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로 가는 삼백리 길, 어느 시인은 가는 곳 마다 술이 익는 마을이라 표현했었다. 그 시상을 잠시 빌려 쓴다면
가는 곳 마다 예수 마리아란 기도 소리가 들끓었다. 혼탁했던 이조중반의 사회상은 너무 힘든 세상이었다. 절대 권력을 진 왕과 집권자인 당파, 관료, 백성들까지 고난의 시대었다. 호란과 왜란을 겪으면서 기울대로 기운 국운속에 의식있는 사대부들은 고뇌하기 시작하였다. 진보적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계 유형원과, 이익이 그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들 이전에 단초를 제공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봉 이수광이 지금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 천주실의란 책과 관련된 내용을 실었고 허균은 북경으로 가 보고 익힌 천주와 관련된 믿음을 혼자 마음에 새긴 것으로 끝나 종교의식으로 전환하지 못한채 조선천주교사에서 비켜나 버렸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은 천주실의에 대하여 익히고 학문적으로 탐구하였으나 주자학적 관념이 강해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담론하고 학문적 고찰에서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선구자들의 영향으로 그들의 제자였던 이벽, 권철신형제, 정약용형제 등 걸출한 남인 학자들은 서로 왕래하며 학문적 소견으로 고찰하기 시작한다. 해양술의 발달과 희망봉 발견과 인도양의 진출은 서양열강으로 하여금 동인제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향해 경제적 침략을 목적으로 문호를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 한다. 동양인들은 몰랐던 신학적 사실을 전파하기 위하여 신문물들을 중국에 들여와 전파하며 아울러 전교를 목적으로 서책을 발간 한다. 그 대표적인 책이 천주실의다. 천주실의 저자인 이탈리아 태생 마테오릿지는 중국에 입국하여 승려 복장으로 변복하고 전교를 다니지만 승려의 신분이 높지 않음을 깨닫고 유생복장으로 바꾼다. 그리고 유생인 중국 대학자와 하느님과 상제에 대하여 담론하는 내용이 바로 천주실의 내용이다. 먹을 것은 하나인데 이를 먹으려는 자들이 많다보니 당쟁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이를 막는 방법은 양반들도 스스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당시 실학을 태동시키는 학자들의 의식이었다. 당시 왕권과 양반중심 사회환경 속에서 이런 생각은 파격적인 행보였다. 뼈를 깍는 철저한 반성으로 출발한 실학은 권력 중심에서 벗어난 남인학자들에겐 매료적인 학문이었던 것이다. 높은 학식과 걸출한 인성의 소유자였던 이벽은 누구나 알아준 대학자였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내린 숙제를 약용은 이벽을 찾아 상의 끝에 글을 만들어 올린다. 정조는 글을 읽는 순간 이벽의 글이란 사실을 단박에 알만큼 걸출한 학식을 지닌 이벽이었다. 남인출신의 학자들이 몰려 살던 곳은 한강 상류인 양근과 두물머리 부근 마재, 경안, 배알미 등등이었다. 이들은 지역적인 여건으로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실학과 당시 여러가지 문제들을 놓고 강학을 자주 열 수 있었다. 강학이 자주 열렸던 곳이 강 건너 앵자산 동쪽 기슭
주어사와 서쪽 기슭 천진암이었다.
1845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성 다블뤼(St A Daveluy) 가 조선 땅을 밟는다. 전교사업 중 조선백성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선교사들이 들어 오기전에 천주교를 전파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 전교자는 바로 광암 이벽이었다. 다블루 주교는 이 이야기를 자신이 저술한 조선순교사 비망록에 적어 놓는다. 조선에 천주교 신앙을 최초로 전파한 사람은 광암 이벽이다. 약 230여년전 광암 이벽은 천주교 소식을 서책으로 접한 후 스스로 전교자가 되어 선구자가 된다. 유교적이며 폐쇄적인 조선의 유학자 광암 이벽은 천주교를 어떻게 받아드린 걸까? 그 것을 알려면은 조선순교사 비망록과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 전서를 살펴야 한다.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 전서 중 천진소요집에 다산이 친구 이벽을 회상하며 받치는 글이 있다.
