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약용의 생애와 저서
申熙榮(서울고은초등학교/교사)
1. 생 애
1762(영조 38)-1836(헌종2). 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호는 사암, 탁옹, 태수, 자하도인, 철마산인, 다산, 당호는 여유(與猶), 경기도 광주(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 마재)출신. 아버지는 진주목사 정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윤두서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월 22일 향리에서 죽었다. 13세 때 풍천홍씨를 취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 학유와 서랑 윤참모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 참의, 좌우승부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육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육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는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의 윤치충, 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게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않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 시절에 마과회통, 사기찬주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지, 채 1년도 못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통사건으로 체포, 투옥되니 , 이로서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제2기>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공세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시절은 유배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 소풍길에 혜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 갔다.
한편, 9개월만에 다시금 목리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주역사전"은 18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 "춘추"(1812) "논어"(1813), "맹자"(1814), "대학"(1814), "중용"(1814), "악경"(1816), "경세유표"(1817), "목민심서"(1818)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 4서와 1표 2서를 완결지었다.
<제3기>
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는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 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 12권외에 "시경강의보" 3권이 있다. 시는 풍림이라 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여,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에는 "매씨상서평" 9권 "상서교훈" 6권, "상서지원록" 7권이 있다. "선기옥형"은 상천의 의기가 아니요 "홍범구주"도 정전형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12권, "사례가식" 9권이 있다. 관혼상제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전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로, 소로, 특생, 특돈의 예에서 그의 변도나 궤형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 대부, 사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鄒衍,
呂不韋, 劉安등의 취률정성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 취처생자의 설이나 괘기월기, 정반변반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易에는 <주역사전>24권, <역학서언>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推移, 물상, 효변, 호체로서 십이벽쾌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 소과 두괘는 오세재윤를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12권이 있다. 좌씨의 책서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책서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는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는 오제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곱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가 너무나도 많다. 총520여장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이라 하였다. 그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부목으로서 주자의 심덕, 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덟째, <맹자>에는 <맹자요의>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鷗)의 기호와 영지(靈知)의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유가의 천명지성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의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아홉째, <중용>에는 <중용자잠(中庸自箴)>3권, <중용강의보>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 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에는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답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 1권 <심경밀험>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 제, 자 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善後)의 지다.
다음으로 1표 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경세유표> 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 군현제도, 전제,부역, 공시, 창저(倉儲), 군제, 과제, 해세(海稅), 마정(馬政), 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 봉공, 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 호, 예, 병, 형, 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서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로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서 6경 4서로써 수기하고 1표 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시문잡저를 살펴보면, 시문집 18권을 간추려도 6권은 되고 잡문은 전편이 16권, 후편이 24편이다. 또한, 잡찬목록을 보면 <아방비억고>30권 (미완성)이 있고 <아방강역고> 10권, <전례고> 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관> 3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 등이 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2. 저 서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집(經集) 220권과 문집(文集) 237권 5백 여권의 저서와 2500여 수의 시를 남기며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에서 일궈낸 그의 학문은 전통 성리학에 실사구시적 연구방법론을 접목시킨 것이다.
