돈이 있을까? 없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나를 동정하고 몇 푼이라도 던져주려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 뿐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단지 사람이 돈으로만 보였습니다. 사도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기도하는 사람인가? 얼마나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 예수님께 붙잡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가? 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전을 몇 푼이나 적선해 줄 것인가? 만 기대하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걸인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사도들이 동전 몇 푼을 던져준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허기진 배를 채우게 되고 잠시 고통을 잊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그가 안고 있는 불행의 고리를 끊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돈다발을 안겨주어도 그를 평생 따라다니는 비참하게 하는 저주의 사슬은 여전히 그를 괴롭힐 것입니다. 동전 몇 푼 아니 은과 금을 던져준다 해도 그것이 그를 괴롭히는 죄와 저주로부터 그를 구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오로지 돈만을 기대하며 사도들을 바라보는 그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인의 기대는 은과 금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을 기대하는 걸인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먼저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은과 금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내게 은과 금은 없다고 먼저 명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려면 먼저 잘못된 기대부터 내려 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놀라운 복을 받으려면 헛된 생각부터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은과 금을 기대하지 말고 더 좋은 것을 기대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걸인과 다릅니까? 은과 금을 얻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 미문에 앉은 걸인처럼 내게 은과 금이 없기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스스로 초라하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과 금을 더 많이 모아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관심을 은과 금에만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걸인처럼 날마다 성전 문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관심을 갖지 못한 채 은과 금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들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래도 나는 모든 사람에게 줄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외치며 살고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은 은과 금에 모두 마음을 빼앗기고 살고 있습니다. 돈의 위력 앞에서 모두 굴복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돈이 차지하고 앉아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신뢰하고 돈을 사랑하며 돈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미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혹 당하여 속아 은과 금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은과 금이 줄 수 없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이 전능한 것처럼 보여도 절대 전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은과 금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위기에서 건져 주십니다. 은과 금이 없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은과 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은과 금을 모두 가져도 불행한 사람이 수없이 많고 은과 금이 없이도 행복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사도들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더 좋은 것을 베풀어 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은과 금이 있다면 그래서 은과 금을 선하게 사용한다면 잘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기 바랍니다.
2. 사도들에게 있는 것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는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에게 있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돈은 없었지만 성령 충만했습니다.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마주친 걸인을 보고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할 것을 내다보고 지나치지 않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자 그 한 마디의 말이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나면서부터 장애를 입어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 걸인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받아들여 깨끗이 치유 받고 온전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치유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치유를 예수의 이름이 하였습니다. 은과 금이 줄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발휘했습니다. 은과 금으로 줄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을 예수의 이름이 가져다 주었습니다. 은과 금으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행복을 예수의 이름이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야말로 걸인에게 꼭 필요한 선물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걸인 뿐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절대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이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영혼도 구원받고 육체도 구원받습니다. 개인도 구원받고 가정도 구원받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전 미문에서 만난 걸인에게 필요한 것이 은과 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만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주어짐을 확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 들여야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여 저주가 떠나가고 불행이 떠나가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최고의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은과 금을 주려고 하기 보다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은과 금을 나누어 주기 보다는 예수의 이름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으면 은과 금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를 질병과 불행과 죄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인생을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전 문 앞에 있는 장애인 걸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누어 주자 그는 그 자리에서 그 이름을 믿고 깨끗이 치유 받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의 이름을 믿고 치유 받아 건강해진 그 사람을 곁에 세워놓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의 이름을 이 사람이 믿으므로 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되는 날이 주님께로부터 임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남자만 오 천명이 예수를 믿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평생을 구걸하며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이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오 천명을 구원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더니 장애와 질병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불행과 저주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비참하고 초라한 생활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여러분, 은과 금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도들처럼 은과 금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혹시 은과 금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없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안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지만 바로 그분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보물이라는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생명이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의 근원이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모든 불행한 문제를 풀어주는 유일한 해답이라는 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죄 사함의 선물을 주시고 새롭고 복된 삶을 가져다 주시며 영원한 천국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게 하심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누구든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동일하게 그 사람 안에서도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되며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에 담긴 뜻은 아주 고귀한데 이름대로 살지 못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그는 크리스토펴 콜럼버스라는 사람입니다. 