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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제 1화
푸른 발에 걸린 삽화
박래여
성탄절이다.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오면 기억의 창고에 깊숙이 숨어있던 그것이 발아를 한다. 잊은 줄 알았지만 아직도 서늘하다. 병치레 잦았던 나는 연약했고 또래보다 작았지만 재잘재잘 까르르 까르르 잘 웃고 잘 뛰어다니는 참새 같은 아이었다. 그랬던 내가 그날부터 애어른이 되어버렸다. 벙어리는 아니었지만 조용하고 말이 없어졌다. 누구에게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천사였던 때가 있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대략 네다섯 살 전후까지 아닐까.
우리 집 뒤란은 온통 굵은 대나무 밭이었다. 동네에서 대나무집으로 통했다. 대나무는 바람이 흔들어줄 때만 울었다. 사그랑사그랑, 우우우우우. 대나무 우는 소리는 슬펐다. 할머니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대나무 속에 스며서 그렇다고 했다. 대나무에 든 영혼은 밤에 슬그머니 대나무를 빠져나와 칭얼거리는 아이를 잡아간다고 했다. 대나무 영혼은 밥투정 하는 아이, 부모 말씀 안 듣는 아이, 거짓말 하는 아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대나무 숲에는 육이오 동란 당시 피난처로 파 놓은 깊은 방공호도 있었다. 입구를 솔가리묶음으로 막아두었지만 방공호에는 할머니가 빚은 밀주가 들어 있곤 했다. 방공호를 지나 올라가면 언덕 밑에 푹 꺼졌지만 편편한 터가 나왔다. 텃밭으로 활용하던 자린데 대나무가 울창해지자 쓸모를 잃어버렸다. 붉은 황토 땅이었다. 아버지는 언덕 아래의 황토를 파내 구들도 고치고 굴뚝도 고쳤다. 언덕의 아랫부분을 깊이 파내다보니 둥그스름한 반원형의 굴이 형성되었다. 언덕은 반원형의 지붕이 되었고 그 아래는 평평한 바닥이 되었다. 반달모양의 굴은 비가 올 때도 그 속에 들어가 앉으면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우리들 아지트였다. 대나무가 바람도 막아주고 언덕이 추위도 막아주었다. 겨울에는 굴 안쪽에 모닥불도 피울 수 있었다. 봄가을에는 아늑하고 따뜻했지만 여름에는 습하고 모기가 많았다.
우리는 틈만 나면 그 곳으로 모였다. 소꿉놀이를 했다. 굴 입구를 온갖 나뭇가지와 대나무가지로 울타리를 만들고 사립문도 만들었다. 문을 열면 굴 한쪽에는 대나무 잎 위에 낡은 거적때기를 깐 포근한 방이 있었고,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벽 쪽으로는 사금파리나 옹기 깨어진 것들을 차려놓은 부엌도 있었다. 꿈의 집이었다. 언니들은 그 곳에서 동화책을 읽고, 학교 숙제도 하고, 공부도 했다. 흐린 날에는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았지만 촛불을 켤 수 있는 굴집을 우리는 좋아했다. 우리들의 겨울옷이라는 게 신기하다. 할머니가 솜을 넣고 누벼준 무명 저고리와 속곳, 까만 치마에 버선이었지만 따뜻했다. 작은언니는 단발머리, 큰언니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땋아 늘어뜨렸다. 나는 엄마 같은 큰언니를 작은언니보다 더 따랐다.
종소리가 들렸다. 은은하다 못해 들리는 듯 마는 듯 했다. 오리정도 떨어진 초등학교 옆의 교회에서 치는 종소리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두 언니를 교회에 못 다니게 했다. 서양 귀신에게 잡혀 간다고 했다. 아무리 어른이 말려도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설렜다. 교회에 가면 떡도 주고 예쁜 장갑이나 공책, 동화책을 선물로 받았다. 다른 아이들은 선물을 받기 위해서라도 기를 쓰고 교회에 갔지만 우리는 어림도 없었다. 할머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나무 숲의 우리 아지트에 들어가 예수님의 탄생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아기예수 탄생은 학교에서 배웠는지, 할머니 몰래 친구 따라 교회를 들락날락했던 큰언니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성탄절은 행복한 날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할머니도 없었고, 우리 아지트에는 따뜻한 불도 있었다.
큰언니는 성탄절 이브라고 했다. 나는 큰언니 등에 업혀 우리들의 비밀아지트에 들어갔다. 그 곳에는 이미 나랑 동갑내기 상후랑 상후의 사촌 누나 순이를 비롯해 동네 아이들이 대여섯 명 모여 있었다. 둥그스름하게 파낸 언덕 밑에 장작불도 타고 있었다. 언니들이 들떠서 소리 질렀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야. 예수님이 오늘 밤 태어나실 거야. 옥아, 니는 아기 천사다. 아기 천사는 구시에서 잠을 자는 거야.’ 나는 얌전한 아기천사가 되었다. 헛간에 방치해 놨던 타원형의 대나무 소쿠리가 구유로 변했다. 나는 타원형의 커다란 대나무 소쿠리에 뉘어졌다. 아기천사처럼 소쿠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이 대나무가지에 걸려 나풀거렸다.
