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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백 ( ? ~ 660 )
백제 말기의 장군, 벼슬이 달솔에 이르렀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20년(660년)에 김유신과 소정방의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싸워 이겼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 장군 품일이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으로하여금 나가서 싸우게 하였다. 관창이 사로잡혀 오자 계백은 어린 나이에 용전했음을 기특히 여겨 살려 보냈으나, 다시 붙잡혀 오자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 군중으로 돌려 보냈다. 관창의 죽음에 자극되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신라 군사의 총공격을 받고, 그는 결사대 전원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맞쳤다. 싸움터에 나가기 전에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하여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2. 경순왕 ( ? ~ 978 )
신라의 마지막(제 56대) 왕(재위 927~935년).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傅)이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습격을 받아 자살한 뒤, 견훤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있는 동안 후백제의 잦은 침략과 약탈로 국력은 차차 쇠퇴해져 갔다. 거기에다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고려로 기울어, 마침내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 주고 말았다. 그 뒤 왕건의 딸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장단에 있다.
3. 경애왕 ( ? ~ 927)
신라의 제 55대 왕(재위 924~927년).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위응이며, 선덕왕의 아들이다. 신라 말의 혼란기에 형인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의 세력이 날로 커져 나라의 힘을 펴지 못하였다. 포악한 견훤의 세력을 누르고자 왕건과 손을 잡기도 하였으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던 중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4. 고종 (1852~1919)
조선의 제 26대 왕.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63~1907년). 이름은 형이다.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세자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11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자기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정치에 간여하였으므로 10년 동안이나 실권을 잡지 못한 채 왕으로만 지냈다. 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배제와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비변사의 폐지 및 삼군부의 설치, 양반들의 세력 억제 등 과감한 정치를 폈으나, 경복궁을 다시 수리하는 일로 인한 백성들의 과중한 부담과 천주교 탄압, 쇄국 정책으로 인한 근대화의 방해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겼다. 1873년(고종 10년)에 민비 등의 계책에 따라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자, 이 때부터 민비 일족이 세도 정치를 시작하였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여러 가지 문물을 시찰하게 하였으며, 일본식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882년의 임오군란,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 농민 혁명으로 인해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김홍집 등 개화당 내각이 정권을 잡아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1897년에는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이라 고치고, 왕의 칭호를 황제라 하였다. 1905년에 을사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의 부당성과 일본의 침략성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등 밀사를 보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10년 우리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뒤에는 이태왕으로 불리었으며, 일본의 음모로 독살당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의 홍릉이고, 저서로 <주연집>이 있다.
5. 공민왕 ( 1330 ~ 1374 )
고려의 제 31대 왕(재위 1351~1374년). 이름은 전이고,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12세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약소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글을 익히고 문물을 배웠다. 거기서 위왕의 딸 노국 대장 공주와 결혼하고, 1351년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되자 원나라 왕실과 인척을 맺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의 일족을 없애고, 몽고식 풍속을 모두 금지시키는 등의 반원 정책을 썼다. 이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쳐 없애고, 영흥 이북 땅을 되찾았다. 또 원나라식 연호와 관제를 고치는 한편, 승려 신돈을 뽑아 써서 귀족이 빼앗았던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등 내정 개혁에서 힘썼다. 그러나 말년에는 홍건적 · 왜구의 잦은 침략과 신돈의 횡포로 나라가 어지러워져 최만생 · 홍유 일당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특히 그림과 글에 뛰어나 <천산대렵도> <노국대장공주전> <석가출산상> 등의 미술 작품을 남겼는데, 지금은 <천산대렵도>만이 국립 현대 미술관에 전한다. 능은 현릉이다.
6. 공양왕 (1345~1394)
고려의 마지막 왕(재위 1389~1392). 이름은 요이고, 신종의 7대손이다. 당시 중국은 원(元) 나라에서 명(明) 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격심했는데, 공양왕은 1389년에 친명파인 이성계가 쫓아낸 창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성품이 과단성이 없어 이성계와 정몽주의 신구 세력 사이에서 그 주장만을 따랐다. 재위 4년만에 역시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나 뒤에 삼척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고려는 제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7. 광해군 (1575~1641)
조선의 제 15대 왕(재위 1608~1623). 이름은 혼이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중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뒤에 인목 왕후에게서 영창 대군 의가 태어나자, 그를 세자로 세우려는 소북과 자기를 세자로 지지하는 대북간의 정권 다툼에 휘말렸다. 1608년에 왕위에 오르자 대북의 득세 아래 임해군 · 영창 대군 등 여러 왕자를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인으로 격을 내려 서궁에 가두는 등 정치를 어지럽혔다. 이에 참다 못한 이귀 등이 1623년에 능양군 종(倧)을 받들어 인조 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강화에 귀양가게 되었다. 뒤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인조 19년)에 죽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위에 있을 때 문화 사업에 힘써 <신중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고, <동의보감> 등을 간행하였으며, 경덕궁 · 인경궁 등의 건축물을 세우는 등 업적이 있었다. 또 대외적으로는 국경을 지키는 일과 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8. 권율 ( 1537~1599 )
조선 중기 문관 출신의 명장. 호는 만취당이고, 시호는 충장이다. 젊어서는 벼슬에 뜻이 없어 책만 읽다가, 1582년 (선조 15년) 45세 때에야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 · 호조 정랑을 지냈다.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아 방어사 곽영의 지휘 아래 싸웠다. 나중에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적이 서부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수원 독왕산성에서는 유격전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쳤다. 1593년에는 행주산성에 진을 쳤는데, 그는 이 때 군사들에게 돌을 운반하기에 편리한 앞치마를 입게 하였고,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이 유명한 ‘행주 대첩’이다.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 죽은 뒤에 영의정 벼슬이 내려졌으며,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의 2대 명장으로 손꼽힌다. 행주산성의 옛 터에는 행주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9. 근초고왕 ( ? ~375)
벡제의 제 13대 왕 (재위 346~375년). 초고왕이라고도 한다.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라 마한을 병합하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어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서 세력을 크게 떨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밖으로는 중국의 동진과 국교를 열러 남조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아직기와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한문을 전하였다. 그 밖에 서울을 한산(지금의 서울)으로 옮기고, 고흥에게 백제의 역사 <서기>를 쓰게 하였으며, 왕위 세습 제도를 확립했다.
10. 김구 ( 1876~1949)
독립 운동가·정치가, 호는 백범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8세 때 동학당에 가입, 접주가 되어 이듬해 고향에서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1896년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감형된 뒤에 탈옥하였다. 1910년 고일제의 주권 침탈 후 신민회의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다가 감형되어 1914년에 풀려났다. 1919년 3·1 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 경무 국장 ·경무령 · 주석으로 있으면서 이봉창 ·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또 장제스의 국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귀각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주장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서 정치 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민족 양심에 호소하여 민족 통일의 원칙을 게속 주장하던 중 1949년에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저서에 <백범일지>가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1. 김대건 (1822~1846)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충남 내포의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1836년(헌종 2년)에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서 영세를 받고, 그의 소개로 1837년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마카오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고국을 떠난 지 8년 만인 1845년에 홀로 국경을 넘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 성공하여, 신부로서 교세를 피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해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쪽배로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귀국 후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중국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와의 연락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탐사하다가 붙잡히어 서울로 끌려와 새남터에서 순교, 미산리에 안장되었다. 1925년 7월 5일에 ㄹ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한국 카톨릭 교 200주년 기념 식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에 올랐다.