바로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습니다.그는 황금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그가 신대륙을 찾아나선 것도 사실은 황금 때문이었습니다.그러나 그의 이름은 황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크리스토퍼'란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그러나 사실 그의 마음 속은 온통 '황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아니면 황금을 쫓는 인생을 계속 살 것인가'.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콜럼버스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그리고 명쾌한 결론을 내렸습니다.'이제부터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자'.그때부터 콜럼버스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나는 14년 동안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그 기간이 내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는 세월이었다"
여러분은 은과 금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처럼 은과 금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은과 금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갑니까? 은과 금이 있고 없고 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은과 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뿐 아니라 확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도 있어서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참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다. 여러분이 은과 금을 선교와 구제를 통하여 나누어 주는 일을 계속하여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은과 금을 나누어 준 것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을 함께 나누어 주어야 온전히 주는 삶입니다. 은과 금이 없어서 줄 수 없다 해도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여러분에게 있는 예수의 이름을 주어서 가장 좋은 선물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주라
이기복목사(하늘문교회) / 행 3:1-10
본문은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 기적을 베푼 사건입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구약의 율법의 전통을 따라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장애인 하나가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인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하니 거지가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볼 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발과 발목에 곧 힘을 얻고 일어나 뛰며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는 거지와 이미 얻은 은혜를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눈은 언제나 무엇을 받을까하여 바라보는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눈은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은혜의 눈입니다. 결국 받으려고 내민 손이 주려고 내민 손에 붙잡혔습니다. 앉은뱅이의 손은 유한한 물질을 구하는 손이요 베드로와 요한의 손은 영원한 생명을 주려는 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는 무엇인가를 주려는 마음이요 손길이요 행동입니다. 앉은뱅이에게는 돈이 전부요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물질이 결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을 주는 전도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1.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전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전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나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 때문에 전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었다면 전도하자고 하면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입니다. 나 하나 믿는 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거지에게 줄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 속에 꽉 차있었습니다. 두 사도가 거지를 돕고 싶은 생각이나 마음이 없었다면 성전 미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거지를 외면하고 빨리 성전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거지 앞에서 멈추었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요, 사회에서도 외면당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는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마음과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 수반되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구제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네 것 내 것이 없이 이웃 사랑을 실질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금번 전도운동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의 재물을 쓸 수 있는 전도자가 됩시다. 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배 성도들은 참으로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물질이나 돈이 없는 사람은 건강한 몸을 주신 주님 앞에 손과 발을 가지고 섬겼습니다. 나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제물로 드렸고 가지고 있는 재능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도운동에도 협력하여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합시다. 마10:8절에 보면 70인 전도대를 파송하면서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시간도 거저 받았고, 물질도 거저 받았고, 재능도 거저 받았습니다. 건강도 거저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사랑을 거저 주는 전도자가 됩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전도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전도는 고상한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는 법을 전하는 것도, 성공의 비결을 전수하는 것도, 병 고치는 비법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하고 지식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입니다. 전도는 원색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그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What I have I give you”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습니다. 바울은 빌1: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의 전부라고 믿고 고백하여 생활하는 사람이 그 주님을 전하여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고백하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이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겠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 대장에게 “당신의 전도 비결을 어디에 있습니까? 그 능력을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묻자 그는 “내가 어느 날 런던의 빈민가를 보았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저들에게 줄 금과 은은 없거니와 나의 전부인 그리스도를 전하여 주리라고 생각하던 순간부터 전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뿐 아니라 나의 전부로 믿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유일한 희망이요 생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말하고 행동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부임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랑스럽게 전합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이웃과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도, 행복도, 명예도, 돈도 바꿀 수 없네” 우리의 고백이요 자랑이길 바랍니다.