다산과 이벽은 천진암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한다. 그리고 1779년 앵자산 서쪽 기슭 주어사에서 있었던 강학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강학을 지금으로 말하면 세미나이다. 당시 강학은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 경전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당시 좌장격인 권철신을 빼 놓고 이십대 안밖의 젊은 학자들이었다. 당시 이 강학 소식을 듣고 야밤을 이용하여 눈길을 헤치며 걷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광암 이벽이었다.이벽의 참가로 강학의 내용은 순시간에 종래의 유학사상을 뛰어넘어 천주교 사상으로 바뀐다. 하늘과 세상, 인간 본성을 딛고 선 신앙적 문제와 유학의 의문점과 선현들의 가르침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강학은 여러날 지속되었다. 광암은 유학자 시각으로 천주가를 지었는데 그 때가 바로 1779년(기해년) 섣달 이었다. - 집안에는 어른이 있고, 나라에는 임금이 있듯이 내 몸엔 영혼이 있고 하늘엔 천주가 있다_
이 때 참석했던 이들이 추후 조선 천주교를 세운 사람들이 된다.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비망록에 조선천주교회의 역사는 이벽의 강학에서 시작되었다 규정한다. 학문연구에 불탄 젊은 유학자들은 그 날 이 후 이벽을 통하여 새로운 학문적 지평과 함께 신앙의 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마테오 리치는 천주교와 유교를 대립된 관계로 보지 않고 천주교 신앙이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준다는 보유론을 펼친다. 바로 그 보유론적 이론의 천주실의를 이벽은 읽었고 이벽은 유학을 기초로 해서 천주교를 받아 들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동양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천주교 서적 뿐 아니라 서양의 철학, 과학, 수학 등 과학기술서까지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서양의 학문은 폐쇄적인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당시 외국과의 유일한 접촉 수단이었던 사신을 통해서였다.새롭게 들어온 서학은 유학만을 숭상한 조선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왔고 성호 이익(1681~1763)을 필두로 한 실학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익에게 학문이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목적을 위한 도구였고 사회제도는 개혁이 필요한 낡은 관습이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이익은 마테오리치의 저서 등 수많은 서양인들의 책을 읽었다. 이벽은 바로 이런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모시는 남인 계열의 학풍에 속해 있었다.
"스승의 학문성은 당시 주자학풍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른바 실사구시며 진보적인 성향, 그것을 광암 이벽은 닮으려 하였다. 이런 일들이
바로 천주교를 가슴으로 안게 된 것이다. 그에 마음을 흔든 것은 만인은 평등하다는 종교적 논리였던 것이다.
날씨가 흐렸다. 순례와 걸음여행 하기엔 최적의 날씨다. 서울에서 두 시간 삼십분이 소요되어 갈매못에 도착하였다. 미사참례 시간까지는 두 시간 여유가 있었다. 일행을 예수님 성상 앞에 모이도록 한 후 우선 기도를 드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단체사진촬영 후 십자가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다. 순간 성지에 근무하시는 수녀님의 초청이 있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순교자와 황석두ㅡ 장주기 순교 기념관으로 가 수녀님의 설명을 듣는 기회를 갖은 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미사참례 마치고 점심 나눔을 한 후 순교터를 찾아 굴신하고 순교자들께 드리는 기도의 시간을 갖았다. 성지에서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차량으로 이동하여 다섯 순교자들이 한양에서 형장까지 끌려와 육군에서 수군으로 인수인계 하던 장소였던 수군사령부 충청 수영성을 방문하였다. 수영성문을 지나 성안 언덕에 올라서자 천수만과 안면도 일대가 들어 왔다. 성안을 돌아 북문으로 나선 후 다시 차량으로 도미부인 사당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걸음여행을 시작하였다. 해안선이 아름답게 보이는 솔바람 길, 걷기에 안성맞춤, 걸음여행을 마친 후 오천항으로 저녁모임을 끝내고 서울로 귀경, 10시였다.
이벽이 신앙적 강학으로 강학의 궤도를 수정한 후 천주가를 지은 1779년으로 부터 66년의 세월이 흘렀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인 드블뤼 신부께서 조선에 입국하시게 된다. 입국배경은 다음과 같다.
마리 니콜라 앙투 안 다블뤼( Marie Nicolas Antoine Daveluy)로서 1818년 출생하여 1866년 순교로서 생을 마감한다.
한국 이름으로 안돈이(安敦伊)다. 1818년 3월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졸업 후 1834년 10월 파리교외 잇시(Issy)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고 파리 쉘 쉴피스(Saint Suipice)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후 1841년 12월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르와(Roye) 본당의 보좌로 20개월 동안 사목하고 1843년 10월4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44년 극동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45년 8월초 페레올 주교님과 상해로 가서 8월17일 김가항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서품에 참석뒤 8월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황당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내가 가야 할 선교지 조선의 첫사제를 첫사제의 첫미사를 보좌할 수 있어 얼마나 큰 감동을 얻었는지 모른다고. 말한곤 하였다. 마침내 8월31일, 나는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강경부근 황산포에 상륙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후 수언 샘골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1846년 1월부터 교우촌 공동 주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리골에서는 몇몇신자들을 모아 신심단체인 성모성심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다. 큰 고초를 겪었고 당시 고초로 무릎인대가 늘어나 평생 동안 보행이 불편하였습니다. 1850년도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 최양업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57년 3월25일 한양에서 대목교구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로 서품되었다. 서품예식에는 메스트로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참석하였다. 1856년부터 조선의 순교사를 만들 목적으로 사료를 수집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메달렸다. 신임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하였고, 1862년 그 동안 수집 작성한 조선교회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냈다. 이 자료들이 바로 다를뤼 비망기이다. 애통하게도 비망기를 쓰면서 모았던 한국 순교자 관련 자료가 주교관이 불이 나면서 소실되어 너무 가슴아펐으며 그 후에 달래 신부가 비망기를 바탕으로하여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니 하느님의 계획은 오묘하심을 깨닫는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가 서울 태평동 주교댁에서 체포되어 3월7일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래서 대목구장직을 승계하여 제 5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었지만 재임기간을 불과 23일에 불과 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후 4일 뒤 3월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위애신부, 오메트로 신부, 그리고 산자 황석두, 장주기와 함께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나이 48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교를 받아들인다. 사제로서 25년 생활중 조선에서 생활은 21년 이었다.
