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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後地實(우후지실)
- 비온 뒤 땅이 굳음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소식?]
[병판집에 불이 났다는구만.]
[아이고, 시방 그게 뭔 소리단감? 초가삼간도 아닌 디. 그 큰 집에 불이?]
장씨의 유달리 사삭스러운 반응이 지나던 이들까지 가는 이의 발길을 붙들어 맸다. 정작 서씨는 그 반응에 익숙하다는 듯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곡할 노릇인게 지. 아 글쎄 종놈들은 죄다 도망가고, 잠들어있던 병판과 그 여식이 황천길 갔다는구만.]
[아니, 이 날씨에 불이 웬 말인감.]
장씨의 시선을 따라 일제히 하늘을 향했다. 청명하고 높은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보란 듯이 지나고 있었다. 비가 오려고 폼을 잡는 것이 추우[秋雨]의 기운이 만연한 날씨였다. 그 날이 어제라고 별다를 바 없었다. 비소식이라면 모를 까, 불 소식이라니...뭐 구지 구별하자면 종종 때 아닌 불로 종종 화마소식이 상인들 입에 오르내린 것은 심심치 않은 일이긴 하였으나 그는 정말 만에 하나 있을 법한 일로 꼽히는 대사[大事]임은 분명했다.
허나 이 사건이 더욱이 희한한 것은 병판대감네라면 대궐 부럽지 않기로는 조선팔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거주하고 있는 종만 계수한다 해도 족히 마흔이 넘는 수 .헌데 누구도 불이 그리 거세질 때가 아니 화마가 주인양반의 목숨을 앗아갈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 했다는 것은 쉬이 납득이 갈만한 일은 아니었다.
장안 사람들은 때때로 종놈들이 합세해 집안에 불을 질러 노비문서를 불사르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기에 그저 그리 여길 경우가 많았으나 더군다나 호사를 누리며 만수를 누릴 것 같던 외솔이 역적죄로 그 사체마저 능지처참에 처해졌으니 이중 삼중으로 겹친 악재 소식에 사람들은 더욱 그 궁금증은 증폭 되었다. 오늘 장바닥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린 이유역시 어찌 그와 관련 된 화근을 주워들을까 싶어서였다.
[인생 진짜 별거 없네 그려. 그러게 욕심을 줄이 지.정말 있는 놈들이 더하는 갑소.]
괜한 홀망함에 내뱉은 말에 그저 관망하던 정씨가 팔짱을 풀고선 이야기에 발을 디밀었다.
[역적? 아니 아래로 여식하나 남은 치가 뭐가 부족할 것이 있어서 그랬단 말인 가. 안 그런가? 그리고 그 분이 그럴 분이신가? 자네들도 황천 길 건넜다고 그러는 거 아닐 세. 여기 있는 이중 대감댁 곡창에 손 벌리지 않은 이가 있었던 가? ]
[쉬이-.우리 입에 올려서 좋을 거 없는 일 아닌 가 . 목소리 낮추시게.]
[아니 내가 틀린말 하는 가!. 지난 이맘 때 오목골 장씨가 정승네 가서 쌀 한가마 빌린 것, 아직 그 이자도 못 갚아 얼마 전엔 이자대신 곤장을 자그마치 서른 대나 맞고 왔다허이. 헌데 그 대감댁 곡간의 가마들을 빌리다못해 밤도둑맨치 곡간을 털털 털었을 적에도 그냥 모른 척 안 보이는 척 눈 감아 주신 분이셨네. 그런 분이 역적이라니 당치도 않지.]
[아니 글쎄 목소리 좀 낮추래도!]
장씨의 말 그대로였다. 이듬해 겨울에도 지난 해 겨울에도 외솔은 백성들을 위해 꼬박꼬박 자신의 곡간을 열어주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 해왔었다. 곡식을 내어주고 이자를 불리는 탐욕적인 돈 놀음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었다. 쌀들은 모레나 겨가 섞인 것도 아니었고 먹지 않아도 배부른 흔히 말하는 이잣쌀도 아니었다. 비록 형평성을 위해 장도수를 시켜 빌려간 이들의 명부를 기록하도록 하였으나 독촉하는 법을 몰랐다. 그의 그러한 행로가 거두어들이기를 염두하지 않았던 일임은 적어도 이 도성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일이 그러하니 외솔집 대문을 두드리는 이는 해가 바뀌며 그 수는 늘어만 갔다.
