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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침(2)
행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설 교 >
삶을 변화시킨 이름
>성경본문|
행03장 01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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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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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동휘목사
>비 고|
평강교회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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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변화시킨 이름
(행3:1-16)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이제 곧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시며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14:1-4)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리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게 되면, 장차 제자들이 자신이 행하신 일을 행하고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내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4:12-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자, 그가 곧 일어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자 앉은뱅이로 태어났던 자가 온전한 사람으로 치유되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2. 여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 사람은 당시 40세로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지낸, 그야말로 그 자신이나 그 누구도 그가 걷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4:22)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앉은뱅이로 태어난 이 사람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서 날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성전 문 앞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앉은뱅이를 성전 문 앞으로 운반에 둔 이유는 그곳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들로부터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을 매우 큰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관습(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따라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길에 바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유는 그 시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앉은뱅이는 매일 성전 미문에 옮겨지고 여느 때처럼 그 자리에서 구걸하던 사람으로, 어찌 보면 매일 성전에 기도하러가거나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늘상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 앉은뱅이에게 그저 동전 몇 닢 던져주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따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며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함께 하시던 성령께서 특별히 감동케 하셔서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의 감동에 따라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며, “우리를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단지 돈 몇 푼만을 적선해주기를 바랄뿐이었는데 왠 두 사람이 갑자기 자기를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하자 얼떨결에 평상시보다 뭔가 대단한 것, 아니면 더 많은 돈을 얻는가 보다 생각하여 집중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말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이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걷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정상인이 된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완전히 정상인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걷고 뛰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좋았겠습니까? 성전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 늘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았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어나 걸으라” 고 한 후 곧 그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행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는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앉은뱅이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순간 그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겨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성령의 역사가 그 앉은뱅이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것입니다. 40년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영육간에 치유되어 온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C.1030년경, 이스라엘의 사울 왕 시대였습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치고자 했습니다. 그 때 블레셋의 장수는 그 유명한 골리앗이었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인 데다가, 놋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무게가 57킬로그램이나 되는 놋갑옷을 입고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대고 놋창까지 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창자루는 베틀 채만큼 두꺼웠고 또 그 창날의 쇠 무게는 약 7킬로그램이나 되었으며 호위병 하나가 그의 큰 방패를 들고 그 거인 앞에서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삼상17:4-7) (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이같은 거인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군을 조롱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가 왜 나와서 전열을 갖추고 있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며 너희는 사울의 부하가 아니냐? 이제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나에게 보내라. 만일 너희가 보낸 자가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오늘 너희 이스라엘군을 이렇게 모욕한다. 자, 나와 싸울 자를 어서 보내라.’ 골리앗의 이 말에 사울과 이스라엘군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이새라는 사람이, 전쟁에 나간 세 아들이 몹시 걱정이 되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막내 아들 다윗을 불러 ‘네 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물을 받아오너라.’며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양치기 소년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을 갔다가 엘라 계곡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 민족이 싸우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양상은 블레셋 군대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심하게 모욕하는데도 이스라엘 병사들은 전전긍긍하며 도망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말렉을 쉽게 그리고 완벽하게 진멸했던 사울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이미 하나님의 버림받은 터라 사울 역시 골리앗의 치욕적인 모욕을 당하면서도 안절부절할 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에 소년 다윗이 사울에게 가서 낙담하지 마시라며 자신이 나가 싸우겠노라고 말합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사울은 어린 다윗에게 자기 군복을 입히고 투구와 갑옷을 입혀 나가 싸우도록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 어린 소년인지라 군복과 갑옷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어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고 다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평소대로 손에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 다섯 개를 주머니에 넣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갑니다. 이 모습을 목격하고 있던 골리앗이 다윗을 보며 업신여기며,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너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에게 주리라.”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에 소년 다윗이 외칩니다.
(삼상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리고 나가서 물매에 돌을 달아 골리앗을 향해 던지자 중무장한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박혀 골리앗이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어 다윗이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 칼로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이를 목격하고 있던 블레셋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군대가 이를 뒤쫓아 모두 진멸해버렸습니다. 양치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죽이므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가진 것이라고는 무기라고 할 수 없는 물매와 돌멩이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키가 약 2.9m인데다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의 무게는 57kg, 그리고 창날의 무게는 6.8kg이나 되었습니다.(사무엘상17:4,5,7) 약 10년 전인 1993년 5월에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하다가 이마에 돌이 박혀있는 거인의 해골을 발견했습니다. 이마 좌우거리를 측정하여 거인의 키를 계산해 본 결과 그 키가 2m 90cm나 되는 거대한 체격의 거인이었음이 밝혀졌고, 연대측정 결과 약 B.C. 1000년경의 다윗시대에 죽은 것으로 측정되었습니다. 발견장소가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체격이 거대하였고 이마에 돌이 박혀 있고 연대가 다윗 시대임을 종합해 볼 때, 이 해골의 주인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골리앗의 유골임이 확실하다고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외국신문의 영어표현이 절묘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물매에서 날아간 돌이 아직도 거인의 이마에 박혀 있다.” 고고학에서도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분명히 이겼다는 기록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소년 다윗의 승리 비결은 사무엘 상17:45-47에 나오는 그의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골리앗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칼과 창과 단창“ 등으로 표현되는 세상적인 힘과 무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과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에서 승리케 하는 능력과 권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며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 놀랍게도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일어서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펄쩍 펄쩍 뛰며 두 사도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았던 불행한 삶이 전혀 새롭고 복된 삶으로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완전히 고침을 받고 난 후로 계속해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붙어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행 3:11-16)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우리 개인의 능력과 신앙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쳐다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은 그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넘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기로 했는데도 여러분이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을 거절하고 오히려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요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으나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다 이 일의 증인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온 바로 그 믿음이 여러분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것을 고치고 온전케 하시는 능력의 이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승리했던 것처럼,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범사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단의 권세를 결박하고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6:17-1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면 귀신이 떠나간다는 약속입니다.
고구마 전도 왕으로 유명한 김 기동집사의 간증입니다. 이 분이 10여년 전 남의 집 반 지하에 세 들어 살 정도로 아주 어렵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주인이 자꾸만 전세금을 올리는 통에 어느 복덕방을 찾아가 아주 싼 집 하나 구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복덕방 주인이 한참을 생각을 하더니 “싼 집이 하나 있기는 있는데 이걸 소개를 해야 될 지 안 해야 될 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김 집사님이 “어떤 집인데요?” 물으니까 복덕방 왈 “흉가로 알려져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가 하나 있습니다. 그 집에 사람이 들어가면 3개월도 안 되어, 식구 중에 한 사람이 죽어나옵니다. 2년 동안 4가정이 들어갔는데 4가정 다 한 사람씩 죽어 나왔습니다. 그래 지금은 아무도 안 들어갑니다.” “그 집이 어디 있는데요?” “과천 주공아파트 30평짜리인데 404동 605호입니다.” 그래서 김집사님이 “선생님, 그것 소개해 주이소.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아요. 값은 얼마입니까?”하니까 “원래는 8,400만원인데 6,000만원에 주인이 내놨습니다.” “됐네요. 우리 돈하고 거의 비슷하니까 주이소”' 하자 복덕방 주인이 놀라서 “당신 아직 젊고, 애가 둘이나 된다면서 되겠소?”라고 하자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니까요. 주이소.” 그랬더니 복덕방 주인이 연락해 가지고 집주인이 대전에서 올라와서는 하는 말이 정말 괜찮겠느냐고 몇 번 다짐을 하더랍니다. 괜찮다고 하고는 집에 가보니, 그간 몇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엉망이더랍니다. 진짜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이었답니다. 집주인이 1주일 안에 다 고쳐주겠다고 해서 이사하기로 계약하고는, 이사를 하자, 주변에 사는 아파트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염려 반 호기심 반으로 쳐다보더랍니다. 이사 간 첫 날은 진짜 무섭더랍니다. 저녁에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오는데 뒤에서 뭐가 꽉 잡는 것처럼, 머리끝이 바짝 서더랍니다. 그럴 때 뭐라고 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그 뒤 동네 사람들이 김 집사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볼 때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과천 교회에 김기동 집사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알고 들어 왔습니다.”라며 선수를 쳐서 인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났는데 아무 일이 없자, 그 다음부터 아파트 사람들이 눈초리가 달라지더랍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났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축복하셔서 하시는 사업을 불티나게 일으켜 주시더랍니다. 그 다음에 우연히 40평 아파트를 신청을 했는데 당첨이 되어, 2년만에 이사를 가게 됐답니다. 흉가라고 비어둔 집에 와서 오히려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를 간다고 집주인에게 했더니, 집주인 부부가 올라와서 집사님에게 넙죽 큰절을 하며 “우리도 예수 믿으면 당신처럼 될 수 있습니까?” 하더랍니다. 그 집주인은 대전에 있는 어느 정부 기관의 국장이었답니다. 그러니 김 집사님이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국장님 예수 믿으십시오. 믿으면 저처럼 대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아파트를 소개한 복덕방 부부도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김 집사님이 이사를 간다고 하니까 아파트 같은 동에 있는 주민들 40여명이 모여 가지고, 잔치를 베풀어주더랍니다. 폐가가 옆에 있으면 아파트 값이 떨어질텐데 그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놨으니까 감사하여 잔치를 베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전도하기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 이름이 가진 능력을 알면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것이 전혀 없어요. 예수 이름 부르면 귀신이고 잡신이고 다 도망갑니다. 자, 여러분 중에서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까? 예수 믿고 싶으신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하자 모두 다 손을 들더랍니다. 이 집사님으로 인하여 과천에서 한 동 전채가 거의 다 예수 믿는 동이 되었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와 같이 사단의 권세를 꺾으시고 승리하신 이름이기에 그 이름으로 명하면 귀신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에게도 이같은 권세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기도 응답의 보증이 되는 이름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14:13-14)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6:23)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누구든지 예수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의 약속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든지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7에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이루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는 인간이 죄악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이름입니다. 로마서 10:13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의 이름밖에는 없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병마를 이기게 하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게 하며, 궁극적으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게 하는 능력과 권능있는 이름입니다.
성경학자인 스코필드박사가 한 번은 버지니아 주 스탠톤에 있는 한 정신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스코필드는 병원을 안내하던 병원장에게 건강의 화신처럼 보이는 한 건장한 육체의 젊은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젊은이가 난폭해지면 다루기가 매우 어렵겠습니다.” 그러자 병원장은 “예. 그렇지만 저 젊은이는 한 번도 자신의 힘을 발휘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자기는 힘이 없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요. 그리고 항상 자기가 약하다고 불평하며 거기에 대한 약을 달라고 졸라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코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젊은이와 같은 사람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내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많은 재능을 받은 교인들은 재능을 사용할 믿음과 지혜와 헌신이 부족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만 이미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비천한 자리라도 쓰임을 받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할 믿음입니다.
”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다윗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역사했던 것처럼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성령의 능력과 권능이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범사에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앉은뱅이의 삶을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일어서리라.종교개혁
>성경본문|
행03장 01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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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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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광일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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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10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부패한 교황제도와 면죄부 판매에 대항하는 95개의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며 교회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교회개혁 운동입니다. 하지만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끄는 동안 평탄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교황청의 감시로 일상적인 생활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시행한 교황청의 정체가 드러나자 교황은 루터를 소환하여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또 마음을 돌리려고 황금의 장미(Golden Rose)를 보내는 회유책도 썼습니다. 황금의 장미는 교황에 의한 축복으로 알고 누구나 받기를 바라는 명예였지만 루터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복음의 제사장이기에 교황권이 신자보다 우월할 수 없으며, 교황에게만 성경 해석권이 있는 것은 잘못이라며 종교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520년 6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이 발행되었고 국회를 통해 화형을 시키도록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1521년 4월 17일, 황제 찰스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Worms)에서 소집된 국회에 출두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친구들이 만류하자 루터가 말합니다. “원수들이 보름스 성당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 국회로 들어가는데 백여명의 기마병들이 둘러쌌습니다. 루터는 재판정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달리 말할 수가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I can not help it, God help me, Amen).” 루터는 신앙적 결의를 단단히 하며 어떠한 위협에도 ‘나는 일어서리라’고 외쳤던 진정한 개혁자였습니다.
종교개혁 504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을 본받아 지금의 힘든 상황과 처지에서도 ‘나는 일어서리라’고 선포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초대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성장해 나갈 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킨 기사입니다. 죄에 묶여 신음하는 영혼이 예수를 통해 자유와 구원을 얻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예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자가 일어서서 뛰는 삶으로 변하였습니다.
복음성가 ‘나는 일어서리라’를 다함께 부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의 문제는 육체적인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그 안에 없는 영적인 장애였습니다. 예수께서 안에 들어오시자 장애가 떠나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저앉아 있는 부분들이 일어서야 합니다. 기도가 일어서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함이 일어서야 합니다. 섬김과 봉사가 일어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어서리라’는 고백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첫째로 예수의 믿음으로
미국의 어느 부부가 사업에 실패하여 재산을 잃어버리고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재산을 정리해 보니 이천만원 조금 넘은 돈이 남았습니다. 신앙이 좋은 부부는 십일조를 떼어 교회에 바친 다음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설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어나게 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인 오병이어를 바친 소년의 헌신과 오병이어 밖에 없음에도 그것을 나누어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순종했던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설교에 감동을 받은 부부는 “우리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이지만, 우리의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하며 가진 돈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리고 마을에 작은 집을 구해 살면서 일자리를 알아보았습니다. 부동산업자 친구가 사막 옆에 있는 땅을 사서 채소를 심어 팔아보라며 부족한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부부는 그 땅을 사서 채소를 심었습니다. 어느 날 땅을 파고 있는데 물줄기가 솟아 올랐습니다. 솟은 물줄기는 온천수였고, 버려진 줄로 알았던 땅은 온천수가 쏟아져 나오는 온천지대였습니다. 부부는 온천 개발업자에게 땅을 팔고 갑부가 되었습니다. 온천지대는 L.A 근교에 있는 팜 스프링스(Palm Springs)라고 부르는 휴양지가 되었습니다. 부부는 남은 것이 적어 미래가 불투명하였지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모두 하나님께 드렸던 믿음으로 일어서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여기의 ‘바라보거늘’은 원어로 ‘에페이켄 프로스도콘’인데 ‘주의 깊게 보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인가 기대하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자신에게 애정 어린 눈길로 주목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향한 걸인의 반응은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의 선포는 절망적인 자세로 앉아있는 걸인에게 희망을 주는 믿음의 선포요 믿음을 요구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면서 못 걷게 된 자처럼 은혜의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성전의 문가를 맴도는 영적 장애자가 아닙니까? 교회 안에 깊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교회밖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교회에 와서 누구를 주목합니까?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주목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봉사하는 발에 힘이 솟아야 합니다. 전도하는 발목에 힘이 생겨야 합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회복될 때 힘을 얻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주선애 교수의 ‘주님과 한평생’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교육에 기초를 놓은 주선애 교수는 1924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2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여자이지만 기독교 선생이 되게 해주시오”라고 유언했습니다. 어머니는 고무신 공장을 다니면서 딸을 공부시켰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으셨고, 예수 이름을 부르며 딸이 좋은 기독교 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교회학교 교사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대학 교수가 되게 하여 여성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훌륭한 인재로 삼으셨습니다. 주교수의 어머니가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키워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앞세우면 하나님께서 일어서는 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본문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여기의 ‘예수의 이름으로’는 원어로 ‘오노마티 이에수 크리스투’인데 ‘예수 안에 거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합니다. 걸인이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 안에 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은과 금에 대조되기에 귀합니다. 외식에 물든 성전 앞에서는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물질을 받을 수 있지만 예수의 이름 안에서는 병든 육신을 고침 받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 안에 거하는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이름은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소중합니까? 예수의 이름이 소중합니까?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과 금의 물질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까? 물질이 많아도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완고한 마음을 옥토로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도 해결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해 줄 것은 예수 이름뿐입니다.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의 능력으로
한춘근 교수의 ‘죽지 않는 순교자 김익두’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920년대 대표적 부흥사 김익두 목사는 병고침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마을 다리 아래에 나면서 부터 못 걷는 걸인이 살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그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다리 아래로 내려가 주위를 살펴본 후 “내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걸인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머슥하고 창피해진 김익두 목사는 교회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7일간 금식 기도를 하면서 “왜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을 의식하면서 나의 능력으로 하려고 했던가?” 라며 회개하였습니다. 다리 밑에 다시 가서 걸인에게 말했습니다. “지난 일은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금식하면서 당신을 위해 기도를 드렸소이다. 오늘 밤이 기도 작정 마지막 날인데 나와 함께 기도합시다.” 진심으로 말하는 김목사의 태도에 마음이 움직여 등에 업혀 교회로 갔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다가 새벽 미명에 걸인이 다리에 힘을 얻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자국을 옮기더니 예배당 안을 뛰어다니며 “만세! 할렐루야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김익두의 하나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걷지 못하던 걸인이 일어섰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으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예수의 능력이 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 7절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여기이 ‘힘을 얻고’는 원어로 ‘에스테레오데산’인데 ‘육체적인 힘이 강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습니다. 단순히 힘이 생긴 정도가 아니라 곧바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정도로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의 능력은 영육을 회복시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한 행동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성전에 있었지만 성전 밖에서 구걸을 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능력으로 고침받고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능력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의 능력으로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게으름과 나태의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의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는 찬송가 작사자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그녀의 찬송이 21곡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의 생명 되신 주’, ‘나의 갈길 다가도록’ 등입니다. 그녀는 나면서 부터 못 걷는 자 같은 신세였습니다. 생후 6주만에 실명을 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주저앉아 있던 인생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원망과 탄식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섰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시인이 되어 95세에 천국 갈 때까지 8천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찬송시를 통해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일으켰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성전 앞의 나면서 못 걷는 자처럼 주저 앉은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를 향한 믿음으로 ‘나는 일어서리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의 능력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조학환목사 / 행 3:1~8
1. 늘 감사하며 귀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귀하고 복되게 감사하며 기쁘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든데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면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까?