12. 김부식 (1075~1151)
고려 인종 때의 문신 · 학자, 호는 뇌천이고, 시호는 문열이다. 당대의 권세 있는 집안에 태어났으며, 벼슬은 평장사를 거쳐 수사공에 이르렀다. 학식이 높아 왕에게 <주역> <상서> 등을 강의하면서 정치의 바른 도리를 역설하였고, 정극영 등과 함께 <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134년 (인종 12년) 묘청이 도참설(장래의 길흥을 예언한 책의 주장)을 이용하여 서울을 서경(평양)으로 옮기려 할 때 강력히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에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이를 평정하여 정국 공신이 되었다. 1145년에는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50권을 완성하였다.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정사(正史)로서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3. 김수로왕 ( ?~199)
가락국의 시조, 42년에 가락국의 북쪽 귀지봉에 6개의 알이 든 금 상자가 있었는데, 이 알이 깨어서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키가 9척이나 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금관 가야국의 왕이 되어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다고 하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능은 경남 김해에 있다.
14. 김유신 ( 595~673)
신라의 명장.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김서현 장군의 아들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태종 무열왕을 도와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용맹과 지모가 뛰어나 여러 차례 백제 · 고구려와 싸워서 이겼고, 647년 (진덕 여왕 1년)에 왕족인 신하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654년에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 알천과 의논하여 김춘추(태종 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 무열왕 7년)에 상대등에 올랐고,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과 연합하여 5만의 정예군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문무왕 8년)에는 나당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금성(지금의 부여)에 남고, 김인문 · 김흠순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 뒤에는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는 데 힘써, 대동강 이남의 땅을 되찾아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67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흥무대왕의 칭호를 올렸다.
15. 김윤식 (1835~1922)
조선 말기의 문신 · 학자, 호는 운양이다. 1874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영선사로 청나라를 자주 왕래하였으며, 임오군란 ㅍ 갑신정변 때에는 청군을 청해 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1887년에 민비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여 미움을 샀으나, 1895년에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외무 대신이 되었다.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침탈한 이후 자작 벼슬을 받았으나, 뒤에 ‘대동학회’ ‘기호 학회’등을 조직하고 대종교에 들어가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석학이자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운양집> <천진담초> <음청사> 등이 있다.
16. 김정호 ( ? ~ 1864)
조선 고종 때의 지리학자. 호는 고산자이며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우리 나라의 정밀 지도를 제작하는 데 뜻을 두어, 30여 년 간 전국을 누비며 힘 쓴 끝에 순조 말년에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이어서 그는 전국 각 지방의 연혁 · 풍속 · 산수 · 인물 · 지리를 기록한 <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가 손수 목판에 새겨 박아 낸 <대동여지도> 1벌을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대원군은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옥에 가두고 목각판은 불태워 버렸다. 그 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17. 김좌진 ( 1889~1930)
독립 운동가. 호는 백야이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따. 진취적 사상이 뚜렷하여 15세 때 집안의 종들을 해방시키고,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에 뜻을 두고 활약하다가 1913년에 대한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1917년에 만주로 망명, 1919년 3·1 운동 때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서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세워 군사를 훈련시켰다. 1920년에 청산리에서 나중소 · 이범석 등과 함께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싸움"이다. 이듬해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일본의 보복을 피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소련 땅으로 갔으나, 소련군과의 충돌로 많은 전사자를 내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다. 그 후, 성동 사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쓰는 한편, 1929년에 한족 연합회를 결성하는 등 동포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고려 공산 청년회의 박상실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만 민국장)을 받았다.
18. 김홍도 (1745~?)
조선 정조 때의 화가. 호는 단원 · 단구 · 서호 이다. 우리 나라 근세 화단에 독특한 화풍을 열어 솔거 이래의 천재 화가로 일컬어진다.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김응환에게서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우고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그는 곧 왕실의 전속 화가가 되어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사실적 기법의 산수화와 서민적인 풍속화에 뛰어났고, 신선화 · 인물화 · 불화 등을 두루 잘 그렸다. 안견 · 장승엽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소림명월도> <군선도> <쌍치도> <낭구도> <청앵도> 및 <풍속화첩> 등 수많은 명작이 남아 전한다.
19. 김홍집 (1842~1896)
조선 후기의 정치가, 호는 도원, 또는 이정학재이고, 시호는 충헌이다. 1867년(고종 4년)에 문과에 급제, 평양 현감을 거쳐 예조 참의가 되었다. 1880년에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중국인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와 소개하고, 개화 정책 추진에 히믈 기울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이유원과 함께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었다. 1894년에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제 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 대신이 되었다. 이어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로 구성된 제 2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고, 1895년에 제 3차 김홍집 내각을 세워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성급한 단발령과 일본인들이 민비를 죽인 사건으로 민심을 잃은데다가, 고종 황제가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아관 파천) 후 친러시아파에서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저서에 <이정학재일록>이 있다.
20. 나대용 (1556~?)
조선 선조 때 수군의 장군, 일찍이 글을 배웠으나 나라의 방비가 급함을 깨닫고 무관이 되었다. 임진왜란 전해인 1591년에 전라 좌수영 수사로 있던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그 동안 연구해 온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고 나라의 방비책을 건의하였다. 이후 충무공 밑에서 병선 건조 책임을 맡고, 옥포 · 당포 · 사천 등 여러 해전에도 참가하여 왜적을 무찌르는 데 공이 컸다.
21. 나석주 (1889~1926)
독립 운동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23세 때 만주로 망명하여 4년 간 신흥 무관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귀국하여 항일 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3·1 운동 후에는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 정부에 보내고, 동지들을 모아 일본 관헌을 죽인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김구가 이끄는 의열단에 들어가, 우리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일본인이 만든 동양 척식 회사와 식산 은행을 파괴할 임무를 띠고 1925년에 몰래 귀국하였다. 이듬해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인들을 쏘아 죽인 뒤 총격전 끝에 자결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ㅎ누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22. 낙랑 공주(?~32)
낙랑 태수 최이의 딸,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 왕자와의 사랑 떄문에, 무기고에 들어 있던 자명고(적의 침입이 있을 때 스스로 울어서 대비하게 하였다는 북)을 찢어서 낙랑을 고구려에게 정복당하게 하였는데, 그로 인해 그녀는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한다.
23. 남건 (? ~ ?)
