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설명한 유광천의 검시보고서를 보아도 매우 구체적으로 검시는 물론 사건 조사도 병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또인 유광천이 수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의 관리 즉 사또 급이 이와 같이 수사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 관리의 필독서라고 볼 수 있는 수사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사용된 수사집의 원본은 원래 중국 원나라 왕여(王與, 1261~1346)가 1308년에 저술한 책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 일본 등지에서 법의학 지침서로 널리 활용되었다. 특히 고려 중기인 문종 1년(1047)부터 인명살상에 관한 재판에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삼심제도를 실시했는데 『무원록』이 출판된 후 고려에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무원록』의 경우 점차 조선의 사회 구조가 중국과는 달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성향이 다르므로 『무원록』의 조사 방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무원록』이 간행된 지 100여년이 지난 세종 17년(1435), 『무원록』에는 검시하는 격례(格例)가 잘 갖춰져 있으므로 이과(吏科), 율과(律科)의 시험 과목으로 정하고 조사(朝士)들도 이를 익히게 하여 검험에 사용하자는 뜻으로 세종은 최치운을 중심으로 『무원록』의 해설을 명했다.
신주무원록, 1440년 초판 발행
이에 최치운 등은 명나라에서 발간된 『무원록(無寃錄)』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고 『세원록』과 『평원록』 등을 참고하여 세종 20년(1438) 11월에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완성했으며 1440년에 강원도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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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수사극 별순검의 검시장면 |
『신주무원록』은 검시의 지침을 다룬 법의학서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범죄와 얽힌 생활사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는 생활사 연구의 자료이기도 한 귀중한 사료이다.
물론 동양의 검시는 서양과 달랐다. 동양의 경우 시신을 해부하지 않으므로 검시의 핵심은 바로 시체의 안색(顔色)을 관찰하는 방법이었다.
실제 『신주무원록』에 표현된 색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적색 계통만 보아도 적색에서부터 적자색, 적흑색, 담홍적, 미적, 미적황색, 청적색 등 여러 단계로 색이 세분화되었다. 이와 같은 안색의 관찰은 전통적으로 색(色)을 중시하는 동양의학의 지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색은 곧 ‘기(氣)의 발화(發化)’라는 『황제내경』의 사상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한편 시체의 상태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안색이 매우 달랐는데 이를 구별하는 일 또한 중요하였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시반의 변화를 정확히 안다면 거꾸로 사망 후 경과 시간을 추급하여 사망 일자를 과학적으로 추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상흔 위장 찾는 방법도 매우 발달
또한 상흔의 위장(僞裝)을 찾아내는 방법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가령 타물(他物)로 구타, 살해한 경우 상흔이 푸르거나 붉게 나타날 것이 틀림없지만, 갯버들나무의 껍질을 상처 부위에 덮어두면, 상흔 안이 짓무르고 상하여 검은색이 되는 등 구타 흔적을 위조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손으로 만져보아 부어오르거나 단단하지 않으면 위장의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밖에도 칼로 살해한 후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경우, 범인이 검시인들을 사주하여 시체의 상처에 초를 발라 상흔을 지운 경우,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끓는 물에 데여 죽은 경우, 얼어 죽은 경우 등 그 상황에 맞게 다양한 약재와 보조도구를 사용하는 과학적인 판별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시신을 해부하지도 않고 이와 같이 엄밀한 검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신주무원록』의 내용 전체가 검시의학에만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집행상의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마련했는데, 검시의 기본은 바로 정확성과 엄격함이었다. 예컨대 검시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 행인(行人)과 이인(吏人) 등에게는 잠시라도 검시관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다짐받고 또 이를 검시관이 감독하였으니 이들이 조금이라도 뇌물에 연루될까 미리 예방하였던 것이다.
