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자기정체성 찾기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해냄 〭 9500원
나는 가끔 전철에서 맹인들이 동전바구니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나는 그 때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대신 아마 측은한 눈빛 정도를 던져주곤 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러한 가정법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내 자신이 그 때 그들을 측은히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무관심 쪽으로 도망가고 싶어했을 개연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 많은 눈뜬자들 앞에서 눈이 먼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눈이 멀었을까? 내가 눈이 먼다면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가 무심코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이러한 질문들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포르투갈의 국민작가 주제 사라마구의『눈먼 자들의 도시』는 무심코 책을 펼쳐든 나에게 눈이 먼다는 것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절망과 진실의 경이로움에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든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이 땅에 눈 뜨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진정 눈먼 자들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나는 스스로 눈이 먼 채 이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소경이 되었고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한동안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니 눈을 뜨고 세상을 본다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오래동안 나를 통해서 왜곡되었던 세상에게 느끼는 이러한 죄송스러움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미덕이다.
도대체 인간의 선과 악의 경계선은 어디 쯤 있는 것일까?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 본성의 존엄성에 강한 의문을 던지는 사라마구의 문학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사라마구의 실질적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의외로 대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보여지듯이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을 교묘히 결합시킨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남자가 신호를 기다리며 차안에 있다가 아무 이유 없이 눈이 멀게 된다는 가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백색 질병’으로 불리는 이 전염병은 급속하게 번져나가 도시 전체를 눈먼 자들의 도시로 만들게 된다. 급기야는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고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와 윤리의식은 생존 본능과 어둠의 공포 속에서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다. 의사, 의사의 아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검은 색 안경을 낀 여자와 같이 익명의 인물들은 의사의 아내만 제외하고 모두 눈이 멀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혼자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이 소설을 이끌고가는 작가의 관점을 대표해주는 인물로, 끝까지 눈먼 자들과 함께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아수라장이 된 눈먼 자들의 도시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는 혼자 멀지 않은 눈으로 눈먼자들이 보여주는 추악한 이기심과 욕망의 실체를 보고, 도시가 점점 더러움과 무력감이 팽배한 절망의 도시로 변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인간의 오감중의 하나인 시각이 거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이 야만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지옥으로 변해버리는 현실은,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온 인간의 존엄성의 주소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이 소설의 위대성은 현실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환상으로 현실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들추어내면서도 결코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작가의 치밀한 상상력과 독자적인 문체에 있다. 이 소설은 초반부에는 약간의 인내심을 요하지만, 중,후반으로 갈 수록 독자들의 눈을 뗄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이 평자들로부터 조지 오웰의 『1984』,카프카의 『심판』,카뮈의 『페스트』에 버금가는 마술적인 리얼리즘의 대작이라는 평을 듣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이 소설을 읽어보면 쉽게 알수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문체와 상상력이 새롭고 도발적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이 땅의 모든 눈뜬 자들에게 달려가는 빛을 차단시키고 회수해서 끔찍한 어둠의 실체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어둠의 이면에 존재하는 빛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현하게 해주는 블랙홀과 같은 소설이다. 작가는 눈먼 자들이 다시 눈을 뜨게 되는 이소설의 결말에서 의사의 아내의 말을 통해서 눈이 먼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각인시켜준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 볼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필자: 박남희, 시인)
첫댓글 미소님~~ 저도 지금 이 책 읽고 있는데 게시물 제목엔 '주제 사라마구'가 '사라구마'로 되었어요. 저역시 사라마구, 사라구마, 자주 햇갈리네요. 고구마도 생각나는 것이, 사라! 마구! 하고 속으로 간절히 외쳐댈 노점상들의 마음도 생각나는 것이... ㅎㅎㅎ.
에구~죄송해요. 어쩌나 부끄~ 그리고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