“자 구시를 빙 둘러 앉아 기도하는 거야.”
큰언니는 아이들을 통솔했다. 아이들은 나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앉아 두 손을 모우고 눈을 감았다. 기도가 시작되었다. 큰언니의 목소리는 댓잎 흔들리듯 사락거렸다.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시니 우리를 복되게 하소서. 아멘”
고요하다. 나는 살그머니 실눈을 떴다. 쭉 뻗은 대나무들이 일렁거렸다. 순간 대나무 끝에 시커먼 그림자가 앉아 내게로 쏟아졌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고함을 지를 수도 없다. 나는 끅끅 숨이 넘어갔다. 대나무 소쿠리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대나무소쿠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때마다 내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으악 으악’ 헐떡거렸다. 대나무 소쿠리가 나를 꼼짝 못하게 옳아 맸다.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나를 옭아맸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언니들이 눈을 떴다.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큰 언니가 뒤뚱거리는 소쿠리를 꽉 잡았다. 작은 언니는 내 손을 잡았다.
“가시나가 와 이라노? 옥아, 옥아. 가만히 좀 있어봐라. 누가 니 잡아 묵는다나.”
“이 가시나 병이 또 도진기다.”
눈을 번쩍 떴다. 상후가 넋 나간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상후를 외면하고 큰언니를 봤다. 큰언니는 나를 일으켜서 품에 안았다. 그제야 나는 헐떡임을 멈추었다. 언니를 꽉 끌어안았다. 언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엉아야, 누가 죽을 끼다. 무서워. 할매한테 가자.”
“할매는 고모 집 갔다 아이가. 니 또 헛소리 하모 니만 냉기고 우리는 교회에 가끼다. 아기 예수님 만나러 가끼다. 그랑께내 할매 찾지 말고 우리끼리 놀모 된다.”
그때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가 대밭에서 노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침 첫차를 타고 고모 집에 가셨다. 큰언니 말에 의하면 고모가 해산을 했단다. 고모는 다섯 번째 딸을 낳았다. 손자를 학수고대하던 고모의 시어머니는 고모가 또 딸을 낳자 해산구완도 작파 했다는 소문이 날아들었다. 할머니는 미역국을 끓여 딸을 보러 갔다. 안사돈과 쌈질을 할 것이다. 할머니 성질에 그러고도 남았다. 고모가 딸을 낳을 때마다 할머니와 안사돈 간에 시비가 붙었다. ‘이판사판이다. 한 번 붙자. 니가 사돈이모 다냐. 내 딸 너거 집 귀신 안 맹글끼다.’ 그러면서 고모를 끌고 오려고 했지만 번번이 고모부 때문에 실패했단다.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 빤하다. 고모부는 칠삭둥이다. 고모가 잠깐만 안 보여도 ‘우리 색시 오데 갔노. 옴마, 우리 색시 오데 갔노.’ 징징 짜는 바람에 고모 시어머님은 며느리가 아무리 미워도 쫓아낼 수가 없다. 고모가 딸을 낳을 때마다 한번 씩 난리를 쳤지만 할머니는 사돈끼리 한바탕 하고 또 의좋게 한 이불 덮고 자고 새벽같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할매 올 기다. 고모 집에서 벌써 나왔다.”
나는 언니의 품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 끝에서 대나무 우듬지가 한들거렸다. 나를 덮칠 것 같던 시커먼 그림자는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들은 다시 의기투합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도했지만 나는 웅크렸다. ‘가시나가 겁은 많아서. 괜찮다니까.’ 언니가 달랬지만 소용 없었다. 구유 속에는 나대신 헝겊인형이 뉘어졌다. 나는 여전히 언니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엉가, 집에 가자. 무서워.”
나는 큰언니에게 자꾸 보챘다. 내게 할머니의 빈자리는 넓었지만 언니들에게는 꿀같이 달았다. 방학도 했겠다. 학교 갈 일도 없는 겨울, 아버지는 겨울동안 지리산 골짝의 산판에 가서 산다. 화전민촌에 기거하면서 벌목 작업을 한다. 봄에 해동을 해야 집에 올 수 있다.
“가시나야 할매는 낼 온다카이. 자꾸 그라모 니 혼자 냉기고 우리는 교회 가끼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상후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나는 상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상후는 입속으로 들어가는 코를 소맷부리로 쓱 문지르며 바보처럼 웃었다. 멍텅구리. 나는 상후를 째려봤다. 도톰하게 솜을 놓아 만든 상후의 누비옷 소맷부리는 콧물로 반질반질했다.
“옥아, 쪼매만 있다 고매 꾸 주게. 니는 방에 들어가 누라. 이불 덮고 누 있으모 따시다. 상후야 니는 옥이랑 방에 들어가 놀아라.”