고구려 때의 재상. 천남건이라고도 한다. 명장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이다. 665년(보장왕 24년)에 아버지가 죽자 형 남생을 몰아내고 막리지가 되었다. 667년에 형 남생이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압록강에서 그들을 막아 싸웠다. 668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이 함락되자, 왕은 항복했으나 남건은 굽히지 않고 게속 싸우다가 부하의 밀고로 잡혀, 당나라로 끌려가 검주에 유배되었다.
24. 남생 (?~679)
고구려 말기의 재상. 연개소문의 맏아들이다. 665년(보장왕 24년)에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막리지가 되어 삼군 대장군을 겸하고, 후에 대막리지에 올랐다. 두 아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간 사이에, 형제간을 이간시키려는 자의 무고를 믿은 아우 남건 · 남산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쫓겨서 국내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여러 성을 당나라에 바치고 당나라의 벼슬을 얻었다. 667년에 당나라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치고, 이듬해에는 신라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빼앗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의 묘는 아우 남산의 묘와 함께 중국 뤄양 남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지석에는 관직 · 품계 및 조상에 관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25. 내물왕(?~402)
신라의 제 17대 왕(재위 356~402). 성은 김씨이다. 왕위에 있는 동안에 고대 왕국으로서의 체제를 두루 갖추었다. 왜구와 말갈의 침입이 잦았으나, 364년에는 부현 동쪽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381년에 위두를 중국의 전진에 보냄으로써 교류가 생기고 고구려를 통해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한자가 사용된 것도 이 무렵부터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 논개 (?~1593)
조선 선조 떄의 의로운 기생. 성은 주씨이며, 전라도 장수에서 태어났다 1593년(선조 26년)에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술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를 꾀어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그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죽였다. 뒷날 논개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어 그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고, 남강 가에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논개의 순절을 기리어, 그녀의 고향인 장수에는 정문이 세워졌다.
27. 눌지왕 (?~458)
신라의 제 19대 왕(재위 417~458). 성은 김씨이다. 내물왕 (제 17대)의 아들인데, 실성왕(제 18대)이 그를 죽이려 하자 먼저 손을 써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418년에 박제상을 시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동생 미사흔을 귀국시켰다. 433년에는 백제와 나제 동맹을 맺어, 455년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백제를 구하였다. 눌지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였다.
28. 단군(?~?)
우리 겨레(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고조선(단군 조선)의 첫 임금.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천제(天帝)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에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후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를 임금으로 삼아 조선을 다스리게 한 다음,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그 때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 한다.
이후 오늘날까지 단군을 겨레의 시조로 받드는 한편, 환인이 환웅을 인간 세상에 보낼 때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다(弘益人間).’고 판단한 것을 건국 이념으로 새기며, 오늘날 교육의 기본 정신으로 삼고 있다.
29. 단종 (1441~1457)
조선의 제 6대 왕(재위 1452~1455). 이름은 홍위이다.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11세 때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 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겨 상왕으로 밀려났다. 1456년(세조 2년)에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응부 · 유성권 등의 ‘사육신’이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려다 실패한 일을 계기로, 이듬해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낮추어지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 해 가을에 수양 대군의 동생인 금성 대군이 다시 단종을 왕위에 올리려다 잡혀 죽자, 단종은 평민으로 낮추어진 뒤 살해되었다. 세상을 떠난 뒤 241년 만에 다시 임금으로 복위되었고, ‘단종’이라는 묘호(임금의 시호)가 내려졌다. 능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이다.
30. 대조영 (?~719)
발해의 시조(재위 699~719년). 왕호는 고왕이다. 668년에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의 대장군 이해고의 군사를 천문령에서 크게 쳐부수고,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들을 모아 읍루의 동모산(지금의 지린 성 둔화 부근)에 홀한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699년),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해로 고쳤다. 동쪽은 바다, 서쪽은 거란, 남쪽은 신라에 이웃한, 5천 리에 걸친 큰 나라로 고구려의 옛 땅을 거의 회복하여 ‘해동성국’을 이룩하였다. 당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신라와도 국교를 맺었다.
31. 덕종 (1016~1034)
고려의 제 9대 왕(재위 1031~1034). 현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흠이고, 시호는 경강이다. 왕위에 오르자 새 과거 제도인 ‘국자감시’를 만들고 거란에 억류된 고려인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거란이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유소에게 압록강 어귀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지금의 광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게 하였다. 또 현종 때에 시작한 국사 편찬 사업도 완성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숙릉이다.
32. 명성황후 (1851~1895)
조선 제 26대 고종의 비, 흔히 민비라 불린다. 9세 때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다. 1866년에 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섭정으로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던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과 치열한 정치 싸움을 벌이면서 여러 외국 세력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민씨 문중의 사람들을 중요한 직위에 앉혀 민씨 일파의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이를 평정한 다음, 대원군을 청나라로 잡혀 가게 하였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힘을 배경으로 친일 세력을 물리치려 하였다. 이에 일본은 1895년에 을미사변을 일으켰는데, 민비는 이 때 일본 공사 미우라가 조종하는 일본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1897년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경기도 양주군 홍릉에 묻혔다.
33. 명종 (1131~1202)
고려의 제 19대 왕(재위 1170~1197). 이름은 호이고 시호는 광효이다. 친형인 의종을 몰아낸 정중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있는 동안 정중부를 죽이려는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농민 반란과 무신들의 싸움이 잇달아 일어나 나라 안이 매우 어지러웠다. 1197년에 당시의 실권자인 최충헌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지릉이다.
33. 명종 (1534~1567)
조선의 제 13대 왕(재위 1545~1567). 이름은 환이고, 시호는 공헌이다. 중종의 둘째 아들로 11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초기에 어머니 문정 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가 을미사화를 일으켜서 많은 선비를 죽게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 뒤 문정 왕후가 죽자 명종은 윤원형 일당을 처형하고 정국을 바로 잡고, 중 보우를 처단한 뒤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다. 한편 수자와 전쟁 군함을 만들고 <속무정보감>을 간행하는 등 국방과 문화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 능은 서울시 도봉구 공릉동에 있는 강릉이다.
34. 무령왕(?~523)
백제의 제 25대 왕(재위 501~523). 이름은 사마 · 융 · 여륭이다.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서 501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 말갈족과 대치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고,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 523년에는 인우 ·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쌍현성을 다시 튼튼히 쌓아 외국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971년에 무령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능이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35. 무왕 (?~641)
백제의 제 30대 왕(재위 600~641). 이름은 장이며, 별명은 서동이다. 아버지인 법왕의 뒤를 이어 600년에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서쪽 국경을 여러 번 침공하였고, 고구려를 눌러 두기 위해 중국의 수나라, 이어 당나라와 가까이하였다. 627년에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에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당나라가 화친을 권하여 하는 수 없이 그만두었다. 그 밖에도 일본에 관륵을 보내어 천문 · 지리 · 역법에 관한 서적과 불교를 전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으나, 군비와 잦은 토목 공사, 그리고 사치에 국력을 소모하여 뒷날 백제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36. 무학대사(1327~1405)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고승, 무학은 호이며, 속성은 박씨, 이름은 자초이다. 18세 때 승려가 되어 용문산에 가서 혜명으로부터 불교의 깊은 전리를 배웠다. 1353년에 원나라에 유학하여 그 곳에 가있던 혜근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귀국 후에는 그로부터 법을 이어받았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무학의 예언대로 나라를 세우자 그를 왕사로 봉하고 그가 도를 닦던 설봉산 토굴터에 석왕사를 세웠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나랏일을 항상 대사와 의논하였으며, 대사 역시 슬기로운 판단으로 좋은 충고를 주어 조선 건국 사업에 큰 공적을 세웠다. 서울을 한양으로 정한 것도 대사의 제언에 따른 것이다.