게다가 여러분, 우리가 존귀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은혜주시고 역사해 주시고, 능력과 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감사하며 기뻐하며 귀하게 복되게 살아야 하거니와 또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전5: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요15:1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맥추감사절기를 보내고 있는데 이 맥추감사절기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동안 설령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존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가까이 함으로써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와 지혜로써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상황과 현실을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충만한 복되고 존귀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분명 감사하며 기뻐하며 귀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것이 많겠지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볼 것은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도 영광스러운 주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걸맞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에 휩쓸리거나 낙심하거나 불평 불만하지 않고 존귀하고 복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학생이나 경찰이나 군인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기타 다른 어떤 신분이든 그 신분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알아야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학생이나 경찰이나 군인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통력이나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그 신분에 합당한 모습으로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며 자신도 아름답고 귀하고 복된 삶이 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도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너무나 존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충만하게 누리는 가운데 귀하고 복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늘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십 여세 된 사람이 근 삼십여 년을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며 거지로 살다가 어느 날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삼십년 동안의 거지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서 먼저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물론 여러 가지 생각할 것이 많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먼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고 휘황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꾀죄죄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구걸하고 있는 거지의 모습에서 좀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당시 헤롯 성전은 겉에는 거의 모두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었고, 성전의 문은 청동으로 되어 있어서 물론 평소에도 아름답고 휘황찬란했지만 특별히 아침에 해가 뜰 때면 이 황금과 청동이 눈이 부시게 번쩍번쩍 빛났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해가 뜨는 성전의 동쪽은 더욱 눈이 부시도록 휘황찬란하게 빛나 바라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그래서 성전의 동쪽 문을 미문 즉 아름다운 문이라 불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하필 그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성전의 미문 앞에 한 초라하고 추하고 꾀죄죄한 모습의 거지가 앉자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이지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그런데 어디서 구걸했어요? 2절에 보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황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예루살렘 성전과 구리 빛 대문, 그 앞에 엎드려 꾀죄죄하고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앉아 손을 벌려 구걸하는 거지, 이 얼마나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또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은 어떤 곳이며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성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눈이 부시게 휘황찬란한 성전,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성전 미문 앞에서 꾀죄죄하고 남루한 모습으로 앉아 비굴하게 구걸하고 있는 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은 누굽니까? 물론 그도 엄연히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더더욱 모순된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휘황찬란한 성전 앞에서 이방인도 아닌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백성이 냄새나고 추하고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구걸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모순된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또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정말 성전 미문 앞에서 거지 노릇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까요? 물론 걸을 수가 없으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성전 미문 앞에서 거지 노릇하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겠으며, 그게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한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큰 장애를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어 건강한 사람에 비하면 분명 선택의 폭이 매우 좁았을 것이고, 게다가 당시로서는 그런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제약이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일지라도 그러나 자신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무언가 다른 일을 찾아본다면 분명 성전 미문 앞에서 꾀죄죄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거지 생활을 하는 것 말고도 다른 선택의 여지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설령 무슨 폼 나고 대단한 일은 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그래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초라하고 볼품없고 구차한 거지생활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울리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도 아니거니와 나아가 비록 힘들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도우심을 구하면 뭔가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다른 일을 찾아보았더라면 설령 뭐 대단히 폼나는 일을 아닐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지보다는 훨씬 귀하고 복된 일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 전에 걷지 못하니까 장애가 있으니까 그래서 장애가 없는 사람보다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난점이 있으니까 더욱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성경 보고 찬송하는 일에 힘써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장애를 고쳐주시든지 설령 고쳐 주시지 않는다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가운데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대신 성전 미문에 앉아 생명의 말씀을 전하거나 은혜로운 찬송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굳이 성전 미문에 나오지 않더라도 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뭔가 수공예품이라도 만들어 판다든지 해도 풍족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거지보다는 천배 만배 나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존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장애가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져 근 삽십여년을 그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성전 미문 앞에서 초라하고 꾀죄죄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거지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존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존재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설령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다할지라도 상황 탓 환경 탓 세상 탓하고 낙심 근심 절망 원망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주님을 가까이하고 의지하며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고 능력과 지혜와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주심으로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하고 떳떳하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이 넘치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초 축원합니다.
3. 예수의 이름으로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언제 어느 때나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선택을 하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는 해결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보게 되는데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무슨 뜻입니까?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고 비록 장애가 있다할지라도 낙심하고 절망하며 그저 동전 몇 닢이나 바라보며 그것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그까짓 동전 몇 개를 바라보며 그것을 구하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과 능력과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원하는 그까짓 동전 몇 닢이 아니라 그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노니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벌떡 일어나 성전으로 들어가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추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거지의 신세를 벗어나 감사와 기쁨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근 사십여년 동안 일어설 수가 없어서 성전 미문에서 거지 노릇하던 이 사람은 어떻게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까? 베드로가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어떻게 완전히 나았다고요?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예수께서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믿는대로 예수님은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우주만물의 주권자요 구원자이십니다. 따라서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문제를 제거해 주시든지 아니면 우리에게 힘과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녀요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혹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낙심 근심 절망 원망 한탄하거나 상황과 환경에 굴복하며 끌려 다니지 말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바라보며 엎드려 기도하며 도우심을 구하며 가까이 하며 주님과 동행함으로써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과 환경을 넉넉히 이기고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와 평강이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있는 최고의 보물
문기태목사 / 행 3:1-10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돈의 위력은 너무나 크고 대단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돈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오래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정적일 때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신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보다 돈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돈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함과 돈에 대한 탐욕은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니 경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성전 문 앞에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사도들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걸인은 몇 푼의 동전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기대를 안고 사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 한 마디의 말이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장애를 입어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 걸인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믿음이 솟아났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면서 그를 치유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했을 뿐인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도 사도 베드로와 똑같이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베드로는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 말을 했을까요?
걸인이 사도들에게 기대한 것은 은과 금 즉 돈이었습니다. 걸인은 성전 문을 드나드는 수 많은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의 주머니에 돈이 있을까? 없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걸인은 저 사람이 나를 동정하고 몇 푼이라도 던져주려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 뿐이었습니다. 돈을 얻어야 그날 굶지 않고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기도하는 사람인가? 얼마나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 예수님께 붙잡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가? 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전을 몇 푼이나 적선해 줄 것인가? 만 기대하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걸인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사도들이 동전 몇 푼을 던져준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허기진 배를 채우게 되고 잠시 고통을 잊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있어도 걸인의 불행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돈다발을 안겨주어도 그를 평생 따라다니며 비참하게 하는 저주의 사슬은 여전히 그를 괴롭힐 것입니다. 동전 몇 푼 아니 은과 금을 던져준다 해도 그것이 그를 괴롭히는 죄와 저주로부터 걸인을 구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오로지 돈만을 기대하며 사도들을 바라보는 걸인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인의 기대는 돈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돈을 기대하는 걸인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먼저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기대하지 말라고 내게 은과 금은 없다고 먼저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려면 먼저 잘못된 기대부터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놀라운 복을 받으려면 헛된 생각부터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돈보다 더 좋은 것을 기대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걸인과 다릅니까? 은과 금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 미문에 앉은 걸인처럼 내게 돈이 없기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돈을 더 많이 모아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은과 금에만 관심이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걸인처럼 날마다 성전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못한 채 은과 금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들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에게 줄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외치며 살고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온통 은과 금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고 있습니다. 돈의 위력 앞에서 모두 굴복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위축되고, 돈이 좀 있으면 교만합니다. 돈을 얻으려는 것에 모든 것을 쏟으며 살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돈이 차지하고 앉아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신뢰하고 돈을 사랑하며 돈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미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혹 당하고 속아서 은과 금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은과 금이 줄 수 없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이 전능한 것처럼 보여도 절대 전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은과 금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위기에서 건져 주십니다.
은과 금이 없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은과 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은과 금을 모두 가져도 불행한 사람이 수없이 많고 은과 금이 없이도 행복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사도들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더 좋은 것을 베풀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은과 금이 있어도 은과 금을 선하게 사용한다면 잘 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이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기 바랍니다.
2. 내게 있는 것을 주니
베드로는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했습니다.
사도에게 없는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사도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돈은 없었지만 성령 충만했습니다. 입은 옷은 수수했지만 마음에는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마주친 걸인을 보고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할 것을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멈추어 서서 그를 향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나면서부터 장애를 입어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 걸인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받아들여 깨끗이 치유 받고 온전해졌습니다. 자신을 치유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치유를 예수의 이름이 하였습니다. 은과 금이 줄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발휘했습니다. 은과 금으로 줄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을 예수의 이름이 가져다 주었습니다. 은과 금으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행복을 예수의 이름이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야말로 걸인에게 꼭 필요한 선물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걸인 뿐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절대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이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영혼도 구원받고 육체도 구원받습니다. 개인도 구원받고 가정도 구원받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전 미문에서 만난 걸인에게 필요한 것이 은과 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 들여야만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여 저주가 떠나가고 불행이 떠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에게 있는 최고의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은과 금을 주려고 하기 보다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은과 금을 나누어 주기 보다는 예수의 이름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으면 은과 금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불행과 죄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인생을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장애인 걸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고 그가 그 이름을 믿어 깨끗이 치유 받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의 이름을 이 사람이 믿으므로 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남자만 오 천명이 예수를 믿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평생을 구걸하며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이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오 천명을 구원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더니 장애와 질병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불행과 저주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비참하고 초라한 생활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은과 금을 주려고 하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사도들처럼 은과 금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혹시 은과 금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없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만 바로 그분이 최고의 보물이라는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은과 금이 있고 없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은과 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 최고의 보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사시는 예수님이 동일하게 그 사람 안에서도 일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되기를 소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은과 금이 없다 해도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내게 있는 예수의 이름을 나누어 주어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반드시 남아야 할 것은?
조영식목사 / 전 3장 1-10절
0. 들어가는 글
오늘 본문에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옵니다(1절), 또한 성전에서 구걸하기 위하여 앉아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2절). 그들은 모두 성전에 있었지만, 서로가 성전에서 기대하는 것들이 달랐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모두 교회에 예배하기 위하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기대하며 예배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기대하며 예배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예루살렘 성전과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어떤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과 구걸하는 사람이 어떤 대조를 이루었습니까?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온통 황금색이었고, 성전의 문은 강한 구릿빛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침마다 태양이 떠올라서 성전의 문을 비추면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의 문을 아름다운 “미문”이라고 불렀습니다(2절). 그러나 성전의 미문 앞에는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아온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2절). 참으로 상반된 대조를 이룹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황금빛 나는 성전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대조되고, 구릿빛 나는 아름다운 미문과 엎드려 구걸하는 사람이 강력한 대조를 이룹니다. 예전에 월드비전을 통해 인도 지역에 구호 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 사원들이 너무나 웅장하고 화려했지만, 사원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그릇을 놓아둔 채로 쓰려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려한 힌두교 사원과 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의 상반된 대조를 보면서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부유한 종교와 어려운 이웃이 상반된 대조를 보일수록 교회에 대하여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베드로와 요한는 성전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았습니까? 그들은 성전 앞에 있는 사람을 외면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당시에 제 구 시의 기도 시간에 성전의 미문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모두 다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외면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주실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4절). 이처럼 그들이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 기도를 응답받는 것입니다. 백부장 고넬료도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합니다(행10:4). 오늘날 우리도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서 내 기도가 상달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이 구걸하는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6절).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은 먼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확실하게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또한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가난했습니다. 만약 그의 가난이 본질적인 문제였다면 은과 금을 주어야 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장애인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장애가 본질적인 문제였다면 의사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그는 배울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의 배움이 본질적인 문제였다면 랍비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그에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누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6절). 성도들이 예수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관심을 가질수록 자신을 변화시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본질 되신 예수에게 관심을 가질 때 구원받고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렸을 때 모든 사람이 불후의 명작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이 최후의 만찬에서 특별히 극찬하는 부분을 지워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는 예수보다 성찬의 은잔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진다면 자신의 그림은 실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믿음의 본질 되신 예수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지면 실패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의 본질 되신 예수에게 관심을 가지므로 구원받고 새롭게 변화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첫째로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을 때 세 가지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삶의 태도가 변화되었습니다(8절). 그는 앉아있는 절망의 삶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희망의 삶이 되었습니다. 둘은 입술이 변화되었습니다(8절). 그는 구걸하며 투덜대는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증거하는 입술이 되었습니다. 셋은 성전을 찾아가는 목적이 변화되었습니다(8절). 그는 성전 밖에서 구경만 하는 신앙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참여하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변화되어 절망의 삶에서 희망의 삶으로, 투덜대는 입술에서 찬양하는 입술로, 구경하는 신앙에서 함께 참여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인생에 반드시 남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글입니다. 사고로 다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소년이 길거리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열심히 장사해서 모은 돈을 가지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치료비로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먼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소년은 버럭 화를 내면서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서 감사하느냐고, 재산도 다 잃어버리고, 엄마를 다치게 했고, 저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면서 이 고생을 하는데, 그런 하나님에게 도대체 무엇을 감사해야 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다친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쥔 다음에 “재산을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우리 아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것도 원통하고, 내 몸이 다친 것도 서러운데, 주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무엇이 남겠느냐”고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윗 왕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가장 힘들었을 때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고백이 떠올랐습니다(시16:2). 우리의 삶에 주님이 함께하면 모든 것이 있고, 주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오직 믿음의 본질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끝까지 남아있기를 소망합니다.