“싫어. 아기 예수도 싫고, 상후도 싫어. 집에 갈기다. 할매한테 갈기다.”
나는 토라져서 언니들 곁을 떠났다. 아무도 잡지 않았다. 대나무밭에서 집까지는 비탈길이었고, 대나무 잎이 깔린 길은 미끄러웠다. 나는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픈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며 울었다. 내 울음소리가 커지자 ‘옥아, 옥아’ 언니들이 합창을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명저고리 소맷부리로 눈물을 쓱 닦고 대밭을 벗어났다. 언니들이 등 뒤에서 시시덕거렸다.
“가시나가 순 고집쟁이다. 놔도삐라. 집에 갔다가 심심하모 올라올 기다.”
“우리 고매 꾸 무까? 불에 묻어 놓고. 상후 니가 아기예수 해라.”
우리 집 안방에는 고구마 가마니가 가득 차 있었다. 고구마는 겨울 양식이다. 겨울이면 고구마는 삶아서도 먹고, 구워서도 먹고, 말려서도 먹었다. 보리쌀에 쌀 한 줌 섞어 고구마만 잔뜩 올려 지은 고구마 밥을 먹었고, 고구마 죽도 먹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아무도 가난한 줄 몰랐다. 고구마가 밥인 줄 아니까. 겨울밤이면 화로 속에서 고구마가 익고, 생고구마를 깎아 먹으며 허기를 채웠고 고구마 가마에서 고구마가 썩어가며 풍기는 냄새는 우리랑 동고동락 하는 익숙한 냄새였다.
집에 왔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내가 잠을 깼을 때는 밤이었고 할머니가 내 곁에 누워계셨다.
“할매, 할매, 온제 왔어?”
나는 할머니의 거죽만 남은 젖을 만지며 자꾸만 할머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우리 옥이가 할매를 자꾸 찾아서 선걸음에 왔니라. 니가 열이 많이 나서 걱정 했더이 인자 괜찮것다. 낮에 엉가들이 니를 몬살고로 굴더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고모는 괜찮더라. 갓난쟁이도 건강하고. 그란데 우짠지 맴이 싱숭생숭 한기라. 니가 자꾸 할미를 불러서 고모 집에 못 있것더라. 집에 오길 잘 했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할머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할매, 누가 죽을 끼라. 아까 대밭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확 덮치는데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아푼 기라. 할매가 집에 올 줄 알았어.’ 할머니는 조용조용 내 등을 토닥거려 주셨다.
다음 날 아침 댓바람이었다. 두레상을 펴고 밥을 먹던 중이었다. 갑자기 동네를 들썩거리게 하는 곡성이 들렸다. 할머니는 ‘이기 먼 소리고?’하면서 삽짝으로 튀어나갔고, 밥숟가락을 팽개치고 두 언니도 튀어나갔다. 나도 튀어나갔지만 내 짧은 다리로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나는 ‘할매’를 부르며 울었다. 할머니는 내 울음소리에 놀라 돌아왔다. 허둥지둥 나를 업고 다시 곡성이 울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집 삽짝 주변은 이미 동네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구루마를 끄는 황소는 느긋하게 꼬리로 제 등을 쓰다듬으며 먼 눈 바라기를 하고 서 있었다. 구루마를 에워싼 물레방앗간 집 식구들은 오열하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우짜노. 이기 무신 날벼락이고. 일어나 보거래이. 야야, 일어나 보거라.’ 물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물레방앗간 집 양촌할머니의 통곡이 하늘을 덮었다. 양촌할머니는 구루마 옆에 퍼질러 앉아 꺽꺽 이상한 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앞집 아저씨 옆구리를 슬쩍 밀쳤고 고개를 앞으로 쑥 내미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할머니 어깨 너머로. 구루마에 실린 거적 밑으로 나온 시퍼런 발 두 개. 맨발이었다. 강물처럼 검푸른 빛깔이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와들와들 떨었다. 할머니의 손이 내 엉덩이를 꽉 잡았다.
물레방앗간 집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다. 양촌어른, 그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하던 물레방앗간의 머슴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이 두고 간 집과 물레방앗간을 차고 앉아 부자가 되었다. 아래위채 날아갈 듯 멋진 기와집이었고, 솟을 대문이 우뚝 섰지만 사람들은 그 집 앞을 지나다니길 꺼렸다. 소작농으로 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그는 자린고비였다. 싸라기 쌀조차 고리채를 받았다. 양촌어른은 보통사람보다 큰 키에 다부진 몸이지만 염소수염을 하고, 머리에는 유건만 썼다. 쥐꼬리만큼 붙은 허연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하게 뒷짐을 지고 다녔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기며 ‘노랭이’라 부르며 조롱했지만 그 앞에서는 깍듯이 양촌어르신이라고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양촌어른은 동네 앞을 흐르는 도화강가에 물레방앗간 두 채를 가지고 있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양촌어른의 물레방앗간을 이용하여 쌀, 보리쌀, 밀 등, 곡식을 빻았다. 자린고비로 소문난 양촌어른보다 양촌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집 살림을 주관하는 것은 양촌어른이 아니라 일찌감치 언문을 익혔던 양촌할머니였다. 양촌할머니는 이 씨 가문의 몰락한 양반의 후예라고 했다. 양촌할머니는 아녀자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 덕으로 집에서 천자문을 읽었고 일본인이 만든 공립 초등학교였던 일신학교를 다녔다.