하여 민심이 자신들에게서 등을 돌리니 탐욕적인 양반네들에겐 외솔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국고를 군사자금으로 빼돌리고 사병을 키워 모략을 꾀한다는, 모르는 이가 들으면 아주 그럴 듯 해 보이는 이야기의 시발점 역시, 군사정변이란 계략에 빠뜨리기 위한 더 없는 덫이 된 것이 바로 그 민심이었다. 허니 이 시점에서 민심이 반발 하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종놈들도 그렇지. 지 살겄다고 그리 사람을 보낸단 말인 가.]
[천하의 썩을 놈들이지 암. 지들이 누린 것이 태평성대가 아니고 무엇 이었겠는가. 허어. 박씨도 사람 그리 안 봤는데.]
[그래! 평소에 병판대감댁 노비가 된 것이 천운이라며 그리 장에 와서 자랑질을 하던 이 아닌가.]
[맞네! 그 소리 때문에 배알이 꼴리던 것이 한 두 번 이던 가. 이런 썩을 놈!]
[글씨올시다.]
여인네의 퉁명스러운 끼어들기에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평소 저잣거리를 지나는 이들의 꽤 신빙성 있는 소식을 주워들으면서 장안의 소식통으로 자리매김한 주모였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글쎄라는 말이 나온 것일까. 박씨가 나쁜 놈이라는 부분?,아니면 병판대감이 하늘아래 둘도 없는 성인군자라는 부분?, 어느 하나 들어맞는 부분이 없었기에 듣는 이들이 눈알을 이리 저리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것이 무슨 말 인가.]
[늦은 밤에 들러 급히 음식을 청하기에 음식을 내주었네.]
[어제 말인 가?]
[그렇소.애 셋까지 달고 가는 것이 똥매려운 강아지새끼마냥 그랬기에 톡톡히 기억하지.]
어렴 풋 하긴 했지만 사해가 떨어진지도 서너시진 정도 지난 후에 일이었기에 기억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그래,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던가?]
[그냥 급히 가는 줄로만 알았지 도망가는 건 줄 알았겄소.]
[내 이년놈들을 잡아다가 족을 쳐야....]
[내 그놈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으니 우리가 벽보라도 붙입시다!]
행동대장 서씨가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기어코 두 팔을 걷어붙이며 소리쳤다. 듣는 이들 중 어떤 이가 자신이 그림을 곧 잘 그린다며 나섰고 다른 이들 역시 곧 사단을 낼 것 마냥 열이 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해댔다. 무리가 일렁이며 서씨에 동조했지만 주모 장씨는 그저 새초롬한 표정이었다. 하여 장씨가 물었다.
[뭣 때문에 여직 그런 표정인가?]
[헌데, 내가 조금 희한한 말도 들었소.]
[희한한말? 어디 지역이름 같더이?]
[고것은 아니고. 참으로 희한한 말이었네.]
[...]
[분명 그리 말했다네.]
아스러져가는 기억에 스스로에게 맞다 그리 세뇌하듯 몇 번을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필시 자신이 들은 것은 분명 환청었다.
[시체는... 구했는가? 분명 그리 말했다네.]
***
[아직인게냐.]
누역을 걸친 휘도는 재빨리 처마 밑으로 걸음을 옮기며 어깨를 적신 빗물을 두어번 털어내고는 문 앞을 지키고 서있는 향단에게 물었다.
[아직..]
향단은 휘도의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듯 바짝 말라 부르튼 입술을 비틀며 전보다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띄웠다. 피골이 상접한 것이 그 또한 제 주인을 닮아가기 위한 몸종의 재주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아버님께 별다른 기별은 없었느냐..]
[예. 아직..]
적절한 시간에 비를 피하지 못했는지 어깨에 걸쳐진 누역에서 고였던 빗물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물음도 잠시 휘도는 제 겉저고리에 젖은 손을 닦아내곤 젖을세라 품안의 서찰을 조심스레 꺼내어 들어 그 형태가 온전한지 확인했다.
