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 이벽을중심으로 젊은 학자들에 의해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된 천진암이다.
천주교 강학회가 열릴 당시 폐허가 된 버려진 암자로 소개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쓴 시에도 천진암을 가리켜 "절은 파괴되어 옛모습을 볼 수 없구나!"(寺破無舊觀)라고 읊은 구절이 있다.
강학회 이후에도 절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은 홍경모의 남한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원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150여년 전에 절이 완전히 없어져 그 이후로 화전논밭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논밭이 되어버린 천진암터를 1978년에 처음으로 변기영 신부가 매입하면서 본격적인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9년에 경기도 포천군에서 광암 이벽 성조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이장하였고
이후 1981년에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성현 등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한국천주교회창립 선조 5위 묘역이 조성되게 되었다. 5위 성현 묘역은 천진암성지의 지성소로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참배하는 성역이므로, 일체의 오락과 식사가 금지된다.
大韓民族100년계획 天眞菴大聖堂 건립 조감도(1979~2079)
천진암대성당 교황강복 머릿돌
한국천주교발상지
천진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푸느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1993년 9월 21일
교황 요한바울로 2세
1980년 6월 24일 제막한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문 일부를 여기에 옮겨 음미하려고 한다.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과, 세자요한 광암 이벽,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에 관한 역사적인 여러 사실이,
지금까지 여기저기 흩어져서 파묻혀 있었거나 가리워져 있었고, 심지어는 그릇 알려져온 바도 있었다.
이에 우리는 거룩히 빛내야 할 자랑스런 이 역사를 되찾아 캐내어 밝히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묘한 기원사를
간추려서 올바르게 여기 적는다.
천주강생 1779년 기해년 정조 삼년 음력 섣달, 양력으로 1780년 정월 중순경이었다.
지금 이 위에 있는 이벽 성조 묘자리에 있던 천진암에서,학자 권철신이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등과 함께 학문연구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학자 권철신이 강학회를 개최하였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벽 성조께서는 서울에서 일백여리 눈길을 걸으시어
엄동설한에 마재와 항금리를 거쳐,강학회 주최자 권철신이 잠시 거하던 앵자봉 동편아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셨다.
그러나 강학회는 천진암에서 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 밤으로 길을 떠나사 눈으로 덮인 앵자산마루를 넘으시어,
한밤중 늦게서야 천진암에 이르셨고, 학자들을 만나시어 촛불을 밝히시고 경서를 담론하셨다.
빙천수(氷泉水)이다. 한국천주교발상지 천진암성지의 홈페이지에서 '빙천(氷泉)'을 옮겨온다.
천진암 강학회 학자들이 세수하고 아침을 맞이했던 샘으로 심한 추위에도 얼지 않는다.
빙천의 위치는 강학회 장소가 천진암이라는 근거중의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즉, 강학회당시의 기록에서 "새벽이면 일어나 얼음샘에 가서 샘물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였다 "는 氷泉은
氷川과 달라서, 氷川은 겨울에 얼어붙은 개울을 말하나 氷泉은 얼음처럼 찬 샘물을 말하는 것인데,
氷泉이란 샘은 겨울에 얼음이 있어서 생기는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한 여름 무더울 때,
샘물이 얼음처럼 차다고 하여, 사람들이 붙이는 샘물이름이고, 이러한 찬 샘물은 항상 北向계곡에나 있지,
南向이나 東南向계곡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얼음처럼 찬 샘물이 별도로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햇빛을 덜 받는 北向계곡의 지하나 지표상의 지면이 덜 데워져서 물이 비교적 차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그런데 氷泉은 지금도 천진암터에 있고, 한여름에도 손을 넣으면 손이 시리고 저릴 정도로 차서,
조금 있으면 손이 오리발처럼 불그레하게 된다.
그런데 한 여름 무더위에도 찬 이러한 물은, 한겨울 추위 때는 김이 무럭무럭 날 정도로 물이 덜 차고,
때로는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천진암 강학회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그 추위에 학자들이 氷泉에 가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였다는 것은 그泉水가 가장 얼지 않았고,
덜 차갑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도 아무리 추워도 서울이 영하 25도가 되어도 현 천진암의 빙천수는 얼지 않는다.
이 성지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성업을 이룬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등 한국 천주교회창립선조 5위 묘가
천진암 터에 모셔져 있다.
천진암 계곡은 예나 지금이나 봄이면 원앙새들의 집단 산란처라서 일명 원앙산이라고도 하고,
여름이면 꾀꼬리들의 서식처로 앵자산이라고도 한다.
사찰은 유일하게 천진암뿐으로, 마재 앞 소내 건너 두미에 있던 이벽 성조의 저택에서 보이는 30여리 거리로
다산 정약용 형제들이 자주 가던 곳이다.
“천진암에는 이벽의 독서처(讀書處)가 아직도 저기 그저 있는데, 원공이 깃들이던 발자취 아득하여 다시 찾기 어렵네!
풍류문채는 모름지기 신령한 경지라야지, 그 시절 생각하며 한나절내 술 마시며 시를 짓노라!”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桮半日吟).
다산 정약용이 36세 되던 1797(丁巳)년 왕궁 현직에서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詩)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 에서 천진암 이벽의 독서처를 설명하고 있다.
심산궁곡의 독서처는 선비들의 소박하고 검소한 작은 처소로서, 주로 혼자서 3년 독서,
7년 독서 하는 면학 강마(勉學講磨)의 도장(道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