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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영축산)기[文殊山(靈鷲山)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내용을 중심으로-
문수산(文殊山)은 600m의 아담한 산이다. 동쪽방향에는 약340m의 영축산(靈鷲山) 봉우리가 있고, 남쪽방향에는 543m의 남암산(南巖山)을 좌우 날개처럼 연봉을 펼치고 있는 이 산의 신라 때 본디 이름은 영축산(靈鷲山)1)이였다. 영축산이 문수산으로 그 이름이 바뀐 시기는 신라 38대 원성왕 때 연회국사가 ‘통천문(문수점)’에서 문수보살을 감접한 그 후 부터로 보인다. 영축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신 영산회상(靈山會上)2)의 법지(法地)로서 대승불교 최고의 명승지이다.
문수산의 위치는 동경(東經) 129도10분과15분 사이, 북위(北緯) 35도30분과35분 사이의 좌표에 있고, 소재는 울주군(蔚州郡) 청량면(靑良面) 율리(栗里)에 속하는데, 동쪽은 울산시 무거동, 서쪽은 울주군 삼동면, 남쪽은 울주군 웅촌면, 북쪽은 울주군 범서면과 언양면에 접한다. 또한 태화강(太和江)이 문수산의 북쪽을 돌아 울산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가는데, 이 물은 가지산(迦智山)에서 발원한 물이다.
문헌에 나오는 울산(蔚山)의 첫 이름은 굴아화촌(屈阿火村)이다. 신라 파사왕(婆裟王:78~111)이 하곡현(河曲縣)으로 개명하고, 경덕왕(景德王:741~764)때 아곡현(阿曲縣)으로 바꾸어 굴불역(屈弗驛)3)을 두었으니 그 지명이 굴화리(屈火里)로 바뀌어 지금도 남아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4) 제3권 제3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厭髑滅身)에서 “신라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513~539) 즉위14년(527년)에 염촉(厭髑) 이차돈(異次頓)5)이 불법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했으니, 그 연대는 중국 양(梁)나라 무제(武帝) 26년으로써 서축(西竺;印度)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 금릉(金陵;南京)으로 온 그 해, 낭지사(朗智師)6) 또한 영축산에 들어와 살면서 처음으로 법의 도량(道場)을 연 것을 보면, 대교(佛敎)의 흥하고 쇠하는 것이 반드시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같은 시기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이 일로 보아 알 수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7) 제4권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에서 “법흥왕15년(528년)에 불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라고 기록했는데, 신라불교가 이때에 비로소 나라에서 공포하고 밀파(密播)에서 포교(布敎)로 널리 일반서민들에게 까지 퍼지고 마침내 국교(國敎)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제5권 제8 피은(避隱) 낭지승운 보현수(朗智乘雲 普賢樹)에서 “지통(智通)8)이 7세 때 출가하여 낭지사(朗智師)에게 ‘영축사에 머문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물었더니, ‘법흥왕14년 정미년(527년)에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얼마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지통소년이 영축산에 입산할 때가 문무왕(文武王) 즉위년 신유년(661년)이니 계산해 보니 그 때 이미 135년이 되었던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비추어 보면, 신라의 초기불교가 경북 일선(一善;善山)의 금오산(金烏山)을 중심으로 뿌리내려 울산의 영축산까지 전파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 영축산은 인도의 영축산과 함께 불교의 제십법운지(第十法雲地)9)로서 이 산의 산주(山主)는 변재천녀(辯才天女)10)이고, 이 산에는 보현보살(普賢菩薩)11)과 문수보살(文殊菩薩)12)이 살고 있는 신라불교의 성지(聖地)였으며, 낭지사(朗智師)가 불법을 연 뒤 당대의 유명한 고승인 자장(慈藏)13), 의상(義湘)14), 원효(元曉)15), 지통(智通), 연회(緣會)16) 등이 수도한 곳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서 “삽량주(歃良州) 아곡현(阿曲縣)에 있는 영축산에 한 승려가 살고 있었다. 바위굴에 살기 수십 년이 되었어도 고을에서는 모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또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고 있어서 신통력이 있었다. 당나라 고종 12년, 신라 문무왕 즉위년(서기661)에 지통이란 중이 있었는데, 본시 이량공 집의 종 이었다. 일곱 살에 출가 했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며 말하기를 ‘영축산에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어라’ 지통이 그 말을 듣고 이 산을 찾아가다가 동구 앞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보현보살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 하며 계(戒)를 베풀고 사라져 버렸다. 계를 받은 지통은 일각에 마음이 활달해지고 지혜로워져 진리를 달관하게 되었다. 다시 길을 가다 도중에 한 스님을 만나 ‘낭지스님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라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어째서 낭지를 묻느냐?’ 지통은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말했다. 스님은 웃으면서 ‘내가 낭지니라.’ ‘나도 까마귀가 와서 신성한 아이가 스님을 찾아올 것이니 나가 영접하도록 하시오. 알려 주기에 지금 맞으려 나온 것이다.’ 하며 손을 잡고 감탄했다. ‘신령한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나오게 하고, 나에게 알려 너를 맞게 하니 이 무슨 상서로운 일인가! 아마 이 산의 산령(山靈)의 은밀한 도움인 듯하다. 이 산의 산주는 변제천녀라고 한단다.’ 지통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고 낭지사에게 입문하고 예를 올렸다. 이윽고 낭지가 계를 주려하자 지통은 ‘골짜기 동구 앞 나무 밑에서 이미 보현보살에게 정계를 받았나이다.’ 하니, 낭지사는 탄복하며 ‘훌륭하구나! 너는 이미 친히 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17)를 받았구나! 내가 이곳으로 온 후 조석으로 마음 닦기에 게으르지 않고 은근히 지성님 만나길 염원해 왔으나 지성님의 감동을 얻지 못했는데, 너는 출가하자 이미 직접 계(戒)를 받았으니 나보다 더 훌륭하구나!!’ 낭지사는 지통소년에게 도리어 예를 했다. 지통이 보현보살에게서 계를 받았던 나무를 보현수(普賢樹)18)라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통소년이 출가하기 전 종으로 살던 이량공 집이 있던 곳은 지금 알 수 없지만, 영축산 남쪽 아랫마을인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는 지통골(智通谷)과 보현수(普賢樹)가 지금도 남아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 마을에 지통대사가 쉬어 갔기 때문에 지통골로 불리어 졌다.” 라고 했다. 또한 지통골에서 영축산(문수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영축마을입구 동나무(당산나무)에 대한 유래를 마을 노인들에게 들어보니 “신라 때, 고승 지통대사가 아랫마을 지통골에서 묵은 후 영축산으로 올라가다가 이 나무아래에서 쉬면서 지금의 문수암 절터를 가리키며 저곳에 절을 지으면 길(吉) 하겠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삼국유사》의 지통의 출가 내력과 거의 비슷하니 ‘지통골’은 지통대사의 생가마을로 추정되고, 영축마을 동나무 역시 ‘보현수’로 추정된다.
