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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하여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이 있는데, 이 아들 때문에 3월 초에 사건 하나를 치렀다.
서울대학교는 작년에 2005학년도 입시요강을 발표하였는데, 그 요점은 2005학년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각 계열별로 지정된 과목을 고등학교에서 이수하여 그 내신성적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목의 내신성적이 없으면 서울대 그 계열에 지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지만 나는 이 방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방침에 의하면 학생이 고등학교에서 한 번 어떤 과목을 이수하지 않으면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애초에 영원히 박탈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과 공부를 한 학생이 이과에 입학할 수도 없게 되고, 이과 공부를 한 학생이 문과로 갈 수도 없게 된다. 나아가, 첫 해에는 재수생도 입학자격을 박탈당한다. 딴 데 가서 그 과목을 아무리 잘 배워와도 안 된다. 오로지 고등학교에서 그 과목의 내신성적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줄 한 번 잘못 서면 서울대학교에 들어올 생각을 말라는 것이다.
교육은 이와 같이 기회를 빼앗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독일 같은 나라는 학생이 인문계고등학교에 갈 것인가, 실업계고등학교에 갈 것인가를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동안 4년 내내 아이를 가르쳐온 담임선생이 결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즉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또는 중학교에 가서 학생의 적성과 성적 따위가 바뀌거나 하면 그것을 바꾸어 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울대학교는 애초에 줄 한 번 서는 것으로 서울대학교 입학자격을 제한해 버리겠다는 황당무계한 발상을 내놓은 것이다.
전국 고등학교 교장들이 들고일어나 이 방침이 부당함을 지적하고 그것을 바꾸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서울대학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이것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우리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작년에 이것 때문에 학부모설명회를 열었고, 내 아내도 가서 그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나와 내 아내는 갑자기 올 3월 초에 아들이 다니는 학교 2학년 이과반 중에서 서울대반이 따로 있고 우리 아들은 그 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에 벌어졌다. 작년에 열린 학부모설명회에서 학교 쪽은 학부모들에게 학생이 서울대학교 자연대학이나 공과대학을 가려고 하면 이러이러한 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라고 설명을 하였을 뿐이고, 그 고등학교가 그러한 과목을 가르치는 반을 따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는 올해 들어서 2학년에 서울대 이과반을 따로 만들었는데, 이 사실을 학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1학년 담임선생들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알려서 서울대 이공계에 가려고 하는 학생들은 그 반에 지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아들의 1학년 담임이 이 일을 게을리 하였다. 그 담임은 어느 날 점심시간에 아이들에게 “서울대학교에 갈 사람 손들어라” 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해 갔던 것이다. 우리 아들은 스스로가 서울대학교에 갈 실력이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꼭 서울대학교에 가야한다는 신념이 없었기 때문에 우물쭈물했고, 그 사이에 조사가 끝나 버린 것이다. 그 이후에도 아들이나 학교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이 사실이 학급편성이 다 끝난 3월 초에 내 아내에게 알려진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안 다음 날 아들의 학교에 찾아가 교감 선생과 교무부장을 만나서, 내 아들을 서울대 이과반으로 옮겨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무부장의 말은 이미 학급 편성이 모두 끝났으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교무부장은 학교에서 서울대학교의 그 방침을 누누이 알렸고, 학생들이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애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무부장은 홍보를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데, 미안하지만 학교는 그 홍보를 제대로 다하지 않았다. 학부모설명회 때는 서울대에서 그러한 과목을 이수해 오라고 한다는 사실만 알렸지, 그 학교에서 그러한 과목을 따로 가르치는 서울대반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 아내는 모든 이과반 학생들에게 서울대 이공계열에서 요구하는 과목을 다 가르쳐 주는 줄 알았던 것이다.
또한, 우리 아들의 1학년 담임선생이 일을 게을리 하였다. 다른 반 담임선생은 아이들에게 여러 번 그 이야기를 강조하고 혹시나 서울대학교에 갈 실력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아이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아이의 담임은 그렇게 하지 않고, 어느 날 점심시간에 서울대학교에 갈 사람 지원하라고 하여 조사를 해 가고 말았다.