□ 말씀 다지기 (함께 되새김질 하는 시간입니다.)
1. 베드로와 요한는 성전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요?(4절)
2.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6절)
3.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변화된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8절)
4. 우리의 인생에 반드시 남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시16:2)
□ 말씀 적용하기 (서로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1.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체험은 무엇이 있나요?
2. 우리가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3.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인가요?
4.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가장 크게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요?
일어나라 그리고 일으키라
행 3장 1~10절 / 홍문수목사
한 가난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바이올린이 한 대 있었는데, 실력도 별로이고 연습도 하지 않아서 연주회에 불려 다니지 못했습니다. 돈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바이올린을 갖고 중고 악기점을 찾아갑니다. 통사정을 했더니 주인은 100달러를 쳐주었습니다. 젊은이는 그 돈을 갖고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악기점 주인이 그 바이올린을 조율하고 소리를 내보니까 제법 괜찮았습니다. 불을 켜고 손질을 하려고 여기저기 살피다 악기 안쪽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Stradivari 1704’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닙니까! 깜짝 놀라 감정을 해 본 결과 이탈리아 바이올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진품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후 그 악기는 명연주자에게 1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젊은이는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악기의 가치를 모르고 싸구려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잠재된 가치를 모르는 채 현실에 안주하면서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현실의 굴레에 얽매인 채 체념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냥저냥 살다가 죽어 갑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그런 싸구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아니, 그렇게 해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깨닫고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막 시작되는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히 나아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 한 앉은뱅이 거지를 만나 그를 일으켜 줍니다. 그는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전격적으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그냥 순응하고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달라질 수 있는데, 그리고 달라져야 되는데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해가 됐다고 뭔가 달라져야지 하고 결심도 해봤지만, 벌써 한 달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면 여전히 구습에 얽매여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본문의 앉은뱅이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인생으로 변화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앉은뱅이 인생
오늘 본문을 보면 등장하는 앉은뱅이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죠.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앉은뱅이라는 말이죠. 행4:22를 보면, 그의 나이는 40세쯤 됐습니다. 그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선천성 장애인으로 평생 남의 도움으로 살아왔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이나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가고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직접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구걸이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데려다 달라고 간청해서 성전 문 앞으로 갑니다. ‘미문’(美門)은 예루살렘 선정의 여러 문들 중 하나로, 동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동대문이죠. 그는 미문 앞에 있다가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했습니다. “한 푼 줍쇼!”
그는 아마도 별다른 소원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 모양이니 그저 입에 풀칠만 해도 다행이라는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언뜻 언뜻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주위 사람들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 사람인들 마음껏 걷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동안 살아오면서 받은 마음 속의 상처와 비참한 신세에 대한 원망과 한탄을 날려버리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가능성이 없고 그 방법도 모르니까 자포자기한 채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분,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루하루 돈 몇 푼에 인생을 거는 ‘죽지 못해 사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저 먹고 사는 현실적 육신적 문제만 겨우 해결하려는 작은 소원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 의미도 즐거움도 없이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이 모습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눈앞의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있습니다. 오직 육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것인지 모릅니다. 정말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문제에 매달려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대충 이러합니다. 예수님도 지적하셨죠. 마6:31~32 “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 이 말씀은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긴요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극단적인 비유입니다만, 이런 인생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겉보기에 멀쩡하지만 그 안에서 시계바늘이 째깍째깍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계바늘이 멈추고 뻥~ 하고 터지는 겁니다. 이 경우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일까요? 속히 시계 바늘을 멈추는 겁니다. 그 흐름을 바꾸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앉은뱅이 걸인이 정말 불쌍한 것은 육신의 장애나 물질적인 가난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소원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인 문제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앉은뱅이의 모습이죠.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앞의 현실적 문제에만 매달려 하루하루 근근이 살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군상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런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2] 일어나 걷는 인생
감사하게도 본문의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주셨고,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는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앉은뱅이 인생’이 아니라 ‘일어나 걷는 인생’이 된 겁니다. 6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지나가자 그는 별 생각 없이 “한 푼 줍쇼!” 구걸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돈도 없었거니와 돈을 한두 푼 주는 게 그 사람의 인생에 근본 해답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붙잡아 일으키는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름에는 그 당사자의 인격, 권세, 그리고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권세자의 이름에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예전에 이런 일들이 많았잖아요. 청와대 실세를 사칭해서 사기를 쳤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잘 넘어가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한 겁니다.
보통 사람의 이름은 별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20여년 전 이야기입니다. 저의 집 아이가 동네에 나가 널다가 얼굴이 빨개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런가 그랬더니, 동네 오빠들이 서로 자기 아빠 자랑을 하더랍니다. 우리 아빠는 교수다! 사장이다! 부장이다! 변호사다! 자기를 딱히 댈 게 없어서 그냥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 아빠는 홍문수다!” 그러자 오빠들이 “그게 뭔데?”하고 놀리더랍니다. 그렇죠. 보통 사람의 이름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놀라운 것입니다. 십자가에 피흘려 죽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으면 구원받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받고, 그 이름으로 외치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 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외칠 때 앉은뱅이는 자기 몸에서 이상한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났고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며 찬송합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내 그의 입술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들어가지 보지 못했고, 생각도 않았던 성전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제 그에게는 일시에 육신적인 궁핍과 영적인 궁핍이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걸할 필요도 없고, 마음껏 성전을 출입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영생을 누리는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의 육신적 장애나 물질적 궁핍을 해결할 수 있게 됐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 풍요가 찾아왔습니다.
이게 정말 중요하죠. 왜냐하면 당장은 육신의 장애를 해결하고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어서 모든 게 해결된 것 같지만 육신의 욕망은 끝이 없죠. 단순히 육신의 문제만 해결한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육신의 굴레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안에 영생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천국이 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살 동안에도 영혼 가운데 누리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겁니다.
요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영생의 샘물! 이 기쁨은 영적인 것으로 육신적 환경을 초월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체험한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빌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육신적으로 풍부하든 궁핍하든 상관없이 어떤 환경 가운데 처해도 그 가운데 영혼의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씀,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외적인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길 수 내적인 능력을 갖추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럴 때 새 로운 인생이 됩니다. 고후5:17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육신의 포장이 바뀐 게 아니라 인생의 근본인 영혼이 바뀐 겁니다. 한두 가지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 한 게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영원히 해결하는 겁니다.
이런 인생으로 변화되면 현실의 문제들도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킬 수도 있고 설사 환경이 변화되지 않아도, 마음이 변화되었기에 문제될 게 없습니다.
「던킨 도너츠」창업자 로젠버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 변화됩니다. 그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30세에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도너츠 상표 개발합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그를 놀랍게 축복해 주십니다. 전 세계에 많은 체인점을 거느리게 됩니다. 그는 72세 생일 날 축하연 석상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가난했고 무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나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이 된 겁니다.
환경이 변화되지 않고 단지 마음만 변화되어도 큰 축복입니다. 이것도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신앙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어느 젊은 교수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잉태하게 됐는데,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출산하고 보니 뇌성마비 아이입니다. 황당했습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했습니다. 서로를 탓하다 파경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던 중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크리스천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똑같이 그들에게도 뇌성마비 자녀가 있었지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나는 가정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교제하던 중 감동을 받고 그들 역시 변화를 경험합니다. 부부의 사랑이 회복되고 아이에 대한 사랑도 싹트면서 가정이 천국 같이 변화된 것입니다. 환경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이 앉은뱅이 상태에서 일어나 걷게 된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혹시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앉은뱅이 같이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문제들과 환경에 얽매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 가운데 불신자들처럼 숙명이거니 팔자소관이거니 하면서 체념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의지함으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걸어 다니며 승리의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3] 일으키는 인생
본문의 앉은뱅이 걸인은 일어나 걷게 된 후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남은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그를 일으킨 베드로도 본래는 앉은뱅이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평생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한 때 꿈에 부풀었지만, 그것도 세속적인 차원이었습니다. 예수님 따라 다니면 한 자리 하지 않을까,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낙심천만한 가운데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 이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변화됩니다. 영적인 앉은뱅이 상태에서 벌떡 일어난 겁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는 사람이 됐습니다. 4절 보세요.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거늘” 앉은뱅이 걸인을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비록 물질은 없었지만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었기에 도와줍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줍니다. 돈 몇 푼 도와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전해 주는 게 근본적인 도움입니다.
① 기도의 삶 :
먼저 베드로는 기도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삶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하루에 세 번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제3시(오전9시), 제6시(정오 12시), 그리고 제9시(오후3시)입니다. 1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이렇게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 능력 가운데 자신도 일어날 수 있었고, 남도 일으켜 줄 수 있었습니다.
다시 6절~7절 보시죠.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 베드로가 명령합니다. 그리고 붙잡아 일으켜 줍니다. ‘일어나 걸으라!’ 이것은 기도의 한 형태로 명령형 기도(Prayer of Command)입니다 혹은 선포형 기도라고 합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기도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가족들 가운데 친구들 가운데 이런 저런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일으켜 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증인의 삶 :
또 베드로는 증인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이때 베드로 옆에 있는 앉은뱅이였다 일어선 사람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9절~10절 보세요.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여기서 ‘놀라니라’라는 말은 원문에 명사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엑스타시스’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ecstasy(황홀경)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 보고 많은 무리가 깜짝 놀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이제 ‘살아있는 증거’가 된 셈입니다.
특별히 11절을 보면 그 사람 스스로 어떻게 합니까?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NASV-he was clinging to Peter and John)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여기서 ‘붙잡으니’ 이 말은 영어성경을 보니까 cling to(붙어 있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붙어 다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복음 증거에 대해 시청각 자료 역할을 한 겁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 사람에게 나타난 변화가 증거가 되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겠다고 결신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까?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 3천 명이 되었고, 이제 5천 명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불이 한참 타오르고 있는 곳에 휘발유를 뿌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사도들이 핍박받은 상황에서 방패막이가 되어줍니다. 행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당국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 취조를 하고 핍박했지만 그 사람의 명백한 증인으로 옆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훈방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수준입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를 잘 아시죠.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도 그녀의 찬송이 21곡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279장), ‘나의 생명 되신 주’(380장), 그리고 ‘나의 갈 갈 다가도록’(384장) 등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앉은뱅이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생후 6주만에 실명했으니 모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됩니다. 절망 중에 주저앉았던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원망과 불평, 절망 가운데 한탄하며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송하는 천상의 시인이 됩니다. 그녀는 95세에 천국 갈 때까지 8천 편 이상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1백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로,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 질병, 문제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앉은뱅이 인생처럼 현실 속에서 때로는 안주하며, 때로는 체념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육신만을 위해 그냥저냥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주저앉아 있는 자리에서 당당히 일어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일으켜 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는 성도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시고, ‘일어나는 인생’에서 더 나아가 ‘일으키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행 3장 1~10절 / 김흥규목사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도 당신처럼 될래요!>
유명한 성형 외과 의사 가운데 맥스웰 맬츠(Maxwell Maltz)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 「Psycho-Cybernetics」(영혼 인공 두뇌학)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를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맬츠 박사가 직접 경험한, 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어떤 여자 한 분이 자기 남편 문제로 맬츠 박사를 찾아 왔습니다. 이 남편은 집에 불이 났을 때 자기 부모님을 구하려다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효성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구하지 못했고 두 분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죄책감으로 시달리는데다가 남편의 얼굴은 아주 흉측스럽게 일그러져 그 날 이후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고 골방에 갇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조차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맬츠 박사는 이 여자를 안심시키려고 했습니다. "현대 성형 외과 기술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남편의 얼굴을 보기 좋게 고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나 부인이 정말 걱정하는 것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자기 남편은 불에 타 죽어 가는 부모님을 구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셔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문불출, 심지어 자기 아내조차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남편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 여인은 한 가지 매우 충격적인 제안을 맬츠 박사에게 했습니다. "선생님, 저도 제 남편과 똑같이 되도록 제 얼굴도 일그러지게 만들어 주세요! 가 남편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이가 예전의 삶으로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제 남편을 정말로 사랑해요. 저는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제 얼굴을 흉하게 만들어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저는 그 길을 택하고 싶어요."
물론 맬츠 박사는 이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크게 감동을 받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결국 맬츠 박사는 자신이 직접 남편을 만나서 수술을 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남편이 갇혀 지내는 작은 골방문 앞에 가서 열심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맬츠 박사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나는 성형 외과 의사 맥스웰 맬츠랍니다. 나는 얼마든지 당신의 얼굴을 예전과 똑같이 고칠 수 있답니다." 그래도 방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맬츠 박사는 부인이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 부인은 당신이 밖으로 나올 수만 있다면 당신 얼굴과 똑같이 흉측스럽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이 끝나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무섭게 잠가져 있던 골방문이 삐꺽하고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남자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풀어 준 것은 아내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남편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심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이웃을 고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관심과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와 같은 관심과 사랑을 가졌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사도 행전에서 베드로가 최초로 행한 치유 이적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걸인 한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쳤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변에 길 잃고 방황하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우리가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발견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대체적으로 하루에 세 차례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전 9시와 제 구시, 즉 오늘 우리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 그리고 해질 무렵에 각각 정시기도를 올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불쌍한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매 주일 아침, 매 주일 저녁, 매 주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 없이 고통 당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올 때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은 그저 늘 그렇듯이 똑같은 거리를 운전해서, 똑같은 곳에다가 자동차를 세워두고, 똑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예배당에 앉아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민감해지면 이 세상에는 우리를 향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올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령열에 불타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당에 올 때마다 여러분의 도움을 구하는 불쌍한 이웃들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열리시기 바랍니다.