지통골은 옛날 조선후기까지 역(驛)이 있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몇 집 밖에 없는 퇴락한 마을이다. 보현수로 추정되는 영축마을 당산나무는 지금 푸조나무(포구나무) 4그루, 소나무(해송) 1그루로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옛날에는 아주 큰 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축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이 나무를 신성시하고 정월 열나흘날 저녁에 동민모두가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
계속하여《삼국유사》는 “낭지율사는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五臺山)에 가서 그곳의 승려와 함께 설법을 듣고는 잠깐사이에 돌아오곤 했다. 그 곳의 승려들은 낭지가 이웃 어느 절의 스님이려니 생각했을 뿐 그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청량산의 주승이 대중에게 명하기를 ‘이 절에 상주하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스님들은 각각자기가 거주하는 곳의 이름난 꽃이나 진기한 나무를 가져와서 도량에 바치라고 했다.’ 낭지는 이튼 날 해동(海東;신라) 영축산에서 자라는 진기한 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 바쳤다. 낭지가 꺾어 바친 나무를 주승이 보고 ‘이 나무의 범명(梵名)은 달제가(怛提伽)19)라고 부르는데, 이 곳 말로 번역하면 혁(赫)이란 뜻이다. 이 나무는 서축(인도)과 해동(신라)의 두 영축산에 만 있는 나무인데, 이 두 산은 모두 제십법운지(第十法雲地)로서 보살(菩薩)이 사는 곳이니 이 나무를 바친 분은 필시 성자(聖者)이겠구나!’ 낭지의 행색을 살펴보고 그가 해동(신라)의 영축산에서 온 것을 알고는 그 곳의 스님들이 낭지를 존경하여 명성이 안팎에 드러났다. 그 후 본국 신라에서는 낭지사가 기거하는 암자를 혁목암(赫木庵)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혁목사지(영축사지) 북쪽 멧 뿌리에 옛 절터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낭지사가 머물렀던 혁목암의 유허다. 영축사기에 의하면 낭지가 일찍이 그 암자 터는 바로 가섭불(迦葉佛) 당시의 절터라고 하여 등항(燈缸)두개를 그 곳에서 발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낭지가 중국 청량산 주승에게 바친 혁목(赫木)이라는 진귀한 나무가 무엇일까? 이 나무는 인도(西竺)와 신라(海東)에만 있다는 나무라고 했는데, 이 나무는 석류화(石榴花)로 보고 있다. 석류나무는 꽃도 붉고 열매도 붉고 나무 속살도 불어 관연 혁목(赫木)이라 할 만하다.
조선조 세종(世宗;1418~1450)때의 명신 강희안(姜希顔)이 쓴《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격물총화(格物叢話)》에 이르되 류화(榴花)가 본디 안석국(安石國)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안석류(安石榴)라 하고, 또 해동 신라국에서 온 것을 해류(海榴)라고 한다.” 중국의《격물총화》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면 중국에서는 석류화가 안석국(인도)과 해동(신라)에서 수입되어 길러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류화의 원산지가 인도로 명기되어 있는데, 중국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신라로 유입되어 있었을까? 인도와 고대 한반도와의 해상교류 흔적은 가야국 김수로왕의《허황후설화》에서 차(茶)나무의 김해 전래와 같이 석류나무의 울주 전래도 연구해 볼 만 하다.
낭지사가 중국 청량산에 가지고 간 혁목이 석류화라면 인도와 신라 두 영축산 일대가 당대의 석류화 산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옛 부터 울산지역에 고목 석류나무가 많았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시《삼국유사》에서 “화엄경 제십법운지를 살펴보아 낭지사가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불타가 삼지(三指)를 굽히고 원효가 백신(白身)으로 나눈 것과 같은 류(類)라고 하겠다. 낭지는 신통력을 가졌고 당대의 대성인 지통과 원효에게 사사한 분으로 도의 경지가 높고 고매한 분이었음을 짐작할 만 하다.
원효가 영축산 서쪽 골짜기 반고사(磻高寺)20)에 있을 때, 낭지사는 원효로 하여금《초장관문(初章觀文)》과《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짖게 하였다. 원효가 찬술을 마치고 문선(文善)이라는 은사(隱士)를 시켜 낭지사에게 받들어 책을 보내면서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계송(戒頌)》을 지어 바쳤다.
서곡(西谷)의 사미(沙彌)는
머리를 조아려 예로서 바치옵나니
동악(東岳)의 상덕고암전(上德高巖前)21)에
미세한 먼지를 불어 영축산에 보태고
작은 물방울을 날려 용연(龍淵)에 던지는 것 같을 뿐입니다.”
원효가 낭지사의 명에 의해 책 2권을 찬술한 곳이 영축산 서쪽 골짝 반고사라고 하나 지금까지 반고사 절터로 알려진 지명이 없다. 여러 번 답사한 결과 확실한 자료가 출토되진 않았지만 현제 문수암(문수사) 서남쪽 골짝이, 옛 영축사(혁목사) 절터에서 서쪽 골짝이 “베이내” 라는 곳에 신라 때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된 큰 절터를 발견했다. 지형이나 방향등으로 볼 때 이곳이 원효가 기거하던 반고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계송(戒頌)》에서 나오는 “서곡(반고사)에 기거하는 사미(원효)가 머리 숙여 예를 올리나니, 동악(혁목사)에 계시는 상덕고암전(上德高巖前)에....” 낭지사가 혁목사의 가섭불 옛 절터의 높은 바위대 면좌석(宴坐石)에서 선정에 들고《법화경》을 강론했음으로 면좌석에 앉은 낭지사를 일컬어 상덕고암전(上德高巖前)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낭지사의 면좌석 유허가 지금도 윗 영축마을 민가 속에 신령한 모습으로 수려하게 남아있다. 또한 원효가 “작은 물방울을 날려 용연(龍淵)에 던지는 것 같을 뿐....” 이라고 말한 용연(龍淵)도 태화강의 황룡연(皇龍淵)을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가지산(加智山)에서 발원한 태화강(太和江)은 문수산 북동쪽을 돌아 흘러 황룡연에서 소(沼)를 이루는데, 그 곳에 태화사(太和寺)가 이었다.
《삼국유사》제3권 제4 탑상(塔像)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에서 “자장(慈藏)이 중국 청량산(오대산)에 갔을 때 문수보살을 만나 계시를 받고 태화지(太和池)에서 용을 만나 불사리(佛舍利), 불가사(佛袈裟), 불경(佛經)등 3가지 보물을 얻어 용의 아들 황룡(皇龍)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울산 태화강 사포(絲浦)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서기643년 신라로 돌아온 자장은 불교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었고, 서기645년 경주에 황용사탑(皇龍寺塔)을 건립하고, 서기646년에 양산에 통도사(通度寺)와 울산 태화강 황룡연에 태화사를 건립하여 불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한몫은 황룡사탑에, 한몫은 태화사탑에, 한몫은 불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모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는 신라 선덕여왕 때 고승으로 이름은 김선종(金善宗)이며 진골(眞骨) 출신인 소판(蘇判) 김무림(金茂林)의 아들이다. 부모를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당나라로 갔다. 당에서 돌아온 자장은 남산종(南山宗)의 시조(開祖)가 되었고, 전국 각처에 10여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저서에는《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십송율목차기(十誦律目次記)》등이 있다. 자장이 귀국하여 경주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구황동 황룡사지 木塔)은 서기643년(선덕여왕 12년) 왕에게 요청하여 건조되었다고 하는데, 황룡사구층탑지 심초석(心礎石)안에서 도굴된《신라황룡사찰주본기(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서는 서기645년(선덕여왕 14) 처음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 완공했다고 한다. 탑의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서기698년(효소왕 7년)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서기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려 그 후로는 중수되지 못하였다.
또한 자장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 금강보계(金剛寶戒)로 일컫는 정골(頂骨) 불사리와 불가사를 설해 놓고, 수계의식(授戒儀式)등을 행하였다고 한다. 정골 불사리를 안치함은 부처님의 현신(現身)을 믿는 데서 온 것이다.