양촌할머니는 열일곱 살에 지리산 함양 땅에서 산청 땅 우리 동네로 시집을 왔다. 양촌어른과 달리 후덕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동글동글한 얼굴, 총기어린 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나 범접하기 어려운 야무진 구석이 엿보였고 기품이 있었다. 뽀얀 피부에 미인은 아니었지만 귀여운 생김새였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은 그녀가 채송화를 닮았다 해서 채송화라 불렀다. 양촌할머니는 시집을 와서도 채송화 마님으로 통했다. 그녀는 양촌어른 몰래 소작인들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그 집이 잘 사는 것도 양촌할머니 덕이라고 했다.
우리 동네에서 공처가 이야기만 나오면 단연 양촌어른이다. 양촌어른이 양촌할머니께 꼼짝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한 탯줄에 아들 다섯을 줄줄이 낳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출가를 하면 그 집안의 대를 잇는 것이 의무사항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사실 새댁시절 양촌할머니는 소박데기 될 뻔했다. 양촌할머니는 시집오자마자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았다. 물론 3년이 지나도록 태기도 없었다. 양촌어른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집안의 대 끊어지게 생겼다고 첩을 얻던지 새장가를 가라고 닦달했다. 양촌할머니는 뿔났다. 친정으로 피정을 가버렸다.
양촌할머니의 친정 인근에 금오암이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고 친정 부모님은 그 절의 독실한 불자셨다. 양촌할머니 역시 어려서부터 그 절에 다녔다. 금오암 주지 스님의 양딸이라고 알려졌을 정도다. 시댁에서 도망치다시피 친정으로 떠났던 양촌할머니의 의지 처는 부처님이었다. 날마다 그 절에 가서 기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댁으로 돌아갈 염치도 없어 아예 그 절에 눌러앉아 삭발을 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었다. 새댁은 싱숭생숭 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또 금오암에 올라갔다. 부처님 앞에 앉으니 서러움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새댁은 울면서 백팔 배를 했다. 백팔 배를 하다가 기진하여 부처님 앞에 쓰러졌다. 비몽사몽간에 꿈을 꾸었다.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작은 호리병 다섯 개를 주며 네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라 했다. 호리병 다섯 개를 품에 안고 깜짝 놀라 깼다. 백팔 배를 마치고 나와 주지스님께 꿈 이야기를 했다. 주지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채송화야, 이제 네 업이 다 풀렸나 보다. 사실 그 집안에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있다. 그 귀신이 너를 붙잡고 안 놓아준 탓에 아팠다. 이제 너의 수호신장이 튼튼해졌다는 뜻이다. 너의 수호신장이 관세음보살님이라니 어찌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겠나. 이제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이니 시댁으로 들어갈 일만 있을 게다. 시부모님께 잘 하고 남편에게도 잘 해야지. 집에 가면 아마 좋은 일이 있을 거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마라. 첫 아들은 용왕님께 바쳐야 집안에 우환이 없을 게야. 잊지 마라. 또한 해마다 도화강에 용신제를 지내야 한다. 꼭 명심해야 하느니라.”
그 날 양촌할머니가 절에서 돌아오니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촌어른이었다. 친정집에서 두 부부가 합방을 했다. 양촌할머니는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댁 식구들의 눈칫밥을 먹는 것도 잠깐이었다. 입덧을 했고, 그해 겨울에 옥동자를 분만했던 것이다. 양촌할머니는 첫 아들을 안고 금오암을 찾아갔다. 용왕님께 바친다는 뜻으로 삼신 각에 아들의 이름을 올리고 금오암 주지스님 주선으로 정갈하게 제수거리를 준비해 도화강에 가서 용왕제를 지냈다. 아들은 튼실하게 잘 자라주었고 내리 4형제를 더 낳았다. 양촌할머니는 딸이 한 명만 있었으면 하다가도 이것도 오감타 싶어 욕심을 접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모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안 카드나. 그 말이 딱 맞는 기라. 상후 어매가 오죽하모 집을 나갔것나. 노랭이가 올매나 며느리를 못 살게 굴었시모 그랬시까. 보물 훔쳤다는 것은 누명이고 아들이 집을 비우모 며누리 방에 들어갔다는 기라.”
“쉬,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요. 마님 귀에 들어 가모 우짤라꼬.”
