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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5) - 이근호 목사
[ 히브리서 (5)] - 11장(1,서론)
1998,6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성경말씀은 오직 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
* 중요한 것은, 마음밖에 있는 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십자가를 여러 수백 번을 지셨더라도 그것이 마음밖에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가 마음밖에 있는 사람은 살고자 할 것이고,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죽고자 한다는 것이다.
* 성경말씀은 오직 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이해가 되지,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다가 죽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살려고 무엇을 한다면 이 세상과 타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살아야 하니 말이다.
* 그런데 교인들은 살려고 교회에 모였는데, 그곳에서 '죽자!' 라고 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보다 편하게, 잘살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죽자고 하는 것은, 마치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 내에서 장로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은 살고자 해서 교회를 세운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예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라는 것이다.
* 어느 교회에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주일 아침에는 장로님이 설교하고 저녁에는 전도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장로님이 설교할 때는 아무도 '아멘' 소리를 안 하다가,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면 '아멘'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전도사님이 교회를 물러났다는 것이다. 장로가 전도사를 쫓아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전도사의 설교가 성경적으로는 분명히 맞지만 그러나 장로인 내가 이 교회를 세운 목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말씀을 포기한 교회라는 것이다.
* 열왕기를 살펴보면, 엘리야나 엘리사가 누구를 공격하는가? 민중들인가, 왕인가? 분명하게 왕인데, 그러면 왜 왕인가? 다윗언약에 의하면, 왕 하나가 잘되면 백성들도 덩달아 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성전에 들어가실 때, 백성들이, 특히 어린아이들이 뭐라고 하는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무슨 주특기가 있는가? 오직 왕 하나만 잘 만나면 그 왕을 통해서 복이 온다는 것이다.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외쳤는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왕 하나만을 잘 만나면 자기들은 그냥 산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윗언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다는 것이다.
*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바세바와 다윗이 부정을 해서 낳은 아이가 하나 있는데, 이 아이는 이름도 안 나와있는데, 그런데 이 아이가 태어난 지 7일만에 죽는데, 그 동안에 다윗이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는 멀쩡하게 평상시처럼 돌아왔다는 것이다.
* 왜 그런가? 다윗의 기도와 금식이 결코 그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 아이가 죽은 것은 다윗의 죄 때문에 그렇다고 나단 선지가 지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아이를 주시는데, 이 아이가 바로 '여디디아', 즉 솔로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이라도 안 된다는 것이다.
* 다윗의 기도와 금식은 그 아이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이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셔서 주신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열매로서 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이 새로운 아이를 볼 때마다 점점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금식과 기도가 아니라 말이다.
* 이런 점이 '용의 눈물'의 마지막 장면과는 다른 점인데, 그 마지막 장면에 이방원(유동근)이 나라에 그만 가뭄이 들어서 기도를 하는데, 하늘에서 비가 죽죽 내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원이 지은 죄를 하늘이 다 용서해준다는 의미가 깔려있는 것이다.
* 그러나 다윗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분'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점을 한국교회가 제대로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없으면 없지 뭐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뭔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우리가 주님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언젠가 주님을 버린다는 것이다. 환경이 바뀌고 입맛이 바뀌면 말이다. 그러나 주님의 선택을 안다면, 어떠한 상황이 와도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버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솔로몬의 존재는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다윗을 사랑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하는 것은, 소경이나 문둥병자가 뭔가 제시할 것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약속을 믿고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부터가 이 세상에서 민중들이 바라는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 총신대원에 가서 강의를 하면서, 열왕기에서 왜 선지자들이 왕을 공격했느냐는 것이다. 지금 왕들이 생각하는 여호와와 선지자 배후에 있는 여호와가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싸운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 그 당시 선지자의 말을 듣는 7천명은 바로 선지자 엘리야의 배후에 있는 여호와를 보고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그런데 이 7천명이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과 행동에 동의를 했다는 것이다.
* 어떻게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고 빈 그릇에 기름이 차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들이 무엇을 바치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이다.