3. 대표적저서
> 목민심서(牧民心書)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으나 귀양살이하는 몸이니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필사본. 48권 16책. 규장각도서. 이 책은 지방 관헌의 윤리적(倫理的) 각성과 농민경제의 정상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여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코자 한 것이다. 내용은 모두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① 부임편(赴任篇):치장(治裝) ?사조(辭朝) ?계행(啓行) ?상관(上官) ?위사(事). ② 율기편(律己篇):칙궁(飭躬) ?청심(淸心) ?제가(齊家) ?병객(屛客) ?절용(節用) ?낙시(樂施). ③ 봉공편(奉公篇):선화(宣化) ?수법(守法) ?예제(禮祭) ?문보(文報) ?공납(貢納) ?요역(役). ④ 애민편(愛民篇):양로(養老)?자유(慈幼) ?진궁(振窮) ?애상(哀喪) ?관질(寬疾) ?구재(救災). ⑤ 이전편(吏典篇):속리(束吏) ?어중(馭衆) ?용인(用人) ?거현(擧賢) ?찰물(察物) ?고공(考功). ⑥ 호전편(戶典篇):전정(田政) ?세법(稅法) ?곡부(穀簿) ?호적(戶籍) ?평부(平賦) ?권농(勸農). ⑦ 예전편(禮典篇):제사(祭祀) ?빈객(賓客) ?교민(敎民) ?흥학(興學) ?변등(辨等) ?과예(課藝). ⑧ 병전편(兵典篇):첨정(簽丁) ?연졸(練卒) ?수병(修兵) ?권무(勸武) ?응변(應變) ?어구(禦寇). ⑨ 형전편(刑典篇):청송(聽訟) ?단옥(斷獄) ?신형(愼刑) ?휼수(恤囚) ?금포(禁暴) ?제해(除害). ⑩ 공전편(工典篇):산림(山林) ?천택(川澤) ?선해(繕) ?수성(修城) ?도로(道路) ?장작(匠作). ⑪ 진황편(賑荒篇):비자(備資) ?권분(勸分) ?규모(規模) ?설시(設施) ?보력(補力) ?준사(竣事). ⑫ 해관편(解官篇):체대(遞代) ?귀장(歸裝) ?원류(願留) ?걸유(乞宥) ?은졸(隱卒) ?유애(遺愛)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은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데, 한국의 사회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다산이 죽은 뒤에도 수많은 필사본이 유통될 정도로 널리 읽혀져 왔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O고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 흠흠신서(欽欽新書)
유배생활의 대부분을 경전연구에 쏟았던 다산은 말년에 접어들어 치인서에 눈을 돌린다. 당시 사회 현실이 그를 경전에만 매어놓질 않았던 것이다. "흠흠신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와 함께 다산의 대표적인 저술인 1표2서 가운데 하나다. 형사 사건을 판견할 때에는 "삼가고 조심해서 마땅히 살릴 사람을 죽이거나 죽일 사람을 용서해 살려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법정신을 구현하는 새로운 책"이란 뜻에서 책제목을 흠흠신서라 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흠흠신서는 5편 5백49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1편에는 경전의 교훈과 역사상에 나타난 형사사건 판결사례의 중요한 뜻이 실려있다. 판결보고 선고의 실제 사례를 2편에 기록했다. 3편에는 법을 어긴 사람의 죄에 마땅한 형벌을 판정한 사례를, 4편에는 지방 군현의 사건기록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다산의 반론을 담았다. 다산이 직접 다룬 형사사건을 마지막 5편에 수록했다. 역주 흠흠신서가 출판되어 입법이나 사법에 관련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더 없이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 경세유표(經世遺表)
경세란 국가제도의 골격을 세워 운영함으로서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는 뜻이며 유표는 신하가 죽으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의미이다. 전 48권으로 중국의 국가제도를 기술한 주례(周禮)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쓰여진 것이 특징이다.
필사본. 44권 15책. 규장각도서.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이며, 1표(表) 2서(書)로 대표되는 경세론(經世論)을 펼친 저술 가운데 첫번째 작품으로 일종의 제도개혁안이다. 전남 강진에 유배 중인 1817년(순조 17)에 저술하였으며, 처음에는 48권으로 지었으나 필사하는 과정에서 44권 15책으로 편집되었다.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육전체제(六典體制)로 기술된 《주례(周禮)》와 《경국대전》의 체제를 본받아, 천관이조(天官吏曹) ?지관호조(地官戶曹) ?춘관예조(春官禮曹) ?하관병조(夏官兵曹) ?추관형조(秋官刑曹) ?동관공조(冬官工曹) ?천관수제(天官修制) ?지관수제(地官修制) ?춘관수제(春官修制) ?하관수제(夏官修制) 등으로 서술하였는데, 각각에 정치 ?경제 및 사회 사상이 뒤섞여 있다. 육전체제의 형(刑)과 공(工)에 해당하는 추관수제와 동관수제는 완성되지 못하였다.