37. 문무왕 (?~681)
신라의 제 30대 왕(재위 661~681).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다. 650년(진덕 여왕 4년)에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 가서 대부경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여 병부령이 되었다가 6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661년에 왕위에 오르자, 삼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무열왕의 뜻을 이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제 1차 정벌에는 실패하였으나, 668년에 다시 나당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7년에는 백제 ·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려는 당나라 세력을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끝내 이루었다. 뒤에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들여와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도 힘썼다. 왕은 왜구의 침입을 막아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에서 유언으로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묻게 하였다고 한다. 1967년에는 경북 월성군 감은사 절터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의 해중 왕릉임이 밝혀졌다.
38. 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 · 문신, 호는 삼우당이고 시호는 충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11세 때 이름난 학자인 이곡의 제자가 되었다. 1360년(공민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63년에 사신의 한 사람으로 원나라에 갔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목화밭을 보았고, 솜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를 인도에서 들여온 지 오래지 않은 터여서, 목화씨나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막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심어 가꾸어 그 재배에 성공하였다. 벼슬이 좌사의대부까지 올랐으나 이성계가 추진하는 농지 개혁에 반대하다가 쫓겨났다. 세상을 떠난 뒤 1440년(세종 22년)에 영의정 벼슬이 내렸다.
39. 문자왕(?~519)
고구려의 제 21대 왕(재위 491~519년). 이름은 나운이며 문자명왕· 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 장수왕의 손자로, 태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일찍 죽자 장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494년에 부여를 쳐서 멸망시켰고, 신라 · 백제를 자주 침공하여 영토 확장에 힘썼다.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고구려는 장수왕 때를 거쳐 문자왕 때에 이르는동안 관도가 더욱 넓어지고 세력이 더욱 강성한 나라로 발전하였다.
40. 문정왕후 (1501~1565)
조선 제 11대 중종의 왕비. 파평 윤씨로 1517년에 왕비가 되었다. 1545년에 인종에 이어 아들 명종이 11세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으로 정사를 보살폈고, 아우인 소윤파의 윤원형에게 권력을 잡게 하여 대윤파인 윤임 등 많은 선비를 역적으로 몰아 죽인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한편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보우를 신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켰고, 과거에 승과를 두어 나라에서 승려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1553년에 형식상 명종에게 정권을 돌려 주었으나, 소윤파와 함께 오래도록 그 실권을 쥐고 있어서 폐해가 컸다. 능은 서울시 도봉구 공릉동에 있는 태릉이다.
41. 문종 (1019~1083)
고려의 제 11대 왕(재위 1046~1083). 이름은 휘이다. 현종의 셋째 아들로 형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려의 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사형죄에 대해 세번 재판을 받게 하는 삼원 신수법, 농토의 세율을 정하는 야전 보수법 등 여러 법률을 제정하여 정치의 기초를 다졌으며, 절을 세우고 사학을 일으키는 등 불교와 유학을 숭상하였다. 또 국방 · 외교에도 힘써 북쪽의 여진족을 회유책으로 달래고, 송나라와 국교를 맺어 앞선 문화를 받아들였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능은 경기도 장단에 있는 경릉이다.
42. 문종 (1414~1452)
조선의 제 5대 왕(재위 1450~1452). 이름은 향이고, 시호는 공순이다. 세종의 맏아들로 20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문신과 무신을 고르게 쓰도록 하고, 올바른 말을 할 수 있게 하여 민심을 파악하는 등 세종을 크게 도왔다. 1450년에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있는 동안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군사 제도도 개혁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을 비롯한 천문 · 역법 · 산술 등을 두루 잘 알았고, 초서 · 예서를 잘 썼다.
몸이 허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현릉이다.
43. 문주왕 ( ? ~ 477)
백제의 제 22대 왕(재위 475~477년). 개로왕의 아들로 왕이 되기 전에는 상좌평으로서 아버지를 도왔다.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서울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대두산성을 쌓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476년에는 탐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에 병관 좌평인 해구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암살당했다.
44. 미천왕(?~331)
고구려의 제 15대 왕(재위 300~331년). 호양왕이라고도 하며, 성은 고씨, 이름은 을불, 또는 우불이라고 한다. 서천왕의 손자이고, 고추가를 지낸 돌고의 아들이다. 왕위에 오르자 영토를 넓히기에 힘써 302년에 현도군을 쳤고, 311년에는 요동의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이어 313년에는 낙랑군을, 이듬해에는 대방굼을 점령하여 한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45. 미추왕 (?~284)
신라의 제 13대 왕(재위 262~284). 본래의 칭호는 미추 이사금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미조 또는 미소이다. 구도의 아들로서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6대손이다. 신라의 제 12대 왕인 점해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백제의 침입을 잘 막았을 뿐만 아니라, 농업을 장려하고, 좋은 정치를 폈다.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그의 능은 죽릉, 또는 죽장릉이라 불린다.
46. 민영환(1861~1905)
구한 말의 문신, 호는 계정이고, 시호는 충정이며, 민겸호의 아들이다. 17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오군란 때 아버지가 살해되자 한때 관직을 물러났으나, 뒤에 다시 병조 판서와 한성 부윤 등을 지냈다. 1896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길에 일본 · 미국 · 영국 등을 둘러보았다. 이듬해에 다시 유럽 6개ㅜㄱ의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유럽을 여행함으로써 새 문물에 일찍 눈떳다. 귀국하여 민권 신장과 정치 · 경제 등의 전체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받았다.
47. 박문수 (1691~1756)
조선 영조 떄의 문신, 호는 기은이고, 시호는 충헌이다. 17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고, 그 이듬해에 병조 정랑에 올랐으나 노론이 정권을 잡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1727년에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사서로 임명되어, 영남 지방의 암행 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잡아 내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이인좌의 난’ 때에는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영성군에 봉해졌다. 진주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 · 병조 판서 등을 지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고,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려운 백성을 많이 구제하여 함흥 만세교 옆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암행 어사 때의 그의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저서에 <탁지정례> <국혼정례> 등이 있다.
