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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선전
■ 해제
작자, 창작연대 미상의 조선 시대 때의 계모형 소설로, 계모의 학대 속에서 고난을 겪는 유추연과 정을선의 파란만장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지리적인 배경은 한국이지만 시대 ·관직명 ·지명 등이 중국과 혼동되어 전체적인 통일성이 없다. 경상좌도 계림부(鷄林府)에 사는 정재상의 만득자(晩得子) 을선과 익주(翼州) 출생으로 계모의 학대 속에 자라난 유상서(兪尙書)의 딸 추연(秋年)과의 파란 많은 애정을 그리고 있다.
여인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빚어지는 비극을 묘사한 가정소설인데, 초반에는 계모의 학대를 그렸고, 후반에는 일부다처의 생활에서 파생되는 비극(유 ·조 두 부인의 쟁총(爭寵))을 다루고 있다.
■ 줄거리
명나라 가정연간(嘉靖年間) 경상좌도 계림부 자산촌에 정진희라는 재상과 부인 양씨가 혈육이 없어 근심하던 중 을선이라는 아들을 낳으니, 용모와 재질이 뛰어났다. 한편, 익주땅에 유한경이라는 재상이 노씨라는 후처와 딸 추연을 데리고 살았는데, 유 재상의 회갑 때 정 재상을 따라 놀러갔던 을선이 그네 뛰는 추연을 보고는 집에 돌아와 상사병이 든다.
이 사정을 안 정 재상이 청혼하니 유공 또한 기뻐하여 혼약하고, 을선은 과거에 나아가 장원 급제한다. 추연과 을선이 첫날밤을 맞게 되자 계모 노씨가 이를 시기한 나머지 자기의 사촌 오빠를 시켜 추연과 정을 통한 남자인 것처럼 꾸며 두 사람 앞에 나타나게 한다. 이에 을선은 추연을 의심하고는 그 날 밤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너무나 놀란 추연이 변명도 못한 채 울다가 죽으니, 근처에 가는 사람이 모두 죽고, 추연의 혼령이 나타나 울면 그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이 모두 죽었다. 유 재상 또한 죽고 그 마을은 폐촌이 되고, 오직 추연의 유모만이 남아 있었다. 익주가 폐촌이 되었다는 상소를 받은 상이 순무어사로 을선을 보내고, 을선이 유모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그제서야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다.
을선은 추연의 혼령이 시키는 대로 금성산에 가서 신기한 구슬을 얻어와 방 안에 있는 추연의 시신에 놓아 추연을 회생시킨다.
을선이 추연을 충렬부인으로 봉하고 아내로 삼으니, 을선과 먼저 혼인하였던 초왕의 딸 조부인(정렬부인)이 이를 시기한다. 을선이 출정한 사이에 조 부인이 남장한 시비를 보내어 추연을 오해받게 하니, 시어머니가 이를 알고 크게 노하여 추연을 죽이려 한다.
종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추연은 지함에서 혼자 아들을 낳고 죽기 직전에 이른다. 을선이 이 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돌아와 진상을 밝혀 내고, 조 부인을 죽인다. 그리고 추연과 아들을 구하여, 이후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고 부부가 같은 날 같은 때에 죽는다.
▶주제 : 계모의 학대와 처첩 간의 갈등
[지문 일부분]
홀연히 익주 자사 장계(狀啓)하였으되,
‘익주 일도(一道)에 흉년이 자심(滋甚)하고 또 이상한 일이 있어 유 승상의 여아 청춘에 요사(夭死)하매 그 원혼이 흩어지지 아니하여 그 곡성을 사람이 들으면 곧 죽으며 겸하여 백성이 화하여 도적이 되오니 복원(伏願) 폐하는 어진 신하를 보내어 안무(按撫)하심을 바라나이다.’ / 하였더라. ▶유소저의 폐허가 된 익주
상이 장계를 보시고 근심하여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으시고 익주 진무(鎭撫)함을 의논하시니 좌승상 정을선이 나서며 아뢰되,
“신이 무재(無才)하오나 익주를 진무하리이다.”
상이 크게 기뻐하시며 을선에 순무어사를 제수하시어 인검(印劍)과 절월(節鉞)을 주시고 가로되,
“익주를 빨리 진무하고 돌아와 짐의 바람을 잊지 말라.” ▶익주 순무어사가 된 정을선
하시니, 어사 하직하고 부중에 돌아와 왕비와 정렬 부인께 하직을 고하고 역졸을 거느려 여러 날 만에 익주에 득달하여 옛일을 생각하고 유승상 부중에 이르니 인적이 끊이고 그리 장려(壯麗)하던 누각이 빈 터만 남았고 다만 일간 초옥이 수풀 속에 있을 뿐이요, 다른 인가 없으니 물을 곳이 없는지라. 두루 방황하더니 수풀 속에 사람 자취 있거늘 배회하여 사람을 기다리더니 인적이 다시 없어지고 일색이 서산에 지는지라. 갈 바를 몰라 주저하더니 멀리 바라보니 산꼭대기에 연기 나거늘 인하여 찾아가니 다만 일간 초옥이라. 주인을 찾으니 한 노파 나와 물어 가로되,
“귀댁이 어디 계시기에 누구를 찾아 이 심산에서 방황하시나이까?”