국가 통치질서의 근본이념을 세워 오랜 조선을 새롭게 하고자 저술하였다고 저자 자신이 쓴 묘지명(墓誌銘)에서 밝히고 있듯이, 《서경(書經)》과 《주례》의 이념을 표본으로 하되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조정하여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에 목표를 두고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저자는 남인 실학자의 공통적 관심사인 토지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뿐만 아니라, 주로 북학파 실학자가 관심을 가져온 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의 실현 문제도 논의하였다. 특히, 당시 사회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토지문제 및 농업문제에 대해서도, <지관수제>에서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영농(自營農)의 경영을 기본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에 두면서도 당장에 실시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아, 우선 첫 단계로 부분적인 개혁론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의(井田議)를 제시하였다. 즉, 정전제는 토지를 정자(井字)로 구획하여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면적을 계산하여 사전(私田)과 공전(公田)의 비율을 9:1로 하거나 수확량의 9분의 1만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임을 설명하고, 한국에서 정전제를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현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지관수제>에서 부세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하여 농민과 토지에만 국가의 부세가 편중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모든 산업에 과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과거제 개혁안에서는 당시 사회적으로 세력이 커가던 서얼 ?중인 ?부호층(富豪層) 등을 관료기구에 흡수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이 밖에 환곡 ?호적제도 ?지방행정제도 등의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 마과회통(麻科會通)
마진(麻疹)에 관한 의서로 6권 3책으로 우리 나라 마진학의 최고봉이라는 평을 듣는다.
다산은 6남 3녀를 낳았으나 살아남은 자식은 2남 1녀로 6남매를 홍역과 천연두로 잃는다.
질병은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아픔과 손실임을 알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의학서와 민간요법을 집대성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의견을 덧붙인 이 책은 홍역의 증상과 치료법과 함께 유사한 증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고 책 말미에 의령(醫零)이라는 논문을 붙여 홍역이 유행하는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의약서를 저술하였으며 종두법을 처음으로 실시하는 등 우리 나라 의학발전에 기여하였다.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1811년에 전 10권으로 편찬하였으며 단군조선 이래 우리 나라 역대 국가들의 영토와 지리를 고증한 역사지리서 고조선, 부여, 옥저, 예맥, 마한, 진한, 변한, 발해 등 고대 국가들의 밝혀지지 않는 영토 문제를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의 문헌을 바탕으로 정리해놓았다.
이 책은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이중환의 택리지와 같이 우리 나라 역사지리서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아언각비(雅言覺非)
1819년 3권 1책인 필사본으로 백성의 언어, 문자생활을 바로 잡기 위해 당시에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던 말과 글 가운데에서 잘못 쓰이고 잇는 것을 골라 바로 잡은 책. 총 200여 항목에 달하는 우리말의 참뜻과 어원을 밝히고 용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 비어고(備禦考)와 민보의(民堡議)
다산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이 남긴 방대한 저술은 일제 식민강점기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는 문집으로 정리됐다. 전체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다산이 남긴 역사. 국방 관련 저작 가운데 '비어고'(備禦考)와 '민보의'(民堡議)라는 게 있다. 제목 뒤에 붙은 '고(考)' '의(議)'라는 글자는 요즘 말로 옮기면 '고찰'혹은 '연구' 정도의 뜻이 된다. 따라서 글자대로라면 '비어고'는 '방어에 대한 연구', '민보의'는 민보(民堡)에 대한 탐구'의 뜻이 된다. 민보란 전란 때에 방어를 위해 쌓아올리는 일종의 민간 방어시설로 소규모 성곽이다.