② 미문(美門)이라는 성전 문 앞에는 앉은뱅이 거지가 세상의 은과 금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미문'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성전 문' 앞에 앉아있는 '불구자,' 얼마나 극명한 대조가 됩니까? 성전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데 그 앞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불쌍한 병자가 있다니, 이보다 더 오늘의 교회와 불신자들의 형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들것으로 날라다 주어야지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걸 행위를 해야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불쌍한 거지였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다른 사람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갈 때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해야지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요 무엇보다도 내일에 소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름다운 성전 문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앉은뱅이처럼 추하고 불쌍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6절에 나온 베드로의 외침대로 이 사람은 은과 금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얻게되는 날은 이 사람에게는 횡재하는 날이요 재수 좋은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오는 시간에도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세상의 은과 금을 구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더 귀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땅에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은과 금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올 때마다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그들을 영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이 은과 금의 노예가 되어 산다면 더 귀한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을 것입니다. 6절에서 베드로가 크게 외쳤던 것처럼 은과 금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훨씬 더 귀하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그들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③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 거지를 주목했고(looked straight at him with intense purpose),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했고(trusted the power of God), 그의 고통에 직접 손을 댔습니다(touched his pain).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걸인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주목했다는 말은 그냥 무심하게 쳐다봤다는 말이 아닙니다. 희랍어 원어로는 'athenisas'로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 NRSV는 'Peter looked intently at him,' 즉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는 말로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행 1: 10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하늘을 자세히 쳐다 볼 때 이와 똑같은 희랍어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행 7: 55에서 스데반이 순교 당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도 동일한 희랍어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구걸하는 소리를 듣기는 듣되 건성으로 듣고 대개 못 본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 앉은뱅이의 영혼의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주목해 보았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 불쌍한 거지 앉은뱅이를 향한 자비심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면 주목해서 그 영혼을 지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영혼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브라이언 브릿드웰(Brian Bridwell) 중령이 국방부 건물 복도로 걸어 들어가다가 테러범의 비행기 자폭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도착했을 때 브릿드웰 중령은 전신의 40%가 불에 탄, 2도 내지 3도 화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피부 이식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틀이 지난 후 대통령 영부인인 로라 부시(Laura Bush)가 브릿드웰 중령을 방문해서 부인인 멜(Mel)을 포옹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누군가가 브릿드웰 중령 부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부시 대통령이 병실로 걸어 들어 왔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거수 경례를 했습니다. 브릿드웰이 답례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데 15초에서 20초 정도가 걸렸습니다. 팔에 입은 화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거수 경례한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브릿드웰 중령이 손을 내리자 비로소 내렸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부하가 상관에게 하는 거수 경례 예법을 브릿드웰 중령에게는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한 영혼에게 이와 같은 관심과 배려를 보였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불행한 이웃에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시면서 여러분들은 누구를 보았습니까? 혹시 늘 그랬듯이 그냥 무심결에 스쳐 지나오지는 않았습니까?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려면 그 영혼을 주목해서 자세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비심이 넘쳐 나서 한 영혼을 자세히 주목한다고 해도 도와 줄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인가를 구했습니다. 아마 먹을 것이나 돈을 구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금방 알아차린 베드로는 자기에게는 은과 금이 없지만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현존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은과 금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은금, 그러나 그 은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과 권위에 의지해서 앉은뱅이를 향하여 외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지는 놀라운 치유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입니다. 오늘 한 영혼이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권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철저히 신뢰했을 뿐 아니라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ouch'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의 고통을 직접 어루만졌던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실천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선언했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약 2: 17, 26). 베드로는 가슴 속에 불붙는 믿음을 'touch'함으로서 실천했습니다.
사도행전이 쓰여지던 시대에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불구자가 된 사람은 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신체적인 접촉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비심이 발동할 때 기껏해야 돈이나 던져주고 "쯧쯧" 혀를 차면서 지나가면 그만이었습니다. 괜히 손으로 만졌다가는 더러운 귀신이 자기에게도 옮겨 붙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유대 관습과는 달리 환자의 손을 직접 움켜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신체적인 접촉이 있었을 때 앉은뱅이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게 된 것입니다. 치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환자를 주목해서 보았고, 예수의 이름을 신뢰했고, 이제 잡아 일으켜 세웠더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이 신체적인 치유를 받은 앉은뱅이는 영적인 치유까지 받게 됩니다.
④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고 걷고 뛰면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러분, 8절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몸만 일어 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기가 치유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불쌍한 영혼을 자비심이 가득한 채 주목해서 보았고, 예수의 이름을 절대적으로 의지했고, 그의 상처와 고통을 터치했을 때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⑤ 이와 같은 치유 이적을 바라 본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9절과 10절을 보세요.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아무도 하지 못했고 또 할 수 없었던 일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냈을 때 세상 사람들이 경탄스러운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positive impact,' 즉 긍정적인 충격을 세상에 줄 때 복음은 점점 더 활발하게 세상에 누룩처럼 번지게 될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오실 때 길거리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누구를 만나셨습니까? 그들을 어떤 생각으로 보셨습니까? 그저 늘 그랬듯이 무심결에 스쳐 지나왔습니까?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자비심과 긍휼이 가득한 채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 그보다 더 확실하고 능력있는 길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확신한다면 그들 곁에 가까이 가십시오. 그들의 상처를 감싸 안고 어루만지십시오! 이렇게 주목해서 보고, 믿고, 어루만질 때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옵니다! 은과 금이 비록 여러분에게 없다고 할지라도 가장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그 이름을 상처받고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주십시오! 아멘.
우리가 세상에 줄 것
행 3:1-10 / 이수영목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모여 기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날 모두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나가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들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신기하게 여기며 그것이 어찌 된 일이냐고 서로 물었습니다. 그 기회를 잃지 않고 베드로는 일어나 소리 높여 기독교 최초의 대중설교를 했습니다. 그 베드로가 두 번째로 대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증언하는 설교를 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합니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하루 세 차례의 정기적인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제 삼시 즉 아침 아홉시와 제 구시 즉 오후 세 시와 해질 때였습니다. 이 기도시간에 경건한 사람들은 종종 성전에 가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에 따라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미문 즉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던 문을 통해 성전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 문 앞에서 그들에게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본문 3절).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본문 2절). 유대교에서는 적선하는 것을 칭찬받을 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걷지 못하던 거지는 영리하게 구걸하는 장소로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이 문 앞을 택해 자리 잡곤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보라!” 했습니다(본문 4절). 그러자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는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본문 5절). 그때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본문 6절) 그 거지는 분명 돈을 구걸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그저 푼돈을 기대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얻은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거지에게서 더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그것을 준 것입니다. 아니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줄 것은 사실 은이나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신다는 사실의 증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지만 사실 자기 자신이 가진 권능으로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을 힘입어 준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을 뒤따르는 12절에 보면 그가 행한 일 앞에서 놀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묻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했던 것입니다.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일으켜 걷게 한 것은 베드로 자신의 권능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며 베드로의 경건한 신앙 자체의 힘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놀라운 일을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일으킬 수 있음을 우리는 증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거지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고 그는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섰을 뿐 아니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본문 7-8절). 그리고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고 거기서도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분명 거기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제사장들도 그 광경을 목격했을지 모릅니다. 옛날 다윗이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여부스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쳐서 빼앗은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여부스 사람들과 싸우려 할 때 그들은 다윗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삼하5:6) 그러나 다윗은 그들 생각과는 달리 그 성을 빼앗고 말았습니다(삼하5:7).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는 말에 그만 화가 났거나 자존심이 상한 다윗은 어디 보자는 듯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부하들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했습니다. 그후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속담이 생겼으며(삼하5:8) 다리 저는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 의해 걷고 뛸 수 있게 된 사람도 그래서 그전까지는 성전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만 앉아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완전히 나아 성전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그가 그런 기쁨에 넘쳐 걷고 뛰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들조차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내다보았을 가능성이 아주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체적으로든지 심리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 영적으로든지 뛰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일어서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구걸하며 사는 모든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일어나 걷고 뛸 수 있는 희망과 확신과 능력과 용기와 기쁨을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전 안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문턱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을 성전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걸을 수 없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 걷고 뛰게 되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본 모든 백성은 그 일로 인하여 크게 놀랐습니다(본문 9-10절). 우리도 사람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놀라게 하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다음 절인 11절에 보면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였다.” 합니다. 붙잡았다는 것은 놓지 않으려고 꽉 잡고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걸을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도들이 인생의 참된 길도 걸을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쉽게 놓아버릴 수 없어서 그들에게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세상이 교회를 배척하고 내던져버리고 싶어 하는 이때 교회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매달리게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과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수가 없어서 그를 보내고 성전 밖으로 나왔는데 그 사람이 끝내 그들을 놓아주지 않고 성전 밖까지 따라 나왔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발 날 이대로 두고 가지 마십시요!”라고 소리치며 좇아 나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밖으로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는 행각에 모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향해 또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장 연설을 한 것입니다.
솔로몬 행각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좁은 의미에서는 성소를 비롯하여 성전의 부속공간들을 포함한 성전건물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에서는 성전건물뿐 아니라 그 건물을 둘러싼 뜰과 그 외벽과 그 외벽 안쪽을 따라 만들어진 회랑들을 다 포함시켜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외곽벽 사방에 돌아가며 나있는 여덟 개 문 가운데 한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황금문이니 양문이니 북문이니 하는 것은 다 이 여덟 개 문 가운데 한 문의 이름들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성전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뜰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뜰의 이름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쫓으신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있던 곳이 바로 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 뜰까지 밖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솔로몬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 외곽 벽의 동쪽 벽을 따라 기둥들이 나란히 서있는 회랑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 솔로몬 행각의 맞은편 정면에 성전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미문이었습니다. 이 미문으로 들어가면 [여인들의 뜰]이 됩니다. 유대인 가운데 여인들은 여기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미문을 들어서서 [여인들의 뜰]을 가로질러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면 [큰 문]이 있고 그 [큰 문]을 통과하면 [이스라엘의 뜰]이 됩니다. 제사장 외에는 여기까지만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뜰] 앞 중앙에는 제단이 있고 그 제단 넘어 성소가 있으며 성소의 제일 안쪽에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역순으로 지성소에서 성소를 거쳐 정면 동쪽으로 나가면 제단이 있고 제단 넘어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큰 문]으로 나가면 [여인들의 뜰]이 있으며 그 뜰을 가로질러 계속 정면 동쪽으로 나가면 미문에 닿고 미문을 나서면 [이방인의 뜰]로 나가게 되고 그 정면 맞은편 동쪽에 보이는 회랑이 솔로몬 행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 행각과 성소 사이의 문들이 다 열려있다면 제사장들과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보일 수도 있고 크게 소리 지르면 들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사장들 가까이에 있었고 그들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있는 곳에서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베드로의 설교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종으로 사용하신 아들을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그를 놓아 주기로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행3:13). 유대인들은 살인자는 도리어 석방시키라고 요구하며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행3:14-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행3:15). 자기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고 그를 믿는 사람이며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완전히 낫게 되는 역사를 행하셨다는 것입니다(행3:15-16). 그러나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것입니다(행3:17-18). 이제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행3:19).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모든 이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와 사죄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롭게 되는 날”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행3:1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내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행3:20-21). 우리도 이 사실을 알리고 확신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좌절과 포기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누구나 용하다는 의사나 한의원을 알고 있으면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어디 아픈 데 있으면 그분들에게 한 번 꼭 가보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싸고 좋은 옷가게를 알고 있어도 가보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맛있는 음식점을 알고 있어도 한 번 가서 먹어보라고 선전해주지 않습니까? 좋은 책이나 잘 된 영화 있으면 꼭 보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값없이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참된 삶의 의미와 기쁨과 방법을 깨우쳐 주는 그 길을 알리려 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필요할 때는 사람들에게 은도 주고 금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우리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으로 얻는 치유와 구원과 새로운 삶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하는 은혜와 진리와 소망과 위로와 지혜와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고 보증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과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의 확신,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줄 것입니다. 이것을 열심히 전하고 나누고 증언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 3장 1~10절 / 최승윤목사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고쳐준 사건입니다. 이 사건 자체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4:22절에 보면 고침을 받은 사람의 나이가 40여세라고 했으니 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40여 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40 여 년 동안 한 번도 걷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다리의 뼈와 근육의 기능은 완전히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완전하게 고쳤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더니 곧 바로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완전하게 고친 것입니다. 이 사건 자체가 대단히 놀랍고 신기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신경을 써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 때문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고치려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으로 세상을 대하여야 하는가?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드러내고 보여주어야 할 진정한 능력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사건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십시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전통에 따라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세시. 집에서 드리기도 하고, 성전에 와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 구시는 오후 세시를 뜻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는데,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40대 남자가 거기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4:2절에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한 것을 보면 이미 오래 전에 그곳에서 구걸을 해오던 사람이요, 베드로와 요한도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이란 곳이 본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니까 그곳에 자리를 깔고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할 때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돈을 달라는 것이지요.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주목하면서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우리가 잘 아는 매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그 말을 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더니 그 사람이 곧 바로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과 은총과 능력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에 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며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았고, 성전에 오지 못하더라도 멀리서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재난에서 막아주시고, 평안과 복을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곳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면서부터 40여 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한 사람이 ‘미문’이라는 곳 앞에서 엎드려서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미문’이라는 곳은 말 그래도 ‘아름다운 문’입니다. 성전이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마당’이 있고, 그 다음이 이스라엘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마당이 있고, 그 다음이 이스라엘 남자들의 마당이요, 그 다음이 레위인들이 일하는 곳이고, 그 다음이 제사장들이 일하는 마당이 있습니다. 오순절 당시 이 구분이 얼마나 엄격하게 지켜졌는지 모르겠지만 구약 시대에는 각 구역이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 있어서 이방인의 마당에 있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여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없고, 이스라엘 남자들이 레위인들이 일하는 곳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미문’이란 곳은 바로 이방인의 마당에서 이스라엘 여자들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에 있는 문으로 매우 아름답게 꾸몄다고 해서 ‘미문, 아름다운 문’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미문’이란 곳에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바로 그 미문이란 곳 앞에서 구걸을 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방인이었는지, 이스라엘 사람이었는지 자세하게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가 이방인이었다면 이방인으로 나면서부터 불구가 되었고, 40 여 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고, 구걸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푼입니다. 40여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원했던 것이 동전 몇 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 하나님을 만나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곳 바로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한 평생을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푼을 의지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그의 육체적인 상태, 경제적인 형편 뿐 아니라 그의 전 존재가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으로 그가 온전하게 고침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 뿐 아니라 그 성전을 드나드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도 그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동전 몇 푼 던져주고, 빵 몇 조각을 주는 것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입니다.