검시의 기본은 정확·엄격성
이처럼 엄밀함과 정확성을 기하려는 정신은 ‘타물(他物)’, ‘자액(自縊)’, ‘중독(中毒)’ 등과 같은 용어의 사용뿐만 아니라 검안 문서의 표현에도 나타난다. 가령 ‘피부가 파손되었는데 피가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며, ‘피부가 약간 손상되어 피는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신주무원록』이 강조하는 정확한 용어 및 서술 정신은 이를 활용하려는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정확한 번역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끔 했고, 그 이해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법의학 지식과 행형상(行刑上)의 절차가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살해 후 자살한 것처럼 시체의 목을 매 조작한 ‘조액사(弔縊死)’가 가장 판별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죽기 전에 즉시 목을 매달면, 시체의 상흔이 스스로 목을 매 죽은 자액(自縊)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을 맨 장소가 목을 맬 수 있는 높이인지, 목을 맨 들보나 기둥 위에 흔적이 어지럽게 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목을 매단 끈이나 줄이 단단하게 탄성을 유지하면 자액이지만, 끈이 느슨하고 늘어지면 이는 시체를 옮겨 매단 흔적임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시체를 관찰하면서 ‘눈을 감았는지 여부’를 주의 깊게 검험하도록 하였다. 타살이라면 입과 눈을 벌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는 칼에 찔린 경우, 독을 먹은 경우, 서로 구타 후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등에서 검시를 통해 신중하게 판별해야 할 사항이었다.
독약을 먹고 죽은 경우, 은비녀를 인후(咽喉) 안에 깊이 넣었다가 잠시 후 꺼내면 비녀의 색이 검어진다고 적었다. 독사(毒死)의 경우, 전적으로 은비녀에 의지했다.
시대 상황 맞는 특유의 수사 기법
이 점은 『신주무원록』이 갖고 있는 조선 특유의 수사기법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비상으로 인명을 해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상으로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흔히 쓰던 '비상'은 비소와 황의 화합물인데, 은은 비상의 황과 결합하면 검게 변한다.
상흔을 변질시키지는 않았다 해도 사체가 외부에 노출되어 시일이 오래 경과되면 시반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법물(法物)을 사용한 과학수사가 더욱 빛을 발한다.
법물이란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 도구 및 수단들로 널리 알려진 것은 100% 순도의 은비녀이며 그밖에 지게미(糟), 초(醋), 파, 소금, 매실과육은 물론 창출(蒼朮), 조각(皂角) 등의 약재도 사용되었다. 지게미, 초, 파, 매실과육 등은 사체의 상흔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고 창출, 조각은 시체가 놓인 곳의 악취를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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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수무원록언해의 한 페이지. |
이런 긴요한 법물(法物)을 검시에 닥쳐서야 검시 관리들이 이웃이나 피고의 집에서 얻어다 사용하는데, 시장이나 공장에서 동(銅)을 섞어 만든 가짜 은비녀들이 많아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고 적었다. 따라서 백성의 원망과 억울함을 없애려면 관(官)의 관리 하에 품질 좋은 은으로 은비녀를 만들어 봉하여 간직했다가 검시 전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시대 변천에 따른 수사집 보완>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 및 병조호란 등으로 사회의 기강이 많이 무너지고 범죄 수법도 다양해지자 과거의 법의학 지식만으로는 사건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영조 24년(1748)에 간행된 구택규의 『증수무언록(增修無寃錄)』은 이와 같은 변화를 반영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에서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새로운 사건 등을 새로이 삽입했다. 구택규의 아들 구운명(具允明, 1711~1797)이 더욱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버전을 내놓았다.
그는 그동안 조선에서 누적된 다양한 검험 지식과 수사 기법 가운데 기록할만한 것은 모두 첨가하여 『증수무언록대전』을 편찬했다. 정조는 서유린(徐有隣, 1738~1802)에게 『증수무언록대전』을 언해하도록 명령하여 1796년 『증수무언록대전』과 『증수무언록언해』가 함께 출간되었다. 전자는 한문으로 되었고 후자는 한글본이었다. 이 두 책은 1905년 새로운 형법이 반포된 이후에도 검시 지침서로 계속 활용되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검시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우선 그 시신의 혈속(血屬)과 이웃에게 그 신원을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후 시신이 놓인 위치와 상태를 정확히 측량하거나 관찰하여 기록하는데, 그 자리가 검시하기에 마땅치 않아 시신을 옮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일을 기록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다음 시신의 상태와 상처를 샅샅이 관찰하고 치명상은 무엇인지 확정하도록 한다. 이때에는 시장(屍帳)에서 인체의 부위를 그려놓은 앙면(仰面)과 합면(合面)의 각 부위의 상처를 기록하도록 했다. 다음 시신을 평평하고 밝은 곳으로 옮기고 원래 입고 있던 의복과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기록한 뒤, 원고와 피고 및 관련된 가족, 이웃 등에게 확인시켜 서명하도록 하고 있다.