이 두 저술은 모두 건국이래 조선 왕조가 겪은 미증유의 양대 전란인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비어고'는 두 전란의 실상을 탐구하고 있고 '민보의'는 이런 전란에 민(民)이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민방위를 구성하고 '민보'라는 성책 시설을 구축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정조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신도시 화성 성곽 축조에도 관여했던 전력으로 미뤄볼 때 '비어고'나 '민의보' 같은 글을 썼다는 점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한데 묘하게도 이 두 저술은 '여유당전서'에서 탈락했다. 아마도 전서 간행시점이 일제 강점기이고 그 내용이 주로 일본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어떤 의도아래 빠졌을 것이다.
4. 기 타
> 다산의 첫 한시(7세 때)
작은 산이 큰산을 가리는 것은 - 小山幣大山
거리가 멀고 가깝기 때문이다 - 園近地不同
> 다산의 3농 정책
원래 "농업이란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和)이라는 3재(三才)가 어울려 상생과 화합의 길을 일궈감에 있어, 세 가지 불리점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이른바 3농(三農)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대저 농사란 장사보다 이익이 적으니 정부가 각종정책을 통하여 '수지맞는 농사(厚農)'가 되도록 해주어야 하며, 둘째는, 원래 공업에 비하여 농사짓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 정부는 경지정리, 관개수리, 기계화를 통하여 농사를 편히 지을 수(便農)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셋째는, 일반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선비보다 낮고 사회적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함에 비추어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上農)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내용
> 다산의 여름나기
1824년 다산은 '더위를 물리치는 여덟 가지 멋진 일(消暑八事)'을 구상하여 일련의 시를 지었다. 그 여덟 가지는 '소나무 밑에서 활쏘기' '홰나무 아래서 그네뛰기' '넓은 정자에서 투호하기' '시원한 대자리 위에서 바둑두기'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동쪽 숲의 매미울음소리 듣기' '비오는 날엔 시짓기' '달밤에는 냇가에서 발담그기'이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시인은 철따라 다른 서정을 묘사한다. 사철 가운데 여름철이 시심과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듯 여름날의 시에는 명작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 가운데 두보(杜甫)의 "띠를 차니 미칠 것 같아 고함이 절로 나건만 / 서류는 어째서 내게만 밀려드나(속대 발광 욕대규 부서하금래상잉 : 束帶發狂欲大叫 簿書何急來相仍.)"라는 구절은 혹서(酷暑)에 근무하는 괴로움을 실감나게 전한다.
반면 이백(李白)의 "여름날 산속에서 / 천천히 백우선 부치면서 / 녹음 짙은 숲 속에서 벗고 있노라 / 두건 벗어 바위에 걸어놓으니 / 이마는 솔바람에 시원하구나(하일산중 난요백우선 나체청림중 탈건괘석벽 노정쇄송풍 : 夏日山中 懶搖白羽扇 裸袒靑林中 脫巾掛石壁 露頂灑松風)"라고 하여 숲속에서 피서하는 여유가 느껴진다.
정다산은 "지리한 긴긴 여름 무더위에 헐떡일 때 / 후즐근한 삼베 적삼 등에는 땀이 흐른다 / 시원한 바람 불고 소나기가 내린 뒤에 / 어느새 골짜기에 폭포가 걸려있으니 / 이 아니 상쾌한가!(지이장하인주염 ??초삼배한점 낙풍래산우급 일시암학괘렴 불역쾌재 : 支離長夏困朱炎 ?? 蕉衫背汗霑 落風來山雨急 一時巖壑掛氷簾 不亦快哉)" 이라 했다. 서로 다른 여름나기지만 모두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여름철 풍경이다. 조선의 시인 가운데 여름철의 경물과 서정을 잘 읊은 이로는 다산이 으뜸 아닐까.
