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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차 암살 ․ 파괴작전
의열단을 창단한 뒤 김약산은 동지들과 함께 한동안 길림에 머물렀다. 그는 스물두 살의 겨울을 고독과 고심 속에 맞았다.
어느 날 곽재기가 며칠 동안 혼자 길림 시내를 돌아다니더니 단검 던지기의 달인이라는 중국인 중늙은이 하나를 데려 왔다. 그의 이름은 장광(張廣)이었다. 약산과 동지들은 그에게서 암살 요령을 배웠다.
“칼이 내 몸의 일부, 마음의 일부가 돼야 하오.”
젊은 날에 자객으로 고용되어 여러 사람의 목숨을 끊었다는 장광은 죄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정신의 통일, 그리고 총탄과 칼끝이 심장을 명중시키는 것을 신앙이나 도(道)처럼 여기고 있었다. 마치 일본의 무사도같이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는 이상한 정신을 갖고 있었다.
약산은 동지들에게 늙은 자객의 기술과 정신을 이어받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민첩함을 얻기 위해 거의 매일 토끼잡이를 하며 풍만산(風滿山)이라고 하는 길림 서쪽의 험한 산을 뛰고 달리게 했다.
모든 훈련에서 김약산은 제외되지 않았다. 그는 단원들과 똑같이 달리고 단검을 던지고 사격 연습을 했다. 그리고 밤에 잠 못 이루며 여러 가지 문제를 고심했다.
북방의 도시 길림을 덮고 있던 긴 겨울이 끝났을 때 그는 훈련과 고심으로 인해 수척해져 있었다.
1920년 봄이 되자 약산은 의열단 본부를 북경으로 옮겼다. 북경은 정치 중심지였고 중국의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지원을 얻기가 쉬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교적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선을 갖기 시작한 것에 반대하고 있었는데, 북경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조선인 지도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대신 기밀이 샐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의열단은 연락 수단을 이중의 점조직망으로 바꾸었다. 의백인 김약산도 두 사람에게만 연락할 수 있었으며 단원들 가운데 두 사람만 그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의열단원들은 변장술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여자나 노인으로 감쪽같이 변장하여 눈을 속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김약산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며 숙소를 옮겨 다녔다. 때로는 단원들이 모인 공원의 잔디밭 앞을 유유히 통과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달이 휘영청 뜬 어느 날 밤에 대원들은 돌아가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만났던 독립운동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윤세주는 탑골공원의 3․1 독립선언서 낭독 순간을 이야기했고, 이종암은 김좌진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이성우가 홍범도 의병대장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홍대장은 무식한 사람이야. 홍대장이 우리 마을에 와서 의병대 입대와 후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한다 해서 사람들이 수백 명이 모여 앉았는데 늠름하게 나타났지. 하지만 이야기 중에 ‘제에미 씨부럴!’ 소리를 어찌나 많이 하는지 나는 그걸 손가락으로 꼽아 세다가 연설을 다 들어 버렸지.”
“몇 번이오?”하고 윤세주가 킬킬 웃으며 물었다.
“서른한 번이었지.”
윤세주가 물었다.
“그런데 형씨는 왜 홍범도 부대로 가지 않았소?”
“김약산 동지가 내 마음을 사로잡은 때문이지.”
이성우는 그렇게 말하고 김약산 의백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김약산은 나이가 한 살 많은 동지에게 더 크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모든 대원의 이야기를 끝내자 이종암이 입을 열었다.
“의백께서 한 마디 해 주시지요.”
김약산은 단원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일어섰다.
“동지들, 우리는 오늘 담론에서 나왔던 우국지사들 누구보다도 더 위험한 의열투쟁을 선택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그런 우국지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더 많은 동포 청년들에게 더 비장한 선택으로 우리의 뒤를 따르게 할 것입니다. 곧 첫 번째 공격을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동지 여러분, 각오를 단단히 해 주십시오.”
의열단원들은 감격에 젖어 고개를 숙였다.