나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 교감, 교무부장에게 실망했다. 다른 것보다 나는 이들에게서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잘 되도록 해 주겠다는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에게 교육이란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업무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자는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길을 찾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아들의 일은, 잘못되면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는 아이에게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자격을 영원히 박탈하는 중대한 결과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의 앞날에 정말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선생들은 자기 제자인 아이의 장래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반 편성이 끝났으니 이제 어쩔 수가 없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설혹, 학부모와 아이에게 여러 번 철저히 알렸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치자. 나는 그래도 학교는 아이나 부모가 원한다면 서울대반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 몇 명의 반을 바꾸는 일이 대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 결과는 아이의 앞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학교는 너무도 쉽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행정적인 편의 때문에 안 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행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교장이나 교사들을 위하여 있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행정은 바뀌어서 학생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행정에 맞추어 움직여주고 피해를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아들이 똑똑치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들 비교육적인 교육직업인들의 태도에 분노하여 이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과연 이들 선생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옳은지를 묻고 따지기로 하였다.
나는 우선 교육인적자원부와 교육청에 청원서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의회와 국회의 교육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할 준비를 하였으며, 신문, 방송에도 이 문제를 밝히고 여론에 호소할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내가 학교에 갔다 온 후, 내 아내는 내리 사흘 동안 학교에 찾아가 우리 아들을 서울대반으로 옮겨 줄 것을 간청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사건은 금방 유명한 사건이 되어 버렸다. 굳이 신문, 방송의 힘을 빌릴 것도 없었다. 아이의 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근처의 고등학교의 교사들, 학생들, 학부모들에게 이 사건이 금방 알려져 버려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교사들 및 학부모의 여론은 무성의한 교장, 교감, 교무부장을 비난했다. 특히, 많은 교사들이 당연히 옮겨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혀 주었다. 이 여론을 견디지 못 한 교장, 교감, 교무부장은 대엿새만에 우리 아이를 서울대반으로 옮겨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교육부와 교육청에 들어간 청원서에 대하여는 이미 다 해결되었다는 회답이 오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 사건 교무부장과는 정반대의 교무주임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다.
덕수상업고등학교라는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의 이름이 요즈음에는 덕수정보산업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상업고등학교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나, 기업체에 취업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가는 학교였다. 물론, 예전에는 집안이 어려워서 대학교 학비를 마련할 수 없는 학생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고에 갔다.
그런데, 30년쯤 전에 덕수상고에 진학반을 설치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덕수상고 선생님들 일부가 대학교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진학반을 만들어서 학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선생님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에 진학반을 설치해야 한다는 선생들이 있었던 반면에 진학반 설치를 반대하는 선생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하는 쪽의 주장은 이러했다. “덕수는 상고다. 상고에 왔으면 주산, 부기를 공부해서 취직을 해야지, 왜 상고에 와서 대학을 가겠다고 하는가? 이것은 상고의 본질에 어긋난다.”
그런데, 그때 교무주임 선생님의 주장은 이러했다. “학교는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덕수가 아무리 상고라 해도 학생들 중에 대학에 가려고 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학교는 그 학생들이 대학교에 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 나온 사람과 안 나온 사람의 차별이 엄청나지 않은가? 우리 제자들이 대학교에 가서 더 잘 되고자 하는데, 학교가 왜 이것을 도와 주지 않는단 말인가?”
이 논쟁의 쟁점은 결국 “상고의 본질을 지키느냐, 학생들을 위할 것인가”였다. 그런데, 학교는 교무주임 선생님의 주장을 받아 들여서 진학반을 설치하였다.
1973년에 입학한 덕수상고 학생들은 모두 열 다섯 반이었는데, 학교는 대학교에 가고자 하는 지원자들을 조사하여 희망자들을 모아 두 반의 진학반을 만들었다.
이 두 반의 진학반에서 서울대학교 1명, 연세대 1명, 고려대 4명의 합격자가 나왔고, 기타 수많은 대학교 합격자가 나왔다. 그리고, 이 두 반에서 훗날 사법시험 3명, 행정고시 1명, 외무고시 1명의 합격자가 나왔고, 공인회계사도 여럿 나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그 때 덕수상고 진학반에서 공부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에 붙은 사람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때의 우리 친구들은 제자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노력을 다한 교무주임 선생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분을 평생 존경해 왔다. 그 분은 다른 선생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학교는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선생은 학생들을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하신 분이다. 이런 분이 참 스승인 것이다.