> 삼정의 문란과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고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의 시
시냇가 헌 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가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 덮어 부엌은 차디차고
뚫어진 벽 틈으로 별빛만 스며드네
집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한없어
모두 팔아도 일곱 여덟 푼이 안 되겠네
- 중략 -
여름에는 솜 누더기, 겨울에는 삼베 적삼
땅이나 녹아야 냉이를 캐지
아아, 이런 집 천지에 즐비하나
구중 궁궐 깊고 멀어 어찌 다 살펴보랴
>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을 하며 지은 시 - 1795년 7월
** 동작나루를 건너며 **
해저무는 동작나루 물결만 출렁이네
멀어지는 저 남산은 그리운 옛동산
드리운 수양버들 비에 더욱 희고
연기 솟는 성안은 황혼에 젖어 있네
궁궐에서 다시 부르실 기다리는 것만 상책이 아니로다
성은으로 이 몸을 나루터에 보내졌노라
서학은 들었지만 참뜻을 모르는데
이 길은 머나먼 귀양길인가 하네
> 정조 승하하고 순조 등극하며 천주교 탄압
순조의 나이 겨우 11세 이를 핑계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실권을 장악하여
벽파사람들의 편을 들어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물론 서학을 하는 선비들까지 모두 잡아들임.1801년 2월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죽고 정약종과 이승훈은 서소문 밖에서 목을 베어 죽임. 정약용은 천주교를 두둔했다는 죄명으로 스무날 가까이 옥에 있다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고 둘째형 약전은 전라도의 신지도로 유배됨.
** 사평촌에서 처자와 헤어지면서 **
산바람 불어와 가랑비 뿌리는데
서로가 이별이 서러워 머뭇거리네
주저하고 머뭇거린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끝내는 이 이별 막을 수 없는 것을
옷자락 뿌리치고 길을 떠나
들판을 넘고 냇물을 건너 멀어져 가네
얼굴빛이야 꿋꿋하고 장엄하나
마음은 처자식과 어찌 다르랴
하늘을 우러러 날아가는 새를 보니
쌍쌍이 오르락내리락 짝을 지어 춤을 추네
어미 소도 울면서 송아지 돌아보고
어미 닭도 구구구 울며 병아리를 부르네
> 남도 천리 강진의 유배
중국인 주문모신부는 자수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다산의 맏형의 사위인 황사영이 숨어 지내다가 중국에 알리는 백서를 써 보내려다 발각되어 많은 사람이 죽고 또 다산은 사형을 당할 뻔 했는데 정일환의 변호로 다행히 강진으로 유배됨
** 강진읍 주막 **
북풍이 눈 날리듯 휘몰아치는데
남녘 땅 강진의 주막에 이르렀네
작은 산이 바다를 가려서 고맙고
빽빽한 대나무는 꽃처럼 아름답네
날씨 따뜻하여 겨울은 없는 듯하고
근심 많으니 밥술 더 마시네
설전에 동백꽃 붉게 피어
나그네 수심을 풀어주네
하늘을 우러러 날아가는 새를 보니
쌍쌍이 오르락내리락 짝을 지어 춤을 추네
어미 소도 울면서 송아지 돌아보고
어미닭도 구구구 울며 병아리를 부르네
> 혜장선사와의 만남
이름은 혜장(惠藏), 호는 연파(蓮波).별호는 아암(兒菴), 자는 무진(무진)이라 함. 해남 27세에 병불(秉拂)이 되자 제자가 1백 수십명에 이르렀고, 30세에는 대둔사의 대회를 주재 1805년 가을에 만덕사에 머물다가 10년 위인 다산을 만나 주역에 대한 설명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부질없이(無端히)’라는 말을 쓰며 술병으로 배가 불러다 40세에 일찍 죽음. 이에 다산은 아암(兒菴)은 내가 죽였다며 시를 지어 그 슬픔을 삭임
** 만시(輓詩) **
이름은 중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르렀네
‘논어’책 자주 읽었고 서 고맙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찢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 아암의 시 **
백 수 공부로 누가 득력했나
연화세계는 이름만 들었네
외로운 읊조림 매양 근심 속에서 나오고
맑은 눈물 으레 취한 뒤에 흐르네
> 초의선사와의 만남