김약산은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는 단원들을 이종암에게 맡기고 곽재기 ․ 이성우 동지와 함께 폭탄을 구하기 위해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 도착한 그들은 프랑스 조계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 폭탄 구입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리저리 노력한 끝에 단익산(段益山)이라는 중국인으로부터 고성능 폭탄 3개와 탄피와 폭약제조용 화공약품을 230원에 구입했다. 그리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도움으로 시가 2천원에 달하는 탄피 제조기와 화공약품을 기증 받았다.
김약산은 폭탄 하나를 집어 들고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걸로 왜놈 경찰서 하나는 박살낼 수 있다고 하오. 왜놈들 모르게 국내로 들여갈 방법을 찾아봅시다.”
그는 폭탄을 나무 상자에 담아 중국 우편을 통해 만주 안동의 중국 세관에 있는 영국인 협조자 유스 포인에게 보냈다. 유스 포인은 임시정부 외교부 차장으로 있는 장건상(張建相)과 절친한 사이였다.
김약산은 곽재기에게 임무를 주었다.
“장건상 선생의 밀서를 갖고 안동으로 가서 유스 포인을 만나시오. 그 사람한테 도착해 있는 폭탄을 찾아, 안동에서 원보(元寶)상회라는 상점을 열고 있던 이병철(李丙喆) 동지에게 맡기시오. 이동지에겐 그걸 밀양의 미곡상 김병환 동지에게 화물로 탁송하라고 하시오. 김병환 동지는 밀양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고 미곡상을 경영하고 있소.”
곽재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꼭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김약산은 이종암과 함께 상해에 머물렀다. 폭탄은 부르는 게 값이라 어떻게든 자체 제작을 하고 싶어서였다. 두 사람은 임시정부 별동대(別動隊) 구국모험단장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의 폭탄 제조 실험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이미 신흥무관학교에서 주황(周況)이라는 중국인 전문가에게서 폭탄제조법을 배운 바 있었다. 그것이 이론에만 머물렀던 터라, 그때 받아 적은 노트를 꺼내놓고 김성근과 함께 실제 제조와 실험에 나섰다. 실험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김약산은 김성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김동지, 아예 우리하고 같이 길림으로 가시지요. 전체 동지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김성근은 승낙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화공 약품과 탄피 제조기 등을 갖고 길림으로 돌아왔다. 폭탄 국내 반입 임무를 갖고 떠났던 곽재기가 그 곳으로 와 임무완수를 보고했다.
김약산과 단원들은 보름 동안 김성근의 지도를 받으며 질산암모늄으로 폭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기식 및 도화선식 기폭장치, 그리고 그것들로 형성폭탄을 만드는 방법을 익혔다. 단원들은 하나하나 실습을 해서 폭약과 폭탄을 만들고, 이삼 일에 한 번씩 그것을 들고 풍만산에 깊이 들어가서 폭발시험을 했다.
폭탄은 대부분 터졌지만 김약산은 망설였다. 그는 긴 시간 궁리한 끝에 단원들에게 말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 우리가 만든 폭탄은 확신이 안 서요. 군자금을 아껴보려고 했지만 그게 어렵군요. 이렇게 합시다. 나하고 이종암 동지 ․ 곽재기 동지 ․ 이성우 동지․ 배동선 동지는 다시 상해로 가서 폭탄과 권총을 삽니다. 폭탄과 무기를 국내로 들여보내는 일은 안동 이병철 동지에게 계속 부탁하기로 합시다. 나머지 행동대원들은 폭탄이 국내에 도착하고 보름 안에 입국하고 한 달 안에 거사를 하기로 합시다.”
김약산은 세 동지와 함께 다시 상해로 가서 단익산에게서 도화선 시한신관이 붙은 폭탄 7개, 투척에 의한 충돌 폭발장치가 달린 폭탄 6개, 그리고 미국제 리볼버 권총 2정과 실탄 100발을 구입했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배동선 동지, 동지는 미리 귀국해서 폭탄을 받을 준비를 하시오.”
배동선은 배중세란 암호를 쓰고 있었으며 약산보다 다섯 살이 연상이고 마산 출신이었다. 그는 기미년 4월 3일, 마산시 만세 시위의 선봉장이었는데 헌병경찰이 뒤를 쫓자 만주로 망명했다. 약산이 첫 번째 국내 잠입의 임무를 준 것은 그가 변장술에 능하고 천연스럽게 신분을 속일 줄 아는 말솜씨 때문이었다.