그것은 중한 내용이 담긴 서찰이 분명했다. 본디 이러한 기우에는 서찰을 받기위해 달음하는 것은 솔노비중에서도 가장 아랫것이 하는 일이었다. 헌데 이를 마다하고 직접 걸음을 한 것을 미루어 보아 그러했다. 또 어찌나 이를 정성스레 품고 온 것인지 며칠간 계속되는 장대비에도 갓 풀을 먹인 듯 보일정도 이니 년차가 오래 된 종들은 구지 말하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곳엔 내가 있을 터이니 넌 이만 건너가 보거라.]
[아닙니다. 이곳에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말대로 하거 라.]
[그래도...]
[은아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 너라도 온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도련님...]
향단의 작은 목소리에 휘도는 눈길을 내려 답을 미뤘다. 갓을 타고 흐른 빗물이 아슬하게 턱을 타고 흘렀다. 갓끈으로 빗물이 떨어질 찰나 휘도가 갓끈을 느슨히 하며 말했다.
[궐을 제외하곤 아직까진 이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
[...]
[허니 걱정은 그만큼 해두거라.]
[...]
은아는 더 이상 병판대감집 규수가 아니었다. 허니 스승의 딸을 품어주겠다던 휘도의 마음 역시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라 향단은 그리 생각했다.. 혹여 그렇지 않다한들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도망자가 되는 것이 운명이었다. 또한 병판댁 솔거노비로 거하며 얻은 깨달음은 그 어떠한 비밀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요, 사람의 믿음 또한 그 끝이 항상 길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또한 몸종들의 눈초리가 이전과는 달리 양호랑목(가시나무) 못지않게 날카로워져 있는 것이 아씨와 자신에게 남은 기한이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리는 것만 같아 맘을 놓을 수도 잠을 편히 들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냥 정해진 기한 없이 잠들어 있는 은아를 보고 있자니 속이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발을 뻣고 자는 건 상상밖의 일이었다.
[꽤 영리한 아이이니 내 말의 뜻은 이해 할 테지.]
하루하루가 칠흙같은 매일 속에서 휘도가 건낸 한마디에 의미모를 안정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철저히 혼자였던 지옥으로 건네어진 손길. 비록 무심한 듯 건네었지만 향단의 생사를 건 고투를 너무도 잘 아는 작지만 휘도스러운 배려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은아의 곁에 남겠다는 무언의 약조. 향단에게는 그 언약이 안신환(*오늘날의 신경안정제)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전 것들의 무거운 노곤함이 느껴졌다.
허리를 숙였다. 제 마음을 정확히 간파한 선비에게 그리 감사인사를 대신하였다. 왜 제 주인이 하필이면 이곳에 자신과 아씨를 보내었는지 명확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허면 아씨께서 깨시면 기별을 주시겠습니까?...]
[그리 하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인 향단을 뒤로한 채 휘도는 문고리를 잡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냉기가 들어올까 싶어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 소리에 깰세라 움직임을 조심히 하였지만 그리라도 깨는 것이 나았을 까하여 자신의 조심스러웠던 행동을 찰나 후회했다.
한 공간에 남은 두 남녀. 밀폐 된 공간.평소의 휘도라면, 여전히 그가 외솔의 제자였다면, 규수댁을 드나드는 선비였다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나, 지금은 평소라 불리울 수 없는 때라 스스로 그리 위안하며 굳게 문을 닫았다. 아니 문을 닫는 순간에도 눈길은 이미 두터운 솜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는 여인에게 가 있었다.
관에 뉘여진 송장의 모습이 이러할까. 의원이 다녀간 지 반나절이 지난 것이 무색할 만큼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채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에 솜이불이라. 더울 법도 한데 작은 뒤척임조차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안쓰러웠다. 짙었던 눈매가 새카만 눈이 감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안쓰러웠다. 그 모습에 스승의 선했던 눈매가 겹쳐 울컥함에 괜스레 고개를 피했다가 이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한참을 그리 넋놓고 지켜보던 휘도는 정말 잠을자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코끝에 손가락을 대어 숨이 붙어있나 확인을 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이리도 약한것이냐.]