48. 박정희 (1917~1979)
우리 나라의 제 5~9대 대통령(재임 1963~1979).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37년에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국민 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만주 군관 학교와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한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후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 학교장 · 제2군 사령관 등 군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1961년에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자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이 되었다가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7년에 제 6대 대통령, 1971년에 7대 대통령, 1972년에 8대 대통령, 1978년에 9대 대통령에 잇달아 당선되었다.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평화 통일과 민족 중흥을 이룩한다는 명분 아래 1972년 10월에 유신 헌법을 마련하였고, 제 1,2,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여 조국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남북 대화의 문을 열었으며, 6·23 평화 통일 외교 정책과 평화 통일 3대 원칙 등을 선언하여 조국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1979년 10월에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 국장으로 국립 묘지에 묻혔다. 저서에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등이 있다.
49. 박지원 (1737~1805)
조선 정조 때의 문인·실학자, 호는 연암이다. 16세 때 처음으로 처삼촌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대에는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다. 당시 형식적인 예절과 도덕만을 중요시하는 현실을 살피고는, 학문은 실생활에 보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실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780년에 친족형 박명원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청나라의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그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열하일기>로 엮었다.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문물 제도와 생활 풍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뒤는 또 벼슬아치와 양반들의 생활을 폭로 · 풍자한 한문 소설 <허생전> <호질> 등을 지어 세태를 비평하기도 하였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몇몇 관직을 거쳤고, 늘그막에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서를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제가 ·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 등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 정경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50. 박혁거세 (기원전60~기원후4)
신라의 시조, 왕호는 거서간이며 박씨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옛날에 지금의 경주 지방에 여섯 마을이 흩어져 살았는데, 하루는 양산 산기슭에서 말이 울어 대기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가보니 큰 알이 있어, 그것을 깨어 보니 옥동자가 나왔다. 그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다. 아이가 13세에 이르자 기골이 빼어나고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받들었다 한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나라 이름을 ‘서나벌:(<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유사>에는 서라벌로 기록되어 있음)’이라 하고, 서울을 ‘금성’이라 하여 그 곳에 궁궐을 지었다 한다. 기원전 53년에 왕비를 맞아들여 왕비와 함께 여러 마을을 순시하면서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한다.
51. 방정환(1899~1931)
아동 문학가 · 소년 운동가. 호는 소파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선린 중학교를 중퇴하고 틈틈히 책을 읽고 글을 지었다. 1916년에 잡지 <청춘>에 그의 글이 뽑힌 뒤부터 문학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보성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아동 문학을 공부하다가, 1921년에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는 한편, 어린이들을 존중하여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썼다.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엮었고, 이듬해에 잡지 <어린이>를 발행하였다. 이어 윤극영 · 손진태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정하는 등 어린이 보호 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에 월간 잡지 <혜성>을 발간하였으나, 병을 얻어 7월 23일에 3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신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1957년에 새싹회에서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저서에 <소파전집>이 있다.
52. 백결 선생(?~?)
신라 자비왕 때의 거문고의 명수, 서울인 금성(지금의 경주)에 살면서 매우 가난하여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은 데서 ‘백결 선생’이라 불리었다. 그는 기쁨이나 슬픔의 모든 감정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표현하였는데,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쌀이 없어 떡을 하지 못해 걱정하고 있는 아내에게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53. 백낙신 (?~?)
조선 철종 때의 무신. 1861년 (철종 12년)에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가 되어 진주에 부임한 뒤, 나랏돈을 가로채고 백성들을 괴롭혀 마침내 이듬해 진주 민란(임술민란)을 일으키는 원인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강진 고금도에 유배되고 재산을 몰수 당하였다. 1865년 (고종 2년)에 풀려나 이듬해 영종진 첨절제사가 되었으며,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영종진과 행주에서 프랑스 군대를 막아 내었다.
54. 법흥왕(?~540)
신라의 제 23대 왕(재위 514~540년). 지증왕의 아들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원종이다. 왕위에 오르자 시법을 제정하고 병부를 설치했으며, 관리의 공복을 정하였다. 521년에는 중국 양나라와 국교를 맺고, 남부 지방을 순시하며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527년에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삼국 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536년에는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건원이라 하였다.
55. 비류 (?~?)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둘째 아들, 북부여에서 내려온 형 유리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생 온조와 함께 부하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미추홀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흩어지자 아우 온조에게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56. 선덕 여왕(?~647)
신라 제 27대 왕(재위 632~647년). 선덕은 시호이며,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호는 성조황고이다. 진평왕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진평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받들었다. 634년에 연호를 인평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638년에 고구려군을 물리쳤고, 642년에 백제에게 40여 성을 빼앗기게 되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도 하였다. 647년에는 임종과 비담 등이 반역을 꾀했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고, 당나라의 문화와 불교를 들여왔으며, 첨성대를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57. 선조 (1552~1608)
조선의 제 14대 왕(재위 1567~1608년). 이름은 균, 또는 공이고 시호는 소경이다. 1567년에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이황 · 이이 등 훌륭한 인재를 뽑아 써서 어진 정치를 펴기에 힘썼다. 또한 <유선록> <근사록> <실경> <삼강행실> 등을 펴내어 유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조의 그러한 노력과는 달리 신하들 사이에는 붕당간의 치열한 정권 다툼이 벌어져 나라의 정치 기강은 날로 어지러워져 갔다. 국정이 어지러워 뚜렷한 국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는 야인(만주족)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의주까지 피란해야 하는 등 고통을 겪었으나, 명나라의 군사 원조와 이순신의 활약으로 왜적을 몰리칠 수 있었다. 1597년에 다시 왜군이 쳐들어와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가 재정은 극도로 계속되어 시달림을 받다가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었다. 글을 잘 썼으며 그림 솜씨도 뛰어났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목릉이다.
58. 선종 (1049~1094)
고려 제 13대 왕(재위 1083~1094). 이름은 운, 시호는 사효이며 문종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여 경사에 밝았으며, 중서령을 거쳐 수태사와 상서령을 지내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84년에 처음으로 승과를 설치하고 법흥사에 교장도감을 두어 책을 펴내는 등 불교 발전에 힘썼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이다.
59. 설총 (655~?)
통일 신라 경덕왕 떄의 학자. 호는 빙월당이며, 경주 설씨의 시조이다.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신라의 10대 현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다. 벼슬은 한림을 지냈고, 주로 임금 가까이에서 정치에 대한 자문 구실을 하였다. 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일찍이 국학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두를 정리하여 체계를 세웠으며, 한문에 토를 다는 방법을 창안하여 당시 중국의 한문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 <화왕계>를 지어 신문왕을 충고한 일화가 유명하다. 강수 ·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문장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60. 성해응(1760~1839)
조선 시대의 실학자. 호는 연경재이다. 1783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1788년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벼슬은 부사에 머물렀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경학에 정통했으며,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등과 친하게 지냈다. 저서로는 <동국명신록> <주한잡사고> <동국명산기> 등이 있다.