3. 우리가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장애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비결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기도하였습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기도시간이 되어 기도하려고 성전 미문으로 가던 중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원동력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전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전도대상자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주님 앞에 데리고 온 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도 병자가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명령하실 때 즉시 나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특히 영적전쟁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전도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기도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와 성도들은 지원사격인 기도를 집중적으로 해야 합니다. 전도주일을 지키려면 먼저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큰 행사를 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금번 전도집회에서 은혜 받은 것처럼 우리는 아직도 믿지 않는 가족이나 골육친척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전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수석 총리가 되어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다니엘을 모함하는 자들이 왕을 꼬여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 속에 넣는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둘째는 직접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거지를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운명이 기구하다느니, 저렇게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한다고 비난도 했을 것입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어 동전 한 푼 두 푼을 던져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여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도하러 출입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데 있는 그 사람에게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전도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음에 시간나면 하고 핑계하면 영원히 전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가 그렇게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에 대하여 사탄 마귀나 이방인들 특히 안티 기독교인들이 방해하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전도는 하지 않고 비난만 하고 남이 하는 전도를 비웃는 사람입니다. 아주 잘못된 처사입니다. 또한 남이 하는 방법을 무시합니다. 내가 하는 방법만이 제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전도를 하지 못하게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주일을 정하고 모든 교인들이 불철주야 힘쓰는데 어디 놀러가자고 유혹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브가 죄를 짓고 아담에게 먹으라고 권면한 것과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행동합시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가던 길을 멈추어 복음을 전하고 손을 내밀어 행동하는 믿음으로 실천합시다.
4. 전도한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전도를 받은 사람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 많습니다. 전도를 받은 사람이 더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보는 것처럼 대견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거지는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겠습니까? 평생 걷지 못하던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즉시 성전으로 들어가 자기의 체험한 기적을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 전체가 일어난 앉은뱅이의 간증이요 전도입니다. 혹시 우리도 이러한 앉은뱅이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금번 기회를 통하여 전도할 뿐 아니라 우리도 새롭게 변화를 받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 상급이 가장 큰 것입니다. 생명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6가지 기적의 통로
이한규목사 / 행 3장 1-10절
본문에는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이 40여 세에 기적적으로 일어서는 장면이 나온다. 40여년의 장애를 극복한 걸인의 얘기는 하나님의 사명 이행과 복음 전파를 위해 필요하다면 인생에서 극복하지 못할 단점이 없다는 도전을 준다. 본문의 기적은 사도들이 처음 행한 기적인데 그 놀라운 기적의 통로는 무엇인가?
1. 정기적인 기도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정기적으로 기도했다. 그 시간은 3시, 6시, 9시로서 오늘날의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늘날의 오후 3시인 제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1절). 그것은 그들이 정기기도를 중시했고 기도를 생활화했다는 암시다. 생활화된 기도는 기적의 핵심 통로다. 다니엘의 지혜의 원천은 무엇인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정기적으로 하루에 세 번 기도한 삶이었다(단 6:10).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이고 영혼의 호흡이기에 항상 기도하면서 특히 정기기도 시간을 가지라. 정기기도를 꾸준히 드리면 누구보다 능력 있는 기도자가 된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언제 하늘의 불을 끌어내렸는가? 제단에 물을 붓고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기다린 후 간절히 기도했을 때다(왕상 18:36). 왜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기다렸는가? 그때는 이스라엘의 저녁 정기기도 시간 때다. 엘리야가 다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정기기도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도한 것은 정기기도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정기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은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다는 표시다. 문제나 기도제목이 생길 때만 기도하지 말고 기도를 생활화하라. 기도를 생활화하라는 말은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가급적 덜 보이라는 뜻도 있다.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면 기도의 생활화나 기도 응답의 역사가 멀어진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밀하게 작전계획을 짜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승리와 기적의 최대 원천이다.