울산 태화강 황룡연 위(지금의 울산 태화동 반탕골 산기슭)에 건축한 태화사에 따른 설화에 따르면, 자장이 중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태화지(太和池)를 지나가다가 한 신인(神人;龍)을 만났는데, 그가 삼보(三寶; 佛舍利, 佛袈裟, 佛經)를 주며 국가를 위해 탑을 세우고, 남쪽에 절을 지으면 덕을 갚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자장은 용(神人)의 아들 황룡(皇龍)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울산 사포나루까지 도착했다. 그 때 황용은 돌아가지 않고 태화강의 가장 큰 소(沼)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곳을 지금도 황룡연(皇龍淵)이라 부르고 있다. 황룡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귀국한 자장은 황룡연 위에 태화탑를 세워 불사리를 봉안하고 태화사를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로 미루어 당시 신라불교는 영축산의 여러 절과 태화강 황룡연 태화사 태화탑 등 울산지역이 보현, 문수 두 보살(菩薩)이 사는 제십법운지(第十法雲地)가 된 것이다.
고려 충숙왕(제위1313∼1339)때 울주에 살던 정포(鄭誧;1309~1345)가 지은《태화루(太和樓)》라는 시에서 태화사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 정조 23년(1799년)에 편찬된《범우고(梵宇攷)》에는 태화사가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화사가 태화강가에 자리 잡고 있어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빈번한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로 1962년 울산시 태화동 반탕골 태화사지에서 발굴된 9세기의 “태화사지십이지상부도”가 전해지는데, 현재 보물 제4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부도는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석종형 부도로, 특히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다시《삼국유사》로 돌아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784~798)때 “고승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축산에 은거하여 항상 법화경을 읽으며 보현관행(普賢觀行)을 닦고 있었다. 뜰에 있는 연못에는 연꽃 두어 송이가 피어 사철 시들지 않았다. 나라의 왕이 그 상스러운 사연을 신기하게 듣고서 연회를 국사(國師)로 받들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연회는 암자를 버리고 둔적(遁蹟)의 길을 떠났다. 서쪽 고개바위 사이를 넘어가는데 한 늙은이가 밭을 갈다가 연회에게 ‘어디로 가느냐?’ 고 물었다. ‘나라에서 소문을 잘못 듣고 나에게 벼슬을 내려 얽매려 하기에 피해 가는 길이오.’ 늙은이가 듣고서 말하기를 ‘이 땅에서는 법사가 지닌 가치를 팔(賣)만도 한데, 무얼 그리 수고스럽게 멀리 가면서까지 팔(賣)려고 하오. 법사야 말로 이름팔아먹는(賣名) 것을 진정 싫어하는 것이 아니로군!’ 연회는 그 늙은이가 자기를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늙은이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계속 길을 갔다. 두어 마장을 더 가서 물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그 노파 역시 연회에게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오?’ 물었다. 연회는 앞의 늙은이에게 한 답변 그대로 했다. 노파는 앞에서 왠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연회는 한 늙은이가 나에게 심한 모욕을 주기에 불쾌해서 그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 노파는 연회에게 알려 주기를 ‘그 분은 바로 문수대성(文殊大聖)인데 왜? 그 분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았소?’ 이 말을 듣고 연회는 놀랍고 송구스러워 그 늙은이가 있는 곳으로 급히 되돌아 와서 머리를 조아려 뉘우침으로 사죄했다. ‘성자(聖子)의 말씀을 감히 어찌 듣지 않겠나이까! 이제 되돌아 왔나이다. 그런데 시냇가의 그 노파는 어떤 분이오이까?’ ‘그분은 변재천녀(辯才天女)지!’ 말을 마치자 늙은이는 사라져 버렸다. 연회는 마침내 자신의 암자로 돌아와 기다리다가 왕의 사신(王使)이 부르는 조명(詔命)을 받게 되니, 연회는 자기의 업연(業緣)이 이미 국사(國師)의 작위를 받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 조명에 응하여 서라벌 대궐로 갔다. 그 후 연회는 국사로 봉해졌다. 연회가 문수보살을 감접한 곳을 ‘문수점(文殊岾)’22)이라 이름하고, 노파를 만나 되돌아온 곳을 ‘아니점(阿尼岾)’22)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제5권 제8 피은(避隱) 연회도명 문수점(緣會逃名 文殊岾)의 기록이다.
연회가 왕의 부름을 피하려고 영축사 서쪽고개 바위사이를 넘어 도망가다 밭을 갈고 있는 늙은이 ‘문수보살’을 만난 곳을 ‘문수점’이라 이름 하였고, 냇가에서 변재천년를 만나 다시 돌아온 곳을 ‘아니점’이라 이름 하였다. 이곳들이 과연 어디일까? 이들 지명을 찾기 위하여《삼국유사》기록 내용의 지형을 살펴 여러 번 답사한 결과 ‘영축사 서쪽 고개 바위사이’ ‘문수점’은 지금의 통천문(洞天門)으로 추정되고, ‘아니점’은 샘물이 흐르는 지금의 ‘베이내’로 추정되는데, ‘아니점’은 냇가(溪邊)이므로 ‘아니천(阿尼川)’으로 불리다가 ‘아니내’로 다시 ‘베이내’로 변화된 듯하다. 또한 ‘베이내’에 있는 신라 절터는 원효가《초장관문》을 지어 상덕고암전(낭지사)에 바친 반고사지로 추정되고 있다.
연희가 영취사 용장전(龍藏殿)에 은거할 때, 영축산 주봉가까이 소재한 문수점(지금의 통천문)에서 문수보살을 감접한 후부터 영축산의 주봉의 명칭을 문수산으로 바꿔 불렀고, 주봉 옆 다음 산봉우리, 지금의 영축마을 뒷 산봉우리를 영축산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축산이 문수산으로 바뀐 시기는 신라 원성왕대(784년)로 추정되고, 낭지사가 영축산으로 왔다는 법흥왕대(651년)이나, 원효가 반고사에서 지은 책을《계송》과 함께 상덕고암 낭지사에게 바칠 때에는 지금의 문수산이 영축산으로 불리고 있었을 때였다.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一然)은 주(註)에서 “지금의 영축사 용장전이 연회의 구거(舊居)이다.” 이 내용을 보면,《삼국유사》를 쓴 1281년 고려시대 까지 영축사(혁목사)가 존재했던 것이다. 지금 폐허가 된 영축사지에는 도괴된 돌탑 두기와 비석기단 돌거북 한기가 농군의 괭이에 찍혀 멸실되어 가고 있는데, 혹 땅 속 어디에 묻혀있을 돌비석에 연회국사가 쓴 낭지사의 전기가 새겨져 있지나 아닐까? 도괴된 비석이 땅속 어디에서 누군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심히 궁금하다. 그러나 이 절터에도 어김없이 박가, 이가의 분묘 2기가 모셔져 있는데, 한심하게 탑석이 묘지의 기초가 되고 있다. 신라 초기불교성지 보현, 문수 두 대성들이 기거하시던 신라불교 제십법운지의 혁목사, 반고사는 흔적도 없이 파괴시킨 후손들의 짧은 지식에 분노를 느낀다. 뿐만 아니라, 문수산 남쪽 남암산 서북쪽 자락에 있는 김신암지(金信庵址)23), 문수산 동쪽 영축산 능선에 있는 망해사지(望海寺址)24), 문수산 남쪽 남암산 동쪽에 자리한 청송사지(靑松寺址)25)에도 주인을 알 수없는 분묘가 옛 금당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니? 명당 찾아 해매는 우리내 풍속이 야속하기만 하다.