무엇을 주고받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사실을 한국교회가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교회가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아니라 말이다.
* '여디디아'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윗이 여디디아가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어떤 마음을 가졌겠는가? '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러한 솔로몬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면, 우리들의 마음가짐도 어떠해야 하겠는가? 역시 다윗과 같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이런 개떡같은 놈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 말씀이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그런 교회에서는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가 아무리 많고 아버지가 장로라고 해도 말이다.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그런 교회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과연 남은 자인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우리의 각오 - 무엇을 하다가 죽지 !!
*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생각들은 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하다가 죽지?' 라는 마음가짐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반대로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지?' 라고 하면, 예수님을 등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세상과, 교회와 타협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다 살려고 교회에 왔으니 말이다. 그런 교인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어야 함께 살려고 하지 않겠는가? '죽읍시다' 라고 하면, '나가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대구의 제법 큰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가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사람들이 원래 모두 돈을 좋아하는데 그 목표를 자기 노력으로는 다 채우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힘으로 나머지를 모두 채우려고 교회에 나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하나님을 얼마나 저질적인 분으로 바꾸고 말았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인간들의 돈이나 대주고 욕망이나 채워주는 분이냐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자기 아이가 입원을 했는데 왜 기도를 하는가?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돈이 하나도 안 들면 왜 기도를 하는가? 교회에 나와서 놀면 되지 말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돈 때문에' 라는 것이다. 싫던 좋던 간에 말이다. 이 세상과 교회도 이렇게 돈을 따라 빙빙 돈다는 것이다. 마치 레코드판이 돌 듯이 말이다.
* 요즘 왜 예배당을 크게 짓는가? 크게 지어놓으면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물론 부채는 없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마음가짐으로 지은 교회가 어떻게 교회냐는 것이다. 그냥 산밑으로 내려온 갓바위에 불과하지 말이다. 마을 곳곳마다 갓바위라는 것이다. 그것도 십자가가 달린 갓바위 말이다.
* 부산 문현교회에 가서 새벽기도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누가복음 21장을 설교하면서, 생활의 염려 때문에 마음이 둔화된다고 했는데, 우리는 생활을 염려하지만 주님은 그런 염려 때문에 마음이 둔하여져서 지옥 갈까봐 염려하신다는 것이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 그리고 요한복음 5장 29절의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을 설교하면서, 이 땅에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은 죽고 난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만 그렇게 연연해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이제 히브리서를 들어가기 전에, 지난번에 강의한 것을 다시 요약해보면, 아무리 밖에 좋은 것들이 있어도, 십계명이 있고 뭐가 있어도 그것이 내 마음의 법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수백 번을 짊어져도 그것이 내 마음밖에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최진실이 예쁘고 김희선이 예쁘고 박정애(?)가 예뻐도, 그들이 내 마누라가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아닌가?
*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는데,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는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야 그 사랑이 들어있지 말이다.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들어오는가? 아무리 디자인실의 정 실장이 좋아해도 이강토가 싫다고 하는데 되느냐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고? 그 유명한 '미스터 Q'도 모르는가?
◈ 새 언약의 조건 - ① 누군가 다른 분이 법을 완성해야 !! ② 그리고 그 법이 내 마음속에 !!
* 그러니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를 지셨는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 완성된 법이 우리의 마음속까지 들어와야만 되는데, 이것까지 합쳐서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새언약은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드리는 제사는 받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즉 인간의 행위는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그분이 하신 것만 받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히 10: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 우리들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셨는데, 첫 것은 왜 폐하는가? 인간이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대로 행하셨던 둘째 것은 세운다는 것이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우리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그 거룩함과 의(義)가 우리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온전히 모두 다 이루심으로 우리는 공짜로 '얻었다' 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없는 데서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까?' 라는 것이다.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말이다. 둘째 것을 받으려고만 하지, 처음 것을 왜 폐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둘째 것을 제대로 받으면 그런 말도 못하지만 말이다. 왜 하나님께서 처음 것을 폐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것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 !!