항상 봉숭아 빛이 잘그락하던 보드라운 볼에는 닷새 째 계속되는 열은 얼굴에 붉은 열꽃은 태우다 못해 검붉은 흔적을 남겼다.
[너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어찌하면.]
머릴 지끈거리게 했던 일에 시름을 놓은 일들에 휘도는 여느 때보다 지쳐있었다. 그 결과물이 제 품안에 있었다. 두루마기 앞섬을 열어 서찰을 꺼내들었다. 스승의 측근이었던 서재학대감에게서 받은 약조와 봉한 밀서위에 대감의 낙인이 찍힌 서찰이었다. 이는 유일무이 조건없이 아군이 되어주겠다는 약조였고 궁내에서 은아를 숨겨 둘 유일한 비책이었다.
사실 실료들의 의심이 제 아비인 이판대감에게로 쏟아진다는 말을 전해 듣기 전까진 넋 놓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던 휘도였다. 그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잊혀질 때까지 꽁꽁감싸둔다면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거라 그리 여겼다. 또한 자신역시 먼곳으로 움직일 형편이 아니었기에 눈앞에 둔다면 안심이 되리라 그리 생각했다. 시간이 그리 허락해 준다면 은아를 청으로 보내고 자신 역시 맘편히 입궐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허나 이는 근간 장안에 도는 소문을 간과한 큰 오산이었다. 그 소문이 실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제 아버지와 자신을 예의 주시하는 눈이 많아 졌다. 그 때문에 휘도는 장대비가 내리는 날을 틈타 스승의 또 다른 벗이었던 서재학을 찾아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길고 피곤한 여정이 될 것이었지만 서재학은 흔쾌히 치기어린 선비의 도움을 구하는 손길을 기꺼이 잡아 주었다. 물론 이는 외솔의 지나온 날들이 남긴 흔적과 주위사람을 소중히 여겼던 스승의인덕때문이었으리라 휘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한시름 놓았다한들 은아의 건강에 차도가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꼬리가 잡히고 말 것임이 분명했다. 스승을 사지로 몬 이들은 분명 할 수만 있다면 그 싹까지도 모조리 잘라낼 위인들이었다. 아니 그것을 명분 삼아 자신과 아비까지도 끌어 내릴 사람들이었다.
하루빨리 은아가 눈을 떠야만 했다.그래야만 한다.
[으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허무한 족쇄들이 일시나마 휘도의 마음을 옭아맸다. 이도 잠시 휘도가 들려오는 흐느낌에 더듬어 그 형체를 찾았다. 은아였다. 흐느낌과 더불어 속눈썹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동하고 있었다. 열오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 아님 곧 눈물을 쏟아낼 흐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행여 또 잠에 빠지지나 않을까하는 마음에 다급해진 휘도가 은아의 어깨를 힘을 주어 잡았다.
[은아야. 정신이 드느냐 눈을 좀 떠 보거라.]
[아...아버...지...흐으.....으! ]
[은아야!]
척박한 입술 새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제법 또렷해지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모 든 것을 통감한 은아의 눈망울은 사경을 헤메였다고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또렷했다. 그 눈길이 애잔해 마음이 애잔해져 어깨에 놓였던 손이 어느덧 이마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현실과 마주해야할 은아가 아니 어쩌면 이미 현실과 마주한 은아를 다시금 지독한 현실로 끌어내려야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허나 서글프지만 그래야 했다.
[기억이... 드느냐.]
집을 드나들던 의원에게 때로 혼절하여 기억을 모두 잃는 이가 있다고 들은바 있었다. 차라리 그리 되어라 될 수만 있다면 그리 되어라. 기억과 아픔을 맞바꿀 수 있다면 그리되어라 그리 빌었지만 쎄엑쎄엑 숨조차 내쉬지 못하며 모습을 보며 휘도는 자신의 간절함이 부족하였음을 깨달았다.
[정신이 드느냐.]
[이는..정녕 꿈이 아닌게지요.]
이마를 쓸어내리던 손을 어설피 거두며 답했다.
[그래. 꿈이 아니다.]
[하아-.]