문수산 남쪽 능선으로 어께를 걸친 남암산이 있다. 그 서북쪽 능선에 신라 고찰 김신암(金信庵)이 있었다. 그 화려했을 절은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지금은 옛 절터에 성불사라는 작은 암자가 쓸쓸히 지키고 있다. 김신암지(金信庵址)에는 투박하고 삼베무늬의 신라와당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왕이 사용했다는 돌 세숫대야는 조각난 채 버려져 있다. 절터 아래 계곡에는 촛대바위, 절벽석굴과 폭포, 너럭바위,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고, 그 유명한 김신대(金信臺)도 계곡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관은 문수산 주위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구전설화》에 의하면 “자장이 부모를 잃고 처음 출가하여 촛대바위를 부모처럼 의지하며 수도한 곳이다. 그 후 자장은 당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라고 전하며,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926~947)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김신대(金信臺)에서 기도를 올려, 문수보살을 감접하려 했으나 그 뜻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제2권 제2 기이(紀異)2 김부대왕(金傅大王)조에서 “을미(乙未,935)에 신라 제56대 김부대왕(경순왕)이 신하들과 의논한 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자는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으며, 막내아들은 김신암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범공(梵空)이라 이름 하였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 등지에서 머물렀다고 전한다. 즉 가야산 성주 법수사는 경순왕의 막내아들 범공이 머문 곳이다.
《삼국유사》제2권 제2 기이(紀異),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서(望海寺)에서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874~885)때 서라벌을 비롯하여 지방에 이르기 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 초가가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 때 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세죽나루)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물가에 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껴 길을 알 수 없었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들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 용(龍)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그 곳을 개운포(開雲浦)라 했다. 동해 용은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이 처용(處龍)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 벼슬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 하다가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 놀다가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東京明期 月良(동경명기 월량)
夜入伊 遊行如可(야입이 유행여가)
入良沙 寢矣見昆(입양사 침의견곤)
脚鳥伊 四是良羅(각조이 사시량라)
二肹隱 吾下於叱古(이힐은 오하이질고)
二肹隱 誰支下焉古(이힐은 수지하언고)
本矣 吾下是 如馬於隱(본의 어하시 여마어은)
奪叱良乙 何如爲理古(탈질량을 하여위리고)
이 노래를《처용가(處龍歌)》라 하는데, 울산지역 방언으로 풀이하면 이러하다.
서벌 발기 달에(東京明期 月良)
밤들이 노닐다가(夜入伊 遊行如可)
들에사 자리보곤(入良沙 寢矣見昆)
각조리 내시에라(脚鳥伊 四是良羅)
두힐은 내하엇삐고(二肹隱 吾下於叱古)
두힐은 뉘기하언고(二肹隱 誰支下焉古)
본디 내하시 엇다마어은(本矣 吾下是 如馬於隱)
아삿삐늘 엇지하릿고(奪叱良乙 何如爲理古)
역신이 이 노래를 듣고 본래의 모양으로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끓어 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그림만 봐도 그 문안으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해서 나라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와 복(慶福)을 맞이하게 됐다. 왕은 서라벌로 돌아오자 곧 영취산 동쪽기슭에 좋은 터를 잡아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 세운 것이라는 뜻이다.”
헌강왕이 동해용왕과 처용을 만난 개운포가 지금의 ‘세죽나루’로서 앞바다에 떠 있는 듯, 신비스런 바위섬이 있다. 동해용왕과 일곱 처용형제가 춤을 추던 곳으로 이 바위섬을 처용암(處龍岩)이라 한다. 그 바닷가에는 처용을 위해 제사를 올렸던 큰 소나무가 있는 처용당(處龍堂)이 있다. 울산공업단지 조성에 의한 공해로 시달리던 노송은 죽고 처용당만 남아있다. 세죽나루 처용암 바다 건너편 이름이 처용리(處龍里)인데, 이곳은 처용형제들이 살던 마을로 전해오고 있다. 처용암과 처용리 일대를 울산시 지정기념물 50호로 지정되어 있고 세죽나루 뒷산 ‘개운포성지’도 기념물 72호로 지정하고 있다.
헌강왕의 명으로 지어진 영축산 망해사가 신라 때의 절은 없어지고 어느 신라고승의 석조부도(石造浮屠) 2기가 보물 제173호로 지정되어 동해바다 개운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문수암(文殊庵)은 신라 원성왕 때 연회국사가 도피하다가 문수대성을 감접한 문수점(지금의 통천문) 위쪽 바위위에 연회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절 서쪽 절벽바위 위에는 보현보살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 보현당(普賢堂)이 있다.
청송사지는 민가 한 복판이 되어 3층석탑이 보물382호로 지정되어 있고, 탑 옆에 조그마한 석종형 부도가 있는데 우바이(優婆夷) 백화당(百花堂) 낭옥(朗玉)이라 쓰여 있는데, 조선시대 어느 여신도의 사리부도로 보인다. 또한 청송사지 서남쪽에는 부도 3기가 있는데 대석으로 미루어 보면 4기인 듯 하나 2기는 완형그대로 있고 2기는 석재들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중 서응당(瑞應堂) 신흡대사(愼洽大師)의 부도는 기단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종형의 조선시대 대표적인 부도로 보인다.
1992년 6월 4일
松隱, 劉秀 拜上.
[주해(註)]
1) 영축산(靈鷲山).
가사굴산(Gdhrakuta)의 번역으로서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부근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이 산은 신선(靈)들이 살고, 독수리(鷲)가 많이 있기도 하고, 또는 산봉우리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취두(鷲頭), 취봉(鷲峰), 취대(鷲臺)라 부르기도 했다. 산정에 신선(靈)과 취령(鷲靈)이 많이 있다고 하여 영산(靈山) 또는 영축산(靈鷲山)이라 불렀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정상에서《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셨기 때문에 대승불교 최고의 명승지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등장하는 신라의 영취산은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는 지금의 ‘문수산(文殊山)’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축산이라 불리는 산이 몇 곳 있는데, 신라 때 영축산으로 불리던 지금의 문수산의 동쪽 제2봉우리를 영축산으로 부르고, 또 통도사 뒷산 본디 이름은 취서산(鷲棲山)을 영축산이라 부르고 있다.
2) 영산회상(靈山會上).
부처님께서 인도 영취산 산정에서《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셨기 때문에 영축산을 영산회상(靈山會上) 이라고도 한다. 영산회상은 산스크리트어 Uposada에서 온 말로서 스님들의 공양의식을 가리키는 영산재(靈山齋)라고도 한다. 영산재는 “《법화경》을 설하신 부처님과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인 영산회상의 대중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옮겨 오는 뜻” 이며, 여기 모인 모든 불ㆍ법ㆍ승 삼보(三寶)에 공양을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영산재는 부처님[佛]과 불경[法] 그리고 중생의 모임(會衆)[僧]에게 예배-찬탄-공양함으로써 망자(亡者)의 영가(靈駕)를 포함하여 모든 중생들이 진리의 바다, 자연과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하는 의식이다. 즉, 삶과 죽음을 평등하게 보고, 범인(凡人)을 성인(聖人)과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의식적 표현이며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수행도(修行道)가 영산재이다.