* 그래서 새언약 속에는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받지 않는다' 라는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언약의 첫째 조건인, '하나님의 법을 완성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라는 것은, 우리들의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약속을 이루셨는데, 그 약속을 믿을 인간이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분을 두고서 '미쳤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차라리 외면하고 싶다는 것이다. 너무나 비참하기에 말이다.
* 우리들의 마음은 그분을 메시야로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마음이 무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는 악의 세력이 이미 자리잡고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악의 세력이 말이다.
◈ 귀신 들린 자 -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하고 싶은 설교가,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인고 하니 한국교회의 내막이 그렇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장로에게 쫓겨난 전도사님 이야기도 했지만, 제발 우리 교회에서 예수 이야기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귀신들린 자가 말한,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막 5: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 그러니 지금 한국교회는 온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밀쳐낸다는 것이다. 목회자에게도 그런 예수님 이야기는 너무 힘드니 그런 설교는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스트레스를 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세상일도 하고 십자가도 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지금 교인들은 자기들이 하고 모자라는 것은 보충하려고 교회에 나오는데, 그런데 엉터리 목사들은 뭐라고 하는가? 지금 이렇게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기도를 안 해서 그러한 것이니, '열심히 기도합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목사들은 쫓아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입맛에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 그런데 '여러분, IMF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신경을 쓰십니까? 어차피 죽는 마당이 돈이 뭐가 필요합니까?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봅시다' 라고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것이 성경에 있는 줄을 교인들도 알지만, 그러나 왜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귀신들린 자가 외치는 사고방식과 얼마나 똑 같은가?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 그런데 그렇게 설교를 하지 않고, '여러분,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라고 하면, 교인들은 그렇게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이 그렇게 기도하는 내면에는 어떤 마음이 잇는고 하니,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물질도 좀 채워주시겠지' 라는 바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쓰다가 남는 것은 구제도 좀 하고 말이다.
* 이러한 가짜 복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엉터리 목사 4인 방이, 바로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이동원' 이라는 것이다. 아닌가? 이런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 왜 돈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야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목사의 임무 - 여러분, IMF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
* 그런데 제대로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IMF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거지 나사로가 될 수가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는 놈이 이런 목사를 좋다고 하겠는가? 마누라도 보따리를 싼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들도 하는 말이 '그 정도는 다 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도 목사로서 좀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나도 목사로서 살아야 하겠다' 라는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살고자 하는 바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정신과는 정 반대의 정신을 가지고 강단에 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내막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 하지를 않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마련한 분이 따로 계시고, 그분이 법을 성취를 하셨고, 그리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스스로 자기 자신과 맺은 약속에 의해서,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여기 18절에 나오는 소망이 무엇인가? 잘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서 죽는 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도 우리가 나그네라고 하지 않는가?
◈ 목회자의 한 마디 - 죽으세요. 그러면 삽니다 !!
*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소망은, 소위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소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보면 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제 죽어도 괜찮은 길이 열렸습니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죽어야 되는데, 그런데 죽으면서도 뭔가 죽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도 하나의 쇼라는 것이다. 그런 드라마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냥 조용하게 죽자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 흙, 흙, 흙 !!
* 사람이 죽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은 하나의 취미이지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그런 노동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조용히 그냥 살다가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목사로서 담담하게 설교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약속이 중요한 것이니 말이다.
*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가? 처자식도, 교회도, 재산도 말이다. 이런 것을 뭔가 내가 소유하려고 하니까 불안하고 겁이 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하나님께서 첫 번 것을 폐하신 이유는, 다윗의 금식과 기도를 안 받는 것과 같은 차원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하나님께 재롱을 피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만약에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 라는 마음가짐이라면 히브리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러나 거꾸로 그러한 마음이 없고 오직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긴다면, 히브리서는 그야말로 술술 풀려나간다는 것이다.
(히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모든 것을 다 용서하셨는데 무슨 제사가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안식일도 그렇고 말이다. '받으소서' 라고 하면서 제사 때 잔을 돌리듯이 그런 음복(飮福)하는 모습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합격해서 통지서를 보냈는데, 그런데도 합격시켜달라고 계속 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모독하느냐는 것이다. - 줘도 못 먹나 !!