知己인 아암의 죽음은 다산에게 큰 슬픔을 주어 혜장선사의 제자인 초의에게 정을 쏟았다. 초의는 총명하고 온유하고 침착하였다. 그의 스승 아암이 다산에게서 역리를 배워 우주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혼돈을 일으키고, 인생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초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역리를 통하여 정명을 밝히는 가 하면, 불법을 기초로 해서 인생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 비에 같혀 다산초당에 가지 못함
내가 자하동을 좋아하는 것은
거기 화초와 함께 어르신(다산)이 계신 때문인데
마침 장마철이 되어서 가지 못하도다
행장을 꾸려 놓은 지 스무 날이 지났고
어르신께서 간곡히 불러 주셨는데
이 지경이니 뭐라 변명할 것인가
한밤에 별과 달이 사뭇 빛나고
머물던 먹구름이 새벽 되자 흩어지네
너무나 기뻐 지팡이 짚고 일어나 보니
물색들 정녕 신선하구나
장삼자락 걷어잡고 시냇물 건너고
머리 숙여 대나무 숲도 뚫고 지났다
가까스로 만폭교에 다다르니
하늘색 갑자기 찌푸려지는데
골짜기 바람에 나무는 휘청이고
그 기운 벼랑 깊이까지 미치는구나
바람 불고 물방울 수면을 튀어 솟구친다
그만 중도에서 돌아오고 말았으니
서글픈 심사 토로하기 어렵구나
열흘이 지나도록 이 지경이니
슬프다 칠 척의 이 한 몸뚱이여
가벼이 날고자 해도 방법이 없네
> 부채시
같은 무렵에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관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수원성을 쌓을 때 함께 참여하였던 김이교가 전라도 암행감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산을 찾았을 때 그의 부채에다가 지어준 시. 김이교는 순조에게 보이고 해배를 탄원하고 부채시에 써준 시를 읽은 대신들도 선처를 호소. 1818년, 순조 18년 8월 그믐날 다산의 나이 56세 때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 부채시 **
역마을 적시는 가을비
사람 보내기를 더디게 하네
이 두메산골에 자네 떠나면
뉘 다시 나를 찾겠는가
반열에 다시 오르리
어찌 감히 바랄 수 있으리
오얏꽃 언덕 한강 물에
돌아갈 길 기약이 없네
여유당에서 글쓰던 날 잊지마소
요 몇 해 동안에 떨어진 칼 그 설움 말문이 막히네
푸른 두 대숲 두어 개 새어든 달 아래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만 짓네
> 삼국시대부터 구한말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열 사람 학계에서 선정
불교쪽에선 원효. 의천. 지눌, 주자학에선 이황. 조식. 율곡 , 양명학자로는 정제두, 실학자인 정약용. 최한기, 그리고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가 포함됐다.
각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선정 작업을 한 예문동양사상연구원(원장 김충렬 고려대 명예교수 )은 '한국의 사상가 10인'시리즈를 연말까지 펴내기로 하고 1차분으로 불교계 3인에 대한 해설서를 먼저 출간했다. 10인의 사상가 중 눈에 띄는 인물은 정제두. 최한기. 최제우다. 다른 7인에 비해 비교적 낯선 이들 3인은 1980년대 이후에 와서야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으며 최근 박사학위 논문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번 선정작업의 실무를 총괄한 홍원식(계명대 철학과)교수는 "외래 사상을 추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독창적 사상체계를 형성한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10인에 아깝게 포함되지 못한 인물로는 실학자 이익과 의병활동으로 유명한 이항로라고 한다.
# 출생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있는 마현 마을은 일명 정다산 마을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 정다산 마을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조선말 실학자인 다신 정약용 선생이 이곳 마현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팔당댐에서 양수리 방향으로 손바닥을 편 듯 떠있는 마치 섬 같은 강변마을인 이곳은 밤나무 숲과 넓은 운동장이 있는가 하면 무엇보다 강변을 따라 걷는 자갈길의 운치가 뛰어나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 단위의 나들이에도 좋다.
