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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1. 10
박근혜는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박정희가 아닐까? 하지만 무소불위의 독재체제는 죽었다. 1979년이 아니라 정확히 1987년에. 그렇다면 79년부터 87년은 애도기간이 아니었었을까? 80년의 광주항쟁은 우리가 무엇을 애도해야하는지를 제시한 사건이었으리라. 80년부터 87년 동안 우리가 곡처럼 불렀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표면상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다. 나는 그것이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에 저당잡힌 우리의 자유, 그 인간적 존엄의 근본조건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유는 세 가지 방식으로 전유되었다. 누구나 광주의 계승을 외쳤지만 항쟁의 본연은 단연 인간으로서 존재할 자유의 요구였다. 물론 이 인간은 벌거벗은 생명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자신의 삶과 세계를 선택하고 창조할 자유이다. 그것이 진정한 정치적 자유이다. 광주는 왜 인간이 정치적인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편... 항쟁은 자유민주주의적 자유 혹은 시민적 자유로 전유되었다. 그것은 항쟁과 "잘 살아보세"의 노예의지와의 타협이었다. 이렇게 항쟁이 양보된 공간에서 또 다른 자유가 목소리를 가질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축적체제를 요구하는 자본의 자유였다.
소위 87년체제는 시민적 자유와 자본의 자유가 결탁하여 인간으로서 존재할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일 것이다. 90년대 초반 삼저호황과 함께 전개된 경제적 풍요와 함께 다양한 문화적 금기들이 무너지며 우리는 바야흐로 무한 자유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과정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소비주체로 훈육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소비주체의 핵심적인 특징은 "경제"라는 단어 앞에서 부동자세를 취한다는 점일 것이다. 박정희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은 우리가 80년의 항쟁이 제시한 애도의 과제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지난 토요일의 촛불집회에서도 이 정부가 경제 상황의 현상만 유지했더라도 박-최게이트가 터질 수 있었을까를 자꾸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시민들이 든 촛불이 상징하는 희망의 빛이나 서울의 중심을 뒤흔드는 함성소리보다도, 요란스러운 자본의 이미지들을 발산하면서 광화문에서 덕수궁까지 모인 시민들을 조명하는 고층빌딩 전광판에 자꾸만 불안한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는반복한다 .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희극적 결말은 되돌아온 박정희 귀신을 영원히 죽음 속에 유폐시키는 행위를 통해 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는 단순한 정권교체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자유의 요구이어야 할 것이다.
11. 11
2년간 해오던 번역도 마치고, 미술작가들과 10년간 꾸준히 해오던 정신분석세미나를 끝내면서 페이스북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가상공간에서 떠돌게 될 나의 상상적 이미지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성정이 게을러 그런 이미지라도 구축해낼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함 해보지 뭐. 성가시면 집어치우고. 그런 심정이다.
요즈음에는 묵시문학에서 영지주의가 파생되는 이행의 지점에 관심이 많다. 최근 우연히 읽은 우엘벡의 <소립자>는 이런 관심에 기름을 부어주었다. 68혁명의 전방위적 저항이 인간의 물질성에 대한 염오로 이어지는 과정은 매우 기이해 보이지만 그 기이한 이행에 인간이해를 위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는 생각이다.
묵시문학에서 영지주의로의 이행에도 유사한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70년 사이에 유대지역의 지식인들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제국에 저항하는 강력한 투쟁의 문학적 산물이다. 묵시문학은... 후기로 갈수록 이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절망의 파토스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이 세계의 물질성 자체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영지주의 운동이 파생한다. 이 영지주의 운동이 오늘날 68이후 전개된 뉴에이지운동의 원천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사복음서가 예수의 선배쯤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세례 요한이 묵시문학운동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선배이자 스승인 세례 요한과 분명한 선을 긋는다. 복음서는 그것이 메시야적 지위를 확인하는 제스처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은 분명 노선의 차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운동에서 예수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대체 예수는 어느 지점에서 그 흐름을 잘라낸 것일까?
11. 16.
최근 페북에서 지젝이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해서 ‘이제 지젝의 책을 던져버려야 하는가?’라고 자문하는 글을 보았다. 나는 ‘읽지도 않은 책을 던져버리기에는 아깝지 않을까?’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젝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소위 ‘진보’라고 알려진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예각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쯤은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젝이 트럼프 지지선언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미국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트럼프’라고 답했을 뿐이다. 그가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 것은 그를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힐러리보다는 트럼프가 변화의 공간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비록 당장에는 ‘악화’로 나타날지라도 말이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글로벌 경제체제를 주도하는 금융자본이 어떻게 몰락한 남부 백인 농...부 형제들로 하여금 은행털이로 나서게 만드는지를 말이다. 그들의 절망적인 강도행각은 정확히 포퓰리즘에서 드러나는 ‘정치적인 것’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것은 대중들의 ‘아니오’이다.