민 위앵 마르티노 루카 (Huin Martin Luc)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 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오메트르(베드로 1837-1866)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메트르 배드로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 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 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 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 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계속)
장주기 요셉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水原)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황석두 루까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延豊)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교리서와 교회서적 출판을 위하여 드블뤼 주교님과 황석두 루까 순교자께서 편집하는 모습이다.
회중시계, 12시 15분전을 가르키고 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내는 시간이었을까? 의문을 품고 시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 태어나고 멸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이며 세상만물의 이치다. 태어나면서 부터 생을 이어 나가다 어느 시기가 도래하면 저절로 멸하게 되는 것이 모든 생명들이 안고 있는 운명이다. 동방의 아주 작은 나라, 이 땅은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일꿔 온 나라다. 그 후 고구려 시대를 통하여 불교를 접한 후 지금까지도 종교적으로 불교가 제일 성한 나라다. 그리고 유교 또한 삶의 기준으로 삼아 지금도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남아 있다. 시련이 닥치게 되면 그 극복을 위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 모색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역활을 도모한다. 앞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유교를 기반으로 한 성리학의 명맥이 자연스럽게 양반과 상반으로 가르고 그 사이 중인들이 삶을 꾸려가고 저 아래 하층으로 천민들이 살던 계급사회가 바로 조선시대의 사람 구분이었다. 지식인들을 상대로 전교하던 이벽은 지식인들이 자리를 잡자 전교의 방향을 중인 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 방향이 바로 내포지방이였으며 그 대상자가 바로 이존창 루도비꼬 였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전교로 내포지방은 천주학의 세상으로 변한다. 평등이란 사실을 경험하게 된 이들이 전교에 뛰어들면서 내포지방은 여사울, 신리, 합덕, 솔뫼, 공세리, 등등 기하급수적으로 신자수가 늘어나 서양선교사들도 이곳에 머물게 된다. 그 연유가 수많은 순교자를 만들게 된 동기가 된다. 내포지방에서 검거된 순교자들 한양으로 압송되지만 국혼의 영향으로 군문효수를 하데 그 장소를 한양과 멀리 떨어진 갈메못으로 정한 것이다.
한양에서 갈매 못 까지의 거리 400리 길이며, 서양의 거리를 빌려 표시하면 165km 가 된다 짧지 않는 길이다. 1866년 3월 19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20일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는다. 24일 한양을 출발하여 29일 충청수영성에 도착한다. 6일만에 도착한 것이다. 하루에 27.5km 씩 이동하였다는 이야기다. 당시의 이동 수단으로 볼 때 쉽지 않은 걸음이었을 것이다., 군문효수(軍門梟首 )란?
칼로 머리를 베어 군문에 메달아 놓는다는 것이다.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중죄에 한해서 처해지는 극형이었다.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형장까지 이동하였는데 당시 도로사정으로는 고행이었다. 3월 중순, 기온이 낮고 찼다. 이동동선 표시를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 졌다. 차라리 새남터나 절두산이나 서소문 형장이었다면..... 나는 조용히 드블뤼 주교님의 회유문을 정리해 보았다.
순교 전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에 드블뤼주교는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아 !
내 떠날 때 내 주님의 훈계를 좋은 마음으로 받아 지성으로 따라서 행하여라. 떠나도 너희를 자주 생각하여 그리워하고,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구하고, 너희 영혼의 神益(신익)을 항상 돌아볼 것이오, 멀리서라도 통 공 하는 은혜로 너희 가운데 있음과 같으니, 나를 생각하여 너희 본분을 열정으로 지켜라. 환난 이후에는 잊기 쉬우니 어려운 가운데 너무 겁내고 낙심하지 말며, 부디 사람의 힘으로 구해 주기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구하며, 너희들이 주님을 위하여 당한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니 당신 인자하심만 믿고 기다려라. 예로부터 환난이 성교를 널리 펴는 법이다.