측은한 눈빛과 목소리로 구걸을 하는 그 사람을 보았을 때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전을 몇 푼 던져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지난 주일에 생각한 것처럼 그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나누어주었습니다. 만약 베드로와 요한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 한 사람 돕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교회에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이 자립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은 물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더욱 칭찬하고 고마워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걷지 못하는 그 사람, 구걸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빵 몇 조각, 동전 몇 푼이 아니라 그의 불구를 완전하게 고쳐주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먹고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해서 그 사람을 고치면 하나님의 능력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질테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이 사건의 결과를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고침을 받은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깡충깡충 뛰었다고 했습니다. 누가의 이 표현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크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고치려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고쳐줌으로 해서 생긴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몹시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임했을 때와 동일한 반응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저들이 뉘기에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서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설교의 핵심은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자신들의 능력이나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시요, 생명의 주인인데 그 예수를 너희들이 부인하고,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그 예수가 바로 이 사람을 완전하게 고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인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죄를 용서받고, 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에게 동전 몇 푼을 요구하는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빵 몇 조각과 돈 몇 푼을 원하는 그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입니다. 40 여 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그 사람, 구걸해서 먹고 사는 그 사람, 몸 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온전하게 마비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구원의 은총도 모르고, 기대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그 사람에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과 은총을 그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그 사람이 완전하게 고침을 받음으로 더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게 되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 결과 남자만 5000명 되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40년 동안 걷지 못했던 사람이 완전하게 고침을 받은 사건보다 더 크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곧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올바르고 알고 그 예수를 온전히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요, 그것이 더욱 놀라운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았고,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서 그 사람을 고친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남자만 5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기적이 발단이 되어서 더 큰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등장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적 자체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세와 능력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만이 죄로 말미암아 마비되고, 걷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걷게 만들고, 뛰게 만들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사람이 사는 것은 은과 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이 바로 기적이요, 그 사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많은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고칠 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주목해 주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베드로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곧이 곧대로 “내게는 너에게 줄 돈이 한 푼도 없다”이렇게 이해해야 할까요?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돈을 주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고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일의 결과를 놓고 생각해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에게 동전 몇 푼을 던져주는 것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를 온전하게 고쳐주는 것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베드로의 말은 결국 그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빵 몇 조각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신의 불구를 고쳐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럴 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자비와 은총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단지 동전 몇 푼, 빵 몇 조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다니면서도, 은과 금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의 고귀한 구원의 은혜와 자비와 능력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고, 무감각하고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대면하고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교회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금과 은입니다. 금과 은으로 대변되는 세상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교회에 요구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금과 은을 주어라. 이 고단한 인생을 좀더 편안하게 사는 길을 보여달라.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많은 세상살이를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길을 가르쳐 달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와 잘못된 것을 뜯어 고치고, 이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교회가 앞잘 서 달라. 이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우리의 것을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할 수 있는대로 이웃과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는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과 금인가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세력과 권력과 힘인가요?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이렇게 세상 앞에 비아냥 거림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과 교회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증거로 “은과 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축복, 세상적인 형통, 심령의 평안과 위로, 교회의 크기, 이런 것으로 세상 앞에 교회의 교회 됨, 신자의 신자 됨을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 영원한 생명의 은혜로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사는 것으로 우리의 우리 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세상에서 부러움을 살 만한 것으로 우리의 우리 됨을 드러내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만 주신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과 은총과 자비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것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것 또한 금과 은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마비가 된 사람을 온전하게 치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금과 은’으로는 온전하게 치유할 수 없고, 그를 걷게 만들고, 뛰게 만들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금과 은’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망가진 세상을 걷게 만들고, 뛰게 만들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갖고 있는 것, 하나님의 교회만이 갖고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세상이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참으로 조화가 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나사렛 촌 구석에서 태어난 사람, 모든 사람들이 무시해도 될 만한 평범한 예수라는 청년. 그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요, 왕이요, 대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참 하나님인가?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가고, 지금도 살아서 권능과 지혜와 능력과 자비와 사랑으로 이 땅을 다스리고 있단 말인가?
은과 금을 추구하는 세상, 은과 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걱정이 없다고 여기는 세상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자신들이 원하는 금과 은을 얻기 위해서 도용할 수는 있을 지 모르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무지와 자신의 교만과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그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단어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고, 따르고 있고, 의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를 왕으로, 통치자로, 무한하신 권능과 위엄과 지혜와 자비와 사랑을 갖고 계신 우리들의 생명의 주인이시요, 교회의 머리로 믿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금과 은으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힘과 이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따르고, 추구하며, 이 세상의 것으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우리 됨을 증명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갖고 있지 못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살도록, 그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과 권능과 자비와 사랑으로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본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능력을 오늘날 성도들과 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셨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메시지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저와 여러분들의 구주가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들의 삶의 동기요 목표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고 있는 이 메시지를 우리가 믿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하겠습니까? 이 메시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금과 은이 아니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과 권세와 위엄과 권능을 지금, 이곳에서 의지하고 살아라, 그 이름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며 살아라. 그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고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우리됨, 교회의 교회 됨을 증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과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능력을 의지해서 우리가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실패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 걷기도 하고, 기뻐서 깡총깡총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가 누리는 감격과 감사와 권능과 은총은 누리지 못하고 살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금과 은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것, 세상의 가치, 세상의 방식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위엄과 능력과 자비와 사랑의 통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 이름조차 모르는 세상 앞에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우리의 우리 됨, 빛과 소금이라는 우리 존재를 증명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 이 부르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온전하게 드러날 때까지 저와 여러분들은 분발하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 앞에 온전하게 선포될 때까지 우리의 마음은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금과 은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하여도,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지 않은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 안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과 권세와 위엄과 자비와 사랑으로 마비된 세상을 걷게 만들고, 뛰게 만들고, 하나님을 찬미할 때까지 우리의 기도가 끊이지 말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헌신과 각오와 충성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동기요, 힘이요, 목표가 될 수 있도록 날마다 분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행 3장 1~10절 / 윤태성목사
이 주간을 통해 교회가 창립9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늘의 복과 사람들의 축하가 넘치는 날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함께 축하 인사하겠습니다. “참 좋은 교회입니다” “축하 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역사에서 교회라는 영광스러운 기관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그 말씀을 따라서 제지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이 저들위에 임하게 되고, 성령 충만으로 세워진 기관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회를 “성도의 어머니”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광스러운 교회가 이 땅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요한과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 장면을 통해서 교회위에 순종한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영광의 기회를 잡아라
1절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그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하루에 세 번 기도를 드렸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루에 아침 9시와, 오후 3시에 상번제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도 변함없이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를 위해 성전을 찾아갈 때 역사가 오늘의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그분의 뜻하신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그분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때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기도하는 자를 통하여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성도의 기도가 이처럼 하늘의 역사를 바꾸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자! 이제 기도하는 사람의 역사를 보겠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향하는데 앉은뱅이가 등장을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자라” 그는 그의 능력으로 살아 갈 수가 없게 되고 사람들에 의해서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입니다. 걷지도 못하고 앉아서 구걸하는 그에게 한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베드로아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5절에 나와 있는 대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곳에 만났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방법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는 타율(他律)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유행이나 시류에 영합하여 살아가는데, 뭐 하나 잘된다 하면 그 쪽으로 우루루 몰려다니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두 번째가 자율(自律)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신념이나 주장대로 누가 뭐라 하든 앞만 보고 한 길가는 뚝심 있는 삶입니다. 입지전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신율(神律)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율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뜻와 마음에 맞추어 산는것”을 말합니다. 신율로 사는 사람은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며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인데 신율대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오늘 바로 이 성전에도 세 가지의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 앉은뱅이는 타율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구걸을 하고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성전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의지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율의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도 자신의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 신율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을 변화 시키는 무리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간다.≫ 이 순종의 자리에 세상과의 소통이 생깁니다. 주님의 사역을 위한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신실하게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기 위한 기회를 주십니다.
이점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동일한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으니까, 혹은 주일이 되었으니까 기계적으로, 타율에 의해서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또 다른 분들은 인본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운데, 주님께서 다만, 내 마음에 내 사업에, 내 자녀 위에, 도움이 되시는 분이면 좋겠다. 이렇게 무엇인가 바랄까 하여 주님의 전에 나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예배드리는 자들입니다.
윌리엄 템플 켄터베리 대주교는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양심을 일깨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로 생각을 키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를 헌신하는 것이다” 말하였습니다. 바라기는 영이신 하나님 앞에 나의 인간전인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영광을 위한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시대교회의 모습을 알아 보기위해 지난달에 기윤실에서 성인 1천명에게 전화를 걸어 '2008 교회신뢰도 여론조사' 벌였습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한국 교회를 향한 사회의시선이 차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종교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호감을 가진 종교로는 불교가, 가톨릭, 기독교 순입니다. 호감도 뿐만 아니라 신뢰도에서는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가 48.3%로 가장 많았고 '신뢰한다'는 18.4%에 그쳤다. 신뢰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항목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않다'가 50.8%, '보통'(35.2%), '그렇다'(14%)의 순이었다. 개신교회가 신뢰받기 위해 개선할 점으로는, 다른 종교에 관한 관용뿐아니라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일치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숙하며 우리를 돌아보아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과 세상 사람이 보는 우리의 온도차가 뚜렷합니다.
이와 같은 세상과 교회와의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5절에 하나님의영이 충만한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 말합니다. 이때 앉은 뱅이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게 됩니다. 6절 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따라서 할까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세상의 요구와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은 무엇인가 바랄것이 있을까하여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교회를 통해서 원하는 보편적인 기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우리에게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내게 있는 것으로” 우리가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범위 내에서 할 수 있을 만큼, 다른 이들을 섬기기를 기대하십니다. 또 그 일은 언제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름에는 권위와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없을지라도 그 사람의 이름이 적힌 도장이나 사인을 제시하면 그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과 똑같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로 정부시책에 반대되는 글들을 썼다가 반역혐의를 뒤집어 쓰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처형받기 위해서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달려 온 친위대의 급보로 말미암아 그는 즉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름의 권세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 이름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권세도 비례해서 막강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권세는 어떠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권세는 천하에 그 어떤 죄의 권세, 악령의 세력, 병마의 세력, 죽음의 권세까지도 굴복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당시에 멸시받고 천대받는 이름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온 몸이 발가 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못박혀 죽은 수치스런 이름이요, 부끄러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순종하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이름위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그 이름을 높여주셨습니다. 그 이름에는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 그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오늘날에도 성탄을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그 성탄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청팡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왜 별을떼어내고 특정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세우느냐. 종교적인 당파성에 예수님을 묶어 버립니다. 오히려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경제정책에, 특정한 기업이나, 김연아와 같은 스포츠 스타에 기대하고 열광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의 인생에 어떤 변화나 힘도 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권세는 우리들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능력 있게 하고 영광스럽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하고” 베드로가 이 귀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전했을 때에 갑자기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솟아나더니 40년 동안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용수철 튀듯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운명적인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남에게 부담을 줄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도 그 능력의 이름을 의지할 때 이런 변화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능력의 이름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선포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오는 말
중세에 유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이제 돈도 많고, 건물도 많고, 땅도 많고, 성직자들도 많다. 우리는 아예 성당바닥을 은과 금으로 깔아 버렸다. 그러나 왜 초대교회 때만큼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다른 외적인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런 능력도, 아무런 은혜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다 부족해도 예수님이 있으면 우리는 은혜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권세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능력 있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강도와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끓임 없이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가정과 이 지역 위에 나타나기를 구하는 우리의 역할이기도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우리에게 이웃은 내가 만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가 속한 검단 지역과 이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서 늘 기도합니다. 우리교회에 영적인 생수 흘러넘치게 하셔서 이 지역을 적시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교회 위에 어린 영혼들을 많이 맡겨 주셨습니다. 한국교회에 다음세대가 없어서 걱정인데 우리교회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기학교와 꿈터 주일학교 또 이번에 청소년 주일학교 어린이에게 비젼을 찾아주기 위하여 위한 “꿈터 새벽기도회”가 계획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이지역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품고 민족과 이웃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영향력 있은 아이들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내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있는 것”이 됩니다.
이제 교회뿐 아니라 우리 개인에게도 주님의 요청이 있다면 여러분 그대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바른 순종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꿈이 있는 교회 또한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행 3장 1~10절 / 손상률목사
‘절간에서 생선 찾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치에 어긋나거나 상황과 맞지 않는 요구를 하는 것을 보고 비유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손을 내밀며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처럼 돈을 추구하며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다수가 은과 금 같은 재물이 최고인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살지만 사도들은 그보다도 더 큰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1. 본래는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안드레와 함께 고기를 잡기 위하여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왔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같은 장소에서 부름을 받았는데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마 4:18-22).
1)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은과 금’은 재물에 대한 총칭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생존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거의 다 보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사람들과 심지여 동, 식물까지라도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은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런 것은 세상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연은총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물질적인 자원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지식이나 재능과 같은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습니다. 다만 죄가 들어오고 욕심이 사람을 지배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가진 능력만큼 발전하고 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9:12-27에 보면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하여 먼 나라로 가면서 열 명의 종을 불러 놓고 한 사람에게 한 므나씩을 맡겼습니다. 똑같이 한 므나씩 받았지만 능력에 따라서 열 므나를 남긴 자도 있었고, 또 다섯 므나를 남긴 자도 있었으며, 한 므나도 못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훗날 그 귀인이 왕이 되어서
돌아왔을 때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다섯 고을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본래는 어부로 생활하면서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었습니다. 배와 그물을 비롯하여 고기잡이에 필요한 어구들과 그 어장에서 생산되는 자원으로 저희 필요한 것만큼은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3) 사용하기에 따라서 결과가 다릅니다.
똑 같은 자원을 가지고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청지기 정신에 입각하여 주인의 의도에 맞게 선용하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받게 되고 오래도록 누리면서 자신과 여러 사람에게 유익을 주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자기의 분수를 망각하고 교만한 나머지 받은 축복을 방탕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기의 욕심만을 위해 악용하게 되면 그것이 자기를 찌르는 불행의 불씨가 되고 맙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규정하고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서 착하고 올바른 삶을 사는 자에게 더 준다고 하였습니다(눅 19:26).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10).
2. 지금은 없습니다.
이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왔습니다(눅 5:11).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에게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고 하였습니다(눅 18:28).
1) 목적 있는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17-1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이어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고 하였습니다(막 1:20). 본래 이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하고 가족들과 함께 거기서 어부로서 자기들의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됨으로써 그들의 삶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재물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죄악의 바다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살려내는 제자의 길을 가게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엘리사는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즉시 소를 버려둔 채 달려 나왔습니다(왕상 19:20). 사람마다 자기의 재능과 소질에 따라 무슨 일이나 할 수 있지만 막상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의하여 선택을 받게 되면 거기에다 자기의 인생을 걸어야 됩니다. 특히 영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그것만을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0:37-38). 재물에 대한 집착이나, 가족에 대한 인정이나, 다른 어떤 것에 마음의 일부라도 빼앗기게 되면 목숨을 걸고 수행하여야 될 사명에 전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눅 9:62)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데도 곁눈질을 하지 말고 오직 일편단심 주님만을 바라보고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이런 결심이 흔들릴 때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의 쾌락과 같은 유혹을 받게 되어 결국 사명자의 길을 이탈하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4:10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3. 없어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재물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고, 또 더러는 그것을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때 조금도 부끄럽거나 위축되지 아니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1) 있고 없음이 행복의 기준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물질의 많고 적음에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합니다. 또 재물이 많으면 행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가치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국 시민의 대헌장’이라 불리는 산상보훈과 팔복의 내용도 은이나 금 같은 세상재물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마 8:3-12). 예수님께서는 부모의 유산을 가지고 싸우는 형제를 보시고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15). 물질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오히려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2)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인기 같은 것이 거의 그렇습니다. 야고보서 1:9-10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게 있는 재물이나 권세나 영화가 언제까지 그대로 있을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한순간에 풀의 꽃과 같이 시들게 되고 아침 안개와 같이 소멸될 것을 예상했다면 이보다 더 허망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2:15-17).
3) 모든 것에 부요한 사람입니다.
은과 금이 많아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그런 것이 없어도 부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가난하고 가련한 자 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계시록 3:17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모든 것에 부요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
행 3장 1~10절 / 손상률목사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생후 40년이 넘도록 지구 땅덩어리를 깔고 앉아 걸어본 일이 없는 앉은뱅이가 즉시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단숨에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은과 금이 있으면 무엇이나 못할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도 사도들에게 은과 금을 요구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앉은뱅이가 요구하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확실하게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가지고 있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1. 은혜로 받은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수용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은혜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하였습니다(사 9:6).
1) 나사렛 예수
‘나사렛’은 예수님의 육친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며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동네입니다. 누가복음 1:26-27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동네에 세워진 나사렛 성전을 지칭할 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려 준 곳이라 하여 수태고지(受胎告知)교회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후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서 요셉이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갔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 2:23에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뜻인데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입니다(요 1:41).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레 6:20)과 선지자(왕상 19:16)와 왕(삼상 16:13)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사장과 선지자와왕의 직분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마 16:16) 신앙고백을 한 것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마리아의 몸에서 육신을 입고 나신 인간적인 이름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는 신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롬 1:3-4).