김약산은 계속 명령을 내렸다.
“이성우 동지, 동지는 중국어와 중국인의 관습에 가장 능통하니, 중국인 의류상인으로 변장하여 폭탄들을 갖고 이륭양행 소속 연락선 계림환(桂林丸)을 타고 안동까지 가시오. 곽재기 동지, 동지는 호위를 맡아 이성우 동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시오. 이성우 동지는 안동에서 그걸 지난번처럼 이병철 동지에게 맡겨서 부산진 역전 김명국 운송점으로 탁송하시오. 그걸 마산 역전의 운송점을 거쳐 배동선 동지에게 전달하면 배동지는 밀양의 미곡상 김병환 동지와 진영 역전의 강원석 동지 미곡상에서 보내 은닉하게 하시오.”
“알았습니다, 의백 동지.”
배동선과 이성우와 곽재기는 꼿꼿이 허리를 폈다.
김약산은 국내에 행동대원으로 잠입할 동지들과 작전을 짜기 위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안동으로 간 이성우와 곽재기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함께 귀환한 두 동지는 성공했다는 보고를 했다.
“의백의 명령대로 했소이다. 안동의 이병철 동지가 수수쌀 스무 자루에 폭탄들을 숨겨 ‘경남 부산시 부산진역 김영국 운송점 경유 배중세 귀하’로 써서 탁송했소이다. 배동선 동지는 화물 열차보다 하루 앞서 귀국길에 올랐소이다.”
단원들이 긴장하여 지켜보는 가운데 김약산은 입을 열었다.
“동지들, 마침내 거사 기회가 다가왔소. 나는 이미 결심이 섰지만 하룻밤만 더 생각하겠소.”
대형 폭탄 두 개, 소형 폭탄 열세 개, 권총 두 자루와 실탄 백 발. 국내로 들여보낸 무기의 분량으로 보아 태반의 단원이 잠입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듯 단원들은 비장한 빛을 보이며 흩어졌다.
김약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깊은 고독감과 함께 두려움이 밀물처럼 확 밀려 왔다. 그는 참선하는 승려처럼 똑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실천할 것인가, 단원들을 더 훈련시키고 거사를 미룰 것인가. 강제합방 10년 만에 일어난 3․1 만세 시위는 결국 엄청난 희생만 겪고 제압당해 민족 전체에게 강한 절망감과 열패감을 안겨준 채 수그러들고 있었다. 만세시위가 촉발시킨 민족 독립의 염원을 타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으나 의견 통일이 안 되고 대립되어 시작하자마자 탄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때에 자신이 동지들을 이끌고 들어가 일제 관청을 공격한다면 조선 땅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고 민족정기를 드높이 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의 확신은 없었다. 자신을 포함해 국내에 잠입하는 단원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은 목숨을 잃거나 체포당해 온갖 고초를 당할 것이었다.
자정이 넘어 겨우 잠들었던 김약산은 누군가가 헐렁헐렁한 옷을 입혀주는 꿈을 꾸었다. 평상복이 아니라 장수들이 입는 철릭이었다. 그것을 어깨에 걸치는 순간 헐렁하던 느낌은 사라지고 몸에 딱 맞았다. 어서 달려가거라, 하고 등 뒤에서 누가 말했다. 그는 철릭을 입고 고향의 성채를 향해 뛰어 달리다가 꿈에서 깨었다. 그는 꿈에서의 일이 표충사의 원주 스님과 사명대사의 장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침이 되자 단원들이 부지런히 일어나 체조를 하고 밥을 지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하게 그들과 어울리고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조회를 열었다.
“동지들, 결심이 섰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의열단은 마침내 첫 출정에 나섭니다. 이성우 동지 ․ 김상윤 동지 ․ 곽재기 동지 ․ 한봉인 동지 ․ 신철휴 동지는 나와 함께 우리 조국으로 잠입해서 일제 침략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합니다.”
“넷! 의백 동지.”
이름이 불린 단원들은 짧게 외치며 어깨를 폈다.
“꼭 명심할 게 있습니다. 목표를 정해 공격하는 것이므로 애매한 생명을 죽이면 안 됩니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홧김에 일본인 집에 폭탄을 던져선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의백 동지.”
