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날아오른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 애국지사 권기옥의 묘비명이다.
“나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
굳은 의지로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간 권기옥(權基玉,1901.1.11~1988.4.19) 애국지사는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당찬 여장부다.

권기옥은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7년 5월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의 곡예 비행사인 아트 스미스(A. Smith)의 곡예비행이 있었다.
귄기옥은 그 곡예비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비행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1918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권기옥은 박현숙 선생님의 권유로 비밀 항일조직인 '송죽결사대'에 가입한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앞두고 권기옥은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서 비밀리에 운반하는 일을 한다.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죄로 권기옥은 체포되어 3주간 구류를 살게 된다.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시절 3.1운동 참여와 비밀활동으로 멸치 배를 타고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두 군데 항공학교에서 여자라고 입학을 거절당하자 그녀는 임시정부의 추천서를 품고
직접 멀고먼 운남으로 향한다. 1923년 12월 하순 운남에 도착한 권기옥은 성장(省長)인 당계요를 찾아가서
직접 담판을 지어서 입학을 허가받는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성장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국만리를 찾아온 조선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해준 것이다.
마침내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여 자랑스러운 윙 배지를 달게 된다.

1928년 2월 중국의 손정방 군벌(軍閥)로부터 공군 비행기를 접수하러 갈 때 사진이다.
빨간 원 안에 중절모를 쓰고 남장을 한 이가 우리나라 첫 여성비행사 권기옥이다.
"조선 총독부를 폭파할 테니 비행기를 사달라!"
1925년 5월 상해로 돌아간 권기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요청한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 사정이 좋지 않았다.1925년 가을 광동의 국민혁명정부에 가담했다.
1926년 봄 의열단의 배후 실력자인 손두환의 소개로 북경에 있는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군(馮玉祥軍)의 항공대에 들어갔다.
1926년 4월 권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임명된다.
그 무렵 남원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인 서왈보의 소개로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시인 이상화의형)을 만나게 되고
훗날 그와 결혼하여 함께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1935년은 비행사로서 권기옥이 꿈에 한껏 부풀던 해였다.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 부인이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청년들이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자
고심 끝에 여류비행사의 선전비행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까지 날아가는 화북선, 화남선,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일본까지 날아가는 남양선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상해에서 선전비행의 연습과 실무가 착착 진행되었다.
권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을 일본 폭격으로 장식하겠는 뜻을
세우고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에서 대학생 시위가 확산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전비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권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 일본으로 기수를 돌려 황거를 폭격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의 대학생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전비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이룰 절호의 기회가 산산 조각나 버린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중경으로 이동하여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했다.

중경에서 재건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 한 권기옥(오른 쪽에서 두번째)이다.
1939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오자 권기옥은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1943년에는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직할로 김순애·방순이·최선화·최애림·최형록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사교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여름 권기옥은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던최용덕, 손기종 비행사 등과 함께 한국 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1945년 3월에임시정부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중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이 그 결실이었다.
미국과 중국에서 비행기를 지원받아서 한국인 비행사들이 직접 전투에참여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하여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권기옥은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자 1949년 귀국해서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이 된다.
권기옥은 ‘공군의 어머니’로서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