3) 주님
성령 받은 베드로가 유대인을 향하여 설교하면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 2:36).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요 13:13). 주(κυριος)라는 말은 임금 또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이는 예수님을 유일한 주권자로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2. 신비로운 이름입니다.
앉은뱅이를 향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고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신비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이름의 신비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1) 사죄의 능력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안고 있는 불행의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12에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몸부림을 쳐 왔습니다. 한편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문제의 원인이 죄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하지만 죄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해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명쾌하게 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2) 구원의 능력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행 4:12).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자기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이를 외면하고 거부하였으나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이 주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피력하였습니다(롬 3:28).
3) 치유의 능력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사건을 두고 여러 사람이 호기심을 가지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10절). 사람들은 베드로의 능력으로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사자인 베드로는 자기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이 걷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12절).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거기 모인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신기한 능력이 그곳에도 행사되었던 것입니다(행 19:11-15).
3. 영광스럽고 복된 이름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라고 할 때 나사렛 산골에서 난 이름 없는 목수 정도로 생각했겠지만(요 1:46), 사도들은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표현하고 자신 있게 증거하였습니다(행 5:41-42).
1) 부활하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1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예수를 구주로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 1:11). 예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멸시와 천대를 하였습니다(사 53:3).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였지만 자기를 종의 형제로까지 낮추셨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무덤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살아나신 다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며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빌 2:6-11).
2) 권능과 영광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는 최후의 명령을 하시면서 그 자신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주요,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지금도 그 위대한 권세와 영광으로 지상교회를 지키시며 그 교회를 통하여 자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난 것도 이 예수의 이름 권세가 나타난 증거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하여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의 앞에 섰느니라.”고 증거 하였습니다(행 4:10).
3) 세세토록 자랑해야 될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것을 소유한 것이 최상의 축복인줄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4:7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비록 질그릇처럼 비천한 존재이지만 보배처럼 존귀한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에 이 큰 감격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됩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세상의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와 같은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던 사람도 예수의 이름과 그 가치를 알고 나서는 이전에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미련 없이 포기해 버립니다(빌 3:8). 그리고 예수를 자랑합니다.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때로는 말 못할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예수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측은하고 그 영혼이 불쌍해서 생명이신 예수를 전해야 됩니다. 그뿐 아니라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열심히 전하게 됩니다(고전 9:16).
가장 소중한 재산
행 3장 1~10절 / 류영모목사
I. 고통의 시대
영성신학자 리차드 포스터의 글 가운데 「돈 권력 섹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돈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돈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살아가느냐. 그 돈으로 어떻게 나누면서 영향을 베풀며 살아가느냐 여하에 따라서 그 영성이 결정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적으로 온 나라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인이 함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경제적인 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위기, 영적인 위기입니다. 세계 어디를 돌아보더라도 건강한 인격, 건강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 같지가 않습니다. 혹자는 이 시대를 일컬어 막장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은 고난을 잘 헤쳐왔고 지금도 고난을 잘 헤쳐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선한 방향으로 잘 해결해 갈 줄로 믿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우리는 언제나 더 큰 복을 받아왔습니다. 고통의 시대, 고난의 시대에는 인생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영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회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경제적인 위기, 북한의 핵문제, 각 가정마다 당하는 시련,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다시는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문제가 있어왔고 지금도 문제가 있고 앞으로 늘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사실 문제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지요.
우리는 고난을 일부러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 문제를 잘 해결할 것이고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분연히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키에르코게르는 절망에 이르는 병은 고난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고난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낙심치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질병의 문제도 하나님이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속상한 문제, 내적인 문제, 마음의 상처들도 주께서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당하고 있는 환경의 문제도 주께서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아도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 문제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셨음을 추억하게 됩니다. 저 자신이 언제나 그런 문제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였고 또 선한 방향으로 풀어갔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당한 고난을 되돌아보면 어찌 그 어린것이 이겨냈을까 싶습니다. 청소년시절에도 실패가 있었고 좌절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목회를 시작한 지난 30년 되돌아보면 언제나 어려움은 있었고 위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가 되어서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회가 되었고 더 많이 기도하는 기회가 되었고 언제나 목회가 부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울때마다 포기하고 절망했더라면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생 살아가다가 조금 어렵다고 죽어 버리자? 그랬다면 이 세상에 살아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니콜라스 머레이 총장(콜럼비아대학교)의 말처럼 문제가 있을 때마다 -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소수 사람들이 있고, 문제속에 자신이 빠져 죽는 사람들이 있고, 문제를 수수방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문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라야 어찌되든 공동체가 어떤 아픔이 있든말든 나만 편안하면 된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빼고 나면 문제를 만드는 사람도 소수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는 사람도 극소수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문제가 있을 때 언제나 그 문제를 선한 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창조적인 소수라 얘기했습니다. 문제를 선한 방향으로 해결하는 이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고 또 살 희망이 있는 겝니다. 문제를 치유하는 소수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치유하는 공동체입니다.
II. 아름다운 문과 앉은뱅이
오늘 본문 초대교회의 문제 하나가 던져졌습니다. 초대교회는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오고 오는 시대의 신앙공동체는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앞장 행 2장 43절에서 성령강림사건으로 사도들이 능력을 받고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사와 표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이었는지 말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 3장에 와서 드디어 사도행전 첫 번째 이적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걷지 못하던 걸인의 병이 고침 받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성전 미문에서 일어났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 개 남짓 많은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 은으로 금으로 장식되어 있는 화려한 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문"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미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누런 황금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고 아주 아름다운 황홀한 은으로 잘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했을 때에 거기에 있는 "은과 금"을 보면서 얘기했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부요로운 것은 내게 없지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얘기했을 때 사람들은 그 은 금을 두리번거리면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문은 동쪽으로 들어와 이방인의 뜰을 지나 여인들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 제사를 경험했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했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여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원받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이 문은 아름다운 - 미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운 문" 앞에 별로 아름답지 못한 풍경 하나가 있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거지 하나가 거기에 멍석을 깔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는 어미 태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소위 앉은뱅이였습니다. 인생 살아가다가 중간에 사고 만나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행 4장 22절에 보면 그의 나이 마흔, 이 많은 세월을 걷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은 앞으로 낳을 희망이 전혀 없다는 얘기이고 낳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포기한지 벌써 오래 전이었습니다. 거기다 거지였습니다. 동냥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메고 그곳까지 데려다 주어야 몇 푼 돈이라도 동냥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은 거지들이 동냥하기 좋은 자리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걸인을 보십시요. 성전 문에 자리를 깔고 앉았지만 성전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성전 안에서 어떤 제사가 이루어지는지 어떤 멋있는 일들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경험과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바 아닙니다.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평생에 소원이 예루살렘 성전에 한번 방문하는 것입니다. 돈을 모으고 또 모아서 성전을 방문하곤 했지요. 그러나 이 걸인은 늘 성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배자들이 던져주는 돈 몇 푼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점에서 걷지 못하는 걸인은 대단히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몸은 여기 앉아 있는데 마음과 생각, 애정과 열정과 관심은 엉뚱한데 계신분 계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입니다. 예배 한번에 평생의 소원을 이룬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겁니다. 영생 구원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목표와 꿈이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온갖 상처와 문제를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을 체념한체 몸만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신앙일 겝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이 비전 안으로, 하나님의 은혜 중심자리로, 공동체 중심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인생 살아가다가 몸이 병들 때가 있지요. 그러나 마음까지 병들면 안됩니다. 몸은 앉은뱅이로 일어서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건강하게 뛰고 하늘을 날수 있는 사람, 그가 신앙인입니다. 경제적으로 좀 어려워졌다고 영혼까지 위축되어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업 한 두 번 실패했다고 인격 파탄자, 신앙의 실패자가 되지 말란 말입니다. 몸이 불편해도 마음은 건강하고 세상 일에는 실패했지만 신앙에는 성공했고 돈은 잃었지만 하나님은 새롭게 만났고 신앙은 되찾았다. 환경은 불편해도 영혼에 무한한 자유가 있는 바로 그 사람이 근사한 사람이지요. 적어도 신앙인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이지요. 나는 인생의 실패자이다. 나는 교회생활 신앙생활에 실패자이다. 하는 얼굴로 살아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III. 교회와 은과 금
초대교회는 걷지 못하는 걸인을 어떻게 도와주었습니까? 지금 세상은 과거 그 어느때보다도 더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교회는 그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의 대 사회적책임을 감당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 비판중에는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의 생리 때문에 언제나 있어왔던 일임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비판이 급속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스미디어와 인터넷이란 도구가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언제나 교회를 미워했고 비판적이면서도 또 교회에 무리에 가까운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누군가 나에게 큰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가 나의 여러 가지 한계와 제한 때문에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실망을 하게 되고 또 우리를 향하여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왜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모순된 감정으로 비판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 세상 어디에도 기대를 할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늘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되고 세상 모두가 썩어도 교회는 희망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될 유일한 책임이 사회봉사인 것처럼 말하고 또 그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에 명령에 따라서 물질로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깊이 고민해야 되고 더더구나 우리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이 관심이 가져야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고 이것이 교회의 최우선순위는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칫하다보면 복음적인 균형감각을 우리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자유주의 신학이 온 나라를 뒤덮고 온 세계 신학을 주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신학은 복음전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고 교회 성장에 대해서 비판적은 태도를 신학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사회적인 봉사에만 깊은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고 세계 교회는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랬더니 회심자가 없어졌습니다. 구원받은 새신자가 없어졌습니다. 교회성장은 중단되어졌습니다. 결국은 사회적인 책임도 사회적인 섬김이나 봉사도 중단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구제와 섬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우선순위는 아니었고 본질은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한계마저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균형잡힌 신앙,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습니다.
IV.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세상에 모든 가치기준은 은과 금입니다. 세상에 문제해결 능력은 오직 물질 경제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할 얘기도 은과 금, 경제문제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은과 금을 이야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 본질은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세상은 진정으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세상이 가지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와 하나님이 원하는 바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로부터 얻고 싶은 것과 정작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줄 수 있는 것은 다르다는 겁니다.
교회는 구제를 잘 하려고 늘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호단체는 아닙니다. 교회는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의료기관은 아닙니다. 교회가 사회 정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NGO는 아닙니다. 교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곳입니다. 교회 본질도 교회 능력도 교회 위상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 목록 제 1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재산입니다.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으로 죄사함을 얻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붙들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가치가 우리 가치가 되었고 그분의 삶의 목적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보배로운 재산입니다. 예수 이름은 능력이요 재산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우리 어머니가 부엌에 계시다가 갑자기 저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십니다. 밥을 빨리해야 되는데 부엌을 비울 수 없으니 가계에 가서 두부 두 모만 사오라는 겁니다. 돈? 그랬더니 그냥 가져오랍니다. 돈 없는데 어떻게 두부를 가져와? 그랬더니 엄마 이름만 대라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이 새말댁입니다. 제가 새말댁 큰아들 영모예요. 두부 두 모 주세요? 그랬더니 두말하지 않고 두부를 주더라구요.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야, 우리 어머니 이름은 전지전능한 이름이구나. 그때부터 군것질하고 싶으면 어머니 이름만 대면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월말이 되면 그것 갚느라 혼이 났지요. 어머니 이름이 능력이었듯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초대교회 최고의 재산은 예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은과 금보다 소중합니다. 치료보다 귀합니다. 부자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소유입니다. 진실로 세상이 얻고 싶은 것은 단순한 구제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을 믿고 싶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분의 위로와 격려를 그리워합니다.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 세상 사람들의 진정한 리더요구입니다.
은과 금을 구하는 걸인에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앞에 나사렛을 붙여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말은 신구약 성경에 꼭 두 번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행 3장 6절과 4장 10절에 한번 더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있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유명한 말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그리스도의 입에서 가장 많이 불려졌던 이름 가운데 하나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힘과 능력입니다. 교회 재산이요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수많은 이적이 있었던 초대교회 이적기사들 가운데 선별적으로 몇 개의 기적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적들이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기적이 가져다 준 결과가 놀라웠기 때문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적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기적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이 또 한번 나옵니다. 죽은 다비다를 살린 사건(행9:32-35). 감옥문이 열린 사건(16:25-34). 276명이 파선된 배에서 구원된 사건(27:13-44). 이 기적들의 공통점은 이적의 결과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이 일로 행 4장에 5천명이 초대교회로 회심하여 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적의 목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V. 예수를 전하라
몇해 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길레스피 총장이 졸업생들에게 보낸 송사의 내용중 얼마가 인터넷에 게재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설교를 했고 연세대학교에서 설교를 하고 영락교회와 새문안교회에서 설교를 한 후 남대문 시장을 찾아본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레스피 총장 내외분은 남대문 시장에 발을 들여다 놓자 마자 그 수많은 상품에 감탄을 합니다. 상점마다 물품들이 산적해 있었고 길 한가운데 노점상도 상품으로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었습니다. 온 시장이 상품 더미에 파묻혀 있는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분주한 길 바닥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시장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것입니다.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앉은 몸 밑은 고무판으로 쌓여져 있었고 두 손으로 땅을 짚어가며 몸을 움직이는데 수건 몇 장, 목욕 타올 몇 장을 손에 들고 팔고 다녔습니다. 갑자기 어디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옵니다. 두리번 거리고 살펴보니 남대문 시장을 기어다니는 사람의 고무판 위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고무줄로 둘둘 묶은 카셋트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퍼지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복음전도 내용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길레스피 총장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워서 동행하던 이상은 박사에게 사연을 물어보게 했습니다. 앉은뱅이와 잠시 대화한 이 박사는 앉은뱅이가 시장에 나온 목적은 물건을 파는데 있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은 당당하게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남대문시장에 전도단이라는 것을 천사같은 얼굴을 하고 당당히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수건 몇 장을 팔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목욕 타올을 팔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그가 미국에 돌아가서 졸업생들에게 훈화할 때에 그가 썼던 모든 훈화를 찢어버리고 대한민국 남대문 시장에서 만났던 앉은뱅이 이야기로 모든 훈화를 꾸미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나가서 목회를 할 때에 내가 가르친 신학으로 목회를 하지 말고 내가 만났던 남대문 시장에 고무판 위에서 두 팔로 시장 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앉은뱅이의 열정과 그의 복음의 능력과 그가 증거하고 있는 예수 이름의 권세로 목회하라고 교훈했습니다. 은과 금이 없어도 목회할 수 있습니다. 두 다리가 없어도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 - 아무것도 없어도 우리는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을 손에 붙들고 담대히 이 교정을 나가십시오. 훈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여러분들 세상이 너무 어려워서 냉냉한 심령으로 이 곳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열정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비전이 새로 일어나길 바랍니다. 가정이 어려우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도 일어날지어다. 몸이 병들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건강은 일어날지어다. 한국교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날지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언제까지 절망하고 전쟁의 공포속에 시달리고 있느냐. 한민족이여 일어날지어다.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제사장의 나라로 일어날지어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와서 한국복음화를 외쳤던 복음의 열정은 일어날지어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들은 되살아나고 일어날지어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예수님의 이름을 손에 들고 이 문을 나설 때에 저 뒤에 있는 문에 성전의 미문 아름다운 문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전으로 들어가서
행 3장 1~10절 / 윤태성목사
들어가는 말)
오늘 말씀은 성전의 미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美門은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12개의 문이 있는데 그 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문입니다.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이 문은 청동으로 되어 있는데 그 무게가 얼마나 육중한 지 그것을 닫으려면 20명의 장정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면으로 보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 문 앞에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성전을 거룩한 곳이라 생각하기 보다는 구걸하는 장소로 여기고 있는 앉은뱅이가 등장합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지만 마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다니지만 고압적인 상사로 인해 진퇴를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자식들 참 잘 키웠습니다” 칭찬을 듣지만 정작 왕래가 없는 자식으로 인해서 외로운 분들도 계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그 속에는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반대로 걱정과 근심으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빛을 사랑하지만 빛이 없는 자리에는 숨겨진 그늘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성전 밖이 아니라 성전 안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라도 우리가 이런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 문제의 해결하기 위해서는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어두움을 어떻게 물리칠수 있을까? 어떻게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1. 올라갈 새
먼저는 “올라갈 새” 움직임이 나옵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오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높은 곳에 위치해서 기도하러 올라가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제 구시 기도하는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새” 늘 반목되는 일상이지만 그날도 하루에 세 번 성전에 올라갑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출발을 움직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변화도 나비효과와 같은 작은 움직임에서 출발합니다. 여인이 아이를 잉태할 때면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그런데 생명은 움직임이 있기에 아이가 배속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입덧을 하기도하고 식성이 변화가 되기도 하는 것이 생명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땅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운동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시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자리 하늘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에서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계속 움직이시며 고쳐주시고 병자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따르는 사람들은 바로 움직이는 사람 제자들입니다. 기억 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움직이고 찾는 자들을 통하여 임하고 계십니다.