61. 성혼(1535~1598)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 호는 우계 또는 묵암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병으로 과거를 단념하고 백인걸의 제자가 되어 경학 공부에 힘썼다. 선조 초에 현감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중 세자의 부름을 받고 좌참찬에 올랐으나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갔다. 일찍이 이이와 친근하게 사귀었으나,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여 1572년부터 6년간 이이와 ‘사단 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여 화제가 되었다. 그는 글에 뛰어났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 좌의정 ㅕ슬이 내려졌다. 저서에 <우계집> <주문지결> 등이 있다.
62. 세조 (1417~1468)
조선의 제 7대 왕(재위 1455~1468년). 이름은 유이고, 시호는 혜장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아우로서 1428년에 수양 대군으로 봉해졌다. 대군 시절에 세종의 명을 받아 <석보상절>을 지었으며,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2년에 조카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가까이 모시던 황보인 ·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아우인 안평 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낸 다음 스스로 영의정에 올랐다. 실권을 잡은 그는 단종에게 왕위를 내놓게 하여 1455년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뒤 단종 복위를 꾀하는 여러 신하들을 처형했으나, 정치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쌓았다. 집권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룩하였고, 국방에도 힘써 4군을 없애고 야인을 정벌하여 서북 방면을 개척하였다. 경제 정책면에서는 과전법의 모순을 바로잡아 직전법을 실시하였으며, 농업 기술 서적을 펴내어 농업을 장려하였다. 특히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 불경과 연해본들을 간행하였고, 1465년에는 서울에 대원각사를 세웠다. 그 밖에 <역학계몽요해> <병사십장> 등을 손수 지어 널리 펴고 <국조보감> <동국통감> <경국대전>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광릉이다.
63. 세종(1397~1450)
조선의 제 4대 왕(재위 1418~1450년). 이름은 도, 시호는 장헌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충녕 대군으로 있다가 2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곧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청렴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대한 자문과 왕실의 교육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경자자 · 갑인자 · 병자자 등의 활자를 만들게 하여 <고려사> <농사직설> <의방유취> <팔도지리지> 등의 책을 펴내었다. 또 궁중에 정음청을 두어 1443년에는 성삼문 · 신숙주 · 최항 등과 훈민정음을 창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편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다. 또 과학 기술 부문에도 관심을 가져 장영실로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고, 궁중에 흠경각을 세워 과학 기구들을 비치하게 했다. 그 밖에 혼천의 · 해시게 · 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고, 역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전제 상정소를 두어 전제와 세제를 정비했고, 농업을 장려했다.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 확장에 힘썼는데, 북방 변경 지방을 개척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에는 4군을 설치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일본과는 제포 · 염포 · 부산포의 3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국교를 지속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이다.
64. 소수림왕 (?~384)
고구려의 제 17대 왕(재위 371~384). 소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구부이며,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백제의 근초고왕과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372년에 전진의 왕인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가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오자,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오게 되었다. 또 그 해에 태학을 설립하고, 이듬해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375년에 순도를 위하여 초문사를 지었으며 또한 승려 아도를 위하여 이불란사를 지어 주지로 삼기도 하였다. 377년에는 3만 대군으로 침공해 온 백제군을 물리쳤다.
65. 송시열 (1607~1689)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호는 우암 또는 화양동주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학문을 배운 뒤, 1633년에 생원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릉 참봉을 거쳐서 봉림 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그 뒤 효종 · 현종에게 등용되어 이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에 올랐다. 서인의 거두로 있으면서 남인과 예론에 대하여 서로 다투기도 하였다. 한때 남인에게 몰렸다가 다시 정계에 나와 이름을 떨쳤으며,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우두머리가 되엇다. 1689년 숙종 때 왕세자 책봉에 반대 상소를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 뒤 서울로 심문을 받으러 오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이어 받아 기호 학파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여 뒤에 송자(宋子)라는 성인의 칭호를 받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만흔 정적을 두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훌륭한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 <우암집> <주자대전차의> 등이 있다.
66. 송순 (1493~158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면앙정 또는 기촌이며 시호는 숙정이다. 1519년(중종 1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547년(명종 2년)에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개성부 유수를 지냈다. 1550년에 이조 장판으로 있을 대 죄인의 자식을 등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그 뒤 대사헌 · 한성부 판윤 · 우참찬 등을 지냈다. 늘그막에 벼슬에서 물러나 담양에 석림 정사 면양정을 지어놓고 독서와 시조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작품으로는 <면앙정가> 등이 전한다.
67. 송상현 (1551~1592)
조선 중기의 지사, 호는 천곡이며, 시호는 충렬이다. 1576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경성 판관 등을 거쳐 종계 변무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로 있었는데 동래성이 왜적이 쳐들어오자 용감히 맞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조복을 입고 앉은 채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적장은 그의 시체를 동문 밖에 묻고, 그의 충성심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 이조 판서 및 찬성 벼슬이 내려졌다.
68. 송준길 (1606~167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호는 동춘당이고ㅡ 시호는 문정이다. 어릴 때 이이 밑에서 공부하고 20세 때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1624년 (인조 2년)에 진사가 된 뒤 세마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계속 학문에만 힘썼다. 1649년에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어 당시 정치를 어지럽히던 재상 김자점을 규탄하여 벼슬에서 몰아냈다. 1659년에는 병조 판서과 되어 송시열 등과 함께 노론파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나,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의 상복을 입는 문제로 윤휴 등 남인파와 싸우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예학에 밝았고 이이의 학설을 찬성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송시열 · 송규렴과 함께 "3송"으로 불린다. 죽은 뒤 영의정의 벼슬이 내렸다.
69. 송여종 (1553~1609)
조선 선조 때의 무신.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밑에 들어가 한산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왕에게 올리는 보고문을 가지고 적진을 통과하여 행재소에 전달한 공으로 녹도 만호 벼슬에 올랐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 단성 현감 · 사복시정 · 홍양 현감을 거쳐 1607년에 경상 좌도 수군우후가 되었다.
70. 송익필 (1534~1599)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귀봉 · 현승이고 시호는 문경이다. 서자라 하여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이이 · 성혼 등과 사귀며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예학에 밝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이산해 · 최경창 · 백광홍 · 최입 · 이순인 · 윤탁연 · 하응림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고양의 귀봉산 기슭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 · 김집 · 정엽 등 많은 학자가 나왔는데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저서로는 <귀봉집>이 있다.
71. 송진우 (1889~1945)
정치가·독립운동가, 호는 고하이며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다. 1915년에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7년에 중앙 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교육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3·1 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운동을 지도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921년에 동아 일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 만국 기독교 청년회가 주최하는 태평양 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였다. 광복 후 한국 민주당을 조직하여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당하였다.