또한, 나는 진실로 학생이 행정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실천하는 영국인 교육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변호사가 된 후 영국에 해상법을 공부하러 갔다. 내가 유학한 곳은 영국 웨일즈대학교 카디프대학인데, 이 대학교의 대학원에 해상법을 배우고 연구하는 석사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는 필수과목 한 과목과 선택과목 네 과목을 공부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필수과목이 ‘바다공법’이라는 과목으로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바다를 두고 일어나는 분쟁에 관한 일종의 국제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변호사였기 때문에 그러한 바다공법을 공부할 필요성이 별로 없고, 선박충돌에 관한 법률, 해상보험법, 해상운송법 따위를 공부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장을 찾아가 내가 필수과목인 바다공법을 공부하지 않고 다른 과목을 선택하여 공부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학장이 바로 바다공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 학장은 즉석에서 ‘오케이’ 했다. 이 분은 아무런 이유나 단서를 달지 않았고, 싫어하는 내색도 없었고, 안 되는 것을 특별히 해 준다는 태도도 전혀 없었다. 나는 그 분의 태도에서 학생이 바라는 것이고, 학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만일, 우리나라 대학교에서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바다공법 그거 중요한 거야, 중요한 것이니 필수로 정한 거야. 잔소리 말고 그거 공부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게 우리 현실임을 나는 안다.
나는 우리나라 교육 풍토에 대하여 절망하고 개탄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교육이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고쳐야 할 것인지를 안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우리나라 교육은 근본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교육행정가들은 그 큰 잘못은 보지 못 하고 매번 지엽말단을 가지고 교육개혁을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번번이 실패를 하고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육자들의 대부분은 교육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학생의 바람직한 소질을 발견하여 그 소질을 펴도록 도와 주는 일”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자아(自我)의 계발(啓發)”이라고 한다.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학생을 놓고 그 학생의 특성과 자질을 충분히 파악하여 과연 그 학생이 앞으로 어떠한 직업으로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결정하여 그 목적에 맞도록 공부를 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 교육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들의 대부분은 교육을 “지식의 전달”로 알고 있다. 많은 선생님들이 자기는 그렇지 않고, 참교육을 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학생들에게 하는 행위는 지식의 전달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은 학원 강사이지 선생님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보아온 수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학원 강사와 다르지 않으니 한숨이 나는 것이다.
내가 교육을 이와 같이 뜻을 매겨놓으니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나라 학교 교육이 교육답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 학생의 ‘나’를 일깨우고 밀어주는 것일진대 그 교육은 개별화되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단체적인 교육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국민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근대라는 시대 이전에는 귀족만이 교육을 받아서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평민들은 글을 몰랐다. 평민들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나라들이 국민국가로 형성되면서 정부는 무식한 평민들을 가르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정부가 부국강병을 추진하려면 국민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려서 그 명령에 따르도록 하여야 하는데, 국민들이 글을 못 읽고 셈도 못 하고 무식하니 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정부는 국민들에게 글과 셈 그리고 기본적인 사회 지식과 자연과학 지식을 가르칠 필요가 생겨서 그러한 기본적인 사항을 가르칠 학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이 정부가 베푸는 국민교육을 받아서 글을 쓰고 셈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얼마 전에 버린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바로 이 국민교육을 대변하고 있는 이름이다. 즉, 국민학교는 “국민교육”을 실천하던 학교였던 것이다. 다만, 왜정시대에 생겨난 그 이름은 대한민국 국민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왜왕에게 충성하는 “황국국민”을 길러낸다는 뜻에서 국민학교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뒤늦게나마 그 이름을 버리고 “초등학교”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국민교육을 성공리에 마친 나라는 강국이 되었다. 영국, 독일, 일본 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인 나라였다. 국민교육이 성공리에 마쳐지니 대부분의 국민들이 상당한 지식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세계 지도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국민교육을 완수하지 못 해 가난과 무지에 허덕이는 나라들이 많다. 예를 들어, 인도, 파키스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 같은 나라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글을 못 읽는 문맹이다. 이런 나라들은 분명히 아직 국민교육을 추진하여야 할 나라들이다.
이러한 “국민교육”은 내가 말하는 교육이 아니다. 왜냐 하면, 국민교육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을 국민들에게 전수하는 것이었지, 개인의 소질을 개발하여 삶을 개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의 질을 높이는 사회 운동이었지, 인간의 계발이 아니었던 것이다.