어사 답하여 가로되,
“유승상의 집을 찾아가더니 길을 잘못 들어 이에 왔으니,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노라.”
할미 답하여 가로되,
“유하시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오되, 양식이 없으니 어찌하리요.”
▶익주에 다다라 한 노파를 만나게 된 정을선
하고 죽을 드리거늘 어사 하저(下箸)하고 노고(老姑)와 같이 앉아 이윽히 담화하더니 문득 철천(徹天)한 곡성이 나면서 점점 가까이 오니 그 할미 일어나며 울거늘, 어사 이상히 여겨 보니 홀연히 공중에서 한 여자 울며 내려와 할미를 책하여 가로되, / “어미를 보러 왔더니 어찌 잡인을 들이느냐. 외인이 있으니 들어가지 못하노라.”
▶철천한 곡성과 함께 나타난 원혼
하고 애연히 울며 돌아가니 그 노고의 부처(夫妻) 또 울며 들어오거늘 어사 괴이히 여겨 물어 가로되,
“어떤 사람이관대 깊은 밤에 울고 다니느냐?”
주인 노고 울기를 그치고 답하여 가로되,
“노고의 딸이로소이다.”
어사 가로되,
“주인의 딸이면 무슨 일로 울고 다니느냐?”
노고 답하여 가로되,
“상공이 이렇듯 물으시니 강고하리이다. 우리 상전은 유 승상이시니 승상 노야(老爺) 황성에서 벼슬하시더니 천자께 득죄하고 이곳에 오신 후 정실부인 최씨 다만 일녀를 낳으시고 삼일 만에 기세(棄世)하시니 노야 후실 노씨를 얻으시매 노씨 불인(不仁)하여 소저를 죽이려 하여 죽에 약을 넣어 주니 천지신명이 도우시어 홀연 바람이 일어나 죽에 티끌이 들어가 인하여 먹지 아니하고 개를 주니 그 개 먹고 즉시 죽거늘, 그 후는 놀라 밥을 제 집에서 수건에 싸다가 연명하였으며, 길례(吉禮)날 밤에 노씨 제 사촌 노태를 금은을 주고 달래어 칼을 가지고 와 장난하니 정시랑이 그 거동을 보고 의심하여 밤에 돌아갔으며 그 후 소저 분원(忿怨)하여 자처(自處)하매 염습코자 하였사오나 사사운 기운이 사람을 침노하니 인하여 빈소에 가까이 가지 못하였더니 그 후에 소저의 원혼이 공중에서 울 때 동네 사람들이 그 곡성을 들으면 병들어 죽으니 견디지 못하여 집을 떠나 타처로 거접(居接)하되 우리 양인은 관계치 않기로 이곳에 있사온즉 소저 밤마다 울고 오나이다.”
하고 인하여 혈서 쓴 적삼을 내어 놓으니 어사 받아 봄에 놀라고 목이 떨려 방성대곡하다가 이윽고 진정하여 주인에게 가로되,
“내 과연 정시랑이니 사세 여차한즉 어찌하리요. 내 불명하여 여자의 원을 끼치니 후일에 반드시 앙화(殃禍)를 받으리로다.”
유모 부처 이 말을 듣고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붙들고 방성대곡하며 가로되,
“시랑 노야 어찌 이곳에 오시나이까?”
어사 또한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과연 모년 월일에 나의 부친을 모시고 유 승상 집에 내려왔을 때 후원에서 화초를 구경하다가 추천(鞦韆)하는 소저를 보고 올라와 병이 되어 사경에 이르렀으니 부친이 근뇌하시어 유 승상께 통혼하였더니 승상이 허혼하기로 살아난 말이며, 천자 사혼하시되 듣지 아니하고 성례하러 내려와 신혼 초일에 흉한 한 놈이 칼을 들고 여차여차함에 그 밤으로 올라가니라.”
하고 조왕의 사위된 말과 옛일을 생각하고 찾아온 말을 자세히 일러 통곡하니 주객이 슬퍼함을 마지아니하더라.
* 장계(狀啓) :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 절월(節鉞) : 조선 시대 지방에 관리가 부임할 때 왕이 내주던 절과 부월. 절은 수기와 같고 부월은 도끼같이 만든 것으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함.
* 하저(下箸) : 젓가락을 댄다는 뜻으로, 음식을 먹음을 이르는 말.
* 노고(老姑) : 할머니. 노파(老婆)
* 기세(棄世) : 세상을 버린다는 뜻으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이르는 말.
* 자처(自處) : 자결(自決).
* 거접(居接) : 잠시 몸을 의탁하여 거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