3) 굴불역(屈弗驛).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34 잡지(雜志) 제3 지리(地理)에서 “하곡현(河曲縣)은 파사왕(婆裟王)때 굴아화촌(屈阿火村)을 취하여 현(縣)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때 아곡(阿曲)으로 개명하여 지금은(三國史記 執筆時) 울주(蔚州)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곡(阿曲)의 ‘곡(曲)’자를 ‘서(西)’자로 쓰여 지기도 했고, 또한 ‘구불(求佛)’ ‘굴불(屈弗)’이라고도 했음” 이라는 주해(註解)가 있다. 당시에 쓴《영축사기(靈鷲寺記)》에도 “굴정역 동지야(屈井驛 桐旨野)에서 눌지왕(訥祗王)때 왕의 동생 미해왕자(美海王子)를 박제상(朴(金)堤上)에 의해 일본에서 탈출시켜 동해 해안에 도착했을 때 백관들에게 명하여 굴헐역(屈歇驛)에서 맞이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울산시 무거동에는 굴화(屈火) 지명이 남아있고, 울산의 옛 지명으로 굴아화촌(屈阿火村), 하곡현(河曲縣), 아곡(阿曲), 굴불(屈弗), 굴정(屈井), 굴헐역(屈歇驛)으로 불려 진 듯하다.
4)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 충열왕(忠烈王) 때 일연(一然;성은 金씨) 스님이 청도 운문사(雲門寺)와 군위 인각사(麟角寺)에서 찬술한 책이다. 같은 시대에 지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는 대조적인 책으로서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이 있어 귀중한 책이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 가자조선,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야, 고구려, 신라, 백제의 기록도 수록되어 있어 매우 귀중한 역사책이고,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해 많은 신화(神話)와 설화(說話), 향가(鄕歌)가 실려 있어 문학사(文學史)에도 귀중한 보고이며, 불교에 대한 풍부한 자료와 민속(民俗), 일화(逸話) 등의 민간신앙사상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이 책의 간행 년대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고려 충열왕 8년 전후(서기1281~1283)로 보고 있으며, 고판본(古版本)으로는 조선 중종(中宗) 정덕본(正德本)과 그 이전에 만든 듯한 판각(板刻)의 영본(零本)이 있고, 신간본(新刊本)으로는 조선사학회본, 개명구확부본, 동경대학본 등이 있다.
5) 염촉(厭髑) 이차돈(異次頓).
성은 박(朴)씨고 이름은 염촉(厭髑)이라 하나 아버지 이름은 모르고 할아버지는 아진(阿珍)벼슬의 종(宗)이란 이름을 가진 분으로 습보 갈문왕(習寶 葛文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서 기록하기를, 염촉이 22세로 사인(舍人)벼슬에 있을 때, 당시 대신들이 불교반포를 강하게 반대함으로 법흥왕이 속으로 심하게 고민하는 것을 알아차린 염촉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왕에게 나아가, “소신이 죽음으로서 대교가 행하여져 불일(佛日)이 중천에 오르고 성주(聖主;法興大王)께서 편안하신다면 바랄 것이 없습니다.” 순교를 원했다. 왕이 말하기를, “본시 도(道)를 일으키려 함은 만물을 살리기 위함인데 무죄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라고 했으나, 이차돈(異次頓)이 “만일 도가 행할 수 만 있다면 신(臣)은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뜻이 굳었다. 왕이 이에 많은 신하(群臣)들을 불러 도(道;佛敎)에 대하여 물으니 모두 다 가로되, “보건데 중 들은 머리를 깍고 이상한 옷을 입고 언론이 기괴하고 거짓스러워 보통의 도(佛敎)가 아니오니 그대로 둔다면 후회가 클 것이오니 신(臣)들은 중죄를 당할지라도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차돈만은 홀로 “지금 여러 신하(群臣)들의 말이 옳지 못합니다. 비상한 사람이 있는 후에 비상한 일이 있는 법입니다. 불교는 그 뜻이 깊고 크니 불가불 믿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버릴 수 없지만, 너 혼자 만 뜻이 다르니 너의 말대로 할 수 없다. 형리에게 목을 배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법흥대왕이 형장을 벌여놓고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경들이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지체시키지 않았느냐?” 이에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황망스럽게 맹세하고 손가락으로 아무에게나 가르키니 왕은 사인(舍人) 염촉(厭髑)을 불러 꾸짖어 베어 죽이라고 명령하니 옥사가 목을 베자 흰 젓이 한길이나 솟아올랐고, 갑자기 사방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왕은 놀라고 슬퍼하여 눈물이 용포를 적시니 재상들은 근심하여 진땀이 조관(朝冠)에 까지 흘렀다. 이 때 감천(甘泉)이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튀어나고 나무가 부러져 원숭이들이 때지어 울었다. 그의 머리는 금강산(慶州北山) 마루에 날아가 떨어져 금강산(金剛山) 서쪽 고개에 장사 지냈다. 국인(國人)들도 슬퍼하며 좋은 곳을 택하여 자추사(刺楸寺;지금의 栢栗寺)를 짖고, 그 후에 무덤을 고쳐 비(碑)를 세우고 그를 추모하는 모임도 만들어 졌다. 그는 이후 아도(我道)와 법흥(法興)과 더불어 신라불교 삼성(三聖)으로 받들어 칭송되었다.
6) 낭지사(朗智師).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23대 법흥왕 14년 서기 527년에 영축산(靈鷲山)에 와서 처음으로 도량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30대 문무대왕 때 기이한 스님(異僧)으로 알려져 있다.《추동기(錐洞記)》를 쓴 지통(智通)이 낭지사의 문하가 되었고, 원효(元曉)가 반고사(磻高寺;지금 寺址만 있음)에 기거할 때 그를 우러러《초장관문(初章觀文)》과《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어 바치었다 하니 당대의 대성(大聖)인 듯하다.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오대산)에 가서 강설을 듣고 잠깐 동안 영축산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가 영축사(靈鷲寺;지금 寺址만 있음) 가섭불(伽葉佛) 고암대(古巖臺)에서《법화경(法華經)》을 강하며 거처할 때, 중국 청량산 주승(主僧)에게 바친 혁목(赫木;석류나무로 추정)을 보고 그가 신라국의 성자(聖者)임이 알려져 신라 사람들은 그가 거처하는 절을 혁목사(赫木寺)라고 불렀다 한다. 그 후 원성왕(서기 784~798)때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영취사 용장전에 기거하며 낭지사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유통케 했다하나 지금은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7)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 인종(仁宗;서기1122~1185)때 왕명을 받고 김부식(金富軾;서기1075 ~1151)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사(史)적 내용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삼국의 정치적 변천을 한족(漢族) 관점(觀占)에서 전한시대(前漢時代)의 사마천(司馬遷;기원전145~86)의《사기(史記)》그대로 지(志), 전(傳)을 기전체(紀傳體)로 본떠서 찬술한 사대사상(事大思想)적인 내용의 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통합 50권으로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되어 있다.
첫 간행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태조 3년에 개간하였고, 중종 7년에 개간하여 목판본과 활자본이 수차례 간행되었다. 판본은 고려본, 조선본, 최근본으로 나눈다. 또한 김부식의《삼국사기》이전에《삼국사(三國史)》가 있었다는 기록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문집에 있다. 또한 김부식 사망 후 17년에 태어난 이규보(李奎報)의《동명왕편(東明王篇)》에도《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김부식의《삼국사기》이전에 벌써《삼국사》,《구삼국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8) 지통대사(智通大師).
신라 제30대 문무대왕(文武大王;서기660~680) 때의 스님. 이량공(伊亮公)의 종으로 있다가 7세 때 출가하여 영축산 낭지사의 제자가 되는 과정이《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출생지는 현제의 울주군 청량면 율리 지통골(智通谷)로 추정된다. 지통골에서 영축마을로 이어지는 마을 입구에는 지금도 수려한 당산나무(洞木)가 있다. 이 나무가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보현수(普賢樹)로서 지통소년이 출가하자마자 보현보살(普賢大聖)을 만나 정계(正戒)를 받고 도(道)가 통했다는 그 나무로 추정된다. 지통은 그 뒤 의상대사(義湘大師) 문하에서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의상이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 동안 3천 도중에게《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할 때 중요한 것을 모아《추동기(錐洞記)》2권을 지어 세상에 유통하게 하였으며 의상문화 10대 대덕(大德)으로 신라불교에 크게 이바지 했다.