사람들이 수군수군 했다. 나는 시퍼런 발을 더는 볼 수 없어 할머니 등에 얼굴을 파묻고 사람들 수군거림을 들었다. 양촌할머니의 큰 아들 이름은 용덕이다. 용왕님의 덕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었다. 용덕이는 양촌어른의 뒤를 이어 물레방앗간 주인이 되었다. 그 용덕이가 방앗간 물레에 빨려 올라가 비명횡사를 한 것이다. 그 곳에 용덕의 아내는 없었다. 용덕의 아내는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미인이었다. 타지에서 들어온 여자였다. 읍내에 다방이 처음 생겼을 때 다방 아가씨로 들어왔다. 용덕이 첫눈에 반해 쫓아다녔고 양촌어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감행했다. 그들 부부 사이에 상후가 태어났다. 나랑 동갑내기였다. 그녀는 시댁에 들어왔지만 3년을 겨우 채우고 어린 아들만 남겨놓고 제 발로 시댁을 나갔다. 일설에는 양촌어른이 쫓아냈다는 소문이었다. 그것도 집안의 보물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워 쫓아냈다는 것이다.
“용왕님 덕 좋아하네. 해마다 고사상이 떡 벌어지도록 치성을 드린 결과가 이겁니꺼? 상후 에미 쫓아내는 기 용왕님 덕입니꺼? 인자 용왕이고 지랄이고 없십니더.”
용덕은 술만 들어갔다 하면 집안을 발칵 뒤집어엎었던 것이다. 그 용덕이가 죽은 것이다.
그때 나는 상후를 봤다. 할머니 등에서 고개를 살며시 들고 그 집 대문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졌다. 내가 할머니 등에서 비명을 지른 것은 달구지에서 쑥 나와 있는 시퍼런 두 발 때문이 아니었다. 대문간에서 웃고 있는 그 아이 때문이었다. 상후였다. 조부모 손에 자라는 그 아이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나와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도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우뚝 솟았다. 그 아이를 집어 삼키는 검은 동공이었다. ‘아악 아악!’ 나는 할머니의 등을 마구 두들기며 발악을 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할머니와 내게 쏠렸다. 나는 기절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리 집 안방의 따뜻한 아랫목이었다. 내 이마에는 젖은 무명수건이 얹혀 있었다.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눈 뜨는 것이 무서웠다. 검은 동공이 나를 덮칠 것만 같아 눈을 꼭 감고 숨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때 마루에서 수런수런 말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누군지 감을 잡았다. 아랫집 서촌할머니, 소골 안동 아지매, 아랫마을 가실 할머니였다.
“참말로 우짜다가 그런 일이.......”
“저 밑에 고마지 사람이 새복겉이 쌀 찌 달라는 바람에 나갔다가 그런 참변을 당했다요. 늘 하던 일인데 우짜다가 그리 된 긴지.”
“어려서부터 용왕한테 바칠 아라 쿠더이. 기어코 데리고 간 기라요. 안 빼낄라꼬 양촌 띠가 온갖 방술을 다 했다 쿠더마. 정해진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기라요.”
“그래도 대를 이을 손자는 두고 갔으니 용신도 후한 귀신이제.”
“참 옥이는 우떻소? 그 아가 거서 못 볼 것을 본기라. 안 그라고는 그럴 수가 없제.”
“괘안소. 내 핏줄이라 머를 본 기요. 나도 한기가 들 정도였으니. 한숨 푹 자고나모 괘안을 기요. 우리 아 땜에 동네 사람들 구설수에 오르게 됐으니 참말로 고개를 못 들것구마.”
“머, 얼라가 무서운 걸 보모 그랄 수도 있제. 워낙 험한 꼴이라 나도 섬뜩했다오. 얼라 우는 걸 문제 삼을 사람이 누가 있것소. 명도할매는 놀랜 손녀나 잘 따독이소. 삐죽 나온 시퍼런 발보고 나도 놀랬거마.”
그러자 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랫집 서촌할머니가 누가 들을 세라 소곤댔다.
“인자 하는 말인데 양촌 띠가 그러데. 지난 시월에 용신제를 지냈는데 큰 며느리 땜에 맘을 못 부쳤다고. 에미 찾는 손자 땜에 제수 장만하기도 벅찼다고 하더마. 그 집 용신제는 큰 무당을 불러 굿까지 한다 아이요. 그런데 지난번에는 간소하게 했다카네. 용신이 노한기라. 쫓겨난 맏며느리가 앙심을 품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그 며느리가 얼마 전에 돌아 왔다는 소문이던데. 읍내 다방에 있다더마. 아들이 보고 싶어서 방앗간을 찾아 댕긴다는 소문도 있고, 용덕이가 그 다방에 들락날락 한다는 소문도 있고. 양촌 양반이 보통 양반이간디. 양촌양반이 알모 무슨 사단이 벌어지고도 남을 기라 삿터마. 생목숨 하나 앗아간 기라.”
“남의 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마소. 용왕님이 데려갈 때가 되어 데리고 간 기요.”
할머니의 엄한 목소리를 듣고 나는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꿈에 그 아이를 봤다. 시퍼런 시체의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었다. ‘일로 와. 우리 아부지야.’ 아이가 내게 시체의 발을 내밀었다. 발이 뚝 떨어져 나를 찔렀다. 나는 고함을 지르며 깨어났다.