정치가들이나 그들을 보필하는 학자들 전문가들, 나아가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착각하면서 스스로 지각 있는 (소위 ‘민주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중간계층들(사실은 그들 역시 대중이다)이 ‘뭣이 중헌지’ 떠들어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이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힐러리는 이 ‘아닌’ 세계를 안정화시킬 인물이었다. 미 공화당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트럼프야말로 그 안정된 (실질적인) 무질서에 작은 균열이나마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의 기층을 이루는 민중들은 바로 그 텅 빈 공간을 향해 선택한 것이다.
대중들의 ‘아니오’는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갖지 않는다. 그래서 그 공간 속에서는 인종주의를 비롯해 여성폄하, 고립주의, 성공신화, 막연한 공격성 등 온갖 잡쓰레기들이 어떤 일관된 논리도 지니지 못한 채 혼재한다.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은 그와 같은 잡쓰레기들이 어떻게 대중들의 분노를 표현하는 기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인 것’ 즉 자신들이 어떤 세계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세계는 아니라는 거절의 제스처를 정치의 장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이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입으로는 변화를 외치지만 사실 진정한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변화가 악화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악화’는 현실이 그 실상을 가리던 옷을 벗은 것일 뿐이다. 지난 대선 후 나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에 애통해하는 교인들을 위로해야 했다. “걱정 마시오. 박대통령이 잘 해줄 것이오.” 작금의 사태가 비선이 문제이며, 청와대가 그 자체로 도둑들의 산채이고, 집권당이 그들의 비호세력인 것이 문제인가? 이 사건으로 국격이 떨어졌다고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 그 ‘격’이라는 것이 타자와의 상상적인 비교 속에서 높다 싶으면 비굴해지고 낮다 싶으면 적당히 깔아뭉개는 저열한 판단의 기준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을 유지하는 제도적 체제의 실상이다. 이 세련된 제도의 민낯을 전 국민이 이해할 수 있게 막장드라마로 조근조근 연출해낸 것이야말로 박근혜의 업적이다.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11. 21
어제 저녁 무렵 청담대교를 건너면서 멀리 롯데빌딩을 보았다. 완공된 모습은 처음이었다. 스모그가 깔린 저녁 강가에 괴괴하게 솟은 건물은 먼저 바벨탑을 연상시켰다. 그러고 보니 건물 상단은 정말 브뤼겔이 그린 바벨탑의 형상과 유사한 것도 같다.
하지만 연상은 곧 리들리 스코트의 영화 <2019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400층짜리 타이렐 빌딩으로 이어졌다. 영화 속 거리 풍경은 영화가 제작되던 당시(1982) 로스엔젤래스의 뒷골목 풍경과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지저분해졌다. 달라진 것은 다만 타이렐 빌딩이 도시 전체를 압도하듯 솟아난 것뿐이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는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당선으로 새로운 자본축적 체제가 전 세계적으로 현실화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니까 영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40년 가까이 진행된 이후의 세계를 상상한 것이었다.
그 세계는 디스토피아다. 영화 속의 로스엔젤래스 거리 풍경은 극단적인 빈부격...차, 인간 이하의 생존에 내몰린 대중의 삶을 시각화하고 있다. 타이렐 빌딩은 그 자체로 절대 권력이 된 자본을 상징한다. 지저분해진 거리에 넘쳐나는 다양한 인종의 가난한 사람들, 노숙자들, 끔찍한 기형의 인간들은 노동 이주가 단순히 노동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아니라 임금을 최저수준에 묶어두는 자본의 자유에 더 가까운 것임을 간파하고 있다. 영화 속 세계의 밤거리를 조명하는 거대한 디스플레이 장치들은 자신의 삶의 진실을 현실이 아니라 그 너머 어딘가의 모호한 장소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 냉소적인 욕망을 전시하고 있다.
나는 청담대교에서 이 풍경에 가까워진 세계를 보았다. 우리의 세계를 절망과 허무 그리고 냉소의 디스토피아로 끌고 온 그 흐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흐름을 중지시켜야 한다. 끊어내야 한다. 검찰의 기소로 박근혜는 사실 상 끝났다. 박근혜에게 남은 카드는 청와대 농성투쟁 뿐이다. 탄핵과정을 통해 대중들에게 열려질 새로운 정치적 공간은 바로 이와 같은 물음들에 우리 스스로 답을 구하는 장소여야 할 것이다.
11. 23.
새로운 정치적 공간은 어떻게 열릴 것인가?
