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행-
K형, 나는 오늘 4시간 여 운전을 해 첩첩산중을 파고드는 구불구불한 고갯길이 끝없이 열려있어 초행 여행자를 당황하게 하는 청송(靑松)에 왔습니다. 사시사철 늘 푸르름이 있다는 곳, 지명(地名)에서 맑은 기운이 뚝뚝 묻어날 것같은 청송에 왔습니다. 들었던 대로 이곳은 앞과 옆 그리고 뒤에도 산 산, 산들이 열병하듯 서 있어 길을 찾아간다기 보다는 길을 헤맨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습니다. 차길 주위에 병풍처럼 늘어선 산줄기는 고향의 동네 언덕배기를 대하듯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오지라서 그런지 길가와 밭 어디에도 인적이 드문 곳, 그래서 산골이 더 정겹습니다. 나그네가 담아 갈 가을풍광이 지천이고 오늘 밤을 묵을 집에서 하늘을 보니 밤하늘의 별무더기가 손에 잡힐 듯 합니다. 밤 공기의 청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K형. 오늘 밤 머물 집은 감나무 풍경이 그윽한 마을의 조선후기 만석꾼의 가옥, 송고고택입니다.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안채 등이 'ㅁ'자 형으로 펼쳐진 이 집은 전통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오롯이 간직한 곳이군요. 무려 7개동 아홉아홉 칸이라하니 그 크기에 놀랍고 옛 집주인 위세를 가름하게 합니다. 나는 그런 위세보다는 오랫만에 장작 군불을 떼는 방에서 잔다는 사실이 더 행복합니다. 언제 어디서 다시 이런 집과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
K형은 언젠가 '누구든 울굿블굿한 가을이 융단처럼 깔린 청송,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진 가을의 청송에 한번 갔다하면 그는 틀림없이 또 가을이 되면 그 풍광이 눈에 선해 다시 찾을 것이라'했지요.
그런 마음이 내게도 생기도록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산자락을 보니 그 아래로 혈관처럼 휘감은 계곡과 하천, 그 사이로 가을바람에 몸을 젖히고 노는 억세와 갈대들, 그리고 한철 장사를 마감하는 사과밭의 몇 안 남은 사과들이 도드라져 보여, 지금 청송에는 완연한 가을이 수줍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K형, 날이 새면 청송보다 더 유명세를 자랑하는 이웃 주왕산을 찾을까 합니다. 태백산맥에서 뻗어나온 지맥으로 별로 높지는 않지만 헤아리기 어려운 전설, 기암괴석의 오묘하면서도 화려한 배열 그리고 가을단풍의 화려함을 품은 명산, 주왕산을 갈 작정입니다. 지금 쯤 단풍이 절정일, 그리고 단풍 빛갈이 유난히 고운 절골계곡을 출발해서 가메봉과 내원마을을 거쳐 몇 개의 폭포를 지나 대전사로 내려올렵니다.
많은 산길 중 절골을 택하는 것은, 절골의 단풍을 보면 어느 곳보다 마음이 설래이기 때문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그곳의 단풍의 아름다움은 가을 하늘을 수놓은 노을의 변신과도 같고 서리의 짓궂은 장난과도 같답니다. 시선을 단풍잎 하나하나에다 머물면서 천천히 계곡길을 가다보면 드지미재를 오르는 산길을 만나고, 산길을 오르면서 보이는 발아래 떨어진 낙엽들에는 숨겨 놓았던 사연들이 몇 줄 쓰여있는듯 아픈 추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바람에 나부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가을에는 조락만을 말하지 않을렵니다.
산행 후에는 신비의 청송약수로 끓인 닭백숙과 연한 녹색의 국물도 맛보고 안동소주도 한 잔 할랍니다. 이렇게 하면 오색단풍으로 찬란한 청송 땅도 밟아보고 울울창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어우려진 주왕산 풍광도 볼 수있어 자연의 사치를 한껏 누려볼 수 있겠지요. 운 좋게 단풍비라도 내리면 옷을 벗고 있을 주왕산을 더 깨끗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산 중에서 가장 좋아 해 가을이면 자주 찾는 주왕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