초검관은 복검 참여 못해…검시 객관성 유지
특히 초검관(初檢官)은 복검할 때,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검시의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상급 기관의 복검이 여의치 않을 경우 대처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했다. 송철의 교수 등의 『역주 역주증수무언록언해』에서 인용한다.
‘검시의 정한 기한이 있어서 잠시도 늦추기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니, 혹 인근의 관리가 유고(有故)하고 다른 고을의 원(員, 같은 도에 있는 먼 고을의 수령)이 관할 지역 내에 지나감을 만나면 본관이 문첩(文牒)하여 복검을 청하는 것이 곧 국조(國朝)의 옛 일임에도 지금은 폐지하여 거행하지 않으니 사리(事理)가 마땅히 단단히 알려 경계하여 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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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수무원록언해의 신체부위표시 앙면과합면. |
『증수무원록언해』에서는 살인에 쓴 칼이 오래돼 핏자국을 찾기 어렵거든 숯불에 달군 후 고초(高醋)라는 강한 식초를 뿌리면 핏자국이 드러난다고 한다. 서강대 화학과 이덕환 교수는 ‘오래된 피에 남아있던 철이온은 소량이라도 티오시안산과 반응하면 붉은색이 드러난다’며 ‘고초에는 티오시안산이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방울도 채 안 되는 혈흔을 탐지할 수 있는 현대의 루미놀 기법에 못지않은 과학수사기법인 셈이다.
현대 못지않는 과학 수사기법
현대의 루미놀 기법에서는 루미놀에 과산화수소수를 혼합한 용액을 사용한다. 혈흔을 찾고자 하는 곳에 이 혼합액을 뿌리면 과산화수소수가 혈흔의 혈색소와 만나 산소가 떨어져 나가고 이 산소가 루미놀을 산화시킴으로써 파란 형광 빛을 낸다. 범죄 현장이 실내인 경우 어둡게 한 후 루미놀 기법을 쓰면 아무리 작은 혈흔이라도 루미놀을 만나 반딧불처럼 빛난다.
『증수무언록언해』에 나타난 다음 기록은 당시에 얼마나 과학적인 수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상처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흔적이 의심스러운 부위가 있으면, 먼저 그 부위에 물을 뿌려 적신 후에 파의 흰 부분을 짓찧어 상흔이 있는 곳에 넓게 퍼 바르고 초에 담가 두었던 종이를 그 위에 덮어둔 채 한 시간 여를 지난 후 이를 걷어내고 물로 씻으면 상처가 바로 나타날 것이다.’ 간혹 범인이 사체를 부검하는 데 참여하는 관원을 매수하여 꼭두서니와 같은 풀을 식초에 담갔다가 상처에 바르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면 상흔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증수무언록언해』는 ‘의심스럽다고 생각이 들면 사또는 반드시 감초즙으로 해당 부위를 닦도록 하라. 진짜 상처가 있었다면 즉시 나타날 것이다’라고 적었다.
시신의 추정 사망일자도 계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성한(盛寒, 한추위) 때에는 5일이 한더위 때의 1일과 같고, 반달이 여름의 3∼5일과 같다. 봄·가을은 기후가 온화해서 2, 3일이 가히 여름의 1일에 비견될 수 있고, 8, 9일이 가히 여름 3, 4일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살찌고 어린 사람은 상하기 쉽고 여위고 늙은 사람은 상하기 쉽지 않으며, 또 남쪽과 북쪽은 기후가 같지 않고 산 속은 춥고 덥기가 두돈(陡頓, 빠르게 변하는 것)하여 일정하지 않으니 그때 그때 가서 변화를 두루 살피는 일에 (요체가) 있다.’ 여자를 검시할 때에는 특별한 주의를 하도록 했다.