단초는 촛불이 자기애 혹은 자기 정당성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촛불시위는 우리의 자기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자축의 장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위대하고 촛불을 든 시민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 아닌가?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게 나라냐?”는 구호 속의 그 나라, 전 세계의 가십거리가 된 그 나라의 국민이다. 그 삼류국가는 박근혜의 나라가 아니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다. 촛불시위 현장에서 늘 울려 퍼지듯,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면, 이 나라의 주인이 위대하고 정정당당한 국민이라면, 우리가 손가락질하는 저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났다는 것인가?
이 사건이 전 국민적 분노로 확산되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화여대 학생들의 집요하고 고달픈 투쟁은 도화선일 뿐이었다. 어디서 터졌을까? JTBC의 폭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노가 폭발한 시점은 그 이전, 이화여대에... 부정입학한 최씨의 딸 정유라가 트위터에 썼다는 발언, “부모의 돈도 실력”이라는 발언이 SNS에서 유포되기 시작한 때였다. JTBC의 폭로는 이 분노에 공식성을 부여한 계기였을 뿐이다.
왜 “부모의 돈도 실력”이라는 발언이 전 국민적인 분노를 격발시켰을까?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그것이 우리 모두 신봉해마지 않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 국민적 분노에는 물신주의적인 것이 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으로 하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모의 돈도 실력’이라고 깊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자족적인 정당성을 위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겠다.” 분노는 우리가 ‘부모의 돈도 실력’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적응하고 성공하려 애쓰고 있는 이 사회의 근본원리라는 사실, 나아가 우리가 그 원리를 깊이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에 대한 일종의 공격적인 방어이다.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가 가진 돈이 결코 아이의 실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돈을 벌어 우리 아이가 남들의 아이보다 우월한 조건에서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학연, 지연, 혈연 등등의 줄을 대서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경쟁하려 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몸은 초라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뻣뻣해지며, BMW를 굴리는 사람 앞에서는 나긋나긋해진다. 인간은 내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내면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가능하다면 위풍당당한 가격을 알리는 브랜드마크가 두드러지게 표시된 상품을 구매한다.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거세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부모의 돈도 실력”인 이 세계의 질서에, 비록 의식으로는 저항한다할지라도 행위로는 철저히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괴물을 저토록 끔찍한 형상으로 기른 것은 바로 우리가 바친 복종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세의 인정, 바로 우리 자신이 “이게 나라냐?”는 냉소적인 질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박근혜, 최순실은 우리가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구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끔찍한 이면이었다는 부끄러운 사실과 대면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새롭게 열리는 정치적 공간을 진정한 주권자로서, 기성정치의 대권놀음을 넘어. 우리가 선택하고 책임질 새로운 세계와 삶을 꿈꾸는 장소로 만드는 단초이다.
첫댓글 페북을 활용한 본격적인 글쓰기 강행군이 시작되었군요. 필력이 난세를 만나 불꽃처럼 만개하리라 믿습니다.^^
할렐루야~목사님 페북시작에 응원보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저도 열심히 읽고 좋아요 눌러보겠습니다.
좋아요 좋아요 홍야홍야~~
'거세의 인정'의 층위가 세가지 지양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구성의 가장 낮은 층위인 '혈연'적 층위의 지양(일반화)가 '지연'이고, '지연'적 층위의 지양으로서 '학연(지식)'. 문제는 그 '학연'의 층위에 대한 반성, 지양, 일반화로서의 '진리'의 층위에 입각한 거세인정이 이번 시위에서 잘 보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학연'의 층위에 머무르는 '행위'가 주류를 이루는 듯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말했던 '관념'의 힘이 아직 대중을 사로잡고 있지 못한 것인지도, 바디우 식으로 아직 '세계적 차원의 정치(이념)'가 사유, 실험되지 못하고 있는 그 머뭇거림의 실체가 무엇인지... 위기는 심각한데, 사유(행위)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이유가.... 저 '진리'의 층위가 정말로 다시는 대중적으로는 물질화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20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일반화 형식이 출현할 것인지.... 어디에 남은 삶의 에너지를 투여해야할까??? 잠못드는 새벽입니다..
사실 대중들은 늘 관념의 힘에 사로잡혀 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종의 피동적인 선택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일상을 통해 그 관념의 힘을 부지불식간에 재확인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대중도 아니라고 샹각합니다. 문제는 진리-관념이 대중들을 사로잡는 계기겠지요. 사건은 늘 예상할 수 없었던 것으로서 도래합니다. 어떤 관념이든 대중들을 번개불처럼 사로잡는 것 아닐까요? 바디우의 진리 주체처럼 도래할 관념을 선취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그것이 메시야로서 메시아의 도래를 예비하는 신앙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또 여기에 숙면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을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메아리 없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