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샘으로 돌아오는 늙은이는
영원한 날들로 들어가며 변화하는 날들에서 나온다;
젊은이의 눈에서는 불꽃이 보이지만
늙은이의 눈에서는 빛이 보인다.
< 빅토르 위고의 '잠든 부즈' 중에서 > -
좋다. 참 좋다.
투르니에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도대체 '나'처럼 재미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내면 일기가 아닌,
'나'의 밖에서 일어나고 변화하는 '외면 일기'를 쓴다고 했다.
사실 위의 말씀은 알쏭달쏭..... 알겠다가도 모르겠다.
이제 80세가 된 투르니에의 일기 곳곳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한 발은 죽음에 담그고,
그러므로 더욱 아름답고 애틋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세상을,
특유의 대비적 사고와 쌍을 이루는 인식의 시선으로 풍요롭게 표현한다.
이때껏 읽어왔던 투르니에의 소설이나 독서 감상문의 경우와는 다른,
청춘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시는 매력적인 할아버지의 때로는 깊은,
때로는 유머스러운, 때로는 통찰의 이야기를 듣는 듯.....
온갖 매력이 이 책 속에 담겨있다.
나는 투르니에를 아주 잘 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내가 김원일이나 박상륭, 이제하, 최인훈 등등의 작품을 거의 모두 읽었다고 해서 그들이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마음은 존경을 함뿍 담은 공감대이리라.
번역을 한 김화영은, <짧은 글 긴 침묵>의 번역 후 투르니에를 만나고,
이번에 또 그를 만나서
투르니에의 집인 사제관 그의 모습 사진들, 그리고 나누었던 대화를 뒷부분에 상당량 실어놓았다.
읽고 놀랐다.
한국의 여성 작가 중 누군가가 벌써 투르니에에게 자신의 사진과 더불어 편지를 보냈고,
투르니에의 답장과 사인이 들어있는 그의 사진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투르니에는 그 여성의 사진을 거실 벽에 붙여놓고 있다 한다.
누굴까. 부럽다.
어쨌든, 김화영은 주름살이 온 얼굴에 가득한 청년의 목소리를 지닌 투르니에와의 두시간 넘는 대화를 한 후에,
기차역으로 와서 그동안 참았던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을 찾는다.
- 이 환한 봄날에 세계적인 작가를 만나고나서 남은 제일 큰 고민이 소변이라니.
인간은 겨우 그런 존재다. -
김화영의 상반되면서도 당연한 이 느낌은,
투르니에의 외면 일기 속에 여러 가지 일화와 관찰로써 심화되어 나타난다.
1월부터 12월까지 총 12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계절의 변화, 날씨의 변화, 생각의 변화, 상황의 변화.....
다정 다감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예리함을 지닌 투르니에의 글을 이제부터 몇 가지만 간추려 소개하겠다.
짧게 되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신 분은 다음 번 시간이 충분하실 때 천천히 읽어보시면 마음이 따사로워지는 미소가 절로 반짝반짝 피어오르실 것이다.
*(우연찮게도 며칠 전 FM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멘트를 들은 적 있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 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 (망원경과 자신의 얼굴에 대한 글)
그 물건을 동행한 사람에게 잠시 빌려주면 그때마다 그는 두 망원경 사이의 거리를 일단 밀어서 좁힌 다음 사용한다는 점이다.
거기서 나는 내 두 눈 사이의 거리가 예외적일 만큼 많이 벌어졌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내가 미남이 못 되는 이유 중의 일부는 바로 이 동물적인 특징에서 오는 것 같다.
* 내가 M.L의 집에 들어서자 그 집 개가 내게로 달려 나와 짖어댄다.
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 M.L이 말한다.
"뭘 그렇게 겁을 내?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걸 자네도 잘 알쟎아. "
내 대답; " 나야 알지. 하지만 개도 그걸 알까? "
* 렌즈의 조리개 열기.
조리개를 적게 열수록 장면의 깊이가 깊어진다.
* 선천성 농맹아들은 사춘기를 넘겨 사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귀먹고 동시에 눈도 멀다니!
.....
시청각 정보들이 완전히 결핍된 그들의 두뇌는 신체조직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위축되는 것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이는 그의 절대적인 어둠,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결국 심심해서 죽는 것이다.
* " 한쪽 발을 무덤 속에 담고 있다. "
는 것은,
병들어 아프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을 땅 속에 묻었다는 뜻이겠다.
* 그는 철저한 채식주의자다.
그는 내 접시에 담긴 비프스테이크를 끔찍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말한다.
" 당신은 상처를 먹는군요. "
* 건조하고 해가 밝게 비치는 추위.
정원은 설계도처럼 분명하고 움직임이 없다.
*(빅토르 위고에 대한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 순 없을 것)
빅토르 위고는 "음악은 생각하는 잡음이다"라고 말했다.
번뜩이는 천재와 완전한 어리석음이 한데 섞인 이 말은 과연 빅토르 위고다운 표현이다.
.....
어떤 사람이 빅토르 위고는 멍청하다고 말하자 트 콩트 드 릴르는 이렇게 고쳐 말했다는 것이다.
" 맞아요. 멍청하죠. 하지만 히말라야처럼 멍청하죠. "
* (마르크 소리아노 교수의 임종 전 전화)
" 자네에게 말을 놓겠네. 이게 마지막인 것 같아서. 나는 죽어가고 있어.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죽어가고 있으니까. "
(프루스트와의 설문대답)
" 당신의 행복한 이상은?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천재적인 아이를 키우는 것.