*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끼리 모이기 때문에,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교회라고 한다면, 자기의 처지를 비관한다든지, 낙망한다든지, 부끄럽다든지, 라는 말이 결코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서 하늘나라에 가는 기관차에 올라탄 입장이라면, 기차가 늦게 가든지 일찍 가든지 아무런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느긋한가? 마치 낮잠을 즐기는 배부른 사자와 같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런 철저한 죄 용서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촛대뼈를 까는, 따귀를 때리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심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한 이야기가 히브리서 10장 28, 29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히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여기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 주체적인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효과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런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지근지근 밟는 행위라는 것이다.
* 그러니 오늘 한국교회가 과연 아들을 높이는가, 아니면 밟고 있는가? 정말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인간들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 옆에 서서 버티려고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밟는 행위인데, 이것은 결코 용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 언약의 피만이 거룩하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피가 아니라는 말이다.
* 그런데도 자꾸만 여기에 자기의 무엇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이 언약의 피의 완전성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나오는데, 무슨 성령인가? 은혜의 성령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구약시대의 모세의 법과 한번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언약의 피, 은혜의 성령,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그냥 들어왔는데, 그런데 이것을 부정하고 자기의 행위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자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다.
(히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 여기 갑자가 원수 갚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 원수갚는 것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새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목회자라고 한다면 이 새언약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 약속이 아니면 전하지 말자 !!
* 과거 신학교에 다니면서 한가지 다짐을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약속이 아니면 전하지 않으리라' 라는 것이다. 그 약속이 바로 '예수님의 피를 믿고 천당에 가자' 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잘 살자'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무슨 남북통일이 나오고, 밥 퍼주는 사랑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 그런데 신학교를 다닐 때, 이 히브리서 10장을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데, 왜 다른 학생들은 그런 마음이 없었는가?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약속이 아니라, 장차 자기가 훌륭한 목회자가 한번 되어 보겠다는 쪽에 가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것이, 자기에 대해서 기대를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인가?
* 이런 자기에 대한 기대감은 '남은 못 되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하겠다' 라는 그런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이다. 자기 생존에 대한 집요한 애착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자' 라는 성경말씀과는 정면으로 충돌된다는 것이다.
* 기존 목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 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더욱더 자기의 있음을 확고히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은 사라지고 자기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또 정면충돌하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도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가증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성경이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겠는가?
* 이렇게 목사가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면, 이것이 설교시간에 나타나는데, 교인들이 눈치를 챈다는 것이다. 뭔가 좋은 말을 하기는 하는데 수상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목사를 존경하지 말고 주님만 존경합시다' 라고 해도, 자기를 존경하라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여러분, 헌금이 없으면 사례를 안 주어도 괜찮습니다' 라고 해도, 사례를 왕창 올리라는 소리보다도 더 무섭게 들린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미스터 Q'에서, 이강토를 한혜원이 사랑하는 것과 디자인 정 실장이 사랑하는 것과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사랑이라고 해도 말이다. 문제는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목회자의 경우에,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도 좋다고 하는 그런 기쁨과 희열이 없이 그냥 설교를 해버리면, 교인들이 눈치를 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설교하면 듣는 교인들도 괴롭고 설교하는 당사자도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의 실상하고 말씀하고 다르기에 말이다.
* 그러니 이 성경이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 인간들을 골수까지 쪼개서 그 모든 내막을 다 해체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분해된 곳에다가 피를 마구 퍼부어 버린다는 것이다.
(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히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 피를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는데, 이것은 하나의 테크닉인가, 아니면 외형적인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어린양의 죽음에 동참되지 않으면 죽음의 사자로부터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 - 피와 더불어 죽어 가는 공동체 !!