‘부녀자를 검험함에는 가히 수치심을 피하지 못하는 법이다. 부녀자를 검험함에 있어서 상처 입은 곳이 없으면 모름지기 음문(陰門)을 보라. (이는) 여기로부터 칼을 배 안으로 들여보냈을까 의심함인데, 살갗에서부터 거리가 얕으면 배꼽 상하에 적게 피가 생긴 것이 있고, 깊으면 없는 법이다. 부녀자가 산문(産門)에 상처 입음으로 인하여 죽어 살갗과 살이 소화(消火, 썩어 업어지는 것)한 부녀자는 그 신문(숫구멍)골(顖門骨)과 가골(架骨)이 다 검붉고 붉은 색이다. 처녀의 주검을 검험함에는 수생파(收生婆, 해산시키는 여자)로 하여금 중지갑(中指甲, 장지 손톱)을 베어 버리고 솜으로써 싸서 감고 주검의 가족과 이웃 여자 두세 사람을 함께 보게 하여 산파로 하여금 솜 감은 손가락 끝을 음호(陰戶) 안에 시험하여 검은 피가 있으면 곧 이는 처녀이고 없으면 곧 아니다.’
해부하지 않고 겉모습만 살핀 한계도
물론 『신주무원록』의 기록에는 틀린 부분도 있다. 젖은 종이에 질식사한 경우 시체의 배가 부어오른다는 내용 등이다. 서울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는 “질식사의 경우 혈액이 고여 내부 장기가 부을 수 있지만 시체의 배가 부어오를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시체를 해부하지 않고 시체의 겉모습만 살폈던 조선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다.
조선시대에도 몽타주를 활용했는데 이를 ‘용파’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글로 사람의 생김새 등을 묘사했다.
키와 얼굴빛, 머리 모양과 그 사람만의 특이한 생김새, 주로 얼굴이나 팔 등의 상처 혹은 뜸을 놓았던 부위 등을 기록해 포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는 현대의 유전자 감식 같은 기술이 없으므로 용모나 병력(病歷)에 따른 상처, 혹은 문신 등을 수사에 참조했다.
『증수무원록언해』에서도 검시할 경우 반드시 ‘생전에 팔ㆍ다리가 부러졌는지, 곱사등이였는지, 조막손이나 절름발이였는지, 대머리였는지, 사마귀나 혹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병의 상처나 문신, 뜸을 뜬 자국, 옴이나 버짐, 종기나 뾰두라지 부스럼 등의 흔적이 원래 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못 박았다.
흥미 있는 것은 벼락에 맞은 사람의 시신 등 자연 재해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었다는 점이다.
‘시신이 살빛이 누렇게 타고 온몸이 무르고 검으며 두 손이 혹 쥐어졌거나 혹 흩어져 있고 입이 열려지고 눈이 튀어나와 있고 이후(耳後), 발제(髮際)가 타서 누렇고 머리와 상투가 흐트러져 있고 불에 탄 곳은(천둥과 번개를 입은 곳) 피부와 살이 딱딱하며 단단히 오그라들어 있고 몸 위의 옷이 천둥과 번개에 태워졌거나 혹 불타지 않았다. 상처 난 흔적이 머리 위와 뇌후(腦後)에 있으되 뇌봉(腦縫)이 많이 터져 있다. 귀밑털과 털이 불꽃에 태운 것과 같고 위부터 아래가지 손바닥만한, 들뜬 살갗이 검붉으며 붉은색이 있으되 살은 상하지 않고 가슴, 목, 등, 팔뚝 위에 혹 전자(篆字) 흔적 같은 것이 있다.’ 술에 취하여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많은 내용을 기록했다.