ex) 지난 수요일에 한국과 이란과의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국의 패색이 짙은 상황이였습니다. 그 때 축구경기에서 기회를 잡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박지성 선수의 발끝에서 골이 터지게 됩니다. 우리의 사역도 출발도 움직임에서 일어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신실하게 예배에 참석합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는 그들이 매일의 경건한 삶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은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삶의 자리는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 거리를 지나며 실제 세상과 접촉을 합니다. 교회 울타리뿐 아니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지 않을까?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데 왜 응답이 없는가? 고민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경건생활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매일의 은혜가 있는가? 내가 매일 주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는가?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반복적인 일상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소중합니다. 우리 곁에 만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사역의 기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작은 일상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시고 우리의 날들은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2. 바라보라
두 번째 우리의 능력의 출발은 어디부터입니다. 바람 봄에서 이루어집니다. 바라봄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순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하나님의 영의 동행하심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회당에서 말씀을 펴시며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사야의 글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120명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교회가 출발을 하게 됩니다. 오늘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자! 보시면 그때 요한과 베드로가 성전의 미문을 지나가게 됩니다. 늘 지나가던 시간이고 어쩌면 자주 만나는 앉은뱅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입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통해서 은혜주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지 않습니다. 나면서 앉은 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는 장면에서 그들에게 앉은뱅이의 필요를 채워야겠다는 성령의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때까지도 앉은뱅이의 관심은 5절에 나오는 대로 “무엇을 얻을까하여” 내용이 다릅니다. 이 장면을 보시면 베드로와 요한은 걷게 하고자하는 소망이 그를 바라보고 그는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믿음의 불일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요한은 먼저 “우리를 보라” 이야기합니다. 왜 보아야만 합니까? 사람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거스릴 때 육체의 소욕을 물리쳐야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누르고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주님께로 시선이 고정이 되어야합니다.
ex)한국교회의 원로인신 우리교단의 방지일 목사님이 계십니다. 중국 산둥성의 최초의 선교사이셨고 지금은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로 올해 99인데 아직도 사역을 활발하게 하십니다. 이분께 어떤 기자가 물어봅니다. 목사님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분의 대답이 복음은 “죄사함”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죽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다시 대답하시기를 복음의 삶을 위해서는 나에게 있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재력, 지식을 모두 버리고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나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봄으로 내 몸을 쳐서 복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할 수 있습니다.
3. 걸으라
하나님께서는 역사는 공간과 시간의 일치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요한 복음 3장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거하실 주님의 성전 우리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파송을 하십니다. 유럽의 구원을 위해서 바울을 보내주셨고 그에게 꿈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니엘을 에스더를 느헤미야를 준비하였습니다. 이 앉은뱅이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꿈이 있는 교회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은 의심 없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의심 없는 믿음이란? 바울의 고백이기도합니다. 따라서 할까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선포하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만약에 일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마음이 아니라 무엇인가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선포합니다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금과 은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이 말이 떨어지자 즉시로 걸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믿음은 쌍방의 동일한 스파크가 나타나야 합니다. 두려움 없는 선포 그 말씀에 의지하여 일어서는 앉은뱅이의 순종으로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서 일어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벧후 5:7 “너희의 염려를 주께 맡기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욥기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임하리라” 히브리서 3장 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되리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잡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홍해를 가를 때에도 약속을 말씀을 붙들고 두 손을 들고 기도할 때 홍해가 갈라지게 됩니다. 나에게 역사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붙들고 기도할 때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찬양하라
이제 나면서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받을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은 매일 나타나는 은혜는 아니였습니다. 그 시간에 허락하시는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나타나는 은혜, 그 은혜를 오늘 내가 드리는 헌신을 충성을 그렇게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앉은 뱅이를 일으키신 은혜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나에게 주신 시간, 물질, 능력은 헌신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섬길 수 있습니까.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 올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앉은뱅이는 이제까지 성전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전의 싸이즈 성전의 규모 성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그들이 가져오는 제사에 필요한 동물의 양은 얼마나 되는가 성전에 대해서 소상히 안다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안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였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앉은뱅이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먼저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ex) 얼마 전에 믿지 않는 분을 병원으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분이지만 자신의 병으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제가 기도해드린다고 하니 기도를 기꺼이 받으십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아멘을 안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멘 하시는 겁니다. 마지못해서 아멘을 합니다. 이처럼 전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을 생명의 전으로 인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전도라고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운데에도 몸은 성전에 나와 있지만 아직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와 걱정으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마당만 밟다가는 분들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상처가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아직도 내안에 온전한 성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런 분들은 앉은뱅이처럼 “우리를 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사람을 보내어 주십니다. 그리고 말없이 바라보시고 그 문을 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말씀이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옥토에 내 심령에 깊숙하게 떨어져야합니다. 그때에 내 마음에도 깊은 영적인 체험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깊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이 내 가슴에 떨어져야 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울림이 있어야하고 주님의 살아있는 은혜를 성전 밖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의 영적인 깊은 체험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나오는 말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언제나 동일한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장소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의 태도는 중요합니다. 이 순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임하고 계십니까?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마음입니까? 아니면 앉은 뱅이와 같이 마음입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안식과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육체적인 장애로 주님의 성전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을 봅니다.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까지 완전하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순종을 방해하는 육체의 소욕이 남아있습니다. 육체와의 사움에서 이기지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앉은뱅이 일수 있습니다. 성전의 건물만을 바라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주님 주신 은혜에 받고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합니다. 성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그냥 주일에 예배당에 나오고 헌금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받은 영과 훈련받은 육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직도 성전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나를 베드로와 요한처럼 부르셨습니다. 아직도 연약하여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다른 지체를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며 함께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부르심 받은 성도 기쁨의 찬미가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적
행 3장 1~10절 / 강용규목사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사랑하시던 제자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중에서 베드로는 그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드로만이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한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제자도 베드로입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순교를 당한 반면 요한은 자신의 수명까지 살았고,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저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들은 모두 부르받기 전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준비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시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도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후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시는 그 자리에 요한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차이점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다혈질이고, 충동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반면 요한은 신중한 성격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은 이처럼 성격이 서로 달랐지만,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갔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만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고 말하자 일으켜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삶을 뒤돌아보면 여기에 있는 어느 한 분도 평탄한 삶을 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고 죽을 고비도 넘기며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기적입니다. 기적으로 우리는 살아왔고 기적으로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날에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즉 새벽 6시, 낮 12시,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에 철저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이스라엘 비행기를 탄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을 비행기 안에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셨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동이 틀 때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옷을 가다듬고 예루살렘을 향해 조용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던지 시간이 되면 기도했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반면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하 100프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곳에 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100프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한신교회도 100프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전에 와서 성실히 그리고 꾸준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우리가 전혀 힘쓰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자 하루에 삼천 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삼천 명이 회개하기 전, 베드로는 먼저 열흘 동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을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늘 하는 일 속에서 기적은 일어납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어느 날, 호렙산 기슭에서 떨기나무에 나타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린 다윗도 늘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서 형들이 있는 전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골리앗을 보았고 골리앗과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사야도 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봅니다. 그리고 “거룩 거룩하다.”는 천사의 찬양를 듣습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는 결단을 내립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습을 본 회당 안 사람들은 놀라며 이 일을 누가 행했느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지목합니다.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목하자 그들이 말합니다. “여러분, 왜 나를 주목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 그리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철두철미하게 예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의 말씀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잘 지킨 모자람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영생에 관한 물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돌아갔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늘 원하는 것은 버리고 난 후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들은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얻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앉은뱅이에게 자신의 것을 주고 있습니다. 얻고자만 하던 사람이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병이어를 내놓았기에 일어났고, 사렙다 과부의 기적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것까지 내어놓았기에 넘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바쳐보십시오. 내어놓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미래의 삶에 기적이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행 3장 1~10절 / 김흥규목사
<정시기도 시간에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일>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아니, 베드로와 요한이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치신 것이지요. 마치 수술은 의사가 하지만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듯 말입니다. 이것은 두 제자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했다는 말씀에서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이 최초의 치유 이적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던 수제자들 중 두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을 눈여겨보았다가 자기들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지상에 함께 계시지 않는 대신에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의 대행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한 불쌍한 환자가 어떻게 치유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1절을 보세요.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여기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하지요. 야고보까지 함께 했다면 예수님이 수제자 삼총사가 될 터인데 두 사람만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왜요? 제 9시 기도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들은 해가 뜨는 오전 6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제 9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가 됩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대 시간에는 6시간을 더해야지만 오늘 우리 시간과 맞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반드시 하루에 세 차례씩 시간을 정해놓고 정시기도를 드렸습니다. 오전 9시, 정오 12시, 그리고 오후 3시에 규칙적으로 기도했습니다(단 6: 10).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면 아무 때나 드리는 무시기도도 하겠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 역시 정시기도를 했는데 그것도 성전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장소보다도 성전에서 하는 기도는 더 의미가 있고 더 경건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성령충만한 가운데 지속적인 경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남자의 운명 =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비극>
오후 3시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2절을 보세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여기 몇 가지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이 사람은 마흔 살이 넘은 남자였습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40세가 될 때까지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온 몸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 반드시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자유가 없었던 사람이지요. 그래서 본문 말씀에도 사람들이 메고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움직여 노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걸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한 푼 줍쇼!" 하면서 적선을 구하기 위해서 성전 미문 곁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운명이야 말로 태어날 때부터 죄와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죄중에 있는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마미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마비가 되어서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항시 이웃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도움과 위로를 줄 뿐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예수를 떠난 인생은 본문의 환자처럼 철저한 무기력과 절망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환자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인생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사람이 성전 미문(美門) 곁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고린도 양식의 청동으로 되어있는 아름다운 문, 바로 성전 미문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지만 옛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거지들이 구걸행각을 벌이는 장소가 주로 성전 근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전에 예배하러 가는 이들이 경건심의 한 표현으로 다른 지역에서보다 자선을 더 잘 베풀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도 수십 년 동안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워낙 적선을 더 잘 베풀었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구걸행각을 벌여왔던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
이제 3절을 보세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을 터인데 그 중에서 하필이면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고 그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겠지만 수십 년 동안 구걸을 해왔던 이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적선을 잘하는지 척 보면 알았기 때문에 거의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구걸을 하는 거지를 향하여 드디어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봤습니다. 여기 4절에 보니까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목해서 봤다는 말은 어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눈여겨봤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행인들은 비록 발걸음을 멈추어서 몇 푼 적선을 하더라도 그냥 스쳐 지나가며 대충 봤을 것입니다. 눈여겨 골똘히 보지는 않았다는 말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고서는 한 영혼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건지려는 전도자의 아름다운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뭔가 도움을 호소할 때 성령충만한 전도자들은 건성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영혼이 속에서 어떤 울부짖음을 가지고 호소하는지 그 실상을 꿰뚫어 보면서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주목해서 보면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왜 "우리를 보라!"고 외쳤을까요? 아마도 이 남자는 수십 년 동안 이 곳에서 잔뼈가 굵어온 베테랑 걸인이었으므로 지나가는 행인들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면 그 다음에 누가 자기를 도울 것인지 아주 잽싸게 살펴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면 그 다음에 자기를 도울 사람이 누구인지 아주 빠른 속도로 계산을 하면서 눈길을 돌렸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바로 이런 거지의 습성을 너무도 잘 알기에 "딴 데 쳐다보지 말고 우리에게 눈길을 고정하라!"고 부탁했던 것이지요.
드디어 5절을 보니까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하면서 그 못 걷는 사람이 두 제자를 빤히 쳐다보았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NRSV를 보면 "he fixed his attention on them", 자신의 주의를 베드로와 요한에게 고정시켰다고 번역했습니다. 주목해서 봤다는 말이지요. "아, 이 사람들에게는 뭔가가 나올 것이다." 이런 기대를 하면서 골똘히 쳐다봤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거지가 바란 것은 은과 금, 즉 그 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몇 푼의 돈, 적선(積善)이었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이제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거지는 은과 금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두 제자에게 은과 금은 없습니다. 은과 금이 없다고 했을 때 거지는 실망했을 것입니다. "괜히 쳐다봤네!" 하면서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든 진실이 담긴 교회론의 핵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은과 금이 없어도 좋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없으면 안 됩니다. 가장 불행한 교회는 은과 금은 넘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사탄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재산이 넘쳐나자 재산 분할 문제로 법정 다툼을 쉬지 않는 교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교회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세상 재판장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려는 교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은과 금이 아무리 넘쳐난다 한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없는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일 뿐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아닌 은과 금을 구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자선과 구제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전부는 아닙니다.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짓고 양로원을 짓고 은금으로 수없이 많은 선교 사역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심리 치료, 가정 상담, 사회 개혁, 정치 참여, 물론 교회가 다 해야 하겠지만 이 역시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교회가 은과 금을 가지고 자선 베풀기 사업에만 몰두한다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온데간데없이 찾을 수 없게 되기가 쉽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거지 환자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은과 금은 일시적인 도움과 위로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본질적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은과 금이 다 떨어지면 시간이 지난 다음 성전 미문에 또 다시 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또 구걸행각을 하면서 일평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영과 육이 마비된 채 이웃에게 의존해서 노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그를 40년 동안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던 영적, 육체적 마비상태를 풀어줍니다. 자유와 해방을 줍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에는 이런 권세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명령한 뒤 베드로는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이 12세 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 명령하신 그대로 했던 것이지요(눅 5: 54). 스승의 영향력은 이토록 오랫동안 남아 영향력을 미쳤던 것입니다.
<성전이 진짜 성전이 되어 다가오다>
이렇게 해서 나면서부터 못 걷던 거지는 그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게 되었습니다(8절). 성전 앞에 있었지만 한 번도 스스로 들어갈 수 없었던 바로 그 거룩한 자리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지요. 그에게 성전은 더 이상 구걸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본래적 장소로 제 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기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자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고 예루살렘에 일대 소동이 일어난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지요(9-10절).