“아가, 괘안타. 무서워마라. 할미가 니 옆에 있다.”
할머니는 내 옆에 누워 포근하게 안아주셨다. 맑은 영혼은 맑은 것을 끌어오고 어두운 영혼은 어두운 것을 끌어온다는 것도 모를 때 나는 어두운 영혼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 일을 겪은 후 나는 부쩍 어른스러워졌다. 나잇살 하나 더 늘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언니와 동네 아이들은 어른들 눈을 피해 다시 대나무 숲 속에서 놀았다. 대낮에도 어두침침한 대나무 숲이 그날따라 더 어두워보였다. 아버지도 할머니도 없을 때 우리 집 가장은 큰언니였다. 큰언니는 할머니가 없을 때는 밥도 직접 지었다. 보리쌀을 빡빡 문질러 씻어 삶아놨다가 밥을 하는 언니를 보면 엄마 같았다. 겨우 열 두 살쯤 됐을 텐데.
내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엄마는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언니들은 나를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도 하고, 할머니는 아버지 배꼽에서 튀어나왔다고도 했다. 아무려면 어때서. 나를 낳아놓고 죽은 엄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나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혹여 감기라도 걸리면 할머니는 밤낮없이 탕약을 달였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나는 하얀 이밥을 먹었다. 내 밥숟가락 위에는 수시로 짭조름한 갈치 토막이 놓였다. 입 짧은 아이였다. 동네 아이들이 홍역에 걸려 예닐곱 명이 애기 장으로 떠났을 때도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죽은 줄 알고 거적에 말아 마당에 내 놨는데 울더란다. 할머니 주문에 의하면 ‘삼이웃 동냥 젖 먹은 은혜도 갚아야 하고, 명 치레 못하고 간 제 어미 몫까지 살아내야 하는’ 손녀였다.
그리고 이태 뒤 고모는 여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고모 집에서는 경사가 났다. 할머니도 얼마나 좋은지 ‘인자 내가 다리 쭉 뻗고 자것다. 아이고, 천지신령님, 부처님 고맙습니다.’하면서 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딸자식이 시집가서 남의 집 대를 잇지 못하면 소박데기 못 면하던 시절이었다. 위로 딸만 다섯을 낳자 고모 시어머니는 첩을 들이니 어쩌니 말이 많았는데 달덩이 같은 아들 손자를 안겨 주자 고모는 조선에 없는 내 며느리가 되었다. 할머니는 툭하면 고모 집 행차를 했다. 그동안 허물도 많았던 사돈지간에 친손자, 외손자를 놓고 화기애애해졌다.
그해 성탄절이었다. 나는 여섯 살이 되었다. 할머니는 우리만 남겨두고 고모 댁에 갔다. 길쌈거리를 잔뜩 싸 들고. 할머니는 사돈과 삼을 삼으면서 수다를 떠는데도 이상하게 불안하더란다. 내가 자꾸 눈앞에 어룽거리더란다. ‘사둔 암만 캐도 집에 가야겠소. 맴이 통 안 놓이는 기 이상 하요.’하면서 허둥지둥 고모 집을 나섰다. 우리 동네로 오는 막차를 겨우 탈 수 있었다.
할머니가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밤 아홉 시경이었다. 터미널에서 도화강이 보이는 아랫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도화강이 시뻘겋게 보이더란다. 강에 비친 달빛 치고는 색깔이 너무 붉다는 생각도 잠시였다. 매캐한 연기가 뭉클뭉클 올라오면서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불이야, 불, 불'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신작로를 달려가는 무리를 봤다.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요?”
“가운데 방앗간이 불타고 있다요.”
그 순간 할머니는 다리 힘이 풀려 흙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이쿠,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우리 옥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지만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달렸다. 불구경 간 아이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불덩이가 아이를 덮치는 악몽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헐떡거리며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불타는 방앗간이 아니라 바로 집이었다. 세 아이가 있는 집, 집은 조용했다. 대나무도 숨을 죽인 채 흔들림 하나 없었다. 괴괴하게 가라앉은 집 마당에 들어선 할머니는 우선 숨을 골랐다. 부엌에 들어가 동이에 든 찬물을 한 바가지 퍼서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을 수습한 할머니는 세 아이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수영아! 수진아! 수옥아!”
그때였다. 대나무 밭에서 작은언니가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할매다. 할매 여기요. 빨리 와 봐. 옥이가 이상해.”
할머니는 대나무 밭으로 달려갔다. 나는 우리들의 비밀아지트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하얗게 변한 얼굴은 완전히 죽은 아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번쩍 안고 집으로 달려 내려왔다. 안방에 뉘어놓고 맥을 짚었다. 맥이 가늘게 뛰고 있었다. 할머니는 청심환을 숟가락에 갈았다. 내 입을 벌리고 조금씩 흘려 넣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고른 숨을 쉬었다. 내가 땀을 흘리며 잠들었다는 것을 안 할머니는 그제야 옆에서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 큰언니와 작은언니에게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사실대로만 말해라. 저 아가 우짜다 저리 된 기고?”