9) 제십법운지(第十法雲地).
제십법운지보살(第十法雲地菩薩)이라고 하여,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 52위중에서 제41위부터 제52위까지 해당하는 제10위를 수행하는 십지(十地)가 바로 법운지(法雲地)이다. 영축산은 보살이 수행하는 십지가 됨으로 법운지라고 했다. 수혹(修惑)을 끊고 끝없는 공덕을 구비하고서 사람에 대하여 이익이 되는 일을 행하여 대자운(大慈雲)이 되는 지위(地位)란 뜻이다. 십법운지보살은 바로 법운지의 계위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이 계위에 있는 보살은 색계(色界)의 정상에 있는 천신(天神)인 마해수라천왕(摩醢首羅天王)이 되어 불법을 수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제십법운지는 인도의 영취산과 함께 신라의 영축산(지금의 문수산)도 이에 속한다고《삼국유사》에는 기록하고 있으며 제십법운지인 영축산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보현당과 문수암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10) 변재천녀(辯才天女).
영가(詠歌)와 음악을 맡은 여신(女神)으로서 무애(无涯)의 변재술(辯才術)을 가지고 있어 막힘이 없는 말 재주로 불법을 유포하여 수명증익(壽命增益), 원적퇴산(怨敵退散), 재보만족(財寶滿足)의 이익을 준다는 여신이다. 이 신모(神母)가 영축산(지금의 문수산)의 산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지통 소년이 출가할 때 신성한 까마귀로 변한 변재천녀의 도움으로 낭지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으며, 그 뒤 신라 원성왕 때 연희국사가 왕의 부름을 피하기 위해 도피 하려다가 이 신모를 만나서 뉘우쳤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부터 영축산 주봉이 문수산으로 산 이름이 바뀌게 된 듯하다. 지금도 문수산(영축산)에는 변제천녀가 산의 신모로 살고 있으며,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기거하고 있는 영험한 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11) 보현보살(普賢菩薩).
신라의 영축산(지금의 문수산)에는 지금까지 보현당(普賢堂)이 있다.
보현연명보살(普賢延命菩薩), 혹은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 하여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지고 계신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짝이 되어 석가여래의 오른쪽 협사(右脇士)이다. 보현보살은 석가여래의 보처로서 여러 부처님의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고, 언제나 중생제도 일을 도우시는데 그 형상은 흰 코끼리를 탄 모양, 연화대에 앉은 모양을 보이고 있다. 그는 온갖《보현삼매(普賢三昧)》를 주(註)하여 부처님을 도우신다. 보현삼매는 보현보살을 본존으로 하고 제벌실상(除伐實狀)의 이치에 관하여 죄상을 참회(慙悔)하는 삼매, 이 삼매를 이루면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보현보살이 발원한 10종의 큰 소원,《보현십원(普賢十願)》은 고려 광종(949~969)때 균여(均如)가 향가(鄕歌)로 만들어《고려향가(高麗鄕歌)》의 대료로 전하고 있다.
1, 예경제불가 - 여러 부처님께 예경(禮敬).
2, 칭찬여래가 - 석가여래를 칭찬(稱讚).
3, 광수공양가 - 공양을 널리 닦음.
4, 참제업장가 - 업장을 참회懺悔).
5, 수희공덕가 - 공덕을 수희(隨喜).
6, 청전법륜가 - 법륜 굴리기를 청함.
7, 청불주세가 - 부처님이 항상 세상에 머물기를 청함.
8, 상수불학가 -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울 것.
9, 항순중생가 - 항상 중생들은 순수하게 될 것.
10, 보개회향가 - 모두 다 회향 할 것 등 이다.
12) 문수보살(文殊菩薩).
신라의 영축산(지금의 문수산)에는 지금까지 문수암(文殊庵)이 있다.
대승(大乘)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산스크리트어의 Manjusri에서 유래되었으며 문수사리(文殊師利), 만수시리(滿殊尸利), 만수실리(曼殊室利)등으로 음역된다. 문수와 만수는 ‘묘(妙)’, 사리, 실리는 ‘두(頭)·덕(德), 길상(吉祥)’ 등의 뜻이므로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말이 된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보현보살(普賢菩薩)과 더불어 삼존불(三尊佛)의 일원이 되어 있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 뛰어들어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활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즉, 이 보살은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하여 일시적 권현(權現)으로서 보살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석가가 열반한 후 인도에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하였다고 하며, 항상 반야 지혜의 권화(權化)처럼 표현되어 왔다.《반야경(般若經)》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져 있다. 때에 따라서는 경권(經卷)을 손에 쥔 모습으로 조각되고 묘사되는 일이 많았다. 전설에 의하면, 이 보살은 중국의 산시성(山西省) 오대산(五臺山)에서 1만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하는데, 신라 때 자장이 이 보살에게 불사리, 불가사, 불경을 받아 황룡사탑, 통도사계단, 태화사탑에 봉안하고, 그 후 신라불교 제십법운지 울산 청량면 율리 영취산(지금의 문수산)에 살고 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원성왕 때 연회국사가 ‘문수점’에서 문수보살을 감접했고, 경순왕이 ‘김신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했다고 하는데, 그 후 부터 영축산으로 불리던 최고봉이 문수봉으로 불리어져, 지금의 문수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 듯하다.
13) 자장율사(慈藏律師).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831~646)때의 진골(眞骨)출신의 고승으로서 본명은 선종랑 김선종(金善宗)이었다. 선덕여왕이 그를 불러 대신으로 삼겠다고 했으나 왕명을 따르지 않고 “차라리 하루를 살더라도 계율(戒)를 지키겠다.”고 하며 불도에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당나라 청량산(淸凉山;五臺山)에서 문수보살 진신을 보고 감응을 받아 불사리, 불가사, 불경 400여 상자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선덕여왕12년(643년)에 신라불교의 대국통이 되어 교단을 정비하고 기풍을 쇄신하며 기강을 확립하여 경전과 계법을 넓이 펼쳐 많은 대중들이 불교를 신봉하게 했다. 불사리는 3등분하여 황룡사탑, 통도사계단, 태화사탑을 창건 봉안 하고, 그 뒤 강원도 오대산 수다사(지금의 월정사), 태백산 석남사(지금의 정암사) 등 수많은 사찰도 건립했다. 자장은 신라의 의관, 문물을 당과 같이 계량했으며 호국불교를 열었다.
14) 의상대사(義湘大師).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647~653) 때의 스님으로써 속성은 김(金)씨다. 서기 625년 진평왕 때 출생하여 서기702년 성덕왕때 입적했다. 의상은 29세 때 황복사에서 스님이 되고, 당나라에 불교가 성함을 듣고 서기 650년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으로 가서 배우고 돌아온 후, 서기 661년 다시 당으로 들어가 지엄선사에게서 배우고 화엄경을 연구했다. 그 때 당에서는 사신으로 간 김흠순(金欽純)을 가두고 신라를 치려함으로 서기671년 문무왕10년 본국으로 돌아와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문무왕이 신인종(神印宗)의 명랑법사(明朗法師)를 청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문두루비밀지법(文豆婁泌密之法;불상, 보살상, 신장들을 줄지어 모신 것)으로 당나라 군사를 풍랑으로 수장시키고, 태백산 부석사(浮石寺;지금의 영주 부석사) 및 화엄종의 10사찰 및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문하에 유명 10대덕을 길렀다. 10대덕은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이다. 의상의 대표적 저술에는《화엄일성법계도》, 《백화도장발원문》이 있다.