국민교육은 물론 값어치 있는 사업이었다. 국민교육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나는 국민교육의 값어치를 무시하거나 깎아 내리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최소한 우리나라는 이런 국민교육의 수준을 넘어서야 하고,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교육에 관한 한 인도, 파키스탄과 같은 수준으로 보면 안 된다.
국민교육 사업이 끝나면, 이제 전문적인 교육, 개별화된 교육이 베풀어져야 한다. 언제나, 학생들에게 똑같은 지식을 가르치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제 기본적인 지식이 갖추어지면 각 학생들의 소질과 능력에 맞추어 각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이 베풀어져야 한다. 이것이 참된 교육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상태로 학교에 간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내가 아는 한 다른 나라에 없는 현상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글쓰기를 배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다 글쓰기를 익혀 버린다.
인도, 파키스탄은 어른들 중 절반 이상이 글을 모르는데, 우리나라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부분의 아이들이 글을 쓸 줄 아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략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첫째는 우린 겨레의 머리가 좋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외국에 나가 경험해 본 바에 의하여 알게 된 것이다. 한겨레의 머리는 좋다. 이것은 정말이다.
둘째는 대한민국 부모들의 알 수 없는 엄청난 교육열 때문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뒤지는 꼴을 볼 수 없다는 부모들의 열의가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글을 읽고 쓰게 만든다.
셋째로, 한글이 매우 우수한 글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편한 글이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배울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너무 쉽게 글을 배우는 것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유엔 산하 기구인 유네스코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 이름을 “세종대왕상”으로 지은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이미 “국민교육”이 끝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교육자들이 이 국민교육을 교육인 것으로 알고 아직도 국민교육을 추진하는 자세로 교육행정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평준화”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으며, 아직도 학교에서 교육평준화를 목표로 삼고 있음을 안다.
“교육평준화”야말로 비(非)교육적이며, 반(反)교육적이다. 교육평준화라는 것은 “국민교육”에서는 있을 수 있는 방침이지만, 국민교육이 끝나면 존재하여서는 아니 되는 방침이다. 어떻게, 영어를 잘 하는 아이, 수학을 잘 하는 아이, 음악을 잘 하는 아이, 미술을 잘 하는 아이, 운동을 잘 하는 아이를 함께 평준화시킨다는 말인가?
영어를 잘 하는 아이는 그 방면으로 더욱 잘 나가도록 밀어주어야 하고, 음악을 잘 하는 아이는 음악을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즉, 개별적으로 학생들에게 맞는 교육이 베풀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을 한 군데에 모아 놓고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겠다는 발상이 교육평준화이니, 이것이 어디 교육인가, 군대 훈련이지.
만일, 이런 아이들을 평준화시킨다면 그것은 서로들 못 하는 수준에서 함께 평준화시킬 수밖에 없게 되며, 실제로 우리나라의 그 동안의 교육이 바로 이와 같이 함께 못 하는 방향으로 평준화를 해 왔던 것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 학교는 참으로 우수한 인적자원을 받아서 대부분 아이들을 바보로 하향평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니, 중고등학교에서는 매우 우수하던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바보가 되어 다른 나라 머리들과의 경쟁에서 뒤졌던 것이다.
평준화를 주장하는 교육자들은 우열반의 폐해를 걱정하고, 또한 많은 학부모들이 학교에서 우열반을 나누어 자기 아이가 우반에 들어가지 못 할 것을 우려하여 우열반 편성에 반대한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학교에서 편성해야 할 것은 우열반이 아니라 개별반이다. 학생들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반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공부 잘 하고 못하는 것을 기준으로, 1반은 공부 잘 하는 반, 10반은 돌탱이반으로 구별하여서는 아니 되고,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의 반, 수학에 취미가 있는 아이들의 반,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반 이와 같이 반을 편성해야 한다.
우리 기억을 더듬어 보자. 옛날 우리들의 수학 시간을 회상해 보자. 60명이 한 반에서 함께 수학을 공부하는데,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10여명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 정도는 이미 다 아는 것이었다. 또한, 10여명은 선생님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간 그룹만 그저 선생님 말씀을 따라 배우고 있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이것은 군대처럼 똑같은 지식을 머리 속에 처넣자는 것일 따름이다.