교회에는 은과 금이 없어도 좋습니다. 물론 선교하기 위하여 은과 금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놀랍게도 은과 금이 풍부한 교회일수록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아주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은과 금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은 아주 미약하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12세기의 어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둘러보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교황이 은과 금으로 장식된 건물들을 가리키며 탄식했습니다. "토마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네." 그 때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더 이상 '일어나 걸으라'라고도 말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은과 금으로 운영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오늘 세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만 있으면 우리의 영혼이 삽니다.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독립하지 못하고 남에게 얽매여 있던 영혼이 자유와 주체성을 회복합니다. 영혼이 삽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은과 금이 없어도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잃어버려서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내리교회에 은과 금이 좀 부족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반드시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멘.
일어나 걸으라
행 3장 1~10절 / 김상복목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강림하시면 우리에게 권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도록 계속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앉은뱅이가 걷고 뛰는 사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메고 와서 성전 미문에 내려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9시, 정오, 오후3시에 정기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본문의 9시는 오후 3시를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정기적인 기도생활을 한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기도하며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기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기도가 충만합니다. 기도의 능력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에 충만한 은혜가 있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온갖 종류의 앉은뱅이들이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 형태의 기도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중보기도위원회는 여러분이 써낸 기도제목을 가지고 1주일 내내 아침부터 1시간씩 교대로 연속적으로 기도합니다. 화요일 10시에는 화요중보기도팀 100여명이 모여 그 기도제목들을 놓고 기도합니다. 성전건축이 완공될 때까지 구역별로 드리는 건축중보기도도 있습니다. 구역예배로 모일 때나 위원회, 선교회 등에서도 기도를 합니다. 수요기도회와 예배중보기도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주보를 펴놓고 순서 하나하나가 진행될 때마다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배 중에 말씀과 찬양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 누군가 저 뒤에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금요일 밤 9시부터 하는 심야기도회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QT를 통해 기도하며, 직장에서는 하루 일과를 기도로 시작합니다.
기도가 여러분 삶에 습관이 되고 생활 스케줄 속에 꼭 들어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힘은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의 힘은 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과 성령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들이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반드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본문의 앉은뱅이는 평생 부모님이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날도 사람들이 그를 성전 미문에 앉혀놓았고, 그는 전처럼 동전 한 푼이라도 얻을까 하여,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몸과 마음이 약한 사람들, 슬픔과 분노와 괴로움이 있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영혼이 연약해서 늘 사탄에게 패하고 죄의 종으로 끌려 다니는 사람들, 좋지 않은 성격과 습관 때문에 일평생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짐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그들이 누구보다 우리를 더 쳐다봅니다. 그러다가 가끔 우리 때문에 실망을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남다른 인격으로 내게 힘과 도움과 모범이 되어줄 줄 알았는데…’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통해 우리 삶에 변화와 능력이 나타나야 됩니다.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도움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분에게 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어. 저분의 기도는 응답이 되잖아. 저분의 변화를 보니 저분에게 대답이 있구나.’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남에게 줄 것이 없는 사람은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 한 닢을 주고 싶어도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으면 줄 수가 없지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육적, 경제적, 신앙적 도움을 풍성하게 받아서 언제나 넉넉히 나눠줄 것이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이든, 기도든, 사랑이든, 물질이든, 재능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지 반드시 줄 것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겨우 맺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많은 열매를 맺어서 내게 찾아오는 누구에게든지 따서 줄 수 있는 풍성한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계속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풍성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줄 것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줄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문제해결의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돈 몇 푼을 원했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보기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돈 몇 푼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에게 무관심한 채 그저 불쌍해서 동전 몇 푼을 던져주었을 뿐이지만,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매우 멋있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줄 것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의 이름과 성령의 충만함이 있으면 앉은뱅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돈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 내 안에 성령 충만함이 있다. 일어나 걸어라.”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명령만 하지 않고 직접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말만 하지 말고 빵도 한 덩어리 주어야 합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손을 잡아 일으켜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와 함께 현실적인 도움의 손길을 펴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제일 유명한 예가 오병이어의 이야기입니다. 무려 5천명, 만 명이 모인 곳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내가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 사랑의 손길과 성령님이 합할 때 거기에서 5천 명을 먹이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작은 손에 힘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여러분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인간적으로, 직장 때문에, 건강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손을 펴서 그분들의 손을 잡으시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목사의 기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목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동일한 하나님이시요, 같은 성령이시오, 같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옆을 보십시오. 여러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마음에 모신 여러분,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준 적이 있습니까? 꼭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난 성격 때문에 평생 힘들게 사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선언할 때 그 분이 일어나 자유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그 분의 성격에 변화를 주시는 것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질병이 있는 사람을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붙들고 기도해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반드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교회와 가정과 형제와 친구들 가운데서 기도의 일꾼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시는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 앉은뱅이가 발목과 발에 힘을 얻어 일어났습니다. 그는 걸었고, 뛰었고, 손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성령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경험한 바로 그 성령님이 이 시간에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옛날에 역사하신 성령님은 오늘도 내일도, 어떤 형편 중에도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어도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분을 통해 결정적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모두가 놀랐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과 실력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뻗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을 확실히 믿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몸의 질병이면 이제 기도할 때 아픈 곳에 손을 얹으시고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기도하십시다. 만약 사람 때문에 고생한다면 그 사람이 있는 쪽으로 손을 펴고 “하나님이여,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자유를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얻어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직장이나 사업에 문제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우면, 이 시간 만복의 근원 하나님께 손을 들고 “옛날에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하나님, 이제도 나타나셔서 제 문제를 해결해주옵소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혹시 자녀 때문에 속을 썩고 있다면, 그 자녀를 생각하며 “하나님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딸, 내 아들을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를 꼭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성령의 역사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 앉은뱅이도 무엇인가 받을 것을 기대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앉은뱅이의 믿음이 서로 일치하여 불꽃이 튀었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와 동일한 축복이 우리의 삶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도 기대하십시다. 우리도 믿으십시다. 우리도 선언하십시다. 우리도 기도함으로써 인생의 문제를 성령의 힘으로 해결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리니
행 3장 1~10절 / 손상률목사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하는 기관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곧 죄와 마귀의 횡포에 시달리는 인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과 소망을 가지게 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하여 이 일을 수행하였습니다(막 10:45).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네게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분부하십니다. 한번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어릴 때부터 계명들을 다 지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율법사는 재산이 많은 부자인고로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였다는 것입니다(눅 18:18-23).
여기 베드로와 요한은 재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 앞에서 손을 벌리고 있는 사람은 은과 금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앉은뱅이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지만, 저희들이 가진 것을 그에게 줌으로써 사실상 가장 큰복이 되게 하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가지는 특수한 은사를 발휘하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말씀 중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행 1:4). 그것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생명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Ⅰ. 구걸하는 앉은뱅이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비롯하여 경건한 성도들은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 10:3). 베드로와 요한도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1절). 그는 평소 사도들이 자주 드나드는 미문에 앉아 그곳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며 구걸하는 자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돈을 얻을까하여 구걸하였습니다.
(1)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
이 사람은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일어서거나 걸어다닐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그곳까지 이동하는데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문 말씀 2절에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기 혼자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직장이나 생업을 가질 수 없었고 결국 남에게 구걸하여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체적 기능이 정지된 사람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구걸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경우 영적 기능이 마비되어 있어서 자기 스스로 온전한 생각과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롬 1:21-23).
(2) 은과 금을 요구하였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매일 그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무래도 성전으로 나오는 사람일 경우 선한 마음과 자선하는 행동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도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하고 그 사람의 기대를 무색하게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가 되거나 세상적 욕구를 충족시킬 것처럼 잘못 생각합니다(눅 12:13-15).
(3) 현실적인 욕구 충족을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을 보시고 진노하시면서 그들을 모두 내어쫓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6에 보면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신령한 기관으로써 그 특수성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신령한 일보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일해주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여기에 발맞추어 끝도 없는 사람들의 욕구성향에 맞도록 환경을 만들고 여러 가지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을 주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적인 문화에 편승하여 대중적인 인기나 육신적인 만족을 꾀하므로써 교회 목표를 오도하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도가 하나님의 의도를 읽지 못하게 되면 베드로처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마 16:23).
Ⅱ. “우리를 보라”는 주문
4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은과 금을 요구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우리를 보라”고 주문하였습니다. 그때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를 보라고 하는 사람과 거기 따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눈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결국 사람은 만나고 대면하여 교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띄고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하였지만 그 말속에는 저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은과 금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대답입니다. 그들의 수중에 은과 금같은 세상 재물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솔직하게 밝히기를 꺼려합니다. 상대방이 제게 실망을 하거나 아니면 무시해 버릴 것같기 때문입니다. 이 앉은뱅이도 그의 기대가 무산되면서 몹시 실망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들에게서 은과 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그의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3-14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형에게 부모의 유산을 동생과 나누어 가지도록 명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하시며 크게 나무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재물 나누어주라는 사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걸하는 자에게 나누어줄 만한 재물이 없었습니다.
(3)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들은 앉은뱅이가 요구하는 은과 금은 줄 수 없었으나 자기들에게 있는 것으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제게 있는 것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찌기 예수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들었습니다(마 16:16-17).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있었으며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도 제게 있는 그 믿음의 도리를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행 10:34-43). 베드로는 유대교 지도자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면서 예수를 전했습니다(행 4:12).
Ⅲ. 손을 잡아 일으키는 능력
베드로는 “내게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와 동시에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이적입니다. 베드로의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1) 예수의 이름으로
여기 이 앉은뱅이가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베드로가 선언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능력이 행사된 것입니다. 이 일 후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 일이 큰 화제가 되었고 그때부터 베드로는 이적의 주인공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본인인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였습니다(행 3:12). 그리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 3:13). 그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이적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에 기인한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 성령의 사역입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남겨두신 자기의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하는 이적과 능력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를 받들어 땅 끝까지 그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부여하신 권세입니다(행 1:8).
사도행전 2:41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할 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가 하루에도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는 성령 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변화된 삶이 이루어졌습니다.
8절에 보면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선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서게 된 앉은뱅이는 이때부터 그의 삶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성전 문간에만 앉아 있던 사람이 사도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겨우 성전 문 앞에서만 맴돌던 사람이 그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한 세계를 발견하였습니다.
또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은 신앙의 체험입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서 이동하던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서고 걷고 뛰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적인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7). 처음 앉은뱅이가 요구했던 대로 은과 금을 받았더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이 원하는 은과 금을 주는 기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복음의 산실입니다. 은과 금은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되고 그 이름으로 새로운 삶의 소망을 가지게 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 걸으라
행 3장 1~10절 / 김 조목사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히13:8) 하셨으니 오늘도 그 주님의 능력과 은혜 의지하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역사를 삶 속에 이루며 언제나 승리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나아가서 복음을 성전 내 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신 일입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난 것 중 한 때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인하여 사도들이 더욱 힘써 복음을 증거했고 반대자들은 할 말을 잊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앉은뱅이 된 사람을 보면 “나면서”라고 했으니 40여세(4:22) 되도록 한 번도 일어나 보지도 못하였기에 일어나기를 벌써 포기한 사람이요, 구걸하는 자로 다른 사람이 메어다가 놓는 무능한 자입니다. 또 그 앞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가는 자들도 돈 몇 푼 주고 그에게는 관심도 없으니 이 또한 영적 무지로 앉은뱅이와 같은 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내 힘, 재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남의 신세만 지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과 삶은 아닌가요? 이제 일어나 걸으라는 역사가 삶 속에 이루어지기 위해 “일어나 걸으라” 제목하고 어떻게 했기에 고침 받았는가를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었습니다. (4-6절)
사도들이 “우리를 보라” 하신 것은 안타까운 시점 올바른 인식을 위한 것으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요5:6)과 같이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셨습니다.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 그 이상의 뜻으로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름이란 곧 그 사람입니다. 그의 성격과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앉은뱅이에게 말하지만 실제는 예수께서 하신 것이요, 죽었다가 다시 사신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어 역사하시는 것으로 제자들이 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연속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후 베드로 설교에서도(12-13) “그 이름 믿음으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맺을 절망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기뻐 뛰게 할 인생의 참된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돈, 명예, 권세, 향락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영생의 문제, 근심, 괴로움, 질병, 고통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유대에 계시던 역사속의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계시어 하나님 보좌에서 기도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그 이름으로 문제 해결 받고 가정과 교회가 복을 받고 나라와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복된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성령 충만의 역사입니다. (7절)
태어나면서부터 40여세 되도록 일어서지 못했으니 아예 포기했고 다른 사람의 신세지는 일에 익숙했던 자에게 “일어나라고 손을 잡고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걸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기분이나 재주나 힘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여러 기적과 표적을 이룬 것 중에 한 예로 들었던 것이기에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가서 성령을 보내리라고(요14:16-17) 하셨고 또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으니 사모하는 심령으로 전혀 기도에 힘쓴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고 충만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니 이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고 고통과 절망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성령 충만 받아 그 능력으로 될 수 있습니다.(슥4:6-7) 예수님 3번 부인한 베드로 사도가 변화되어 담대한 복음 증거자 되게 한 것은 성령 충만 받은 연고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하겠기에 성령 충만 받아야 합니다.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난 나라 찾기 운동에 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때에 천도교는 300만 명이나 되었으나 기독교인이 삼십만 밖에 되지 아니했음에도 이렇게 주도적 역할 한 것은 1907년에 평양 대 부흥운동으로 성령 충만 받은 연고였습니다. 날짜가 3월 1일로 정한 것도 고종황제 장례식 맞추기도 하고 3월 3일 했으나 예의상 못하고 3월 2일 주일이라 못한다고 하여 3월 1일 한 것이니 3.1운동은 기독교 운동이었고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주도적인 역할이었으니 성령 충만하여 일어나 걸으라 하신 역사 이루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3. 믿음으로 일어난 표적입니다. (4-10절)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우리를 보라”하신 것은 소망과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요,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고자 기대하는 것으로 바라보았으나 바라보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줄줄 믿고 본 것입니다. 또 16절에 “그 이름을 믿음으로”한 것을 볼 때에 환자도 믿음으로 기도하시는 분도 믿음으로 일어난 표적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에 중 많은 환자 치유하셨는데 직권으로 고쳐주신 것이 20%이며 80%는 환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보는 순간에 믿음이 왔고 믿게 하려고 우리를 보라 하셨고 일으켜 세울 때 40년 동안 일어서지 못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설려고 한 것은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도 믿음으로 일어나 걸어가는 삶에 역사 이루기 원합니다. “할 수 있거든 고쳐달라는 것을 책망하시며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막9:23) 하신 주님이 믿음으로 영생, 승리, 평강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나면서 40여세 되도록 일어서 보지 못하였고 구걸하며 다른 사람이 메어가지고야 움직일 수 있는 앉은뱅이가 영적으로 볼 때 내 모습은 아닌가요? 이제는 일어나 걸으라 하시던 말씀대로 일어나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세상 것으로 불가능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능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사신 주님이시니 그 주님과 더불어 있을 때 우리의 모든 영육간 문제 해결 받습니다. 성령의 역사인 것이니 성령 충만 받아 이 역사 이루며 이것은 믿음으로 일어난 표적입니다. 우리 삶에 이러한 역사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