* 출애굽을 할 때 처음 유월절의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이 피의 운명으로, 피 속에 잠겨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피와 더불어 함께 죽어 가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언약의 백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이런 성경말씀을 보면서, 어떤 테크닉과 방법론적인 것들 전혀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자체가 우리가 말씀을 이용해서 뭔가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여지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구나 다 읽을 수가 있지만, 그러나 아무나 읽다가는 큰 코(?)를 다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성경이 너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거지 나사로고 십자가상의 한편 강도의 입장이라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참된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부담이 되는 것은 자기가 뭔가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의 있음을 더 확고히 하려는 그런 욕심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 기적과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치명적 약점이 무엇인고 하니, 병 고치는 것은 어느 정도 흉내를 내지만 물위로는 걷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풍랑이 치는 바다를 잠잠케도 못하고 말이다. 병을 고치는 것이나 물위를 걷는 것이나 다 동일한 주님의 이적이 아닌가? 그런데 왜 하나만 고집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사기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 그러면 기독교 윤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기성이 있는가? '술 취하지 말라' 라는 이야기는 잘하지만,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 라는 소리는 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뻐할 만한 것은 기뻐하겠지만, 그러나 항상 기뻐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적을 주장하고 기독교 윤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경우는, 바로 십자가의 강도와 거지 나사로의 경우라는 것이다.
* 며칠 전에 신학생들에게 화두(話頭)를 던졌는데,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모두 의아해했다는 것이다.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 찬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교인들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헌금이 절반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찬양하는 교회를 보았습니까?', '주일학교가 사고가 나서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한 것을 찬양하는 교회를 보았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드리는 찬양과 감사는 자기들 뜻대로 되게 해달라는 그런 찬양과 감사라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찬양과 감사를 통해서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다가 보면, 정말 주님이 선택하지 않고서는 단 한 놈도 견디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퉁겨 난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너무나 낯설고 부담스러운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을 전하는 설교자라는 직분이 그 얼마나 무서우냐는 것이다.
* 그러니 그런 목회자가 자기 교회 장로를 무서워하고, 당회장을 무서워하고, 총회장을 무서워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정말 너무나 무서운 그분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정말 무서운 그분을 말이다.
(히 12:18) 너희에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히 12: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히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 지금 모세가 두려워서 떨고 있는데, 왜 그런가? 모세가 청와대 대통령을 만난다고 떨고 바로 왕을 만난다고 해서 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떠는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이 없다면 목회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무서움 가운데서도 살아남았다는 그 구원의 기쁨, 그것이 바로 '항상 기뻐하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서워하고 겁을 낸다는 것은, 마귀에게 여전히 사로잡혀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무너져 가는 흙덩어리를 두려워하느냐는 것이다.
* 군대생활을 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제대를 하고 나면 '아니, 내가 왜 저런 허수아비 같은 인간들을 그렇게 무서워했던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제대하고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그냥 과거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닥쳐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에 있을 때에는 모른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명령하셔서 돼지 때에 귀신이 들리자, 그냥 돼지들이 죽으려고 마구 바다로 뛰어든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군대는 마귀의 절정(?)이라는 것이다. 나이도 작은 조교가 꼴아 박으라고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한다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악마가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압력을 가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평생 마귀의 종노릇을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이 15, 16절에서 계속해서 이 히브리서를 죽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사실 이런 말씀이 전혀 목회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그러나 영생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 죽자' 라는 사람이 아니면 히브리서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제 다시 히브리서 10장을 보자.
(히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히 10: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 지금 이 말씀은 '아예, 우리는 이 세상의 구경거리다' 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에 기죽지 말라는 것이다. 영구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니 이런 내용을 어떻게 설교를 하느냐는 것이다.