“이종암 동지를 비롯한 나머지 동지들은 여기 남습니다. 만약 내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종암 동지가 의백을 맡아 다음 거사를 도모하기 바랍니다.”
김약산은 벽장에서 포도주 병을 꺼내고 술잔을 하나씩 동지들에게 안겼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별주를 마십시다.”
그 때 이종암이 번쩍 손을 들었다.
“할 말이 있소이다. 나는 의백 동지가 여기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투쟁이 안중근 선생처럼 한 번 하고 말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백 동지는 우리를 결속시키고 지탱해주는 경이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가서 불운하게도 죽거나 체포당하면 어찌합니까?”
김약산은 이종암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동지는 나를 의백으로 뽑을 때 명령에 따르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런데 왜 첫 명령부터 거부합니까? 나한테 뒷전에 앉아 지원 책임이나 지라는 얘기 아닙니까?”
“의백 동지, 그게 아닙니다.”하며 이종암은 김약산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 조국 땅으로 들어가는 사람 중 태반은 죽을 겁니다. 죽은 자의 유업을 받아 지속적으로 고국 침투를 하고 뒷날 기회가 오면 군대를 일으켜 죽은 자의 비원(悲願)을 달래줄 사람은 의백 동지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곽재기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종암 동지 말이 맞습니다. 의백 동지는 남아야 합니다. 동지들, 내 말에 동의하면 손을 드십시오.”
김약산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다.
김약산은 뜻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동지들에게 말했다.
“동지들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나 대신 이종암 동지가 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 때 잠자코 있던 윤세주가 입을 열었다.
“나는 왜 뺐습니까? 나도 가야 합니다.”
약산은 윤세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윤동지는 우리 중 가장 나이가 어려. 차마 보낼 수가 없어.”
윤세주는 자리에서 일어서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는 가장 어립니다. 그러나 다른 동지들보다 더 기묘한 방법으로 적의 정탐을 피할 수 있습니다. 3․1만세 때도 지명수배가 내렸는데 붙잡히지 않고 만주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설령 체포된다 해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태도가 워낙 간곡해 약산은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온 이성우가 말했다.
“내가 이번에 조국 땅에 들어가 죽거든 남은 동지들은 열심히 싸워주시오. 그리고 언제고 기회가 와서 군대를 만들면, 그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조국을 해방시킨 다음 조국 하늘에다 대고 크게 한 번 내 이름을 불러 주시오. 내 소원은 이것 하나뿐이오.”
그러자 출정하는 다른 동지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나도 그렇소이다.”
김약산은 포도주 잔을 다시 동지들에게 안겼다.
“그 말을 명심하겠습니다.”
의열단원들은 비장한 얼굴로 술잔을 들어 건배하였다.
김약산은 동지들을 보낸 뒤 수도승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뒤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를 남겨놓은 동지들의 비원을 생각하면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남은 대원들과 함께 다음 일을 도모해야 하고, 아울러 단원을 더 영입해 조직을 확대해야 했다. 그는 김익상(金益相)과 오성륜(吳成崙)을 신입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김익상은 스물여섯 살로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신이었다. 평양 숭실학교를 나왔으며 비행사가 되고 싶어 중국으로 온 사람이었다.
김약산은 첫 대면에서 김익상이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며 호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김익상은 마음이 통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그는 주머니의 동전 한 닢까지 털어 음식을 샀다. 그리고는 덥석 김익상의 손을 잡았다.
“김동지, 우리 의열단에 들어오십시오.”
김익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난 비행사가 될 사람이오. 조국을 목숨처럼 사랑하지만 단 한 순간에 운명을 걸고 결행하는 일, 그런 거 할 자신 없어요. 배짱도 없고요.”
그러나 김약산은 지지 않았다. 사흘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따라다니며 매달렸다.
“김동지, 왜놈들의 채찍에 신음하는 동포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자손들을 왜놈들 노예로 만들 겁니까. 김동지는 우리 의열단의 최적의 인물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의 청년이 찾아와 입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약산은 “당신들은 어렵소. 다른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시오.”하며 거절했다.