“그랑께 거기 우찌 된기냐 하면 예.”
큰언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대나무 밭에 모인 동네 아이들이 내가 누운 대소쿠리 주위에 빙 둘러앉아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단다. 두 자루의 촛불이 구유 곁에 켜져 있었다. 거기 모인 대여섯 명의 아이들 중에 양촌할머니 댁 종손인 상후와 사촌 누나 순이도 있었다. 순이와 작은언니는 친구다. 순이도 상후를 데리고 놀러온 것이었다. 목사 흉내를 내던 큰언니가 흠칫 놀라 물러섰다. 가슴에 헝겊인형을 안고 눈을 감은 채 잠자듯이 누워있던 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소쿠리 주변에 둘러앉은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상후에게 눈이 딱 멈추었다. 그때였다. 내가 벌떡 일어서더니 촛불 한 자루를 뽑아들고 상후의 코앞에 들이대며 소리쳤다. 아이의 소리가 아니었다. 목 쉰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다.
“네 이노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네가 와? 퍼떡 물러가지 못할까? 우리 옥이 데리고 갈라고? 어림없다 이 놈! 썩 꺼져라. 탄다. 탄다. 지옥불이 타고 있다. 썩 꺼져라. 한 목숨 갖고 갔으모 됐제. 오데서 또 욕심을 부려? 용왕이 노하셨다. 어린 목숨 갖고 장난치다가는 평생 그 악귀 못 면할 거다. 어서 썩 물러나래도? 용왕님이 부르고 있다. 썩 물러가래도. 탄다. 탄다. 방앗간이 타고 있다.”
나는 촛불을 든 채 상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무서웠다. 아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한 손에는 헝겊 인형을 꽈 잡고 나비처럼 춤을 추었다. 촛불을 상후 얼굴에 바짝 갖다 댔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상후의 머리가 거슬러질 정도로 바짝 대자 상후의 눈도 벌겋게 타 올랐다. 상후의 목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미친 것, 네 딸년이 나를 봤어. 네 딸년도 데리고 가야겠다.”
“어림없다. 방앗간이 다 타기 전에 돌아가. 너의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내 딸을 데리고 갈 수 없어. 저 아이를 불길에 던지겠어.”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아이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나는 촛불을 상후에게 던졌다. 촛불은 정확하게 상후의 가슴을 때리고 발치에 떨어졌다. 상후의 바지에 불이 붙었다. 상후는 나무토막처럼 꼼짝도 못하고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내가 상후에게 달려들자 상후는 희죽 웃었다. 상후의 뺨을 사정없이 쳤다. 타악, 아이의 손이 아니었다. 하얗게 질린 상후가 나무토막처럼 픽 쓰러졌다. 그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상후의 몸에서 쑥 나오더니 대나무 우듬지로 솟구쳤다. 내가 상후의 바지에 붙은 불을 두드려 끄면서 벼락같이 소리쳤다. 행동거지도 목소리도 어린애가 아니었다.
“순아, 상후 업고 퍼떡 가거라. 상후 에미가 지달린다. 어서”
순간 얼이 빠져있던 아이들이 깨어나고 순이는 상후를 들쳐 업고 대밭을 빠져나갔다. 동네 아이들도 순이를 따라 도망을 쳤다. 두 언니만 얼이 빠진 채 내 옆에서 떨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대나무의 우듬지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사방이 괴괴했다. 어둠이 대나무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영아, 수진아, 수옥아~~~’ 그제야 두 언니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할매, 여기 여기요~~~’ 두 언니는 고함을 질렀고 할머니는 대밭으로 달려오셨다. 축 늘어져 시체 같은 나를 안고 집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헝겊인형부터 찾았다. 할머니는 안도하며 헝겊인형을 내 가슴에 안겼다.
“에미가 우리 옥이를 구한기라. 인자 우리 옥이도 사람구실하고 살기다. 헛것 안 보고.”
