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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 '오베흐-쉬흐-와즈 Aubers-sur-Oise'
파리의 북쪽으로 한시간 거리의 ‘오베흐-쉬흐-와즈’ 는 인상파 화가 '고흐'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는 곳이다.
천재화가 '고흐'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며, 많은 작품을 완성시킨 곳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화가 지망생들이 '고흐'의 고뇌를 느껴보고자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 오베흐의 계단 >, < 오베흐의 골목길 >을 거닐며 100년 전 마을 주변의 보리밭과 시청, 교회 등 '고흐'의 그림 속에 나타난 '오베흐-쉬흐-와즈’의 풍경을 떠올리며 천재 화가의 인생을 돌이켜 보자.
패키지 여행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프랑스 시골의 풍요롭고 여유있는 한적함을 체험하는 프랑스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특별한 장소이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30 세에 이르러 화가가 되었다. 파리에서 활동했던 그는 도시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로방스' 지역의 '아를르'로 옮기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흐'에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모티브를 준 반면 점점 심해지는 광기로 인해 자신의 귀를 면도날로 자르는 광기를 보이게 된다.
그 후 '고흐'는, 그의 영원한 친구이자 보호자 였던 동생 '테오' 의 권유로 '오베흐'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고흐'는 신경과 전문인이면서 미술 애호가였던
'가셰' 박사의 보살핌으로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고, 이 기간동안 70 여 점의 작품을 남긴다.
< 오베흐의 교회 >, < 오베흐의 길과 계단 >, < 가셰의 초상 >, < 까마귀 나는 밀밭 >, < 최후의 자화상 >같은 많은 유명 작품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탄생하여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림도구를 챙겨 마을을 나서서,
저녁이면 동생 '테오' 에게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를 편지로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던 '고흐'.
자신의 천재적인 정신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으로, 1890년 5월 20일 정착하여 70일 후인 7월 27일 자살을 하게 된다.
집안 내력일까??? 아니면, 천재의 운명일까???
오베흐 교회 Eglise de l`Assomption
'고흐'의 유명한 그림인 '오베흐의 교회'의 모델은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그림과 똑 같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루이 6세'의 미망인 ‘아델라이드-드-모리앤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기도실로 이용되었고, 이중 경사를 갖는 사각형 종탑의 지붕 모습이 독특하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뒤엉킨 '고흐'의 그림과는 달리 엄숙한 분위기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는, 작품의 대상으로의 역할만을 충실히 끝내고, '고흐'의 느낌이나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그림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조용히 서있다.
'고흐'의 집 Auberge Ravoux
'고흐'가 살았던 여인숙이자 카페인 ‘고흐 기념박물관'으로 개조된 여인숙에서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고흐'의 초라하고 외로운 방을 볼 수 있는데, 작은 방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가 있을 뿐이다.
1890년 5월 20일 ‘라부 여인숙 Auberge Ravoux’에 도착한 '고흐'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활발한 작업으로 70 여일 의 생의 마지막 기간 동안에 무려 70 여 점의 유화와 수 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화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좁은 지붕 아래 작은방에는 침대와 작은 책상, 의자밖에 없어서 당시 화가의 쓸쓸한 삶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고흐'는 그린 그림을 침대 밑에 보관하였단다.
식당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며 화가의 숨결을 느껴보자!
전원에서의 한가로운 산책
묘지에서 좀더 언덕을 오르면 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고흐'가 왜 이 밀밭을 자신의 화폭에 담게 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흰색, 분홍색, 보라 빛으로 어우러진 푸른 하늘 아래에, 감자꽂이 드문 드문 피어있고, 갈아 부친 땅과 함께 온화한 연보라 빛과 아주 부드러운 노란색과 연한 녹색의, 바다처럼 넓은 구릉을 배경으로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 초원에 저는 완전히 빨려 들어 갔습니다. > 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고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건강이 호전되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생 ‘테오’ 에게 "극도의 고독함과 슬픔을 표현하는데 구속 당하지 않으면서, 혼란스러운 하늘아래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그리고 있다." 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테오’는 1890년 7월 27일 미완성의 답장에서 "그래서 무었을 원하는지요?" 라고 '고흐'에게 묻고 있다. 바로 그 순간에 '고흐'는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쏘고 신음한다.
묘지 Cimetiere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도 바로 죽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이틀이나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숨을 거둘 수 있었던 불운 했던 화가가 안식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언제나 '고흐'의 열렬한 팬이면서,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동생 '테오' 가 형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는지 6개월 간의 정신질환을 앓고 사망하여 네덜란드에 묻히었다가, 1914년 '테오'의 미망인 ‘요안나’의 뜻으로, 형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고 담쟁이 넝쿨이 이들의 불멸의 우애를 상징하는 듯이 무덤을 덮고 있다.