또한 주 예수께서 여러 가지 말씀으로 미리 가르쳐 주셨으니, 그 말씀을 생각하면 어찌 지나치게 염려하겠느냐? 또 성 베드로 말씀에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하는 사람은 眞福者(진복자)다."라고 하셨으니, 너희 모두는 마음을 일으켜 甘心(감심)으로 참아 받아 흩어지지 말고 思言(사언)행위에서 愛主愛人(애주애인)하는 진실한 덕을 드러내고, 해롭게 하는 사람도 모두 사랑하여 그 回頭(회두)함을 천주께 구하고, 국왕과 관장에게 원망을 품지 말고, 도리어 성실히 받들어 섬길지니, 이렇게 하면 예수의 참 제자가 될 것이다.
이 몇 가지 훈계를 착실히 지킬 것으로 바라며, 너희 모든 이에게 강복하노라.
조선에서 순교하신 성 안토니오 안 다블뤼 주교님이 조선에서 보낸 비망기를 토대로 파리 외방선교회 달레 신부( Claude Charles Dallet 1829.10.18. ~ 1878.4.25. ) 는 1874년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 간행할 수 있었다. 지금 천주교회사의 대부분은 바로 다블뤼 주교님의 기록에 의존해 있는 셈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는 박해시대 극동아시아와 우리 나라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선교회였다. 파견 선교사는 약 4000명이었다. 그들은 조선으로 출정하면서 부른 성가가 있다.
“오, 조선이여!
오, 나의 기쁨이여! 오, 나의 새로운 조국이여,
나는 너를 보고야 말며
너를 위해 내 삶을 바치리라.
큰 배가 흔들거리며 항구에서 나를 기다리도다.
안녕, 프랑스여, 나는 너를 떠나노니,
순풍이여 네 나래를 펴라.
나는 거기에서 더욱 아름다운 해변을 찾게 되리라.
그렇다. 나는 죽어도 살아도 조선인이다.”
프랑스 작곡가 샤를 프랑스와 구노(Gounod, C. F., 1818-1893년)는
1843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성당의 악장(樂長)이 된다.
구노는 그때부터 사제의 길을 걷고자 성 슐피스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의 꿈을 접고 1848년 전교회를 떠나 음악에 전념하지만 마음 속엔 선교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그토록 아름다운 종교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노는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이며 순교 성인인 다블뤼(Daveluy, 1818-1866년)와 같은 시대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서 살았으며 서로 잘 아는 사이. 구노는 다블뤼를 비롯한 자신의 신학교 친구들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들어간 소식들 듣고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다블뤼 주교가 1866년 조선에서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후 1869년 조선 순교자들을 위한 성가를 작곡한다.
우리 성가곡 284번 무궁무진세가 바로 그 곡이다. 다블뤼를 비롯하여, 신학교 시절의 동료와 후배들의 조선에서 순교를 기리는 구노의 곡이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는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조선의 선교사들을 위한 곡이다.
십자가는 수난을 뜻한다. 수난의 끝은 부활이라 했던가! 그것이 바로 수난의 신비가 아닌가 한다.(계속)
걸음여행~~ 스케치.
첫댓글 성지순례와 걸음여행을 할수있게 좋은날씨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갈매못 순교 성지는 사방이 기도 하는 성지인듯....
성지의 한 발자국마다 기도의
마음으로~~
도미부인 솔바람길은 멋진
숲속의 흴링의
아름다운 길~^~^
끝까지 멋지게 리더해주신
대장님!
수고와 감사드리며^^
자매님들과 함께한 걸음여행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
샬롬 샬롬~
수고 많으셨습니다. 동행하며 나눈 순례와 걸음여행 소중한 기억으로 추억할 것 입니다. 늘 고맙습니다.
본당 사목일에도 바뻐신
총무님!
걸음여행까지~~
점심과 아침 떡 맛있게
잘 먹었슴다.
늘 수고 하시는 충무님.
감사해요. 사랑해요♡
아네스 형님,,,사랑가득한 격녀,
감사합니다.......
중요한건 모두가 함께걸을수있기에 더욱더 행복한겁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7 월의 성지걸음여행은 또하나의 감동......
늘 바쁘게만 들러보았던 갈매못 성지 여유로운 시간으로 마음에 담을수있는 기도의 시간들......
수영성문을 지나 천수만.과 안면도 해안을 조망하며.....
도미부인사당 에서의 솔바람길 ......
걸어보지 안은 사람은 그 감회를 모르리라,,,,,,
날씨도 좋고 함께걸을수 친구가있어좋고 우리를 늘 좋은곳으로 이끌어 주시는 든든한 안쌤님 계서
더욱더 행복할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