하도 끈질기게 매달리는지라 김익상은 입단을 결심해 버렸다.
“의백 동지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소이다. 뿌리치면 조국에 죄를 짓는 것 같소이다.”
그렇게 말하며 김익상은 껄껄 웃었다.
오성륜은 스물한 살로 소년기에 부모를 따라 고향인 함경북도 온성(穩城)을 떠나 북간도 화룡(和龍)에 이주한 청년이었다. 용정의 3․14 만세 시위 때 앞장섰다가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김약산은 김익상에게 한 것처럼 그에게도 매달려 기어이 입단시켰다.
김약산은 어느 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초대를 받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 자격으로 북경에 온 도산은 임정의 통합과 독립 운동가들의 임정 중심 결속을 실현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높은 경륜을 가진 노숙한 독립투사는 스무 살 아래 젊은 지도자의 손을 잡았다.
“단원들은 잘 있는가?”
김약산은 도산 선생의 손을 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고모부 황상규와 은사 전홍표 교장으로부터 이름을 무수히 듣고 흠모해 온 민족지도자의 한 분이었다. 지난번 상해에 폭탄을 구입하러 갔을 때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탄피 제조기를 기증 받게 해 준 분이었다.
“그렇습니다. 은밀한 장소에서 거사 준비를 하며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원들이 대거 국내에 잠입한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도산은 그의 두 팔을 잡아 일으켰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는가?”
“없습니다. 그저 격려하고 기원해 주시는 일밖에는.”
도산은 그의 손을 잡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우리는 당장 일본을 쓰러뜨리고 독립을 쟁취할 힘이 없네. 먼눈으로 앞을 보고 도모해야 하네. 자네들 의열단이 아무리 눈부신 활동을 해도 독립을 가져 올 수는 없네. 너무 성급하게 나서지 않기를 바라네. 그리고 나와 임정 지도자들은 자네들이 폭탄 사용을 기율 없이 하지 말기를 바라고 있네. 임시정부에도 군사당국이 있으니 거기 소속되어 실력을 점차 쌓은 뒤 적당한 시기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거사함이 어떤가?”
약산은 두 눈을 또렷이 들고 말했다.
“저는 선생님과 생각이 다릅니다. 저희의 투쟁은 민족독립의 정당성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각성시키고 온 세상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임정에 배속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의열 투쟁을 위한 비밀결사는 없는 듯이 숨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산은 약산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알겠네. 부디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만천하에 떨쳐 주게. 일본은 만만한 나라가 아니네.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이기고 조선 땅을 강점한 놈들이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교활함을 가진 족속이네. 철저한 대비를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약산은 깊이 허리를 굽혀 감사했다.
약산이 물러간 뒤 수행원들이 도산에게 말했다.
“선생님, 김약산은 임정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걷겠다고 했습니다. 건방지고 혈기 방장한 젊은이에게 너무 너그럽게 대하신 듯합니다.”
도산은 머리를 저었다.
“김약산은 거절하기 위해 정중히 무릎을 꿇은 거야.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는 기백, 그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단 말야. 두고 보게. 김약산이 지휘하는 한 의열단은 놀라운 성과를 거둘 거네.”
한편 이종암은 국내로 잠입하는 길에 압록강 국경 도시 안동에서 비밀 연락책 이병철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전보를 치려던 참인데 잘 들르셨어요. 폭탄 열세 개는 무사히 보냈어요. 하지만 큰일 났어요. 지난번에 1차로 보낸 폭탄 세 개가 밀양까지 무사히 갔는데 김병환의 집에서 왜놈들한테 압수당했어요.”
이종암은 탄식했다.
“이를 어떡하나. 그렇다면 2차로 보낸 열세 개도 무사하지 않을 텐데.”
그는 즉시 국내로 잠입했다. 경찰의 검문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하루 만에 마산까지 가서 암호 접선을 하여 배동선을 만났다.
배동선은 노심초사하여 입술이 까맣게 타 있었다.
“2차로 온 폭탄은 지금까지는 무사합니다. 제가 받아 밀양 김병환 동지에게 보냈는데, 김동지는 그걸 즉시 김해군 동면에 있는 강상진(姜祥振) 동지한테 보내 은닉시켰지요. 그런 다음 1차로 온 폭탄들을 빼앗긴 겁니다. 김병환 동지가 왜놈들 고문에 못이겨 자백하기 전에 그 폭탄들을 어서 경성으로 옮겨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주일 동안 한숨도 못 잤습니다.”