‘슬픔은 끝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
도비니 작업실 Atelier de Daubigny
'도비니'는 1854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처음으로 야외사생을 시작하였고, ‘코로’, ‘도미에’ 를 동반하여 ‘오와즈’ 강의 수면에 비치는 빛의 현상을 표현하는 기법을 개발한다.
유명 작품인 ‘오베흐의 겨울’은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사로’, ‘르느와르’, ‘끌로드 모네’, ‘세잔느’ 같은 유명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업실을 설계하고 장식하였다.
'고흐' 탄생 150 주년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고, 또한 인상파 화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이던 '가쉐 박사'의 집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특별 전시회가 9월 28일까지 열리고 있으니 꼭 들러 보시기를......
Parc de Sceaux
한가로이 산보하거나 운동을 하고, 아이들이 뛰어 놀며, 인상주의 화가 ‘마네’와 ’모네’의 작품 < 풀밭 위의 식사 >처럼 삼삼오오 짝을 지어 피크닉을 하는 모습에서 프랑스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조용한 공원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공원이 바로 이곳이다.
‘180 헥타르의 면적에 엄격한 기하학적인 도식으로 면을 구분하고, 여러 종류의 나무와 식물이 우거진 숲,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한 수 많은 연못과 분수 등이 어우러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성의 노천카페에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의 맛이 일품인 ‘쏘’ 성과 공원…….
건설에서 ‘꼴베흐 Colbert’ 가문까지
왕의 고문관을 지낸 ‘루이 뽀티에 Louis Potier’가 1597년 처음으로 이곳에 성을 건설하였고, ‘루이 14세’의 총리이던 ‘꼴베흐 Jean Baptiste Colbert’ (1619-1683)가 1670년 영토를 사들이면서 성을 확장하는데, 건축가 ‘끌로드 페로 Claude Perrault’, ‘앙뜨완느 르뽀트르 Antoine Lepautre’, 왕실 실내 장식가 ‘샤를르 르 브룅 Charles Le Brun’, ‘프랑스와 지하흐동 François Girardon’, 그리고 조각가 ‘앙뜨완느 끄와스보Antoine Coysevox’ ,
‘정원 계획가 '르 노트르 André Le Nôtre' 등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의뢰하여 ‘루이 14세’의 총리가 살만한 성으로 탈바꿈을 시킨다.
재무장관을 지내다가 자신의 집 ‘보 르 비꽁트 Vaux le Vicomte’ 성을 너무 화려하게 만든 탓에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하루 아침에 감옥으로 가는 ‘니꼴라 푸케 Nicolas Fouquet’의 사건을 지켜본 ‘꼴베흐’는 왕의 눈치를 살피면서 성을 확장하였으리라.......
집들이는 왕의 심사를 헤아려가며 조용히....
‘꼴베흐’의 큰 아들이며 해양 수산부 장관을 지낸 ‘세뉴래 후작 Marquis de Seignelay’ (1651-1690)’이 영토를 상속 받아서 미화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며, 길이가 1킬로미터에 달하는 운하를 파도록 지시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며 ‘'베르사유’ 궁전의 성당과 파리의‘앵발리드’ 성당을 설계한 ‘줄 아흐두앵-망사르 Jules Hardouin-Mansart’에게 당시 유행하던 ‘오렌지 온실 Orangerie’ 건설을 의뢰하였으며, 17세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볼 수 있다.
‘맨느 Maine’ 공작과 공작부인
‘세뉴래 후작’이 사망한 후 ‘루이 14세’와 애첩인 ‘몽테스팡 후작부인 Marquise Montespan’ 사이의 서자이며 왕의 총애를 받던 ‘맨느 공작 Duc du Maine’이 새로운 주인이 된다.
1694년 왕자의 지위를 획득하였으며, 1714년에는 왕의 후계자로 인정되기까지 하던 ‘맨느 공작’이 ‘루이즈 베네딕트 드 부르봉 꽁데 Louise Bénédicte de Bourbon-Condé’와 결혼을 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볼테르 Voltaire’를 비롯한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성격대로 시인과 연극인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조명과 불꽃 놀이를 동반하는 음악회나 신화 극을 상연하여 사교계에 선망의 대상이던 < 쏘 공원의 밤 Nuits de Sceaux >이라는 연회를 자주 베풀었단다.