2. 화합하는 마음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올라갔다(1절). 그들은 당시에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성령까지 받았다. 그래도 유대인의 기도 관습은 물론 유대인의 성전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도 훌륭한 점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기존 스타일을 잘 깨는 것을 영성으로 오해하면 특권의식과 비판을 앞세운 이단 교주의 미혹에 넘어가기 쉽다. 한국 교회가 썩었다는 이단 교주의 비판은 대개 기성교회를 깨고 자기 단체로 영혼을 빼앗으려는 것이 목적이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운다고 다 믿지 말라. 이적을 행하는 것으로도 믿지 말라.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한다고 했다(마 7:22). 한국 교인은 체험과 현상에 아주 취약한 편이다. 체험과 현상을 무조건 신뢰의 근거로 삼지 말고 그 체험과 현상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를 살피라. 또한 신기한 성경해석도 다 믿지 말고 그런 해석도 성경을 보고 인터넷 검색도 하면서 잘 분별하려고 하라.
화려한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합을 위해 애쓰면서 바르고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단 교주는 교리 문제보다 윤리 문제로 비난받을 때도 많다. 교인 빼앗기를 일삼고 기본적인 화합 자세가 없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진리를 내세워도 그 진리는 헛된 진리일 뿐이다. 늘 화합 정신으로 무장하라. 본문의 주인공인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성격이 극과 극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극과 극이 하나 되면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더욱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된다. 그것이 화합의 힘이다.
3. 유연함과 온유함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구걸했다(3절). 그때 그들은 정기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에 왔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지만 걸인의 구걸에 반응했다. 그 모습은 그들의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너무 치우친 경직된 모습이 없도록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유연함을 가지고 가나안을 정복하라.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자비와 온유도 잃지 말라. 유연함과 온유함은 사랑의 중요한 표식이다.
유연하고 온유하게 살면 손해 볼 때도 많지만 그 손해가 앞날의 더 큰 아픔과 상처를 미연에 방지해준다. 반대로 경직된 채 악착같이 살면 손해를 덜 볼 것 같지만 언젠가 큰 일이 터지면 순식간에 추락하고 부러진다. 버들가지 같은 사람은 바람을 많이 타지만 그 성향을 잘 활용하면 잘 순종해서 고목나무 같은 사람보다 더 귀하게 쓰임 받는다. 좋은 의미에서 적절한 흔들림은 필요하다. 예전에 63빌딩 59층 연회장에 갔을 때 건물이 흔들려 놀랐는데 고층건물은 그런 흔들림이 있어야 오히려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딱딱하게 살지 말고 목표를 세워 전진할 때도 목표 위주보다 사람 위주로 일하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힘없는 걸인은 그들 사역에 거의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겠지만 그들은 그의 구걸에 바쁜 걸음을 멈췄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때로는 힘찬 발걸음을 멈출 줄 아는 온유함을 훈련하라. 사명 이행에 큰 도움이 안 되더라도 어떤 감동이 생기면 누군가를 위해 가던 걸음을 멈추거나 늦추라. 그런 유연함과 온유함이 있는 곳에 치유의 역사도 있다.
4. 거룩한 자존심
베드로와 요한은 걸인이 구걸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주목한 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다(4절). 거룩한 자존심과 권세를 가지고 “그를 보라.”고 하지 말고 “우리를 보라. 나를 보라.”고 할 정도로 나를 귀하게 여기라. 또한 나의 거룩한 자존심도 지키면서 전체 교회와 교인의 자존심도 지켜주라. 교인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믿는다면서 왜 그래? 교인이 더 나빠.”라는 말이다. 가끔 어떤 교인이 나를 실망시켜도 전반적으로는 교인이 더 좋고 또한 더 좋게 되려는 마음과 의식이라도 있다는 사실을 소중히 여기라.