* 물론 이런 본문을 '여러분, 이러한 고난을 당하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왜곡해서 설교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하면 당한 것이지, 그런 당한 것 때문에 보상이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절망과 부담만을 가득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댄 장로들이 얼마나 목사를 미워하겠는가? 교회성장에 일말의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6월말로 할까, 12월말로 할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빠진 것 하나만 다시 설명하자면, 26절에서 짐짓 죄를 범했다고 하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고, 그따위 주장을 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마치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십자가을 믿지 말라'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이 과연 그런 말씀인가?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도 안 짓는다고 한다면, 정말 이제는 언약의 피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죄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새언약이 모두 깨어진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본문은, '새언약이 들어온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부인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믿는고 하니까, '어떤 것이 최종적으로 나를 속죄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두고서, 정말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죄 용서함을 받았다면, 즉 언약의 피로 그렇게 되었다면, 그런 사람이 '가만히 있어보자. 또 내 죄가 생길 것이니 다른 것을 한번 찾아보자' 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버리는 죄는 천당 가서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다.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그 정도로 예수님의 피는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어야 하고', '기도는 몇 시간 해야 하고' 하는 등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짓을 안 해도 예수님의 피는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을 짓밟는 행위와도 같다는 것이다.
* 이렇게 말하면, '아니 목사님, 너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전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택한 자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법이 이미 들어왔음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런 것이 없으니 남을 걱정하는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자기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 1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사생아 같으면 간섭을 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의 아들이라면 징계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성령이 들어왔으니 그분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 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고 말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없으면 마귀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도 없고 마귀도 없는 사람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 사람이 까부는 것도 그렇지, 무엇을 기준으로 까부느냐는 것이다. 다들 자기의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까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성경의 기준과 맞는가? 누가 진리이고 기준인가? 그러니 엉터리 기준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주님이 제시한 기준은 무엇인가? 사랑이 없으면 다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랑이 기준이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어떤 조건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래두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레위기에서 '소금언약' 이라고 나오는데, 그야말로 그대 앞에서 거짓의 옷을 벗는다는 것이다. -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이 없고, 공짜로 우리 속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배를 드려도 '사랑을 예배를 드리자' 라고 하면 안 되도, 사랑 자체가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예배라는 것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예수님께서 공연히 피를 흘렸는가? 그분이 피를 흘렸으면 반드시 사함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시종일관 이야기하는 것이, 구약시대에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었으나, 즉 그림자와 모형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마지막 때에는 언약의 피라는 것이다. 그러니 고난과 핍박 때문에 주님을 버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을 이긴 자라는 것이다.
* 이것이 구체적으로 히브리서 11장에 낱낱이 다 나오는데,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 등 수 많은 사람들이 다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영웅들이 아닌, 믿음의 후손들을 보면서 자기도 성질 급하게 얼른 참여하려고 하지 말고, 히브리서 10장까지 정리가 다 되었다면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구 헤맨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히브리서 11장 24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라고 되어있는데, 모세가 언제 거절했는가?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억지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 이란? - 오직 예수 그리스도 !!
* 그런데 성경을 이것을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냥 그들을 일방적으로 몰고 다니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이고, 예수님은 애마부인(?)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피를 그들에게 마구 퍼부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운명의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물귀신 작전(?)이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의 피가 발린 자들을 놓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 그런 무서운 분에게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속하는 것인데, 그런 기적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는 기쁨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 여기 인내와 약속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피를 받은 예수님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 피를 받은 '피의 공동체' 라는 것이다.
(히 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믿음이란, 집단자살 행위이다 !!
* 여기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믿음은 예수님을 지향하는 속성을 가지는 것인데, 믿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단단하게 잘 믿느냐가 아니라, 호두 같은 그것을 깨트리면 그 속에 예수님만 달랑 들어있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집단자살이다' 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다른 데로 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함께 있는 분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 너무나도 연약하다는 것이다. 옆에서 마구 흔들고 쑤시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아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창조의 원리가 따로 있음을 모르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남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가 편하면 그만 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중심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 주께서 땅의 기초도 두었고 하늘도 지으셨는데, 그런데 그것들은 다 멸망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직 주님이 영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멸망당하는 것에 우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자기 자신의 영존만을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이것이 과연 통하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그대로 두면 다 망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새언약을 보내서 선택하시는데,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원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택함을 받은 사람은, 즉 새언약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온 사람은,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주님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언약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 목회자의 한 마디 외침 -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
*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회자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무엇 무엇을 합시다' 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라고 외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을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간다는 그만 이라는 것이다.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 히브리서 10장 마지막에서, 인내하고 뒤로 물러가지 마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다. 징계를 해서라도 말이다. 그 증거가 바로 11장에 줄줄이 나온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제대로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나님을 믿을 만한 인간이 전혀 못된다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드디어 히브리서 11장에 들어왔는데, 그런데 이 11장을 많이 설교한 사람일수록 이 11장을 엉터리 설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11장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시작하자는 것이다.