‘뻥띠에브흐 Penthièvre’ 공작
1753년 ‘맨느 공작부인’이 사망하고 1773년까지 아들들의 소유였다가, 잠시 왕정 소유로 넘어갔다가 '루이 14세'의 손자인 ‘뻥띠에브흐 공작 Duc de Penthièvre’이 1775년 이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Marquise Montespan’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뚤루즈 백작 Comte de Toulouse’의 아들인 ‘뻥띠에브흐 공작’은 ‘브르따뉴 Bretagne’ 지방의 영주이면서 해군 제독으로도 유명하지만, ‘아네 Anet’, ‘앙브와즈 Amboise’, ‘비지 Bizy’, ‘블르와 Blois’, ‘샹뜨루 Chanteloup’, ‘샤또네프 Chateauneuf’, ‘외 Eu’, ‘랑부이에 Rambouillet’ 성들을 소유한 부유한 부동산가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딸을 후에 ‘필립 에갈리떼 Philippe Egalité‘로 불리는 ‘필립 도흘레앙 Philippe d’Orléans’에게 시집을 보내는데,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 되는 ‘루이 필립 Louis-Philippe’의 어머니가 된다.
파괴에서 복원까지
귀족이 학대를 받던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기에는
‘쏘’ 성이 < 국민의 재산 Bien National >으로 지정이 되어 몰수되면서, 공원에 놓여있던 유명한 조각가들의 작품들과 성의 가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오늘날 파리의 ‘룩상부르그 Luxembourg’ 정원이나 ‘뛸르리 Tuilerie’ 정원에서 볼 수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도 전시되어있다.외국으로 많이 나가 있을 법도한데.....
‘생 말로 Saint Mâlo’의 도매상인이며
유능한 재력가인 ‘르꽁트 Jean-François Hippolype Lecomte’가 1798년에 영지를 사들여서, ‘꼴베흐’ 당시에 세워진 성을 철거하고 정원에 나무들을 뽑아버리고 농경지로 만드는데, 다행히 ‘오로흐(새벽) Aurore’ 별장, ‘오렌지 온실 Orangerie’, ‘마구간’, ‘보초막’, ‘관리인 집’ 등등은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다.
돈 자랑인지?? 성을 사서 밭으로 만들어???
1828년, ‘쏘’의 소유주의 딸 ‘안느 마리 르꽁트 Anne-Marie Lecomte’와 결혼한 ‘트레비즈 Trévise’ 공작이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본래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1856년부터 건축가 ‘조셉 미쉘 르 수파쉐 Joseph-Michel Le Soufaché’에 의해서 ‘꼴베흐’의 성이 있던 자리에 ‘루이 13세’ 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돌을 재료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고, 1862년에서야 실내장식이 완성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 드 프랑스 박물관 Musée de l’Île-de-France’으로
1922년 ‘트레비즈’ 공작의 상속자이며 무남독녀인 ‘포시니 시스트라 Faucigny-Cystra’ 공주가 영지를 팔려고 하자, ‘쏘 Sceaux’의 시장이 도의 재산으로 구입하여 일반인들에게 공원으로 공개하도록 ‘센느 도의회 Conseil général du départment de la Seine’에 간청을 하였단다.
시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쏘' 성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1937년부터 성에는 ‘일 드 프랑스 박물관 Musée de l’Île-de-France’이 들어서있다. 1992-1994년 수 많은 기부 작품들을 예술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면서, 다음의 네 가지 테마로 전시실을 꾸며놓고 있다.
1. ‘꼴베흐’에서 ‘트레비즈’까지 ‘쏘’ 성의 변천사
2. ‘일 드 프랑스’에 존재하던 왕족들의 거처
3. 17세기-19세기 초 사이의 ‘일 드 프랑스’ 정원과 조각
4. ‘일 드 프랑스’의 도자기
필자의 집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늘 "우리 집 정원에 놀러 오세요~~~"라고 초대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농작물이 말라 타버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포도경작자들은 2003년이 지난 수십 년을 능가하는 최고의 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전망이어서 똑 같은 자연적인 재해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소비자만 힘들어지겠군.....
농산물은 흉년이라고 비싸게 될것이고,
포도주는 '빈티지'가 좋다고 비싸게 되겠지.....
그 해의 포도주 중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전 세계에 일제히 출시되는 ‘보졸레 누보 Beaujolais Nouveaux’를 만드는 ‘보졸레’ 지방에서는 8월 12일부터 포도 따기가 시작되었다.
‘보졸레 포도경작자 협회 Union Viticole du Beaujolais’에 따르면,
보통 포도 수확이 9월 초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작자들이 올 여름휴가를 떠났다가, 이른 수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서둘러 들어오고 있는 중이지만, 22,500 헥타르에 달하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포도밭은 매년 수확한 포도를 등짐으로 져 나르는40,000 여명의 일꾼을 어떻게 구하느냐가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하지만, 4월에 내린 서리와 우박으로 인한 피해로 올해의 수확량은 100 만 헥토리터 정도라는 전망.
스페인에서부터 ‘벙당즈 Vendange’를 시작하여 ‘알자스 Alsace’ 지방까지 따라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기도 하고, 포도 따기 체험학습처럼 관광 프로그램이 준비되기도 한다.