은아는 제 눈앞의 스승의 모습이 현실임에 통탄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자고 일어나면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악몽을 꾸었다며 제 아비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쏟아내겠다 그리 다짐을 하였다. 허면 서책을 읽던 아비는 책장을 넘기는 그 큰손을 제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이니 악몽의 기운을 씻은 듯 던져내고 아비의 무릎을 배고 다시 깊은 단잠에 빠지겠노라 그리 계획하였다.
헌데 눈앞엔 아비가 아닌 스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로인해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다시 이야기를 꾸려야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진짜 제 스승을 믿어야 할지 조차 의문이 들었다. 그도 잠시 그저 현실처럼 제 앞에 자리한 스승이 죽도록 싫다 그리 생각하게 만든 현실이 미웠다. 현실이 미워, 현실 대신 마주하고 있는 결국 스승을 원망하는 쪽을 택했다.
[스승님께서..모든 일엔 인과가 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허면...이 일의 인은 무엇입니까? 그 인이 무엇이기에 ...이리 제 앞에 앉아 계신 것이옵니까?]
[은아야.]
[중용은 전부 헛된 소리입니다. 하여 스승님도 제게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여느 때처럼 살아남아 심박이 뛰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제 자신이 끔찍하리만큼 역겨웠다. 은아는 안쓰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휘도의 말은 귓가에 닿지도 않은 듯 그리 쏟아내었다.
[소녀가 부덕한 탓입니까? ]
[은아야.]
[하여 사람들 진정 사람들 말처럼 오라비도 어머니도.아버지도 그리 잡아먹은 것이옵니까?..]
[...]
[그래야 이 말도 안 되는 일의 인과가 성립이 되지 않겠습니까!]
[...]
[이 모든 일이 인이라면 과는 또 무엇입니까? 스승님도 제 곁을 떠나실 것이지요! 떠나시어요.소녀 하나도 두렵지 않습...!]
휘도가 은아를 제 품으로 힘을 주어 당겼다. 힘 없이 들린 몸이 맥 없이 사내의 품으로 떨어졌다. 휘도는 여린 어깨를 한 번의 주저 없이 세게 끌어안았다.
휘도는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양반의 삶은 더욱 그러했다. 함께 슬퍼하는 법 또한 몰랐다. 그것은 치부를 보이는 것이라 그리 여겼다. 하지만 그대로 무너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혼자 그리 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보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맞았다. 이는 짙은 연민이 분명하리라. 비록 혼란스러움을 동반하였으나 이는 불쌍한 제자에 대한 연민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쉬이 여인을 안을 수 없지 않은 가. 이리 등을 두드리며 서투른 위로를 할 수 없지 않은 가. 결국 휘도는 제 안에서 이는 큰 일렁임에 두 눈을 감아버렸다. 중용이 틀렸다. 인과 없는 마음이 존재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인에 따른 그저 미래였다. 답 없는 미래 어찌 중용으로 답할 수 있을까. 허니 네 말대로 틀린 학문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휘도는 제 마음을 그 혼란스러움을 잇새로 흘려 내보냈다.
[내 너에게 슬픔을 이기는 법을 가르쳤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어.]
[스승님..가슴이..가슴이...너무 아픕니다...가슴이..]
[울거라.힘껏..목 놓아 울거라..]
[으어헝..으으..아..아버지..]
[두려워 하거 라. 내 그 두려움을 앗아주마.]
[흐으...윽..]
[너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
[...으어어...]
[오라비가 되어주고 어머니가 되어주겠다.]
[아아...어..어엉.]
[허니 오늘만 울거라. 딱 오늘만..]
흐느낌이 짙어질수록 휘도는 작은 여인을 부서져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제 옷자락을 부서져라 잡는 손길에 더욱 뜨겁게 품에 넣었다. 연유 따윈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유야 어찌됐든 제 품에 쏟아내는 눈물이 옷자락을 적셨던 빗물에 어린 땅은 꽃을 위해 스스로를 단단히 굳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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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부터 본격 궁중스토리가 시작될 것 같아요.
역사물이다보니 이리저리 조사할 것도 많고 하네요..
제목표 만들어주신 선미향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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