10대덕 중 오진(悟眞)은 당에서 대성했으나 서축(인도)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의적(義寂)은 27부 86권의 저술을 남겼고, 표훈(表訓)은 김대성(金大聖)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기공하고 청하여 이곳에 있었다. 진정(眞定)은 지리산 동쪽 단속사에 효성에 대한 비가 있다.
15) 원효대사(元曉大師).
원효는 장산군(章山郡;지금의 慶山郡) 남부 불지촌 북쪽 밤골(栗谷)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태어났다고 한다. 속성은 설(薛)씨요 이름은 서당(誓幢)인데.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고 담날내말(談捺乃末)의 아들이다. 29세에 출가하여 황룡사에서 중이 되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교교리를 연구하여 많은 책을 남겼고 변론 또한 좋았다. 하루는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을 떠받일 기둥을 찍으련다.” 고 외치니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654~661)이 듣고 원효를 맞아 과부공주가 살고 있는 요석궁(瑤石宮)에 들게 하려고, 왕의 사신이 스님을 문천(蚊川)의 다리 밑에서 물에 밀어 옷을 젖게 하여 궁으로 모셔 옷을 말리게 하고 유숙시켜다. 그 후 공주는 설총(薛聰)을 낳았는데, 설총은《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쓴 혜초(慧超)로 알려져 있다. 이 후 원효는 속인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많은 책을 저술했다.
원효가 영축산(지금의 문수산) 서쪽 골짝 반고사(磻高寺)에 기거할 때《초장관문》과《안신사심론》을 집필하여 낭지사에게 바쳤다고 삼국유사에서 기록되어 있다. 원효는 신문왕 6년 서기686년 3월 30일 70세의 나이로 굴사(窟寺, 지금의 石窟庵)에서 입적하셨다. 그는 불교 및 신라의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초인적인 저술가였다. 그 유명한《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境論)》이 있다.
16) 연회국사(緣會國師).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784~798) 때의 승려이다. 헌안왕(憲安王; 856 ~860)과 경문왕(景文王;860~874) 2조에 걸쳐 왕사(王師)로 봉해 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경문왕 3년 서기 863년에 입적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곡현(阿曲縣) 영축사에 있으면서《낭지사전기(朗智師傳記)》를 지어 세상에 통행케 하였고, 낭지사는 원효와 지통의 스승으로써 항상《법화경》을 외우며 보현관행(普賢觀行)을 닦았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피은> 제8의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조에 나오는 인물이다. 연회는 영축산에 은거하여《법화경》을 읽고 불법을 닦았다. 연회가 기거하는 영축사 용장전 뜰 가운데 연못에 있는 연꽃이 사철 시들지 않아서 기이하게 생각한 원성왕이 스님을 불러 국사로 삼으려고 했으나 스님이 미리알고 도피하다 문수대성을 만난 곳을 문수점(文殊岾;지금의 통천문)이라 했고, 변재천녀(辯才天女)를 만나 돌아온 곳을 아니점(阿尼岾;지금의 배이내)이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연회가 문수점이라 지명을 붙인 이후부터 영축산 봉우리를 문수산 봉우리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연회는 원성왕10년 서기794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 수도산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했다. 봉은사는 조선 명종6년 서기1551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부름을 받은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스님에 의해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 되고 승려과거(僧科)를 실시한 사찰로서 조선조 당시 불교중흥의 본산이었다.
17) 만분지계(滿分之戒).
지통이 7살에 출가하여 영축산 낭지사를 찾아가는 길에 마을 당산나무(보현수) 아래 쉬고 있는데, 보현보살이 나타나 지통소년에게 베푼 계(戒)라고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신사(信士)와 신녀(信女)가 삼귀계(三歸戒)를 받은 뒤에 1계(一戒)를 더 받는 것을 일분계(一分戒), 2계(二戒)를 더 받는 것을 소분계(小分戒), 3계, 4계를 더 받는 것을 다분계(多分戒)라 하고, 5계 모두를 받는 것을 만분계(滿分戒)라 한다. 5계(滿分之戒)는 신자(信者) 모두가 지켜야 하는 계율(戒律)로서 불자입문오계(佛者入門五戒) 이다.
1, 살생하지 말라.
2, 음행하지 말라.
3, 거짓말하지 말라.
4, 술 마시지 말라.
5, 도적질하지 말라.
18) 지통골(智通谷)과 보현수(普賢樹).
《삼국유사》권15 제8 피은(避隱),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에서, 이량공(伊亮公) 종 지통(智通)이 7세 때, 출가하기 전(前) 살던 마을을 지통골(智通谷)이라 했고, 신령한 까마귀의 계시대로 영축산 낭지사를 찾아가다 큰 당산나무 밑에서 잠시 쉬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 정계(正戒)를 받은 나무가 보현수(普賢樹)라고 했다. 지금도 울산시 청량면 율리에는 ‘지통골’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영축산 쪽으로 더 올라가면 영축마을이 나온다. 영축마을 앞 당산나무(洞木)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전한다.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口傳)에 의하면 “신라 때 고승인 지통대사가 ‘지통골’에서 하룻밤 묶고 영축산으로 올라가다가 마을 당목(堂木) 아래서 쉬면서 지금의 문수암 터를 가리키며 저곳에 절을 지으면 길(吉)하겠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 구전(口傳)은《삼국유사》의 지통소년 출가과정과 너무나 흡사하다. 주위 지형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지통골(智通谷)’은 지통대사의 생가마을로 보이고, 영축마을 당목이 ‘보현수(普賢樹)’로 추정된다.
19) 달제가(怛提伽;赫木).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기한 나무이름으로써, 이 나무의 인도어로 달제가(怛提伽)이고 중국어로 혁(赫)이라고 하여 혁목(赫木)이라 한다. 신라 영축산에 기거하던 낭지사가 중국청량산(中國五臺山)에서 설법을 듣고 잠깐 사이에 구름을 타고 신라영축산(新羅靈鷲山)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루는 청량산 주승(主僧)의 명에 따라 낭지사(朗智師)가 바친 진기한 나무 달제가(怛提伽)는 인도(西竺)와 신라(新羅)의 두 영취산에 만 있는 나무로서 이 두 산은 보살이 살고 있는 제십법운지(第十法雲地)라는 것을 알게 된 그 곳 스님들은 낭지를 성자대접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혁목(달제가)라는 진기한(珍奇)나무가 지금의 이름이 과연 무엇일까?
조선 세종 때《용비어천가》를 주석하고《동국정운(東國正韻)》편찬에 참여한 명신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쓴 《양화소록(養花小錄)》이나 중국의《격물총화(格物叢話)》를 미루어 추정해 본 결과 혁목(달제가)은 석류화(石榴나무)로 보인다. 석류화는 꽃, 열매, 나무속질도 모두 붉으니 붉은나무 혁목(赫木)이라 할만도 하다. 예부터 울산지방에 고목 석류나무가 많이 있었던 것도 이곳이 신라석류 해류(海榴)의 산지였음을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20) 반고사(磻高寺).
《삼국유사》에 신라 때 영축산 서쪽계곡에 있었던 절로 기록되고 있지만 지금은 그 절터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 절은 낭지사(朗智師)의 명에 따라 원효가 은거하며《초장관문(初章觀文)》과《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어 바친 곳이었고, 또한 알천공(閼川公)이 은거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알천공은 신라 진덕여왕(647~653) 때 상대등에 올랐고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서기654년 화백회의에서 섭정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김춘추(태종무열왕)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고 전한다. 이 절터를 찾기 위해《삼국유사》기록에 따라 필자가 여러 차례 답사한 결과, 지금의 문수산 서남쪽 계곡 ‘배이내’로 불리고 있는, 연회가 영축사(혁목사) 용장전에 은거하다가 도피 중에 변재천여를 만나 다시 돌아온 ‘아니점(阿尼岾)’으로 추정되는 곳에, 신라 때 기와 쪽이 무더기로 출토된, 약간 넓은 전답지로 변한 절터가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반고사지(磻高寺址)로 추정된다.