하루에 7시간씩 일을 하며 포도경작자 협회에서 일당을 30-40 유로 정도로 정하고 있다. 잠자리와 식사는 제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걸쭉한 막 포도주는 공짜!!!!!
여행도하고 체험학습도하고 돈까지 번다?????
진정한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접해보는 것이 아닐는지……
또한, 각 지방마다 독특한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이네들의 포도 수확 축제가 볼 만하다. 9월과 10월은 축제의 달!!!
프랑스를 이때에 여행하는 것은 <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이라는 포도주를 시음하며 프랑스의 문화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포도주 향기에 취하면서.....
보통 축제 기간에는 사람들이 더 친절하고, 포도주가 무료로 제공되기도 하고, 각종 콘서트와 흥미진진한 볼 거리가 가득하다.
"포도주의 길 Route du Vin"을 따라서,
<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베르사유 정원 Jardins de Versailles
아름답고 화려하게 잘 조성된 ‘베르사이유’ 정원을 산책하다 보면 누구나 왕족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곳곳에 아름다운 조각상과 분수들이 놓여있고, 궁전의 화려함과 더불어 광대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정원에서 ‘루이 14세’ 당시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베르사유의 백장미'를 찾는 분들도 있지만......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7,600 헥타르 (1 헥타르는 3,000 평), 1852년 제 2제정시대 이전까지는 1,700 헥타르에 달하는 광활하던 이 숲이 지금은 670 헥타르로 축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전경으로 관광객을 압도하며, ‘루이 14세’ 이후의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정원이 귀족들의 화장실이었다는 사실!!!!!
왕과 왕족들은 어떻게 용변을 해결하였을까???
파리의 ‘뛸르리 Tuillerie’ 정원을 설계한 정원사 ‘르 노트르 André Le Nôtre’ 작품인 정원은 궁전의 증축 공사가 시작되기 이전인 1657년부터 착공되었으며, 1668년 대부분 완성되었고 다음해인 1669년 정원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정원 산책을 위한 지도를 직접 작성하는 애착을 보였단다.
왕의 정원 산책 지침서를 따라가 보면 좋겠지만, 패키지 여행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약 1시간 정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최초의 프랑스 양식 정원일까? 아닐까?
화단의 아름다움과 사냥을 위한 광활한 숲을 동시에 갖고자 했던 ‘루이 14세’의 의도를 파악한 ‘르 노트르’는 숲을 배경으로 정원의 조경과 궁전 건물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운하 끝까지 일직선으로 펼쳐지는 2,6 킬로미터에 달하는 중앙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못과 화단을 배치하였고 양쪽 숲 사이로 직선의 산책로를 내면서 전체적으로 대칭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궁전과 비교하여, 가장 화려한 ‘라똔느 분수 Bassin de Latone’는 11 미터, 남쪽 정원 끝에 위치한 ‘오랑쥬리’ 온실은 17 미터, 태양왕 ‘아폴론’이 4두 마차에 태양을 달고 솟아 오르는 모습의 ‘아폴론의 분수 Bassin d’Apollon’는 30 미터, 운하는 32 미터 낮게 배치되어 있다.
이 정원에 애착을 갖고 있던 '루이 14세' 시절에는 운하를 만들었지만, 물이 모자라서 운하에 물을 채우지 못하였단다.
꽃과 분수, 그리고 400 여 점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정원과 숲은 1664년 처음으로 ‘루이 14세’에 의해 3 일간의 대 향연이 베풀어진 이후로 지금도 성수기인 5월부터 9월까지는 매주 토, 일요일에 분수 쇼를 하고, 비수기에는 매달 첫 번째 일요일에 딱 한번만 분수 쇼를 하는데, 우리나라 관광객들 중에서 쇼를 본 사람들은 많지 않다. 정원 입장료가 겨우 6 유로이지만... 바쁘다 바빠!!
1776년 ‘루이 16세’에 의해 대대적인 식목이 행해진 이후로 1860년, 1987년 등 한 세기마다 한번씩 다시 나무를 심는 이 정원은 프랑스인들의 자랑거리이다. 1998년까지는.......
파리 지역을 강타한 태풍으로 인하여 이 정원에서만 약 6,000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는데, 정원을 본래의 나무 종으로 복원하기 위하여 옛 날의 식목대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번에 쓰러진 나무들이 대부분 '마리 앙뚜와네트'와 '나폴레옹 1세'가 미국에서 수입한 '실편백 나무'로 밝혀지면서 프랑스인들의 콧대가 꺽이게 되었단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정원에 미국산 나무라......
프랑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미국에서 5,000 그루의 나무를 무상으로 보내주었는데,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인들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행한 조치가 있었으니, 일명 '존심 대결'........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이라크 사건과는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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