72. 송흥록 (1801~1863)
조선 말기의 판소리의 명창, 전북 운봉에서 태어났다.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이라 불리었다. 그는 판소리의 중시조 격으로서 그의 매부인 김성옥이 새로 만들어 낸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하여 완성하였으며, 소리가 웅건하고 청담한 동편조 창법을 이룩하였다. 특히 <춘향가> 중의 <옥중가>와 <변강쇠타령> <적벽가>에 뛰어났다.
73. 숙종(1661~1720)
조선 제 19대 왕(재위 1674~1720). 이름은 순이고 시호는 현의이다. 1667년에 왕세자가 되고 1674년에 즉위하였는데, 왕위에 있는 동안 남인과 서인간의 정권 다툼이 그칠 날이 없었다. 또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였으며, 왕비 민씨를 폐위시키는 사건이 일어나 그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는 등 내환이 잦았다. 그러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왕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토지 개혁을 완성하였으며 화폐를 만들어 널리 쓰이게 하였다. 1691년에는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사육신에게 벼슬을 다시 내렸다. 1712년에는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하였고, 군사 제도를 새로이 정비하였다. 한편 편찬 사업으로는 <선원록> <대명집례> 등을 간행하고,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특히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나와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명릉이다.
74. 순조 (1790~1834)
조선의 제 23대 왕)재위 1800~1834년). 이름은 공, 호는 순재이며 정조의 둘째 아들이다. 1800년 1월에 세자로 책봉된 뒤 그 해 6월에 정조가 병으로 죽자 10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영조의 왕비인 정순 대비가 정권을 잡고, 1801년에 2백여 명의 교인을 학살한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1804년부터 직접 나랏일을 돌보게 된 순조는, 계속 천주교를 탄압하여 1815년에 ‘을해박해’를 일으켰고, 1827년에는 3차레에 걸친 대탄압을 강행하였다. 한편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권세를 잡고 어지러운 정치를 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한 틈을 타서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그 밖에도 많은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순조는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조씨의 일문을 중용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를 누르려 하였으나,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능은 서울시 강남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이다.
75. 순종 (1874~1926)
조선의 제 27대 왕(재위 1907~1910년).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척이며 고종의 둘째 아들이다. 1875년(고종 12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1897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른 해에 한일 신협약이 맺어졌고, 통감부가 설치 되어 일제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 해 8월에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국 군대를 해산했고, 1908년에 동양 척식 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권마저 빼앗기고, 군부와 법부를 폐지하였다. 1910(융희 4년)에 이른바 ‘한일 합병 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선 왕조는 27대 518년 만에 망하여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순종은 일제의 압력으로 정치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지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유릉이다.
76. 신규식 (1879~1922)
독립운동가, 호는 예관이다. 청주에서 태어나 1899년에 관립 한어 학교를 거쳐 육군 무관 학교를 나와 부위에 올랐다. 1905년에 을사조약을 죽음으로 반대하려고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그 뒤에 대한 자강회 · 대한 협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 1915년에 박은식 등과 대동 보국단을 조직하여 잡지 <진단>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법무 총장이 되었다. 1920년에는 국무 총리 겸 외무 총장이 되어 이듬해에 광둥(지금의 광저우)에 가서 신생 중화 민국 정부로부터 임시 정부를 승인받기도 했다. 1922년에 임시 정부 안에 분열이 일어나자 조국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단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한국혼> <아목루> 등이 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77. 신돈 (?~1371)
고려 말기의 승려. 호는 청한거사이고 법명은 편조이다. 어려서 스님이 되어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을 만나고부터 나랏일을 맡았다. 1365년에 진평후라는 작위를 받았다. 1366년에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문란하던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농민의 권리 보호에 힘쓰며 국가 재정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왕의 두터운 신임을 이용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으며, 1367년에는 귀족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도읍을 충주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의 반대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반란을 일으키려다 탄로나 수원으로 귀양가 죽었다.
78. 신돌석 (?~1906)
구한 말의 의병장,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을사조약이 맺어진 이듬해에 울진군 평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일본군을 죽임으로써 이름이 알려졋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현상금을 탐낸 고종사촌 김자성이 그를 자기 집에 불러 독한 술을 먹인 뒤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79. 신무왕 (?~839)
신라 제 45대 왕. 섬은 김, 이름은 우징이며 원성왕의 증손이다. 836년에 흥덕왕이 죽고 희강왕이 왕위를 탐내자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여 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839년(민애왕 2년) 4월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 7월에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주 제형산에 있다.
80. 신문왕 (?~692)
신라 제 31대 왕(재위 681~692년). 문무왕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정명 또는 명지이다. 682년 에 위화부령 2명을 두어 선거의 사무를 맡게 하고,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685년에는 9주를 정비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봉성사 · 망덕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당나라로부터 예기 · 문장에 관한 책 50여 권을 들여왔다.
81. 신사임당 (1504~1551)
조선 중기의 여류 문인·서화가, 사임당은 호이며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바느질 솜씨가 좋았으며, 특히 시와 그림에 뛰어났다. 유명한 화가인 안견의 영향을 받아 그림이 섬세하여 산수 · 포도 · 풀 · 벌레 등을 잘 그렸고,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예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훌륭한 어머니로서, 어진 아내로서 우리 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어 존경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대관령망친정> <사친>, 그림에 <산수도 > <자리도> <초충도> 등이 있다.
82. 신석구 (1875~1950)
독립 운동가. 호는 은재이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크리스트 교에 입교, 협성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 · 개성 · 춘천 · 원산 · 남포 등지에서 종교 운동을 벌였다. 3·1 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신사 참배와 전승 기념 예배 등을 거부하다가 여러 번 감옥에 갇혔다. 1949년에 남포에서 반동 비밀 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6·25전쟁 때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살당했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83. 신숙주 (1417~1475)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호는 보한재 · 희현당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1439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차늘 지내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이바지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일등 공신이 되어 예문관 대제학으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을 때 의리를 저버리고 이에 가담했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우의정에 있으면서 북방의 야인들을 물리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예종 · 성종 때에도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왕을 도왔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재능으로 6대 임금을 섬기면서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동국정운> <영모록>을 편찬하는 등 큰 업ㅈ3ㅓㄱ을 남겼다. 저서에 시문집인 <보한재집>, 한자 음운서인 <사성통고> , 그 밖에 <해동제국기>등이 있다.
84. 신숭겸 (?~927)
고려 시대의 명장. 처음 이름은 능산이고, 시호는 장절이다. 평산 신씨의 시조로 광해주(지금의 춘천)에서 태어났다. 918년에 태봉의 기장으로 배현경 · 홍유 ·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위에 앉혀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이 커서 개국 벽상 공신이 되었다. 927년 태조가 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출하고 죽었다. 1120년에 고려의 예종은 신숭겸과 김낙을 추모하여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지었다.
85. 신위 (1769~1847)
조선 말기의 문신 · 시인 · 서화가, 호는 자하, 또는 경수당이다. 1799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도승지와 이조 · 병조 · 호조 참판을 지냈다. 그는 시 · 서 · 화에 뛰어나 3절이라 불리었으며, 후세의 시인들도 그의 작시법을 본받았다. 또한 필법과 화풍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작품에는 <경수당전고> <신자하 시집>과, 시조 40수를 한시로 번역한 <소악부> 등이 있다.