이종암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배동선의 손을 잡았다.
“김해 강동지한테 보낸 건 참 잘했어요, 배동지.”
이 무렵, 윤세주는 간고등어 장수로 변장하여 고향 밀양 땅으로 들어갔다. 등에는 고등어를 담은 지게를 지고 있었다. 그는 해질녘에 고성의 서문으로 갔다. 부산에서 폭탄을 인수해서 김병환에게 넘겨준 배동선이 말해준 대로 서문 오른쪽 성곽의 가장 큰 돌에 내 천(川) 자가 쓰여 있었다. 그는 지게작대기로 그 밑 땅바닥에 바를 정(正) 자와 한 일(一)자를 쓰고 재빨리 그 곳을 벗어났다. 성곽의 표시는 폭탄이 무사하지 못하다는 암호이고 그가 바닥에 쓴 글자는 오늘 밤 자정에 제1접선 장소인 영남루에서 만나자는 신호였다.
그는 자신의 집이 있는 내이동으로 걸어갔다. 그의 집과 김약산의 집이 지척에 보였다. 대문이 열리고 모친이 나왔다. 텃밭에서 파를 뽑아 들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자신이 헌병대에 붙잡혀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고문에 못 이겨 동지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혹시 아내가 나오나 기다렸다. 그는 열여섯 살에 결혼한 몸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그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며 마을을 벗어났다.
종남산 숲속에 숨어 있던 그는 자정이 가까워지자 지게를 벗어던지고 영남루로 갔다. 밀양의 상징물인 유서 깊은 누각은 고요한 달빛 속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고향땅에 들어와서도 가족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기둥 하나를 껴안고 어루만졌다.
“잘 있었느냐, 영남루야.”
자정이 넘어서자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호이 호이 하고 새 소리를 두 번 냈다. 그러자 저 쪽에서 발을 두 번과 한 번, 다시 두 번과 한 번 굴렀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달빛 속에 얼굴이 드러났다. 동화학교 한 해 선배였던 최수봉이었다.
동화학교가 문을 닫자 최수봉은 부산 동래 범어사에 소속된 명정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를 1년쯤 다니고 중퇴했다. 평안도의 사금광을 찾아다니며 날품을 팔아 학비를 벌다가 기미년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즉시 귀향해서 윤세주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김병환 선배는요?”
윤세주가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1차로 온 폭탄이 발각당해 붙잡혔네. 그 전에 접선 방법을 나한테 알려 준 터라 내가 나왔어.”
최수봉이 빠르게 말했다.
“2차로 온 폭탄은요?”
“그건 금시초문이야. 내가 모른다면 안 들킨 거지. 1차 폭탄 들킨 게 며칠 전이라 그런 짐작이 들어.”
“불행 중 다행이군요.”
윤세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 나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나 아내가 고초라도 겪지 않으셨나요?”
최수봉이 말했다.
“경찰에 불려가 고초를 당하셨지. 하지만 지금은 괜찮으셔. 여기까지 와서 부모님을 뵙지 못하는구나.”
“어머님을 먼발치에서 봤어요. 우리집에 나 왔다는 말 하지 말아요.”
윤세주는 목멘 목소리로 말하고 잠시 달빛이 부서지는 남천강을 내려다보았다.
최수봉이 다시 물었다.
“원봉이는 잘 있지?”
“네. 의열단의 우두머리에요. 원봉 형의 말 한 마디에 의열단원들은 목숨을 던지게 돼 있어요.”
윤세주는 남천강으로 돌렸던 시선을 거두며 다시 말했다.
“이번 계획에는 안 들어 있지만 언제고 밀양헌병대를 폭파해야 해요. 의열단 우두머리와 대원 태반이 밀양 출신이니까 거길 박살내는 건 상징적 의미를 갖거든요.”
“그렇구나. 참, 헌병대가 아니라 경찰서야. 3·1 만세 이후 모두 경찰서로 바뀌었어. 폭탄만 주면 내가 경찰서를 폭파할 수 있어. 받아준다면 나도 의열단원이 되고 싶어.”