‘먼저 여러 사람들과(증인) 처음에 함께 자리했던 회수등인(會首等人, 술을 먹던 사람 중 어른)을 모아 놓고서, 여러 사람 앞에서 오작(仵作), 행인(行人)을 시켜 끓인 물로 씻기고 이를 마친 뒤에 먼저 몸에 있는 것을 검험하여 만일 상처 흔적이 없으면 곧 이는 술에 취하기를 과도하게 하여 심폐(心肺)가 부풀어 올라 죽은 것이니 손으로 두피(뱃가죽)를 두드리면, 팽창했기 때문에 소리가 맞추어진다.
(중략) 무릇 술을 먹어 찧어지고 밟혀 속이 상하기에 이르면 또한 가히 죽을 수 있지만, 그 모습은 매우 밝히기 어렵다. 그 시신이 바깥에 특별히 다른 연고가 없고 오직 입과 코, 항문에 음식과 똥이 피를 띠고 흘러 나와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만나면 모름지기 자세히 체구(體究, 정성스럽게 구문하라는 뜻)하되, 일찍이 다른 사람과 서로 다투어 이로 인해서 찧어지고 밟혔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체구하라. 목격한 사람이 증언한 것이 분명해야만 바야흐로 죽은 정황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과학기술의 한계로 인해 황당한 내용이 과학수사 기법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핏방울의 응고 여부로 친자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핏방울 응고 여부로 따진 친자확인법
중국 무술영화에서 친자를 확인할 때 자주 나오는 방법이기도 한데 조선 후기 혼란된 사회의 영향으로 친자 등을 확인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등장한 방법이다.
‘친자나 형제가 어려서부터 나뉘어 떠나 있어서 기억해 내어 알고자 하지만 진짜와 거짓을 가리기 어렵거든, 각기 찔러서 피를 내어 한 그릇 안에 떨어뜨리면 진짜는 서로 합쳐져 하나가 되고 진짜가 아니면 합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생피가 소금과 초를 만나면 엉겨지니 먼저 사용할 그릇을 당면(當面, 관원이 직접 보는 곳)한 채로 씻어 맑게 하거나 혹 특별히 새 그릇을 가져다가 시험하라. 또 피를 떨어뜨려 물에 넣을 때 만일 그릇이 크고 물이 많아 둘의 거리가 멀면 곧 능히 합쳐지지 못할 것이고 혹 물에 떨어뜨릴 때 약간의 앞뒤(시간차)가 있으면 곧 피가 차고 덥기가 다름이 있어서 또한 능히 합쳐지지 못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친자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각각 피를 내어 한 그릇 안에 떨어뜨리는데 친자라면 하나로 응결되고 아니면 응결되지 않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혈청과 혈액의 응고에 대한 생리적 지식을 조금이라도 아는 현대인이라면 웃고 말겠지만 이와 같은 내용이 유명한 법의학지침서에 삽입되어 있으므로 부모형제가 아닌 사람들이 호부호형(呼父呼兄)했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김호 박사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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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사관 모습(TV 한장면). |
한편 조선판 CSI 과학 수사대 드라마로 TV에서 방영된 「별순검」은 『증수무원록』을 바탕으로 수사관 별순검이 지휘하는 과학 수사 정황을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특수 경찰 이야기로 볼 수 있는 「별순검」은 기존 사극이 주로 연애와 역사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반해 조선시대에도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범인을 몰아가는 점 등이 다소 색다르다는 평을 받았다. 『증수무원록』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원전이 탄탄한데다가 추리로 범인을 찾는다는 내용은 어느 시대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부각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MBC-TV 드라마 「다모」에서의 다모(茶母)는 원래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민계층에서 선발된 격이 낮은 여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조선 중엽 이후 포도청에서 선발한 여자 비밀형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외(內外)의 법도가 엄해 외간남자는 남의 집 안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규방(閨房)사건을 수사하는 데는 여자가 적격이기 때문이다.
다모들은 주로 염탐과 탐문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임무였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김자점(金自點) 역모사건도 다모의 정보로 전모가 드러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계속)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