* 여기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실상이란 무엇인가? 11장 39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증거는 약속에 대한 증거라는 것이다. 약속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고 말이다. 믿음이라는 호두를 깨면 그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형태로 자기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미리 앞당겨서 말이다.
◈ 믿음 -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이미 오셨다 !!
*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내가 결심해서 믿고 의지하고 마음을 드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믿음의 실상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 약속의 내용물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믿는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것은, 단지 오실 분의 장차 증거하는 의미에서 미리 앞당겨 와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니, 나중에 오실 분이 어떻게 미리 올 수가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장차 오시는데 그 이전에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말씀 성취를 위해서, 이 약속은 모형과 그림자로서 미리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모형과 그림자에 맞추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미리 설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모형과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히브리서 1장에서 이미 언급하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존하시는 주가 오시니까 기다리라는 것이다. 여러 부과 여러 모양이 실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전체의 내용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전체가 그러하고 말이다. 자기의 구원받음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장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 핵심 -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지 않아도 끌려간다는 것이다. 말씀이 능력으로 당기니 말이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는 침륜(沈淪)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게 하시고 말이다. 이렇게 의인은 참된 의인에게 끌려가는데, 그것을 두고서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자기가 만든 믿음이 아니라 당기는 힘으로 미리 어떤 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약속이라는 미리 있어서, 이 약속이 여러 사람들을 증거물로 활용했는데, 활용 당한 사람은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다양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약속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믿음의 영웅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tape 4 끝)
* 이미 약속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설칠 수가 있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살펴보면서, '아, 예수님을 이런 면이 있구나', '아니, 이런 면도?'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1절에도 있지만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항상 강조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초조해하지 말고, 그분만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분을 증거할 기회들이 얼마나 많이 주어지는가? '나는 할 것 없다. 놀자'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모든 것을 하셨다' 라는 것을 증거하자는 것이다.
* 그것도 못하는가? 물론 우리 힘으로는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존심이 있기에 말이다. 자기가 무엇을 이룩하는 그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그것을 못하게 하니 열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증거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증거하라는 말인가?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왜 믿는 자들에게 문제가 되는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는 증거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 이상으로 인정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보면, 하나는 긍휼의 그릇, 하나는 저주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제 3의 그릇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든지, 자기 잘난 것을 잘아하든지, 그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일반 민중들이 왜 교회에 나오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 즉 '싫으면 말고!' 라는 것이다.
*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을 들어가기가 사실 이렇게 힘든다는 것이다. 함부로 들어가 버리면 아벨하고 노아하고 막 먹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히브리서 11장 강해서들이 대부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 그런 책들은 사지도 말고 보지도 말자 !
*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라는 것을, '예수님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믿음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1장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말하는 이 외골수 믿음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이다.
* 지금 히브리서 11장은 '너희들이 과연 그런 믿음이 있는가?' 라고 우리에게 묻는데, 만약에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고 오직 이 믿음만을 붙들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이다.
*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땐 얘기를 나누나 거울 속의 나하고, 웃어라 웃어라 울면 바보다, 캔디 캔디야 !
* 이 땅에 좋은 날이 있는가?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날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믿음의 기차에 탔다고 하는, 그 완료된 상태 외에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을 다 상대적이고 돈을 좀 벌었다고 설치다가도 더 많이 번 사람들을 보면 비애를 느낀다는 것이다. - 슈퍼맨의 비애 !
* 여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보면, 그의 밑바닥 인생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 말고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런 자들 가운데 겁도 없이 뛰어들려고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