▶ 찾아가는 법
교통편 - 비둘기호 : 청량리역 승차 능내 역 하차, 하루에 2회 운행
버 스 : 청량리 승차 마현 마을 입구에서 하차
자 가 용 : 경강국도인 6번 국도를 타고 서울에서 양평방향으로 달리다 내리막길에서 철길 밑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정약용 묘'라는 이정표를 보고 따라 가면 된다.
# 유배지 :
& 위치 -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다산초당은 조산 말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귀양생활을 했는데, 강진읍 동문밖에서 8년간 머물다 이곳 만덕리 귤동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500 여권에 달하는 정약용 선생의 저서가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당시 다산이 기거했던 집은 오랜 세월에 낡고 쓰러져 1958년 5칸 도리 단층 기와집으로 중건 한 후 선생이 우거하셨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인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이 남긴 유적으로는 초당 앞마당에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다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약천, 초당으로 이주 후 바닷가의 돌을 모아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새긴 정석바위가 있다. 이 네 가지를 다산 4경이라 부른다.
# 다산 초당
신유사옥(1801년)의 여파로 머나먼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가 살았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지식 발전소로서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을 살았다. 목숨만 부지한 채 이 곳에 쫓겨와서는 8년간을 동문 밖 주막에서 지냈다. 그의 곤궁한 모습을 보다 못한 해남 윤씨 일가가 산기슭에 작은 집을 지어준 후에야 다산은 객방 신세를 면했다. 다산은 이 초당에 들어 "이제야 생각할 겨를을 얻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산초당(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은 만덕산 기슭에 앉아 호수같은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구에서 초당에 오르는 200여m의 길은 대나무, 향나무, 동백나무의 터널이다. 물들지 않는 상록수여서 숲에 들면 계절을 혼동하기 쉽다. 초당은 모두 3동의 건물과 1개의 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정약용의 거처였고, 양쪽의 동암과 서암은 그의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를 했던 곳이다. 본채에서 왼편 언덕으로 20m를 오르면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에서의 조망이 장관이다. 발아래 잔잔한 강진만에는 작은 섬 죽도가 드리워져 있고 멀리 부용산과 천태산의 돌봉우리가 구름에 가릴 듯 말 듯 눈에 들어온다.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간 형 약전과 고향 땅을 그리워했던 곳이다.
초당은 이 땅의 차문화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웃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사상을 교유하면서 차에 심취했다. 중국에서 들여 온 차가 아닌 우리 차에 매력을 느꼈고 국산차를 예찬하는 '동다기(東茶記)'를 쓰기도 했다. "…나무도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애오라지 차 얻고자 할 뿐이요. …목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선물을 아끼지 말기를…" 차를 구걸하는 내용의 '걸명소(乞茗疏)'는 차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다산은 찻물을 얻기 위해 초당 오른편에 약천이라는 샘을 직접 팠고, 그 물을 끓이기 위해 솔방울을 지필 수 있는 넓적한 돌(다조)을 앞마당으로 옮겨놓았다. 약천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고, 다조에는 불을 놓았던 흔적이 역력하다.
다산은 1818년 57세의 나이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갔다. 그는 귀향해서 18년을 더 살다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의 18년간 그는 또 하나의 고향인 강진을 항상 그리워했다고 한다.
▶ 다산초당 가는 길
강진 버스터미널에서 해남 방면 18번 국도를 약2㎞ 달리다가 추도 3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시멘트로 포장한 완도 방면 군도 2호선을 타고 7㎞를 가면 초당입구에 닿는다.
버스는 강진 터미널에서 귤동행 시내버스가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7시20분까지 9차례 운행한다. 초당 인근에는 민박을 제외하고는 숙박시설이 없다. 만덕슈퍼(061-432-5460), 만덕상회(061-432-0459), 다산슈퍼(061-432-0098)등에서 민박을 친다.
강진에는 다산초당 외에도 영랑 김윤식 생가, 청자도요지, 까막섬(천연기념물 제 172호)등 둘러볼 명소가 많다.