어떤 분야에서건 빛나는 재능들이 싹트는 것을 보고 그 재능이 피어나도록 돕는 것.
동일한 존재 속에 부드러움과 찬미가 합쳐지도록 하는 것. "
* (갈리마르와의 조크)
" 여보게, 출판사 사장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한국의 격언을 늘 명심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네. (이건 물론 이 경우에 써먹기 위하여 내가 즉석에서 지어낸 것이다. );
작은 배신이 큰 결혼을 낳는다. "
* 발레리 라르보는 만년 20년 동안 실어증 환자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 인생의 구차한 일들이여 안녕하신가! "
라는 다섯 마디밖에는 할 줄 몰랐다고 한다.
* 밖으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얼굴은 거짓말을 한다.
다른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의복 속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덩어리인 몸은 빙산의 잠겨있는 부분이다.
그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너무 부럽고 질투 생기는..... 꿈같은 이야기)
어떤 여교사가 내게 자신이 지도하는 어떤 학생의 학사카드를 보내왔다.
<장래 희망>란에 학생이 이렇게 적은 카드였다.
" 나는 장차 작가가 되어 콩쿠르 상 심사위원회의 회원이 되겠다. "
나는 그 카드를 가지고 우리가 매번 모이는 드루앙 식당으로 갔다.
그리하여 우리 회원들은 메뉴 종이에 이렇게 적은 다음 그 학생에게로 보냈다.
" 어서 작품을 한 편 써라. 우리는 갈리옹 광장에 있는 식당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
물론 거기에는 아카데미 콩쿠르 회원 열 명이 돌아가며 서명을 했다.
* (사강에 대한 지적)
소설가 프랑수와즈 사강은 (마들렌 샵살이 쓴 책 <음악을 보내주세요>에 의하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나이를 먹어 늙게 되면 돈을 주고 젊은 남자들을 사서 나를 사랑하게 할 생각이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가장 생생하고 가장 온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값이야 얼마든 상관없다. "
그녀는 아마도 사랑은 돈을 주고 사게 되면 물론 특이한 맛, 즉 다소 씁쓸한 맛이 나겠지만
매매행위로 인하여 욕망이 단순화되고 빈약해진 나머지 다른 것으로는 바꿀 수 없는 맛이 나게 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45년간 한 곳에서 살고 있는 투르니에)
나의 과도하고 절대적이며 타개책이 없는 정착의 버릇.....
* (투르니에의 고등 유머)
어떤 사람들- 특히 작가들
(어네스트 헤밍웨이, 로맹 가리)- 은 성적으로 불능이 되었다고 느낀 나머지 자살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 앞에서 오직 개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
그런데 오늘날에는 비아그라라고 하는 환약이 발명되어 그만 그런 비극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한심하도다, 한심해, 한심하도다!
* 파우스트는 늙어가면서 자신이 세상 만사 모르는 것이 없지만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와 파우스트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백과사전 못지않은 지식을 갖춘 결과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은 다 쓸데없는 잡동사니 지식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친구들처럼 술을 마시고 여자들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을 얻어낸다는 점이다.
내가 볼 때 지식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답고 심오한 것이다.
철학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빛이 있고 수학에는 온갖 절묘한 감칠맛이 있으며 여러 가지 과학에는 전광석화와도 같은 효율성의 열쇠가 담겨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 무엇보다도 문학과 예술에는 장엄하고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풍요로움을 획득하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아, 그 무슨 마술지팡이로 탁 건드려 다시 열 살 먹은 어린이로 돌아가서 지금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다 알고 모든 것을 다시 하고 더 보람 있게, 더 강하게, 요컨대 완전하게 산다면.
그 어떤 완전한 삶을 영위한다면.
* 내 주소록의 명단은 450여 건.
이십 년 동안에 그 중 삼분의 일이 사망했다.
* 우리 마을 정육점 주인;
투르니에 씨, 나처럼 진짜 당신을 잘 아는 처지라면 당신이 쓴 책 같은 것은 안 읽어도 되는 거죠. 안 그래요?
* (찡하다.....)
주여, 엄청난 사랑이 찾아와서 저의 삶을 비추어 뒤죽박죽 만들어놓도록 해주소서!
* 이상한 악몽을 꾸었다.
나의 이웃은 미켈란젤로, 베토벤, 반 고흐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천재적이지만 어렵고 불행하고 까다롭고, 또 당연히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한의 헌신을 요구하는 그런 인물들을 일부러 이웃으로 택하는 것이다.
* 나는 망령든 영감이다-
하기야 정말 망령이 들었다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는 않을 테지.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망령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뿐이지 뭐.
* 소설 한 권을 쓰려고 고심하면서 나는 내 두뇌를 개처럼 부린다.
* (가슴 울렁이는 감동)
오늘 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옛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선생의 부르고뉴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곤 하는 어떤 바보녀석 때문에 자꾸 끊어지곤 한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서 이런 안내의 말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1949년 가스통 바슐라르와 미셸 투르니에가 주고받은 대담을 녹음한 INA 자료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
* (마지막 보너스로 제일 웃겼던 이야기^^ 내 맘대로 각색했당~)
아를르에 사는 잔느 칼르망이라는 할머니는 인류의 장로격인 분으로 123년이나 사셨다.
사람들이 물어본다.
무슨 섭생을 어떻게 취했냐고...
할머니 말씀 ;
" 오래 살기 위해서는 분별있게 살아야지. 그래서 나는 114살 때 담배와 술을 끊었다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