86. 신윤복 (1758 ?~?)
조선 시대의 화가, 호는 혜원이다. 그림에 뛰어난 3원 중의 한 사람으로,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풍속 화가로 손꼽힌다. 화원으로서 첨정 벼슬을 지냈다. 그림은 주로 농촌 마을의 서민적인 풍속을 많이 그렸으며, 특히 기생 · 무당 · 술집 등의 풍속도를 잘 그렸다. 그가 현실 인간 사회의 높은 도덕만을 중요시하던 양반 사회를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 <주막도> <미인도> <주유도> <산수도> <단오 풍정도> <심계유목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87. 신익희 (1892~1956)
독립 운동가·정치가, 호는 혜공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10년에 한성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 · 법무 총장 · 문교 부장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회 부위원장이 되고, 자유 신문 사장 · 국민 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1948년에 제헌 국회위원으로 야당을 이끌었으며, 1956년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유세하러 가는 도중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88. 신입 ( 1546~1592)
조선 선조 때의 무장 시호는 충장이다.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 도사 ·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83년에는 온성 부사가 되어 북쪽 국경에 침입한 니탕개를 물리치고, 두만강을 건너가 오랑캐를 소탕하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삼도 도순변사가 다ㅚ어 충주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우다 패하자, 부하 장수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뒤에 영의정의 벼슬을 받았다.
89. 신채호 (1880~1936)
독립 운동가·사학자·언론인, 호는 단재, 또는 단생이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으며, 20세 때에는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논설을 쓰고, 영웅전과 역사책을 저술하여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을 북돋우기에 힘썼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 가입하고 국채 보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상하이와 베이징에 가서 독립 운동을 했으며, 옛 고구려 땅을 답사하여 국사 연구와 저술에도 힘썼다. 1926년에 ‘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였다가 체포되어 10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조선 상고사> <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사 연구초> <조선사론>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90. 신헌 (1810~1888)
조선 말기의 무신·외교가, 호는 위당이고 시호는 장숙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어 강화의 임장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후 좌참찬 겸 훈련대장을 지내고, 행지삼군부사 등을 거쳐 공조 판서에 올랐다. 1875년에 운요 호 사건이 일어나자 관중추부사로서 일본의 전권 대사인 구로다와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로 전권 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와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특히 예서를 잘 썼다.
91. 신홍식 (1872~1937)
독립 운동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30세에 크리스트 교에 입교하였다. 1913년에 협성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신앙 생활과 민족 단결을 호소하였다. 3·1 운동 때에는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여 체포되었으며, 풀려난 후에도 인천 · 원주 등지에서 종교 운동과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92. 신후담 (1702~1761)
조선 시대의 학자·문신, 호는 하빈이다. 이익의 문인으로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힘썼다. 당시 서양의 학문이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자 <서학변>을 지어 이를 비평하였다. 한편 소설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속열선전> <태평유기 <금회외편> <남흥기사> 등의 한문 소설을 많이 썼다. 그 밖에도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93. 신흠 (1566~1628)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호는 상촌 또는 현헌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15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감찰 · 병조 좌랑등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양재도찰방으로 신입을 따라 조령 싸움에 참가하였다. 그 뒤 도승지 · 병조판서 · 대사헌의 벼슬을 지냈다. 선조로부터 영창 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에서 쫓겨나 춘천으로 귀양갔다. 1621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에 올랐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전주에 피신시키고 돌아와 영의정에 올랐다.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고, 장유 ·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대가로 일컫어지며, 또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상촌집> <야언구정록> <산중독언> 등이 있다.
94. 신흥우 (1883~1959)
정치가,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1896년에 서재필 · 이승만 등과 협성회를 조직, 근대화 운동을 벌였다. 그 후 미국에 가서 남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1911년에 배재 학당에 제 3대 교장이 되고, YMCA 간부로서 기독교를 통한 민족 운동에 나섰다. 1920년에 조선 체육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가, 제 7대 조선 체육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27년에 이상재 등과 신간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지도했다. 광복 후 특명 전권 대사 겸 주일 대표부 대사를 지내고, 1949년에 대한 체육회장을 지냈다.
95. 심사정 (1707~1769)
조선 중기의 화가, 호는 현재이다. 일찍이 정선에게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뒤에 중국의 남화와 북화를 종합,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는 특히 산수화와 새 · 벌레 · 짐승 등을 잘 그렸다. 작품에 <강상야박도> <하경산수도> <모란도> <맹호도> <초충도> 등이 있다.
96. 심의겸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손암 · 황재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62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 좌랑을 거쳐 부수찬 · 교리 등을 지냈다. 1572년에 김종직의 제자인 김효원이 이조 정랑으로 뽑히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이듬해에는 자기의 아우가 이조 정랑으로 추천된 것을 김효원이 반대하여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동인 · 서인의 붕당이 이루어졌는데,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구세력을 서인이라 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선비들의 세력을 동인이라 하였다. 1584년 (선조 17년)에 부제학으로 있었으나 동인의 세력에 밀려나 물러났다.
97. 심정 (1471~1531)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소요정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1502년(연산군 8년)에 문과에 급제, 1506년에 중종 반정에 참가하여 정국 공신 3등으로 화천군에 봉해졌다. 그 뒤 형조 판서에 올랐다가 신진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쫓겨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남곤 ·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젊은 선비들을 모조리 죽였다. 1527년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나 김안로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98. 심충겸 (1545~159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양당이고 시호는 충익이다. 심의겸의 동생으로 1572년(선조 5년)에 문과에 급제, 예조 좌랑을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 참판으로 선조를 모시고 평양에 피란하였으며 이어 세자인 광해군을 모시고 성천까지 가면서 왜군과 싸웠다. 1594년에 병조판서에 오르고, 1604년에 호성 공신 2등으로 청림군에 봉해졌다. 글씨에 뛰었났다.
99. 안견 (1418~?)
조선 초기의 화가. 호는 현동자, 또는 주경이다. 도화원의 화원으로서 호군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1447년 안평 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하며, 이듬해에 <의장도>를 그렸다. 중국 송나라 · 원나라 시대의 그림 경향을 북종화에 가까운 수법으로 그렸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덕수궁 현대 미술관에 <적벽도> <다경산수도> 등이 소장되어 있고,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 대학 도서관이 소장 되어 있다.
100. 안민영 (1816~?)
조선 시대의 명창, 호는 주옹이다 1876년에 스승인 박효관과 함께 조선 역대 시가집인 <가곡원류>를 편찬 간행하여 시조 문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가곡원류> 속에는 그가 지은 시조 <영매가> 외에 26수가 실려있다. 그 밖의 저서로 <금옥총서> <주옹만필> 등이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들 우리 후손들이 함께 공유했음 하네요^^ 잘 보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