# 약력 :
& 1762년 1세 : 6월 16일 사시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나주 정씨 재원, 어머니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의 후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초자는 귀농, 관명은 약용, 자는 미용. 송포, 호는 삼미.다산.사암.자하 도인.태수.문암일인 등 당호는 여유당, 천주교명은 요안. 이 해에 사도세자의 변으로 아버지 진주공이 시골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는데, 그때 마침 아들이 태어나니 귀농 이라 지음
& 1765년 4세 :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함
& 1770년 9세 : 11월 9일 어머니 윤씨를 사별함
& 1776년 15세 : 2월 22일 부승지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결혼함.
아버지가 다시 복직되어 서울로 이사함
& 1783년 22세 : 2월 세자 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증광감시의 경의 초시에 합격,
4월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함. 선정전에 들어 최초로 성군 정조와 만남.
회현벙에 이사하여 재산루에 거처함.9월 장남 학연 태어남
& 1789년 28세 : 5월에 부사정, 6월에 가주서에 제수됨,
겨울에 주교를 설치하는 공사에 규제를 만들어 공을 이룸
& 1790년 29세 : 2월에 예문관 검열이 됨. 3월 8일에 서산군 해미현에 정배되어,
13일에 배소에 이르고 19일에 귀양이 풀림. 9월에 정언 잡과감대에 나아갔고,
이어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어 무과감대에 나아감
& 1791년 30세 : 5월에 사간원 정언, 10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됨.
겨울에 <시경의> 8백여 조를 바쳐 임금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음
& 1792년 31세 : 3월에 홍문관록에 뽑혔으며, 이어 홍문관 수찬이 됨.
4월 9일 진주 임소에서 아버지 진주공의 상을 당함.
겨울에 명을 받들어 <수원성제>를 지어 올림.
& 1794년 33세 : 3년상을 마침. 7월 성균관 직강, 10월에 홍문관 교리, 수찬을 거쳐
10월 29일 경기 암행어사의 명을 받들고 11월 15일 복명함.
12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됨
& 1795년 34세 : 1월에 동부승지 , 2월에 병조참의, 3월에 우부승지를 제수 받음.
주문모 사건에 둘째형 약전의 연좌로 7월 26일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외보됨.
이때 성호유고 정리함. 12월에 용양위 부사직 으로 옮겨짐
& 1796년 35세 : 10월에 규영부 교서가 되고, 12월에 병조참지, 다시 우부승지,
좌부승지에 올랐다가 부호군으로 옮겨짐
& 1797년 36세 : 윤 6월에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나가서 치적을 올림.
겨울에 마과회통 12권이 완성됨
& 1799년 38세 : 2월 황주 영위사로 임명하는 교지를 받고,4월에 내직으로 옮겨져
병조참지, 5월에 동부승지, 부호군. 서울에 돌아와 형조참의를 제수 받음.
6월에 반대파의 무고에 대해 <자명소>를 올리고 사직하려 함
& 1881년 40세 : 2월 9일, 정원의 논계로 옥에 갇힘. 3월에 경상도 장기에 유배됨.
이때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에 유배, 셋째형 약종은 옥사함. 10월 황사영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전라도 강진현으로 귀양감
& 1804년 43세 : 봄에 2천자로 된 <아학편훈의>가 이룩됨
& 1811년 50세 : 봄에 <<아방강역고>>10권을 저술함
& 1818년 57세 : 봄에 <<목민심서>>48권이 완성됨. 8월에 귀양이 풀려서
다산을 떠나, 9월 14일에 마재 고향집에 돌아옴
& 1819년 58세 : 여름에 <<흠흠신서>>30권을, 겨울에는 <<아언각비>>3권을 저술함.
& 1836년 75세 : 2월 22일 진시초에 마재 자택 정침에서 조용히 서거함.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곧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자좌지원에 안장됨
& 1883년 : <<여유당전서>>가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됨
& 1910년 : 7월 18일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도공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