영국에는 정부에서 지정해 주는 교과서가 없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선생님들이 정해서, 아이들이 공부할 책을 선생님이 골라준다. 아이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선생님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맞추어 가르칠 것과 교재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에 따라 교재와 가르치는 내용을 달리 선택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교육에 관한 한 지옥이다. 젊은 날에 서양 선진국에 나가서 몇 년 동안 지내면서 아이들을 그 나라 학교에 보냈던 사람들은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를 매우 주저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다. 아이들에게 주어졌던 천국을 빼앗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서양 선진국의 학교에서 천국의 행복을 누린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학교에 가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부모들은 천국에서 놀던 아이들을 불러들여서 지옥으로 보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예 그 나라에 눌러 앉아 살 것을 생각한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외국에 눌러 앉는 사람들이 무척 많고, 어떤 경우는 아이들을 영국, 미국에 남겨 놓고 부모만 귀국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육 때문에 이민을 가기도 한다. 아빠는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미국, 영국에 가서 살면서 아이들 교육을 시키고, 아빠는 자주 우리나라와 미국, 영국을 오가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서양 선진국처럼 천국과 같은 학교를 만드는 것이 과연 안 되는 것일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만들기 위하여 실천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계획하고 있다. 이것을 논의하자면 참으로 길다. 여기 이 글에서는 이것을 모두 논할 수는 없고, 중요한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학교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가장 먼저 교육자들이 학교는 학생들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정이 학생보다 앞서서는 아니 된다. 교장, 교감, 교사의 이익이나 편의가 학생의 앞날보다 앞서서는 아니 된다. 학생이 잘 되도록 하는 일을 위하여 행정과 교장, 교감, 교무부장, 교사들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경우에 따라서 희생까지 할 수 있을 때, 우리나라 학교는 천국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영국의 학교에서 이것을 느꼈다. 그곳의 교육자들은 진실로 아이들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고 학생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주었다.
나아가, 교육자들이 교육이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똑같은 지식을 가르치는 국민교육이 아니라, 학생들 개인의 소질을 개발하고 밀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학생들의 성적을 1등부터 600등까지 매겨놓을 때, 그 학교는 천국이 될 수 없다. 학생 개개인이 장점을 가지고 잘 하는 분야를 가지고 값어치를 가질 수 있을 때, 학교는 천국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내신성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이것이다. 내신은 학생이 어떻게 생활하였고, 어떻게 공부했는가를 자세히 써서 밝혀주고, 대학교에서 이것을 참고로 학생을 선발해야 하는 것이지, 숫자로, 등급으로 만들어서 줄을 세워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학교생활을 등급으로 매겨서 대학입학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실로 소름이 끼치는 반교육적인 작태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나라 고등학교가 지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육에 대하여 할 말이 참 많다. 이 글에서는 그 일부만을 썼다. 내가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교육에 대한 생각을 다 써 놓으면 그것은 한 권의 책이 될 것인데, 나는 언젠가는 그런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내가 지옥과 같은 학교를 다녔으며, 내 아이들이 지옥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지옥을 피하여 천국과 같은 서양의 학교로 내 아이들을 내 보낼 생각이 없다. 왜냐 하면, 나와 내 아이들은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힘들고 어려워도 내 아이들이 이 땅에서 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를 바라지, 다른 나라에 가서 손님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와 내 아이들, 손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 교육을 개혁할 수 있는 일이라면 노력할 것이고, 또한 교육 개혁을 위한 생각과 실천 방안을 정리해 놓을 것이다.
변호사 17년 (4336년, 서기 2003년) 5월 1일
첫댓글 혁명이 아닌 개혁을 하려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부와 명예와 권력을 향유하는 사회저명인사)이 솔선수범 하여 내자식, 내가문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게임에 참여할수 있는 공평한 룰과 틀을 마련 국가에 기여할수있는 진정한 인재를 배출하는 교육풍토와 사회풍토가 조성 되었으면 좋을텐데... 어느세월에 되려나...
교육 문제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고 교육인적자원부는 장관이 바뀔때마다 수시로 제도를 개선한다며 개악을 해온것이 사실이다. 또한 학교에서는 인성교육도 중요시 하여야 하는데 이를 포기한지 오래된현실을 통탄한다. 권변호사의 지적에 동감을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