21) 상덕고암전(上德高巖前).
《삼국유사》에 원효가 영축산 반고사에 기거할 때, 낭지사에게 지어 바친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의 책 말미에 쓴 계송(戒頌)에 나오는 ‘상덕고암(上德高巖)’ 이란 호칭은 낭지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낭지사는 혁목사(영축사)의 가섭불(伽葉佛) 절터에 있는 높은 바위대(高巖臺) 면좌석 위에서 참선을 하며 항상《법화경(法華經)》을 강론했다고 하는데, 이 바위위에 앉아있는 낭지사를 일컬어 상덕고암전(上德高巖前)이라 한 것이다. 지금도 낭지의 면좌석이 영취마을 민가 속에 그 수려하고 신령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22) 문수점(文殊岾)과 아니점(阿尼岾).
고승 연회는 일찍이 영축산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연경(蓮經)을 읽어 보현보살의 관행법을 닦았다. 신라국왕이 그를 국사(國師)로 삼으려 하자 미리 알고 피하려 서쪽고개 바위사이를 넘다가 만난 한 늙은이가 왕명을 받을 것을 일러 주었으나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가다가 냇가에서 변재천녀(辯才天女)를 만나 앞의 늙은이가 문수대성(文殊大聖)임을 알고 뉘우쳐 돌아왔는데, 문수보살을 만난 서쪽고개 바위사이를 문수점(文殊岾)이라 불렀고, 변재천년를 만나 돌아온 냇가를 아니점(阿尼岾)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 지명들이 지금은 남아있지를 않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내용대로 현장답사를 해본 결과 ‘문수점’은 지금 ‘통천문(通天門)’으로 불리는 바위사이로 보이고, ‘아니점’은 통천문에서 좀더 가면 ‘배이내’로 불리는 곳으로 보인다. 통천문은 지금의 문수암(文殊庵)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서 경관이 좋기로 이름난 곳으로 수십 돌계단이 큰 바위 절벽사이로 뚫려 있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착각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아니점’은 냇가였음으로 ‘아니천(阿尼川)’으로 불리다가 ‘아니내’로, 다시 ‘배이내’로 불리어 진듯하다. ‘통천문(문수점)’과 ‘배이내(아니점)’ 두 곳은 문수산에서 중요한 지명이 되고 있다. 특히 배이내(아니점)에는 그 유명한 반고사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23) 김신암지(金信庵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절로서, 문수산 남쪽능선을 이루다 솟아오른 남암산(南巖山)에는 신라 때 김신암(金信庵)이란 절이 있었다. 조선 정조10년 서기1786년 울산읍지(蔚山邑誌)에서 “문수암 남쪽 3리에 김신암(金信庵)이 있다. 이 산을 김신기산(金信基山)이라한다.” 라는 기록도 있다. 김신암이 있는 계곡에는 수려한 폭포와 용바위와 김신대(金信臺)가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나라가 쇠약해짐을 막기 위해 이곳 넓은 바위대에서 기도를 올려 문수보살을 친견했으나 나라를 바로 잡지는 못했다고 한다. 경순왕이 하늘에 재사를 올린 바위대를 ‘김신대(金信臺)’로 불리게 되었고, 이곳 절 이름역시 김신암(金信庵)이라 불리게 되었다한다. 이에 앞서 부모를 잃고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자장이 은거하며 수도한 곳 또한 이곳 김신암이라고 하며,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왕자님이 이곳에 와서 은거 수도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법명은 범공(梵空)이라 하였다. 김신암 옛 절터에 지금 조계종 성불암이 자리하고 있디.
24) 망해사지(望海寺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절로서, 통일신라시대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지금의 세죽나루)에 갔다가 동해용을 위해 지은 절로서 문수산(영축산) 동쪽 봉우리, 지금의 영축산이라 호칭하는 산록에 동해(세죽나루)를 바라보고 위치해 있었다. 옛날에는 신방사(新房寺)라고 이름 했다고 하나, 그 절은 없어지고 승탑2기가 보물 제173호롤 지정 관리되고 있다. 동승탑의 높이는 3.4m이고 서승탑의 높이는 3.3m이다. 원래 동서에 같은 형식으로 건립된 2기의 승탑 이였으나, 동쪽 승탑은 일찍이 무너졌던 것을 1960년에 복구하여 현재 쌍기(雙基)를 이룬다. 모양은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기본양식을 따라, 지대석(地臺石)은 정4각형으로 마련하고 기단(基壇)을 구성했다. 8각상대(八角上臺)의 각 면 상부에는 얕은 턱을 두고, 그 밑의 각 면에 안상(眼象)을 1좌씩 얕게 조각했다. 이 지대석 위에 복련석(覆蓮石)을 놓았으며, 복판(複瓣) 8엽(八葉)의 연꽃을 둘렀고, 그 꽃잎 끝에는 귀꽃을 새겼으나 평면적이다. 중앙에 팔각형의 높직한 4단의 굄이 얕은 중대석(中臺石)을 받치고 있고, 중대석에는 각 우각(隅角)에 기둥모양이 모각(模刻)되어 있을 뿐 다른 조식(彫飾)은 없고, 그 위에 앙련석(仰蓮石)이 놓여 있다. 앙련석은 밑에 3단의 각형(角形) 받침이 있는 위에 단판(單瓣) 연꽃이 상하 6잎씩 2중으로 조각되었다. 탑신도 역시 8각으로 각 우각에 기둥모양을 모각했고, 각 면에는 위에 영창의 형태를 나타냈으며, 밑에는 전후좌우 4면에만 호형(弧形)을 새겼다. 옥개석도 8각으로 각 부재(部材) 중에서 가장 많은 손상을 입었다. 옥리(屋裏)는 반원을 그리며 연목(椽木)을 번안(飜案)하였고, 추녀는 수평으로 넓은 편이다. 옥상에는 높직한 우동(隅棟) 8가닥이 흘렀고 곡선은 매우 완만하다. 상륜(相輪)은 양 승탑이 모두 상실하고 있으나 그 일부가 따로 보관되어 있다. 이 승탑은 각 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다소 섬약(纖弱)한 편이다. 특히 얕게 새겨진 안상이나 복련석 귀꽃은 입체감을 잃었다. 그러나 8각원당의 기본형을 계승했고, 석재의 결구(結構)에서 짜임새 있는 비율을 잃지 않아 통일신라 후기의 가작으로 꼽힌다.
25) 청송사지(靑松寺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文殊山)에 있는 절터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추정되나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터에는 청송마을 민가가 자리 잡고 있다. 폐사된 시기는 조선 성종12년(1481년)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또는 후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절터는 청송마을 전체가 청송사 경내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로 청송사지삼층석탑과 부도 3기가 전해진다.
청송사지삼층석탑은 보물 제382호로 지정된 것으로,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보수할 때 상층 기단에서 청동제사리함과 청동여래입상, 유리구슬 16점, 수정곡옥(水晶曲玉), 관옥(管玉) 등 3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부도 3기 중 조선시대 부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서응당신흡대사(瑞應堂愼洽大師)의 부도와 1982년 복원한 부도 등이 남아 있다.