“수봉 형, 형은 가장 적당한 사람이지요. 의백 형도 같은 생각일 거예요. 그 문제는 동지들과 의논해볼게요.”
윤세주는 부산에서 경성행 밤기차를 탔다. 다음날 아침에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전차를 타고 탑골공원으로 갔다. 지난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공원은 초여름 신록이 무성했다.
그는 10층 석탑에서 가장 가까운 늙은 은행나무로 다가갔다. 그늘에 들어서 나무를 한 바퀴 도니 흉터처럼 드러난 흠집이 보였다. 거기 나무껍질 틈을 들여다보니 돌돌 말린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을 꺼내 펴보았다. 5월 4일부터 사흘 동안 정오에 수표교에서 만나자는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의 암호연락이었다. 이 날은 둘째 날이었다.
그는 곧장 수표교로 가서 이종암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으면서 속삭였다.
“이동지, 어서 거사를 합시다. 지금쯤 김병환 선배가 고문을 못이겨 자백했을 거고 왜놈들이 혈안이 돼서 찾을 거예요.”
“내 생각도 그렇소.”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싶어하는 고향 선배가 있어요. 의백과 중학 동창인 최수봉이라는 사람입니다.”
윤세주는 싱싱한 나뭇잎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며 말했다.
이종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수봉이라는 동지 이름을 기억해 두겠소. 우리가 의백 동지에게 명령 받은 제1 공격목표 조선총독부요. 거긴 나와 이성우 동지와 김상윤 동지가 맡겠소. 제2 공격목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윤동지가 곽재기 동지와 함께 맡으시오. 제3 목표 식산은행은 신철휴 동지와 한봉인 동지가 맡으면 되오.”
“경계 상태는 어때요?”
“내가 살펴본 총독부는 경계가 삼엄하지만 빈틈은 있소. 일단 단원들을 소집해 작전계획을 세우고 임무를 확정합시다. 그런 다음 폭탄을 가져와야지요.”
이종암의 말에 윤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모두 모이는 장소는 어디가 좋겠어요?”
“내일 저녁 인사동 중국 요릿집 중화루로 합시다.”
“도시 한복판인데 괜찮을까요?”
“여럿이 모이려면 사람 많이 모이는 데가 더 안전해요.”
윤세주는 이종암이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성격이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저녁, 단원들은 점조직으로 연락된 명령을 받고 중화루에 모였다. 양화점을 하는 이종암이 개업을 도와준 어릴 적 친구들에게 한 턱 쓰는 것으로 모임을 꾸며 만들었다.
그들은 2층의 작은 방을 차지하고 저녁을 먹었다. 건물 밖 길 건너편에서 강세우가 망을 보고 곽재기가 문앞에 붙어서서 바깥을 살폈고 나머지도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막상 긴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를 죽였다. 그리하여 모든 전략을 세우고 성공을 기원하며 건배를 했다.
바로 그 때 30여 명의 무장 경찰이 큰길을 피해 뒤편 골목으로 소리 없이 접근해 건물을 포위하고 뒷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건물 앞쪽에는 누군가가 살피고 있을 것이라 예측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포위가 완료되자 사복형사 두 사람이 건물 앞에 나타나 출입문에 몸을 붙였다.
강세우는 그자들을 보는 순간 얼른 머리에 썼던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했다.
그것을 본 이종암이 “위험 신호요!”하고 외치는 순간 문을 걷어차며 권총과 소총을 든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꼼짝 마라! 움직이면 쏜다!”
의열단원들은 저항을 하며 일제히 단검을 꺼내 들었으나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런 틈에서도 이종암과 김상윤은 창문 밖으로 유리를 깨며 몸을 던져 옆집 기와지붕 위에 떨어졌다. 포위한 경찰이 사격을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문 앞에 있던 곽재기는 비호같이 몸을 날려 박치기를 하며 뛰어나갔으나 밖에서 기다리던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단원들은 몇 분 사이에 머리와 얼굴이 깨지고 터진 채로 포승에 묶였다.
“아, 틀렸구나!”
의열단원들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통곡했다.