내 어릴 적 장난감 인형은 무명베로 만든 인형이었다. 무명 헝겊을 기워 솜을 넣어 만든 사람 형상의 인형, 털실로 만든 머리, 숯으로 그린 눈썹과 코 빨간 헝겊을 댄 입, 인형은 큰 대자로 만든 엄마와 아버지였다. 인형을 만드는 것은 큰언니의 솜씨였고, 그 인형에 눈 코 입을 그려 넣는 것은 작은언니의 솜씨였다. 큰언니는 손재주가 좋았다. 인형의 옷이랑 이불 등을 진짜처럼 만들었다. 할머니의 헝겊광주리를 열면 온갖 종류의 자투리베가 있었다. 큰언니는 그것으로 솜씨를 뽐냈다. 누비이불도 만들고 베개도 만들고, 속옷에서부터 겉옷까지 인형의 옷을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커다란 인형 상자가 있었고, 우리들은 그 인형들과 함께 자랐다. 밤에도 끌어안고 자고, 학교 갈 때도 책상 밑에 숨겨두고 갔다.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인형놀이를 아주 싫어하셨다. 사람 형상을 한 인형에 못 된 짓을 하면 장희빈처럼 쫓겨나 사약을 받는다고 했다. 할머니가 역사 속의 인물이었던 장희빈을 어떻게 알았을까.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귀동냥 한 것이었겠지만 조선의 국모였다가 사약을 받게 된 가련한 여인은 할머니의 입을 빌어 구성지게 살아나곤 했다. 할머니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외우기에는 달인이었다. 천수경은 물론이고, 법화경이나 반야심경을 줄줄 읊었다. 오지랖 넓었던 할머니는 아는 것도 많았다. 이야기꾼에 솜씨꾼이었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평생 들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이 씨 가문의 귀한 딸이 박 씨 가문에 시집 와서 신세 조졌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양촌할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두 노인은 마루에 앉아 이런 말을 나눴다.
“순이한테 들었소만. 우리 상후 목심을 구해줘서 고맙소. 명도 할매라먼 알 것 같아 왔다우. 우리 집안에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나 알고 싶소. 꽤 좀 빼 주소. 내 복채는 든든히 놓으리다.”
“방앗간은 다 탔소? 상후는 우떻소? 그 집에 한 맺혀 죽은 귀신이 있소. 한 명도 아니고 일가족이요. 그 한을 풀어줘야 남은 자식들이라도 건사할 수 있을 기요. 일단 이걸 갖다가 손자 속옷에 달아주고 당장 용왕님께 치성 드릴 제물 준비를 하소. 제물이 준비되면 서둘러 금오암으로 가소. 금오암 스님이 알아서 풀어주실 거요. 내가 무슨 심이 있소. 우리 옥이도 아직 에리요. 지난해 용왕님께 치성을 디리는 둥 마는 둥 했으니 그 귀신이 해코지를 하는 기제. 귀신의 힘은 산 사람의 허물을 먹고 자란다요.”
할머니는 아주 작은 새빨간 복주머니를 양촌할머니께 주셨다.
그 뒤 한 달여 나는 앓았다. 그 사이 양촌할머니네 불타버린 가운데 방앗간은 깨끗하게 치워졌다. 그 자리에 나직한 묏등 세 개가 생겼다. 소용돌이가 이는 강가의 절벽 위에 아담하게 조성된 묏자리였다. 묏등은 도화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묏등의 주인은 미궁에 빠졌다. 언제 묻혔는지, 자살인지, 타살인지, 누구의 시체인지, 결코 찾아낼 수 없었다. 요즘 같으면 DNA 검사를 해서라도 알아냈겠지만.
그 시체는 가운데 방앗간을 치우는 과정에서 발견 되었다. 불타버린 잔해를 치우려 바닥을 긁어내는데 가지런하게 놓인 편편한 널돌이 발견했다. 인부 중 한 사람이 구들장으로 제격이다 싶어 뒤집었는데 그 밑에 사람 형상으로 남은 뼛조각이 있더란다. 세 구의 시체였다. 살은 허물어 사라지고 뼈만 남은 것을 금오암 스님이 거두어 화장을 했다. 양촌 할머니는 큰 굿을 하고 그 뼛가루를 소중히 거두어 그 자리에 묏등을 썼다. 이승을 떠돌던 영혼이 저승으로 떠나야 평화가 찾아오는 곳이 이승의 삶이라고 하든가.
그 후 우리 가족도 고향을 떠났다. 오십대 중반이셨던 아버지가 산판에서 사고로 돌아가시자 충격으로 쓰러진 할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갔다. 세자매만 남은 우리는 고모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고모의 보살핌으로 유년시절을 보내고 도시유학을 떠난 후 도시 삶에 젖어들어 고향은 잊은 거나 진배없었다.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은 양촌어르신도 돌아가시고 이어 양촌할머니도 돌아가셨단다. 그들의 남은 자식들도 고향의 재산을 정리해서 각자 짊어지고 떠났단다. 고대광실이었던 양촌어르신 네 집은 오랫동안 폐가로 남아있었다. 귀신들린 집이라고 팔리지를 않았다.
이순이 지난 지금도 나는 성탄절이 돌아오면 그 날을 기억한다. 잊고 싶은데도 잊히지 않는 날이 있다면 해마다 돌아오는 성탄절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화강은 여전히 흐르지만 내 고향은 볼라보게 도시화 되었다. 내가 고향을 떠났듯이 상후도 고향을 떠난 지 오래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두 개의 방앗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강의 흐름조차 변해버린 고향은 내 기억의 삽화 속에만 살아있는 구전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푸른 발에 걸린 성탄절과 안개처럼 흐릿한 코흘리개 적 상후의 모습과 대나무 우듬지를 흔들던 검은 그림자를.
<2020. 12월 경남 작가 38호 소설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