“교인이 더 문제야.”라는 말로 자기 정체성과 거룩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교양도 아니고 반성도 아니다. 다른 교인의 잘못을 보면 더 각성해서 “나를 보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힘쓰라. 아무리 속상해도 “교인이 더 나빠. 교인이 왜 그래?”라는 말을 하는 것은 나의 현재의 정체성과 지나온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성도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 잘못된 어떤 교인 때문에 성도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지 말라.
남이 가진 것이나 남의 형편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 남이 나를 불쌍하게 보면 이렇게 말하라. “생각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지금도 행복해요.” 남이 나를 부러워할지언정 나는 남을 부러워할 것이 없다는 거룩한 자존심으로 살라. 물론 아무 것도 없이 자존심만 내세워 살면 안 되지만 실제로 성도는 가진 것이 많다. 나를 사랑하는 예수님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새 많은 사람이 상류사회를 추구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신실한 성도가 진짜 상류사회의 일원이다.
5. 순수하고 굳건한 믿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하자 걸인은 무엇을 얻을까 하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5절). 그때 베드로가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곧 걸인이 일어났다. 기적은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곳에서 믿음을 통해 생겨난다. 요즘은 은금이 넘쳐도 “일어나 걸으라.”는 능력은 오히려 사라진 시대다. 언뜻 보면 믿음의 말과 고백이 곳곳에 넘치는 것 같지만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가르침에 의해 유도된 믿음의 말과 고백은 넘쳐도 진짜 믿음과 말과 고백은 오히려 사라진 것이 문제다.
20세기부터 치유기도를 할 때 베드로처럼 기도하는 것이 유행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마야 썩 물러가라.” 그런 선포로 인해 이단 교주의 거짓 기적과 기적 선전과 그로 인한 기복적인 교인만 늘어나지 실제 기적은 오히려 잘 일어나지 않는다. 참된 믿음과 긍휼도 없이 습관적으로 베드로의 치유 선포만 모방하지 말라. 베드로는 치유 능력을 과시하려고 습관적으로나 모방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지 않았다. 학자에게는 논문 표절이 가장 나쁜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신앙 모방이 가장 나쁜 것이다.
당시 베드로의 귀에는 예수님이 다락방 강화에서 하신 유언의 말씀이 늘 맴돌았을 것이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순수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했기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순수하고 굳건한 믿음이 놀라운 기적의 통로다.
6. 응답 후의 헌신
베드로가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발과 발목에 곧 힘을 얻었다(7절). 40여 년의 장애가 극복된 것이다.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했는가?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8절). 그 모습에 모든 백성이 심히 놀랐다(9-10절). 기적을 기적으로 끝나게 하지 말고 다음 단계의 증거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까지 있게 하라. 아무리 큰 기적을 체험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헌신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복된 기적이 아니다.
고난 중의 성도의 삶은 4백 미터 계주와 같다. 처음 주자는 ‘고난’이다. 그렇게 고난이 생기면 ‘기도’라는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라. 그러면 적절한 때에 ‘응답’이란 주자에게 바통이 넘어간다. 그때 거기서 계주를 멈추지 말고 응답 후에는 ‘헌신’이란 주자로 바통을 넘기라. 그때 비로소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된다. 응답받은 단계에서 계주를 끝내지 말라. 응답으로 인생 계주를 끝내면 그 다음에는 응답이 순조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응답이 순조롭게 주어지면 영성과 인성이 더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응답 받고 그 은혜를 헌신으로 승화시킬 때 그 다음 기도 제목에도 기쁘게 응답하신다. 4백 미터 인생 계주를 잘 완주하는 인내와 헌신을 보이라. 고통을 기도로 잘 연결되게 하고 응답을 헌신으로 잘 연결되게 하라. 응답 받고도 헌신이 없는 것은 400미터 계주를 300미터만 뛰고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100미터만 뛰고 포기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기도 응답과 축복을 ‘헌신’이란 다음 주자에게 잘 연결시키라. 그때 기적과 축복도 저절로 따라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