이종암과 김상윤은 포위했던 순사들이 총을 쏘며 뒤쫓았으나 요리조리 골목길을 달려 빠져나갔다.
의열단원들의 피검 소식은 혹독한 고문 취조를 하여 연루된 사람들을 체포한 뒤 신문에 보도되었다.
북경에 남아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약산은 만주로 떠나 안동으로 갔다. 거사를 하고 귀환하는 동지들을 맞이하고 뒷수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동포 지도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져다 준 고국의 신문을 보고 그는 털썩 주저앉으며 탄식했다.
“아아, 실패로구나!”
신문의 제목은 ‘조선총독부 파괴 음모 폭파단체 대검거.’였다. 두 사람이 도주해 경찰이 쫓고 있다는 문장을 읽고 그나마 작은 위안을 느꼈다.
한편 서울 요릿집에서 붙잡히지 않고 탈출한 이종암은 김상윤 ․ 서상락과 함께 대구로 가서 비밀조직과 접선해 대구 근교 시골 마을의 숲속에서 아우 이종범과 만났다. 망명 3년 만에 아내와 아들 소식을 듣고 밀양으로 갔다.
세 사람은 거기서 윤세주가 말해 주었던 최수봉을 만났다. 그를 통해 밀양 청년들을 이끌어온 지도자 고인덕과 이원경(李元慶)도 만났다.
“밀양은 김약산 의백과 많은 의열단 동지들의 고향입니다. 밀양경찰서를 폭파해야 합니다. 최수봉 동지가 그런 결심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폭탄은 모두 빼앗겼습니다.”
최수봉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폭탄을 만들어 주십시오. 의열단원들은 만들 줄 안다고 윤세주가 말해 줬습니다.”
이원경도 나섰다.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이종암과 김상윤과 고인덕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부산에서 화공약품을 구해왔다. 김성근을 통해 폭탄제조법을 익힌 바 있던 이종암과 김상윤은 밀양의 산속 토굴에 숨어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최수봉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 그를 의열단에 가입시켰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종암은 김상윤 ․ 서상락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무사히 안동에 도착했다. 김약산은 이종암의 멱살을 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이종암! 어떻게 해서 폭탄은 한 개도 터뜨려 보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붙잡힌 거야! 내게 가지 말라고 하고 당신이 가더니 이렇게 망해 버려?”
이종암은 그가 흔드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의백, 나를 처단하시오. 모두가 내 탓이오.”
김약산은 이종암의 멱살을 놓고 주저앉았다.
“아아, 하느님, 이걸 어찌합니까. 윤세주 ․ 이성우 ․ 곽재기 ․ 한봉인 ․ 신철휴, 이 동지들을 어찌합니까!”
이종암 ․ 김상윤 ․ 서상락이 함께 그를 끌어안았다.
“의백, 면목이 없어요. 우리를 죽여줘요.”
김약산은 사흘 동안 밥 한 술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동지들이 모여들어 그를 둘러쌌다.
“의백, 정신 차리세요. 옥에 갇힌 동지들이 뭘 원하는가 아셔야지요.”
“알았소이다.”
김약산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김약산은 이때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총독부 경찰은 대대적인 검속을 벌여 18명을 체포했다.「동아일보」는 1920년 8월 1일에 ‘직경 3촌(寸)의 대폭발. 총독부를 파괴하려던 폭발탄은 비상히 크고 최신식의 완성된 것’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기사문이 시험 폭발을 해 본 폭탄의 성능에 대한 설명뿐이라 의열단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총독부 검찰은 그 사건의 주동자와 연루자로 체포한 사람들 가운데 12명을 기소했다. 8개월간 예심이 이루어지고 만 1년이 지난 1921년 6월, 경성 지방법원은 12명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곽재기와 이성우가 징역 8년, 윤세주 ․ 황상규 ․ 김기득(金基得) ․ 이낙준(李洛俊) ․ 신철휴가 징역 7년, 윤치형이 징역 5년, 김병환이 징역 3년, 배동선이 징역 2년, 이주현(李周賢)과 김재수(金在洙)가 징역 1년이었다.
신문들은 이때에야 사건의 내막을 보도했고 의열단의 존재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